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바나(죽림정사)에 도착한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을 뵙자 의식대로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돌고 오체투지의 예로 예배를 드리며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오라, 비구여’라는 말씀으로 이를 허락하였고, 두 사람은 곧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사리불은 부처님께 귀의한 후 15일 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아라한과는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 등 깨달음을 이르는 4단계 중 최상의 경지이다.

또한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정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전까지 아버지 ‘티샤’의 이름을 딴 ‘우파티샤’ 대신 어머니 ‘사리’의 이름을 딴 ‘사리푸트라(사리불 舍利弗 Śāriputra)’가 그의 새 이름이었다. 그 후 열반에 이를 때까지 그는 줄곧 사리불이라 불리었다.


마가다국 바라문들의 잇따른 출가
사리불과 목건련이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당시 마가다국에서 큰 화제였다. 특히 두 사람은 이미 산자야 문하에서 최고의 후계자로 이름을 날렸었기 때문에 더욱 외도들과 바라문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리불의 스승이었던 산자야를 비롯하여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의 많은 외도들과 바라문들은 그가 부처님께 실망을 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리불은 이들의 기대를 보란 듯이 저버렸다. 그 뿐 아니라 논사(論師)이자 수행자로써 바라문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사리불의 외삼촌 구치라(Kotthira)를 비롯하여 우파세나(Upasena), 춘다(Cunda), 레왓타(Revata) 등 사리불의 동생들도 줄줄이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출중한 바라문인 사리와 티샤의 여덟 아들 중 절반이 동시에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이를 반영하듯 높은 학식과 덕망, 권위를 모두 갖춘 바라문과 찰제리 출신의 인물들도 연달아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빔비사라왕은 이를 막기는커녕 아예 출신과 상관없이 원하는 자는 누구나 출가를 할 수 있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자 마가다국의 바라문들은 몹시 당황하였고 부처님과 교단을 향해 온갖 악담과 비방을 퍼부었다. 그러나 반대로 진리를 구하기 위해 베르바나(죽림정사)를 찾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비구들의 시기와 전생의 인연
부처님은 진리를 구하며 가르침을 청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해주셨으나 사리불과 목건련 두 제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눈에 보일 정도로 각별하셨다. 모든 비구들은 출가한 순서에 따라 서열을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교단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긴 것은 물론 모든 비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 사람에게 계경(戒經)을 암송하는 일을 맡도록 지목하셨다. 그러자 먼저 출가한 비구들이 불만을 품고 반발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전생의 인연을 들어 사리불과 목건련이 세세생생 동안 선근을 닦으며 부처님의 상수(上首) 제자가 되기를 발원한 끝에 이번 생에 태어났음을 설명해주셨다. 비록 지금은 다른 비구들에 비해 출가 순서가 늦었지만 이미 부처님과 만나서 먼저 인연을 쌓았음을 말해주신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처음으로 설법을 듣고 제자가 된 교진여(僑陳如 Anna-Kondanna)의 경우 마찬가지로 전생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그는 상수제자가 아닌 첫 번째 제자가 되기를 발원하였기에 지금 최초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만을 품는 비구들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은 몸소 이렇게 말씀하시며 사리불과 목건련을 아끼셨다.

“비구들이여, 사리불과 목건련을 따르고 가까이 하라. 그들은 청정한 삶은 돕는 훌륭한 벗이다. 사리불은 그대들에게 생모(生母)와 같고, 목건련은 그대들에게 양모(養母)와 같은 사람이다.”


생모(生母)와 같은 사리불과 양모(養母)와 같은 목건련
어느 단체에서나 아버지 역할과 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또 그런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져야 편안하게 일이 진행된다.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이 비구들의 아버지라 자처하셨다. 그렇다면 교단에서 어머니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바로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었던 셈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스승과 제자 사이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믿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다행히도 생모(生母) 사리불과 양모(養母) 목건련은 평생 같은 길을 걸어가는 친구로 깊은 우정을 지니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뜻을 잘 알았으며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이는 부처님에게 있어서도,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있어서도, 교단에 있어서 행운 중의 행운이다. 탁월한 지혜와 현명함 그리고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던 두 사람의 모습에 비구들의 시기와 질투는 점차 자취를 감췄다.

