플랜맨, 근대성에 대한 성찰

 

정원사의 삶, 정재영

 

정재영은 플랜맨이다. 시계와 알람이 없으면 불안 증세가 찾아오고, 조금이라도 삐뚤어진 것을 참지 못하고, 1급 결벽증으로 더러운 것이라면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으며, 모든 일은 규칙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일어나서 잠에 들기까지 모든 일이 계획에 의해 돌아간다. 6시에 일어나 6 5분에 이불을 개고 6 10분에 씻고 항상 똑같은 시간에 정확히 출근을 한다.

 그에게 계획적으로 된다는 것은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는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모든 것은 계획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이성에 대한 믿음의 반영이다. 이성과 자유의지를 갖고 철저한 계획대로 행동한다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 여기에 비합리적인 세계에 이성과 합리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이 더해져 믿음은 더욱 공고해진다.

 발전을 통해서 인간은 시계로 매사를 정확한 시간에 통제할 수 있고 위생용품의 발달로 더러운 것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발전과 진보와 궤를 함께하는 책을 다루는 도서관 사서는 그의 성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직업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에 따르자면 이는 그가 근대인에 빗대어 표현한 정원사의 생활방식에 정확히 부합한다.

 

근대 이전에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사냥터지기의 자세와 비슷했다면, 근대의 세계관과 관행을 나타내는 비유로는 정원사의 마음가짐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

 정원사는 자기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또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자지가 관리하도록 되어 있는 작은 부분에는) 질서가 없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에 어떤 종류의 식물이 자라야 하고 어떤 식물이 자라면 안 되는지 더 잘 안다. 그는 우선 머리에 바람직한 배치도를 마련한 다음에 정원을 그 이미지에 맞춘다. 그는 적합한 종류의 식물들(대체로 그가 씨를 뿌리거나 심은 식물들)은 성장하도록 하고, 그 외의 식물들, 즉 이제는 잡초라 개명된 것들을 뿌리를 뽑아 버림으로써 대지에 자신이 미리 생각해 놓은 디자인을 강요한다. 달갑지 않은 불청객인 잡초는, 그가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갑지 않은 존재로서 그의 디자인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가장 명민하고 전문적인(아마도 누군가는 직업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유토피아 창조자(utopia-makers)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원사다. 정원은 언제나 정원사가 머릿속에서 그려낸 청사진 속의 이상적으로 조화로운 이미지에서 그 원형을 드러낸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다시 빌리면, 인류가 유토피아라는 국가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160

 

 정원에 원하는 식물을 정해둔 위치에 심듯이 항상 계획과 계산에 의해 움직이고, 정원에 불청객인 잡초를 걸러내듯이 더럽고 잘 모르는 것은 만지지 않는다. 정재영은 가장 완벽한 정원사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  

 

정반대의 여자, 한지민

 

 한지민은 정재영과 정반대의 사람이다. 둘의 차이는 화성과 금성 사이의 거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녀에게 계획은 없다. 무계획이 곧 계획이다. 늦잠을 자고 싶으면 늘어지게 자고 잠이 안 오면 밤을 새면 그만이다. 그녀의 직업(?)은 가끔 부모님이 운영하는 편의점을 돕고 홍대에서 음악 공연을 하는 일이다. 사서와 대척점에 있는 직업이다.

 여기서 한지민과 정재영의 직업은 그냥 지나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정재영이 어떻게 그러한 성격의 사람이 되었는지 다소 뜬금없는 이유가 등장하지만 일단 사서와 록(Rock)을 하는 음악가의 차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둘은 정확한 이항대립이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은 야만과 싸워 이룬 문명의 기념비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책은 인류의 진보를 상징한다. 항상 계획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그의 성격과 사서라는 직업의 일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한지민은 음악가다. 게다가 기성 음악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는 록음악을 한다. 책과 사서가 이성의 영역에 가깝다면 음악과 음악가는 감성의 영역에 가깝다. 그녀는 규칙보다는 파격을, 계획보다는 무계획을, 음악과 일상생활 모두에서 추구한다.

