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일본을 거쳐 마침내 한국에 상륙한 F4 바이러스는 전국 여성의 마음 속에 거침없이 침투하고 있다.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여성의 판타지와 욕망을 구워삶고 있는 F4 바이러스의 핵심에는 훤칠한 외모와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젊디 젊은(드라마 속 고등학생) 네 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야말로 꽃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왕자님들이다.
 

 


신데렐라에서 찾아본 F4의 탄생비화

<꽃보다 남자>에는 가난하지만 씩씩한 여자 주인공 1명과 어마어마한 부자이며 잘 생기고 매력적인 4명의 남자들이 나온다. F4란 이 네 명의 남자들을 말한다. 도대체 이 여자 주인공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한 명도 아닌 네 명의 꽃미남의 중심에 있단 말인가!

가장 유력한 그녀의 전생은 신데렐라이다. 왕자와 결혼하기 전, 신데렐라에게는 쟁쟁한 경쟁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 피만 섞이지 않은 두 언니들이었다. 유리 구두를 신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데렐라는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게 되었을 때는 상황을 반대로 역전시킨 것이 아닐까? 사랑의 라이벌을 왕자 쪽에 배분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자에게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나 다름없는 3명의 친구들이 생겼다. 신데렐라의 염원을 담은 네 명의 왕자, 즉 F4의 탄생인 것이다.

캔디의 남자들은 F4의 아버지

하지만 중세 서양의 왕자와 신데렐라가 별안간 현대 아시아에 등장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신데렐라가 태어났다. 바로 <캔디캔디>의 캔디이다.
캔디 또한 가난하지만 씩씩한 여자 주인공이다. 덧붙여서 그녀는 고아이다. 요정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난 캔디는 ‘입양’이라는 절차를 거쳐서 왕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입양을 통해 천덕꾸러기 귀족이 된 캔디 앞에는 세 명의 남자가 나타난다. 언덕 위의 왕자님을 꼭 닮은 꽃미남 안소니와 아치, 스테아 형제이다. 꽃미남 안소니와 아치, 스테아 형제는 신데렐라와 두 언니의 모습과 겹쳐진다. 

남자의 모습이 되면서 아치와 스테아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외모부터 성격까지 놀랄 만큼 입체적인 캐릭터로 변모한다. 조연인 줄 알았던 캐릭터의 매력과 여기에 따라온 의외의 인기는 F4라는 특급 꽃미남 군단이 탄생하는 바탕이 된다.

새로운 꽃미남, 테리우스의 등장 

신데렐라 이야기의 왕자를 닮은 <캔디캔디> 속 안소니는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일찍 생을 마감한다. 대신 그는 캔디의 남자라는 자리 대신 ‘첫사랑’이라는 성역을 차지한다. 아련한 첫사랑, 이는 <꽃보다 남자>에서 윤지후(원작 하나자와 루이)의 역할이다.

안소니가 사라진 빈 자리에 테리우스가 등장한다. 닭 대신 꿩이 나타난 격이다. 

잘 생긴 외모, 파격적인 헤어스타일(뱅 스타일의 앞머리를 한 어깨길이의 단발), 여자에게 다정하지 못한 성격 등이 하나로 버무려진 테리우스의 등장 이후, 싸가지 없고 잘 생겼지만 내 여자에게는 친절한 남자는 영원 불멸의 캐릭터가 되었다. 불명예스러운 출생의 비밀을 제외하면 테리우스는 그야말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원작 도묘지 츠카사)의 캐릭터를 떠올리게 한다.

테리우스의 신화를 넘어서 

신데렐라와 <캔디캔디> 이후에 <꽃보다 남자>는 이 전의 고전들이 놓치거나 불가피하게 포기했던 매력을 대대적으로 보완한 남자 주인공을 선보인다. 또한 신데렐라 자신이 화자가 되면서 여주인공은 능동적으로 남자들을 저울질하며 자신의 매력을 어필한다. 한 명도 아닌 네 명의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하면서 이 초특급 우량 꽃미남들은 ‘따로 또 같이’ 라는 세련된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F4의 시대가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막강한 재력과 빛나는 외모, 곱슬머리가 콤플렉스라는 귀여운 빈틈, 싸가지 없는 성격을 가진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원작 도묘지 츠카사)는 신데렐라와 캔디 그리고 모든 여성의 꿈과 판타지를 대변한다. 

