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가섭은 아내를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교단 안에서 그녀와 함께 머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허락을 구해 근처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아직 비구니 교단이 정식으로 생기기 전이었기에 그녀는 홀로 수행을 하면서 살아갔다.


속세의 아내에게 의리를 지키다
진리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바람은 그 누구보다 간절했지만 여전히 너무나 뛰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는 교단의 비구들은 물론 사람들로부터 갖은 모략과 중상을 받았고 탁발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마하가섭은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 뒤, 매일 자신이 탁발한 음식의 반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고, 홀로 수행을 함에 있어서 몸이 쇠약해지거나 억울한 불편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주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여인으로써 뛰어난 아름다움과 수행에 대한 곧은 심지를 지녔음에도 마하가섭의 부인이 왜 이토록이나 힘겨운 길을 걸어야 했는지 의문이 들곤 한다. 만약 그녀가 같은 조건을 지니되 남자의 ‘몸’을 하고 있었다면, 그토록 힘겹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10년이 넘도록 그녀와 순결한 부부이자 도반으로 살아왔던 마하가섭은 오히려 ‘출가’ 후에 발생하는 이런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세속의 잣대와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교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속가의 아내를 머무르게 하고, 매일 같이 탁발한 음식을 나눠주며 보살피는 것은 출가 수행자로써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마하가섭은 비구들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조용하면서도 당당했다. 부부로 살면서도 여인의 육체에 대한 욕망에 초탈했던 그는 지극한 마음으로 가련한 중생을 보살피거나 같은 수행자의 입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도반을 돕는 것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마하가섭의 이런 면이야말로 출가 후 몰래 아내를 만나 관계를 갖거나, 아내를 잊지 못해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했던 다른 비구들과 확실하게 비교가 된다.

마하가섭의 아내는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파제파티를 위시하여 석가족 여인들이 단체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비구니 교단이 만들어졌을 때 곧바로 출가하였다. 비록 마하가섭은 여인의 출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비구니 교단이 만들어짐으로써 속가의 아내는 마침내 수행을 할 최고의 장소를 찾았다. 부처님은 비구니가 된 마하가섭의 아내를 위해 묘현경(妙賢經)을 설해 주시며 수행 정진할 것을 격려하셨다. 그 후 그녀는 부지런히 정진한 끝에 자신의 과거 생을 모두 기억해내었고, 이로 말미암아 5백 비구니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으며 마침내는 부처님께 칭찬을 받았다.


거지 노파에게 가난을 사다
마하가섭은 누구보다 여성에 대하여 엄격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부처님께 여인의 출가를 허락받아 비구니 교단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난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경전을 보면 대립이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으로 아난의 잘못을 지적한 일화들이다. 그래서 여인들과 비구니들은 마하가섭을 싫어하고 아난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마하가섭이 모든 여인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마하가섭이 먼저 여인에게 다가간 적도 있었다. 마침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코살라국에 가서 자리를 비우시고 그에게 베르바나(죽림정사)의 주지 소임을 맡기셨을 때였다. 그때 마하가섭은 라자가하(왕사성)을 출입하면서 탁발을 할 때 가난한 집만을 골라서 다녔다. 가난한 사람들은 전생에 복을 짓지 못해 기본적인 즐거움조차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데, 이번 생에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복을 짓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그는 어떤 거친 음식도 가리지 않고 기꺼이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보시를 하여 복을 짓도록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하가섭은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볼품없이 마르고 늙은 여자로 집도 없고 친척도 없어 날이 밝으면 사방으로 음식을 구걸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했고 날이 저물면 풀밭이나 길가에서 낙엽을 주워 모아 몸을 가리고 잠을 청했다. 한마디로 거지 노파였다. 굶주림이 생활인 노파는 구걸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부잣집 담벼락을 기웃거리다가 때가 되어 쌀 씻은 물이 흘러나오면 그것을 손으로 떠서 마시며 배고픔을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쌀뜨물을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는 노파에게 마하가섭이 다가갔다. 여인은 깜짝 놀라 몸 둘 바를 몰라 황망하게 말했다.