 

무엇을 위한 시간관리와 계획일까

 

 정재영의 모습은 마치 기계와 같다. 코드를 꽂는 순간 작동되고 뽑기와 동시에 동작이 멈추는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시간에 밥을 먹고 잠에 든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는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해진 시간에 학교와 회사를 가고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점심을 먹으며 다음날을 위해 비슷한 시간에 잠을 청한다. 계획에 없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다음부터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원칙에 입각한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일 목적으로 고안된 테일러리즘은과 포디즘은 이제 산업현장과 사무실은 물론 가정을 포함한 일상생활 영역으로까지 외연을 넓히고 있다. 일종의 생존전략으로서의 시간관리는 노동세계의 가치, 즉 생산성과 효용성을 높이고 낭비하는 시간은 줄인다는 원칙에 기초한다.

조주은, 『기획된 가족』, 196

 

 시간관리가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노동의 가치를 높이고 쓸모없는 시간을 줄인다는 목적이 있다면, 과연 정재영에게 있어 시간관리는 어떤 의미와 목적을 띠고 있을까. 그가 철저한 시간관리를 통해 특별히 효용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시간관리를 위한 시간관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분업은 많은 장점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노동 소외와 인간 소외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에서 나사못을 조이는 일을 하는 찰리는 이후 보이는 모든 것을 조이려고 하는 병에 빠진다. 즉 나사를 조이는 이유와 목적이 사라진 채 일에만 강박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정재영도 다르지 않다. 조금 특이한 성격이라는 말로 가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맹목적인 강박관념이 숨어있다.

 

비정상인이라는 시선

 영화에는 정재영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상인이 등장한다. 정재영은 자신의 강박증을 고치기 위해 병원을 찾는데 그곳을 찾은 다른 사람과 강당에 모여 집단 치료를 받는다. 치료는 당사자가 자신의 비정상적인 습관과 성격을 고백하고 의사와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조언과 용기를 주는 식이다.

 문제는 이들이 꼭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인가라는 점이다. 치료라는 말을 썼지만 대신에 개화, 교화, 계몽 등 어떠한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 그들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 아닌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다뤄진다. 이러한 생각은 병원에 걸린 그림을 통해 드러난다. 그 사진은 영장류에서 시작돼 지금의 인간까지의 진화 과정을 표현한 그림이다. , 인간은 진화하는 동물이며 이성을 통해 끝없는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 무한히 뻗어나갈 발전의 앞 길을 막는 존재는 계몽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만 한다.

 

 미셸 푸코는 이성적인 것, 정상인 것과 다른 것으로 치부되고 억압되어 온 미쳤다는 것이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담론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광기는 이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서 배제되어야 할 속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광기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인 것이 되어 간다. 이성과 합리성을 인간 정신의 근본으로 삼고자 했던 근대 철학은 광기를 이성의 타자로 배제시키고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 속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언어는 이성의 언어에서 제외되고 금지된다. 광기의 언어에 침묵이 강요됨에 따라 광기에 대한 담론은 풍성해진다. 미친 사람의 말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무시되지만 미친 사람에 대한 연구와 담론은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증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성과 비이성을 구분하고 광기를 배제하는 담론은 17세기에 감금이란 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실천된다. 감금을 통해 미친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감금된 것은 미친 사람뿐만 아니다. 걸인, 노숙자, 자살 시도자, 음탕한 자, 신성모독자 등 사회적 규범과 동떨어진 것,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된 것은 모두 감금의 대상이 됐다. (…)

18세기 후반이 되면 광기는 의학적 담론이 다뤄야 하는 대상이 된다. 미친 사람은 이제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 수용소에서 관찰되고 치료받아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광기에 대한 의학적 접근은 인간적이고 과학적인 치료행위가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배제시키는 근대적 담론의 수정판일 뿐이기 때문에 미친 사람은 더욱더 정상인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다. 미친 사람의 말은 정신의학이 다뤄야 할 대상일 뿐 그 자체로는 완전한 침묵을 강요받는다.

