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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

 
수상이 된 후 마거릿의 권위적이고 독단적이며 주변을 배려할 줄 모르는 태도는 더욱 강해졌다. 그것은 ‘영국병’을 고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마거릿이 가진 원래 품성이기도 했다. 영국에 ‘영국병’이 있다면, ‘영국병’을 고치고자 했던 마거릿에게는 이른바 ‘대처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쌍벽을 이루는 성공 강박증이 있었다. 수상으로써 마거릿이 영국병을 매로 다스리는 수상이었다면, 남편으로서 데니스는 수상이자 아내인 마거릿의 ‘대처병’을 사랑으로 감싸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최초의 여성 수상과 그녀의 외로움을 위로한 남편 

 


마거릿은 자신이 성공한 것은 운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분과 가난이라는 물리적인 어려움을 의지와 노력으로 이겨냈던 그녀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대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면 견디질 못하고 가차 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또한 그녀는 모든 스케줄은 하루에 네다섯 시간 취침이면 충분한 자신의 체력에 맞췄고 부하직원들을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 피곤에 찌든 보좌관들은 남몰래 치를 떨면서도 감히 그녀 앞에서 대놓고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다.
사실 마거릿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수상이었고 그래서 경직되고 침체된 영국 사회에 많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도저히 실현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포용하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화 등으로 풀어가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시키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비난도 많이 받았다. 여당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와 대립한 야당은 정치적인 사안 외에 마거릿의 목소리, 말 한마디, 목소리, 표정 하나, 가벼운 동작 하나하나에 대한 꼬투리를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워낙 씩씩하고 강한 정신력을 지닌 마거릿이었지만 호의적인 시선보다 적대적인 시선이 압도적인 가운데 항상 긴장 상태로 지내다 보니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데니스는 그런 외롭고 고독한 마거릿을 아는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며 보호자였다.

그는 아내의 꿈과 능력이 세상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소음들 중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고, 자신이 마거릿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며 그때가 언제인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데니스는 마거릿에게 용기가 필요할 때는 진심을 다해 그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지도자라고 말해주었으며 침묵이 필요할 때는 입을 다물었고, 위로가 필요할 땐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며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다우닝가의 안주인에서 퍼스트 젠틀맨으로

또한 데니스는 유머감각과 여유, 배려와 사교성이 부족하여 비난받는 마거릿을 위해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의 ‘안주인’ 노릇을 자처하며 그녀에게 부족한 부분을 소리 없이 채워주었다. 종종 마거릿이 각료들을 집으로 초대하면 데니스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부인들과 응접실에서 어울렸다. 그리고 마거릿과 그녀들의 남편인 각료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차를 마시기도 하고 다양한 화제로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살뜰하게 대접했다.

수상으로써 마거릿은 ‘사교적 모임’과 ‘회의’를 가리지 않고 어떤 자리에서든 한 번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토론을 하는,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사였다. 따라서 데니스의 이러한 배려는 ‘사적인 초대라고 해놓고 남편들을 붙들고 정치 이야기를 끝도 없이 계속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 수상’에 대한 부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마거릿이 바쁠 때면 그녀를 대신하여 수상 관저를 직접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나주곤 했다. 데니스는 단지 의례적으로 그들을 만나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수상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듣고 자세히 기록했다가 나중에 마거릿에게 전달한 후 그녀의 결정이나 대답을 다시 전해주곤 했다. 이러한 행동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만하다는 수상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데 무척 큰 효과가 있었다.

데니스에게 이런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마거릿도 그녀의 내각 참모들도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다우닝가의 안주인’을 자처한 데니스가 알아서 찾아낸 역할이었다. 이처럼 데니스는 마거릿이 수상으로 재임했던 11 년 동안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외조를 계속했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영부인을 뜻하는 퍼스트레이디(First Lady)의 의미를 정중하게 담은 ‘퍼스트 젠틀맨(First Gentleman)’이라는 칭호를 선물했다. 그 후 데니스는 이상적인 정치가의 남편을 칭하는 롤 모델이자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박수칠 때 떠난 명예로운 퇴임

1990년 11월 20일, 마거릿은 보수당 당수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과반수 이하의 표를 얻어 패배했다. 재투표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물론 보수당 내에서도 그녀를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을 때였다. 마거릿은 남편에게 조언을 구했다. 1959년 마거릿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30년 넘도록 정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 적이 없는 데니스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마거릿에게 명예로운 퇴임을 하기 바란다고 대답했다. 데니스의 말은 마거릿에게 남편의 조언인 동시에 국민의 의견이었다. 마거릿은 데니스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

