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멸망사 한말 외국인 기록 1
H.B.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 집문당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라는 장(場)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에 대한 '해석'이라는 주관적 작용은 한시도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만 보더라도, 한국과 일본에서 양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지요.1 그렇다면 혹! ---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바라보는 시선이라면 그 ('팔은 안으로 굽는다' 류의) '주관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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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誹謗)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正義)가 점차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陛下)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치 이 민족의 정기(精氣)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H.B.H.

대한제국의 황제와 국민을 향해 이처럼 감동스런 헌사를 바친 이 책의 저자 헐버트가 조선/대한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종이 설립한 신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 자격으로 1886년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시작되었더랬습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워싱턴을 방문하기도 했었었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었었던, 말 그대로 대한제국이 멸(滅)해가는 과정의 한 가운데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었던 인물이었지요.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조선을 '심한 역경에 빠져 있을 때 종종 악의에 찬 외세에 의해 시달림만 받을 뿐 옳은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한 국가'(p17)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경력을 고려해보면, 이 책 역시 완벽하게 '객관적'인 제 3자적 시선에서 쓰여진 조선의 기록이라고는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피해 당사자(조선)와 가해 당사자(일본)가 아닌, (일정 부분 관찰자적 시점에서 본) 제 3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과연 '조선에 대한 옳은 평가'라는 건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지가 사뭇 궁금했었었다라는 점이 바로 제가 이 (참으로 재미는 없어보이는) 책을 펼쳐들게 된 이유였었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역시나 저자가 고종의 측근으로서 겪었었던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이겠습니다만, 저자는 간략하게나마 우리의 고대사를 다루는 것부터 이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 이러한 기술(記述)은 딱히 고유의 장점을 가지지도 못할 뿐 아니라, 군데군데 역자(譯者)에 의해 지적되고 있듯이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 '제 3자'로서 가질 수 있는 의문에 대한 답변들은 나름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민족은 원시 시대에서 목축 시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농경 시대로 발전했다. 따라서 그들은 우유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축산물을 약재 이외로는 쓰는 법을 알지 못한다.(p36) …… 한국에 소가 들어온 지는 벌써 3,500년이나 되는 데도 한국인들이 우유나 고기를 잘 먹지 않는 것은 희안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이 유목민의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p41) …… 한국에는 양(羊)이 없다. 제물로 수입하는 이외에는 전혀 양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에 유목 시대가 없었다는 추측을 확실하게 해 준다.2(p43)

와 같은 부분은, (현재는 이렇지 않지만, 당시의) 조선인 스스로는 가져보기 쉽지 않은 의문이었었을 겁니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우유나 소고기를 잘 먹지 않는 것은 '희안한 일'이 아닌, 당연한 (혹은 어쩔 수 없는) 이었을 테니까요. 이처럼! --- '서양 외국인'의 눈에 비추어진 당시 조선의 생활상에서 보여지는 '희안한' 일들의 기록은, '당시의 조선'과 '당시의 서구'의 간극 사이에서 이제는 '당시의 그리고 현재의 서구' 쪽으로 많이 변화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 독자인 저에게도 역시 '희안하게' 보여지기만 합니다. (다만!!! 그가 기술하고 있는, 즉 서양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당시 조선의 일상의 '희안함'이 결코 현재의 우리가 짊어져야 할 부끄러움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한 과정을 겪었었지요. 단지, 헐버트는 당시의 조선보다 많이 진보/개선된 문명에서 살아온 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이것을 당시 조선과 서구 사이의 우열의 근본 원인이었다라 보는 것은 지나친 자기 비하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희안함'을 그저 희안하게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라는 점은 이 책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례로 모반(謀反)한 죄수의 경우 그 가족까지 형벌을 내리는 연좌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결론은, 조선에 대한 서구의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그의 애정어린 노력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 당시의 조선에는 범인을 이른 시간 내에 체포할 수 있을 만한 경찰력이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가족들을 가혹하리만큼 들볶는 일 뿐이었었지요. 즉, 모반의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사회 전체에게 보여줌으로서 모반을 계획하고 있는 자들에게 일종의 사인(sign)을 내비친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단순히 범죄를 방지하려는 것이지 응보하려는 것은 아니다."(p89)