주형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86

 

 푸코는 이성과 광기의 대립을 통해 광기와 비정상이 사회적으로 이뤄진 것이며 이성과 정상 역시 사회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성의 기능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의 구현을 통한 인간의 해방과 진보를 주장하는 계몽적 이성은 사실 타자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권력의 장치인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비정상적인 습관과 성격을 고쳐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눈물 겹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한 곳에 모여 끝내 비정상을 극복한 서로를 축하해준다. 모두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치료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 마음껏 비를 맞자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정재영과 한지민, 영화의 마지막에 같이 비를 맞으며 뛰어간다. 아직 비를 맞는 것이 어색한 정재영이지만 한지민의 손에 이끌려 함께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비는 언제부터 피해야 하는 것이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비를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에 젖은 몸이 일상에 귀찮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습기와 축축함 자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젖은 이후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축축한 상태로 버스를 타야 하고,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일정부분 근대화와 관련한다. 농경시대에는 비가 생명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한지민에게 비는 시원함과 즐거움이다. 근대의 생활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사는 그녀에게는 말이다. 정재영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활방식에 녹아들게 된다. 때로는 계획적으로 때로는 무계획적으로 살아갈 정재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진 만큼 행복 역시 늘어나지 않을까.         

 

 

참조

 

Bauman, Zigmund(2010), 『모두스 비벤디』, 한상석 역, 후마니타스,

조주은(2013), 『기획된 가족』, 서해문집

주형일(2012),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세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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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3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돈 받고 원고 팔아도 되겠습니다. 좋군요. 제가 6개월 동안 읽은 알라딘 서재 글 중 톱 10이군요...ㅎㅎㅎㅎㅎ. 이 영화 급 땡기는데요. 봐야겠네요...

까레이 2014-01-31 15:30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ㅋㅋ
근데 이 영화 뒤로가면 병맛입니다.... 신파가 따로 없습니다...

소재는 좋은데 이야기 풀어나가는 게 영...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4
김선욱 지음 / 자음과모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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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자이야기, 고전으로 가는 우회로

 

 

 이것은 책 한 권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권의 책,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일 것 없이 고전은 위대하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무 책이나 짧게는 몇 십 년, 길게는 몇 백 년 동안 꾸준히 회자되고 읽힐 수 없다.

 이제 막 책에 흥미를 붙인 사람을 다시 책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고전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고전의 가장 큰 문제는 읽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전에 대한 농담으로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보지 않은(못한) 책이라는 말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외감이 느껴지는 표지와 제목, 웬만한 책 몇 권에 버금가는 쪽수와 무게, 읽기를 도전할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우회로.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다. 실제로 해설서를 먼저 읽고 그 다음 원저를 읽는 일은 바로 원저를 읽는 일보다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원저로 가는 길이 산적들이 우글거리는 높은 산을 넘어야만 하는 험난한 길이라면 해설서를 통한 우회로는 중간에 쉴 곳도 많고 깔끔하게 잘 닦인 길이다. 오랜 수련으로 내공이 쌓인 사람이라면 첫 번째 길로 가도 괜찮겠지만 초심자라면 두 번째 길로 가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시리즈는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심오한 이론의 핵심을 쉽게 풀어냈다.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표지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이 책을 들기 망설였던 사람이라면 잠시 조금 배웠다는, 대학생이라는 허영심 혹은 자존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는 필히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라고 공자는 말했다. 이 말인즉슨 그 중에는 어린이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모르면 어린이에게라도 배우면 되는 것이다.

 잠시 겸손한 마음으로 고전으로 가는 우회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를 펴보면 어떨까. ,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고전은 확실히 어렵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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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끕인생론, 싸구려 댄스를 추자

 

 며칠 전, 친구 필호가 아는 형에게 나를 소개할 때 얘 글 많이 써요. 약간 삐끕느낌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하지만 담담한 느낌을 지향하는 나에게 삐끕이라니, 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향은 지향일 뿐 엄밀한 사실이다. 나는 삐끕이다. 정확히는, ‘B이다. 하지만 B급을 비급이라고 발음하면 안 된다. ‘자장면보다 짜장면돈가스보다 돈까쓰가 왠지 더 맛있게 느껴지듯, ‘B특유의 싼 맛과 부족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삐끕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된소리는 강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삐끕은 전혀 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B급 아비투스를 갖고 있다. 흔히 고급문화라고 일컬어지는 클래식과 추상적인 미술을 감상하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고 그나마 중간예술인 사진과 영화를 볼 뿐이다. 영화 중에서도 A급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급에 머물러있는데, 가끔 A급 흉내를 내볼 요량으로 타르코프스키나 히치콕 같은 거장의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지만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B급 본능이 올라와 하품이 나오고 딴짓을 하고 만다.