이틀 후인 1990년 11월 22일 아침, 마거릿은 뉴스를 통해 당의 앞날과 융합을 위해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녀의 선택은 그동안 그녀에게 반발하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이끌어냈다. 국민들은 11년간 누려온 절대적인 권력을 포기할 줄 아는 마거릿의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언론 역시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실천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명예로운 퇴임이었다. 1991년 5월, 여왕 알현을 마치고 나온 마거릿은 눈가가 붉게 물든 채 수상 관저를 떠났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데니스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
 
1992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마거릿의 공을 인정해 그녀에게 여남작 작위를 수여했다. 마거릿이 남작이 되면서 남편인 데니스 또한 자연히 준 남작이 되었다. 마거릿이 정치가가 된 이후 데니스에게 무언가를 준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죽음 그리고 홀로 남겨진 마거릿

명예로운 퇴임 이후 마거릿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매우 사소한 일에도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고 지독한 상실감과 허무함에 시달렸다. 30년이 훨씬 넘도록 취미도 휴식도 없이 오로지 ‘정치’라는 한 길만 전력질주해온 결과였다. 데니스는 우울증에 빠진 아내를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녀가 수상이든 아니든, 권력이 있든 없든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던 데니스가 곁에 있는 한 마거릿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2003년 데니스는 췌장암 및 심장병으로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마거릿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남편을 먼저 보낸 마거릿은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다. 데니스 외에는 마음을 나눌 친구 한 명조차 없던 마거릿은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차츰 치매 증상을 보였다. 마거릿과 데니스의 딸 캐럴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와의 대화를 담은 자신의 비망록을 책으로 냈다. 딸과 대화를 하던 중 마거릿은 몇 번이나 남편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캐럴은 그때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해주어야 했다. 그때마다 마거릿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만약 데니스가 마거릿보다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마거릿을 마지막까지 돌보았다면 그녀가 치매라는 사실은 세상에 결코 드러나지 않은 채 죽는 날까지 ‘수상’이자 ‘여남작’다운 품위를 지켰을지도 모른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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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

언젠가 마거릿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충실한 비서를 두었으니까요. 나는 데니스의 재력 덕분에 정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처음에는 재력으로 아내가 꿈을 실현하는 것을 도왔던 데니스는 점차 정치가로서 마거릿의 입지가 넓어질수록 그녀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마거릿의 심신을 세심하게 보살피면서도 정치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재력을 갖춘 충실한 비서

아내의 ‘공무’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나 의견을 낸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잘 알려진 데니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던 것은 1971년 마거릿이 교육장관으로 재임 중일 때였다. 당시 마거릿은 노후 학교 건물의 개선과 의무 교육 기간 연장을 위한 예산 마련을 위해 그때까지 7세~11세의 초등학생에게 무료로 제공되던 급식 우유를 유료화했다. 그녀의 결정은 곧 사회 전체에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언론은 그녀를 ‘우유 도둑’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강하게 비난했다. 또 유력한 잡지는 마거릿을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여성’으로 선정했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거릿이 학교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에 학생들 태반이 나가버리거나 야유와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던 마거릿도 이때만큼은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데니스는 너무나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사임을 권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발언이라기보다는 남편으로서 그녀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마거릿의 반응은 보통의 여자들과 완전히 달랐다. 사임을 권하는 데니스 말을 듣자 마거릿은 눈물을 멈추고 새삼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데니스의 사임 권유는 ‘힘들면 언제라도 사임을 해도 되는 든든한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마거릿에게 확실하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이를 깨달은 마거릿은 더 이상 언론이나 대중의 태도에 상처받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결국 그녀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으며 동시에 정치적 ‘위기’도 극복했다.

하지만 마거릿은 나중에 인터뷰할 기회가 생기자 자신이 이처럼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고향 그랜섬과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하며 데니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가 아내를 위해 이른 은퇴를 결심하다

1975년 마거릿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바로 보수당의 당수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유력한 후보자이자 마거릿의 친구였던 키스 조지프가 그녀에게 입후보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마거릿은 아무에게도, 심지어 데니스를 비롯한 다른 가족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당수 선거에 입후보하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은 혼자 했지만 두 번에 걸친 선거운동은 가족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첫 번째 투표일인 1975년 2월 4일 아침, 마거릿은 선거 전략의 하나로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자택으로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데니스를 위해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가정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대중들에게 가정을 소중히 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후 선거 기간 동안 마거릿이 실제로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을 알면서도 데니스는 승리를 위한 아내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했다.