저자 헐버트의 조선/조선인의 일상에 대한 세세한 관찰은 이처럼 우리의 창피한 모습을 비교적 냉정하게 알려준다(①)라는 긍정적 기술(記述)로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만, 지나친 일반화/단순화(②,③) 또는 개인적 관찰의 기록이 흔히 지니고 있는 상반된 기술들(④VS⑤)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돈과 권력은 사실상 동의어로 되어 있어서 재판이란 이에 제공되는 금액에 따라서 결정되며, 재판관을 위협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뒤에서 밀어주거나 또는 상당한 돈을 가진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판결이 유리하게 내려진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p84)


② 한국인들이 만약 곤경에 빠지게 되거나 위급한 일에 직면하게 되거나, 또는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것의 성패 여부가 진실을 어느 정도 왜곡시키면 호전될 수 있는 경우에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p65)

③ 일본인들은 이상주의적이며 중국인들은 실리주의적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다. 한국인은 그 나라가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질도 두 나라의 중간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성격이 조화됨에 따라서 한국인들은 합리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p54)


④ 한국인은 매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 패싸움으로 변하여 난투극을 벌이는 예란 거의 없다.(p67)

⑤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자기의 기분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 않다. 어린이들까지도 어른들로부터 그와 같은 습성을 배워서 만약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서울 정도로 화를 내어 그 일을 끝장을 내던가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세를 망쳐버리고 만다.(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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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저자 헐버트가 조선에 대해 애정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일지라 하더라도,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의 '애정'이란 것이 '안으로 굽는 팔'의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그저 '동정어린'의 수준이 그 한계였었을 뿐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역시 이 책에 대한 저의 '주관적 해석'에 기인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어차피 '감상문을 적는다'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의 표출이니) 저자의 논리 전개를 간략하게, 제가 이해한 바대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단 저자는 조선 멸망의 근본적 원인을 중화사상(中華思想)으로 보고 있습니다.

애당초부터 한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움직여 왔나를 돌이켜보라. 300년 이상이나 신라는 전 반도를 다스렸지만 그 300년은 급속한 영락의 세월이었다. …… 그와 같은 서글픈 조락(凋落)현상은 중화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비롯된 것이다.(pp106-107)

이처럼 조선의 조락은 오래 전 과거로부터 기인되었고 이미 그 과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전개되었지만, 그나마! 근래 들어 서양의 문물과 종교가 들어오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뉘앙스의 기술을 전개하고 있지요.


사태가 이처럼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서울에서는 매우 낙관적인 측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요한 개혁은 철저하게 수행되었으며 …… 미국의 한 회사는 서울과 제물포 사이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했으며 …… 지난해에 광산 채굴권을 얻은 미국은 작업을 시작했으며 각급 학교가 창설되어 대체로 보아 조선의 장래는 그 미래가 매우 밝았다. 이제까지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던 여러 가지의 난제에 대한 해결책이 발견된 듯이 보였으며 비교적 계몽된 통치 시대의 문이 열리는 듯이 보였다.(p189)3

​저자 헐버트가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라는 사실로 인하여, 그로부터 피해자인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객관적인 서술'을 기대했었던 바램은 이처럼 무너지고 있을 뿐 아니라 --- 객관적임이라는 것이 결국엔 피상적인 관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라는, 그리하여 애초의 기대가 지나친 순진함이었다라는 실망을 안겨주는 것으로 진행이 되기도 합니다.