“나 같은 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찌 사문께서 이곳을 오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저에게 이르시기를 가장 가난한 사람을 찾아 걸식을 하여 그 공덕으로 가난을 벗도록 복을 짓게 하라고 하셨기에 왔습니다.”

노파는 마하가섭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신을 일부러 찾아온 고마움에 울었고, 그에게 보시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서글퍼 울었다.

“저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사문께 보시할 것이 없습니다.”

“보시할 마음이 있다면 이미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은 이미 그대로 훌륭한 옷입니다. 지금 당신이 먹고자 하는 쌀뜨물을 저에게 주신다면 제가 당신의 가난을 사겠습니다.”

노파는 마하가섭에게 정성을 다해 담벼락에서 흘러나온 쌀뜨물을 떠서 바쳤다. 노파에게 쌀뜨물을 받은 마하가섭은 맛있게 마셨다. 그 모습을 본 노파의 마음속에 기쁨이 차올랐다. 공양을 마친 마하가섭은 노파에게 부처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노파는 공손한 자세로 법문을 다 듣고 난 뒤, 부처님께 귀의하였고 지극한 신심으로 내어 날마다 부처님을 향해 예를 올렸다. 며칠 후, 노파는 지독한 가난과 고생으로 가득한 삶을 마치고 죽음을 맞았고 마하가섭에게 쌀뜨물을 보시하고 부처님께 귀의한 공덕으로 천상에서 태어나 복을 누리게 되었다.


마하가섭과 여인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보면 마하가섭이 모든 여자를 무조건 다 싫어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여인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뽐내고 이를 무기로 욕망을 부추기며 타락을 유도하여 안락을 추구하는 여인들의 보편적인 습성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기억해 낸 마하가섭의 아내, 밧다까삘라니 비구니는 몇 번에 걸쳐 태어났던 여인으로 천상에서 태어날 때나 지상에서 태어날 때나 항상 부처님께 공양을 하며 그 공덕으로 남보다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 모든 복을 누린 끝에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고통을 받는’ 몸으로 태어났다. 한편 가난하기 짝이 없는 노파는 처음으로 복을 지어 천상에서 여인으로 태어났다. 건강함과 젊음,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그녀는 여인으로써의 온갖 즐거움을 실컷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즐거움이 다한 뒤에, 그녀는 어떤 생을 받게 될까.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다.

마하가섭의 아내와 가난한 노파를 떠올릴 때면 결코 ‘천상’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복의 전부가 아님을, 결코 ‘아름다움’이 여인이 지닐 수 있는 복의 전부가 아님을 새삼 느낀다. 아마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하가섭은 전생에 수행자가 되기를 서원하고 ‘두타(頭陀)’라는 수행방법을 미리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처님을 만나서 예배를 드렸을 때 마하가섭이 했던 말이 다소 과장이라고 느낀 사람은 부처님의 대답에 더욱 놀랄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마하가섭보다 훨씬 강하다.

“아는 척 하거나 본 척 하는 거짓된 사람이 그대처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예배를 받는다면 그의 머리는 일곱 조각으로 깨어질 것이다. 나는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보지 못했으면서 본 척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아라, 그대의 예배를 받고도 터럭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았기에 알고 본다고 말하는 나는 그대의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고 그대는 나의 제자다.”

부처님의 말씀에 마하가섭이 얼마나 기뻐했을 지를 생각하면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남자라고 하더라도 저절로 ‘엄마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부처님과의 은밀한 만남과 8일간의 시간 그리고 깨달음
부처님은 마하가섭과의 만나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에도 다른 수많은 제자들이 기다리는 교단으로 곧바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마치 평생을 그리워했던 사람들이 만나 둘만의 밀월여행을 떠난 것처럼 부처님은 마하가섭은 8일 동안 오로지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냈다. 마하가섭과 만나기 전, 부처님은 몰래 교단을 빠져나오셨기 때문에 아무도 부처님이 계신 곳을 몰랐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목건련이 신통력을 발휘했다면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 아마 알았더라고 그는 질투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을 믿음직한 제자였다. 그렇게 천명이 넘는 제자들은 알지 못하는, 의발제자와 부처님 사이의 ‘신비주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였고 마하가섭은 곧 깨달을 자였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1:1 개인지도로 마하가섭에게 사성제와 12연기법을 가르쳤다. 마하가섭은 가르치는 족족 마른 논에 비가 스며들 듯이 흡수했다. 진리의 가르침에 목이 말랐던 마하가섭의 성취는 빨랐다. 부처님은 압도적으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마하가섭에게 그가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교만을 하나하나 말씀하시며 그것을 남김없이 버리도록 섬세하게 이끌어주셨고, 출중한 외모와 몸매에 대한 자신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낱낱의 신체부위를 각각 관찰하며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실상을 파악하도록 가르쳐주셨다.
두 사람에게는 하루하루가 완전히 달랐다. 어제의 마하가섭은 오늘의 마하가섭이 아니었고, 오늘의 마하가섭은 내일의 마하가섭이 아니었다. 그렇게 가섭은 부처님과 만난 지 8일 만에 번뇌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라한이 되었다.