첫 번째 투표에서 마거릿은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과반수가 넘지 않아 투표는 무효가 됐다. 두 번째 투표는 일주일 후인 2월 11일로 정해졌다. 마거릿은 이 일주일간 수많은 의원들과 점심,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맹렬하게 선거 유세에 돌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쉰 살이었다. 당연히 가정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보수당의 당수가 된 마거릿의 활동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으며 행동 하나 하나가 화제가 되었다. 마거릿이 당수 선거에 한창이던 당시 런던대학에서 졸업시험이 한창이던 딸 캐럴의 사생활조차 매스컴에 수시로 공개되곤 했다. 이 때문에 캐럴은 졸업 후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이 ‘당수의 딸’이 아닌 ‘캐럴 대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아 호주 라디오 방송국의 리포터로 취직했다.

반면 어머니가 ‘마거릿 대처’임을 적극 활용하며 부모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아들 마크는 학업도 지지부진했을 뿐 아니라 그가 ‘마거릿 대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용하고자 한 사람들에게 휘말려 마거릿의 경력에 흠집이 날 만한 온갖 골칫거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승승장구하는 아내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식들을 지켜보면서 그때까지 사업에 종사하던 데니스는 은퇴를 결심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수십 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꾸려온 가문의 사업이었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문제나 말썽이 생겼을 경우 ‘공인’의 자리에 있는 마거릿에게 화살이 돌아갈 것을 염려해서였다. 은퇴하기엔 조금 이른 예순의 나이였지만 데니스는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골프와 술, 담배 등으로 소일하며 영국을 위해 너무나 바쁜 아내의 곁을 조용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지켰다.

바보 취급당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한 수상의 남편
 

4년 후인 1979년 5월, 총선거가 치러졌다. 투표일 다음날 새벽 세 시, 데니스는 아내와 함께 보수당 본부를 찾았다. 그리고 아내가 영국 최초로 수상이 되는 기쁨을 함께했다. 이번에도 마거릿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승리 연설에서 “내 정치적 스승은 아버지였다.”라고 거듭 말했다.

물질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30년 가까이 아내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데니스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한 마거릿의 행동과 발언은 데니스와 남은 가족들의 존재를 점점 희미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그림자’ 역할을 그 누구보다 우아하고 완벽하게 해냈다.

개표 당일 새벽 다섯 시, 자택으로 돌아온 데니스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마거릿은 너무 흥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왕의 비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가족들은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버킹엄 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좋은 날이었지만 기쁨보다는 긴장과 흥분으로 팽팽해진 공기를 완화하기 위해 데니스는 “자동차가 부서질지도 몰라.”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마거릿은 “그땐 걸으면 돼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거릿의 칼 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이 일화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여기서도 데니스는 아내의 캐릭터를 빛나게 해주는 ‘조연’ 역할을 하고 있다. 데니스는 이처럼 마거릿에게 인간미를 더해주곤 했다. 영국의 수상이라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정치가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데니스의 처신은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그는 마거릿이 수상의 자리에 있었던 11년 동안 혹시라도 마거릿이 자신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단 한 번의 인터뷰도 하지 않은 현명한 남편이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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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  

 

 데니스는 두 사람의 신혼집으로 고급 주택지인 첼시의 플랫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두었다. 마거릿은 많은 여성들이 꿈꾸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여 생계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우아한 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마거릿은 남편의 재력을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이 아닌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했다. 곧바로 법률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결혼과 함께 자기 계발을 시작한 아내를 응원하다

옥스퍼드에서 화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법률 공부는 마거릿의 오랜 숙원 중 하나였다. 데니스는 아내의 선택을 두말없이 존중했고 가정부를 고용해 가사 노동에 대한 부담을 없애주었다. 남편의 이해와 지원을 속에서 원했던 공부를 마음껏 시작한 마거릿은 1953년 6월, 쌍둥이를 출산했다. 딸 캐럴과 아들 마크였다. 출산의 기쁨은 컸지만 그보다 더 마거릿을 조급하게 만든 것은 4개월 후에 있을 법정 변호사 시험이었다.

