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가섭은 아내를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교단 안에서 그녀와 함께 머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허락을 구해 근처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아직 비구니 교단이 정식으로 생기기 전이었기에 그녀는 홀로 수행을 하면서 살아갔다.


속세의 아내에게 의리를 지키다
진리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바람은 그 누구보다 간절했지만 여전히 너무나 뛰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는 교단의 비구들은 물론 사람들로부터 갖은 모략과 중상을 받았고 탁발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마하가섭은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 뒤, 매일 자신이 탁발한 음식의 반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고, 홀로 수행을 함에 있어서 몸이 쇠약해지거나 억울한 불편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주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여인으로써 뛰어난 아름다움과 수행에 대한 곧은 심지를 지녔음에도 마하가섭의 부인이 왜 이토록이나 힘겨운 길을 걸어야 했는지 의문이 들곤 한다. 만약 그녀가 같은 조건을 지니되 남자의 ‘몸’을 하고 있었다면, 그토록 힘겹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10년이 넘도록 그녀와 순결한 부부이자 도반으로 살아왔던 마하가섭은 오히려 ‘출가’ 후에 발생하는 이런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세속의 잣대와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교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속가의 아내를 머무르게 하고, 매일 같이 탁발한 음식을 나눠주며 보살피는 것은 출가 수행자로써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마하가섭은 비구들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조용하면서도 당당했다. 부부로 살면서도 여인의 육체에 대한 욕망에 초탈했던 그는 지극한 마음으로 가련한 중생을 보살피거나 같은 수행자의 입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도반을 돕는 것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마하가섭의 이런 면이야말로 출가 후 몰래 아내를 만나 관계를 갖거나, 아내를 잊지 못해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했던 다른 비구들과 확실하게 비교가 된다.

마하가섭의 아내는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파제파티를 위시하여 석가족 여인들이 단체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비구니 교단이 만들어졌을 때 곧바로 출가하였다. 비록 마하가섭은 여인의 출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비구니 교단이 만들어짐으로써 속가의 아내는 마침내 수행을 할 최고의 장소를 찾았다. 부처님은 비구니가 된 마하가섭의 아내를 위해 묘현경(妙賢經)을 설해 주시며 수행 정진할 것을 격려하셨다. 그 후 그녀는 부지런히 정진한 끝에 자신의 과거 생을 모두 기억해내었고, 이로 말미암아 5백 비구니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으며 마침내는 부처님께 칭찬을 받았다.


거지 노파에게 가난을 사다
마하가섭은 누구보다 여성에 대하여 엄격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부처님께 여인의 출가를 허락받아 비구니 교단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난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경전을 보면 대립이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으로 아난의 잘못을 지적한 일화들이다. 그래서 여인들과 비구니들은 마하가섭을 싫어하고 아난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마하가섭이 모든 여인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마하가섭이 먼저 여인에게 다가간 적도 있었다. 마침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코살라국에 가서 자리를 비우시고 그에게 베르바나(죽림정사)의 주지 소임을 맡기셨을 때였다. 그때 마하가섭은 라자가하(왕사성)을 출입하면서 탁발을 할 때 가난한 집만을 골라서 다녔다. 가난한 사람들은 전생에 복을 짓지 못해 기본적인 즐거움조차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데, 이번 생에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복을 짓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그는 어떤 거친 음식도 가리지 않고 기꺼이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보시를 하여 복을 짓도록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하가섭은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볼품없이 마르고 늙은 여자로 집도 없고 친척도 없어 날이 밝으면 사방으로 음식을 구걸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했고 날이 저물면 풀밭이나 길가에서 낙엽을 주워 모아 몸을 가리고 잠을 청했다. 한마디로 거지 노파였다. 굶주림이 생활인 노파는 구걸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부잣집 담벼락을 기웃거리다가 때가 되어 쌀 씻은 물이 흘러나오면 그것을 손으로 떠서 마시며 배고픔을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쌀뜨물을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는 노파에게 마하가섭이 다가갔다. 여인은 깜짝 놀라 몸 둘 바를 몰라 황망하게 말했다.

“나 같은 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찌 사문께서 이곳을 오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저에게 이르시기를 가장 가난한 사람을 찾아 걸식을 하여 그 공덕으로 가난을 벗도록 복을 짓게 하라고 하셨기에 왔습니다.”

노파는 마하가섭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신을 일부러 찾아온 고마움에 울었고, 그에게 보시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서글퍼 울었다.

“저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사문께 보시할 것이 없습니다.”

“보시할 마음이 있다면 이미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은 이미 그대로 훌륭한 옷입니다. 지금 당신이 먹고자 하는 쌀뜨물을 저에게 주신다면 제가 당신의 가난을 사겠습니다.”

노파는 마하가섭에게 정성을 다해 담벼락에서 흘러나온 쌀뜨물을 떠서 바쳤다. 노파에게 쌀뜨물을 받은 마하가섭은 맛있게 마셨다. 그 모습을 본 노파의 마음속에 기쁨이 차올랐다. 공양을 마친 마하가섭은 노파에게 부처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노파는 공손한 자세로 법문을 다 듣고 난 뒤, 부처님께 귀의하였고 지극한 신심으로 내어 날마다 부처님을 향해 예를 올렸다. 며칠 후, 노파는 지독한 가난과 고생으로 가득한 삶을 마치고 죽음을 맞았고 마하가섭에게 쌀뜨물을 보시하고 부처님께 귀의한 공덕으로 천상에서 태어나 복을 누리게 되었다.


마하가섭과 여인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보면 마하가섭이 모든 여자를 무조건 다 싫어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여인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뽐내고 이를 무기로 욕망을 부추기며 타락을 유도하여 안락을 추구하는 여인들의 보편적인 습성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기억해 낸 마하가섭의 아내, 밧다까삘라니 비구니는 몇 번에 걸쳐 태어났던 여인으로 천상에서 태어날 때나 지상에서 태어날 때나 항상 부처님께 공양을 하며 그 공덕으로 남보다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 모든 복을 누린 끝에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고통을 받는’ 몸으로 태어났다. 한편 가난하기 짝이 없는 노파는 처음으로 복을 지어 천상에서 여인으로 태어났다. 건강함과 젊음,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그녀는 여인으로써의 온갖 즐거움을 실컷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즐거움이 다한 뒤에, 그녀는 어떤 생을 받게 될까.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다.

마하가섭의 아내와 가난한 노파를 떠올릴 때면 결코 ‘천상’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복의 전부가 아님을, 결코 ‘아름다움’이 여인이 지닐 수 있는 복의 전부가 아님을 새삼 느낀다. 아마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하가섭은 전생에 수행자가 되기를 서원하고 ‘두타(頭陀)’라는 수행방법을 미리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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