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상가들을 봤다. 혁명과 영화는, 어떤 관계일까? 더 넓게 혁명과 예술은, 혹은 유희는 어떤 관계일까? 문득 드는 생각은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바꿀 의지와 좋은 방향을 제시할 능력이 있는 것이 혁명가라면 예술은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 


2. 이렇게 본다면 혁명을 선동하는, 혹은 혁명을 예찬하는 영화는 그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어쩌면 그것이 불쾌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영철 평론가의 말. "예술이 제도의 혁명에 먼저 나가면 나머지 두 혁명은 유예된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 마르크스와 랭보와 아방가르드 단체를 인용한 그의 글에서 진실(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이 읽힌다. 그리고 항상 진실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할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의 영화 중에, 예술 자체가 혁신한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3. 예컨대 남쪽으로 튀어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영화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자면 적어도 공감의 측면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 안에서' 뛰어난가? 쉽게 긍정할 수 없다. 사실 예술 자체의 혁신에 관해서 이 영화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인다. 단순히 관심의 차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어쨋든. 결국 이 영화는 '정치색이 강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이 거추장한 수식이 붙어버리면 영화는 더 이상 영화가 아니게 된다. 그저 개인의,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선전물로 되어버릴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런 영화를 찍을래? 라고 물어봤다면 아니, 라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말이 영화가 매혹적이라는 것과 같을 수 없다. 


4.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이것들은 방법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지영 감독은 언제나 말한다(동시에 행한다). 영화는 언제나 운동이라고.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운동과 영화로서의 운동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 사이의 골이 정지영 감독에게 종이 한 장 차이로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그 골은 그 곳에 있으니까. 문제는 이것이다. 혁명, 즉 어떤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실천과 그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 중에서 무엇이 더 낫다라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낫다'라는 판단 후에는 보다 좋음 - 좋음 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수직관계가, 그 수직관계에서 어떤 폭력이 발생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을 변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아니야, 라고 말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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