 B급 성향은 예술에 대한 취향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 깊숙이 퍼져 있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탁월하게 잘하는 것은 아니고, 책을 좋아하지만 고전은 어려워 읽지 못하고, 심지어 얼굴과 키마저도 딱히 잘생기지도 크지도 않은 그저 어중간한 B급이다. 태어날 때 이미 B급으로 운명지워진 것일까.

 그 때문인지(라고 핑계를 대며) 대학교도 B급이고 성적마저도 A+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만 받아도 감지덕지한 실정이다. 취업을 할 때 학점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이라면 다행이다(제가 본 회사에 최적화된 B급 인재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나의 한심함에 혀를 차거나 불쌍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조금 잔인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한참 못난 녀석이네하고 스스로를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이런 B급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B급인 나의 깜냥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은 나름의 장점이 있는데, 현실은 씨끕인데 삐끕을 꿈꾸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사회학자들의 표현의 빌리자면 계급의식, ‘본인의 계급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B급을 넘어설 수 없는 걸 알기 때문에 목표를 정할 때도 B급으로 정한다. 사실 학점 A+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안 받는 것이다(사실 받고 싶어요). A+을 받기 위해 앞으로의 인생에 별로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책의 구석에 있는 말까지 외우느라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다른 책을 보자는 것이 학점에 관한 나의 우스꽝스러운 철학이다.

 “포기하면 편해”, <슬램덩크>의 안감독님 한 말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A급을 포기하면 편하다. A+ 학점을 포기하고 B+을 목표로 하면 시험기간에도 보고 싶었던 책을 볼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다. A급은 아예 포기했으니, B급으로 어떻게 하면 알차고 재미있게 B+로 지낼까 고민만 하면 된다.

 옷도 마찬가지여서 명품 옷을 사는 일을 포기하는(정확히는 포기 당하는) 순간 다양한 디자인에 가격도 싼 구제 옷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품 옷 한 개 조차 사기 힘든 십 만원으로 구제 옷을 사면 집에 들고 오기 힘들만큼 많은 옷을 살 수 있다. 이제 그 많은 옷들을 어울리게 잘 조합해서 입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 하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삐끕이 함부로 에이끕흉내를 내려고 하면 쓸데없고 골치 아픈 일만 생길 뿐이다. 그저 싸구려 댄스를 추고, 싸구려 인생을 살면그만이다. 그러고 보니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홍상수 역시 어떻게 보면 B급이다. 정말 촌스럽게도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고 역시 B급이 최고야라고 조용히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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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차별의 또 다른 말

 

 취향은 사전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흔히 취향이라고 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제목 <개인의 취향>처럼 취향은 개인과 항상 붙어 다닌다. 누구는 아디다스보다 나이키를 좋아하고, 누구는 트로트보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개인의 취향이다. 좋아서 좋다는데 다른 반박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나이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아디다스를 좋아하는 사람,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과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혹자는 나이키가 더 예쁘니까…”, “클래식은 아무래도 트로트보다 고상하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쁘고 고상한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안 예쁘고 천박하다고 외면 받던 것이 지금은 예쁘고 고상한 것으로 환영 일이 부지기수인데 말이다.      

