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와 그 이유
걸작도 졸작도 없다
나에게 멘토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쩌면 아주 많기 때문에 일일이 꼽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뻔한 얘기지만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공자의 고견을 다시 한 번 꺼낼 수 밖에 없다. 즉, 세상의 모든 사람(것)이 나의 멘토이자 스승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한국에 방문했던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는 “졸작들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했다. 졸작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말이다. 공자의 말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의 등장하는 세 사람 중 한 명인 ‘불선자(不善者)’가 콜라니가 말한 ‘졸작’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비록 보통보다 모자라지만 그 사람과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나름대로 안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깨닫는다면 나의 사고와 이해는 한층 더 유연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걸작’과 ‘선자(善者)’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고 뛰어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나의 생각과 세상을 보는 눈은 더욱더 깊고 넓어질 것이다. 방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걸작과 선자의 행동에 담긴 의미와 의도를 나름대로 분석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점은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은 나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지 졸작도 걸작도, 불선자도 선자도 없는 게 아닐까. 졸작과 걸작, 불선자와 선자를 나누는 일은 결국 나에게 달렸다. 공자의 말에 담긴 의미 역시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고정관념과 편견도 배제한 채 모든 사람(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와 열린 마음이 가장 필요한 ‘멘토’가 아닐까.
멘토와 도반(道伴) 사이,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
내 주변에는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 죽비로 내려치듯 항상 따끔한 충고를 해주시는 교수님, 글쓰기의 선배이자 스승이신 기자 선생님, 여자문제와 시사문제는 물론이고 언제든 영화와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 이들 모두는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질문과 반성하게끔 만드는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이다. 항상 가까이 하고 싶다.
좋은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끊임없는 사유만이 있을 뿐이다. 그 사유는 또 다른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은 다시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어낸다. 이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나의 깜냥은 조금씩 커져간다. 그리고 좋은 질문을 갚기(?) 위해 나 역시 좋은 질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또 조금 커진 것이다.
한 교수님으로부터 “질문이 없는 자신을 항상 경계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가슴에 새겨진 후 나는 항상 질문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 해도 괜찮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관해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새로운 생각과 창조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은 질문을 하는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그때는 멘토, 아니 적어도 누군가의 도반(道伴)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도반, ‘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는 의미다.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멘토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반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이자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멘토를 찾기보다는, 멘토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누군가의 도반이 되고 싶다.
짝사랑처럼 나 혼자만 도반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라도 좋다. 어쩌면 더 좋은 일일지 모른다. 내 마음대로, 누구와도 도반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책, 신문, 영화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도반이다. 나는 오늘도 좋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도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