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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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건 집에서건 자주 보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나마 좋아하는 영화는 별 고민없이 볼 수 있는 '때려부수고 싸우고 죽이는' 그런 영화입니다. 아! 물론 야한 영화도 별 고민없이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무지!!!하게 좋아합. 그렇게 부수고 싸우고 죽이는 영화에선 당연히 '철학' 뭐 이런 거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요. 헐리웃 영화에 스며들어 있다는 그 '미국 우월주의', 예를 들어 우주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데 왜 꼭 미국의 대통령이 전 세계의 대통령이 되어야하느냐? 이런 질문에도 '현실이 그렇잖아!'란 한 마디로 넘겨버릴 수 있고 또 넘겨버려도 괜찮다라 전 생각합니다. 부수고 싸우고 죽이는 영화니까, 미국이 그런거 잘하긴 하니까!!! 헌데 말이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게 영화의 스토리에 개입되기 시작하면 뭔가 좀 꼬이는 때가 있기도 하더군요. 'A라는 나라가 B라는 나라엘 쳐들어가서 B의 군대를 무찌르고 B의 영토를 빼앗는다'라는 스토리에서 도대체 왜 A가 B를 쳐들어간거냐라는 질문을 일단 빼버릴 수 있다면 - 이걸 대입시키자면 문제가 복잡해지니까요. --;; - 당하는 B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A가 미울꺼고, 쳐들어간 A의 입장에서도 끝까지 버팅기며 저항하는 B가 밉상으로 보이는거겠지요. 하나의 역사적 전쟁을 오로지 어느 한 쪽만의 시선으로 영화를 찍어낸다면 사전지식 없이 그 영화를 보게되는 관객들은 그 한쪽의 처지에 무방비 상태로 공감하게만 될 겁니다. 허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전쟁들 중 거의 대부분에서는, 그 둘을 무 잘라내듯 그렇게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구분지을 수는 없을꺼라는 게 제 얇디얇은 역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의 결론이거늘, (이에 대해 여기서는 그냥 이렇게까지만 말하는 걸로 하겠.) <300>이라는 아주 화끈!한 영화를 보면 스파르타를 쳐들어 온 페르시아는 일단 처음부터 별 상황설명도 없이 절대악으로, 그들에게 저항하는 스파르타군은 자동적으로 그 반대인 절대선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헌데 그 '선과 악'의 도식이란게 영화가 가지고 있는 줄거리의 전개를 위한 단순한 '도식'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페르시아의 군사들을 온갖 <괴상망칙한 괴물들>로 이루어져있는 것으로 나타내어 보여준다라는 데에서 바로 동양을 '미개하고 뭔가 굉장히 원시적인'이라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무의식적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라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건 뭐 그렇게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요. 조선 말,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더러운 마을 안에 있는, 더 더러운 집에서 살고 있는, 더더 더러운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잖습니까. 1990년대 중반에도 지네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내 신발에 개똥을 묻히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다녀야했던 기억을 선사해 주었던 바로 그 나라에서 온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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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되어 있기에, 또한 같은 동양권 문화의 정서를 가지고 있기에 위화의 「인생」이란 소설에 그처럼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있었던거라 생각했더랬습니다. 2014년의 독서를 한때 무지하게 유명했었던 어떤 영어책의 제목을 빌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란 생각을 해보았었고, 그 첫번째의 꼬리로 서양인이 쓴 '100세 노인'의 이야기를 그 다음의 책으로 골랐지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소설을 직접 읽어보기기 이전에는 그 소설에 대한 설명을 가급적이면 읽지 않으려 하기에, 이 책은 100세의 노인이 그의 일생동안 겪었었다는 파란만장한 세계사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 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만 뭐... 어쨌든 '인생'이야기겠거니!!! 하며 이 책을 집어들었던거지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이라 표현했습니다만, 이 꼬리가 어떻게 그 꼬리를 물 수 있는거냐란 질문엔 "모든 건 다 내 맘대로에요~"라 미리 대답해 놓는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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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그게... 진짜 정말이에요...?>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없단다>라고 할아버지는 대답하셨다.

작가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위와 같은 내용의 헌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인 즉슨,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들이 결코 진실만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책의 마지막에 나와있는 주인공 '알란의 100년 연보'를 통해 우리는 그 100년 동안 일어났었던 세계사의 주요 장면들을 볼 수 있으며, 그것들은 엄연한 진실입니다. 허나 작가의 상상력은 이러한 진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 모든 것들이 알란이라는 한 개인의 삶에 어떻게 연관지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허구를 기가 막히도록 멋!!!지게 만들어내고 있으며, 바로 그 기막히게 멋진 허구가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거지요.

 

주인공 알란이란 사람이 정치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길 극도로 꺼려한다라는 설정을 통해 소설은 애초부터 영화 <300>에서와 같이 역사에 대한 편향적 시각을 (무의식중에라도) 나타내게 될 우를 범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미리 제거해놓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동양'이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 어찌보면 소설 속 시대의 동양(중국, 한국, 인도네시아)이 아름답게 그려질만한 상황도 아니었지요 - 이러한 작가의 조심스러움(?)은 동양권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유머는 거의 배제시켜놓은 반면, 같은 유럽권인 영국이나 프랑스에 대한 풍자는 '나 이렇게 겸손하다구요!'의 표현으로 지나친 굽신거림을 보여주는 듯한 사뭇 과장된 면이 없지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틈만 나면 싸웠고, 그 중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 빌어먹을 마하트마 간디는 뭔가 못마땅한 게 있으면 먹는 걸 중단했다. 세상에 무슨 그따위 전략이 다 있는가?"

--- 영국령이었던 인도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향한 윈스턴 처칠의 말.

 

 ● "가만있자, 지금 미국 대통령 이름이... 존슨? 그래, 그자의 이름은 그냥 단순 무식하게 존슨이었어! 정말이지 미국 놈들이란 품격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단 말이야!"

---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을 싫어했던 드골의 독백.

 

● "이 난리를 시작한 것은 성 해방을 주장하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몇몇 학생 녀석들이었다. 그러더니 자기들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사회 시스템 전반까지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 원래 학생 애들이란 언제나 불평거리를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녀석들이니까."

---  프랑스의 68혁명을 바라보는 드골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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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 알란을 중심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알란이 그의 일생동안 그 굵직굵직한 세계사들과 어떻게 연관되어왔느냐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신의 100세 생일날, 양로원의 창문을 넘어 탈출한 이후의 이야기들이지요.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 대부분이 동의하리라, 심지어는 작가의 의중 또한 아마도 같을꺼라 짐작되)는 당연히 알란 옹과 세계사가 이어지는 부분이 훨씬 더 흥미로웠습니다. 뭐 그렇다고 이 소설을 통해 세계사를 배운다거나하는 기대를 할 수는 없지만요.

 

알란의 삶은 사실... (이 소설의 옮긴이의 의견대로) 결코 '행복했다'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으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는 비교적 그가 어렸던 나이게 돌아가셨고, 지나치도록 섬세(?)한 스웨덴의 사회복지는 젊은 나이의 그에게 '거세'라는 의학적 보살핌을 선사해주기도 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비밀 정보국의 감옥에 투옥되어보기도, 실탄을 장전한 보초들이 노려보고 있는 군대의 수용소에서 짧지않은 세월을 보냈어야 했기 때문이지요. 

