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끕인생론, 싸구려 댄스를 추자

 

 며칠 전, 친구 필호가 아는 형에게 나를 소개할 때 얘 글 많이 써요. 약간 삐끕느낌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하지만 담담한 느낌을 지향하는 나에게 삐끕이라니, 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향은 지향일 뿐 엄밀한 사실이다. 나는 삐끕이다. 정확히는, ‘B이다. 하지만 B급을 비급이라고 발음하면 안 된다. ‘자장면보다 짜장면돈가스보다 돈까쓰가 왠지 더 맛있게 느껴지듯, ‘B특유의 싼 맛과 부족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삐끕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된소리는 강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삐끕은 전혀 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B급 아비투스를 갖고 있다. 흔히 고급문화라고 일컬어지는 클래식과 추상적인 미술을 감상하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고 그나마 중간예술인 사진과 영화를 볼 뿐이다. 영화 중에서도 A급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급에 머물러있는데, 가끔 A급 흉내를 내볼 요량으로 타르코프스키나 히치콕 같은 거장의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지만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B급 본능이 올라와 하품이 나오고 딴짓을 하고 만다.

 B급 성향은 예술에 대한 취향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 깊숙이 퍼져 있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탁월하게 잘하는 것은 아니고, 책을 좋아하지만 고전은 어려워 읽지 못하고, 심지어 얼굴과 키마저도 딱히 잘생기지도 크지도 않은 그저 어중간한 B급이다. 태어날 때 이미 B급으로 운명지워진 것일까.

 그 때문인지(라고 핑계를 대며) 대학교도 B급이고 성적마저도 A+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만 받아도 감지덕지한 실정이다. 취업을 할 때 학점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이라면 다행이다(제가 본 회사에 최적화된 B급 인재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나의 한심함에 혀를 차거나 불쌍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조금 잔인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한참 못난 녀석이네하고 스스로를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이런 B급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B급인 나의 깜냥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은 나름의 장점이 있는데, 현실은 씨끕인데 삐끕을 꿈꾸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사회학자들의 표현의 빌리자면 계급의식, ‘본인의 계급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B급을 넘어설 수 없는 걸 알기 때문에 목표를 정할 때도 B급으로 정한다. 사실 학점 A+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안 받는 것이다(사실 받고 싶어요). A+을 받기 위해 앞으로의 인생에 별로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책의 구석에 있는 말까지 외우느라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다른 책을 보자는 것이 학점에 관한 나의 우스꽝스러운 철학이다.

 “포기하면 편해”, <슬램덩크>의 안감독님 한 말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A급을 포기하면 편하다. A+ 학점을 포기하고 B+을 목표로 하면 시험기간에도 보고 싶었던 책을 볼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다. A급은 아예 포기했으니, B급으로 어떻게 하면 알차고 재미있게 B+로 지낼까 고민만 하면 된다.

 옷도 마찬가지여서 명품 옷을 사는 일을 포기하는(정확히는 포기 당하는) 순간 다양한 디자인에 가격도 싼 구제 옷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품 옷 한 개 조차 사기 힘든 십 만원으로 구제 옷을 사면 집에 들고 오기 힘들만큼 많은 옷을 살 수 있다. 이제 그 많은 옷들을 어울리게 잘 조합해서 입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 하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삐끕이 함부로 에이끕흉내를 내려고 하면 쓸데없고 골치 아픈 일만 생길 뿐이다. 그저 싸구려 댄스를 추고, 싸구려 인생을 살면그만이다. 그러고 보니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홍상수 역시 어떻게 보면 B급이다. 정말 촌스럽게도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고 역시 B급이 최고야라고 조용히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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