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비틀즈를 모르는 무명 예술가, 오노 요코와의 만남

당시 오노 요코는 10년 넘게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었지만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실패한 예술가에 가까웠다. 적지 않은 나이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녀는 여전히 성공을 갈망했지만 돈도 인기도 유명세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존과 만나게 되었다. 런던으로 돌아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존이 우연히 다음 날 오픈 예정인 인디카 갤러리에 들러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오노 요코의 <예스>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훗날 요코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엔 비틀즈는 물론 존 레논이라는 사람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고 존은 항상 그녀를 두둔했다. 당시 오노 요코가 비틀즈와 존 레논을 정말 몰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매스컴과 팬들을 몰고 다니는 ‘존 레논’이라는 슈퍼스타가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요코는 자주 존의 집 밖에서 그를 무작정 기다리기도 하고 비틀즈 전원이 참석한 런던의 힐튼 호텔에서 열린 마하리시의 초월 명상 공개 강연이 끝난 후에는 존과 신시아 부부의 롤스로이스 앞에 뛰어들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존 레논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으며 그가 단지 자신의 작품을 무척 잘 이해하는 낯선 ‘관객’이었다고 주장한 것치고 요코의 행동은 가히 스토킹에 가까웠다. 하지만 수년 동안 비틀즈의 각종 ‘험한’ 팬들을 자주 접했을 뿐 아니라 천성이 얌전했던 신시아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존 레논은 ‘비틀즈를 모르는 예술가’가 마치 열혈 팬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에 우쭐한 기분을 느꼈다. 


비틀즈의 또 다른 반쪽,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1967년 8월 27일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존은 심한 충격을 받았고 그 여파로 밴드자체에 대한 의욕과 관심을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경험해 온 존에게 브라이언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이모부가 세상을 떠났을 땐 어머니 줄리아가 곁에 있어주었고 줄리아가 세상을 떠났을 땐 신시아와 브라이언이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존의 이런 심정을 잘 아는 폴은 그를 달래며 비틀즈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존은 오히려 엇나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음악에 몰두하여 치유했던 사춘기 이후로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존이 생각하기에 비틀즈는 더 이상 순수한 밴드가 아니었다. 존에게는 깊은 상실감을 달랠 음악이나 밴드가 아닌 색다른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존의 정신이 극도로 심약해졌던 1967년 9월, 요코는 리슨의 한 지하 갤러리에서 침대, 화장대, 의자, 세면대 등을 반쪽만 놓아둔 전시회를 기획했다. 요코의 예술은 비틀즈의 반쪽이나 다름없던 브라이언을 잃은 채 방황하던 존의 마음을 흔들었다. 존은 이 전시회에 5천 파운드를 지원하며 요코에게 나머지 반쪽들을 병에 넣어 선반에 진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요코는 존의 의견을 냉큼 받아들였다. 그리고 존의 생일 이틀 뒤인 10월 11일에 전시회를 열어 그에게 후원의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자신과 존의 관계를 대중들에게 의미심장하게 전달했다. 

존은 요코의 전시회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상업적이지 않은 ‘순수 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기쁨을 느꼈다. 존의 아이디어가 첨가된 〈Half Window Show〉라는 이름의 이 전시회는 요코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남편

전시회를 통해 존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요코는 존이 가족과 또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인도에 가 있는 동안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이미 온갖 좌절과 시련, 실패를 맛보며 두둑한 배짱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의지력을 키워온 요코의 빈틈없는 에너지는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섬세하고 여린 존의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1968년 5월, 런던으로 돌아온 존은 신시아가 그리스로 여행을 간 틈을 타서 요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존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 동안 요코는 두 번째 남편인 앤터니 콕스와 이혼하고 존에게 운명을 걸 결심을 굳힌 뒤였다. 하지만 막상 요코가 집 앞에 도착하자 존은 당황했다. 그러나 요코는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녀는 음악을 화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한 후, 〈Two Virgins〉를 녹음하고 존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 요코는 계속 존의 집에 머물며 생활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 신시아는 거리낌이 없는 존과 요코의 모습에 기겁을 한 채 도망치듯 친구의 집으로 갔다. 존은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아내 신시아에게 상처를 주며 요코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요코와의 사랑을 합법화하기 위해 신시아와의 이혼을 결심했다.
1968년 10월 28일 존과 요코는 마약류의 불법 소지 및 경찰 수색 의도적 방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바로 다음날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존은 요코를 보호하고 외국인인 그녀가 영국에서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요코와 만난 이후 존은 아내 신시아와 아들 줄리안에게 최악의, 이기적인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다. 


지독하게 이타적인 연인

1968년 11월 29일 앨범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가 발표되었다. 앨범의 재킷은 두 사람이 처음 밤을 보냈던 날을 기념하며 찍은 나체 사진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요코’라는 불순물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던 팬들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게다가 요코는 비틀즈의 음반 작업에도 동참했다. 결성 이래 비틀즈가 음악 작업을 할 때에는 그 어떤 사적인 인물도 끼어들었던 적이 없었고 이것은 오랜, 당연한 불문율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비틀즈의 음악은 네 명의 멤버들만이 마법처럼 만들어내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코는 비틀즈가 수년에 걸쳐 만들어온 이 마법의 힘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재능이 음악 쪽으로 풍부하다고 믿었다. 존도 요코의 생각에 열렬하게 동의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다른 멤버들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의 동참을 환영했다. 존의 곁에 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요코는 매일같이 존과 함께 녹음실에 왔다. 존의 이러한 태도에 비틀즈를 사랑해온 팬들과 대중들은 크게 분노하며 실망했고, 이 실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요코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요코가 언론의 표적이 되자 존은 요코의 충실한 대변인이자 변호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 달리 요코는 언론의 공격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존은 자신이 그토록 염증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매스컴에 굴하지 않는 요코의 강한 정신력에 새삼 감탄하며 더욱 큰 사랑을 느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해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끝없는 실망을 주는 것과 비례하여 존은 오직 요코에게만 한없이 이타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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