 

알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알란에게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란 말을 해주었는데, 이 말은 이후 알란이 그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를 지배하는 하나의 '사상'이 되어버립니다. <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란 서술이 끝나자 마자, 얼음 빙판위에 서있던 알란의 앞에 그 얼음을 깨고 한 대의 커다란 잠수함이 나타나는 일이 생겼었습니다만, 이런 짜장면스런 상황에 대한 알란의 생각은 지체없이 바로 그의 그런 '사상'이 있었기에... "바로 이런 일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쓸데없다는 거예요. 내가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본댔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어요?"와 같은 말을 그의 입에서 나오게 해주는 겁니다. 그리하여/그러므로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만사는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줘야 하지. 왜냐하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거의 항상 그래."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본문 중.

 

● <인생>은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 또한 나는 <인생>이 ……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 「인생」 '한국어판 서문' 중.

 

이제 겨우(?) 우리 나이로 54살일 뿐인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 그리고 그보다 한 살 더 많아 우리 나이로 55살인 중국의 작가 위화는 이처럼 미묘.한 차이를 지닌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보이고 저의 미숙한 誤讀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러하기에 결국 요나손은 <신의 살아온 일생동안 단 한번도 삶을 낙관적으로 대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허나 그의 말년엔 스스로 "이제는 인생이 지겨워졌다. 왜냐하면 인생이 그를 지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란 생각으로 죽음을 기다리기도 했었던 '알란'이라는 노인>을, 반면 <비록 그의 말년엔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묻어주었다라는 것에 마음 놓아하지만 그의 젊음은 그에게 '허리때로 콱 목을 매 죽고 싶었다'란 생각을 하게도 했었을만큼 잔인했었던 인생을 살아왔던 '푸구이'라는 노인>을 작가 위화로 하여금 그려내게 만든, 뭐 이걸 작가가 다르기에 다른 인물이 그려진 것뿐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제가 믿고 싶은 바대로 이게 바로 '서양과 동양의 근본적 차이'인거라 말해도 되는건지, 혹 이 두 인물은 결국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는건 아닐지, 어쨌든 '인생' 더 좁게는 '인생으로부터의 즐거움'이 되어주는 대상, 반대로 더 나아가서는 '남은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서마저도 알란 옹과 푸구이 옹간에 분명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요. 더 이상은 너무 복잡하니 암튼 여기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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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뒷표지에도 나와있습니다만, '그' 영화를 본 분이라면 누구든 이 소설을 읽으며 <포레스트 검프>를 아니떠올릴 수는 없을듯 합니다. 영화가 미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었다라면, 이 소설은 '세계사 버젼'의 <포레스트 검프>라고나 할까요?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간략한 세계사 100년 연보를 보니 누군가의 한 평생이기도 한 그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실제로!!! 있었더군요. 물론... 지금의 세계는 그 100년간의 세계와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여전히... 알란 옹과 푸구이 옹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은 (그 둘이 결국 같은 것이든 약간/매우 다른 것이든) 그대로 다시한번 더 여전히!!! (최소한 저는 포함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런 공감이 종원군의 세대에까지도 이어질꺼란 장담은 결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종원군의 세대에서도 여전.히 무척이나 재미있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남을꺼란 장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고 말이죠. (이상하게도... 2014년의 독서감상문은 혀가 꼬이듯 계속 꼬이기만 하네요. 40대마저도 꺾.어졌다는 신호일까요? --;;)

 

 

★ More "Food for Thought"

- 위화 作, 「인생」 : 어쩌면... 더 공감될 수 있을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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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1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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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 시절 그렇게나 싫어했었던 '역사'란 것에 근래들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세계사'란 거창.한 타이틀은 여전히 저에겐 버거운 분야입니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혼자 광화문의 교보문고엘 갔다가 '세계사 입문서의 결정판!'이란 말에 이 책을 집어들었었거늘, 읽어야 할 새 책을 고를때면 항상 저의 선택을 받지 못한채 그저 책장에 꽂혀져만 있었었던 이 책을 문득 꺼내든 이유는... 이 책의 저자나 출판사에겐 죄송하지만 아주 거대.한 다른 책을 읽어내기 전의 준비운동을 위한 것이었었습니다. 만 그 '거대'한 책은 정말로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그 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과연 지금의 제 심리상태?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지 못할듯해 당분간은... --;;

 

………………

 

독일어로 씌여진 원저의 제목 <젊은 독자를 위한 세계사>에서 알 수 있듯이 무지막지하게 전문적인 역사책은 아닙니다. 또한 언젠가 남경태C의 글을 통해서도 읽었었듯이 - 역사공부가 직업이 아닌 일반인이 과연 고려시대의 관청 이름들을, 조선시대의 서적 이름 등을 굳이 알고 있어야하느냐란 내용이었었는데, 제가 격!!!하게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게 바로 그러한 것들이 저로 하여금 역사를 싫어하게 만들어준 원인들이었기때문이었지요. - 이 책도 세세한 항목들에 관한 서술보다는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헌데 번역을 잘하신건지 아님 원래 저자의 글쓰기가 그러하신지 상당!히 매끄럽고, 심지어는 '이렇게 술술 넘어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 "흐름"이란게 너무도 자연스럽.더군요.

 

당신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공책 같은 옛날 물건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가? 예전에 쓰던 공책을 넘기다 보면 그새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깨닫고 놀라게 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당시에 쓴 글을 읽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부끄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그런 옛날 물건을 꺼내 보지 않았다면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이 책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라 여겨지는 것은 '재생' 혹은 '부활'을 의미하는 <르네상스>시대를 이야기하는 장의 도입부를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공책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는 저에게 그야말로 감탄.을 아니금할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1935년에 초판이 나왔었던 책이기에, 또한 저자가 독일인이기에... 라는 두 가지 이유로 저자 스스로도 "우리가 지금까지 세계사라고 부른 것은 사실 세계 전체의 역사라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지중해 지역, 그러니까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북아프리카 등은 포함하는 지역이 주요 무대였다." 라고 책 중간에 고백하고 있듯이 중국과 인도, 그리고 일본에 관한 아주 간략한 몇 장을 제외하고는 사실 '세계사'책이라 부르기엔 약간 민망할 수도 있는 범위를 커버하고 있습니다만, 책 제목에 크게 개의치 않을 수만 있다면 이 책은 딱히 흠잡을 데 없는 개론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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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계사에서 가장 재미있게 여기는 점은 그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일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꾸며 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역사'란 것을 공부하면서 느끼게 되는 점을 아마 위의 세 문장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문구를 다시 만나게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치 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설마 아무리 옛날이라고해도 사람이 어찌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가... 하는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는 '엄연한 현실'이었다라는 거, 저자의 말대로 '사람들의 생각은 서서히 바뀌며 스스로는 이를 감지하기 어렵다'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느낀 가장 커다란 한가지를 꼽으라면 역사란 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옛날의 어느 날 당시에는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었으며, 그처럼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던 당연한 것들이 결국 '당연한 것'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져가는 일 과정이 아닐까하는 새로운 깨달음인듯 싶네요.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자면... 저에게 1/11,492,389의 자부심이 아닌 '원죄적 책임'을 부여해주신 '그 분'의 5년은 응당 '반역사적 시간'이었다라 말해도 되지않을까도. - 응? 아니, 내가 이런 말을???)

