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 열풍그리고 박정희라는 판타지

 

 당시의 인기가수가 과거의 명곡을 리메이크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지만지금의 양상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가히 리메이크 열풍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불후의 명곡>, <히든 싱어> TV 프로그램들도 리메이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한국 가요 시장의 상황과 궤를 함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시작으로 EXO까지 남녀불문하고 아이돌’ 가수들이 현재 한국 가요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그들의 인기는 여전하지만 한편으로 5년 넘게 지속된 이러한 유행에 많은 사람들이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가 이제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문제는 새로운 모습의 가수와 노래가 등장할 가능성 역시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다아이돌 가수들이 귀여움섹시함중성적 매력 등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하지만더 이상 파격적이지도 새롭지도 않다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웠던 과거를 추억한다이것이 리메이크의 유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회자되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다한 쪽에서는 경제 부흥의 영웅으로한 쪽에는 무자비하게 인권을 탄압한 폭군으로 그를 재조명한다둘 다 전적으로 맞는 것도틀린 것도 아니다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치가 개입된 사실판단에 의한 논쟁은 싸움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이문세와 김광석의 노래의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 논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리메이크 열풍이 왜

생겨났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이택광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지금 호명 받고 있는 박정희는 역사적 개인이라고 보기 어렵다오히려 박정희는 이런 역사적 사실성을 탈색시킨 채위기에 처한 증상의 임계 상황에서 출몰한다박정희는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을 표현한다박정희가 고통스러운 증상이라는 뜻이 아니다대중이 원하는 건 증상이 예전처럼 다시 쾌락을 주는 것이다박정희는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으로부터 다시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대중의 요구가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택광『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지금의 경제와 정치 상황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그렇다고 마땅한 대안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그리고 대통령 한 명이일국의 차원에서 어두운 현실을 단번에 장밋빛으로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들은 초인적인 인물의 등장을 기대한다바로 그 자리에 이만큼 잘살게 해준” 박정희가 위치하고 있다.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현재의 가요계와 정치 상황과 그 속에서 호출되는 김광석과 박정희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이택광 교수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할 수밖에 없는데, “박정희라는 기표가 점유하고 있는 지점은 그 어떤 기표로 대체되어도 좋은 텅 빈 결여의 자리라는 말처럼 사실 김광석이 아니라 유재하이문세라도박정희가 아니라 다른 과거의 정치인이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단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박정희와 김광석이라는 텅 빈 기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금 즐거움이 결여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P.S 그렇다 해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김광석의 노래는 정말 좋다.   

     이 글은 '페루애'님의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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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메이크라는 표현이 꽤 와닿습니다.

까레이 2014-01-02 11:39   좋아요 0 | URL
사실 제 글도 곰곰발님 글의 리메이크죠ㅋㅋ 박정희에 대해서도 리메이크라는 표현을 썼으면 좀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네요ㅋㅋ 나중에 교쳐야겠어요ㅋㅋ
 

신문 예찬, 우리 꼰대는 되지 말자

 

 신문은 정말 싸다. 가판대에서는 한 부에 800,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과 똑같다. 정기구독을 하면 신문 한 부의 가격은 더욱 낮아진다. 하루에 500원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싸도 너무 싸다. 특히 한겨레 신문 토요판이 그러한데, 몇 백원을 내고 사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삼각김밥 사먹을 돈으로 가판대에서 신문 한 부를 사고 한 달에 치킨 한 마리 덜 시켜먹고 신문 정기구독을 하자. 몸은 지방이 줄어 날씬해지고 머리는 지식과 상식으로 탄탄해질 것이다.

