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장국영이 출연한 영화 <천녀유혼>은 낭만적인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가난하고 순진한 세금징수원 영채신 역으로 분한 장국영은 돈을 들이지 않고 하룻밤 묶어갈 곳을 찾다가 산 속에 있는 황폐한 절 난약사에 가게 된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흉흉한 그곳에서 그는 귀신을 퇴치하는 도사 연적하를 만나게 된다.

어둠이 깔리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무서워하는 영채신에게 연적하는 한 권의 불경을 준다. 그리고 무섭거든 소리 내어 외우라며 경전의 제목을 가르쳐 주고 훌쩍 사라진다. 홀로 남은 영채신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연적하가 가르쳐준 경전의 제목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난약사를 돌아다닌다.


반야심경과 사리불
연적하가 알려준 ‘귀신을 퇴치하는 힘을 가진 경전의 제목’은 무엇일까.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이라면 바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아닌가. 이 반가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

반야심경은 총 270자로 구성된 짧고도 완전무결한 경전이다. 반야심경은 여느 경전들처럼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되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일방적인 말씀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초반에 ‘사리불이여’하는 이름이 등장함으로써 ‘설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은 사리불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데 부처님이 사리불의 이름을 부르는 부분을 독송할 때면 마치 사리불 한 명의 제자를 앉혀놓고 다정하게 말씀을 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리불은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 대표적인 경전에서도 항상 등장하여 수많은 천신, 인간, 비구, 중생 등 각 대중들 사이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이끄는 독보적인 역할을 한다.


사리불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렇다면 사리불은 과연 부처님에게 어떤 제자였으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리불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부터 인연을 맺어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눈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 출신이다. 사리불의 어머니는 ‘니타라’라는 뛰어난 브라만의 딸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특히 새처럼 푸르고 깊은 눈을 지녔다고 하여 ‘사리(Rupasari)’라고 불렸다. 사리가 한창 아름답게 성장했을 때 남인도 지방에서 젊은 ‘논사(論師)’로 이름난 바라문 출신의 ‘티샤’라는 청년이 ‘니타라’를 찾아와 논쟁 끝에 이겼다.

이에 왕은 ‘니타라’가 다스리던 땅을 ‘티샤’에게 내렸고, 사리는 티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곧 사리불의 부모이다. 이들은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근처 마을에서 살았는데 사리가 첫 아이(사리불)를 임신했을 때, 남동생이자 역시 유명한 논사(論師)였던 구치라(사리불의 외삼촌)가 찾아왔다. 그리고 사리에게 ‘누님의 아이는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따르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구치라는 훗날 사리불에 의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사리와 티샤의 여덟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사리불의 어린 시절 이름은 우파티샤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하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이름인 ‘사리’를 따서 샤리푸트라(Sariputra) 즉, ‘사리의 아들(舍利子)’로 불리게 되었다. 사리불과 어머니의 관계는 평생 무척 각별했는데 훗날 사리불이 열반에 들 때 그의 어머니가 임종을 지켰을 정도였다.


마갈다국 최고의 엄마 친구 아들이던 어린 시절과 산자야와의 만남
어머니를 닮아 출중한 외모를 타고났던 사리불은 어린 시절부터 인도의 고대 성전인 네 가지 베다에 통달할 만큼 총명해 10세 무렵에 이미 소년학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16세 때는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미 거침없는 논리와 언변으로 부친의 제자들을 비롯한 논사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뛰어난 논사였던 아버지 티샤 역시 사리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리불은 친구 목건련과 함께 영축산(靈竺山)에서 벌어진 산정제(山頂祭)에 참가하게 되었다. 산정제는 바라문교에서 집전하는 제사였는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는 요란스럽고 번잡할 뿐 아니라 괴기스럽기까지 한 축제의 무의미함에 깊은 환멸과 허무함을 느꼈다.

그날 이후 진실한 깨달음을 구하기로 맹세한 그는 곧장 7일간의 단식 끝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절친한 친구 목건련과 함께 출가하였다. 출가 후 그가 목건련과 함께 찾아간 스승은 당시 유명한 논사(論師)라고 일컬어지는 6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이자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에서 ‘회의론자’로 이름이 높던 산자야 벨라티 푸트라(Sanjaya belrati putra)였다.

산쟈야는 진리란 어떻게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회의론자로 결코 어떤 ‘입장’에 서지 않는 판단 중지의 자세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명석했던 사리불은 ‘산자야’의 문하에 들어간 후 단 7일 만에 스승의 모든 가르침을 깨우쳤다. 이에 산자야는 기뻐하며 그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교단을 맡겼고 그는 250명의 제자들 가운데 으뜸, 즉 상수 제자가 되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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