 

 

상당히 두꺼운 책입니다만 워낙 잘 씌여진 글인지라 이틀간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시청을 포기(?)하는 댓가로 모두 다 읽어낼 수 있더군요. "지혜로운 말은 녹색의 보석보다 구하기 어럽지만 맷돌을 돌리는 가난한 하녀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는 고대 이집트의 경구야말로 요즈음 지칠대로 지쳐있는 제게 유일한 '낙'이 되어주고 있는 이 '책읽기'가 건네어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엄청 재미있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머릿속에 남는 것이 꽤 된다라고도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심지어 저는 이 책을 그저 어떤 '거대'한 책을 읽어내기 이전의 준비운동.쯤으로 대했습니다만 유럽의 역사를 부담없이 '흐름'으로 이해해보고고자 한다면 상당히 유익한 책이 되어줄 수 있을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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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거꾸로 읽는 책 25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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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인생의 황금기인 20대를 보내야 했던 우리 세대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독재권력과 싸움을 벌였다. 압도적으로 강한 정치권력과의 싸움에서 우리 세대는 민중의 힘과 역사의 진보를 믿고 의지했다. 대학의 강의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역사를 배운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에게 단순한 관찰과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는 역사가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는 삶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 1994년 쓴 '책머리에' 중 

 

<역사란 무엇인가1>라는 제목의 첫 단원에서 저자는 이제껏 제가 읽어왔었던 역사 관련책들에서와 마찬가지의 정의를 내리며 이 책을 시작합니다.

 

역사가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야기'인 한 '이야기하는 사람'이, 다시 말해 역사가가 자기의 기분이나 희망, 나름의 세계관이나 이해관계에 맞추어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p15)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실례로 저자는 '묘청의 난'을 이야기합니다. 묘청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성격을 배제하고서라도, 그 '묘청의 난'이 김부식이라는 인물에 의해 진압되었다라는 것, 그리고 그 김부식이라는 인물은 다름아닌 우리가 이제껏 삼국시대 역사의 모든 것으로 배워왔었던 「삼국사기」의 저자이며, 당시 사대주의 세력의 대표주자였었던 그에 의해 씌여진 그 「삼국사기」는 역사가 김부식이 '그러했으리라고 믿고 싶어했거나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라는 것이죠2.

 

이후 책 중반부까지의 내용은 '역사학의 역사'를 다루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과거의 역사'라고 알고 있는 사실들이 기실은 당시의 지배층과 권력자들이 자기네의 관점에서 자기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사료들을 기초로 한 것일 뿐이며, 이는 그들이 역사를 '과거의 사실을 모아 후세에 전달함으로써 기억을 연장'하는 수단정도로 인식했던 데다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내적인 인과관계를 살피기보다는 운명이라든가 신의 섭리 같은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집트의 피라미드같은 건축물이라던가 왕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각종 귀중품들이 당시 지배층들이 누렸던 권력의 크기나 부귀영화에 대해선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지 모르나 그것을 만드는 일에 동원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러한 역사가 '기록에서 서술'로 발전된 첫 작품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들고 있는데 이 책이 가지는 의의는 물론 그 방대한 양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회와 역사를 파악하고 서술한 사마천의 관점'에 있다고 말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마천이라는 인물의 위대함(!)에 상당한 감탄을 했었었다는.)

 

이러한 역사서술에서의 변화는 서양에서도 발생하였는데, 그 시초는 역사를 신학으로부터 해방시켜 속세의 학문으로 되돌려놓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역사가들이었습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실증주의 역사학3'이 등장하게 되고 이 실증주의 역사학을 비판4한 랑케의 '역사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랑케는 '모든 시대는 다음에 오는 시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다른 시대와 동등한 의미를 지니며, 그러하기에 역사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일반적인 법칙에 역사를 끼워 맞추려 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원래 있었던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었지요.

 

허나 이러한 랑케의 사관 역시 역사적 사실들을 철저하게 고증하고 사실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의의를 가지고 있으나, 역사가라면 그것을 뛰어 넘어 어떠한 사건이 다른 역사적 사실과 묶여졌을때 가지는 의미까지를 해석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게됩니다.

 

● 미국의 역사가 베커는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예컨데 1517년 유럽의 카톨릭 교회가 면죄부를 팔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보자. 이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중세 카톨릭 교회가 저지를 부정과 타락, 중세 유럽을 지배한 무지와 터무니없는 미신 따위와 아울러 루터가 벌인 종교개혁운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해주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p96)

이어 저자는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가 아닌 역사학자로서의 마르크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역사·철학·경제학 등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만, 그의 학설을 낱낱이 이해하기란 또한 저에겐 여간 난해한 것이 아니더군요. 헌데 저자는 저의 무릎을 탁!하고 치게 만들 정도로 아주 쉬운 언어로 그의 역사관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이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평등하고 자유를 억압한 과거의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역사의 진보를 이루었다는 관념론적인 견해는 얼핏 보기에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왜 그런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5. (p126) ……… 소수의 사람이 사회의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계급사회에는 필연적으로 계급 사이의 적대적 대립이 생긴다. 기존의 사회체제 아래서 혜택을 누리는 계급은 낡은 생산관계와 사회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반대의 처지에 있는 계급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이렇게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들은 서로 투쟁하면서 통일되어 있다. 예컨데 노예가 없으면 노예 소유자도 있을 수 없고, 농노가 없으면 봉건 영주도 존재할 수 없으며, 임금 노동자 없이는 자본가도 없다. 이들 적대적인 계급들은 서로 투쟁하면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체제라는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급 사이의 투쟁, 이것이 바로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대립되는 요소들 사이의 투쟁이며 역사의 발전을 이끌어 온 원동력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이것을 가리킨다. (p121)

이처럼 마르크스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피지배 계습의 일원으로서 생산에 참여하고 불합리한 사회질서에 맞서 투쟁한 수많은 (과거엔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피지배 계급들이었던) 대중을  역사의 창조자이자 진보의 주역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후의 역사서술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서 보듯, 인간은 추상적 개인이나 민족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일원으로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허나 전 세계의 여타 식민지 종속국들처럼 수 천년의 역사동안 수없이 많은 외적의 침략을 받아왔었고, 근세에조차도 무려 40여년 동안 일제의 노예로서 살아왔던 우리 민족에겐 마르크스가 깨닫지 못했을 고유의 '민족주의'라는 것이 있지요. 또한 이 '(우리만의) 민족주의'는 백인의 인종적·문화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유색 인종에 대한 멸시를 갖고 있는 유럽의 그것관 달리, 남의 간섭이나 억압을 받지 않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야한다는 사상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만의) 민족주의'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았던 두 분의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과 신채호 선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고 공간부터 확대하는 정신적 상태의 활동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 역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인 것이다. 무엇을 我라 하며 무엇을 非我라 하는가? 깊게 팔 것 없이 간단히 말하면, 무릇 주체적 위치에 선 것을 我라 하고 그 밖에는 非我라 하는데, 이를테면 조선 사람은 조선을 我라 하고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을 非我라 하지만,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은 각기 제 나라를 我라하고 조선을 非我라 하며, 무산 계급은 무산 계급을 我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非我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등은 각기 저의 무리를 我라 하고 무산 계급을 非我라 하며,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에 무엇이든지 반드시 중심이 되는 我가 있으면 따라서 그에 대립하여 맞서는 非我가 있고 …… 그리하여 我에 대한 非我의 접촉이 잦을수록 非我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그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앞길이 완성될 날이 없으니, 그러므로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신채호6「조선사 총론」 제 1장 중 (pp158-159)