 

신문, 세상을 열어주는 창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될까. 초능력과 재력을 동시에 갖고 있어 하루가 48시간이고 전세기로 세계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비슷할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지는 나라, 지역, 성별, 경제적 수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대개 그것들에 기초한, 그것들과 관련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환경을 둘러싼 경계를 초월하는 세상을 접하는 것을 직접 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간접 경험에 보다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에 책과 신문이 있다. 그 안에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를 통해서 나의 국적, 성별, 계급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과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카메룬의 소설과 칠레 철학자의 책을 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프랑스의 『르 몽드』와 독일의 『슈트도이체 자이퉁』을 읽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매달려 있는 줄은 무엇일까

 

 미국의 과학자 샘 해리스와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샘 해리스는 “꼭두각시는 자기를 조종하는 줄을 사랑하는 한 자유롭다”라고, 피터 버거는 사회학이 우리가 사회의 꼭두각시임을 보여주지만 그냥 꼭두각시와 달리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발견이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우리가 사회라는 줄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라고 하더라도 그 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회학이 아니라 어떤 공부라도 그것은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고 이는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 이후에 그 줄을 사랑할 것인지, 줄에게 반항할 것인지를 택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위 때문에 길이 막혀 짜증난다고 욕을 하는 것과 시위가 벌어진 이유와 시위의 정당성을 생각해 본 후에 비판을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신문을 읽는 것이 바로 그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매달려 있는 줄 즉 정치, 경제,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언론을 믿지 않는다고?

 

 지인들과 가끔 신문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종종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언론, 특히 그 중에서도 신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어 당황스러웠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그럼 뭘 믿는데?”. 물론 언론의 공신력이 낮아진 데는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진영논리의 스피커 노릇을 해온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기자들은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의식을 잃은 채 특정 진영의 종군기자, 개별 언론사 샐러리맨이 돼왔던”(권석천, 『중앙일보』, 2013. 8. 28.) 사실이 그 말 속에는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모든 신문을 거짓말쟁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신문을 (안 믿으니 그렇겠지만)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조중동이라서 비난하고 한겨레는 한겨레라서 비난한다. 내가 『중앙일보』를 들고 있을 때는 꼴통보수라고 눈을 흘기고 『한겨레21』을 들고 있을 때는 빨갱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홍세화 씨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생각의 좌표』에서 얘기했다.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견해는 견고하다. 택시기사는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고, 또 어떤 계기로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한겨레를 읽지 않은 채 품고 있는 한겨레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나처럼 같은 택시노동자 출신으로서 조금 전까지 죽이 맞아 얘기를 나누었고 지금 한겨레에서 일하는 사람의 한겨레는 그런 신문이 아닙니다라는 얘기를 통해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할 수 없다.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 택시기사는 자신이 빠진 함정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까?

   택시기사 뿐인가? 우리는 정보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다. 사람들은 민주노총에 대해,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 ‘알 필요가 없는 것’,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되어 있다.  

홍세화, 『생각의 좌표』

 

 신문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치 개입이 철저하게 배제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가치와 생각을 접하고 사실에 대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흔히 요즘 정치권의 문제로 소통의 부재를 꼽는다. 모든 사람이 불통을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가? “너나 잘해따위의 말로 정치권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한 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가 한 강연에서 꼰대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꼰대는 달리 꼰대가 아니다. ‘꼰대는 남이 무슨 얘기를 하든 자기가 할 얘기를 머릿속에 이미 정해 놓는다. , 상호작용으로서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의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꼰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을 살짝 바꿔서 얘기하자면, ‘꼰대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해서 남의 생각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기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 대해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신문을 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수구보수라고 한겨레를 빨갱이라고 욕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우리가 핏대를 세우고 그토록 비판하던 불통의 모습이자 꼰대의 행동이다.

 ‘정보의 홍수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일 매일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접하고 싶은 정보만 접한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신문은 나와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트위터에서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만 맞팔을 하고, 페이스북에서 역시 내가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사람과만 친구를 맺는다. 정보는 홍수를 이루지만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무람없고 건방지게도 신문을 보는 방법을 추천해보려 한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무 자르듯 나누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조심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만, 자신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히 보수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중에 하나를 보기 바란다. 반대로 자신이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읽기 바란다. 이 방법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지점의 신문을 본다고 갑자기 그 쪽으로 쓸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영화 <생활의 발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살짝 바꿔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꼰대는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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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는 사지 않아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은 사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활의 작은 기조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사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나지만 예전에 몇 번 샀던 적이 있었고 나중에 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사게 될 날이 오는 일은 예전에 샀던 베스트셀러 책을 기억해내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낮은 일일 것이다. 이택광 교수의 비평서, 심보선 교수의 시집 및 비평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비평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않는 한 베스트셀러를 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은 몇 달만 지나면 헌책방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요즘 헌책방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책들은 <안철수의 생각>, <엄마를 부탁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이다. 잠시 베스트셀러로 영광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지만 이제는 헌책방의 책장만 차지하고 있는 골칫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베스트셀러의 운명이다. 원래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몇 천원만 내면 구입할 수 있다.

