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진정한 나'다. …… 이 책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 '분인dividual'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도입한다. 부정접두사 'in'을 떼어버리고, 인간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분인이란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다양한 자기를 의미한다. 애인과의 부인, 부모와의 분인, 직장에서의 분인, 취미 동아리의 분인... 그것들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분인은 상대와의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자기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패턴으로서의 인격이다. …… 개인을 정수 整數 '1'이라고 한다면, 분인은 일단 분수라고 떠올려주기 바란다. 나라는 인간은 대인 관계에 따라 몇 가지 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됨됨이(개성)는 여러 분인의 구성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pp13-15)
나는 ①분인의 집합체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②타자와의 만남의 산물이며,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다. 타자가 없다면 나의 다양한 분인도 없고, 요컨대 지금의 나라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흔히 말하는데, 그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서로 돕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자체가 절반은 타자 덕분이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③순수하고 무구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pp127-128)
① 히라노 게이치로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개인에게는 당연!히 여러 개의 얼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바뀜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의 모습 또한 바뀌게 되는 것을 절대 꺼림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는 거지요. 오히려 '어디를 가나 나는 나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나를 타인들에게 성가신 존재로 여기게 만들 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절대로 유일무이한 '(분할 불가능한) 개인individual'이 아닌 복수의 '(분할 가능한) 분인dividual'(pp47-48)이며 또한 이어야한다 라는 거지요.
이러한 분인의 숫자는 나이를 먹고 인간관계가 넓어지면서 당연히 늘어가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다종다양한 분인의 집합체로 존재(p109)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일어나는 대인관계마다 모두! 그에 해당하는 분인을 만들 수는 없겠지요. 히라노 게이치로는 한 인간안에 존재할 수 있는 분인의 숫자는 어느 정도의 분인 숫자를 안고 사는 게 자기 마음이 가장 편한가로 결정(p110)되어지며, 또한 역으로 그 감당할 수 있는 분인의 숫자에 맞춰서 실제 사귀는 사람의 숫자로 자연스럽게 조정된다(p1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이러한 분인의 생성은 결코 의도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연기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p48)는 겁니다. 쉽게 말해, A라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에게 A를 상대하는 분인이 자연스레 생성되었던 것이지, 내가 미리 어떤 분인을 만들어/작정해 놓고 A를 만난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 사실 이 부분에서는 동의와 동의할 수 없음이 정확히 절반씩 생겨나더군요. 특정 상대(A)를 대상으로 하는 나의 분인이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A와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그 사람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되면서 A용 분인에 무언가 변화를 주어야한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일관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게 될까 걱정되어, (이제는 맞지 않게된) 그 A용 분인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지속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현실적으로는 분명!히 있는데, 이런 경우를 '의도적인 작용'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책에 나와있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논리를 따르자면, 분인은 어디까지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A의 모습이 애초에 알았던 것과는 달라졌다면 그 또한 '나'를 대하는 A의 분인이 '나'에 맞춰 조정되었기 때문이라 말해야 하겠습니다만, 이걸 엄밀하게 적용해본다면 결국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겨나게만 되죠.)