부처님과 가사를 교환하다
그렇게 행복한 8일간의 시간을 마친 후, 두 아라한은 함께 라자가하(왕사성)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따가운 햇살을 피해 들어간 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에 앉기 전, 마하가섭은 얼른 가사를 벗어 네 겹으로 접은 뒤 부처님이 그 위에 앉으시도록 했다. 지긋한 미소를 지으며 마하가섭을 바라보던 부처님께서는 자리에 앉아 그의 가사를 만지며 말씀하셨다.

“그대의 가사가 참으로 부드럽구나.”

부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마하가섭은 가사를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입고 계시던 분소의(묘지에서 버려진 헝겊들을 기워서 만든 옷) 가사를 청했다. 부처님은 이를 허락하셨다. ‘부처님이 직접 입으셨던 가사’를 받음으로써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뒤를 이을 존재라는 확실한 물증을 얻었다. 이것이 최초의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가사’는 스님들 사이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증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마치 부부에게 있어 결혼반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스님들에게 ‘가사’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상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사실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만남은 그 어떤 뜨거운 사랑을 가진 연인과 부부보다 훨씬 극적인 부분이 많다. 한창 나이의 젊고 잘 생긴 두 남자의 첫 만남부터 둘만이 함께한 8일 동안의 시간 그리고 서로의 가사를 교환하기까지 출가한 수행자이자 아라한이 아니라면 오해를 사기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꿈결 같고 달콤한 만남 이후, 마하가섭은 다른 제자들처럼 항상 부처님과 함께 생활하지 않고 홀로 수행을 하는 것을 즐겼다. 마하가섭은 기약 없이 수행을 위해 떠났다가 부처님께 돌아왔고, 그때마다 부처님은 그가 어떤 몰골을 하고 있어도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실 정도로 환영을 하셨다.


아름다워서 슬픈 여인, 마하가섭의 아내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지 1년, 부처님이 성도하신지 3년째 되던 해 부처님은 속세의 부친인 숫도다나왕(정반왕)의 간곡한 뜻에 따라 고향 카필라성으로 향했다. 부처님은 속세에 많은 가족들이 있었던 반면, 외동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자식도 없고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 출가를 한 마하가섭에게는 단 한 명의 가족, 아내밖에 없었다. 부부의 인연은 시작도 끝도 없었지만, ‘결혼’이라는 공동의 방해물 앞에서 수행이라는 같은 꿈을 바라보며 공부했던 두 사람에게는 ‘도반’으로써의 강한 정이 있었다.

마하가섭은 부처님이 속세의 가족을 만나는 것을 보자 문득 출가 전, 좋은 스승을 만나면 데리러 올 테니 그때 함께 수행자가 되기로 했던 아내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집안을 돌보고 있을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마하가섭은 재산도 처분하고 함께 수행자가 되길 약속했던 아내의 사는 모습도 보고 오겠다고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은 뒤 고향으로 향했다. 부처님께서는 흔쾌히 허락을 하시며 빨리 돌아오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함께 있어도 참으로 애틋한 스승과 제자이다.