물론 박은식과 신채호의 역사관은 당시의 특별한 시대 상황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지만, 이들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을 탐색하기보다는 민족 사이의 투쟁이라는 측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는 '하나의 특수 사관에 불과하다'는, 또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는 '특정한 목적에 따라 연구하는 비과학적 목적사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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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책창엔 언제 읽혀질지 가늠조차 되지않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만약에 한국사」란 책이지요. 사실 이 책을 예전에 한 번 집어 들긴했었었는데, '만약'이 아닌 '史實'도 알지 못한 채 이 책을 읽어서는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강준만 교수가 집필한 23권(?)짜리 「한국 현대사 산책」이란 책을 구입했었고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나 다시 「만약에 한국사」를 집어들려 했지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이란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며 시작되는 <역사에서의 우연과 필연>란 제목의 장에서 저자는 역사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때때로 매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또한 그러한 우연이 역사를 전면적으로 지배할 수도 없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 1987년 '6월 항쟁'의 전후를 서술한 뒤, 당시 박종철군의 죽음이나 은폐 조작의 진상 폭로와 같은 '우발적인 사건'이 결코 '6월 항쟁'의 원인이 될 수는 없으며,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권력의 비민주적인 강권통치는 반드시 국민의 저항을 초래한다'라는 엄연한 역사적 인과관계에서 그 맥락을 찾을 수 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수많은 인과관계의 사슬이며, 역사에서의 '우연'이란 이러한 인과관계의 사슬을 단절시키는 사건, 다시 말해 '다른 역사적 사실과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맺지 않는 사건7'을 말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제 머릿속을 굳건히 지배하고 있는 고딩시절 세계사 선생님이 해주셨던 '역사에 가정은 결코 있을 수 없다'란 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책 「만약에 한국사」를 이제는 읽을 준비가 된 듯 하네요. '만약이 아닌' 사실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때의 '만약에'란 단어가 어떠한 뜻으로 쓰인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죠.  

 

이어지는 <영웅과 대중>에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란 것이 과연 영웅에 의해 만들어지느냐 아니면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냐에 관해 토인비의 '창조적 소수자'를 기반으로 저자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창조적 소수자/지배적 소수자'로 기록되는 자와 반역자로 기록되는 자의 차이를 케인즈, 루터, 전봉준 등 여러 역사적 인물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사마천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웅(창조적 소수자)의 상을 제시하고 있지요.

 

제일 현명한 위정자는 백성의 마음에 따라 다스리고, 차선의 위정자는 이익을 미끼로 이끌며, 그 다음의 위정자는 도덕으로 백성을 설교하고, 또 그 다음의 위정자는 형벌로 백성을 길들이며, 최하의 위정자는 백성과 다툰다. - 사마천 「사기」의 '화식열전' 중 (p59)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라든가 '역사가 심판해줄 것이다'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에 저자는 '역사는 정말로 심판을 내리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지요. '반민특위' 사건을 예로 드려 역사는 때때로 강자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어쩌면 그리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 세대에게 "너무 나서지도 뒤처지지도 말고 그저 중간에만 서라"라 교육시키셨던 이유도 모두 이러한 연유에 기인하고 있다라 말하고도 있습니다8. 허나 단기적으로는 역사 속에서 '정의'란 것이 거듭 실패하고 좌절하는 듯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결국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승리'의 밑거름이 되어왔다라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지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역사는 진보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역사의 종착점을 미리 내다볼 수 없다고 해서 역사의 진보 그 자체를 부정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 진보의 구체적인 내용은 역사의 실제적인 전개과정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이 그때그때 만들어가는 것이다. ……… 진보를 믿는 것은 역사가 어떤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당면한 과제를 인식하고 불합리한 사상과 제도를 고쳐 나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pp278-279)

 

 

 ……………

 

이제껏 읽었었던 역사관련 책들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의 책이었습니다. 개별 사건이나 개별 국가의 역사가 아닌 진정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요. 정통 역사학자가 저술한 역사책을 도외시한채 사회학 전공자나 경제학 전공자가 쓴 역사책만을 읽고 있는 저의 역사책 읽기가 약간은 염려스럽기도 했었습니다만, 어차피 현실에서의 역사.를 알고싶음이 그 독서의 목적이라면 이러한 방향이 크게 빗난간 것은 아닐 것이다라 그간 해왔었던 스스로의 변명이 드디어 떳떳한 자리매김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만큼 무척이나 진지하게 읽었던 책이기도 하구요.

 

얼마전 발간된 「어떻게 살것인가」의 표지사진과 이 책의 표지사진을 비교해보니 이분도... 많이 늙으셨더군요. 정치인이 아닌 '지식 소매상으로서의 유시민'에 열렬한 응원을 보태드리고 싶습니다.

   

 

★ More 'Food for Thought' : 남경태 著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유시민 著 「거꾸로 읽는 세계사」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도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

 

 


 

  1. E.H.카의 같은 제목의 책에 대해 저자는 '영양가는 풍부하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생소한 서양음식'과 같다고 말하고도 있습니다.
  2. 허나 저자가 특별히 김부식의 역사관만을 문제 삼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역사가로서' 특별히 비난 받을 일을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왕조 시대의 역사가들은 누구나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이나 가치관에 따라 '쓸 것은 쓰고 깎을 것은 깎아가며' 역사를 서술했다. 우리가 「삼국사기」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쓴 역사를 사실 그대로라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이 쓴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pp25-26)
  3.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인간의 행동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법칙에 따른다고 믿고, 역사적 사건과 사회현상을 항상 원인-결과 관계로 파악하려 하였다. 그들은 또한 자연과학의 연구 방법을 역사 연구에 들여와 각종의 사회 통계와 비교분석하는 등 과학적인 역사 연구 방법을 발전시켰다.' (p84)
  4. '랑케는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고 하면서 역사를 그것에 끼워 맞추려 한 실증주의 역사학을 단호하게 비판했다.' (p91)
    '(랑케는) 어떠한 합리적 개인도 민족이나 국가를 통하지 않고는 인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 그는 보편 법칙 대신 개별적인 사건과 시대에 대한 연구에 집착하면서 자기 나라의 제도와 법률과 전통과 관습의 독자적인 가치를 옹호했다.' (pp161-162)
  5. 이러한 마르크스의 의문은 '시장제도와 화폐'를 그저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관 달리 시장제도와 화폐의 출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었지요.
  6. 이 글에서 훗날 신채호 선생이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좌익 노선 혁명가로 변신하게 되는 일말의 근거를 찾을 수도 있겠네요.
  7. 이의 예로 클레오파트라의 미모, 레닌의 죽음, 루이 16세의 무능와 마리 앙트와네트의 허영 등을 들고 있습니다. (P210)
  8. "조선 건국 이래도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꾸지 못했던, 비록 그거싱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던,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던 패가망신 했단 말입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고 했단 말입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 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습니다. 눈감과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셨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보면서 살아라."였습니다. 80년대 시위하다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이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쯤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를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2002년 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후보 연설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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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주요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1. 이런 목적으로 씌어진 종류의 책들에서 가장 흔한 구성은 먼저 그 사상가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조류를 배경으로 그 사상가의 일대기를 서술한 뒤 그의 사상을 요약하고 몇 개의 쟁점들이나 후대의 영향을 논하는 식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류와는 다른 서술 방식과 구성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구성은 "현대의 '과학적' 관점은 어떻게 형성되어왔으며 그 속에서 이 사상가의 위치는 어떠한가"라는 시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여기에는 현대의 '전지적' 관점에 이른 필자와 독자가 그러한 완성된 진리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그 과학의 발생적 과정을 '회고하는' 식의 오만이 숨어 있다2. 하지만 이른바 '과학적'임을 표방하는 현대의 상식에 대해 그 근본 전제에서부터 다시 되짚어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현재의 상식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굉장히 오랫동안 책꽂이에 그저 꽂혀있기만 한 책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두꺼워 사뭇 읽기 시작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그 대부분이지만 가끔... 그 내용이 꽤나 버거.워(보여) 읽고자하는 시도를 못할 때도 있지요. 이 책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일단 그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무게감에 눌려 상당히 오랫동안 책꽂이에 그저 머물러만 있었습니다만, 유시민의 책 「경제학 카페3」를 읽다 생긴 궁금증이 이 책에 담겨져 있슴을 목차로부터 알게되고는,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당시 읽고 있던 「종횡무진 동양사」를 빨리 읽어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

