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자랑을 나가지도 않았고, 한 학급을 대표하는 회장도 아니었기에 크게 준비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수학여행을 기다렸고, 우리 방의 즐거운 밤 문화를 위해 노트북과 영화를 챙겼다. 모든 여학생들이 그랬겠지만 수학여행의 사진들을 위해 새 옷들을 사고, 핸드폰 용량을 비우고 화장품도 새로 리필했다. 시험이 끝난 후 부모님께서는 다른 아이들이 놀 때 나는 공부해야 한다며 중요한 시즌이 될 것이라 강조하셨으나, 수학여행의 설렘 덕분에 나는 부모님과의 바람에 어긋나는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내 인생 ‘마지막’인 수학여행이자 내 평생의 친구들과 가는 ‘첫’여행이니만큼 내가 ‘설렘’에 바친 시간이 후회되지도 아깝지도 않았다.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새벽 5시에 눈을 떠 싼 짐을 다시 점검하고 미리 정해두었던 ‘공항 패션’을 입었다. 학교로 가기위해 ‘수동적’으로 일어나 졸린눈을 비비며 출근을 준비했던 평소와 달리 매우 ‘능동적’으로 외출을 준비했다. 화장도 평소 10분이면 완성하고 떡을 쳤지만 그날만큼은 30분동안 공을 들였다. 나름의 메이크업 센스를 발휘해 본다고 ‘제주바다모래’라는 색상의 셰도우를 눈두덩이에 발라보았다. (나름 예뻤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출발할 시간이 되어 공항으로 나갔고, 공항에서 아이들을 만나 설렘을 공유했다. 평생동안 친구로 남을 우리 반 아이들과 대학 합격 후엔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자는 약속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내 사랑 3반 독어과 친구들과의 첫 여행은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시작부터 활발했다. 비행기에서도 쉴 새없이 사진을 찍었고, 비행기가 이륙할땐 (서울 촌놈처럼 보였겠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비행기가 뜰 때의 신기함보다 우리가 함께 여행을 간다는 신비함이 환호성을 지르게 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우리를 보호해줄 ‘형광맨’들을 만났다. 우리반 형광맨의 외모는 매우 준수하였기에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신비의 도로’였다. 어릴 때 ‘스펀지’에서 보았던 도로였다. 실재로 와 보게 되니 조금 신기했다. 착시효과 때문에 오르막길로 보이지만 내리막길이라서 시동을 끄고 있으면 저절로 내려갔다. 내 기억저장소를 뒤져본 결과 이 곳에 차를 세워두면 차가 굴러가 버린다고 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비의 도로’보다는 길거리의 소들이 좀 더 신기했다. 서울 촌놈들인지라 소는 유치원 때 동물원에서 본 것이 다라서 길거리에 있는 소는 매우 신비한 존재였다. 삼다도 횟집에서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튀김부터 매운탕까지 정말 맛있었다.
배부르게 먹고 ‘에메랄드 빛 푸른 바다를 뽐낸다’는 협재 해수욕장에 갔다. 빛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바위들이 ‘현무암’이라 바위들조차 신기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곳 저곳에서 이방법 저방법 가리지 않고 사진을 마음껏 찍었다. 배경이 예뻐서 였는지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예뻣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다들 너무 예뻐 보였다. 다음으로 간 올레길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도 아니었고, 몇 년전 제주도에 와 올레길만 걷다가 간 기억이 있어 개인적으로 올레길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없잖아있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올레는 또 색다른 맛이었다.
트릭아트전시관에 갔다. 헤이리에서 트릭아트 박물관을 갔었던 터라 큰 흥미 없이 들어섰었는데 헤이리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아름다웠다. 왜 페북스타 커플들이 구지 제주도 트릭아트전시관을 찾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부모님이 섭섭하실 수도 있겠지만 부모님과 함께 갔을 때보다 좀 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노출이 심한’ 그림과 사진을 찍으며 웃을 수도 있고 (일부러 ‘야한’그림과 사진을 찍으며 ‘낄낄’거렸다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여러 명이서 같이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아이들의 넘치는 아이디어로 한 그림에서 다양한 포즈를 감상 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못 찍고 나온 곳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정원에서는 아무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다.
하루의 시간은 생각보다 느리게 흘렀다. 첫날은 금방 지날 줄 알았는데 참 많은 것을 했다는 셍각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우리 반 모든 아이들이 함께 놀았다. 28명이 모두 한방에 모여서 (초등학생 때 매우 즐겨했던) 진실게임과 왕 게임 그리고 마피아까지 정말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10시였다. 10시면 평소 야자를 막 끝낼 시간인데 이렇게 모두가 웃고 떠들고 있다는게 신기했다. 방으로 들어와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았고, 우영이가 준비해온 카드게임을 했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게임이었는데 생각보다 매우 재미있었다. 수학여행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었고 내 인생에 있어서도 정말 기억에 남고 재미있었던 날들 중 하루였다.
사실 둘째날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뭔가 즐긴다는 느낌보다는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점심과 저녁(해물과 삼겹살은 비려서 잘 먹지 못한다.)이 내가 거의 먹지 못하는 메뉴였기에 나는 하루종일 배가 고파 힘이 나질 않았다.
