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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발터 벤야민은 외관상으로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일정한 방식이 없는 듯 보이는 미세한 문화적인 변동 속에서도
어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징후들을 독특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탐지해낸 철학자였다. 그는 종종 이야기
유형을 뱃사람 이야기와 농사꾼 이야기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우선 뱃사람 유형의 이야기는 결코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분명 그 누구도 찾아가려 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먼 곳에 대한 이야기이자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과 돌연변이, 마녀와 마법사, 늠름한 기사와 반대로 교활하고 못된 짓을 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 속에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영웅담을 경청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서로 삐걱대면서 충돌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 특히 마법에 홀린 듯 뱃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채 경청하는 그런 사람들은 결코 해보려고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감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반면에 농사꾼 유형의 이야기는 마치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 년 동안의 계절 순환처럼 또는 집과 농장, 들판에서 매일 벌어지는 지루한 일상들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하고
얼핏 보기에도 친숙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금 나는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인상 때문에, 그
친숙한 일들에 관해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 또한 하나의 착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친숙한 것들이 너무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나 거기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을 듯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만큼 아주 재빠르고 단호하면서도 면밀한 음미의 눈길을 피해가는 것도 없다. 친숙한
것들은 바로 ‘빛 속에 숨어’ 있는데, 결국 그 빛은 친숙함 속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오해하게끔 하는 빛이다! 그러한
친숙한 사물들의 평범성은 모든 음미의 눈길을 방해하는 장막인 셈이다. 그처럼 친숙한 사물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면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적으로 무디고 아늑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타락한 판에 박힌 듯 순환하는 일상으로부터 그 사물들을
뜯어내서 분리시켜야 한다. 우선 그 사물들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스캐닝하기 전까진 반드시 무시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그 사물들이 지닌 소위 ‘일상성’이라는 의심스러운 장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친숙한 사물들이 숨기고 있는 풍부하고도 심원한 미스터리를 탐구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 사실 당신이 그 친숙한 사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곧 그 사물들은 아주 기묘하고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돌변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p19
그래, 역시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아니 “역시
발터 벤야민이다”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책을 보던 중 이 얘기를
발견하는 순간, '이건 나를 위한 얘기다', '내가 항상
기억해야 할 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는 글은
어떤 글일까?(답: 재미도 없고 간지도 없는 그저 그런
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답: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 따위의 질문을 어렴풋이 해왔었다. 질문이 어렴풋한 탓에 답도 어렴풋했다. 그러던 차에 벤야민이 했고 바우만이 멋지게 주석을 달아준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다.
벤야민은 이야기의 유형을 뱃사람의 이야기와 농사꾼의 이야기로 구분했다. 일단 뱃사람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을 발견하고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모험담은 누구라도 매료시킬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하루면 세계의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지금, 뱃사람의 이야기는 과거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힘들다.
농사꾼의 이야기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겉으로만 봤을 때 뱃사공 이야기의
매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누구나 겪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 부분에서'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일들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숙한 일들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착각을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봄에는 씨 뿌리기, 여름에는 풀 뽑기, 가을에는 수확하기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자체가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비슷한 아침을 먹은 후 똑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생활에서 어떤 발견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바우만은 바로 그 익숙함과 친숙함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음미해 볼 기회를 뺐어 간다고 말한다. 때문에 평범한 사물을 음미하고 관찰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판에 박힌 일상에서 그것을 떼어내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친숙한 사물들 속에 숨겨졌던 풍부하고 신비로운 미스터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떼어내서 친숙한 것을 다시 보라는 바우만의 말은 ‘거리 두기’, ‘낯설게 보기’와 궤를 함께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에서 이야기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몸을 씻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면대와 욕조를 우울한 나의 ‘텐션(tension)’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인스턴트 늪>),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어중간한
맛의 라면을 만드는 것에 모자라 어느 커피 전문점보다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서비스로 주는 라면가게(<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제목부터 ‘거리 두기’의 표본이다), 무술로만 생각했던 쿵푸로 축구를 하는 것(<소림축구>), 이 모두는 너무 가까이 있어 뻔해 보이는 것을 ‘낯설게 보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 또한 ‘거리 두기’를 통해서 내가 목표로 하는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기대하시라. 언젠가 블로그 혹은 다른 매체에서 내 글을 보고 ‘이 새끼 봐라. 골 때리는
놈이네’하며 킬킬거릴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