 취향은 사회적 산물이다. 취향은 시대, 지역, 교육수준, 경제적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나이키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아디다스보다 좋은지 판단 할 수 없고 트로트와 클래식 역시 마찬가지다. 부르디외는 아름다운 것/추한 것, 탁월한 것/천박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사회적 구도 안에서 가능하며, 이 과정에서 각 주체는 객관적 분류 체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되고. 그 자리에서 높음/낮음의 형식으로 지배관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홍성민, 2012: 41) 미학적 취향이 사회적 주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고 다시 고급 취향/대중 취향으로 나누는 것이다. , 취향은 차별의 또 다른 말이다.

 하지만 그 차별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개인적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 예술에 대한 취향은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전통적인 대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 가구, 패션 등도 여기에 속한다. 클래식 공연장과 유명 호텔의 식당에서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아마 출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르메질도 제냐 양복을 입고 롤렉스 시계를 찬 사람은 햄버거 가게와 힙합 공연장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서로 간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일상의 모습들이 사실은 매우 밀접한 취향의 논리로 이어져 있고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의 형성 과정은 사회적 분류 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홍성민, 2012: 42)   

 

문제는 교육이다

 

 부르디외는 교육이, 문화 활동이 지배관계로 이어지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술적인 그림을 보았을 때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때는 나름의 해독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해독능력은 공부를 통해서, 예술작픔에 자주 노출되면서 길러진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안목은 바로 교육의 산물이다. (홍성민, 2012: 42)

 부모의 교육 수준과 경제적 수준이 높은 가정의 아이는 어릴 때부터 흔히 고급 취향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모의 높은 경제적 수준과 문화적 수준이 필요하고 이에 더해 습득하기 까지 오래 걸리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음악으로는 클래식, 그 중에서도 부르주아 계급은 설문지에서 좋아하는 음악으로 주로 <평균율 피아노곡집>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꼽았다. (홍성민, 2012: 73)   

 이것들은 오랫동안 피아노 수업을 받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피아노곡들이고 작곡가도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집단운동, 신체적 접촉이 많은 운동 보다는 골프, 테니스, 요트, 승마, 스키, 펜싱 등을 즐긴다. 이 운동들은 혼자서 운동할 수 있는 장소와 운동용품을 구매하기 위한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페어플레이가 엄격히 요구되는데, 이것은 통제된 인간 관계의 양상(큰 소리를 내거나, 거친 동작을 할 수 없다)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고급 취향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홍성민, 2012: 72)

 그리고 교육이 전환 전략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학력 자격을 부여하는 학교 제도는 계급 간 경계와 사회적 이동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통해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물려준다. (홍성민, 2012: 125) 돈으로만 자녀에게 물려줄 경우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고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경제적 자본을 문화적 자본과 상징적 자본으로 전환해서 재생산을 할 경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돈을 물려 받은 것에 대한 비난과 지탄이 개인적인 노력의 성과에 대한 찬사와 칭찬으로 바뀐다.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유학을 하고 해외의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사회의 문화소비 형태가 다양할수록 이러한 전환 전략, 은폐 전략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은 권위와 명예의 재생산에 투입되는 의례(儀禮)와 전략(戰略)등을 포함하는 매우 유동적인 성질의 자본을 지칭한다. 경제적 계산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자본으로서, 가령 지명도가 높은 예술가의 작품가격, 개런티 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 유형의 자본은 기본적으로 신뢰도의 척도가 되기도 하며, 때때로 부인되기도 용인되기도 하는 불확실한 자본유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제자본이 상징자본으로 전환되어 표면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자본의 전환 및 은폐현상은 문화소비양식이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그 가능성이 높다. (Bourdieu, 1997: 33)

 

예체능 교육의 필요성

 

해결책은 있을까. 물론 경제적 자본이 문화적〮상징적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민중계급이 고급 취향을 익힌다고 해도 그들의 계급적 위치가 변할 가능성은 요원하고 심지어 학력 인플레이션처럼 자신은 어느 정도 높은 학력 수준을 갖고 있다는 착각의 함정에 빠져 자신의 기대치가 억압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 허위의식에 빠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교육에서 예체능 교육의 비율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는 가정교육에서 고급 취향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취향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클래식과 미술작품은 내가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하고 체념하는 것보다는 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운 후 나는 클래식 보다 락이 좋고, 순수미술보다 팝아트가 좋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을까.

