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비틀즈를 모르는 무명 예술가, 오노 요코와의 만남

당시 오노 요코는 10년 넘게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었지만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실패한 예술가에 가까웠다. 적지 않은 나이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녀는 여전히 성공을 갈망했지만 돈도 인기도 유명세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존과 만나게 되었다. 런던으로 돌아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존이 우연히 다음 날 오픈 예정인 인디카 갤러리에 들러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오노 요코의 <예스>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훗날 요코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엔 비틀즈는 물론 존 레논이라는 사람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고 존은 항상 그녀를 두둔했다. 당시 오노 요코가 비틀즈와 존 레논을 정말 몰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매스컴과 팬들을 몰고 다니는 ‘존 레논’이라는 슈퍼스타가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요코는 자주 존의 집 밖에서 그를 무작정 기다리기도 하고 비틀즈 전원이 참석한 런던의 힐튼 호텔에서 열린 마하리시의 초월 명상 공개 강연이 끝난 후에는 존과 신시아 부부의 롤스로이스 앞에 뛰어들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존 레논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으며 그가 단지 자신의 작품을 무척 잘 이해하는 낯선 ‘관객’이었다고 주장한 것치고 요코의 행동은 가히 스토킹에 가까웠다. 하지만 수년 동안 비틀즈의 각종 ‘험한’ 팬들을 자주 접했을 뿐 아니라 천성이 얌전했던 신시아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존 레논은 ‘비틀즈를 모르는 예술가’가 마치 열혈 팬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에 우쭐한 기분을 느꼈다. 


비틀즈의 또 다른 반쪽,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1967년 8월 27일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존은 심한 충격을 받았고 그 여파로 밴드자체에 대한 의욕과 관심을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경험해 온 존에게 브라이언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이모부가 세상을 떠났을 땐 어머니 줄리아가 곁에 있어주었고 줄리아가 세상을 떠났을 땐 신시아와 브라이언이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존의 이런 심정을 잘 아는 폴은 그를 달래며 비틀즈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존은 오히려 엇나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음악에 몰두하여 치유했던 사춘기 이후로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존이 생각하기에 비틀즈는 더 이상 순수한 밴드가 아니었다. 존에게는 깊은 상실감을 달랠 음악이나 밴드가 아닌 색다른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존의 정신이 극도로 심약해졌던 1967년 9월, 요코는 리슨의 한 지하 갤러리에서 침대, 화장대, 의자, 세면대 등을 반쪽만 놓아둔 전시회를 기획했다. 요코의 예술은 비틀즈의 반쪽이나 다름없던 브라이언을 잃은 채 방황하던 존의 마음을 흔들었다. 존은 이 전시회에 5천 파운드를 지원하며 요코에게 나머지 반쪽들을 병에 넣어 선반에 진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요코는 존의 의견을 냉큼 받아들였다. 그리고 존의 생일 이틀 뒤인 10월 11일에 전시회를 열어 그에게 후원의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자신과 존의 관계를 대중들에게 의미심장하게 전달했다. 

존은 요코의 전시회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상업적이지 않은 ‘순수 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기쁨을 느꼈다. 존의 아이디어가 첨가된 〈Half Window Show〉라는 이름의 이 전시회는 요코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남편

전시회를 통해 존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요코는 존이 가족과 또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인도에 가 있는 동안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이미 온갖 좌절과 시련, 실패를 맛보며 두둑한 배짱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의지력을 키워온 요코의 빈틈없는 에너지는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섬세하고 여린 존의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1968년 5월, 런던으로 돌아온 존은 신시아가 그리스로 여행을 간 틈을 타서 요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존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 동안 요코는 두 번째 남편인 앤터니 콕스와 이혼하고 존에게 운명을 걸 결심을 굳힌 뒤였다. 하지만 막상 요코가 집 앞에 도착하자 존은 당황했다. 그러나 요코는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녀는 음악을 화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한 후, 〈Two Virgins〉를 녹음하고 존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 요코는 계속 존의 집에 머물며 생활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 신시아는 거리낌이 없는 존과 요코의 모습에 기겁을 한 채 도망치듯 친구의 집으로 갔다. 존은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아내 신시아에게 상처를 주며 요코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요코와의 사랑을 합법화하기 위해 신시아와의 이혼을 결심했다.
1968년 10월 28일 존과 요코는 마약류의 불법 소지 및 경찰 수색 의도적 방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바로 다음날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존은 요코를 보호하고 외국인인 그녀가 영국에서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요코와 만난 이후 존은 아내 신시아와 아들 줄리안에게 최악의, 이기적인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다. 