 

희소성이라는 실존의 한계에 직면하여 우리는 각각 자신의 여러 목적에 서열을 부여한다4. 또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찾아 그 쓰임새를 살펴본 뒤 가장 중요한 목적부터 어떤 수단을 얼마만큼 동원하여 얼마만큼 충족시킬지를 결정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고의 능력을 '합리성rationality5'이라고 한다. 또 이렇게 알뜰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제화한다economize'라고 말한다. 동원해야 할 수단의 양을 최소로 하여 달성하는 여러 목적들에서 얻는 전체 만족의 크기를 최대로 한다는 의미에서 이는 '최적화한다optimize'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의 상식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시작으로 저자는 경제원론에서 다루고 있을 법한 경제학의 기본 용어들에 대한 정의들을 재고찰하고 있는데, 경제원론과 미시·거시 경제학을 공부해 본 분이라면 곧 이어지는 다음의 목차가 사뭇 의아할 지도 모릅니다. 우린... 그저 이런 것들을 논박조차 할 수 없는 공리.로만 배웠었기 때문이지요. 

 

 2. 경제에 대한 정의의 문제점들

 

(1) 모든 사회는 희소성에 시달려왔는가

(2)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가

(3) 모든 수단은 항상 희소한가

(4) 희소성에서 선택6은 경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5)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을 때, 항상 연필을 들고 뭔가 와닿는 부분엔 밑줄을 치고 그런 부분들을 핸드폰으로 찍어 보관하곤 하는데, 이 책의 2장은 그야말로... 한 문단, 한 페이지 어디 버릴 것 없이 찍혀지더군요. 이건 분명... '인간의 욕망은 정말 무한한가?'에 대한 저의 궁금증을 마치 사하라 사막을 걷다 만난 호프집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 한잔을 들이켰을 때의 만족감 그 이상을 풀어주었기 때문이지요. 저자에게 누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발췌·정리해 본 저자의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7.

 

● 희소성이란 상황은 "욕망은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 인간의 욕망은 정말 무한한가? ……… 인간이 갖는 구체적인 욕망8은 그 양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구체적인 욕망은 그 하나 하나가 무한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망이 무한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화폐에 대한 욕망은 아주 독특한 욕망이다. 이는 그 돈을 가짐으로 해서 자기 존재의 '미래의 가능성'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가 일정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그러한 욕망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희소한 것은 권력이지 재화 그 자체가 아니다. ………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벌어야만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의미의 사회적 권력을 얻을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따라서 권력을 향한 사람들의 무한한 욕망은 곧 화폐나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으로 나타나게 되고 경제는 희소성의 원리로 조직된다9. 따라서 경제는 희소성의 선택이라는 정의가 현실성을 갖게 된다. ……… 재화 자체에서 희소성이란, 주로 어떤 것을 희소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그 사회가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생겨나는 것10이지 그 수단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 여기서 분명해지는 사실은 희소한 것은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권력이나 서열이라는 점이다. 물질적 부를 가져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가 조직되어 있다면 권력의 희소성때문에 물질적 부도 덩달아서 희소해질 것이다. ………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현대 경제학의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며, 오히려 근대 서양 문명의 독특한 담론이라고 보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권력적 우위의 증거로 과시를 위해 소비하는 버릇이 나타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 유럽 문화의 반영물에 불과한 것이 바로 희소성 공리라는 것이다.

 

 

책의 시작에서 '경제'라는 단어가 현대경제학에서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 본 저자는 곧 그 '경제'라는 단어의 역사적인 변천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역시나 이 부분 또한... 경제사 교과서에선 발견할 수 없었던 흥미로움을 선사해주고 있지요 

 

경제economy라는 말의 어원은 '가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와 '다스린다'는 뜻을 가진 합성어근 nem-이 합쳐져서 생긴 말이다. 그대로 풀이해보면 '가정관리'라는 뜻이 된다. 이 가정관리의 기술,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인 oikonomikos는 '가정관리학'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  결국 그 기원에서 경제라는 말은 단지 가정의 살림살이라는 뜻이었다. 가정이라는 구체적이고도 독특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 내용이 규정되는 것이 경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제와 경제학의 내용은 윤리나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은 이를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 (그러다) 초기 근대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이 말은 '나라polis의 살림살이'라는 뜻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즉) 18세기 말까지 경제라는 문제는 국가라는 분명한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 포섭되어 있는 것으로서 여겨졌다는 점이다. 집안 살림이라는 의미에서 경제는 가정 내의 윤리,도덕,예절 등과 불가분의 것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정치경제도 나라 살림의 다른 영역들인 행정,법률,군사 등과 완전히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정치학,행정학,윤리학,철학 등과 같은 독립된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통합적 의미로서의 '경제'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이 풍미하는 19세기에 이르러서 가정이든 국가든 그 어떤 사회적 맥락도 전제하지 않는 그야말로 독자적인 인간 행동의 영역으로서의 '경제'가 되었고 따라서 이를 연구하는 '경제학'도 정치경제학이 아닌 순수 경제학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11가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경제적 행동은 사회적 관계와 독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는 그러한 경제활동의 결과물로 생겨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와 경제의 관계가 완전히 거꾸로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가부장이 하인에게 주는 돈은 액수를 결정할 때 물론 '순수'한 경제적 계산도 하지만, 하인 다루기의 정치적 기술, 신분 사회 유지의 도덕성, 동네 사람들의 눈치와 여론 등 모든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 또한 돈의 액수 이상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항상 질문은 "어느 정도의 임금이 적정한가"라는 당위의 문제12로 제기되게 마련이다. ………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그 반대다. "하인에게 얼마만큼의 임금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하인의 임금은 (시장에서) 어떻게 결정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답은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게 인구 증가율이나 경제성장률 등과 관련된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으로 '과학적·객관적'으로 주어지게 된다.