하지만 아무리 F4는 넷이라고 해도 에피타이저와 디저트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메인 요리는 따로 있다. <꽃보다 남자>의 욕심 많은 히어로 구준표(원작 도묘지 츠카사)는 왕자 급 재력과 테리우스의 독보적인 매력 그리고 안소니가 지켜왔던 ‘첫사랑’의 성역까지 쟁취하며 꽃미남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조민기 꽃미남 애호 칼럼니스트 gorah99@nate.com  



  • 기사입력 2009.02.10 (화) 15:23, 최종수정 2009.02.10 (화)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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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애호가 2011-04-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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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당시 인도는 철저한 사성(四姓) 계급 사회였다. 가장 높은 신분은 ‘바라문(婆羅門)’으로 사제와 수행자 같은 종교를 담당하는 지배층이었고 그 다음이 ‘찰제리(刹帝利)’로 부처님과 같은 왕족과 무사 같이 정치를 담당하는 귀족들이 여기에 속했다. 그리고 상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들은 ‘비사(毗舍)’에 속했고 가장 천하게 여겨지는 계급은 천민 ‘수다라(首陀羅)’였다. 하지만 부처님은 계급과 상관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교단 내에 평등을 구현시켰다. 실제로 10대 제자 중에는 바라문부터 수다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신의 제자들이 있다.

10대 제자란 수천 명에 이르는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10명의 제자들을 일컫는데 주로 <유마경 維摩經>의 ‘제자품’에 언급된 인물들을 기준으로 10대 제자라고 부른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여래의 제자들 중 으뜸 품’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의 탁월한 면면을 구체적으로 칭찬해주시는데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이 공신력 넘치는 ‘칭찬’ 덕분에 10대 제자들은 일종의 닉네임, 별명이 생겼다.

바라문 출신의 제자 -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부처님의 상수제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사리불(舍利弗 Śāriputra)과 목건련(目建連 Maudgalyayāna)은 각각 지혜제일과 신통제일의 별명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사리불을 생모(生母)처럼, 목건련을 양모(養母)처럼 생각하라고 하실 만큼 이 두 제자를 신뢰하고 사랑하셨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생모와 양모의 비유는 부처님 자신이 출가 전 모자(母子)의 인연을 두었던 두 어머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신 생모 마야부인과 부처님을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이모이자 양모 마하파제파티 두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수제자답게 사리불은 다양한 경전에서 부처님의 설법 상대자로 등장하는데 갖가지 지식에 해박하고 통찰력도 빼어나 ‘지혜제일’이라는 별명에 잘 어울린다. 사리불의 친구이자 ‘신통제일’이라는 별명을 지닌 목건련 또한 신통력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아귀지옥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구출하기도 하고, 천신들에게 설법을 하기 위해 도리천에 가신 부처님을 데리러 갔던 것은 가장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부처님과 비슷한 나이였던 이 두 제자는 훗날 부처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두타(頭陀)제일의 별명을 지닌 마하가섭가섭(迦葉 Kāśyapa)은 부처님의 의발을 이어받은 제자로 ‘가섭’이라는 이름을 지닌 동명의 제자들 중에서 대가섭·마하가섭이라는 칭호로 불리며 구분된다. 그는 브라만 중에서도 대단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나 ‘있는 집 자식’ 특유의 거만함이나 사치를 부리지 않았으며 욕심이 적고 고행을 즐겼으며 규율을 엄격히 지켰다고 한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었을 때 제자들 중 유일하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심전심을 확인했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로도 유명하다. 그는 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500명의 장로들을 모아 결집을 주도하고 지도자로써 교단을 이끌어 인도로부터 선종의 계보를 따질 때 초대 조사로 간주된다.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했다하여 대승불교에서 해공(解空)제일이라 불리는 수보리(須菩提 Subhūti)는 부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금강경’의 대화자로도 유명한데 홀로 고요하게 수행하는 것을 즐겼다하여 은둔제일(隱遁第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 설법제일이라 불리는 부루나(富樓那 Pūrna) 사람들을 교화하고 법을 설함에 있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찰제리 출신의 제자 - 마하 가전연, 아나율, 아난, 라훌라
마하 가전연(迦旃延 Kātyāyana)은 서인도의 아반티국 출신으로 왕명을 받들어 부처님을 영접하러 왔다가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잘잘못을 가려 논박을 잘했으며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설한 것에 대하여 상세하게 그 뜻을 설명하고 외도들과 교의를 논하는데 가장 탁월하여 논의제일이라 불렸다.