한편 사리불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한 후에도 자신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준 앗사지 비구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사리불은 항상 앗사지 비구가 머무는 곳을 향해 예배하고 그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다. 부처님도 앗사지 비구를 향한 사리불의 애틋한 고마움의 마음을 알고는 이를 허락하셨다.


수닷타 장자와의 만남
사리불과 목건련이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깨달음을 이룬 이후, 부처님은 줄곧 마가다국에서만 설법을 해오셨다. 하지만 북쪽의 강대국 코살라국과의 인연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인연을 가지고 온 것이 바로 코살라국의 수도 사왓티(사위성) 출신의 장자(長子) 수닷타였다.

경전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자(長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신분과 부유함은 물론 사회적 명망과 덕을 고루 작춘 인물을 뜻한다. 어느 날 수닷타 장자는 일을 보기 위해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에 왔다가 결혼한 여동생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그를 보고 기뻐하며 환영해주었을 여동생과 매부가 온통 손님을 초대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수닷타는 내심 서운하여 매부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이 처남을 본체만체 하시오?”
그러자 매부가 대답했다.

“처남, 나는 지금 몹시 바쁘다네. 내일 아침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지.”

매부의 말에 더욱 섭섭해진 수닷타는 바쁘다는 매부를 붙들고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지, 왜 공양을 올리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매부는 하는 수 없이 잠시 일을 멈추고 수닷타에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매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수닷타의 마음속에 있던 서운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부처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매부, 지금 당장 부처님을 뵙게 해 주시오!”

떼를 쓰듯 외치는 수닷타에게 매부는 부처님께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날 밤, 수닷타는 잠을 자다가 아침이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세 번이나 일어났다. 하지만 밖은 여전히 깜깜하기만 했다. 결국 아침이 올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던 수닷타는 집 밖을 나와 정처 없이 걷다가 동이 틀 무렵 시타바나라고 하는 묘지에 도착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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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은 7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산자야의 가르침을 모두 숙지하였을 뿐 아니라 스승의 인정을 받았고 또 젊은 나이에 250제자 중 으뜸이 되어 교단을 이끄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산자야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지만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사리불의 의문은 여전히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스스로 깨달음을 구해보기로 결심하고 교단을 나오지 않은 상태로 잠시 스승의 곁을 떠나 따로 수도장을 마련했다.


앗사지(阿說示 Assaji) 비구와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근처를 지나던 사리불은 길에서 한 비구를 보게 되었다. 그 비구는 머리를 빡빡 깎았고 수수한 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발우를 든 채 음식을 빌고 있었다. 사리불이 그 동안 보아왔던 온갖 수행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 비구의 외양은 지극히 평범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모든 거동이 점잖고 의젓한 모습에 왠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또한 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땅을 향한 그 비구의 눈에는 고요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이에 사리불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아마 이 세상에 참다운 성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그런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 이 사람에게 그 스승이 누구이며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리라.'

이 상황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진리와 깨달음을 구하려는 사리불의 간절함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혜와 눈을 가진 사리불의 매서운 안목에 입이 딱 벌어진다. 게다가 겸손할 줄 아는 예의와 실천력까지 겸비했으니 과연 부처님의 상수(上首)제자 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사리불은 곧장 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는 사문이신가요?”

그러자 그 비구는 역시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예, 저는 고타마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하고 있는 앗사지라고 합니다.”

앗사지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설법을 했던 녹야원에 머물던 5명의 비구 중 한 명이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석가족의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던 사리불은 기뻐하며 다시 물었다.

“저는 사리불이라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법을 가르치십니까?”

