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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주요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씌어진 종류의 책들에서 가장 흔한 구성은 먼저 그 사상가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조류를 배경으로 그 사상가의 일대기를 서술한 뒤 그의 사상을 요약하고 몇 개의 쟁점들이나 후대의 영향을 논하는 식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류와는 다른 서술 방식과 구성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구성은 "현대의 '과학적' 관점은 어떻게 형성되어왔으며 그 속에서 이 사상가의 위치는 어떠한가"라는 시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여기에는 현대의 '전지적' 관점에 이른 필자와 독자가 그러한 완성된 진리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그 과학의 발생적 과정을 '회고하는' 식의 오만이 숨어 있다. 하지만 이른바 '과학적'임을 표방하는 현대의 상식에 대해 그 근본 전제에서부터 다시 되짚어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현재의 상식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굉장히 오랫동안 책꽂이에 그저 꽂혀있기만 한 책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두꺼워 사뭇 읽기 시작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그 대부분이지만 가끔... 그 내용이 꽤나 버거.워(보여) 읽고자하는 시도를 못할 때도 있지요. 이 책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일단 그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무게감에 눌려 상당히 오랫동안 책꽂이에 그저 머물러만 있었습니다만, 유시민의 책 「경제학 카페」를 읽다 생긴 궁금증이 이 책에 담겨져 있슴을 목차로부터 알게되고는,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당시 읽고 있던 「종횡무진 동양사」를 빨리 읽어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
● 희소성이라는 실존의 한계에 직면하여 우리는 각각 자신의 여러 목적에 서열을 부여한다. 또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찾아 그 쓰임새를 살펴본 뒤 가장 중요한 목적부터 어떤 수단을 얼마만큼 동원하여 얼마만큼 충족시킬지를 결정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고의 능력을 '합리성rationality'이라고 한다. 또 이렇게 알뜰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제화한다economize'라고 말한다. 동원해야 할 수단의 양을 최소로 하여 달성하는 여러 목적들에서 얻는 전체 만족의 크기를 최대로 한다는 의미에서 이는 '최적화한다optimize'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의 상식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시작으로 저자는 경제원론에서 다루고 있을 법한 경제학의 기본 용어들에 대한 정의들을 재고찰하고 있는데, 경제원론과 미시·거시 경제학을 공부해 본 분이라면 곧 이어지는 다음의 목차가 사뭇 의아할 지도 모릅니다. 우린... 그저 이런 것들을 논박조차 할 수 없는 공리.로만 배웠었기 때문이지요.
2. 경제에 대한 정의의 문제점들
(1) 모든 사회는 희소성에 시달려왔는가
(2)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가
(3) 모든 수단은 항상 희소한가
(4) 희소성에서 선택은 경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5)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을 때, 항상 연필을 들고 뭔가 와닿는 부분엔 밑줄을 치고 그런 부분들을 핸드폰으로 찍어 보관하곤 하는데, 이 책의 2장은 그야말로... 한 문단, 한 페이지 어디 버릴 것 없이 찍혀지더군요. 이건 분명... '인간의 욕망은 정말 무한한가?'에 대한 저의 궁금증을 마치 사하라 사막을 걷다 만난 호프집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 한잔을 들이켰을 때의 만족감 그 이상을 풀어주었기 때문이지요. 저자에게 누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발췌·정리해 본 저자의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 희소성이란 상황은 "욕망은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 인간의 욕망은 정말 무한한가? ……… 인간이 갖는 구체적인 욕망은 그 양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구체적인 욕망은 그 하나 하나가 무한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망이 무한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화폐에 대한 욕망은 아주 독특한 욕망이다. 이는 그 돈을 가짐으로 해서 자기 존재의 '미래의 가능성'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가 일정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그러한 욕망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희소한 것은 권력이지 재화 그 자체가 아니다. ………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벌어야만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의미의 사회적 권력을 얻을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따라서 권력을 향한 사람들의 무한한 욕망은 곧 화폐나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으로 나타나게 되고 경제는 희소성의 원리로 조직된다. 따라서 경제는 희소성의 선택이라는 정의가 현실성을 갖게 된다. ……… 재화 자체에서 희소성이란, 주로 어떤 것을 희소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그 사회가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지 그 수단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 여기서 분명해지는 사실은 희소한 것은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권력이나 서열이라는 점이다. 물질적 부를 가져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가 조직되어 있다면 권력의 희소성때문에 물질적 부도 덩달아서 희소해질 것이다. ………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현대 경제학의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며, 오히려 근대 서양 문명의 독특한 담론이라고 보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권력적 우위의 증거로 과시를 위해 소비하는 버릇이 나타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 유럽 문화의 반영물에 불과한 것이 바로 희소성 공리라는 것이다.