지독하게 이타적인 연인

1968년 11월 29일 앨범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가 발표되었다. 앨범의 재킷은 두 사람이 처음 밤을 보냈던 날을 기념하며 찍은 나체 사진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요코’라는 불순물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던 팬들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게다가 요코는 비틀즈의 음반 작업에도 동참했다. 결성 이래 비틀즈가 음악 작업을 할 때에는 그 어떤 사적인 인물도 끼어들었던 적이 없었고 이것은 오랜, 당연한 불문율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비틀즈의 음악은 네 명의 멤버들만이 마법처럼 만들어내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코는 비틀즈가 수년에 걸쳐 만들어온 이 마법의 힘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재능이 음악 쪽으로 풍부하다고 믿었다. 존도 요코의 생각에 열렬하게 동의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다른 멤버들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의 동참을 환영했다. 존의 곁에 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요코는 매일같이 존과 함께 녹음실에 왔다. 존의 이러한 태도에 비틀즈를 사랑해온 팬들과 대중들은 크게 분노하며 실망했고, 이 실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요코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요코가 언론의 표적이 되자 존은 요코의 충실한 대변인이자 변호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 달리 요코는 언론의 공격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존은 자신이 그토록 염증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매스컴에 굴하지 않는 요코의 강한 정신력에 새삼 감탄하며 더욱 큰 사랑을 느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해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끝없는 실망을 주는 것과 비례하여 존은 오직 요코에게만 한없이 이타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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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꽃미남을 찾아서 - 온고지신(溫故知新) 편

일 년 중 딱 한번뿐인 장마가 올해는 조금 일찍 시작되었다. 덕분에 한여름 무더위도 훨씬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산이라는 짐이 하나 더해짐으로써 훨씬 번거로워진 출퇴근 전쟁과 비온 후에 찾아오는 축축하고 후끈거리는 공기 때문에 불쾌지수가 저절로 상승하지만, “비의 계절”인 장마기간도 조금은 즐겁게 보내기 위해 약간의 낭만을 더해보고자 한다.

시대의 이슈메이커, 정지상(鄭知常)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새로운 해석에 해석을 거듭한 사극이 하나 둘, 등장하면서 옛날 옛적은 더 이상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배경이 될 수 있음을 대중에게 충분히 어필하고 있다. 항상 있어왔던 것에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비가 오는 날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가 오는 날은 흔하지만 화창한 날과는 또 다른 매력을 담뿍 가지고 있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은 이별을 소제로 지은 한편의 시에서 잠시 비를 언급하였다. 그 시인의 이름은 정지상, 그가 이별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낸 그 시의 제목은 ‘송인(送人)’이다. 고려시대의 정치인으로써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가 민감하기 그지없던 당시, 상당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정지상은 당대 최고의 이슈메이커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시재(詩才)를 자랑하는 시인으로써 명성도 높아 후세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을 남겼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비 개인 강둑에는 풀빛이 짙어 오는데,
남포에서 그대를 보내니 슬픈 노래가 나오네.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를 것인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푸른 물결에 보태는데.  



천년을 관통하는 한 편의 시(詩)

한 편의 시가 수많은 시대와 시대를 거듭하며 사랑받으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반만년 역사 위에 오롯하게 생명력을 가지고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는 정지상의 ‘송인(送人)’은 오늘날 감상하더라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빈틈없이 갖추고 있어 앞으로 다시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른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고전 중의 메가 히트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당대 관리로써의 정지상은 비록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세상을 떠났지만 시인으로써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오늘날 매년 학생들은 국사책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써 정지상을 대면한다. 특히 장마가 시작되면 더욱 정지상의 시(詩)가 생각난다. ‘송인(送人)’의 첫 구절에서 단 일곱 개의 문자로 표현한 풍경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가 말한 대로 비가 오고난 뒤의 온갖 식물들은 더욱 짙은 빛을 발한다. 이러한 감수성을 문자로 멋지게 남길 줄 알았던 조상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공유할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을 만끽하자

