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 지인들과 함께한 샤넬


샤넬을 교양을 갖춘 ‘사업가’로 성장시키다

카펠은 여러모로 샤넬에게 이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샤넬을 그저 연인으로 대하기보다 사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 카펠은 샤넬에게 성공이 얼마나 절실한지 잘 알고 있었다. 과감한 투자자이자 사회생활 선배이며 자상한 연인으로서 카펠은 샤넬이 어엿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적극적인 도움을 줬다. 

문제는 샤넬이 경영에 문외한이며 사교 경험이나 인맥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카펠은 패션 전문가인 마드무아젤 생퐁에게 패션 용어를 비롯해 상류사회에 필요한 화술과 교양 등 샤넬의 기본적인 교육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샤넬이 시작한 패션 사업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상류사회의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샤넬은 상류사회 고객층을 대하는 방법을 익혔으며 이때 익힌 것들은 그녀의 사업에 유용하게 쓰였다. 

사실 샤넬은 카펠이 만나는 친구들에 비하여 문화, 예술, 학문 등에 대한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카펠은 샤넬의 자신감을 북돋워주기 위해 가급적이면 전문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기보다 그녀가 지닌 직관력과 같은 장점을 칭찬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카펠의 칭찬을 통해 샤넬은 스스로도 몰랐던 장점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훗날 샤넬은 ‘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나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존재를 만난 것이다.’라며 카펠의 이러한 사려 깊은 행동이 그녀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회고한 바 있다.

또한 카펠은 누구보다 이해타산에 예민한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샤넬 모드’의 운영만큼은 절대적으로 샤넬의 뜻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다. 부족함이 빤히 보이는 샤넬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함으로써 투자자이자 사업가로서 대단한 모험을 행한 셈이었다. 그는 샤넬이 조언을 구할 때만 성심성의껏 대답할 뿐 ‘샤넬 모드’의 주인은 그녀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런 절대적인 지지와 믿음의 결과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은 놀라운 속도로 번창하기 시작했고 샤넬 역시 사업가로서 쑥쑥 성장했다.
 

  

↑ 영화 속 카펠과 샤넬


도빌에서의 밀월여행과 제1차 세계대전 

샤넬을 위해 아낌없는 도움을 주긴 했지만 카펠 역시 한 사람의 독립된, 그리고 매우 바쁜 사업가였다. 또한 자수성가한 그는 인맥의 중요성을 누구보가 잘 아는 영리한 남자였다. 따라서 프랑스에 올 때면 여러 유력 인사들과의 교류에 힘썼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도 늘 바쁘게 움직였다. 

당시 카펠은 프랑스의 정치가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9.28. ~1929.11.24.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이며 의사. 상원의원과 총리 겸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육군 장관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프랑스 전권 대표로 참석하였고 베르사유조약을 강행하였다)를 비롯한 정치인, 은행가, 언론계 주요 인물 등과 교류했다.

‘샤넬 모드’의 성공이 안정권에 접어들 무렵 카펠은 샤넬과 함께 휴양지 도빌로 휴가를 떠났다. 파리에서 가까운 해변에 위치한 도빌은 휴가철이면 전 유럽의 부유층 유력 인사들과 멋쟁이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카펠 또한 도빌에서 상류층의 사업 파트너들과 만나거나 폴로 게임을 즐기곤 했다. 한편 샤넬은 휴양지 자체를 처음 가보긴 했지만 오붓하게 밀월여행을 즐겼다. 

카펠은 패션과 유행의 첨단을 걷는 도빌에 ‘샤넬 모드’의 분점을 차릴 것을 샤넬에게 제안했다. 샤넬은 즉각 동의했다. 이에 카펠은 분점 설립에 필요한 거금을 즉시 지원했고, 샤넬은 재정적인 걱정 없이 원하는 위치에 상점을 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도빌의 ‘샤넬 모드’ 분점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두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시기에 느닷없이 위기가 닥쳤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당연히 카펠도 동원되었다. 사업을 확장해 놓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샤넬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전쟁터로 떠나면서 카펠은 좌절에 빠진 샤넬에게 ‘무엇보다 가게 문을 닫지 말고 일단 기다리라’는 조언을 했다. 그의 말에 힘을 얻은 샤넬은 사업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가는 대신 도빌에 남아 가게를 운영했다. 뒤죽박죽된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그녀는 오직 카펠의 말만 떠올리며 꿋꿋하게 가게를 지켰다. 


현명한 조언과 자금지원으로 전쟁 중 비약적인 도약을 맞다

얼마 후, 부유한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도빌로 몰려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옷과 액세서리들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이들은 도빌에 도착하자마자 샤넬의 가게를 찾았고, 샤넬은 뜻하지 않은 호황을 거의 독식하게 되었다. 모자를 디자인하던 샤넬은 이를 계기로 의류 전체를 총괄하는 패션 디자이너로 변모했고 ‘샤넬 모드’는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한편 전쟁에 동원된 카펠은 존 프렌치 원수(1852~1925. 트란스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3년에 원수가 되었고 1914년에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에 파견되었다)의 연락장교로 일하던 중 프랑스 석탄 수입을 책임지는 프랑스 - 영국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군사위원회 의장은 카펠로부터 석탄 화물선과 석탄 수송(카펠을 재벌로 만든 사업이자 그의 주력 사업이었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관심을 보였던 클레망소였다. 평상시 쌓아둔 인맥이 빛을 발휘한 것이었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석탄 수입 적임자가 된 카펠은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전방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일에서 벗어난 카펠은 며칠 휴가를 얻어 샤넬과 함께 전선에서 가장 먼 휴양지 중 하나인 비아리츠로 갔다. 프랑스 남단에 위치한 비아리츠는 스페인 귀족들도 휴가를 오는 초호화 휴양지로 전쟁과 동떨어진 별세계였다. 도빌에서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샤넬은 비아리츠에서 값비싼 드레스를 파는 고급 의상실을 오픈할 것을 결심한다. 전쟁  중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번에도 카펠은 샤넬을 믿고 주저 없이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샤넬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의상실이 오픈하자 두둑한 지갑을 가진 비아리츠의 모든 귀족들과 부자들이 몰려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넬은 60명의 재봉사를 데리고도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성공이 확실한 적확한 지역을 선택, 거침없이 초기 자금을 공수해 온 카펠은 ‘샤넬 성공 신화’의 숨은 조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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