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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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첫 경험은 소중하다. 첫 사랑, 첫 연애, 첫 직장, 첫 아기... 처음이란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뒤잇는 일들에 있어 지표가 되기도 하고 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이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워.〉

 

태양과도 같은 아이, 솔, 솔랑주Solange는 프랑스 남서부 지방 클레브에 산다. 18세기의 고성이 있지만 그 외엔 평범해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 엄마, 아빠는 항상 바빠서 옆집 비오츠씨가 아이를 돌봐준다. 솔랑주 나이 10살, 생리를 시작하면서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신체적 변화와 남녀의 다름에 대해 반응한다. 섹스는 무엇일까 백과사전을 펼쳐봐도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옆집 개 륄리가 다른 개들 밑에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던진다. 아빠의 그것과 비오츠씨의 그것은 다르게 생겼다. 까날 플뤼스에서 포르노를 보다가 들킨다. 해부학적으로는 이해한다. 남자의 끄트머리가 튀어나와 있고 여자는 그 반대이니, 전자가 후자에 들어간다. 이 정도면 알만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해변에서 비웃음 당하던 비오츠 씨를 자신처럼 느끼고 또 보호해주고 싶던 솔랑주는 13살이 되었다. 친구들은 섹스 얘기를 한다. 로즈 어머니가 읽어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떠올린다. 여자는〈소유〉되는 것이던데 나도 나를 누군가에게 주어야 하나.

 

소설은 불친절하다. 이야기는 조각난 기억들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초점은 언제나 섹스에 대한 관심이고 이야기 중반 쯤 아빠는 왜 사라졌는지(이혼으로 추정), 델핀은 왜 자살 기도를 했는지 그리고 엄마가 솔랑주를 옆집에 맡길 수 밖에 없던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솔랑주 역시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독자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ㅡ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너는 돌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그게 진실이야! 286p

 

ㅡ네 가족은 공중분해되고 있는데 너는 아무 생각 없이 편히 쉬고 있어. 호텔 방에 있는 것처럼 마음 편히, 손톱에 매니큐어 바를 생각만 하고, 모든 사람이 너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 287p

 

솔랑주에게 첫 경험은 자랑할만한 것이기도 하고 얼른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이도 느껴진다. 가장 친한 친구 로즈는 첫 경험을 한 후로 왠지 멀리 느껴진다. 어른스럽기도 하고 여자로서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데 없는 외로운 소녀 앞에 〈그럴듯해 보이는〉아르노가 나타난다. 사르트르가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마리화나를 말며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는 이 오빠, 솔랑주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주도 아닌 암캐 취급을 하는 그에게 푹 빠진 소녀는 충격적인 첫 경험을 하지만 무엇이 잘못된건지 모른다. 원래 이런 건가? 처녀를 부담스러워하는 아르노에게 가기 위해, 솔랑주는 어른 남자 비오츠를 끌어들이고 마침내 귀찮게만 느껴지던 처녀를 잃는다.

 

ㅡ팬티를 다시 입을 때, 작은 핏방울 하나가 보인다. 이러려고 그 난리를 떨었다니, 잘하는 짓이다. 289p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에서 마리아 크로스는 레몽 쿠레주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그는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레몽 역시 그녀를 둘러싼 루머에 편승하여 사춘기의 열정을 발휘하려 했었다. 17년이 지나고서야, 그는 사랑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비슷한 관점에서 『가시내』의 비오츠를 보자. 어른들의 태도를 통해 어렴풋이 그를 〈루저〉라고 파악해왔던 솔랑주도 느낄 정도로, 〈사랑〉의 힘은 그에게 생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진실은 어떠했던가. 그가 기저귀를 갈아주며 사랑해왔던 아이는 그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간편했기에 그를 유혹했다. 비극적인 진실 앞에 쓰러진 그의 옆에서 오리고기 조림을 먹을 걸, 생각하는 솔랑주는 잔인할 정도의 이기심을 보여준다. 아르노에게 솔랑주가 정부에 불과하듯이, 비오츠도 그러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아이는 보르도로의 탈출을 꿈꾸며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성가셔 한다.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 『팻 걸』에서 엘레나는 페르난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신의 처녀를 준다. 영화 첫머리에서 엘레나의 동생, 아나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첫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할 거야. 날 사랑하는 척 했다는 걸 알고 슬플 일이 없을 테니까.」

 

첫경험을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사랑하는 이와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상적인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솔랑주처럼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나이스 또한 솔랑주 또래의 아이였다. 결핍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아나이스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선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랑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그 애는 그냥 발랑 까진 애라고 말하고 싶지만은 않다. 10대라고 왜 성욕이 없겠는가? 어른들이 강조하는 피임이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보다는 이제는 탐폰을 쓸 수 있다는게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다만 솔랑주가 헤프다고 생각했던 나탈리가 처녀라는 것, 진실된 순간을 위해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좀 더 씁쓸해졌을 뿐이다.

 

마리 다리외세크가 적나라하게 솔랑주의 내면을 파헤치면서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사춘기, 인생관이 형성되어가는 중요한 시기. 좁지만 꽉 찬 세상 속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영혼을 담은 육체는 어른과도 같지만 아직 그 내면은 보호받아야할 존재이다. 솔랑주에게는 역할상을 보여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부모는 제대로 된 관심을 주지 못했으며, 부모나 마찬가지인 비오츠도 그녀를 이끌고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아빠 친구는 솔랑주의 앳된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아빠는 딸을 불러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하며 피임교육을 한다. 엄마도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준다. 그나마 제대로 된 것처럼 보이는 로즈 부모님도 로즈의 말에 의하면, 잠자리가 없다고 하니 성적인 것에 관심을 쏟는 솔랑주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소외된 솔랑주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같은 아르노에게 이끌리게 된다. 아르노는 될 대로 주워섬기는 것에 불과하건만.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과 욕망의 차이를 구분해냈다. 그녀가 쌓은 다양한 경험과 자아성찰은 가질 수 없는 것, 결핍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속성 그리고 그 덧없음을 알게 했다.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는 아이, 철 없는 솔랑주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불안정한 현재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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