 현재 한국의 모든 교육의 목표는 수능에 수렴되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예체능 교육은 수능에 반영이 안되기 때문에 예체능 교육이 최소화 되기를 원한다. 아예 없어져 버린다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수능 점수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현실에 처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사고다. 수능은 상대평가다. 따라서 다 같이 체육수업을 많이 하고 음악수업을 많이 하면 자신의 점수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 가정교육에서 쌓을 수 없는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다.

 

랑시에르와 보편적 가르침

 

 부르디외는 학교를 통해 상속이 이루어지고 재생산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면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문제는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학교의 신화, 즉 학교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뒤집는다. 학교는 중립적 기구며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달린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출신계급의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고 믿기 때문에 학교는 지배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노동자의 자식들이 결코 학교에 진학할 수 없도록 만드는 동어반복적인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형일, 2012: 233) 부르디외의 논리를 따르면 노동자의 자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문화적 자본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문화적 자본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의 자식은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계급적 취향의 차이가 사회적 신분을 구분한다고 분석해냈다. ,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신분적 위계질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대한 분석과 동일한 논리가 『구별짓기』에서도 반복된다.

 

 부르디외는 미적 판단과 취향이 계급이 가진 자본들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것들이 지배계급은 지배자의 자리에, 피지배계급은 피지배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하는 상징적 폭력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각 계급은 이 미적 판단과 취향을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계급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민중계급은 순수한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순수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 예술작품을 즐기면서 문화적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결국 민중계급은 문화와 예술의 장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주형일, 2012: 234)

 

 지배의 구조를 밝혀서 그 논리를 깨뜨리고자 하는 이론이 반대로 지배의 구조를 탄탄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할당한 자리에서 계속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다른 계급의 언어와 시간과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정해 놓은 계급, 정체성, 문화, 취향, 지식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려 했다. 즉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 해방은 우선 미적 해방이었다. 그것은 조건에 의해 강요된감각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주형일, 2012, 235)

 

 다시 말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그들이 말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말하는 노동자 시인들의 경우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구술과 산문 밖에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글을 쓴다. 그들은 운문으로 글을 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통속적인’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시를 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개인적인 실천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은 개별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교섭하는 일이 아니라 공적 토론과 시위에 속하는 집단적인 일이라고 결정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것들의 질서에 대한 단절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실천은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채 생산할 능력이 있다고 노동자들 스스로 선언하게 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단절과 일맥상통한다. 불가능한 것은 사실상 이중의 지위를 가진다. 한편으로 불가능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한 것의 영역을 선험적으로 한정하는 데 사용된다. 다시 말해 평민이 말하거나 노동자가 주인 없이 생산하는 것은 지배적인 논리로 가능하지 않다. 다른 한편 불가능한 것의 의미는 가능한 것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이택광, 2013: 120)

 

 랑시에르는 문제는 분할 즉, 모든 것에 대해 각자의 자리를 정하고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분할을 부수고 넘어서는 것이 곧 해방이다. 그는 자코토의 교육 원리에서 그 근거를 발견했다.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것의 핵심은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졌으며 그 능력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공부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다. 그리고 랑시에르는 아무 평민이나 스스로를 인간이라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이 지능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해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구나 똑같이 시인의 글을 쓸 수 있고,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순수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명도 멸시와 차별을 받지 않고 쉽고 편하게 이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학교 교육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랑시에르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이란 보이는 것의 질서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혁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역량들을 표명함으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들을 지워버린다.” (이택광, 2013: 102) , 제대로 된 교육과 공부는 지배/피지배를 나누는 경계와 그것을 지속시키는 구별짓기를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참고문헌

 

Bourdieu,, Pierre,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역, 서울, 새물결