훌륭한 고전(古典)은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멋진 유산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학창시절 ‘입시’라는 압박 속에서 억지로 머릿속에 넣은 지식이었기 때문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기억 속에서 자동 삭제되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종종 사회에 나와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고전들을 다시 볼 때면 반가우면서 생경한 느낌이 들곤 한다. 밑줄 치며 암기했던 시인의 감정, 시적 기교, 기승전결의 순서, 시대적 배경 등을 기억에서 사라지고 아련한 익숙함과 놀랍도록 새롭게 다만 사랑, 이별, 우정, 고독 등의 감정만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문학작품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만약 교과서를 통해 배우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고전(古典)을 접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작품 자체만으로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있는 고전(古典)에 대한 무심한 시선과 두껍고 딱딱한 선입견이다.

고전(古典)은 우리 조상의 생생히 살아 숨 쉬던 가장 뜨거운 시절의 한 조각

문학을 중시하는 나라답게 우리의 고전(古典)을 남긴 작가들 대부분은 정치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출퇴근 시간이 엄격한 중앙 정치인으로 살아가면서 권력이 있을 때 부귀영화를 축적하고, 그 부귀영화를 들키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좌천되지 않기 위해 연줄을 만들고, 아부를 하며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갔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거침없이 몸을 던지기도 하고,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하고, 여자 문제로 골치를 앓기도 하고, 술에 취하기도 하고, 사랑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가 없다. 그들도 몸이 고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숱한 야근도 불사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바쁜 일과 중에서도 승부근성을 불태우며 서로 문장을 겨루고 보다 좋은 작품을 남기려고 노력했던 열심과 최선의 아주 작은 결과물이 바로 고전(古典)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다.

우연하게, 혹은 의무적으로 우리 앞에 고전(古典)이 나타난다면 외면하거나 지루해하기보다는 살짝 흥미를 가져보는 것을 어떨까. 단지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 하나의 작품은 생명력을 갖게 되고 우리의 감성은 훨씬 씩씩해 질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자신만의 기쁨이자 경쟁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먼저 긴 장마의 빈틈이 생길 때, 정지상의 ‘송인(送人)’을 감상하는 것이 그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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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꽃미남을 찾아서 – 적벽의 꽃들, 궁극의 꽃미남 주유 편

생 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어떤 난세보다 치열했지만, 끝내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중국의 삼국시대는 그 어떤 태평성대보다 매력적인 영웅들과 탄탄하고 설득력 넘치는 구조 덕분에 소설로, 영화로, 드라마로, 만화로 그 외 수많은 유형의 창작물로 제작되어 우리 가까이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황제가 되고자 분연히 일어났으나 황제가 되지 못하고, 새로운 사직을 시작하려 했으나 이어가지 못했던 삼국 시대가 끝을 알 수 없는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이유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감히 이상형이라고 칭할만한 보석 같은 인물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석 중에서도 다이아몬드에 비유할만한 완벽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남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여자들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로망의 대상인 주유 공근이다.

금도 세상은 온통 주유의 팬클럽으로 가득하다

서른 여섯 해의 짧은 생애였지만 한 일초도 허비하지 않은 주유(周瑜, 175~210)의 삶이 빚어낸 족적은 하나같이 올곧고 눈이 부실 따름이다. 단 세 줄로 요약된 사전 상의 평가조차 “중국 삼국(三國)의 하나인 오(吳)의 명신(名臣). 손견을 섬기다가 손견이 죽은 후 손책을 섬겨 양쯔강 하류지방을 평정하였다. 손책이 죽은 후는 그의 동생 손권을 섬겼다. 위(魏)의 조조(曹操)가 화북을 평정하고 진격해 오자 강화론자들을 누르고 촉(蜀)의 제갈공명과 함께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위군(魏軍)을 대파하였다.”라니 담백한 사실만 나열된 4개의 문장은 마치 골수 팬클럽 회장이 기록한 것처럼 칭찬 일색이다. 물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80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그의 팬클럽은 곳곳에서 “오직 주유”를 외치며 가열차게 가동 중이다. 역사를 되돌리고 되돌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찾아보더라도 주유만한 인물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풀어야 할 숙제이자, 풀고 싶지 않은 희열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 - 일생에 단 한번뿐인 인연