왕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이라고 한 것은 …… 전에도 얼마 동안 생각해 오던 것이었는데 조선이 외국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자 이 때가 적시임을 알고 제국의 선언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절차는 단시일 내에 조약국에 의해 승인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대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동일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p197)

저자 헐버트의 시각은 이처럼 단순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예의 '동정어린 시선'뒤에 감추어진 어쩔 수 없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4에 대한 헐버트의 앞뒤 설명없는 주장은, 가히 이러한 인물이 우리 역사에 있어 한 시대의 비극적 멸망을 기록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마저도 안겨주더군요.


"물론 한인들로서도 화가 났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지만 이 사건에 있어서는 조선이 어느 정도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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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헐버트의 철저한 '제 3자적 관점'은 일본이 조선을 종속국으로 삼게 된 결정적 계기였었던 러일전쟁의 시종을 다룬 부분에서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유지시키며 단지 무역의 거래로부터만 이익을 얻기 원했었다라고 일본의 의도를 규정한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러일전쟁의 발발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러한 정책에 의거해 활동하려고 과거 30년 동안 노력해 왔다. …… 일본은 사태의 해결을 무력 행사에 의존하기 전에 러시아로 하여금 극동에서의 욕망을 자제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세계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참아 가면서 일본은 적절한 문제점을 골라 러시아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러시아는 자신이 원하던 만주를 요리하려는 의사를 가졌으며 … 일본은 그와 같은 참을성이 있는 태도를 버렸다. …… 드디어 때가 이르자 일본은 국민들의 열광이 식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의 극성스러운 요구에 정부가 굴복했다는 유리한 비평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전 포고를 했다.(p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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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은 저자가 조선에 발을 내디뎠던 1886년 이후부터일꺼라는 제한적 기대를 가졌더랬습니다만, 그러한 기대에도 딱히 크게 부응했다라 생각되지 않는 독서였었습니다. 이것이 (전문 역사학자가 아닌) 저자의 개인적 한계로부터 기인되는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 저자 헐버트가 이러한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 스스로가 제공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창피한) 의구심을 더 크게 가지게 되었다라는 것이, 그러니까 저자의 시각이나 기술 방식에 대한 불만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 우리 역사에 있어 몇몇 인물들의 행적 - 에 대한 창피함 때문이었다라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듯 싶기도 합니다. 

(민비 시해 사건 이후) (고종)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 두세 명의 외국인들이 매일 밤 대궐로 들어와서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당신의 옆에 와 있도록 부탁했는데, 이러한 그의 판단은 그들이 당신의 옆에 있음으로써 당신의 신변을 해치려고 음모할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해 저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으리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p182)

제 아무리 국력이 쇠할대로 쇠한 나라일지라도, 일국의 황제가 외국인들 몇 명에 기대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라는 위의 서술은, 부지불식간에 (그 당사자였던) 이 책의 저자 헐버트가 조선/대한제국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일정 부분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수뇌부가 덕수궁에 집결해 있다라는 첩보를 접한 미군 해병본부는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한국의 유적지를 포격할 수는 없다5'라며 명령을 거부했던 한 미군장교(제임스 해밀턴 딜) 덕분에 우리의 덕수궁이 지금처럼 보존될 수 있었다라는 역사의 한 일화6를 또 다른 예로 들어보죠.


물론! 그 미군 장교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가져야겠지만, 과연 그 고마움이 일 개인에 대한 고마움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느냐라는 의문엔, 그 전쟁을 뒤에서 부추긴 주체가 (혹은 방조한 주체가, 또는 자신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떠넘긴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 전쟁으로 인해 온 국토와 국민이 겪은 피해를 떠올려볼 때, 덕수궁의 보존이라는 사건에는 '고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게 됩니다. 이 '고마움'이란 것이 진정으로 '고마움'일 수 있는, '고마움'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헐버트씨가 죽어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하지만 --- 이 책의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자기 민족에 대한 교육에 전념'(p532)해야 한다라는 의견에 뒤이어 나오는) 마지막 문장인 다음 구절을 읽노라면, 그 역시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는 외국인'이기는 했었으나, 그러하기에 우리가 개인 헐버트에 대해 특정 부분에선 고마움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외국인' (그리고 '특정 종교의 선교사7')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을 하게만 됩니다.