“예, 저희 스승께서는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났다가 인연을 따라 멸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또 모든 것은 덧없어서 나면 멸하는 법이며, 났다가 멸하는 일이 끝나면 고요한 경지를 낙으로 삼는다(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 『佛本行集經』)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사리불은 귀가 번쩍했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진리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선근이 깊을 뿐 아니라 빼어난 총명함과 진리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지닌 채 정진해온 사리불은 앗사지 비구가 말한 인연법을 듣고는 곧장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 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환희에 넘친 사리불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인연법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앗사지 비구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더 깊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의 스승께서 가르치신 대로 외우고 있을 뿐입니다. 더욱 자세한 가르침을 원하신다면 저희 스승께 여쭈어보십시오.”

공손하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에게 한 치의 거만함 없이 오직 아는 것만을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야기한 앗사지 비구의 태도 또한 우아하고 아름다운가. 이 멋진 두 남자의 만남은 훗날 교단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시간을 되돌리는 발명품이 등장하여 역사 속에서 보고 싶은 장면만을 골라서 볼 수 있게 된다면 이 멋진 두 남자의 만남이야말로 여성은 물론 남성 불자(佛子)들까지도 가장 보고 싶은 장면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목건련과 함께 산자야의 문하를 떠나 부처님께 향하다
앗사지 비구와의 만남 이후 사리불은 곧장 목건련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산자야의 제자가 된 지금까지 항상 사리불과 함께했던 목건련은 이번에도 두말없이 친구의 뜻을 따랐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곧바로 스승 산자야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기쁨에 들뜬 사리불의 이야기를 들은 산자야는 이 뛰어난 두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사리불과 목건련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제까지 자신이 누려온 명성과 권위를 버리고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산자야는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진리를 찾으려다 실패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자신과 함께 교단을 이끌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미 앗사지 비구에게서 가능성을 찾은 그들의 굳은 의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제자가 원하는 궁극의 가르침을 줄 수 없는 스승보다 무력한 존재는 없다. 산자야는 이미 두 사람이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뛰어 넘은지 오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산자야를 대신해서 그들이 지도했던 250명의 제자들 역시 사리불과 목건련의 뒤를 따랐다.

라자가하(왕사성)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논사(論師)이자 뛰어난 제자까지 두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그는 손 써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250명의 제자를 잃었다.


길을 열어라. 저기 내 훌륭한 상수제자가 오는구나
한편 베르바나(죽림정사)에 머물며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던 부처님께서는 사리불과 목건련, 두 사람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부처님께는 이미 천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라문이나 찰제리 등 출신이 제각각 달랐는데 부처님께서는 교단 내에 평등과 화합을 추구하셨기 때문에 일단 귀의한 후에는 출가 순서에 따라 서열을 정했다. 이를 확실하게 보여준 예로 석가족의 왕자들과 이발사 우바리가 출가할 당시, 우바리가 먼저 출가를 하자 부처님께서는 왕자들에게 교단 내에서는 그를 당연히 ‘선배’로 대할 것을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처님 생전에 출가 순서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교단의 규칙을 벗어난 예외의 경우가 단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사리불과 목건련의 경우이고, 두 번째가 마하가섭의 경우이다. 멀리서 사리불과 목건련의 선두로 한 250명의 제자들이 오는 것을 지켜보던 부처님은 설법을 멈추고 빙그레 웃으며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열어라. 저기 내 훌륭한 상수(上首)제자가 오는구나.”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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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떠난 장국영이 출연한 영화 <천녀유혼>은 낭만적인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가난하고 순진한 세금징수원 영채신 역으로 분한 장국영은 돈을 들이지 않고 하룻밤 묶어갈 곳을 찾다가 산 속에 있는 황폐한 절 난약사에 가게 된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흉흉한 그곳에서 그는 귀신을 퇴치하는 도사 연적하를 만나게 된다.

어둠이 깔리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무서워하는 영채신에게 연적하는 한 권의 불경을 준다. 그리고 무섭거든 소리 내어 외우라며 경전의 제목을 가르쳐 주고 훌쩍 사라진다. 홀로 남은 영채신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연적하가 가르쳐준 경전의 제목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난약사를 돌아다닌다.