만약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해 타임머신이라는 것이 생겨 투명인간이 되어 단순히 ‘관람’만을 하는 역사 여행이 가능해진다면 꼭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주유와 손책의 첫 만남이다. 풋풋하지만 이미 비상함을 드러냈던 10대 시절, 본디 수춘에 살고 있던 손책과 서현에 살고 있던 주유는 만나기 전부터 서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한나라의 17老제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손견이 제후 연합군에 참여하면서 가족들을 서현으로 옮기며 주유와 손책은 운명의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열 여섯, 이팔 청춘이었던 둘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하여 친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결국 손견이 거병한 후, 손책은 주유의 말에 따라 가족을 데리고 서현으로 이사하였고, 대대로 한나라의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이자 부유한 집안 출신인 주유는, 손책 가족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손책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시며 옆집에 나란히 살았다고 한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인연이 있다면 바로 이런 만남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로 보면 오우삼 감독과 주윤발의 만남이 이와 비슷할까. 부디 이런 아름다운 만남들이 많이 일어나 세상에 빛이 되는 커다란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날에도 실현 불가능한 쿨한 정치를
태연자약하게 실현한 오나라의 멋진 정치가들


중국 10대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주유는 그 자체로도 빛이 나지만, 절친한 친구이자 주군으로 섬긴 손책과 함께했기에 더욱 완벽할 수 있었다. 한나라가 유명무실 하다 보니 권력을 가진 자는 인재를 구하기 위해, 능력이 있는 자는 하루빨리 인정을 받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 받기 위해 권모술수와 배신이 판을 치는 난세에 측은지심에 호소할 정도로 초라하지 않고, 눈살 찌푸려질 불필요한 화려함 없이 다만 반듯하게 목표를 향해 전진했음에도 젊음과 패기, 그리고 대의명분이 하나로 섞여 청아하고 아름다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손책과 주유의 합작품인 오나라 뿐이다.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손견 문대가 어이없게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고작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자칫 오합지졸로 전락해버릴 수 있었던 강남세력을 규합,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신념과 자리를 지키고 훌륭하게 결과로 만들어 낸 주유에게 연륜과 경험을 내세워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오나라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또한 거짓되고 구린내 나는 정치적 술수나 동정심에 호소하는 궁상과 거리가 먼, 강남 오나라 대신들의 쿨한 면모였다.

삼국지의 하이라이트 적벽대전, 적벽대전의 불꽃 같은 남자 주유
적벽대전이 삼국지에 남긴 의미, 바로 자연스러운 신구(新舊) 세대교체


<삼국지연의>의 작가 나관중은 객관성을 포기했다는 판단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촉한을 편애하는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어떠한 각색에도 언젠가는 진가를 발휘하게 되어있다. 삼국지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적벽대전은 강북을 제패한 조조가 여세를 몰아 강남의 오나라까지 토벌하여 단숨에 중원을 통일하려고 일으킨 역사적인 전투이다. 손책과 함께 비상하던 시절부터 유비와 조조를 차례로 공격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큰 뜻을 품었던 주유에게 적벽대전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뜻을 펼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손책과 함께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의 꿈을 이룰 기회가 오자 주유는 오나라의 대신 대부분이 화친을 원하는 분위기에서 조조의 대군에 맞설 것을 주장한다. 주유의 주장은 오나라 대신 대부분의 주장보다 강했다. 게다가 무모한 주장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주유가 제시한 근거 - 조조의 병사들이 수전에 능숙하지 못하고 먼 거리를 왔기에 피로하며, 풍토병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 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으며 이에 따른 계책과 준비는 철저했다. 전쟁이 결정되자 오나라에서는 일말의 소란 없이 전쟁 준비에 집중한다. 노장 황개는 스스로 스파이를 자처, 늙은 몸에 매 타작을 견뎌내며 조조 군을 교란시켰고 결국 준비된 승자 주유의 모든 예상과 계략은 적벽대전을 전체를 관통하며 적중, 눈부신 승리를 거둔다. 소설에서는 주유와 공명의 무언 대결인 손바닥 뒤집기를 통한 화공(火攻)법과 머리를 풀고 제사를 지내는 고난도의 퍼포먼스를 통해 한겨울에 동남풍을 일으킨 공명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적벽의 승패를 결정했다고 구구절절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적벽대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조조와 주유의 싸움이었다. 적벽대전을 통해 조조는 강남의 새파란 인재들에게 대패하여 도주하였고, 중반을 넘어선 삼국지는 신구 세력을 적절하게, 매우 성공적으로 교차할 수 있었다.

