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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ㅣ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극장에서건 집에서건 자주 보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나마 좋아하는 영화는 별 고민없이 볼 수 있는 '때려부수고 싸우고 죽이는' 그런 영화입니다. 아! 물론 야한 영화도 별 고민없이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무지!!!하게 좋아합. 그렇게 부수고 싸우고 죽이는 영화에선 당연히 '철학' 뭐 이런 거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요. 헐리웃 영화에 스며들어 있다는 그 '미국 우월주의', 예를 들어 우주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데 왜 꼭 미국의 대통령이 전 세계의 대통령이 되어야하느냐? 이런 질문에도 '현실이 그렇잖아!'란 한 마디로 넘겨버릴 수 있고 또 넘겨버려도 괜찮다라 전 생각합니다. 부수고 싸우고 죽이는 영화니까, 미국이 그런거 잘하긴 하니까!!! 헌데 말이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게 영화의 스토리에 개입되기 시작하면 뭔가 좀 꼬이는 때가 있기도 하더군요. 'A라는 나라가 B라는 나라엘 쳐들어가서 B의 군대를 무찌르고 B의 영토를 빼앗는다'라는 스토리에서 도대체 왜 A가 B를 쳐들어간거냐라는 질문을 일단 빼버릴 수 있다면 - 이걸 대입시키자면 문제가 복잡해지니까요. --;; - 당하는 B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A가 미울꺼고, 쳐들어간 A의 입장에서도 끝까지 버팅기며 저항하는 B가 밉상으로 보이는거겠지요. 하나의 역사적 전쟁을 오로지 어느 한 쪽만의 시선으로 영화를 찍어낸다면 사전지식 없이 그 영화를 보게되는 관객들은 그 한쪽의 처지에 무방비 상태로 공감하게만 될 겁니다. 허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전쟁들 중 거의 대부분에서는, 그 둘을 무 잘라내듯 그렇게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구분지을 수는 없을꺼라는 게 제 얇디얇은 역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의 결론이거늘, (이에 대해 여기서는 그냥 이렇게까지만 말하는 걸로 하겠.) <300>이라는 아주 화끈!한 영화를 보면 스파르타를 쳐들어 온 페르시아는 일단 처음부터 별 상황설명도 없이 절대악으로, 그들에게 저항하는 스파르타군은 자동적으로 그 반대인 절대선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헌데 그 '선과 악'의 도식이란게 영화가 가지고 있는 줄거리의 전개를 위한 단순한 '도식'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페르시아의 군사들을 온갖 <괴상망칙한 괴물들>로 이루어져있는 것으로 나타내어 보여준다라는 데에서 바로 동양을 '미개하고 뭔가 굉장히 원시적인'이라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무의식적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라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건 뭐 그렇게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요. 조선 말,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더러운 마을 안에 있는, 더 더러운 집에서 살고 있는, 더더 더러운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잖습니까. 1990년대 중반에도 지네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내 신발에 개똥을 묻히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다녀야했던 기억을 선사해 주었던 바로 그 나라에서 온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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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되어 있기에, 또한 같은 동양권 문화의 정서를 가지고 있기에 위화의 「인생」이란 소설에 그처럼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있었던거라 생각했더랬습니다. 2014년의 독서를 한때 무지하게 유명했었던 어떤 영어책의 제목을 빌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란 생각을 해보았었고, 그 첫번째의 꼬리로 서양인이 쓴 '100세 노인'의 이야기를 그 다음의 책으로 골랐지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소설을 직접 읽어보기기 이전에는 그 소설에 대한 설명을 가급적이면 읽지 않으려 하기에, 이 책은 100세의 노인이 그의 일생동안 겪었었다는 파란만장한 세계사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 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만 뭐... 어쨌든 '인생'이야기겠거니!!! 하며 이 책을 집어들었던거지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이라 표현했습니다만, 이 꼬리가 어떻게 그 꼬리를 물 수 있는거냐란 질문엔 "모든 건 다 내 맘대로에요~"라 미리 대답해 놓는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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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그게... 진짜 정말이에요...?>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없단다>라고 할아버지는 대답하셨다.
작가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위와 같은 내용의 헌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인 즉슨,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들이 결코 진실만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책의 마지막에 나와있는 주인공 '알란의 100년 연보'를 통해 우리는 그 100년 동안 일어났었던 세계사의 주요 장면들을 볼 수 있으며, 그것들은 엄연한 진실입니다. 허나 작가의 상상력은 이러한 진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 모든 것들이 알란이라는 한 개인의 삶에 어떻게 연관지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허구를 기가 막히도록 멋!!!지게 만들어내고 있으며, 바로 그 기막히게 멋진 허구가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거지요.
주인공 알란이란 사람이 정치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길 극도로 꺼려한다라는 설정을 통해 소설은 애초부터 영화 <300>에서와 같이 역사에 대한 편향적 시각을 (무의식중에라도) 나타내게 될 우를 범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미리 제거해놓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동양'이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 어찌보면 소설 속 시대의 동양(중국, 한국, 인도네시아)이 아름답게 그려질만한 상황도 아니었지요 - 이러한 작가의 조심스러움(?)은 동양권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유머는 거의 배제시켜놓은 반면, 같은 유럽권인 영국이나 프랑스에 대한 풍자는 '나 이렇게 겸손하다구요!'의 표현으로 지나친 굽신거림을 보여주는 듯한 사뭇 과장된 면이 없지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틈만 나면 싸웠고, 그 중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 빌어먹을 마하트마 간디는 뭔가 못마땅한 게 있으면 먹는 걸 중단했다. 세상에 무슨 그따위 전략이 다 있는가?"