주형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이택광,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서울, 자음과 모음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 서울,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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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발터 벤야민은 외관상으로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일정한 방식이 없는 듯 보이는 미세한 문화적인 변동 속에서도 어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징후들을 독특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탐지해낸 철학자였다. 그는 종종 이야기 유형을 뱃사람 이야기와 농사꾼 이야기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우선 뱃사람 유형의 이야기는 결코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분명 그 누구도 찾아가려 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먼 곳에 대한 이야기이자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과 돌연변이, 마녀와 마법사, 늠름한 기사와 반대로 교활하고 못된 짓을 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 속에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영웅담을 경청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서로 삐걱대면서 충돌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 특히 마법에 홀린 듯 뱃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채 경청하는 그런 사람들은 결코 해보려고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감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반면에 농사꾼 유형의 이야기는 마치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 년 동안의 계절 순환처럼 또는 집과 농장, 들판에서 매일 벌어지는 지루한 일상들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하고 얼핏 보기에도 친숙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금 나는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인상 때문에, 그 친숙한 일들에 관해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 또한 하나의 착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친숙한 것들이 너무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나 거기 있어서’, ‘결코 변하지않을 듯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만큼 아주 재빠르고 단호하면서도 면밀한 음미의 눈길을 피해가는 것도 없다. 친숙한 것들은 바로 빛 속에 숨어있는데, 결국 그 빛은 친숙함 속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오해하게끔 하는 빛이다! 그러한 친숙한 사물들의 평범성은 모든 음미의 눈길을 방해하는 장막인 셈이다. 그처럼 친숙한 사물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면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적으로 무디고 아늑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타락한 판에 박힌 듯 순환하는 일상으로부터 그 사물들을 뜯어내서 분리시켜야 한다. 우선 그 사물들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스캐닝하기 전까진 반드시 무시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그 사물들이 지닌 소위 일상성이라는 의심스러운 장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친숙한 사물들이 숨기고 있는 풍부하고도 심원한 미스터리를 탐구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 사실 당신이 그 친숙한 사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곧 그 사물들은 아주 기묘하고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돌변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p19

 

그래, 역시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아니 역시 발터 벤야민이다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책을 보던 중 이 얘기를 발견하는 순간, '이건 나를 위한 얘기다', '내가 항상 기억해야 할 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는 글은 어떤 글일까?(: 재미도 없고 간지도 없는 그저 그런 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 따위의 질문을 어렴풋이 해왔었다. 질문이 어렴풋한 탓에 답도 어렴풋했다. 그러던 차에 벤야민이 했고 바우만이 멋지게 주석을 달아준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다

 벤야민은 이야기의 유형을 뱃사람의 이야기와 농사꾼의 이야기로 구분했다. 일단 뱃사람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을 발견하고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모험담은 누구라도 매료시킬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하루면 세계의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지금, 뱃사람의 이야기는 과거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힘들다

 농사꾼의 이야기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겉으로만 봤을 때 뱃사공 이야기의 매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누구나 겪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 부분에서'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일들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숙한 일들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착각을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봄에는 씨 뿌리기, 여름에는 풀 뽑기, 가을에는 수확하기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자체가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비슷한 아침을 먹은 후 똑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생활에서 어떤 발견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바우만은 바로 그 익숙함과 친숙함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음미해 볼 기회를 뺐어 간다고 말한다. 때문에 평범한 사물을 음미하고 관찰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판에 박힌 일상에서 그것을 떼어내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친숙한 사물들 속에 숨겨졌던 풍부하고 신비로운 미스터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떼어내서 친숙한 것을 다시 보라는 바우만의 말은 ‘거리 두기’, ‘낯설게 보기’와 궤를 함께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에서 이야기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몸을 씻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면대와 욕조를 우울한 나의 ‘텐션(tension)’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인스턴트 늪>),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어중간한 맛의 라면을 만드는 것에 모자라  어느 커피 전문점보다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서비스로 주는 라면가게(<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제목부터 ‘거리 두기’의 표본이다), 무술로만 생각했던 쿵푸로 축구를 하는 것(<소림축구>), 이 모두는 너무 가까이 있어 뻔해 보이는 것을 ‘낯설게 보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 또한 ‘거리 두기’를 통해서 내가 목표로 하는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기대하시라. 언젠가 블로그 혹은 다른 매체에서 내 글을 보고 ‘이 새끼 봐라. 골 때리는 놈이네’하며 킬킬거릴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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