오전에 한 감귤따기 체험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귤먹기 대회가 개최되는 덕분에 따가운 햇볕아래 지루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감귤 따기가 재미있는 체험으로 변할 수 있었다. 우리반에서는 귤 하면 ‘정지혜’고 ‘정지혜’ 하면 귤이라는 고유명사가 한 분 존재하신다. 겨울엔 귤을 얼마나 많이 먹어대는지 귤의 색소 때문에 몸까지 노랗게 변하기 까지 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이 특징을 따서 노랗다는 뜻의 ‘gelb’를 별명으로 지어주었었다. 우리반은 ‘고유명사 지혜’를 믿고 출전 시켰으나 예상치 못한 강적을 만나 패배의 쓴 맛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지혜는 껍질도 안 까고 흡입했는데 우승을 차지한 1반 친구는 기계적으로 귤을 ‘마시듯’ 먹는 바람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졌지만 즐거운 시간이었고 덕분에 귤따기 작업도 재미있을 수 있었다.
민속촌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사진들을 남겼다. 페이스북에서만 보던 자세로 우리반 14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민속촌엔 푸르른 언덕과 아름다운 건물들은 우리가 사진을 찍기 좋은 최고의 풍경을 제공해 주었다. 민속촌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다가 어느새 안전요원인 ‘형광맨’과 친해졌다. 이때 사진 찍어달라고 “도와줘요 형광맨!”이라고 부르던 것을 시작으로 짧은 시간동안 안전요원과 정이 많이 들었다. 어색했던 형광맨은 어디가고 서로에게 농담까지 던지는 사이가 되었다가 형광맨과 ‘빠이빠이’를 한 지금은 문자와 페이스북으로 연락할 만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제주도 레일바이크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었다. 정선 레일바이크를 즐겨 타는 나는 동굴도 지나고 내리막길도 있고 앞차 뒤차와 부딪히기도 하는 레일바이크를 상상했었는데 기대에 많이 못 미쳤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제주도 레일바이크’의 신비한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페달의 진실이었다. 레일바이크의 페달을 열심히 돌리며 경쟁했던 아이들에겐 너무나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 페달의 역할은 ‘속도 증진’이 아니라 ‘소리 키우기’ 였다. 페달의 역할에 의구심을 갖고 레일바이크 요원에세 물어봤더니 정말 시크하게 ‘소리만 키운다’고 답변해 주었다. 너무 일찍 진실을 알아버린 우리 조원들은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을 감상 할 수 있었다.
에코랜드는 정말 아름다웠다. 기차를 타는 내내 ‘삶의 여유’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란 생각을 했다. 바람 불고 나는 기차를 타고 달리고 있고 바깥의 꽃과 건물들은 동화처럼 예쁘기만 했다. 아이들과 동영상 촬영도 하고 사진도 찍어 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에코랜드에 있었던 시간들은 내게 ‘즐거웠다.’란 말보단 ‘행복했다’란 말이 좀 더 적합할 듯 하다.
둘째날의 하이라이트는 레크레이션이었다. 사실 중학교때 장기자랑들보다 상당히 실망스러운 공연들이었지만 레크레이션 마지막을 장식해준 우리반의 태양 ‘마테최 (갓 수최)’ 의 리듬에 몸을 실은 댄스는 수학여행동안 못 다쓴 목청을 다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둘째날밤은 매우 뜨거웠다. 처음으로 여자 12명이 함께 치킨을 뜯었다. 한 방에 모여 ‘몰래’인 듯 ‘몰래’ 아닌 시간을 보냈다. 2인 침대에 12명이 다같이 올라가서 사진도 찍고 추한 몰골(?)로 거리낌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이 친해졌구나 란 생각을 했다. 밤이 늦었을 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우리 방원들은 4시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영화를 보고 밤을 새고 말겠다는 약속은 또 지키지 못한 채 잠들어 버렸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수학여행 마지막날은 ‘오설록‘은 녹차를 좋아하는 내게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녹차를 사랑하는 나와 친구들은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고 라떼 가루까지 샀다. 비싸긴 했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맛 볼수 없는 깊은 맛이었다. 녹차를 싫어하는 정지혜동지 조차 맛있게 먹어 주셨으니 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또 부족했다. 녹차밭에서 사진도 못 찍었고 제주도 녹차제품을 주로 다룬다는 이니스프리(화장품 로드샵 중 하나)도 들를 수 없었다. 그러나 ’녹차덕후‘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즐거운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는 걸 우리의 아인슈타인은 증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몸소 체험했다. 나의 사랑하는 3반과 떠났던 여행은 그들과 함께였기에 좋았고, 그들과 함께였기에 재미있었다. 당연히 그 어떤 날들보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나는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갈 비행기의 문 앞에 서있었다. 다시 트렁크를 돌려서 제주도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현실에 순응하는 이미지라 학교가 원하는 대로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곱게 탔다. 비행기에서 아이들은 3일간의 추억 팔이를 하며 몇시간 뒤로 돌아가 다함께 숙소에서 몇 시간만 더 놀고 싶다며 툴툴 거렸다. 그러나 언제 툴툴 거렸냐는 듯이 모두들 금방 곯아 떨어져버렸다. 그리고 나의 학창시절 마지막 수학여행은 내년에 있을, 더 재미있을 수련회를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