③ 인터넷이 우리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가면서, 인간 관계의 범위 또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그리 크지 않지만, 예를 들어 블로그라는 이 인터넷 상에서는 그 현실과 비교할 때 '엄청난'이라 표현할 수 있는 숫자의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게만 됩니다. 저만 해도 --- '가살가죽'이라는 이 블로그의 주인공은 여러분을 상대하는 또 하나의 제 분인일 뿐입니다. 실제로 저를 만나본 분들이 저를 만나보기 이전과 만나본 후, 어떠한 생각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만약 (저를 실제로 만나본 B라는 사람에게 저에 대한) 그 이미지가 변화되었다라면 그건 제가 제 진짜 모습을 숨기고 블로그 상에 조작된 이미지의 저 자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닌, 블로그 상에서 집단적으로 누군가들을 상대하는 저의 분인과 B와 단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저의 분인이 서로 달라기 때문이라 (이 책의 논리를 따르자면) 말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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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수많은 분인이 '나'라는 한 개인을 구성하고 있다면, 게다가 인터넷의 발전으로 한 개인이 접하게 되는 대인 관계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다면 --- 그 수많은 나의 분인들 중 과연 어떤 분이니 '진정한 나'인가 헷갈리게 되지 않을까요?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수많은 가면을 바꿔가며 쓰고 있다라는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서 수많은 (일시적인 얼굴인)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라면, 내 안에는 그것을 연기하는 '진정한 나'가 숨겨져 있다라는 말인데, 그런 '진정한 나' (따위)는 없다라는 거죠. --- "복숭아는 한가운데 씨가 들어있다. 사람에게도 그렇게 확고한 자아(=진정한 나)가 있고, 주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양파 껍질처럼 우연적인 사회적 관계가 속성을 한 꺼풀씩 벗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즉, '진정한 나'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p61)"
나의 분인들은 모두 자신의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 분인들 모두가 다 '진정한 나'의 모습이라고 히라노 게이치로는 주장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나'라는 건 실체 없는 환상일 뿐이며, 우리는 이제까지 그 실체도 없는 환상을 찾아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부추김에 시달려 왔다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제껏 우리가 흔히 들었었었던 "꿈을 가져라.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라.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나'를 알아야 한다. 그런 자기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직업이다."라는 직업관은 (차마 책에 이렇게 쓰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로 개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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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한 가지의 렌즈만으로 (거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보려는 시도는 일관성 측면에서는 상당히 멋있어 보이는 장점이 있지만, 한 편으로는 종종 '굉장히 억지스럽다'라는 인상을 띠게도 된다는 단점도 있지요.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책에서 한 '개인'의 성장 과정, 자아 실현으로서의 직업, 사랑과 죽음 등을 모두... 이 '분인' 개념을 통해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분인주의적 연애관'은 자칫하면 결혼 후의 불륜을 정당화시켜주는 논리로 이용되어질 수 있는 여지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p173) --- 이제까지 유지되어오던 현실적 감각이 조금씩 이처럼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는 (그 주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현실성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급격히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이제까지 분인의 개념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행위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다가 죽음의 면에서는 그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에도 '죽은 자와의 분인'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를 설명하려하다보니 '영혼을 통해 저 세상의 지인과 계속 교신하는 것'이라는 무당스러운 주장까지를 해야했던 게 아닐까하는 의문만 남겨줄 정도로 말이죠.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이가 들수록 죽은 자와의 분인을 갖게 마련이다. 영혼을 통해 저세상의 지인과 계속 교신하는 것은 실은 이따금 그 죽은 자와의 분인으로 살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죽은 후에도 타자의 분인을 통해 이 세상에 살아남는다. (pp192-193)
이와는 달리, 따로 이 부분에 대해 떼어내 설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녀 교육에 관한 부분이 오히려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 학교에서의 내 아이, 혹은 친구들과 있을 때의 내 아이가 부모 앞에서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는 것에 대해 히라노 게이치로는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 말해줍니다. 부모가 해야할 일은 단지 나의 '아이에게 어떠한 분인 구성이 이상적인가를 고려(p152)'해 주는 것 뿐이라는 거죠.
"부모 앞에서와 교사 앞, 아이들끼리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아이 나름대로 전혀 다른 인간과 어떻게 하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지 모색한 결과다. …… 만약 그것을 꾸짖는다면 또다시 무익한 '진정한 나' 찾기로 내몰릴 테고, 현실의 인간관계를 거짓되고 표면적이라고 경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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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깨우는 철학 에세이'라는 출판사의 표현은 좀 오글거리지만, 술술 읽히면서도 그렇다고 마냥 술술 읽어내려갈 수만은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한 책입니다. 다만 이 책의 저자인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들을 제가 읽었었더라면,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네요. 이 작가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作, 「지킬 박사와 하이드」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변신」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