10대 제자 중에는 부처님의 속세 친척들도 있는데 석가족 왕자 출신의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아난(阿難 Ānanda) 그리고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羅睺羅 Rāhula)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별명은 하나같이 너무나 인간적인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던 중 졸음을 참지 못해 잠이 들었다가 꾸지람을 듣고 나서 아예 잠을 자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행을 하다가 시력을 잃었던 아나율은 결국 지혜의 눈이 열려 ‘천안(天眼)제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르며 시중을 들었던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을 뿐 아니라 설법 듣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여 ‘다문(多聞)제일’이라 불렸다. 부처님의 속세 아내인 야소다라 왕비의 남동생으로 라훌라의 외삼촌이자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기도 한 그는 훗날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마하가섭이 주도한 1차 결집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들을 전부 암송해 경전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교단 최초의 사미가 된 라훌라는 부처님의 속세 아들이다. 주로 사리불에게 가르침을 배웠으며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많이 하여 밀행(密行) 제일이라 불렸다. 언제 열반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부처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수다라 출신의 제자 - 우바리
마지막은 석가족의 이발사 출신으로 출가한 우바리(優波離 Upāli)이다. 그는 4성 계급 중 가장 천한, 천민 출신이었던 그는 출가 후 누구보다 교단의 규율에 정통하고 계율을 지키는 데 엄격하여 ‘지계(持戒)제일’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후에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첫 번째 결집에서 그는 계율에 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하여 후대의 율장을 성립시켰다.

재미있는 것은 사성(四姓) 계급 사회의 인구는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기 마련인데, 교단 내에서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10대 제자 중에서 출신을 살펴보면 역삼각형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바라문과 찰제리 대다수를 차지하는 교단에서 우파리 존자처럼 수타라 출신은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그의 출신은 오히려 다른 어떤 뛰어난 제자들보다도 평등을 추구하던 교단의 성격을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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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의 만남과 비밀 결혼

1961년 11월, 리버풀 최대의 음반매장 NEMS(North End Music Scores)의 소유주인 젊은 사업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공연을 보러 왔다. 그는 비틀즈에게서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날것 그대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브라이언은 비틀즈에게 자신이 그들의 매니저가 되고 싶다며 거래를 제안했다. 이제껏 음반 판매 사업만 해 왔던 브라이언에게도 이런 결정은 하나의 모험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안목과 느낌 그리고 비틀즈의 가능성을 믿었다. 

계약은 이루어지자마자 브라이언은 거칠고 반항적인 비틀즈의 이미지를 세련되게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유능한 사업가이자 발이 넓을 뿐 아니라 열정까지 갖춘 브라이언은 또 세계적인 음반회사 EMI의 자회사인 팔로폰과 계약을 성사시켰다. 팔로폰의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은 계약 조건으로 드럼 주자를 교체할 것을 요구했고 새 드럼 주자로 링고 스타(본명 Richard Starkey)가 영입되었다. 이로써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틀즈가 탄생했다. 이제까지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어느 날, 존은 신시아로부터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랫동안 연애를 하면서도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신시아는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흘렸고, 존 역시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브라이언은 매니저로써 현명하게 행동했다. 그는 고조되기 시작한 비틀즈의 인기와 극성맞은 소녀 팬들로부터 신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결혼할 것을 추천했고 그의 주선 하에 1962년 8월 23일 존과 신시아는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빛나는 성공의 나날들

얼마 후인 9월 초, 비틀즈는 생애 첫 녹음을 하고 첫 번째 싱글 〈Love Me Do〉를 발표했다. 〈Love Me Do〉에 대한 반응은 크지 않았지만 1962년 1월 11일 발표된 〈Please Please Me〉는 한 달 뒤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회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자작곡인〈Please Please Me〉가 1위를 하면서 비틀즈는 그들을 비웃던 EMI 관계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 두 달 후인 3월 22일, 수록된 14곡이 전부 단 하루 만에 녹음한 전설의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역시 발표하자마자 1위를 차지했다. 빛나는 성공의 시작이었다.