책의 시작에서 '경제'라는 단어가 현대경제학에서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 본 저자는 곧 그 '경제'라는 단어의 역사적인 변천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역시나 이 부분 또한... 경제사 교과서에선 발견할 수 없었던 흥미로움을 선사해주고 있지요
● 경제economy라는 말의 어원은 '가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와 '다스린다'는 뜻을 가진 합성어근 nem-이 합쳐져서 생긴 말이다. 그대로 풀이해보면 '가정관리'라는 뜻이 된다. 이 가정관리의 기술,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인 oikonomikos는 '가정관리학'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 결국 그 기원에서 경제라는 말은 단지 가정의 살림살이라는 뜻이었다. 가정이라는 구체적이고도 독특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 내용이 규정되는 것이 경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제와 경제학의 내용은 윤리나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은 이를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 (그러다) 초기 근대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이 말은 '나라polis의 살림살이'라는 뜻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즉) 18세기 말까지 경제라는 문제는 국가라는 분명한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 포섭되어 있는 것으로서 여겨졌다는 점이다. 집안 살림이라는 의미에서 경제는 가정 내의 윤리,도덕,예절 등과 불가분의 것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정치경제도 나라 살림의 다른 영역들인 행정,법률,군사 등과 완전히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정치학,행정학,윤리학,철학 등과 같은 독립된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통합적 의미로서의 '경제'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이 풍미하는 19세기에 이르러서 가정이든 국가든 그 어떤 사회적 맥락도 전제하지 않는 그야말로 독자적인 인간 행동의 영역으로서의 '경제'가 되었고 따라서 이를 연구하는 '경제학'도 정치경제학이 아닌 순수 경제학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인간의 경제적 행동은 사회적 관계와 독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는 그러한 경제활동의 결과물로 생겨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와 경제의 관계가 완전히 거꾸로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가부장이 하인에게 주는 돈은 액수를 결정할 때 물론 '순수'한 경제적 계산도 하지만, 하인 다루기의 정치적 기술, 신분 사회 유지의 도덕성, 동네 사람들의 눈치와 여론 등 모든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 또한 돈의 액수 이상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항상 질문은 "어느 정도의 임금이 적정한가"라는 당위의 문제로 제기되게 마련이다. ………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그 반대다. "하인에게 얼마만큼의 임금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하인의 임금은 (시장에서) 어떻게 결정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답은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게 인구 증가율이나 경제성장률 등과 관련된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으로 '과학적·객관적'으로 주어지게 된다.
이제 저자는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어떠한 상호작용을 통해 탄생·발전되어왔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어느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 보여지는 것이 물론 달라지겠습니다만, 마치 이야기를 하듯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경제학의 시조라 불리우는 아담 스미스와 근대 경제학의 거두인 케인스의 자취를 볼 수 있더군요.
● 아테네의 민주정을 방대한 관료기구와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었다. ……… 아테네 민주정의 특성 때문에 국가의 업무는 간명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까지 집에서 애를 보다가 얼떨결에 제비가 뽑혀 공직에 취임하게 된 뒷집 철수 아빠는 도저히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잡하고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관료기구는 아테네식 민주주의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폴라니의 지적이다. 시장경제는 바로 이 문제를 풀어줄 수가 있었다. 국가기구는 그렇게 엄청나게 복잡한 분배 업무를 일일이 관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일괄적으로 어느 정도의 화폐를 나눠준 뒤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 가서 알아서 조달하도록 맡겨두면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고전적인 전형을 만들어냈던 아테네인들의 지혜와 슬기는 그것을 가능케 할 시민들의 자발적인 경제 체제로서 시장경제라는 또 하나의 발명품을 인류에게 안겨준 셈이다.