반야심경과 사리불
연적하가 알려준 ‘귀신을 퇴치하는 힘을 가진 경전의 제목’은 무엇일까.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이라면 바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아닌가. 이 반가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

반야심경은 총 270자로 구성된 짧고도 완전무결한 경전이다. 반야심경은 여느 경전들처럼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되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일방적인 말씀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초반에 ‘사리불이여’하는 이름이 등장함으로써 ‘설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은 사리불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데 부처님이 사리불의 이름을 부르는 부분을 독송할 때면 마치 사리불 한 명의 제자를 앉혀놓고 다정하게 말씀을 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리불은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 대표적인 경전에서도 항상 등장하여 수많은 천신, 인간, 비구, 중생 등 각 대중들 사이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이끄는 독보적인 역할을 한다.


사리불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렇다면 사리불은 과연 부처님에게 어떤 제자였으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리불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부터 인연을 맺어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눈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 출신이다. 사리불의 어머니는 ‘니타라’라는 뛰어난 브라만의 딸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특히 새처럼 푸르고 깊은 눈을 지녔다고 하여 ‘사리(Rupasari)’라고 불렸다. 사리가 한창 아름답게 성장했을 때 남인도 지방에서 젊은 ‘논사(論師)’로 이름난 바라문 출신의 ‘티샤’라는 청년이 ‘니타라’를 찾아와 논쟁 끝에 이겼다.

이에 왕은 ‘니타라’가 다스리던 땅을 ‘티샤’에게 내렸고, 사리는 티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곧 사리불의 부모이다. 이들은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근처 마을에서 살았는데 사리가 첫 아이(사리불)를 임신했을 때, 남동생이자 역시 유명한 논사(論師)였던 구치라(사리불의 외삼촌)가 찾아왔다. 그리고 사리에게 ‘누님의 아이는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따르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구치라는 훗날 사리불에 의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사리와 티샤의 여덟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사리불의 어린 시절 이름은 우파티샤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하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이름인 ‘사리’를 따서 샤리푸트라(Sariputra) 즉, ‘사리의 아들(舍利子)’로 불리게 되었다. 사리불과 어머니의 관계는 평생 무척 각별했는데 훗날 사리불이 열반에 들 때 그의 어머니가 임종을 지켰을 정도였다.


마갈다국 최고의 엄마 친구 아들이던 어린 시절과 산자야와의 만남
어머니를 닮아 출중한 외모를 타고났던 사리불은 어린 시절부터 인도의 고대 성전인 네 가지 베다에 통달할 만큼 총명해 10세 무렵에 이미 소년학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16세 때는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미 거침없는 논리와 언변으로 부친의 제자들을 비롯한 논사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뛰어난 논사였던 아버지 티샤 역시 사리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리불은 친구 목건련과 함께 영축산(靈竺山)에서 벌어진 산정제(山頂祭)에 참가하게 되었다. 산정제는 바라문교에서 집전하는 제사였는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는 요란스럽고 번잡할 뿐 아니라 괴기스럽기까지 한 축제의 무의미함에 깊은 환멸과 허무함을 느꼈다.

그날 이후 진실한 깨달음을 구하기로 맹세한 그는 곧장 7일간의 단식 끝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절친한 친구 목건련과 함께 출가하였다. 출가 후 그가 목건련과 함께 찾아간 스승은 당시 유명한 논사(論師)라고 일컬어지는 6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이자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에서 ‘회의론자’로 이름이 높던 산자야 벨라티 푸트라(Sanjaya belrati putra)였다.