고향에 도착한 마하가섭은 몇 년 동안이나 그의 소식이 없자 아내가 기다리다 못해 재산을 처분하여 친척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출가를 했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좋은 스승을 만나서 큰 성취를 이룬 마하가섭은 그 동안 수행자가 되기를 꿈꾸던 아내를 찾지 않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아내가 출가 후 자신처럼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하가섭은 물어물어 그녀가 제자로 있는 한 외도의 무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가는 길에 들어보니 아내가 있는 곳은 발가벗고 사는 외도의 무리로써 그녀는 젊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온갖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가서 보니 겉모습만 수행자인 그들은 수행을 핑계 삼아 젊고 아름다운 마하가섭의 아내에게 온갖 수모를 안겨주고 있었고, 아내는 ‘수행’이라는 꿈을 위해 수치와 괴로움을 참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하가섭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하가섭은 효자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출가수행’을 하기로 결심했던 그에게 부모님의 뜻에 어쩔 수 없이 따랐던 10여 년간의 결혼 생활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크게 슬퍼하기 보다는 마침내 출가를 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부처님과 반대로 마하가섭에게는 부모가 출가에 ‘장애’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출가가 늦어졌다고 해서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지역과 일족의 지도자 겸 가장이라는 지위를 내려놓고, 지혜로운 아내에게 집안과 재산을 맡겨놓고 자신이 좋은 스승을 만나면 데리러 올 테니 함께 수행을 하자는 약속을 하고 솜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최고의 아들, 최고의 남편에서 최고의 제자로
훗날 부처님이 반열반에 들어가신 후, 승단의 지도자가 된 마하가섭이 500명의 장로들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막무가내로 그저 다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단계적으로 마무리를 잘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부모님의 소원대로 ‘결혼’을 했으니 효자요, 결혼을 하고 나서는 출가수행을 원하는 아내와 함께 세속적인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아내에게도 최고의 동반자였다. 또한 일족의 가장이며 지역의 지도자라는 자리는 버렸지만 그를 의지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을 버리지 않았고 아내에게 위탁하여 소위 자신이 없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적응기간’을 주었으니 일족에게도 책임감 있는 현명한 지도자였다.

마하가섭은 그의 나이 서른이 넘어서 출가를 했다. 그가 출가할 무렵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별을 보고 성도(成道)하여 깨달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만남이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부처님의 의발제자라는 인연을 가진 마하가섭이 나타날 때까지 부처님께도 약간의 시간과 준비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출가를 했지만 부처님을 만나지 못해 평온을 찾지 못해 마하가섭이 방황 아닌 방황을 하는 동안 부처님은 반대로 그를 만날 준비를 착착 하고 계셨다.

재가 제자로써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의 후원과 귀의를 받고, 베르바나(죽림정사)라는 머물 곳이 생기고, 사리불과 목건련이라는 걸출한 상수제자들이 이끄는 천여 명의 승가가 생기기까지의 시간은 고작 2~3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출가를 하고 스승을 찾았으나 진리라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해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던 마하가섭에게 2~3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상 가장 멋진 이 두 남자는 정해진 운명대로 만났다.

성도 후,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갈구하는 또 갈구하지 않더라도 가르침이 필요한 제자들을 위해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법륜을 굴리셨다. 항상 ‘고요한 수행’을 중요하게 말씀하신 부처님이셨지만 초기에는 정말 워커홀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정말 지혜롭고 신통한 사리불과 목건련을 제자로 맞이한 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자질구레하고 어지간한 일들은 그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처님은 마하가섭을 맞이하러 가셨다.


역사상 가장 멋진 두 남자의 운명적인 만남
만약에 타임머신이라는 것이 발명되어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면 가장 보고 싶은 장면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만남’이다. 두 번째로 보고 싶은 것은 삼국지 적벽대전의 주역인 주유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주군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손책의 만남이다. 멋진 남자들의 만남은 정말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부처님과 마하가섭은 길에서 만났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하가섭이 지나가게 될 길에 부처님이 의도적으로 미리 앉아계셨다. 예정된 만남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승단을 빠져나와 라자가하(왕사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길가 나무 아래에 앉아 마하가섭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나 간절하게 스승과 깨달음을 구하는 마하가섭과 만났다. 부처님은 마하가섭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가 의발제자가 될 것을 알고 맞이하러 나오셨던 것처럼, 마하가섭도 길가 나무 아래 앉아 계신 부처님을 보자마자 자신의 스승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하가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처님께 가서 두 발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때까지 마하가섭은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석가족의 성자에 대한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눈이 높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도도한 마하가섭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발에 이마를 댄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더욱 멋졌다.