더불어 존은 아빠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신시아가 무사히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존은 아기에게 어머니 ‘줄리아’의 이름을 따 ‘줄리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데뷔 앨범 이후 발표한 싱글 〈From Me to You〉, 〈She Loves You〉 등은 영국을 뒤흔들었고, 비틀즈의 광팬을 지칭하는 ‘비틀매니아’라는 신조어와 함께 신드롬을 낳으며 비틀즈의 인기는 고속 질주를 거듭했다. 두 번째 정규 앨범 〈With the Beatles〉가 발매되었고, 새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는 선주문 100만 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야말로 비틀즈 열풍이었다. 

영국과 유럽을 완전 정복한 비틀즈는 미국으로 진출했다. 미국에서 비틀즈의 인기는 유럽 이상으로 뜨거웠다. 1964년 3월 16일 미국에서 발표한 싱글 〈Can’t Buy Me Love〉는 단숨에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1964년 4월 4일 빌보드 싱글 차트의 1위에서 5위까지를 모두 비틀즈의 노래가 독식(1위 〈Can’t Buy Me Love〉, 2위 〈Twist and Shout〉, 3위 〈She Loves You〉, 4위 〈I Want to Hold Your Hand〉, 5위 〈Please Please Me〉)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는 비틀매니아들을 위해 비틀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이제 비틀즈는 단순한 밴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거대한 문화 현상이었다.


진정한 뮤지션으로의 성장과 위기 

하지만 무리한 일정과 혹독한 스케줄은 비틀즈의 육체와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자신을 치유하는 동시에 세상을 조롱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음악을 만들어온 존은 인기에 힘입어 억지로 발표한 곡들이 계속 1위를 차지하자 회의를 느꼈다. 지나친 성공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 무렵 존은 밥 딜런을 만났다. 

밥 딜런을 통해 음악이 세상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존은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존의 변화는 비틀즈의 음악과 직결되었고 경쾌하면서고 순수하게 감정을 말하던 비틀즈의 음악은 보다 진지하게 변모했다. 달라진 비틀즈의 음악은 그들을 거품 같은 인기를 몰고 다니는 보이밴드로만 생각하던 비평가들과 동료 뮤지션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았다. 팬들은 진정한 뮤지션으로 도약한 비틀즈를 더욱 열렬하게 사랑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순조로운 성공에 존은 성취감보다는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멤버들 역시 누적된 피로와 매스컴의 지나친 관심이 계속되자 신경이 예민해졌다. 결국 1966년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순회공연 도중 돌연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순회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매니저인 브라이언은 펄쩍 뛰었지만 존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갑자기 갖게 된 돈과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던 존이 ‘오랫동안 뜨고 싶어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빚에 허덕이던 예술가’였던 오노 요코를 만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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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사다리가 하나 있었어요. 그것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천장에 그림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까만 캔버스처럼 보이는 그 끄트머리에 사슬로 확대경을 달아놓았더군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죠. 확대경을 들여다보니 깨알 같은 글씨가 ‘예스(Yes)’로 보이더군요. 사다리를 올라가서 확대경을 들여다봤는데 ‘노’, ‘퍽 유’ 같은 것이 아니라 ‘예스’였다고요. 얼마나 마음이 놓였겠어요.”
 

 

 

 

살아생전 수많은 인터뷰에서 요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강조하기 위해 존이 했던 이야기였다. 요코에 대해 전혀 몰랐던 1966년 인디카 갤러리에서 그녀의 작품 <예스>와 먼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런 로맨틱한 사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요코의 작품 〈예스〉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섬세한 감수성의 구제불능 말썽쟁이 존

1940년 10월 9일, 영국의 항구 도시 리버풀에서 알프레드 레논과 줄리아 스탠리의 아들 존 윈스턴 레논이 태어났다. 한창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당시 줄리아는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과 비슷한 ‘존 윈스턴’이란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주었다. 줄리아와 알프레드의 결혼은 오래지 않아 끝났고 얼마 후 줄리아는 존을 아이가 없는 언니 부부에게 맡기고 존 디킨즈라는 남성과 재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존의 이모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반면 이모부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이런 상반된 성격을 지닌, 절대적인 애정을 쏟아주는 부모가 아닌 보호자와 함께 성장하면서 존은 가정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불안한 심리 상태를 자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반항아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존은 이내 ‘반항’에 일가견을 드러내며 또래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데 주먹싸움에서는 난폭했고 말싸움에서는 어른들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철학적인 말들을 내뱉곤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존은 점점 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글을 통해 감정을 곧잘 분출했는데, 그를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 선생님들도 존의 예술적 재능만은 높이 샀다.