부러움과 시샘의 시선조차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삶

"하늘은 어찌 이 주유를 지상에 낳으시고, 다시 또 제갈량을 낳으셨단 말인가!"라는 말과 함께 피를 토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설 속 주유의 죽음은 적벽대전을 통해 제갈공명이라는 후발주자를 위한 작가의 탁월한 연출이자 제갈공명의 라이벌인 주유에 대한 작가 나관중의 유치한 안티 활동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 그대로의 주유를 사랑했다. 믿을만한 기록이 말해주기를, 주유는 젊었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미주랑(美周郞)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용모의 소유자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술자리에서 음악을 듣다가 연주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잘못 연주한 악사 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연주가 틀리면 주유가 뒤돌아본다''는 말을 유행시켰다고 한다. 그런 주유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의 친구이자 주군인 손책이다. 주유의 팬클럽 회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주유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깊었던 손책은 “주유는 좋은 술과 같아 함께 있으면 그 향가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는 엄청난 어록을 남겼다. 세상에서 주군으로부터 이러한 칭찬을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신하가 몇이나 될까.

실존했지만, 창조된 것보다 더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형성한 손책과 주유는 현실에서도 다시 보기 어려운 정말 멋진 남자들이다. 손책의 주유사랑 어록은 만화 <창천항로>에서도 다루어 지는데, 작가가 묘사한 상황은 가슴 벅찰 만큼 멋지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손책의 아들이 주유와 손책이 국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다가오자 주유는 “소주공, 제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손책의 아이에게 깍듯하게 묻는다. 그러자 손책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주유는 좋은 술과 같은 사내다. 부자 2대가 함께 취해보자.”라고 말한다. 생애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가 단 한명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건만, 새삼 주유라는 남자의 완벽함에 부러움을 넘어 경탄하게 된다.

아름다운 사람, 주유가 소중한 이유

타고난 출신과 외모, 스스로 선택한 대업의 길, 젊은 정치가로써 내부는 물론 백성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선망과 신뢰의 시선을 듬뿍 받은 깨끗한 삶, 절세 미녀와의 로맨스와 결혼, 최고의 전투에서의 승리 등등 공과 사가 모두 완벽한 주유의 삶은 궤적을 되돌아 볼수록 한숨이 나올 만큼 완벽하다. 18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주유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라는 상상의 여지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정말 신이 내린 완벽한 사람이다. 매번 그리고 새삼 주유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우리는 공인으로써 주유와 같은 사람을 마음속으로 항상 원하고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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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연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잃어버린 꽃미남을 찾아서 - 적벽의 꽃들

좀 지난 이야기이지만 오우삼 감독의 신작 <적벽>의 캐스팅이 발표되었다.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유 역할을 맡은 사람은 양조위. 연기력은 물론 이미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과 장예모 감독의 <영웅> 등을 통해서 사극에 등장했을 때의 비주얼까지 훌륭하게 소화한 양조위이기에 주유를 연기하기에 비록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팬들은 즐겁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주유의 유일한 라이벌, 제갈공명은 장예모 감독의 <연인>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무사를 연기했던 금성무(가네시로 다케시)이다. 마지막 적벽의 주 무대인 오나라의 군주, 손권을 연기하는 사람은 <와호장룡>의 마적 두목으로 이름을 알린 장첸으로 그는 김기덕 감독의 <숨>에서 주인공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적벽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 적벽에 함께 있었으면 정말 훈훈했을 한 명의 안타까운 꽃미남을 소개하고자 한다.