산쟈야는 진리란 어떻게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회의론자로 결코 어떤 ‘입장’에 서지 않는 판단 중지의 자세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명석했던 사리불은 ‘산자야’의 문하에 들어간 후 단 7일 만에 스승의 모든 가르침을 깨우쳤다. 이에 산자야는 기뻐하며 그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교단을 맡겼고 그는 250명의 제자들 가운데 으뜸, 즉 상수 제자가 되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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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흔히 ‘꽃미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모든 꽃이 똑같이 예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화려한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향기, 치명적인 가시까지 두루 갖춘 장미는 꽃 중의 왕 혹은 여왕이라고 불린다. 반면 백합은 단아한 생김새와 그윽한 향기, 견고하면서도 서늘한 감촉이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꽃다운 남자의 아름다움 또한 서로 다른 매력으로 발산될 수 있다.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는 꽃, 장미  


장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장미는 아마도 <어린 왕자>에 나오는 콧대 높은 장미일 것이다. 한 행성의 왕자를 순식간에 정원사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이 장미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꽃 중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먼 조상은 산과 들 어디서나 강인한 생명력으로 쑥쑥 자라는 야생의 찔레꽃이라는 것은 장미만의 특징이자 특권이다. 덕분에 장미는 혈통보다는 자체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꽃으로 평가 받는다. 장미는 먼저 태양을 듬뿍 받으며 꽃을 활짝 피우고, 달콤한 향기를 뿜으며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그리고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한다. 사랑 받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가시를 세워 자존심을 지킨다. 이러한 특징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착하거나 정의롭지 않은 남자도 얼마든지 장미로 만들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빼어난 외모를 바탕으로 강아지 같은 눈망울과 상처받은 눈빛으로 여자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하는 남자야말로 장미의 화신이다. 장미 같은 남자는 최근 대세로 자리 잡은 ‘나쁜 남자’ 트랜드와도 어울린다.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즐기는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프라이드>의 기무라 타쿠야, 형의 여자에게 자신을 봐 달라고 막무가내로 때를 쓰는 모습조차 귀엽게 보였던 <봄날>의 조인성, 어두운 과거를 지녔음에도 오히려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달콤한 인생>의 이동욱,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오만함 속에 감춰진 여리고 순수한 속마음을 어색하게 표현하는 <꽃보다 남자>의 마츠모토 준이나 이민호 역시 장미 같은 남자이다.

장미의 이미지를 닮은 캐릭터의 공통점은 당당하게 사랑을 요구하고, 사랑 받길 원하고 풋풋한 질투와 소유욕을 미처 감출 줄 모른다는 것이다. 아직 원숙한 어른이 않은 소년의 느낌을 충분히 간직한 남자만의 아름다움은 여자, 특히 연상의 여자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선천적인 우아함을 무기로 삼는 꽃, 백합   


백합은 덩굴처럼 어우러져서 꽃을 피우기보다 한 송이마다 자신의 공간을 오롯이 차지한 채 정해진 모양대로 피어난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그늘에서 자라는 백합은 발랄하고 명랑한 꽃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만들 정도로 귀티가 난다. 그래서일까 몇 년 전, 장동건과 화보를 진행했던 한 패션지에서는 그에게 “사막에 핀 백합 같은 광대로 미소를 지었다”는 표현을 바치기도 했다.

청순한 기품을 자아내는 순백의 꽃잎과 고아함을 완성하는 깊고 그윽한 향기는 고아함을 완성하는 백합의 이미지는 군계일학처럼 무리 중에서 빛나는 남자에게 어울린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엘프 족, 그 중에서도 눈처럼 하얀 피부와 궁극의 스트레이트를 보여주는 긴 금발머리, 알통 하나 없을 것 같은 가녀린 몸매로 반지 원정대에서 비주얼을 담당한 레골라스는 진정 백합 같았다.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설정이 레골라스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여했다. 100분 내내 부산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며 당장이라도 침을 튀기며 싸울 것처럼 흥분한 사람들을 부드럽고 단호하게 제압하며 서늘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손석희는 안개꽃 사이에 홀로 피어있는 한 떨기 백합처럼 빛난다. 사슴처럼 곧은 목덜미와 머릿속이 청량해지는 차분하고 지적인 눈빛, 잡스러운 헛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입술과 깨끗한 목소리, 뼈와 힘줄의 윤곽이 보이는 희고 마른 손과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가진 손석희의 아름다움은 백합과 닮아있다.

