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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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중 「살인자의 건강법」, 「사랑의 파괴」 같은 작품의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다. 명성에 비해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푸른 수염」을 읽기를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다.

 

사튀르닌(25세, 벨기에 출신의 비정규직 이주 노동여성)은 파리 7구에 위치한 저택 내의 욕실 딸린 방을 500유로에 임차하는데 성공한다. 그 방을 거쳐 간 여성들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집주인 돈 엘레미리오(44세, 히키코모리 에스파냐 귀족)가 건 조건은 바로 암실 출입금지.

 

짐을 옮긴 첫 날, 집주인은 직접 요리를 해서 동거인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사튀르닌은 묘한 긴장감 아래서 집주인에 대해 알아 나간다. 취미는 중세 종교 재판 기록 읽기이며 혈통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혈통에 기인한 이유- 내장의 길이가 길어서 우주 여행을 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16세기 면죄부 밀매 또한 필연적이었다던가 하는 얘기들… 사튀르닌은 돈 엘레미리오가 <미치광이>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를 어찌할까. 단지 <가능성>에 불과했던 사튀르닌은 돈 엘레미리오에게 찍히고 만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식사 후, 순금으로 된 잔에 노른자 크림을 채워줬더니…

 

「바로크 양식의 금잔에 담긴 불투명한 노른자 크림이 너무 아름다워요! 노란색과 금색은 …… 가장 광택이 없는 것에서 가장 눈부시게 번쩍이는 것까지 펼쳐진 빛의 색깔 그 자체이기 때문이에요.」

붉은색과 금색, 푸른색과 금색 그리고 노란색과 금색의 차이를 정확히 지적하는 사튀르닌에게 돈 엘레미리오는 엄숙하게 <사랑>을 선언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약간 맛이 간 집주인은 20년 전부터 두문불출하는, 중세시대와 종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하느님의 실체>인 황금의 속성을 정확히 지적한 사튀르닌에게 느낀 사랑의 감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금은 하느님의 실체다. → 에스파냐는 금에 대해 예민하다. → 금을 이해하는 것은 에스파냐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곧 대공작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카르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튀르닌은 루브르 미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고 이것은 예술사 계통에 능통한 것을 의미한다. 여자이고 벨기에인이지만 프랑스에서 꽤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박식한 여주인공은 바로크 잔을 알아보고, 순수하게 아름다운 색채를 감탄했다는 이유로 에스파냐 대공작의 젠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다음날 식사 시간, 여주인공은 남자의 연애사를 알고 싶지 않다며 선을 긋는다. 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인 <암실에 대한 금기>를 깨지 않고자 하는, 자기 보호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사튀르닌은 똑똑하고, 호기심이 많은 여성이며 돈 엘레미리오에게 8명의 여인에 대한 살인 혐의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기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동거인이 원하는 적정선을 넘지 않으면서 아찔한 밀고 당기기를 시도한다. 그녀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면서 고가의 샴페인과 멋진 요리들로 주의를 흩으려 놓은 것이다. 사튀르닌의 죽마고우 코린이 놀러왔다가 놀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간은 오만할 정도의 태도로 남자를 대하는 사튀르닌과 그녀를 이상화하며 숭배하는 듯한 돈 엘레미리오의 모습은 기이할 정도이다. 살짝 맛이 갔지만 호감이 가는 대공작 때문에 코린은 친구를 걱정하며 집으로 떠난다.

 

코린의 우려처럼 사튀르닌은 대공작에게 마음을 주게 되고, 그를 저항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돈 엘레미리오에게 끌리는 감정을 증폭시키게 된다. 하지만 현명한 사튀르닌은 사라진 여덟 여인의 행방을 알아내게 되고,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추리도 성공한다.

 

부와 권력을 소유한 귀족 남성, 엘리트이지만 외국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여성은 원작의 푸른 수염과 그 아내에 대치된다. 원작의 푸른 수염이 계급 차이와 두려움 때문에 합당한 소외를 받았다면,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은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원작의 여성은 푸른 수염의 <선택>을 받아 아내가 되고, 조력자인 두 오빠의 등장으로 위기를 탈출한다. 그러나 사튀르닌은- 돈 엘레미리오가 놓은 <신성한 우연>이라는 덫에 걸리긴 했지만, 주체적 자아를 가진 현대 여성으로서 스스로를 사랑이라는 위기(?)에서 구해낸다.

그리고 암실. 부모의 죽음 이후로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내던 남자는 관계를 맺으면서 암실이라는 은신처를 만들게 된다. 사랑, 자신을 휘두르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음의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비밀과 선언이 실체화된 것이다.

 

다른 이가 만든 요리조차 권력의 요소라 거부하는 이 남자가, <살아있는> 사튀르닌을 암실에 허락한 것은 사랑의 감정이 이를 뛰어넘었음을 보여준다. 선을 넘으면 <사랑>을 가둠으로써 감정의 강제적 종결을 꾀했던 대공작이 진전을 보인 부분이다. 어쩌면 완전한 사랑이란, 또 자신의 이상이란 살아서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사랑을 자신의 암실에 초대함으로써 위대한 혈통의 에스파냐 남자, 교양있는 변태, 매력적이던 돈 엘레미리오는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사랑은 콩깍지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콩깍지가 벗겨지는 날은 지옥이 될 거라는 농담도 함께.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이 너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게 되니까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 몸과 마음을 사리면서, 그 말은 조금씩 잊혀졌다. 팍팍한 삶일수록 아름다움과 로맨스를 동경하게 된다는데 사튀르닌이 미친(?) 순정남 돈 엘레미리오에게 마음을 주면서 느끼는 감정과 나의 감정이 서서히 동화되는 것을 보면 내 삶도 좀 팍팍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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