화려한 등장과 눈부신 필로그라피 - 진정한 스타 손책

이번에 소개할 미남은 지난 회에 소개했던 손견 문대의 장남, 손책 백부이다. 적벽대전이 시작하기 전, 고작 26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손책은 짧은 생애에 시간 활용의 극치를 보여준 경제형 리더였으며 모든 전장에서 스스로 솔선수범한 멋진 남자였다. 그가 단신으로 일으킨 (吳)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두 번이나 유명세를 떨쳤다. 비록 다른 시대였지만 같은 국명(國名)을 가진 다른 오(吳)나라를 잠깐 소개하자면 먼저 춘추시대 12 열국 시대이다. 당시 오(吳)나라의 군주인 부차는 라이벌인 월(越)나라에서 미인계로 보낸 아름다운 여인 서시를 진심으로 사랑한 나머지 꽤 로맨틱하게 멸망, 많은 사가들과 작가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삼국지의 오(吳)나라이다. 맨주먹으로 강남 세력을 규합, 오(吳)나라의 기틀을 만들고 군주의 자리에 오른 손책은 주유, 태사자 등 미모와 실력을 동시에 겸비한 용장들을 거느리고 빠른 시간 내에 강남을 삼국지의 중심으로 부각시킨 인물이다. 또한 자칫 소홀하기 쉬운 로맨스 부분에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한 매력남이기도 한다.

적에서 아군으로 - 태사자와의 만남

때는 바야흐로 흥평(興平)2년(195년) 양주(陽州) 신정산에서 손책(孫策)이 강남을 제패하는 과정에서 양주의 유요(劉繇)를 공격할 당시 손책(孫策)과 태사자(太史慈)가 만났다. 태사자는 그때 유요의 부장으로 있었는데 영웅이 영웅을 만나자 호기가 생겼는지 유요에게 손책을 이번 기회에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일기토를 벌인 두 사람은 결국 비긴 채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훗날 손책에게 항복한 태사자는 손책과의 약속을 지켜 3천 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수많은 전쟁으로 가득한 삼국지이지만, 의외로 젊고 잘 생긴 꽃미남의 1:1 결전은 드물다. 많은 폐인들을 양성할 정도로 팬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코헤이의 진삼국무쌍을 모르고 삼국지를 읽는다 하더라도 젊은 강동의 제왕 손책과 젊고 강한 무사 태사자의 만남은 정말 반가운 마음이 불쑥 들 정도로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태사자는 후에 적벽대전의 주역이 된다.

납치에서 사랑으로 - 이교 자매와의 만남

삼국지를 통털어 가장 로맨틱한 장면을 꼽자면, 손책과 주유가 강남 최고의 미녀 자매인 대교와 소교 자매와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일 것이다. 정말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손책이 그녀를 얻기까지 ''납치''라는 조금은 재미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이조차 손책의 생애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일화로 남는다. 이교자매와 손책, 주유의 합동 결혼은 오늘날로 보면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데이비드 베컴과 빅토리아 베컴 등의 셀레브리티의 유명세와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의 화제를 모은 결혼이었다. 여기서 손책 어록이 나오는데 대교와 소교를 각각 아내로 맞아 오나라로 오면서 손책은 절친한 친구 주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근(주유의 자), 우리 아내들은 고향을 떠나서 슬프겠지만, 그런 것쯤은 우리 같은 신랑을 얻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스물 네살에 결혼한 손책은 2년후 세상을 떠나고 말지만, 삼국지 최고의 로맨틱가이의 영예를 주고 싶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과 아버지를 닮아 조금은 오만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남자, 손책의 짧은 생애의 뒤를 이은 것은 손권이다. 이후 손권은 오나라의 군주로 적벽대전을 기점으로 삼국지에 비틀림없이 깨끗한 한 획을 그으며 요절이라는 가문의 운명을 벗어나 오래도록 장수한다.