 

이제 저자는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어떠한 상호작용을 통해 탄생·발전되어왔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어느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 보여지는 것이 물론 달라지겠습니다만, 마치 이야기를 하듯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경제학의 시조라 불리우는 아담 스미스와 근대 경제학의 거두인 케인스의 자취를 볼 수 있더군요13.  

 

● 아테네의 민주정을 방대한 관료기구와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었다. ……… 아테네 민주정의 특성 때문에 국가의 업무는 간명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까지 집에서 애를 보다가 얼떨결에 제비14가 뽑혀 공직에 취임하게 된 뒷집 철수 아빠는 도저히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잡하고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관료기구는 아테네식 민주주의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폴라니의 지적이다. 시장경제는 바로 이 문제를 풀어줄 수가 있었다. 국가기구는 그렇게 엄청나게 복잡한 분배 업무를 일일이 관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일괄적으로 어느 정도의 화폐를 나눠준 뒤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 가서 알아서 조달하도록 맡겨두면 되기 때문이다. 주주의 체제의 고전적인 전형을 만들어냈던 아테네인들의 지혜와 슬기는 그것을 가능케 할 시민들의 자발적인 경제 체제로서 시장경제라는 또 하나의 발명품을 인류에게 안겨준 셈이다 

 

스파르타의 침입으로 펠로론네소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페리클레스는 모든 아테네인을 도시 성벽 안으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파르테논 신전 재건 등 대규모 공사를 벌인다. 전쟁 중에 무슨 신전 재건인가 싶겠지만 성벽 안에 모여든 평민이나 빈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정책이었을 것이다. 폴라니는 케인스적인 고용창출 정책의 역사적인 예로 케인스 스스로 얘기했던 이집트 피라미드15보다 이 파르테논 신전 공사가 훨씬 더 어울리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아테네인들이 이처럼 민주정을 발전시키기 위해 화폐와 시장경제라는 미증유의 모험을 감행했지만 화폐와 시장경제라는 제도는 민주주의 제도의 얌전한 종복으로 머무는 대신 결과적으로 폴리스의 정신적·도덕적 기초를 잠식해버리는 어두운 결론으로 귀착되고 맙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덕arete16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짐으로 아테네의 혼란을 교정해보려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처럼 타락해가는 아테네의 폴리스에서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데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자들에게 마음대로 할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 자유는 순식간에 방종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을 간파하게 되지요. 그래서 플라톤은 '마치 양떼가 자기 스스로에게 최선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더 잘 알고 있는 양치기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무지하고 세속적 욕망에 눈이 멀기 쉬운 우리는 그 철학자의 손에 우리의 행복을 맡겨야 한다17'고 주장합니다. 즉 플라톤을 거치면서 폴리스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관과 가치관, 나아가 일상에서의 구체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해답을 제시하는 교회와 같은 것으로까지 확장되고 이상화되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덕arete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스승인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18하고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행복한 삶'이란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발휘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인간 활동에 도전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 속에 있는 인간적 이성을 모두 끄집어내어 풍부하게 발전시키고 꽃피우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바깥 세상에 실현하여 세상을 더 아름답고 인간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19. '행복한 삶'이 이렇게 정의된다면 반드시 그것이 가능한 장으로서의 사회적 환경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폴리스가 그 역할을 해야한다고 보았지요. 그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모인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에서 가정경제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폴리스'라고 주장하며 폴리스의 삶을 살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먹고 산다는 것 외의 어떤 인간적 형상도 갖지 못한 짐승 같은 존재이거나 아니면 다른 동료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충분히 윤리적·미학적 삶을 살아가면서 형상을 완성할 수 있는 신, 이 둘 중의 하나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이렇게 '행복한 삶'에 대해 집단적인 답을 줄 폴리스가 형성된다면 가정경제도 단순한 물질적 자급자족만이 아니라 그 행복한 삶을 실천할 윤리적·인간적 삶의 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지요. 즉, 가정경제는 단순히 폴리스의 좋은 생활에 필요한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생활의 장이라는 이론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끄는 기술은,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언뜻 진부해 보이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논점이 내포되어 있다. 당시 그리스에서도 획득의 기술이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그냥 돈벌이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나아가 가정관리의 기술이란 사실상 이 획득의 기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 이러한 사고방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가정의 기술'과 '단지 물품과 재물을 획득하는 기술'을 명확히 구분하며 오히려 전자가 후자를 하위의 기술로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경제 행위에서의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20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현인이었던 솔론의 "부에 관한 한 인간에게 정해진 크기의 한계란 없다.'는 주장과는 달리 '인간의 활동에서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지만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21(하지만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의 양에 제한받지 않는다22!)'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지요.

 

헌데, 당시 그리스인들은 이 '획득의 기술'을 '돈벌이 기술'이란 말과 동일시하고 있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돈벌이 기술'이란 것이 어떻게 발생되었으며 '집안 살림으로서의 획득의 기술'과 달리 왜 비자연적23이고 위험한 것인가를 밝히는 최초의 과학적 분석을 시도합니다. 자급자족의 가정경제, 혹은 그것이 조금 더 커진 촌락의 경우에는 거래 당사자들이 각자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직접 맞바꾸던 물물교환24의 형태 즉 <C25-C>이었으나, 식민 도시 혹은 외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면서부터는 거래의 편의를 위해 화폐가 중간이 사용되는 <C-M26-C>의 형태를 띠게 되지요. 일단 이렇게 화폐가 사용되면서부터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부wealth'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이제와 같이 생활에 필요한 구체적인 물품의 획득이 목적이 아닌) 이 화폐 자체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 즉 '돈벌이 기술로서의 획득의 기술'이 등장하게되고 이때부터의 거래는 <M-C-M'27>, 심지어는 <M-M'>의 고리대금업까지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지요28.

 

아리스토텔레스는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보았지만, 위와같은 영리적 상업(M-C-M')이나 고리대금업(M-M')은 행복한 삶과는 무관한 '돈벌이'라는 자체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화폐에 대한 욕망은 무한한 것이 되고29 훗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말이 생겨날 여지가 바로 여기서부터 생겨난 것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하여 드디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란 공리의 근원을 찾아냈네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보다 폴리스나 가정경제와 같은 사회가 선행한다고 보았으나, 근대 초기인 16세기 이후 '로빈슨 크루소'라는 상징에서 잘 드러나듯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이란 짐승이라기보다는 본원적인 인간의 전형이라는 사고방식과 함께 그에 걸맞는 경제체제와 사고방식이 서서히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의 탐욕과 허영심이 무조건적으로 죄악시되던 시대상에서 서서히 그 탐욕과 허영심으로 인해 인간 세상이 유지되고 심지어는 발전하기까지 했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여전히 그러한 것들의 '무제한적인 허용'은 금기시 되어왔지요. 이때 나타나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이 경제사상사에서 혁신적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탐욕과 허영심의 무제한적인 허용을 더이상 죄악시하지 않았다는데 있다는 겁니다.

