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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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이자 9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 모음집이다. 제목은 적을 만들다, 부제는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축제, 학회, 강연 등 특별한 기회가 생겼을 때 쓴 글들로, 마지막에 글을 쓴 연유와 날짜가 명시되어 있다. 번뜩이는 기지와 백과사전 같은 지식들이 담겨있는 글들은 다른 주제를 담고 있다. 여행기나 에세이집처럼 술술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잠시 멈추고 사유하게 하는 좋은 글들이다.

 

14개의 칼럼 중에 가장 즐겁고 흥미롭게 읽었던 몇 편을 소개한다. 먼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적을 만들다」.

뉴욕의 택시기사가 던진 질문,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 칼럼을 쓰게 했다고 한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거의 자연적인 현상의 측면에서 규명하는 일이 아닌, 그 적을 만들어 내서 악마로 만드는 과정이다.

​고대 로마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적을 만들기는 이방인, 다름의 완벽한 전형인 외국인이 대상이었다. 그리고 민족 간의 접촉확대로 적은 더욱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적은 단순한 이방인에서 기독교와 대치되는 유대인으로 구체화된다. 여자는 문학의 대상이기도 하고 풍자의 대상이기도 했다. 고대,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자는 끊임없이 악마가 되었다. 절정은 중세의 마녀 사냥이었다. 노교수에 따르면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은 이민자의 이름으로, 루마니아인(집시을 적의 이미지로 그리는 현대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적, 그리고 나의 적은 누구인가? 현실을 반영하는 좋은 글이었다. 에코는 사르트르의 희곡으로 마무리한다. 우리는 타자를 적으로 만들고 지상에다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 L'enfer, c'est les autres. 타자는 지옥이다.


밀라네지아나 축제의 간담회에서 발표한 「불꽃의 아름다움」도 흥미로웠다.

 

불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서서히 감소하고 있다. 예전에 불이 수행했던 기능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형태가 맡게 되었다. 우리는 불꽃에서 빛의 개념을 분리했기에, 이제 불꽃은 가스 불(거의 보이지 않는)과 성냥이나 라이터(적어도 아직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촛불(성당을 다닌다면)로만 경험 가능하다.

불의 열기는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며 인류의 문명과 함께 해왔다. 마찰을 통해 발생하기에 강한 성적 의미도 지니며 분노에서 사랑까지 층동의 은유로도 사용된다. 변신의 도구이기도 하고 생명과 죽음, 파괴, 고통의 요소이자 순결과 정호, 더러움의 상징이다. 양면적 속성을 띠는 것이다. 기호학자답게 에코는 신적인 요소, 연금술, 예술의 동기, 현시적 경험, 재생, 현대의 에크피로시스로서의 불을 탐구하며 사고를 확장시킨다.


「보물찾기」는 기독교와 관련한 성물들을 다루고 있다. 예수의 피를 보관하고 있는 벨기에 브뤼주의 성혈 성당은 방문한 적이 있기에 흥미로웠다. 가장 큰 보물찾기는 성배 탐색이겠지만 에코는 2천 년의 시간으로도 부족하다고 끝맺는다. 그리고「천국 밖의 배아들」은 배아의 형성, 원죄의 유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설명한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인데, 중세 교부철학이 논리적으로 성서를 정리하면서부터 지금까지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거리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열과 침묵」, 「위키리크스에 대한 고찰」에서는 사회적 이슈의 본질을 꿰뚫는 힘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음과 검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는데 칼럼이 짧으니만큼 일독을 권한다.

 

내가 만약 내일 신문에 나의 부정행위가 폭로될 것이고 그로 인해 심각한 피해가 나에게 닥칠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어김없이 제일 먼저 경찰서나 역 인근에 폭탄을 설치하러 갈 것이다. 그 다음 날 신문의 주요 면에는 폭탄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것이고, 나의 개인적인 경범죄는 뒷면의 작은 기사로 마무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1면에서 기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진짜 폭탄이 설치되었을지 누가알겠는가! 

14개의 칼럼은 각자 상이한 주제를 담고 있는 짧은 글이지만, 그 깊이 때문에 14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에너지를 요했다. 에코의 글을 읽으며 언제나 드는 생각은, 80대의 지성이 그보다 훨씬 젊은 나보다도 더 활동적이고, 능동적인 사고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럼 중 「율리시스, 우린 그걸로 됐어요」는 말 그대로 읽기만 가능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은 「더블린 사람들」외에는 읽은 적이 없는데! 교수님의 방대한 지식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음이다. 하지만 각 칼럼은 언제 어디서 펼쳐도 독자를 사색의 세계로 인도하며, 이는 진정으로 <읽는 기쁨>을 준다. 많은 글 중에서도, 자극적인 듯 자극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사유>를 요구하고, 글쓴이와의 소통을 요구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지성인 에코가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하며,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 지성이 조금 더 성숙할 즈음,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깨달음을 줄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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