● 스파르타의 침입으로 펠로론네소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페리클레스는 모든 아테네인을 도시 성벽 안으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파르테논 신전 재건 등 대규모 공사를 벌인다. 전쟁 중에 무슨 신전 재건인가 싶겠지만 성벽 안에 모여든 평민이나 빈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정책이었을 것이다. 폴라니는 케인스적인 고용창출 정책의 역사적인 예로 케인스 스스로 얘기했던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이 파르테논 신전 공사가 훨씬 더 어울리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아테네인들이 이처럼 민주정을 발전시키기 위해 화폐와 시장경제라는 미증유의 모험을 감행했지만 화폐와 시장경제라는 제도는 민주주의 제도의 얌전한 종복으로 머무는 대신 결과적으로 폴리스의 정신적·도덕적 기초를 잠식해버리는 어두운 결론으로 귀착되고 맙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덕arete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짐으로 아테네의 혼란을 교정해보려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처럼 타락해가는 아테네의 폴리스에서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데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자들에게 마음대로 할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 자유는 순식간에 방종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을 간파하게 되지요. 그래서 플라톤은 '마치 양떼가 자기 스스로에게 최선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더 잘 알고 있는 양치기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무지하고 세속적 욕망에 눈이 멀기 쉬운 우리는 그 철학자의 손에 우리의 행복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플라톤을 거치면서 폴리스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관과 가치관, 나아가 일상에서의 구체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해답을 제시하는 교회와 같은 것으로까지 확장되고 이상화되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덕arete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스승인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행복한 삶'이란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발휘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인간 활동에 도전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 속에 있는 인간적 이성을 모두 끄집어내어 풍부하게 발전시키고 꽃피우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바깥 세상에 실현하여 세상을 더 아름답고 인간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복한 삶'이 이렇게 정의된다면 반드시 그것이 가능한 장으로서의 사회적 환경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폴리스가 그 역할을 해야한다고 보았지요. 그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모인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에서 가정경제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폴리스'라고 주장하며 폴리스의 삶을 살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먹고 산다는 것 외의 어떤 인간적 형상도 갖지 못한 짐승 같은 존재이거나 아니면 다른 동료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충분히 윤리적·미학적 삶을 살아가면서 형상을 완성할 수 있는 신, 이 둘 중의 하나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이렇게 '행복한 삶'에 대해 집단적인 답을 줄 폴리스가 형성된다면 가정경제도 단순한 물질적 자급자족만이 아니라 그 행복한 삶을 실천할 윤리적·인간적 삶의 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지요. 즉, 가정경제는 단순히 폴리스의 좋은 생활에 필요한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생활의 장이라는 이론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 가정을 이끄는 기술은,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언뜻 진부해 보이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논점이 내포되어 있다. 당시 그리스에서도 획득의 기술이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그냥 돈벌이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나아가 가정관리의 기술이란 사실상 이 획득의 기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 이러한 사고방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가정의 기술'과 '단지 물품과 재물을 획득하는 기술'을 명확히 구분하며 오히려 전자가 후자를 하위의 기술로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경제 행위에서의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현인이었던 솔론의 "부에 관한 한 인간에게 정해진 크기의 한계란 없다.'는 주장과는 달리 '인간의 활동에서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지만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하지만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의 양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지요.
헌데, 당시 그리스인들은 이 '획득의 기술'을 '돈벌이 기술'이란 말과 동일시하고 있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돈벌이 기술'이란 것이 어떻게 발생되었으며 '집안 살림으로서의 획득의 기술'과 달리 왜 비자연적이고 위험한 것인가를 밝히는 최초의 과학적 분석을 시도합니다. 자급자족의 가정경제, 혹은 그것이 조금 더 커진 촌락의 경우에는 거래 당사자들이 각자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직접 맞바꾸던 물물교환의 형태 즉 <C-C>이었으나, 식민 도시 혹은 외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면서부터는 거래의 편의를 위해 화폐가 중간이 사용되는 <C-M-C>의 형태를 띠게 되지요. 일단 이렇게 화폐가 사용되면서부터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부wealth'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이제와 같이 생활에 필요한 구체적인 물품의 획득이 목적이 아닌) 이 화폐 자체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 즉 '돈벌이 기술로서의 획득의 기술'이 등장하게되고 이때부터의 거래는 <M-C-M'>, 심지어는 <M-M'>의 고리대금업까지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보았지만, 위와같은 영리적 상업(M-C-M')이나 고리대금업(M-M')은 행복한 삶과는 무관한 '돈벌이'라는 자체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화폐에 대한 욕망은 무한한 것이 되고 훗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말이 생겨날 여지가 바로 여기서부터 생겨난 것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하여 드디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란 공리의 근원을 찾아냈네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보다 폴리스나 가정경제와 같은 사회가 선행한다고 보았으나, 근대 초기인 16세기 이후 '로빈슨 크루소'라는 상징에서 잘 드러나듯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이란 짐승이라기보다는 본원적인 인간의 전형이라는 사고방식과 함께 그에 걸맞는 경제체제와 사고방식이 서서히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의 탐욕과 허영심이 무조건적으로 죄악시되던 시대상에서 서서히 그 탐욕과 허영심으로 인해 인간 세상이 유지되고 심지어는 발전하기까지 했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여전히 그러한 것들의 '무제한적인 허용'은 금기시 되어왔지요. 이때 나타나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이 경제사상사에서 혁신적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탐욕과 허영심의 무제한적인 허용을 더이상 죄악시하지 않았다는데 있다는 겁니다.
