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거울 속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헬렌 맥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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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는 간단하게 설명 가능하다. 한 여교사의 도플갱어(생령 혹은 페치)가 다른 이들에게 계속 보인다. 그리고 다른 여교사가 도플갱어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그 도플갱어의 주인공인 여교사 역시 심장마비로 즉사한다. 여기에서 한 남자가 개입된다. 그는 두 여자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들이 죽음으로써 그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이상하게도 여기에서는 해석학적 시각이 존재한다. 범인은 그의 주장(즉 자신이 분장한 것은 첫 번째였으며 그 이후에 도플갱어는 초현실적인 것이다)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철회하지 않는다.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미스터리에 초점에 맞춘 저자에게 그 미스터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탐정을 통해 확실한 범죄의 동기, 방법, 개연성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그 소설의 완성도와 관련되어 중요하게 다뤄진다. 언제나 추리 걸작이라 불리는 소설들은 스토리가 어찌됐건 탐정이 범인을 잡는 과정 자체는 정확성에 기인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탐정이 등장한다는 것은 반드시 범인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매클로이는 그것을 스스로 거부했을까? 왜, 추리 소설에서 열린 결말을 추구했을까?


 정신분석학은 안타깝게도 21세기에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으로 취급된다. 예컨대 심리학과에 다니는 대학생들은 프로이트를 믿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잠재의식’, ‘자아와 이드’, ‘히스테리’ 등의 용어와 해설들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논증이라고 믿어질 만큼의 정확성 때문에 관습처럼 굳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는 과학시간에 그것들을 배우지 않는가? 여기에는 그것의 진실/거짓 여부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진실로 믿는가, 거짓으로 믿는가, 라는 문제에서 보편적으로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언제나 정확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문제도 관련이 없다. 작가가 말해 듯 언제나 어제의 과학적 사실은 오늘의 신화로 취급되는 문제니까.

 그렇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는 그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신분석학과 관련이 깊은데,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이란 언제나 증명불가능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분석학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 욕망, 의도 등 절대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저 ‘인간’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두 가지, 혹은 여러 가지의 주장들이 모여 하나의 구도를 이룬다. 우리는 이 주장들 중에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도플갱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이닝이 배질에게 오해받는 것뿐이며 그는 무죄라고 주장할 것이다. 철저하게 검증된 과학만을 믿는 사람들은(즉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배질의 추리가 정확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을 증명할 그 어떤 단서도 소설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차페크의 말을 곱씹어 볼만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없다. 언제나 옳다고 믿는 진리와 다른 진리 간의 충돌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악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악과 진리 모두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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