교육에 투자된 자본이 더 크고, 더 확실하고, 더 유익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한국밖에는 없다는 말은 한국인의 마음씨를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제시할 수 없는 의견인 것이다.(p535)

어느새 ---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읽고선, 종원군을 데리고 헐버트의 묘소가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보고 싶다라 했던 저의 바램(願)이,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어느새, 사라져 버려 있더군요. --;;


▶ 짧은 한두 마디 : 다양한 해석이 깃든 교과서란 것이 정말 교육적인 것인가, 더욱이 오로지 수능 점수로만 평가받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교육적'일 수 있을 것인가? --- 이건 일개 정치꾼들이 결정할 문제는 절대 아닐 듯. --;;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김을한 著,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역사채널e 著, 「역사e 

 

 




 

  1. "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2. 이와 비슷한 주장은 복거일 著, 「비명을 찾아서」에도 나옵니다. : "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동양에서는 소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가축이었으며, 당연히 아낌을 받았다. 따라서 농사에 별 소용이 되지 않는 개가 상대적으로 천시되었고,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반면 목축이 중요한 서양에서는 개가 아낌을 받았다." - 「비명을 찾아서」 하권, p76,
  3. 이 밖에도 저자는 '600마일에 이르는 철도부설권(경의선 - 프랑스, 경부선 -일본)이 일본인 회사와 프랑스인 회사에게 각각 반씩 부여되었으며, … 채광권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및 일본인 회사가 획득했는데 그들 중의 2개 회사는 상당히 성공했다. 러시아인들은 반도의 동부에서 채벌권과 포경권을 얻었으며 일본인들은 중요한 어업권을 획득했다.(p207)'라는 문장을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에서 있었던 좀 더 중요한 물질적인 진보에 관한 기술(p207)"이라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4.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 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 셔먼호는 80급 증기선으로 12파운드의 대포 2문을 갖추고 선원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메도즈상사는 셔먼호에 조선과 교역할 상품을 싣고,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Thomas,R.J.)를 통역관으로 채용한 뒤 8월 9일 즈푸(芝芣)를 출항, 조선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셔먼호의 승무원 구성을 보면 … 총 24명이었다. 이 중에서 셔먼호 승조원 중의 주역은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셔먼호를 타기 전에 이미 조선 포교의 꿈을 가지고 조선 해역을 두 차례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조선이야말로 선교의 최적지임을 확신하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날을 학수고대하던 끝에 때마침 셔먼호 통역으로 채용되어 대망의 조선행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셔먼호는 …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셔먼호의 승조원들은 프랑스 신부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했다. 그러나 중무장한 셔먼호는 이를 뿌리치고 항행을 강행, 드디어 평양 만경대(萬景臺)까지 올라왔다. 조선 관리는 이러한 무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유원지의(柔遠之義)에 따라 세 차례나 음식물을 후하게 공급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호는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마비가 그치자 갑자기 수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셔먼호 승조원들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덕수궁을 포격하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의 유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포격 개시란 말이 떨어지면 단 몇 초만에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 역사채널e 著, 「역사e」, p331, 북하우스刊, 2013.
  6.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역사채널e 著, 「역사e」, pp 328-339, 북하우스刊, 2013.

  7. 감상문의 본문에서는 이 부분 - 선교사로서의 헐버트 - 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 책의 곳곳에서 그는 선교사로서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고 기록해놓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 "기독교는 인간에 있어서의 모든 허식을 떼어 버림으로써 한국인의 합리주의적인 감정적 기질을 완전히 사로잡게 되다고 나는 감히 주장할 수가 있다. 기독교가 그토록 빠르게 한국인에게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면에서 볼 때에 이와 같은 완전한 적응성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종교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도 가장 신비한 것이므로 인간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종교이었다."(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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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람 2020-06-16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진도를 나가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