--- 영국령이었던 인도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향한 윈스턴 처칠의 말.
● "가만있자, 지금 미국 대통령 이름이... 존슨? 그래, 그자의 이름은 그냥 단순 무식하게 존슨이었어! 정말이지 미국 놈들이란 품격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단 말이야!"
---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을 싫어했던 드골의 독백.
● "이 난리를 시작한 것은 성 해방을 주장하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몇몇 학생 녀석들이었다. 그러더니 자기들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사회 시스템 전반까지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 원래 학생 애들이란 언제나 불평거리를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녀석들이니까."
--- 프랑스의 68혁명을 바라보는 드골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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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 알란을 중심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알란이 그의 일생동안 그 굵직굵직한 세계사들과 어떻게 연관되어왔느냐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신의 100세 생일날, 양로원의 창문을 넘어 탈출한 이후의 이야기들이지요.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 대부분이 동의하리라, 심지어는 작가의 의중 또한 아마도 같을꺼라 짐작되)는 당연히 알란 옹과 세계사가 이어지는 부분이 훨씬 더 흥미로웠습니다. 뭐 그렇다고 이 소설을 통해 세계사를 배운다거나하는 기대를 할 수는 없지만요.
알란의 삶은 사실... (이 소설의 옮긴이의 의견대로) 결코 '행복했다'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으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는 비교적 그가 어렸던 나이게 돌아가셨고, 지나치도록 섬세(?)한 스웨덴의 사회복지는 젊은 나이의 그에게 '거세'라는 의학적 보살핌을 선사해주기도 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비밀 정보국의 감옥에 투옥되어보기도, 실탄을 장전한 보초들이 노려보고 있는 군대의 수용소에서 짧지않은 세월을 보냈어야 했기 때문이지요.
알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알란에게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란 말을 해주었는데, 이 말은 이후 알란이 그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를 지배하는 하나의 '사상'이 되어버립니다. <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란 서술이 끝나자 마자, 얼음 빙판위에 서있던 알란의 앞에 그 얼음을 깨고 한 대의 커다란 잠수함이 나타나는 일이 생겼었습니다만, 이런 짜장면스런 상황에 대한 알란의 생각은 지체없이 바로 그의 그런 '사상'이 있었기에... "바로 이런 일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쓸데없다는 거예요. 내가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본댔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어요?"와 같은 말을 그의 입에서 나오게 해주는 겁니다. 그리하여/그러므로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만사는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줘야 하지. 왜냐하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거의 항상 그래."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본문 중.
● <인생>은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 또한 나는 <인생>이 ……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 「인생」 '한국어판 서문' 중.
이제 겨우(?) 우리 나이로 54살일 뿐인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 그리고 그보다 한 살 더 많아 우리 나이로 55살인 중국의 작가 위화는 이처럼 미묘.한 차이를 지닌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보이고 저의 미숙한 誤讀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하기에 결국 요나손은 <자신의 살아온 일생동안 단 한번도 삶을 낙관적으로 대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허나 그의 말년엔 스스로 "이제는 인생이 지겨워졌다. 왜냐하면 인생이 그를 지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란 생각으로 죽음을 기다리기도 했었던 '알란'이라는 노인>을, 반면 <비록 그의 말년엔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묻어주었다라는 것에 마음 놓아하지만 그의 젊음은 그에게 '허리때로 콱 목을 매 죽고 싶었다'란 생각을 하게도 했었을만큼 잔인했었던 인생을 살아왔던 '푸구이'라는 노인>을 작가 위화로 하여금 그려내게 만든, 뭐 이걸 작가가 다르기에 다른 인물이 그려진 것뿐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제가 믿고 싶은 바대로 이게 바로 '서양과 동양의 근본적 차이'인거라 말해도 되는건지, 혹 이 두 인물은 결국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는건 아닐지, 어쨌든 '인생' 더 좁게는 '인생으로부터의 즐거움'이 되어주는 대상, 반대로 더 나아가서는 '남은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서마저도 알란 옹과 푸구이 옹간에 분명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요. 더 이상은 너무 복잡하니 암튼 여기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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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뒷표지에도 나와있습니다만, '그' 영화를 본 분이라면 누구든 이 소설을 읽으며 <포레스트 검프>를 아니떠올릴 수는 없을듯 합니다. 영화가 미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었다라면, 이 소설은 '세계사 버젼'의 <포레스트 검프>라고나 할까요?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간략한 세계사 100년 연보를 보니 누군가의 한 평생이기도 한 그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실제로!!! 있었더군요. 물론... 지금의 세계는 그 100년간의 세계와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여전히... 알란 옹과 푸구이 옹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은 (그 둘이 결국 같은 것이든 약간/매우 다른 것이든) 그대로 다시한번 더 여전히!!! (최소한 저는 포함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런 공감이 종원군의 세대에까지도 이어질꺼란 장담은 결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종원군의 세대에서도 여전.히 무척이나 재미있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남을꺼란 장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고 말이죠. (이상하게도... 2014년의 독서감상문은 혀가 꼬이듯 계속 꼬이기만 하네요. 40대마저도 꺾.어졌다는 신호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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