● 아담스미스는 상인들이라는 족속들은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고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러한 그들이 추구하는 이기심이 때로는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사회 복지를 위협하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탐욕을 추구하여 이리저리 날뛰는 개인들의 이전투구 속에는 결국 그 난장판을 조화와 화합으로 이끄는 신의 섭리Providence가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바로 그 하느님의 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개개인의 탐욕 추구과 사회의 이익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오히려 신께서 사회의 조화와 발전을 이끄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 개인들의 이익 추구인 것이다. 따라서 무제한의 이익 추구란 오히려 사회를 구성할 새로운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에 들어서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이 부정되는 방향으로 흐르는 조류가 나타나는데, 이에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 반격을 시도하다]라는 소제목이 달리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통해,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몇천 년 전 맹아의 모습으로만 나타났던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제시한 몇 가지 테마들을 빌려 경제사상사가 연주해온 푸가를 감상해 보는 것'으로 그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읽겠다.라는 다짐은 사실 그리 이루기가 어려운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얇은 소설책으로 그 권수를 채울 수도 있겠고, 마을버스 안에서도 읽을 수 있을듯한 흔하디 흔한 힐링류의 책들로 서재를 채울 수도 있으니까말이죠. 허나 본문 페이지 수가 겨우 '165'에서 끝이 나는 (게다가 문고판 사이즈라니!!!) 이 책은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조차 쉽사리 되지 않았을만큼 참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고,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이후로 가장 무거운(?) 경제서적이었던 이 책을 단 두 번의 독서로 그 무게를 감당해내기엔 여전히 저는 많이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저 제가 읽었던 책들에 대한 간략한 기록.정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이 글쓰기를 이 책.에서만큼은(최소한 제가 관심있던 부분에 한해서는) 문맥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가급적 기록할 수 있을 때까지 꼭 기록해놓고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경제학을 한번도 공부해보지 않은 이에게는 이 글이 재미없고 지루하겠습니다만, 최소한... 그저 학점따기에만 급급하게 학부생활을 보내었으나 그래도 그 4년간 배웠던 경제학에 약간의 애정이라도 남아있는 경제학과 학생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어쩌면 그러했던 4년의 학부생활보다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보게도 됩니다.
이 책은 칼 폴라니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라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만, 유명 주방장이 만든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고나서 그 소고기를 제공한 소를 그 주방장이 직접 키우지않았다하여 타박할 이 없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칼 폴라니에게서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 모두가 이러한 책(스테이크)을 써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보면 저자의 뛰어난 요리실력에 사뭇 존경의 인사를 아니드릴 수 없지요. 아주 샅샅이 두 번을 연이어 읽어내었습니다만, 이 책을 읽고 쓴 이 글이 감히 '서평'의 단어를 취할 수 없슴을 제가 먼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또 다시 꺼내어 읽게되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간간이... 이 포스트를 읽어보며 지금의 감동을 이어가고 싶었기에 장황하게 써내려간 이 글은 결코 저의 글이 아니며, 오로지 저자의 글을 이리저리 발췌하여 정리한 것일 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마치 요즈음의 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추위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던 2013년의 3월을 그나마 이토록 흥분되게 보낼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문헌
- 「미시적 경제분석」 강태진 외, 박영사. 1996.
- 「경제의 교양을 읽는다 (고전편)」, 홍훈 외, 더난출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