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믿지 않는 순간, 나는 진짜 ‘서울사람’이 되었다
나는 파주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일 년 늦은 스물한 살에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그곳에 살았다. 스물한 살 가을부터는 서울에서 자취하는 친구의 집에 얹혀살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긴 했지만 서울을 떠난 적이 없으므로 나의 20대는 서울, 즉 도시의 생활에 적응하는 시기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 서울에서 보낸 날이 늘어갈수록, 한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았고 동시에 서울에서 살아보지 못한 시골 촌놈의 서울에 대한 동경은 조금씩 사라졌다. 여전히 몇몇 동네에서는 어색함과 거리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지만 나름대로 서울과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어느덧 촌티를 벗고 서울사람에 가까워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사람에 거의 근접했다는 자부심 혹은 성취감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는데, 이삿짐을 잠시 밖에 두었다가 홀랑 다 잃어버린 사건이 있고 난 후였다. 나의 처지를 들은 동네 주민은 딱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게 짐을 잘 챙겨야지” “중요한 짐을 밖에 두면 어떻게 해”라고 말했다. 분명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서울과 도시에서나 그러하지 시골에서는 아니다. 시골에서 대문을 잠그지 않는 것은 예삿일이고 짐과 물건은 당연히 마당에 두는 것이었다. CCTV도 방범장치도 없었지만 물건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20년 간 배워온 대로 짐을 밖에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골의 생활 방식은 말 그래도 고릿적 시절 이야기가 돼버린 지 오래고 도시에서는 ‘눈뜨고 코 베이기’ 딱 좋은 상황을 연출할 뿐이다. 어쩌면 도시의 생활에 진정으로 적응하고 도시인으로 거듭남은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을 믿지 않는 대신 CCTV나 방범장치와 자물쇠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작 나는 도시 생활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모르고 있었다.
누구라도 서울을 비롯한 도시를 잠시만 둘러보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도시의 하늘에는 빨래가 널어져 있는 대신 CCTV가 걸려 있고, 대문 주변에는 강아지 대신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와 사설 경비업체가 자리 잡고 있으며, 담벼락에는 얼기설기 엮인 나뭇가지가 아니라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벽돌과 철조망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무리 담장을 높게 쌓고 감시를 철저하게 한다 해도 불안감은 줄어들지 않는다. 자물쇠를 제대로 잠갔는지 걱정하게 되고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곳을 지날 때의 불안감은 온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어쩌면 철조망으로 둘러싼 높은 담장보다 담이라고 보기 힘든 시골의 보잘것없는 벽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 둘을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다. 다른 사람이 나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말이다. 시골의 어설픈 담벼락과 무방비로 열려있는 대문은 불안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어떤 잠금장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하고 안전하게 모두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합의는 한 명만 어겨도 이뤄질 수 없는 것이어서 매일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도시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사람과 신뢰를 쌓으려 노력하느니 불편과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는 편이 남는 장사일지 모른다. 그래서 모두 당연한 듯 잠금장치를 사고 사설경비업체를 고용한다. 보안장치의 발전과 보안업체의 증가는 사회 전반의 신뢰가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지표일지 모른다.
나 역시 서울에 왔으니 서울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물건은 항상 손에 쥐고, 빨래를 마당에 널지 않고,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한다. 일일이 물건을 챙기고 감추는 일이 불편하고, 불안감은 없어지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면 무언가 안전장치를 하나 더 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며칠 전과 똑같이 무언가 잃어버릴 게 뻔하니 말이다. 이제, 그토록 바라던 서울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 사실에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