임신 자체는 공부를 크게 방해하지 않았지만 출산을 하자 육아에 대한 압박이 어깨를 짓눌렀다. 공부는커녕 갓난아기 둘을 돌보는 데 24시간을 꼬박 투자해도 모자랐다. 마거릿은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자 데니스는 쌍둥이를 돌볼 보모를 구해주었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한결 여유가 생긴 마거릿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4개월 후 마침내 법정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마거릿은 이 결과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훗날에도 두고두고 쌍둥이를 돌보면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데니스의 자상한 배려와 넉넉한 재력 없이도 그것이 가능했을까. 아내가 꿈을 실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운 데니스가 있었기에 마거릿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변호사 활동을 위해 미혼 행세를 한 아내를 이해하다

법정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마거릿은 이번에는 세금 전문 변호사 자격을 따는 것에 도전했다. 이것은 6개월간의 실무 수습 기간이 필요했다. 마거릿은 세금 전문가인 피터 롤런드 변호사 밑에서 실무 수습을 시작했다. 가족이 둘이나 늘어났지만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는 데니스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라면 굳이 마거릿이 돈을 벌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새색시이자 생후 10개월 된 쌍둥이의 엄마인 마거릿은 자신의 꿈을 하루라도 빨리 성취하기 위해 일에 매달렸다.

연수 기간이 끝난 후 마거릿은 본격적으로 취업 활동을 시작했다. 가사와 육아를 뒤로하면서까지 사회 진출을 위해 노력해 뛰어난 성과를 올렸지만 지원을 한 곳마다 거듭 거절을 당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마거릿이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거릿을 고용하려는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마거릿의 고용 조건으로 ‘미시즈(Mrs)’ 대신 ‘미스(Miss)’로 간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제1호 여성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부각하려면 그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마거릿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조건을 냉큼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는 기혼 여성이었지만 취업을 위해서, 더 나아가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는 ‘세금 전문 변호사 활동’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이쯤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다. 마거릿은 미스 대처로서 공공연하게 미혼임을 드러내는 간판을 걸고 5년간 세금 문제 변호사로 일했다. 이번에도 데니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아내의 꿈을 위해 시간과 돈 그리고 이해심을 아낌없이 주었던 데니스와 달리 마거릿은 사업가인 남편을 위해 별다른 내조를 하지 않았다. 데니스는 적지 않은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가정에서 위안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일을 ‘알아서’ 깔끔하게 처리했으며, 본인의 꿈과 미래를 위해 오로지 전진하는 아내를 조용히 응원했다.

마거릿의 정치 입문과 출세 

 

1955년부터 줄기차게 정치 활동을 하며 기회를 노리던 마거릿은 5년 만에 마침내 핀츨리 선거구에서 출마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1959년 10월,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국회의원이 되었다. 마침내 정치가의 꿈을 이룬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34세였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는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마거릿의 야심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젊다는 이유로 또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는 따가운 시선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마거릿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지는 것을 싫어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의 배로 시간을 들여가며 열성적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거릿에게는 이미 이룬 가정보다 앞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자신의 미래가 더욱 중요했다. 그녀는 남자들을 능가하는 성과를 보이며 두각을 나타냈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마거릿은 당선된 지 2년 만에 수상인 해럴드 맥밀런에 의해 국가 연금 및 보험 담당 장관 휘하의 정무차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에드워드 히스 정부 하에서 잇달아 주택공사장관, 재무장관, 연료전력장관, 교육장관 등 여러 각료직을 거치며 경험을 쌓고 입지를 굳혔다. 정치적으로 점점 중요한 위치에 다가설 때마다 가정에 투자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항상 자신이 가정에도 충실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번은 누군가 마거릿에게 그녀의 경력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된 적은 없느냐고 묻자 마거릿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겠지만 데니스를 필두로 한 가족들은 언론이 ‘엄마’나 ‘주부’로서의 자질이나 책임에 대해 마거릿을 추궁할 때면 언제나 그녀의 발언을 옹호했다. 이러한 가족의 협조는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정치가인 마거릿에게 큰 힘이 되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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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1 

 

순탄한 사업과 실패한 결혼

데니스 대처의 가족은 켄트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20세기 초, 비소와 나트륨이 바탕인 온천을 발견해 자신의 사업처를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만든 사업은 그의 아버지가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가업을 농수산 관계의 화학 약품, 예를 들어 제초제와 양을 씻는 세제 등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로 발전시켰다. 데니스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업을 물려받았다.