백합은 여자를 두근거리게 하기보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가시에 찔리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다가가기 보다는 그저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히 흐뭇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빈틈을 보이는 순간, 공들여 쌓은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장미와 백합은 색조화장과 투명화장처럼 다르다
색조화장과 투명화장의 매력이 다른 것처럼 장미와 백합은 명백하게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기 쉬운 햇살이 환한 곳에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미는 덩굴 곳곳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겨두고 자신을 방어한다. 그 모습이 오히려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반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꽃을 피우는 백합은 그윽하고 강한 향기로 자신을 드러낸다.

색조를 지운 뒤 드러나는 얼굴에서 청순함이 빛을 발하기도 하는 것처럼 첫 인상의 강렬함 뒤에는 또 다른 매력이 숨어있는 것이 장미 같은 남자의 매력이다. 그리고 여자로 하여금 비록 가시에 찔리더라도 그 매력을 자신의 손으로 찾아주고 싶은 마음을 먹게 만든다. 반면에 공들여 완성된 투명화장은 굳이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화장을 지우지 않은, 곱게 단장한 얼굴을 감상하는 것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얻는다.

꽃미남 애호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기사입력 2009.04.22 (수) 07:50, 최종수정 2009.04.22 (수)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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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애호가 2011-04-1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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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 지인들과 함께한 샤넬


샤넬을 교양을 갖춘 ‘사업가’로 성장시키다

카펠은 여러모로 샤넬에게 이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샤넬을 그저 연인으로 대하기보다 사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 카펠은 샤넬에게 성공이 얼마나 절실한지 잘 알고 있었다. 과감한 투자자이자 사회생활 선배이며 자상한 연인으로서 카펠은 샤넬이 어엿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적극적인 도움을 줬다. 

문제는 샤넬이 경영에 문외한이며 사교 경험이나 인맥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카펠은 패션 전문가인 마드무아젤 생퐁에게 패션 용어를 비롯해 상류사회에 필요한 화술과 교양 등 샤넬의 기본적인 교육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샤넬이 시작한 패션 사업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상류사회의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샤넬은 상류사회 고객층을 대하는 방법을 익혔으며 이때 익힌 것들은 그녀의 사업에 유용하게 쓰였다. 

사실 샤넬은 카펠이 만나는 친구들에 비하여 문화, 예술, 학문 등에 대한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카펠은 샤넬의 자신감을 북돋워주기 위해 가급적이면 전문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기보다 그녀가 지닌 직관력과 같은 장점을 칭찬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카펠의 칭찬을 통해 샤넬은 스스로도 몰랐던 장점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훗날 샤넬은 ‘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나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존재를 만난 것이다.’라며 카펠의 이러한 사려 깊은 행동이 그녀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회고한 바 있다.

또한 카펠은 누구보다 이해타산에 예민한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샤넬 모드’의 운영만큼은 절대적으로 샤넬의 뜻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다. 부족함이 빤히 보이는 샤넬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함으로써 투자자이자 사업가로서 대단한 모험을 행한 셈이었다. 그는 샤넬이 조언을 구할 때만 성심성의껏 대답할 뿐 ‘샤넬 모드’의 주인은 그녀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런 절대적인 지지와 믿음의 결과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은 놀라운 속도로 번창하기 시작했고 샤넬 역시 사업가로서 쑥쑥 성장했다.
 

  

↑ 영화 속 카펠과 샤넬


도빌에서의 밀월여행과 제1차 세계대전 

샤넬을 위해 아낌없는 도움을 주긴 했지만 카펠 역시 한 사람의 독립된, 그리고 매우 바쁜 사업가였다. 또한 자수성가한 그는 인맥의 중요성을 누구보가 잘 아는 영리한 남자였다. 따라서 프랑스에 올 때면 여러 유력 인사들과의 교류에 힘썼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도 늘 바쁘게 움직였다. 

