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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ㅣ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1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중·고등학생 시절 그렇게나 싫어했었던 '역사'란 것에 근래들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세계사'란 거창.한 타이틀은 여전히 저에겐 버거운 분야입니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혼자 광화문의 교보문고엘 갔다가 '세계사 입문서의 결정판!'이란 말에 이 책을 집어들었었거늘, 읽어야 할 새 책을 고를때면 항상 저의 선택을 받지 못한채 그저 책장에 꽂혀져만 있었었던 이 책을 문득 꺼내든 이유는... 이 책의 저자나 출판사에겐 죄송하지만 아주 거대.한 다른 책을 읽어내기 전의 준비운동을 위한 것이었었습니다. 만 그 '거대'한 책은 정말로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그 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과연 지금의 제 심리상태?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지 못할듯해 당분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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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씌여진 원저의 제목 <젊은 독자를 위한 세계사>에서 알 수 있듯이 무지막지하게 전문적인 역사책은 아닙니다. 또한 언젠가 남경태C의 글을 통해서도 읽었었듯이 - 역사공부가 직업이 아닌 일반인이 과연 고려시대의 관청 이름들을, 조선시대의 서적 이름 등을 굳이 알고 있어야하느냐란 내용이었었는데, 제가 격!!!하게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게 바로 그러한 것들이 저로 하여금 역사를 싫어하게 만들어준 원인들이었기때문이었지요. - 이 책도 세세한 항목들에 관한 서술보다는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헌데 번역을 잘하신건지 아님 원래 저자의 글쓰기가 그러하신지 상당!히 매끄럽고, 심지어는 '이렇게 술술 넘어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 "흐름"이란게 너무도 자연스럽.더군요.
당신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공책 같은 옛날 물건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가? 예전에 쓰던 공책을 넘기다 보면 그새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깨닫고 놀라게 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당시에 쓴 글을 읽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부끄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그런 옛날 물건을 꺼내 보지 않았다면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이 책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라 여겨지는 것은 '재생' 혹은 '부활'을 의미하는 <르네상스>시대를 이야기하는 장의 도입부를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공책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는 저에게 그야말로 감탄.을 아니금할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1935년에 초판이 나왔었던 책이기에, 또한 저자가 독일인이기에... 라는 두 가지 이유로 저자 스스로도 "우리가 지금까지 세계사라고 부른 것은 사실 세계 전체의 역사라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지중해 지역, 그러니까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북아프리카 등은 포함하는 지역이 주요 무대였다." 라고 책 중간에 고백하고 있듯이 중국과 인도, 그리고 일본에 관한 아주 간략한 몇 장을 제외하고는 사실 '세계사'책이라 부르기엔 약간 민망할 수도 있는 범위를 커버하고 있습니다만, 책 제목에 크게 개의치 않을 수만 있다면 이 책은 딱히 흠잡을 데 없는 개론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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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계사에서 가장 재미있게 여기는 점은 그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일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꾸며 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역사'란 것을 공부하면서 느끼게 되는 점을 아마 위의 세 문장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문구를 다시 만나게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치 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설마 아무리 옛날이라고해도 사람이 어찌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가... 하는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는 '엄연한 현실'이었다라는 거, 저자의 말대로 '사람들의 생각은 서서히 바뀌며 스스로는 이를 감지하기 어렵다'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느낀 가장 커다란 한가지를 꼽으라면 역사란 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옛날의 어느 날 당시에는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었으며, 그처럼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던 당연한 것들이 결국 '당연한 것'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져가는 일 과정이 아닐까하는 새로운 깨달음인듯 싶네요.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자면... 저에게 1/11,492,389의 자부심이 아닌 '원죄적 책임'을 부여해주신 '그 분'의 5년은 응당 '반역사적 시간'이었다라 말해도 되지않을까도. - 응? 아니, 내가 이런 말을???)
상당히 두꺼운 책입니다만 워낙 잘 씌여진 글인지라 이틀간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시청을 포기(?)하는 댓가로 모두 다 읽어낼 수 있더군요. "지혜로운 말은 녹색의 보석보다 구하기 어럽지만 맷돌을 돌리는 가난한 하녀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는 고대 이집트의 경구야말로 요즈음 지칠대로 지쳐있는 제게 유일한 '낙'이 되어주고 있는 이 '책읽기'가 건네어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엄청 재미있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머릿속에 남는 것이 꽤 된다라고도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심지어 저는 이 책을 그저 어떤 '거대'한 책을 읽어내기 이전의 준비운동.쯤으로 대했습니다만 유럽의 역사를 부담없이 '흐름'으로 이해해보고고자 한다면 상당히 유익한 책이 되어줄 수 있을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