순탄했던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좌절은 바로 이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그는 마거릿 캠프슨과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육군 포병대에 들어가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마거릿 캠프슨은 남편이 부재중인 동안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불륜을 저질렀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데니스는 이혼으로 4년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성공한 이혼남과 야심찬 처녀의 만남

그 후 독신으로서 데니스는 상속받은 가업을 시대에 맞게 잘 꾸려나가며 36세에 회사의 총 지배인이 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의 회사인 아틀라스는 에리스에 위치해 있었다. 성공한 지역 사업가인 데니스는 에리스 납세협회 위원으로서 보수당협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보수당의 인물들과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 

그는 주변의 추천을 받고 주 의회 선거에 입후보한 적도 있었는데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처음부터 정치가가 되는 일에 그다지 큰 뜻이 없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낙선의 아쉬움보다 오히려 이제 막 정치의 뜻을 펴기 시작한 마거릿 로버츠라는 젊은 여성을 만난 기쁨이 더 컸다. 

마거릿 로버츠는 1950년 총선에 입후보한 인물 중 가장 젊은 여성 후보자였을 뿐 아니라 가장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을 펼친 후보였다. 하지만 노동당이 우위를 점한 다트퍼드에서 그녀는 1950년과 1951년 총선에 출마했고 두 번 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데니스가 마거릿 로버츠를 만난 것은 1951년, 두 번째 출마한 그녀가 한창 뜨겁게 선거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보수당원인 친구의 선거를 돕기 위해 마거릿의 선거 지역인 다트퍼드에 와 있던 데니스는 선거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자신의 차로 런던까지 데려다 주었다. 훤칠한 키에 호남 형이었던 데니스는 여유 있는 집안 출신답게 스포츠와 사업에 관심이 많았으며 정치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정치는 그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이자 성공한 사업가로서 사교를 위해 필요한 사항일 뿐이었다.

마거릿은 데니스보다 열 살이 어렸다. 따라서 데니스의 눈에는 지나치게 열성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투쟁적인 마거릿의 성격이 다소 ‘순수하고 귀엽게’ 비쳤다. 또한 인생에 대한 목표와 계획이 확고하고 투철하다는 점에서도 호감을 느꼈다. 독실한 감리교도이며 똑 부러진 성격의 마거릿은 그의 첫 번째 아내 같은 실수를 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또한 정치에 대해서는 단호했지만 결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마거릿의 입장에서도 데니스는 이혼 경력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춘 남자였다. 중하류 계급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실력과 노력으로 아등바등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하는 마거릿에게 데니스와의 결혼은 중산층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마거릿 로버츠와의 만남과 재혼

총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951년 가을, 마거릿과 약혼한 데니스는 선거 결과에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마거릿 선거 진영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약혼 발표를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의 선거를 도왔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무관하게 마거릿은 선거에 패배했다. 그해 12월 13일, 데니스는 두 번의 낙선 경험이 있으나 정치에 꿈을 버리지 않은 열렬한 보수당원이자 식품 잡화점의 둘째 딸인 마거릿 로버츠와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데니스는 ‘결코 바람을 피우지 않는 아내’를 얻었고, 마거릿은 ‘든든한 경제적 후원을 해주고 영원히 그리고 무조건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아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중하류 계층에서 중류 계층으로 신분 상승도 이루었다. 훗날 두 사람의 딸인 캐럴 대처는 데니스와 마거릿의 결혼을 ‘사랑이라기보다는 상호 편의에 의한 파트너십’ 관계였다고 보기도 했다.

데니스는 마거릿과의 신혼여행지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파리를 선택했다. 마거릿에게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영국 중부의 소도시 그랜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대학 시절을 보낸 옥스퍼드와 처음으로 직장(BX 플라스틱스) 생활을 했던 콜체스터 그리고 선거 지역인 다트퍼드 밖에서는 생활해본 적이 없었다.

한편 수출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데니스에게는 신혼여행이 출장 여행이기도 했다. 마거릿은 허니문까지 ‘일’을 싸들고 간 남편을 이해했다. 합리적인 성격의 그녀가 열 살 연상에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니스와의 결혼을 선택한 데에는 그의 부유함, 그리고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기대가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그녀는 데니스의 사업이 허니문 때문에 영향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데니스는 사업 때문에 바쁜 자신을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어린 신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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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결혼을 통해 야심의 발판을 마련하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카펠은 〈승리에 대한 단상들과 국가 동맹 계획〉이라는 정치적 에세이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이로써 카펠은 정치 관련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인 1917년에는 베르사유의 연합국 이사회에서 영국 측 서기관으로도 임명되었다. 이어 그는 한 단계 높은 목표를 세웠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명망과 지위의 획득이었다. 카펠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계 진출이었다. 하지만 ‘정치’라는 새로운 세계에 수월하게 진출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이 절실했다. 

