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2disc)
이창동 감독, 윤정희 출연 / UEK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인이 사과를 꺼낸다. 일부러 준비해왔단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가 언제 사과를 본 적이 있냐고.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그렇다. 우리는 사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난 한 번도 사물을 그렇게 관찰한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있다고 믿을 뿐. 사물들은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오해인 것이다. 확장시켜보자. 안다는 것은 어쩌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통(서로 안다고 가정하고 상호 교류하는 것)이란 근본적으로 오해를 기초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인이 다시 말한다.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그 이후에 시가 쓰이는 것이라고.

 

소통이라는 이름의 오해

 영화는 집요하게 소통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마치 세상을 안다고 가정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컨대 아네스와 5명의 중학생들이 그렇고, 양미자 할머니와 학부모들이 그렇고, 양미자와 그녀의 딸이 그렇고 양미자와 종욱이가 그렇다. 그들은 주고, 받는다. 그렇지만 주고받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교류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자기기만으로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들의 행동, 말이 전달 될 때 그것들을 가로막는 것은 '폭력(아네스/중학생들, 양미자/학부모들) 혹은 '사랑(양미자/딸, 양미자/종욱)이라는 이름의 벽이다. 처음에 나는 집요하게 시를 쓰려는 양미자 할머니의 시도는 마치 현실의 도피로 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도피할 현실이 있는가? 역으로 그녀는 현실은 가상이고 시를 쓰려는 시도가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것이라고 믿는 것 아닐까?

 

시를 쓰는 양미자의 방법

 시를 너무나 쓰고 싶은 양미자 할머니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녀는 꽃을 보고 꽃말을 찾고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보고 땅에 떨어진 열매를 본다. 그녀는 그것들을 관찰하고 만져보고 느끼려한다. 그리고 글을 써본다. 이상하게 글들, 시구들은 써지지만 시가 써지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상은 가혹하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그녀에게서 낱말을 빼앗아 간다. 옥타비오 파스는 주저 활과 리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은 인간 자신이다. 우리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녀에게 말을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말을 못한다.'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녀의 실존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반면 세상은 공정하다. 그녀에게 말을 빼앗아 간 후 그것을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시를 쓰는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날 저런 와이당이나 하고. 꼭 시를 모독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시를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녀는 '시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이것들을 하기 전에는 시 =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시를 쓰기 위해 만지고 관찰하고 먹어봐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아니 그런 자연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가."

 

법과 합의

 한 소녀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침묵한다. 그들은 '진정성 있는 사죄'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을 덮으로 현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성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죽음을 덮음으로써 그에 따른 의무 역시 '덮어버렸다.' 합의라는 이름의 창은 그들을 안전이라는 성으로 대려가 양심의 가책이라는 불청객을 쫒아낼 것이다. 종욱이는 낄낄거리며 다시 무한도전을 볼 것이고 세상은 예전처럼 잘 돌아갈 것이다. 양미자 함머니는 아네스의 사진을 본 후에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깨닫는다. 부모들과의 합의는 죽은 아네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못한다고. 그 고통이 그녀에게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쩌면 양미자 할머니는 종욱이에게 시를 쓰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법적 처벌은 합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게 토론에서 가장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었던 같은데요. 그녀가 종욱이를 자발적으로 신고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녀는 종욱이가 법적 처벌을 받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거라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합의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아네스를 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사죄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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