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사다리가 하나 있었어요. 그것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천장에 그림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까만 캔버스처럼 보이는 그 끄트머리에 사슬로 확대경을 달아놓았더군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죠. 확대경을 들여다보니 깨알 같은 글씨가 ‘예스(Yes)’로 보이더군요. 사다리를 올라가서 확대경을 들여다봤는데 ‘노’, ‘퍽 유’ 같은 것이 아니라 ‘예스’였다고요. 얼마나 마음이 놓였겠어요.”
 

 

 

 

살아생전 수많은 인터뷰에서 요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강조하기 위해 존이 했던 이야기였다. 요코에 대해 전혀 몰랐던 1966년 인디카 갤러리에서 그녀의 작품 <예스>와 먼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런 로맨틱한 사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요코의 작품 〈예스〉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섬세한 감수성의 구제불능 말썽쟁이 존

1940년 10월 9일, 영국의 항구 도시 리버풀에서 알프레드 레논과 줄리아 스탠리의 아들 존 윈스턴 레논이 태어났다. 한창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당시 줄리아는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과 비슷한 ‘존 윈스턴’이란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주었다. 줄리아와 알프레드의 결혼은 오래지 않아 끝났고 얼마 후 줄리아는 존을 아이가 없는 언니 부부에게 맡기고 존 디킨즈라는 남성과 재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존의 이모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반면 이모부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이런 상반된 성격을 지닌, 절대적인 애정을 쏟아주는 부모가 아닌 보호자와 함께 성장하면서 존은 가정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불안한 심리 상태를 자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반항아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존은 이내 ‘반항’에 일가견을 드러내며 또래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데 주먹싸움에서는 난폭했고 말싸움에서는 어른들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철학적인 말들을 내뱉곤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존은 점점 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글을 통해 감정을 곧잘 분출했는데, 그를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 선생님들도 존의 예술적 재능만은 높이 샀다.


생모 줄리아와의 만남 그리고 밴드 쿼리맨 결성

이 무렵 존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이모부의 죽음과 생모 줄리아와의 만남이었다. 존은 이모부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과 슬픔을 느꼈지만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이런 감정을 정상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마냥 웃기만 했다. 이때 존을 달래준 것은 친어머니 줄리아였다. 

딱딱한 이모와 달리 형식과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에서 줄리아와 존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존은 그녀와 친구처럼 지내며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당시 존은 영국을 강타한 로큰롤에 매료되었는데 그가 악기 연주를 배우고 싶어 하자 벤조(기타와 비슷한 악기) 연주에 능했던 줄리아는 존에게 기타를 사 주고 벤조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음악은 순식간에 존을 사로잡았고 그는 학교 친구 다섯 명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의 이름은 ‘쿼리맨’으로 존이 다니던 학교의 이름(쿼리뱅크 고등학교)을 딴 것이었다. 쿼리맨의 리더로서 지역에서 활동하던 존은 1956년 6월 15일, 최초의 공식 무대인 ‘월튼 빌리지 축제’에서 두 살 아래인 폴 매카트니를 만났다. 

두 사람은 로큰롤에 푹 빠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공통점이 전혀 없었지만 이내 친구가 되었고 같은 밴드의 멤버가 되었다. 이미 자작곡을 만들며 음악을 하고 있었던 폴의 집에서 존은 기타 연습과 작곡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얼마 후,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이 ‘쿼리맨’에 들어오면서 밴드는 차츰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슬픔을 이겨내다

1957년 9월, 존은 리버풀의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 존은 교장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이 학생은 이 상태로 계속 가면 틀림없이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문제아에 졸업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할 만큼 성적도 형편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예술적 재능만을 높이 평가했던 선생님들의 권유 덕분이었다. 

물론 존은 예술학교에 들어간 후로도 늘 그렇듯 학교생활에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가 존이 예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엄마인 줄리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만난 엄마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짤막하게 행복을 느꼈던 존은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같은 밴드의 멤버이자 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는 폴은 존의 슬픔을 이해했다. 그는 존을 위로했고 두 사람은 깊은 유대감으로 남다른 우정을 쌓아갔다. 

그렇게 폴의 위로로 괴로움에서 조금씩 벗어난 존은 음악과 연애를 통해 슬픔을 극복해 나갔는데, 훗날 그와 결혼한 신시아 파웰이 존의 여자 친구가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신시아 파웰은 성격이나 성장 배경이 존과 전혀 다른,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의 여학생이었다. 존은 그녀와 진지하게 연애를 하는 한편 그림을 전공한 스튜어트에게 밴드의 기타를 치도록 설득해 밴드에 끌어들였다. 폴의 우정과 신시아와의 사랑, 스튜어트와의 만남으로 존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회복했고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서서히 치유해 나갔다. 


비틀즈의 탄생 그리고 함부르크 진출

줄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15개월 후, 존은 마침내 무대에 다시 섰다. 스튜어트가 합류한 후 스쿨밴드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밴드의 이름은 ‘더 비틀즈(The Beatles)’로 바꿔 프로다운 면모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매니저를 구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비틀즈의 첫 매니저는 그들이 가끔 출연했던 나이트클럽의 주인이었다. 그는 비틀즈가 리버풀 인근의 여러 클럽에 출연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독일의 함부르크 클럽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함부르크는 리버풀 인근에서만 활동하던 비틀즈가 지역 밴드의 이미지를 벗고 프로로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60년, 비틀즈는 열정을 가득 품고 함부르크로 향했다. 함부르크의 클럽은 선원, 창녀, 포주, 갱, 스트립 걸, 좀도둑, 알코올 중독자, 싸움꾼 등 온갖 시끄러운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곳이었다. 비틀즈는 이에 지지 않는 패기로 매일 8시간씩 격렬한 공연을 하며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연주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 비틀즈의 인기가 높아질 때쯤 미성년자였던 조리 해리슨의 나이가 문제가 되어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사랑에 빠진 스튜어트를 제외한 멤버 전원은 리버풀로 쫓겨나듯 돌아왔다. 하지만 리버풀로 돌아온 것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비틀즈가 리버풀에서 다시 무대에 서자 관객들은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피부로 느끼며 열광했고, 이내 지역 최고의 인기 밴드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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