“가까이 오라, 그대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이미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매개로 염화미소를 주고받기 전, 첫 만남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확인했던 것이다. 마하가섭과 부처님의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은 부처님의 반열반 이후까지도 계속된다. 참으로 감격스럽다. 부처님의 말씀이 끝나자 마하가섭은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참지 못해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며 말했다.

“저는 카샤파 종족 카필라와 수마나데위의 아들 핍팔라야나입니다.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당신은 진정 저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의 제자입니다.”

지금의 스승과 제자라는 개념으로 생각했을 때, 마하가섭의 행동이나 말이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승’을 찾기 위해 마하가섭은 집 안에서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왔고, 출가 하고 난 이후에도 2년이 넘는 세월을 방황했다.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스승과 가르침을 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스승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하가섭의 어린 시절 이름은 핍팔라야나(pippalayana)였는데 이는 그가 핍팔라(pippala :畢鉢羅)라는 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것을 기려서 불렀던 ‘애칭’이었다. 대부분의 명망 높은 바라문들이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나 종족의 이름을 갖는 것처럼 마하가섭도 대를 이어 그가 속한 종족을 대표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성장하자 어린 시절의 이름 대신 그가 속한 종족, 마하가샤파(Makasyapa)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마하카샤파라 불리게 되었다.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마하가섭(摩訶迦葉)이다. 그 외에도 마하가섭파(摩訶迦葉波), 대가섭(大迦葉), 대가섭파(大迦葉波)라고도 한다.


모든 것을 갖춘 남자의 한 가지 고독
어마어마한 집안의 외아들로써 마하가섭이 얼마나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 기대를 듬뿍 받으며 자랐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랑 속에서도 그가 결코 버릇없는 아이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함과 비범함을 드러냈던 마하가섭은 부모님의 전폭적인 후원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8세 때 바라문의 계조(戒條)를 외웠으며 제사법은 물룬 산술, 천문, 지리, 기상, 춤, 음악 등 못하는 것이 없는 아이로 성장하였다.

마하가섭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준수한 청년이 되어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의 부모는 하루빨리 좋은 여자와 맺어주어 후손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마하가섭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아이들과 놀기를 싫어했을 뿐 아니라 세속의 환락과 남녀 간의 정욕을 더럽게 생각했다. 자신의 성품을 잘 알았던 그는 일찌감치 출가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생각하여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아들로써 정성껏 모시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출가를 할 생각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하나뿐인 아들이 출가를 하겠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뜻밖이었던 마하가섭의 부모는 깜짝 놀라 더욱 강하게 혼인을 추진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아들이 뜻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마하가섭은 결혼을 피하기 위해 황금으로 실물크기의 완벽에 가까운 여인을 만든 뒤, 그녀가 자신의 이상형이며 ‘이런 여자’가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결혼을 원하는 부모의 뜻을 잠시라도 늦추기 위해 실물크기의 여인을 황금으로 빚다니, 과연 마가다국 제일의 부자집 아들이 아니라면 생각해낼 수 없는 작전이다. 그런데 더욱 대단한 것은 그의 부모가 결국 아들이 말한 ‘그런 여자’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마침내 마하가섭은 더 이상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아버지가 결정해준 맛다국 사갈라의 꼬시야 종종 장자의 딸 밧다카필라니와 결혼하였다.


출가의 뜻을 둔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고르고 고른 며느리의 정체

마하가섭은 결혼과정은 부처님과 닮은 점이 많은데, 부처님 역시 스무살 무렵 출가의 뜻을 두었으나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바람을 이기지 못해 출가 전, 결혼을 하셨다. 하지만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결혼생활을 사뭇 달랐는데, 부처님이 결혼 생활을 통해 아들을 하나 얻으신 것과 달리 마하가섭은 결혼생활 내내 청정함을 유지하였다. 그가 출가 전, 무려 12년 동안이나 정결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의 덕이 컸다.