 

아담스미스는 상인들이라는 족속들은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고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러한 그들이 추구하는 이기심이 때로는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사회 복지를 위협하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탐욕을 추구하여 이리저리 날뛰는 개인들의 이전투구 속에는 결국 그 난장판을 조화와 화합으로 이끄는 신의 섭리Providence가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바로 그 하느님의 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개개인의 탐욕 추구과 사회의 이익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오히려 신께서 사회의 조화와 발전을 이끄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 개인들의 이익 추구인 것이다. 따라서 무제한의 이익 추구란 오히려 사회를 구성할 새로운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에 들어서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이 부정되는 방향으로 흐르는 조류가 나타나는데, 이에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 반격을 시도하다]라는 소제목이 달리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통해,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몇천 년 전 맹아의 모습으로만 나타났던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제시한 몇 가지 테마들을 빌려 경제사상사가 연주해온 푸가를 감상해 보는 것'으로 그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읽겠다.라는 다짐은 사실 그리 이루기가 어려운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얇은 소설책으로 그 권수를 채울 수도 있겠고, 마을버스 안에서도 읽을 수 있을듯한 흔하디 흔한 힐링류의 책들로 서재를 채울 수도 있으니까말이죠. 허나 본문 페이지 수가 겨우 '165'에서 끝이 나는 (게다가 문고판 사이즈라니!!!) 이 책은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조차 쉽사리 되지 않았을만큼 참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고,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이후로 가장 무거운(?) 경제서적이었던 이 책을 단 두 번의 독서로 그 무게를 감당해내기엔 여전히 저는 많이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저 제가 읽었던 책들에 대한 간략한 기록.정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이 글쓰기를 이 책.에서만큼은(최소한 제가 관심있던 부분에 한해서는) 문맥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가급적 기록할 수 있을 때까지 꼭 기록해놓고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경제학을 한번도 공부해보지 않은 이에게는 이 글이 재미없고 지루하겠습니다만, 최소한... 그저 학점따기에만 급급하게 학부생활을 보내었으나 그래도 그 4년간 배웠던 경제학에 약간의 애정이라도 남아있는 경제학과 학생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어쩌면 그러했던 4년의 학부생활보다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보게도 됩니다.

 

이 책은 칼 폴라니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라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만, 유명 주방장이 만든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고나서 그 소고기를 제공한 소를 그 주방장이 직접 키우지않았다하여 타박할 이 없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칼 폴라니에게서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 모두가 이러한 책(스테이크)을 써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보면 저자의 뛰어난 요리실력에 사뭇 존경의 인사를 아니드릴 수 없지요. 아주 샅샅이 두 번을 연이어 읽어내었습니다만, 이 책을 읽고 쓴 이 글이 감히 '서평'의 단어를 취할 수 없슴을 제가 먼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또 다시 꺼내어 읽게되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간간이... 이 포스트를 읽어보며 지금의 감동을 이어가고 싶었기에 장황하게 써내려간 이 글은 결코 저의 글이 아니며, 오로지 저자의 글을 이리저리 발췌하여 정리한 것일 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마치 요즈음의 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추위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던 2013년의 3월을 그나마 이토록 흥분되게 보낼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문헌 

 

- 「미시적 경제분석」 강태진 외, 박영사. 1996.

- 「경제의 교양을 읽는다 (고전편)」, 홍훈 외, 더난출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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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김형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이글루스에서 "산하의 썸데이서울"이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일명 '산하의 오역'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는 저자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모아 낸 책입니다. 

 

우선 '오역'은 '오늘의 역사', 그 날짜의 역사입니다. 둘째로는 '나만의 역사'를 뜻하는 '오역吾歷'입니다. 또한 그러하다보니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경계해야하는 '오역誤歷' 일 수도 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건, 사물,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는 전달하는 사람의 시각과 주관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고, '오역'이란 그 와중에 당연히 발생할 것이니까요.

여타의 역사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저자 자신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는 해석임을 고백하며 시작하고 있지요. 유시민과 강준만의 책에 감동받았다는 말로 인해 요즘 들어 명마회 내에서 '셀프 좌빨'이란 우스갯 소리를 듣고 있기도 한 저입니다만, 확실히 만약 2-3년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이런 좌빨같은...'이란 혼잣말을 내뱉었을 것이 분명한 저도 2013년의 현재엔 이 책을 읽고 '가슴 아팠고, 많이 배웠'다란 말을 아니내뱉을 수 없게 변해(?)있더군요.  

 

음력에서 양력으로의 변환으로 인해 약 40여일이 사라져버린 1월 1일.을 시작으로 이 책이 담고 있는 '그들이 살았던 오늘'이 시작됩니다. 이처럼 이 책에는 개인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는 역사적 事實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그 백미는 수많은 하루하루들이 모여, 또한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지금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점이죠. 국민학교때 구구단을 외웠던 이가 중학생이 되어 2차방정식을 배우게되고, 미적분을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당시당시에는 도대체 그런 것들을 왜 배워야하는지 알 수 없었었지만 결국 그러한 것들이 모여 (어쨌든! 현실적으로는) 대학엘 입학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켜주었으며, 또한 그 이후의 학업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어주었었듯이 어느 날 갑자기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국민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탄생되었으며, 원래.부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자유가 이 땅 대한민국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어찌보면 참 단순.한 진리가 바로 '역사'라는 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가장 커다란 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1990년 3월 9일의 '오늘'은 공사판과 파출부일로 각각 집을 나서야했던 다섯살 혜영이와 세살 영철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걱정되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이 방안에서 놀꺼리가 없어 성냥을 만지작거리다 화재가 나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화재로 자신의 두 아이들을 잃게 됩니다. 만약 집으로 배달되어 온 조간신문속 '기사'로 이 이야기를 접했더라면 아마도 '무책임한/무자비한'이란 형용사들을 앞에 붙여 혜영이와 영철이의 부모를 잠시 탓하고마는 그리 길지 않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이 슬픔 사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오역吾歷'을 이야기 해줍니다.

 

보육시설 확대를 주장하면 "애는 엄마가 길러야지"식의 논리가 정면으로 박치기 하고 나서는 (1990년 당시의) 분위기였다. 보육은 부모의 책임이지 사회가 뭘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암담함 속에서 파출부 나가는 엄마는 자물쇠를 잠가야 했고 아이들은 뜨거워지는 벽과 문을 긁어 대다가 숨이 막혀야 했다. …… 세상에서 가장 옳은 명제는 어쩌면 가장 잔인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가정은 지켜져야 하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옳고 지당한 책임을 사회가 전담 내지는 분담하지 않고 개인에게 떠밀 때, 옳아서 더욱 단단하고 마땅하여 배로 갑갑한 명제의 동아줄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목을 잡아 죈다.