당시 카펠은 프랑스의 정치가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9.28. ~1929.11.24.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이며 의사. 상원의원과 총리 겸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육군 장관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프랑스 전권 대표로 참석하였고 베르사유조약을 강행하였다)를 비롯한 정치인, 은행가, 언론계 주요 인물 등과 교류했다.

‘샤넬 모드’의 성공이 안정권에 접어들 무렵 카펠은 샤넬과 함께 휴양지 도빌로 휴가를 떠났다. 파리에서 가까운 해변에 위치한 도빌은 휴가철이면 전 유럽의 부유층 유력 인사들과 멋쟁이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카펠 또한 도빌에서 상류층의 사업 파트너들과 만나거나 폴로 게임을 즐기곤 했다. 한편 샤넬은 휴양지 자체를 처음 가보긴 했지만 오붓하게 밀월여행을 즐겼다. 

카펠은 패션과 유행의 첨단을 걷는 도빌에 ‘샤넬 모드’의 분점을 차릴 것을 샤넬에게 제안했다. 샤넬은 즉각 동의했다. 이에 카펠은 분점 설립에 필요한 거금을 즉시 지원했고, 샤넬은 재정적인 걱정 없이 원하는 위치에 상점을 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도빌의 ‘샤넬 모드’ 분점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두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시기에 느닷없이 위기가 닥쳤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당연히 카펠도 동원되었다. 사업을 확장해 놓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샤넬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전쟁터로 떠나면서 카펠은 좌절에 빠진 샤넬에게 ‘무엇보다 가게 문을 닫지 말고 일단 기다리라’는 조언을 했다. 그의 말에 힘을 얻은 샤넬은 사업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가는 대신 도빌에 남아 가게를 운영했다. 뒤죽박죽된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그녀는 오직 카펠의 말만 떠올리며 꿋꿋하게 가게를 지켰다. 


현명한 조언과 자금지원으로 전쟁 중 비약적인 도약을 맞다

얼마 후, 부유한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도빌로 몰려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옷과 액세서리들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이들은 도빌에 도착하자마자 샤넬의 가게를 찾았고, 샤넬은 뜻하지 않은 호황을 거의 독식하게 되었다. 모자를 디자인하던 샤넬은 이를 계기로 의류 전체를 총괄하는 패션 디자이너로 변모했고 ‘샤넬 모드’는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한편 전쟁에 동원된 카펠은 존 프렌치 원수(1852~1925. 트란스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3년에 원수가 되었고 1914년에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에 파견되었다)의 연락장교로 일하던 중 프랑스 석탄 수입을 책임지는 프랑스 - 영국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군사위원회 의장은 카펠로부터 석탄 화물선과 석탄 수송(카펠을 재벌로 만든 사업이자 그의 주력 사업이었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관심을 보였던 클레망소였다. 평상시 쌓아둔 인맥이 빛을 발휘한 것이었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석탄 수입 적임자가 된 카펠은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전방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일에서 벗어난 카펠은 며칠 휴가를 얻어 샤넬과 함께 전선에서 가장 먼 휴양지 중 하나인 비아리츠로 갔다. 프랑스 남단에 위치한 비아리츠는 스페인 귀족들도 휴가를 오는 초호화 휴양지로 전쟁과 동떨어진 별세계였다. 도빌에서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샤넬은 비아리츠에서 값비싼 드레스를 파는 고급 의상실을 오픈할 것을 결심한다. 전쟁  중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번에도 카펠은 샤넬을 믿고 주저 없이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샤넬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의상실이 오픈하자 두둑한 지갑을 가진 비아리츠의 모든 귀족들과 부자들이 몰려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넬은 60명의 재봉사를 데리고도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성공이 확실한 적확한 지역을 선택, 거침없이 초기 자금을 공수해 온 카펠은 ‘샤넬 성공 신화’의 숨은 조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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