바라문답게 마하가섭의 결혼은 중매였다. 밧다카필라니는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빼어난 성품을 지녀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아들을 위해 고르고 고른 며느리는 알고 보니 결혼에 뜻이 없고 마하가섭과 마찬가지로 출가에 뜻을 둔 여인이었던 것이다. 과연 마하가섭의 부모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아들과 꼭 맞는 천생연분을 골랐던 것이다.

신혼 첫날, 손끝하나 닿지 않은 채 밤새도록 마주앉아 밤을 새운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이 같은 것을 알고는 부부의 모습을 유지하되 서로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다른 침대를 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플라토닉’한 부부생활을 마하가섭의 부모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들이 인생의 즐거움을 기꺼이 모두 누리기를 바랐던 마하가섭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하가섭 부부의 방을 찾아와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은 뒤 침대 하나를 아예 부숴버렸다.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 부부가 사는 법
그러자 두 사람은 차마 침대를 다시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침대를 쓰되 결코 몸을 섞지는 말자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이를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은 잠자는 시간을 정했다. 초저녁부터 한밤중까지는 마하가섭이 침대에서 잠을 잤고, 한밤이 지나서는 아내가 침대를 사용한다는 규칙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매번 시간을 지킬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매일 밤, 침대 가운데 꽃다발을 놓고 잠을 잤다. 마하가섭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두 사람이 출가를 할 때까지 꽃다발은 한 번도 헝클어진 적이 없었다.

한번은 마하가섭이 한참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곁에서 아내가 깊이 잠들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검은 빛이 도는 독사 한 마리가 침대 밑에서 나와 혀를 날름거렸다. 팔 하나를 침대 밖으로 늘어뜨린 채 단잠에 빠진 아내와 독사의 거리가 가까워 금방이라도 물릴 것 같았다. 그 상황을 발견한 마하가섭은 급히 옷을 벗어서 옷으로 아내의 팔을 잡아 침대 위로 올려 주었다. 혹시라도 맨살이 닿지 않도록 주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에 잠에서 깬 아내는 옷을 벗고 있는 마하가섭을 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마하가섭이 이제까지의 약속을 어기고 욕망을 누리고 싶어 했다고 생각해 근엄하게 꾸짖었다. 마하가섭은 아무 설명이나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아내의 책망을 들었다. 후에 마하가섭이 독사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었으며, 맨살을 닿지 않기 위해 옷을 벗어 팔을 올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그의 인품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하물며 오해를 하여 비난하는 자신에게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큰 존경의 마음이 솟구쳤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오해를 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다른 부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생활이 1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마하가섭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치른 뒤에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서로의 머리를 깎아 준 것이었다. 드디어 출가의 시간이 온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처님의 제자 중 생사를 벗어나 사과(四果)를 이룩하고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든 아라한이 1200명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뛰어난 ‘아라한’이 500명이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으뜸이었던 10분을 10대제자라고 부른다. 아라한이 된 제자 1200명 중 뛰어난 500명 안에 들어가기까지 경쟁률은 약 2.4:1, 둘이나 셋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 500명 중에서 10대 제자 안에 들려면 50:1이라는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처음 1200명의 아라한 중에서 으뜸가는 10명이라고 하면 120: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이다. 이 정도라면 지옥 같다거나 살인적이라고 불리는 입시나 취업 경쟁률을 너끈히 뛰어넘을 정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10대 제자라고 불리는 분들은 두말할 것 없이 최고 중의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꽃보다 남자>의 F4를 닮은 마하가섭, 아난, 사리불, 목건련
하지만 2명만 모여도 알게 모르게 승부근성이 발휘되고, 비교하게 되는 것이 본능이다. 그런 중생의 본능에 충실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10대 제자 중에서도 유독 두드러지는 인물이 4명이 있으니 가히 10대 제자 중의 ‘F4(만화 <꽃보다 남자>에 등장하는 말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등학교에서 월등하게 뛰어난 미모와 권력과 부유함을 꽃미남 4명을 일컫는 말)’라고 할만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F4' 중에서도 다시 두드러지는 2명의 남자가 있다.