 두 번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것들뿐이다. 베스트셀러’s’가 아니라 베스트셀러라서 그런지, 자기계발서 아니면 힐링이라는 이름의 감성팔이를 하는 책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를 읽어봐야 그것이 시키는 대로 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므로 읽을 필요가 없고 힘들지? 조금만 더 힘내, 마음을 다스려봐라고 말하는 힐링책들을 읽으면 있던 힘도 사라지고 짜증만 날 뿐이다. 다소 오만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지성이 밑받침되지 않는 감상은 건전한 비판의식을 잠재우는 마취제”(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최영미)라는 최영미 작가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좋아요’ 100개도 모자란다.

 큰 이유가 위의 두 가지고 작은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자기계발서와 힐링책은 읽어도 남들과 할 수 얘기가 없다. 친구에게 그 책들의 말대로 야 그건 너가 게을러서 그런 거야,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해”,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야라고 고리타분하게 말하는 것은 왕따를 자처하는 일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인기 있는 드라마나 예능프로를 보고 얘기를 하는 게 훨씬 낫다.

 두 번째, 돈이 아깝다. 책을 사는 데 있어 나름의 작은 기준이 있는데, 시집을 제외하고는 일단 글씨가 많은 책이 장땡이다. 책의 질을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철저히 읽는 사람의 몫이고 글씨의 양이 책의 질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글씨보다 그림이 글씨보다 여백이 많은 책을 보면 지레 질이 별로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사기가 꺼려진다.

 세 번째, 이왕이면 오래된 책을 산다. 베스트셀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만큼 많이 인쇄한다. 10년 안에 절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살려면 나중에도 살 수 있다. 책이 절판되는 주기를 10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2013년에 출판된 책보다는 2003년에 출판된 책을 그보다는 1993년에 출판된 책을 사는 것이 나중에 책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절판된 책들 중에는 가격이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외의 부수입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아직 그래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아까워서 팔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책을 사는 데 있어 크고 작은 이유를 늘어놔봤다. 사실 책을 고르는 것에 정답은 없다. 좋다고 하는 약이 모든 사람에 좋은 것이 아니듯, 좋은 책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좋을 수는 없다. 본인이 봤을 때 좋은 책, 필요한 책을 고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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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읍시다. 지금 우리의 지성 네트워크를 위하여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고 해야 할까. 집에서 혼자 읽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는 일, 즉 독서 토론회에 참여한지 6개월이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시작해 지금은 학교를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독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도서관은 친목이 아니라 침   묵의 공간이, 독서실이 되었다. 독서에서 행위는 배제됐고, 책을 읽을수록 마음의   양식이 살찌니 정신의 비만이 우려된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정열과 혁명의 책   도 혼자 읽는 조용한 독서의 대상일 뿐이다. 내가 읽은 책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노동이나 자본, 탈핵 같은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책을 혼     자 읽으면 뭐하나.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 그 교양을 쌓아서 어디에 쓰지? 그것     이 삶을 더 비참하거나 힘들게 만들지는 않는가.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게 느껴지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특히 계급, 세계화 같이 거대한 담론을 다룬 책이라면 그 강도가 훨씬 심해지는데, 알아봐야 씁쓸한 이물감만 커질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옛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착각)라는 심보선 교수의 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함께 읽는다면 다르다.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때로는 날선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의기투합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장대한 행동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나와 다른 성별, 나이, 지역의 사람과 토론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과 사고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생각, 나의 일상, 나의 주변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모든 것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혼자 읽는 것이 나와 내가 판단한 저자의 모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 소통이라면 함께 읽는 것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들 각각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들이 만들어내는 다대다(多對多)’ 소통이다. 토론의 인원이 5명이라면 그 5명에 더해 그들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 5명이 더해져 10명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토론 속에서 경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난다. 이택광 교수는 프랑스 철학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활발하고 자유로운 지식인 공동체를 들고 있다. 이 공동체의 가운데에는 에콜 노르말 대학이 있었고, 거기에는 루이 알튀세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에콜 노르말과 알튀세르가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알튀세르가 한 일은 학계의 지식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연 것뿐이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을 지칭해서 개념의 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과학과 철학의 개념들이 서로 부딪히고, 예술과 정치학이 서로 조우하는 갈등과 종합의 과정이 이런 초청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철학자로 언급하는 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 또는 조르지오 아감벤 같은 이론가들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통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이런 사실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철학에서 수학〮철학〮정치〮예술〮신학, 심지어 사랑까지도 공평하게 자신의 입장과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콜 노르말의 분위기는 지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성차의 한계도 넘어서는 사상의 용광로였다고 발리바르는 회상한다. 이런 유니섹슈얼이라고 부름직하다는 발비라브의 말에서, 새로운 사상이 출현 할 수 있는 조건은 기존의 한계들을 극복하는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물론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토론회가, 그 외의 수많은 토론회들이 과거 개념의 당에 비하면 규모와 수준에 비하면 한참 모자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적인 한계와 성차의 한계를 넘어서 함께 얘기를 나누고 사유하는 정신만은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택광 교수가 같은 책에서 “(인문학이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비판적 사유는 푸대접을 받는 상황에서)막연하게 인문학의 가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위치한 곳에서 나의 깜냥으로 나름의 지성의 네트워크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읽읍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참고