글 : 칼럼니스트 조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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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그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잃어버린 꽃미남을 찾아서 – 삼국지 편

곱디고운 미소년에서 근육질의 미중년까지 다양한 매력을 뽐내는 꽃미남들로 가득한 삼국지에서 가장 전설적인 외모의 소유자는 바로 방통 사원이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천재라고 인정받은 실력을 드러내기에 앞서, 외모 덕분에 굉장한 유명세를 떨친다. 그의 외모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방통의 외모는 비위 좋기로 유명한 유비 현덕조차 고개를 돌리고, 무려 주유의 시신을 거두어 오나라에 갔음에도 손권이 기겁을 하고 결국 채용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남겼을 정도이다. 방통을 보고 있자면 사회생활에 있어 외모가 중요한 것은 18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록새록 느낄 수 있다. 실력을 갖춘 인재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태평성대’보다 월등히 높았던 ‘난세’라는 치열한 시대를 살았음에도 수많은 편견의 벽에 부딪혔던 남자, 방통만의 미덕을 한번쯤 이야기하고 싶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비주얼을 극복한 완소남, 방통
작사(作家)가 부각시킨 추남, 사가(史家)가 배려한 천재

삼국지 정사 <방통전>을 보면 그의 외모가 한 줄로 표현되어 있는데 ''소년 시절에는 소박하고 노둔했으므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자가 없었다.'' 라는 내용이다. 기록한 사람이 굉장히 단어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선택한 것을 느낄 수 있는 평가이다. 하지만 사실을 기록한 사가(史家)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만들어 내는 작가(作家)의 표현은 전혀 다르다. 삼국지연의에서 방통에 대한 묘사는 정성이 느껴질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까만 눈썹이 보기 싫게 붙어있고, 얼굴이 검고, 덕지덕지하며, 수염이 볼품이 없으며, 키마저 난쟁이처럼 작았다.”는, 작가(作家)의 주관이 지독할 정도로 고스란히 드러난 방통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수 백년을 지나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하다. 2줄이 미처 넘지 않는, 이 묘사와 못생긴 얼굴 덕분에 방통이 겪었던 일련에 에피소드들은 방통이라는 남자를 삼국지 전체를 관통하는 최고 추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부족한 비쥬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들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한 몸에 받은 이유에서 방통의 진짜 미덕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기회 앞에서 굴욕조차 즐길 줄 아는 남자,
단 한 명의 안티도 없는, 무적(無敵)의 인간관계 방통

이상주의자보다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들로 가득한 삼국지에서 방통은 자기 자신을 어필함에 있어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절묘하게 혼합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일찌감치 빼어난 실력과 천재성을 발휘했던 이 남자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인 수경선생을 비롯하여 유비가 목을 메고 매달린 제갈공명까지 유비에게 방통을 추천하고 더 중요한 일을 맡길 것을 끊임없이 제안한다. 그러나 수경선생의 극찬의 추천서와 공명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방통은 면접에서 단지 외모 때문에 유비에게 냉랭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통이 이것을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초연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자신의 실력과 외모에 대한 누구보다 냉정하고 명확한 스스로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방통은 냉정을 유지했던 것이다. 거창하게 형제의 연을 맺고 단체 활동을 하는 유비 삼형제나 형제보다 끈끈한 관계를 자랑하는 오나라의 손씨 집안에서 자신이 주유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현실은 파악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실력, 그것은 불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다.

오늘날 연예계에서 방통과 닮은꼴은 사람을 찾자면 장동건을 제치고 여자들이 뽑은 최고의 완소남 1위를 차지한 국민 MC 유재석이 떠오른다. 국민MC 유재석은 현재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비인기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정말 다양한 역할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왔다. 그를 줄곧 따라다니는 “메뚜기”라는 별명은 데뷔 시절 그가 스스로를 희화하는 개그를 선보이며 직접 메뚜기로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섰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개그맨이면서 슬랩스틱 코미디와 라이브 공연에 약했던 그는 오랜 시간 자신만의 내공을 쌓으며 4천만 시청자를 사로잡는 최고의 MC가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방통은 그 천재성에 어울리게 너무나 일찍 죽음을 맞이하여 기대했던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지만,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삼국지라는 꽃밭을 더욱 향기롭게 만들어주었다.

글 : 칼럼니스트 조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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