앞서 소개했던 사리불과 목건련은 상수제자이자 실질적으로 부처님의 뜻을 알고 승단을 이끌었던 쌍두마차라 할 수 있으니 당연히 10대 제자 중 F4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두드러지는 2명에 속하지는 않는다. 지금 소개하려는 마하가섭이야말로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존재감이며 지위를 비롯하고, 출가 전 집안이며 환경 등을 두루 고려했을 때 F4의 압도적인 리더, 구준표(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한 ‘한국형’ 이름. 원작의 이름은 ‘도묘지 츠카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잘 생긴 외모로 유명한 아난은 F4 중에서 ‘구준표’와 전혀 다른 부드러운 매력과 사랑의 라이벌로 주인공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윤지후(원작의 이름은 ‘하나자와 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마하가섭, 아난, 사리불, 목건련은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 신통, 수행, 포교뿐만 아니라 활약이며 인지도, 출가 전 출신배경, 외모 등에 있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F4라고 할 수 있다. 구준표와 윤지후가 같은 F4의 멤버였으면서도 때로 대립하고 티격태격 하는 관계인 것처럼 마하가섭과 아난도 가장 가까우면서도 은근히 예민한 관계였다.


F4의 리더, 구준표와 마하가섭의 공통점
마하가섭이 얼마나 F4의 리더, 구준표와 닮았는지, 얼마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비교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출가하기 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하가섭은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던 시절,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가하(왕사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하사타라 마을에서 이름 높은 바라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가다국에서도 제일가는 부호 느야그로다(Nyagrodha) 바라문이었는데 그 부유함의 정도가 마가다국 국내 장자(경제력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선량함과 덕을 모두 갖춘 오늘날의 ‘명망 높은 재벌’) 수준이 아니라 중인도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부처님보다 신분이 높은 바라문을 비롯하여 왕과 장자 등 권력과 지위와 재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꼽았을 때에도 마하가섭의 집안은 압도적이었다.

마하가섭의 탄생은 부처님의 탄생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부처님의 생모이신 마야부인이 산달이 가까워오자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진통을 느껴 보리수 아래에 산실을 마련하고 왕자 싯다르타를 낳았던 것처럼 마하가섭도 나무 아래서 태어났다. 마하가섭의 어머니는 산달이 가까워진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던 중 진통을 느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커다란 핍팔라(pippala:畢鉢羅) 나무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그때 공중에서 홀연히 하늘의 옷(天衣)이 내려워 나뭇가지에 걸쳐졌고 자연스럽게 산실이 마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하가섭이 태어났다.


승단을 이끈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비결
그의 어머니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마하가섭을 낳은 핍팔라(pippala:畢鉢羅) 나무는 칠엽수(七葉樹)로 그 근처에 커다란 굴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굴을 핍팔라 굴, 즉 칠엽굴(七葉窟)이라고 했는데 이 굴이 훗날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 후, 500명의 장로들이 모여 제1차 결집을 했던 장소로 유명한 바로 그 굴이다. 정원 부근에 500명이 모일 정도로 커다란 굴이 있다니, 마하가섭의 어머니가 집안이 아니라 정원에서 그를 낳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와 닿는다. 아마도 진통을 느낀 후,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정원이 크고 넓었던 것이리라.

부처님의 의발을 이어받아 결집을 주도한 사람이 마하가섭이었다. 그가 일사천리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500명의 인원이 모여서 밤낮없이 회의를 할 편안하고 적절한 장소를 제공하고, 그 뒷바라지를 살뜰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도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자들이 모여서 화려하게 가든파티를 하는 모습이 나오곤 한다. 결집은 결코 파티도 아니고 화려하지도 않았겠지만 자신의 집 안마당에 500명을 초대할 수 있는 남자는 오늘날에도 그리 흔치 않다. 출가 후, 재산을 정리하고 두타행(頭陀行)을 즐기며 물질적인 것을 철저하게 벗어났던 마하가섭이었지만 그의 집안과 재산은 부처님의 뒤를 이어 그가 승단을 이끌어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500명의 장로를 결집시키고 밤낮으로 회의를 하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을 일을 그토록 쉽게 해낸 마하가섭을 떠올릴 때면 재력이 주는 자유와 카리스마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각한 것을 곧바로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부자집 아들’이라는 마하가섭의 출신이 멋지고 부러운 것을 넘어 그의 존재가 승단에게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