아직도 책을 혼자 읽으시나요?,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자음과모음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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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천재적인
베네딕트 웰스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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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 <거의 천재적인(fast genial)>은 베네딕트 웰스를 가리킬 때 필요한 수식어다. 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한 명의 인생을 그려냈다. 여느 여행처럼 순간의 즐거움도 행복함도 있지만, 그에게는 인생 전부를 건 여행이다. 프랜시스는 지금 인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세상의 똥구멍에서

 

 어머니가 라이언과 이혼한 후 프랜시스와 어머니는 클레이몬트에 정착했다. 그곳은 선전 팸플릿에서 뉴저지 주의 중심부에 위치한, 장래가 유망하고 발전도상에 있는 도시지만 다르게 표현하자면,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세상의 똥구멍에 있는 도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트레일러가 그의 집이다. 어머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반년 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프랜시스는 루저. 클레이몬트의 트레일러에서 살고, 운동신경이 좋아 레슬링을 했었지만 이내 그만두었고, 학교성적은 하위권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다. 운이 좋아 회복될 수 있다 해도 완쾌는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너절한 남자들, 조울증, 입원, 퇴원이라는 악순환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p33).

 학교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자는 아무도 없다. ‘루저라고 놀림 받기 일쑤다. 그럴수록 프랜시스의 내면에는 무언가 자라나고 있었다. 어떤 물건을 부숴버리거나 누군가를 패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그럴 때마다 주변을 한 바퀴 달리거나 귀청을 찢을 만큼 시끄러운 음악을 들었지만 허사였다. 그의 내면에는 어떤 낯선 것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강해졌다(p80).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일까, 혹은 삶에 대한 허무일까.

 

앤메이 가드너와 출생의 비밀

 

 삶의 목적도 이유도 갖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프랜시스의 삶에 앤메이 가드너가 들어온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머니가 입원한 정신병원에서였다. 프랜시스는 한 눈에 반했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이야기하며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엄마가 남긴 편지를 발견했다. 자신의 모든 과거가 담겨있었다. 프랜시스는 자신이 시험관 아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백만장자 먼로의 유전자 엘리트층을 길러낼 계획에 의해 태어난 아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돈을 받고 정자를 제공했고 어머니는 돈을 받고 아이를 낳아 기른 것이었다. 정자를 제공한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고, 첼로를 멋지게 연주했고, 아이큐가 170이 넘는, ‘기증자 제임스라는 가명의 남자였다.