생모 줄리아와의 만남 그리고 밴드 쿼리맨 결성

이 무렵 존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이모부의 죽음과 생모 줄리아와의 만남이었다. 존은 이모부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과 슬픔을 느꼈지만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이런 감정을 정상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마냥 웃기만 했다. 이때 존을 달래준 것은 친어머니 줄리아였다. 

딱딱한 이모와 달리 형식과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에서 줄리아와 존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존은 그녀와 친구처럼 지내며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당시 존은 영국을 강타한 로큰롤에 매료되었는데 그가 악기 연주를 배우고 싶어 하자 벤조(기타와 비슷한 악기) 연주에 능했던 줄리아는 존에게 기타를 사 주고 벤조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음악은 순식간에 존을 사로잡았고 그는 학교 친구 다섯 명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의 이름은 ‘쿼리맨’으로 존이 다니던 학교의 이름(쿼리뱅크 고등학교)을 딴 것이었다. 쿼리맨의 리더로서 지역에서 활동하던 존은 1956년 6월 15일, 최초의 공식 무대인 ‘월튼 빌리지 축제’에서 두 살 아래인 폴 매카트니를 만났다. 

두 사람은 로큰롤에 푹 빠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공통점이 전혀 없었지만 이내 친구가 되었고 같은 밴드의 멤버가 되었다. 이미 자작곡을 만들며 음악을 하고 있었던 폴의 집에서 존은 기타 연습과 작곡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얼마 후,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이 ‘쿼리맨’에 들어오면서 밴드는 차츰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슬픔을 이겨내다

1957년 9월, 존은 리버풀의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 존은 교장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이 학생은 이 상태로 계속 가면 틀림없이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문제아에 졸업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할 만큼 성적도 형편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예술적 재능만을 높이 평가했던 선생님들의 권유 덕분이었다. 

물론 존은 예술학교에 들어간 후로도 늘 그렇듯 학교생활에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가 존이 예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엄마인 줄리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만난 엄마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짤막하게 행복을 느꼈던 존은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같은 밴드의 멤버이자 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는 폴은 존의 슬픔을 이해했다. 그는 존을 위로했고 두 사람은 깊은 유대감으로 남다른 우정을 쌓아갔다. 

그렇게 폴의 위로로 괴로움에서 조금씩 벗어난 존은 음악과 연애를 통해 슬픔을 극복해 나갔는데, 훗날 그와 결혼한 신시아 파웰이 존의 여자 친구가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신시아 파웰은 성격이나 성장 배경이 존과 전혀 다른,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의 여학생이었다. 존은 그녀와 진지하게 연애를 하는 한편 그림을 전공한 스튜어트에게 밴드의 기타를 치도록 설득해 밴드에 끌어들였다. 폴의 우정과 신시아와의 사랑, 스튜어트와의 만남으로 존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회복했고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서서히 치유해 나갔다. 


비틀즈의 탄생 그리고 함부르크 진출

줄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15개월 후, 존은 마침내 무대에 다시 섰다. 스튜어트가 합류한 후 스쿨밴드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밴드의 이름은 ‘더 비틀즈(The Beatles)’로 바꿔 프로다운 면모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매니저를 구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비틀즈의 첫 매니저는 그들이 가끔 출연했던 나이트클럽의 주인이었다. 그는 비틀즈가 리버풀 인근의 여러 클럽에 출연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독일의 함부르크 클럽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함부르크는 리버풀 인근에서만 활동하던 비틀즈가 지역 밴드의 이미지를 벗고 프로로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60년, 비틀즈는 열정을 가득 품고 함부르크로 향했다. 함부르크의 클럽은 선원, 창녀, 포주, 갱, 스트립 걸, 좀도둑, 알코올 중독자, 싸움꾼 등 온갖 시끄러운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곳이었다. 비틀즈는 이에 지지 않는 패기로 매일 8시간씩 격렬한 공연을 하며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연주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 비틀즈의 인기가 높아질 때쯤 미성년자였던 조리 해리슨의 나이가 문제가 되어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사랑에 빠진 스튜어트를 제외한 멤버 전원은 리버풀로 쫓겨나듯 돌아왔다. 하지만 리버풀로 돌아온 것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비틀즈가 리버풀에서 다시 무대에 서자 관객들은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피부로 느끼며 열광했고, 이내 지역 최고의 인기 밴드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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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 십대제자 이야기 서문  