어느덧 마흔에 접어든 카펠은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혼은 전통적으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인맥 구축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샤넬은 카펠에게 매우 특별한 여성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붓감’으로 훌륭한 신분을 지닌 현모양처 타입의 여성을 원했다. 운 좋게도 카펠은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희망 사항에 부합하는 가문의 여성을 매우 로맨틱하게 만났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간호사로 활동하며 슬픔을 이겨내고 있던 라이블스데일 남작의 막내딸 다이애나 윈덤은 카펠이 원하는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춘 신붓감이었다. 다이애나의 유일한 약점은 미망인이라는 처지였으나 출신의 결함이 있는 카펠에게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요소였다. ‘정통 귀족’인 다이애나의 가족들이 보기에 카펠은 출생이 불분명하다는 점만 빼면 부유하고 장래가 밝다는 면에서 흡족한 상대였다. 또한 잘생긴 외모에 다정한 매너를 지는 카펠은 외로움에 지친 다이애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쟁 중 병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성의 개인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당시 다이애나는 임신 중이었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결혼과 함께 정식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된 카펠은 출생에 대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다이애나는 딸을 낳았다. 카펠에게 첫딸은 또 다른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유명 정치가인 클레망소가 대부를 서주면서 상류 부르주아 사회에서 공고히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카펠의 인생은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흘러갔다.   

 

행복의 절정에서 맞은 갑작스런 죽음

카펠이 영국에서 결혼할 무렵 샤넬은 9년 동안 그와 함께 살았던 파리의 집을 떠나 한적한 교외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3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경영자였지만 한편으론 사랑하는 단 한 명의 남자를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이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샤넬은 교외의 집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갈 가족 같은 직원들을 고용했다. 가정부와 집사, 요리사 그리고 출퇴근용 감색 롤스로이스를 운전해 줄 전용 운전사였다. 

하지만 카펠의 결혼으로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샤넬 역시 사랑만큼이나 일과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이었기에 카펠의 선택을 이해했다. 카펠은 변함없이 바쁜 시간을 틈타 샤넬을 만나러 왔다. 카펠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는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샤넬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연인과 완벽한 가정 속에서 카펠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결혼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카펠은 칸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신혼의 달콤함이 절정이던 그때 다이애나의 배 속에는 카펠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카펠의 장례식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항구도시 프레쥐스에서 치러졌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이애나는 두 번이나 남편을 앗아간 프랑스를 미련 없이 떠났고, 카펠의 시신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영국에 묻혔다.

장례식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던 샤넬은 사고 장소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카펠을 잃은 슬픔을 달랬다. 샤넬은 “보이를 잃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졌다. 


죽음, 그 후 샤넬의 연인으로 불린 남자  

 



 

1920년 2월, 〈런던타임스〉에 카펠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총 7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카펠의 재산 중 62만 파운드는 부인인 다이애나와 두 딸에게, 남은 8만 파운드는 각각 4만 파운드씩 익명의 두 여성에게 상속되었다. 사람들은 익명의 여성들에 대해 수군거렸으나 다이애나는 현명하게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언장의 내용은 카펠만큼이나 빠르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익명의 여인 중 한 명인 샤넬은 이미 충분한 유명 인사였다. 독하게 성공에 매진한 샤넬의 집념은 현실이 되었다. 샤넬은 부와 명성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패션의 역사에 혁명을 가져온 여성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화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카펠이 생전 이룬 것보다 훨씬 커다란 성공이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거대한 패션 제국 ‘샤넬’의 여왕이 된 샤넬은 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 물론 그녀의 회고에는 카펠의 이름도 등장했다. 샤넬의 기억 속에 자리한 카펠은 마치 공들인 수작업으로 정교하게 완성되는 옷처럼 아름답고 완벽했다. 샤넬은 카펠을 소중하고도 애틋하며 고마운 존재로 기억했고, 그와 함께했던 시절의 행적을 따스한 시선으로 세세하게 기억했다. 

샤넬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카펠의 이야기는 제2의 샤넬을 꿈꾸는 수많은 여성들을 매혹시킨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카펠의 후계자들이 ‘샤넬’처럼 숨은 보석 같은 여성을 만난다면 제2의 샤넬 혹은 샤넬을 능가하는 여성의 탄생 또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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