이처럼 저자는 미처 제가 깨닫지 못해왔었던 것들을 차근차근 저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정무역'이란 단어와 '버스 노조 파업'이란 두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의 부정적 선입견을 1852년 3월 20일 '해리어트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란 책이 출간되었던 그 '오늘'을 통해 '이제 한번쯤 달리 생각해보지 않으련?'이라 묻고 있기도 하지요. 여전히 노예제도가 합법이었던 미국에 살았던 그녀는 이미 노예제도가 폐지된 영국1에 가서 다음과 같은 강연을 합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영국인들을  "외식하는 사람"이라 강하게 비판한다.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이 표현을 쓴 이래 기독교인에게 "외식하는 사람"은 '개새끼'에 맞먹는 욕설이다. 그녀는 이렇게 얘기한다. "(제가 그런 표현을 쓴 것은) 여러분들은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진작 폐지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하지만 미국 남부에서 노예들의 강제 노동으로 재배된 면화의 80%가 영국으로 수출되고 있는 현실은 묵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국이 이렇게 재배된 면화에 대한 수입을 거부하면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사라질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서 당신의 이익 1페니를 희생할 수는 없습니까?" …… 버스 노조가 파업을 벌여 버스가 오지 않으면 그 이유를 차치하고 욕설부터 튀어나오는 우리에게도 스토는 안타깝게 물어 올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로잡기 위해서 당신의 즐거움을 조금만 희생할 수는 없는가요?"

물론 버스 노조의 파업이 '세상을 바로잡는'것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책을 읽는다'라는 것이 이제껏 내가 가져보지 못했던 사고의 다양성을 타인으로부터 듣는다.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히... 저자의 물음은 그 누구에게도 던져져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톰아저씨의 오두막>에서 노예인 톰 아저씨가 악덕주인인 레글리의 손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인님이 제 몸을 사셨을지는 모르지만 제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라는 부분에선 여전히... '그의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을 샀을 뿐이지 그 사람의 인격 자체까지를 산 것이 아님에도 이해되지 않는 폭행과 폭언들을 감내하고 있다는 2013년 대한민국의 대리기사 아저씨들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책은 이처럼 이제껏 제가 모르고 지내왔던 것들을 친절하게 끄집어내어 단순히 어떤 '오늘'에 어떠한 '일'이 있었었다.라는 것 이외에도 마흔 다섯.의 나이가 되도록 벗어나지 못했던 사고의 틀을 단 몇 페이지의 글로 저 스스로 깨뜨려버리게도 해줍니다. 1997년 1월 10일의 '오늘'이 바로 그 중 하나였지요. 그날 명동에선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사복형사들이 잠복근무중이었었고, 세 명의 소매치기를 발견한 한 형사가 그들을 덮칩니다만 그 형사는 소매치기들에 의해 칼부림을 당하게 됩니다. 순간 수많은 사람들은 비명과 함께 물러서지만 근처 가게에서 일하고 있던 이근석이란 청년은 그 소매치기들을 향해 맞서 싸우기위해 달려들었고 그 또한... 소매치기의 칼에 죽음을 당하게 되지요.

 

그 소식을 듣던 날, 동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칼 앞에 몽동이라도 하나 들어어야 한다는 중, 너무 무모했다는 둥 사설을 달고 있었다. 그때 한 선배가 그 구설들을 한마디로 틀어막았다. "용기 없으면 용기 있는 사람 존경이라도 하자.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그랬겠냐." …… 명동 거리에 세워진 이근석 기념비. 망설이고 주춤하고 외면하려는 찰나 "이건 아니지!"하면서 성큼 한 발을 내미는 이, 우리는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인이 의인으로 대접받는 예보다 그렇지 못한 예가 훨씬 더 많음이 아쉽고 부끄럽다. 용기라는 건 남보다 한발 더 나가는 것이다.

 

삶 속에서 그 한발이란 암스트롱이 달 위에서 내딛은 한 걸음보다 더 어렵고 멀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발을 내딛었다가 상처받은 사람의 용기를 기리기보다 한발 나서지 않아 온전할 수 있었던 지혜를 대견스러워 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 …… 착하게만 살다가 용기의 대가로 목숨을 잃은 청년 이근석은 명동 길거리에 덩그러니 세워진 추모비 하나로 세상에 남아 있다. 명동 거리에서 우연히 이 추모비와 마주친다면 잠시라도 멈춰 서서 한 청년의 명복을 빌어 주기 바란다.

아무리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라 한다지만, 굳이 이 책의 다른 부분에 나와있는 "1970년 청계천 재단사 전태일의 유서와 2003년 한진중곱업 노조 위원장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고 통탄했다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말까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또한 그 사회의 일원인 저는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한발 나서지 않아 온전할 수 있었던 지혜를 대견'스러워하고 있었슴을 난생 처음.으로... 부끄럽다.란 말로 표현하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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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이후 발생한 사회적 혼란와중에 조선인들이 그 혼란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를 하며 지진에서 살아남은 일본인들을 살해하여 봉기를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고 결국 조선인 대학살을 불러오게 되는데, 그러한 소문을 조작하여 유포한 이는 사회주의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열혈경관 쇼리키 마쓰타로 였었었지요. 이후 그러한 소문을 유포한 죄로 경찰복을 벗은 그는 요미우리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 야구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창단하여 '일본 프로야구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이승엽 선수가 더 이상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수가 아니긴 하나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때와는 사뭇 달라지더군요. 이미 땅 속에 묻혀있을 쇼리키 마쓰타로는 이 사실을 알게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고등학교 2학년 사회시간에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너네들 중국 공산당이 하는 고문중에 가장 무서운게 뭔지 알아?' 용의자의 사지와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고 10초에 한방울씩 그의 이마위에 물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물방울 하나가 뭐가 대수겠냐.싶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물방울의 무게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 된다.고 하셨었지요.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겉모습은 단순한 하루하루로 이루어진 '그들이 살았던 오늘'이지만 그것이 뱉어내고 있는 의미는 단순한 하루가 아닌, 표지에 씌여있는 글귀마냥 '웃고 울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선택하고 …… 그러다 시대를 바꾸기도 했던 365일'이었던, 당시에는 단순.해 보였을지 모를 과거.들이 쌓여 엄청난 미래.를 낳게해주고 있다.라는 것을 그야말로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기는 것이 시간이 가는줄 모르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90년 3월 9일 혜영이와 영철이의 '오늘'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공연장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할 수 밖에 없었었다는) 정태춘C의 <우리들의 죽음>이란 노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찾아 들어본 그 노래는, 만약 이러한 이야기를 알지 못했더라면 '뭐 이런 노래가 다...'라 말했겠습니다만 이젠... 차마 그 가사의 내용에서 귀를 뗄 수 없더군요.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감정의 공유'라는 건 어쩌면 지식의 습득을 전제로 한다... 가 아닐까하는 생각말이죠. 보고싶은 것만 보아왔었고, 아침마다 조선일보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을 읽으며 세상을 바라보아왔었던 저에게 불편하더라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세상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이 있으며, 때로는 나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고개숙여 경청해야하는 순간들 또한 참으로 많다.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듯 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저 개인의 역사 또한... 이처럼 '지금'엔 미처 훗날에의 그 영향을 알아채지 못했던 '오늘'들이 모여 또다시 '지금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었을꺼란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권의 책을 읽었다하여 저의 생각 전체가 바뀔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 책 속 다음의 문구를 새겨보며 '바로 지금의 오늘'이 어떠한 훗날을 저에게 안내해주게될 지 사뭇... 긴장되는 마음을 가져보며 감상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런 책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점점 더... '책을 읽는다'라는 것에의 새로운 매력에 푹~ 하고 빠져들게되네요.    

 

역사는 언제나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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