  

 

의심할 바 없이 잘 생긴 정우성이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던 무협영화 <검우강호>는 무림 최고의 고수가 되기 위해 달마의 시신을 차지하려는 강호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영화 초반, 뜻밖에도 부처님의 제자이자 시자인 ‘아난’의 이야기가 나온다. 익숙한 이름을 만난 반가움도 잠시, ‘아난’의 이야기는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검우강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가 된다.

이야기는 이렇다. 조정 대신 일가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달마의 시신을 차지한 여자 살수(킬러)가 돌다리 위를 지나다 죽은 줄 알았던 대신의 아들과 맞닥뜨린다. 살수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남자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남자가 다리 위에서 떨어지고 살수가 다시 길을 가려는 순간 난데없이 뒤에서 스님 한 분이 나타난다. 절세의 무공을 지닌 살수는 기척조차 없이 다가온 스님을 보며 깜짝 놀란다.

그 후 두 사람은 폐허가 된 절에서 밤낮으로 무술을 겨루지만 수일이 지나도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3개월 가까이 승부를 겨루던 어느 날, 스님은 살수에게 오늘 이후 그녀를 보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며칠 후 정식으로 출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출가 후에는 부처님과 경전에 귀의하여 그녀가 모든 고통과 번민을 잊고 피안에 이르기를 빌겠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오기가 난 여자 살수는 만약 이대로 승부를 내지 않고 출가를 한다면 그 절의 개미새끼 한 마리까지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스님은 오늘로 모든 업을 지우겠다는 말과 함께 철로 된 젓가락 한 짝을 들고 살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빠름을 특기로 하는 살수의 검법은 매서웠지만 4개의 초식에 허점이 있었고, 한 조각의 살의도 없지만 정확하게 허점을 노리는 공격으로 스님은 살수를 이긴다. 처음 겪는 패배에 살수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스님은 승리를 거두고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스님은 훗날 살수가 진정한 고수를 만났을 때 목숨을 잃을 것을 염려한다.

하지만 그 말을 마치자마자 스님은 곧바로 몸을 날려 공격을 하고, 살수는 본능에 따라 망설임 없이 스님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칼이 꽂히는 순간 살수는 깜짝 놀라지만 스님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스님은 도저히 살인을 멈추지 못하는, 살기(殺氣)를 버리지 못하는 살수를 위해 승부와 상관없이 그녀의 검에 맞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만 칼을 맞기 전, 그녀의 검법이 지닌 허점을 알려주기 위해 승부를 청한 것이었다.

스님은 목에 걸려있던 염주를 풀어 자신을 찌른 살수의 검에 걸어주며 말한다. 오늘 이후 검을 버린다면 자신이 그녀가 죽이는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자신을 멈추게 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스님의 자비에 살수는 처음으로 살인을 후회한다. 당황과 후회 속에서 스님이 숨을 거두는 것을 지킨 살수는 그 후 정말로 검과 얼굴을 버리고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스님의 스승을 찾아가 달마의 시신과 제자의 유품을 전하며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스님이 눈을 감기 전 남긴 유언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님의 마지막 말은 ‘오백년 동안 바람을 맞고 오백년 동안 비를 맞겠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노스님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난’이 출가 전 길을 가다가 한 소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아난에게 부처님이 물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그러자 아난은 자신이 돌다리가 되어 오백년 동안 바람을 맞고 오백년 동안 비를 맞으며 다만 그녀가 다리를 안전하게 건너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난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그러했다. 오백년 동안 바람을 맞고 비를 맞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다. <검우강호>에 등장한 스님은 이러한 아난의 말과 마음을 빌려 피와 복수로 얼룩진 살인자를 감화시켰다.

아난은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되는 수많은 경전의 화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수많은 경전 속에는 아난을 비롯한 십대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또 그들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시공을 초월하여 부처님의 제자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십대제자의 이름은 왠지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친근한 마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각기 다른 출가 사연과 수행 스타일을 지닌 십대 제자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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