 프랜시스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회이기도 했다. 친아버지가 정말로 그러한 사람이라면, 그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은 지금의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 잘나가는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당장에 앤메이 그로버와 함께 친아버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클레이몬트에서 시작해 뉴욕,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를 지나 티후아나에 이르는 여행이 시작됐다.

 

 그들은 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이 뉴욕 시내를 빠져나가는 동안 프랜시스는 손가락으로 조수석의 글러브 박스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드는 여행이었다. 이 제임스라는 정자 기증자가 어느 고독한 대학 교수인지, 속물이 된 컨트리클럽 회원인지 아니면 애정이 넘치고 가정적 인물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프랜시스는 친아버지를 찾아내기만 하면 그가 자신을 이 지겨운 곳에서 꺼내주리라 예감이 들었다. 그것만은 아주 확실해. (p138)

 

친아버지와 카지노, 그의 유일한 희망

 

 아버지를 찾는 여행 도중에 그들은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다. 프랜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지노로 향한다. 라이언이 준 5,000달러를 종잣돈 삼아 도박을 시작한다. 시작과 동시에 몇 판을 내리 이겨 꽤 큰돈을 땄지만, 종내 모든 돈을 잃고 만다. 빈털터리가 된 그들은 그로버의 부모님께 돈을 얻어 가까스로 여행을 이어간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확률 없는 도박에 몰두하는 프랜시스가 한심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트레일러에서의 가난한 생활, 이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입대를 잠시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혼자서 먹고살기에 넉넉하지는 못해도 부족하지 않은 돈을 벌 수 있겠지만 정신병원에 있는 엄마까지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때 마침 친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됐고, 자신과 어머니 인생의 방향을 바꿔줄 변곡점을 될 것이라는 기대로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에게는 친아버지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희망은 산산이 부서진다. 하버드를 졸업한 똑똑한 엘리트일 것이라고 상상했던 그의 친아버지는 티후아나에서 막노동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프랭클린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루저였다

 아버지의 실체를 알게 된 프랭클린은 좌절한다. 자신을 클레이몬트의 지겨운 생활에서 꺼내줄 구원자, 친아버지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실망만 안은 채 그들은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아직 한 가지 탈출구가 남았다. 카지노다. 한 번만 제대로 터지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남은 전재산을 털어 도박을 시작한다. 거듭 승리를 거두었고 한 번만 더 이기면 100만 달러를 얻을 수 있다. 검은색에 배팅했다. 만약 공이 지금 검은색 칸에 굴러 떨어진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바꾸어놓을 수 있다(p429). 그렇게 되면 앤메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할 것이다. 어머니의 삶도 달라질 것이다. 빨간색이 나와 돈을 잃었을 때도 생각해 본다. 그러면 내일 군대에 지원할 것이고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어쩌면 브래드 제닝스의 형처럼 전쟁터에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어 돌아와 죽을 때까지 절망적인 삶을 근근이 이어갈지도 모른다(p430).

 

 공이 마침내 멈출 때까지의 그 몇 초 동안 프랜시스는 세 가지의 삶을 동시에 살았다. 트레일러 정착촌에서의 삶, 샌프란시스코나 이라크에서 펼쳐질 새로운 두 가지 삶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는 부와 행복, 가난과 죽음 사이를 오갔다. 그것은 단 하나의 나라, 즉 이 나라에서 영위할 수 있는 세 가지 삶이었다. 동시성이 주어진 불가사의한 순간이었다. 이 세 가지 삶 중에서 두 가지는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그는 자신의 숨소리와 공이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고, 머릿속으로 샌프란시스코 또는 이라크, 앤메이와 존 또는 고독한 생활, 삶 또는 죽음을 그려보았다. (p431)

 

 딸깍하고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프랜시스는 조용히 눈을 뜬다. 공이 멈춘 곳은 검은색 칸일까 빨간색 칸일까. 그의 인생 굴곡은 새로운 변곡점을 만나 위로 올라가게 될까, 아니면 더욱 가파르고 빠르게 아래로 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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