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 2014,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 「인생」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80일간의 세계일주」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이런 곳에도 '재패'나 '지배'라는 말을 써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두고 문학 분야에서의 '세계를 재패했다'라 말할 수 있는거라면!!!이라는 이유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의 꼬무책('꼬리를 무는 책'의 약자로 CBS FM의 어느 프로그램에 있는 '꼬무송'에서 차용해왔습니다)으로 중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인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를 집어들었습니다....만.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소(牛)> 그리고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 경주> 이렇게 세 편의 소설 모음집입니다. 이 중 가장 짧은 분량의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를 책의 제목으로 꼽은 이유를 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이 가장 유명하거나 작가의 대표작이어서겠지요. (헌데 그나마)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은 마지막에 실려 있는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 경주>였고, 그 다음으로는 <소>였습니다. 반면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는 다 읽고 나서도 도대체 이 소설이 뭘 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세 편의 작품 모두 평범한 사람들 - 그들의 면면이 평범하다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경제적 · 정치적 계급에서의 평범함 - 의 이야기입니다. '평범'이란 단어가 쓰였듯, 소설들 속엔 또한 그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층의 모습들 또한 등장합니다. 소설들에 등장하는 이 평범한 사람들은 예의 (작가의 표현 하나를 빌자면) '현재보다 백배 천배 순결했으며, 오늘날처럼 여러모로 건전치 못한 사상을 지니지는 않았'던 사람들로 묘사되어 나오죠.

 

어쨌든 책의 제목으로 뽑혀져 있으니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주인공 딩스커우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철강공장에서 일을 했던 노동자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공장을 제 집삼아 살아온 덕에 표창도 많이 받은 노동자였습니다만, 회사의 경영 악화로 인해 정년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사십 여년을 일해왔던 공장에서 강제은퇴를 당하게 되지요.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매우 독특!한 사업 아이템을 하나 구상해내어 여름 한 철 꽤나 짭짤한 수입을 올리게 됩니다. 

 

뭐... 대충 이런 줄거리의 소설입니다. 여기에서 딩스커우처럼 강제해직을 당한 동료들은 자신들 또한 어려움 속에서 생활하지만 서로를 돕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상황을 그렇게 만든(것으로 그려지는) 경영자와 부시장 등은 여전히 고급차를 몰고 다니지요. 작가 모옌은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와 <소>를 통해 이처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비꼬고, 그들에게 지배(?)를 받고있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남을 배려할 줄 알며,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뭐 대충 그런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런 시선은 '권력VS평범'의 구도가 가장 약한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경주>에도 빠지지는 않아, "우파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도 우리 농민처럼 여전히 먹고 산다. 빈농과 하층 중농은 땅에 씨를 뿌려 거두지 않으면 굶어 죽어도 울 땅이 없다."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

.

.

 

나쁜 것을 향해 나쁘다라 말할 수 있는 것이 때로는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할 때가 있었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혹은 중국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예를 들어, 예전에 제가 썼었던 한 표현처럼 '서민은 선하며, 선하기 때문에 옳고, 옳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에는 분명 피치못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란 매우 교조적인 사고방식을 여전히 저는 매우 싫어하기에, 혹... 제가 이해해내지 못한 다른 커다란 교훈이 이 세 편의 소설들이 담겨져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길지도 않은 이 세 편의 소설들을 읽어내는 시간이 은근 지겹기만 했었습니다. 마치 초중고, 심지어는 대학을 졸업하는 그 순간에까지도 변하지 않았던 교장/총장 선생님들의 축사와도 같은 이야기들이었다랄까요?

 

소설을 통해 매번 어떤 교훈을 얻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없습니다. 아무런 교훈 없이도 그저 읽는 재미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읽기'에 들어간 저의 시간과 노력은 충분이 보상받을 수 있는 거니까요. 어쩌면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라는 게 맞는지도 모를정도로 말이죠. 허나...

 

"해학과 입담 넘치는 스토리텔링, 풍자와 현실 묘사를 넘나드는 비판의식, 중국 인민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 중국어권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모옌이 그려 보이는 민중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의 풍경!"이라 씌어져 있는 책 뒷표지의 문구에 어떻게... 단 한 구절도 동의할 수 없는건지, 도대체 이 작품들의 무엇이 대단하다는 건지 끝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뭐... 아직도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제 이해의 깊이가 충분치 못함을 그저 아쉬워하고 탓해야만 하는 게 맞는거.겠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 패권국가 중국은 천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마틴 자크 지음, 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똑같은 책을 읽고도 서로의 느끼는 바는 다 다를 수 있을겁니다. 코너 우드먼의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에서 저 역시 그가 지적하고 있는 면들에 공감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만, 그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인식에서의 오만함이 그 긍정적인 면들을 모두 지워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심각하다라 저는 느꼈더랬습니다. 그는 서양이 매우 시혜적인 위치에 있다라고 확고히 믿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요즘 들어 좀 세졌다고 여기저기서 깝죽(!)대는 '중국'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사뭇 경멸적이기까지 했었지요.

 

여기에 '중국'에 대한 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판단, 그러니까 '중국은 소프트웨어의 문제(컴퓨터의 그것이 아닌)로 인해 결코 선진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과연 맞는 것인가에 대한 점점 커져가는 의문... 뭐 이런 이유들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가 아니었다면 연신 뒤로 밀리기만 했었을 두껍고 딱딱한 이 책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을 읽어보겠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의 결론은... "왜 이제서야!!!" 

 

…………………

 

이런 류의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쓴다라는 건 사실 '모 아니면 도'인지라 각 장(chapter)별로 자세하게 나누어 정리하지 않는한 매우 간단하게 할 수밖에 없지않을까 싶은지라, 논문이 아닌 블로그에의 독서 감상문 수준으로만 요약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지금 시점에의 이 의도가 결국 그대로 이루어질지에 자신이 없긴합니다. --;;) 그러니 '너무 간단한데?' 라는 실망만은 부디...

.

.

.

 

<서구 세계의 종말> 그리고 그에 뒤이은 <중국이 지배하는 시대> 이렇게 크게 1·2부로 나뉘어져 있는 책입니다. 결과론적 이야깁니다만 이 책의 저자 마틴 자크가 영국의 좌파 이론지 편집장을 약 15년 여간 역임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서양인으로서 서구 세계에 대해 이토록 비판적인 것에 나름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지도 않을까 싶네요.

 

18세기 중반까지 사람들은 주로 과거로부터 주어진 대로 살아가려 했다고, 즉 현재란 지나간 과거의 최신 버전일 뿐이며 미래 또한 과거의 반복 혹은 재창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미래는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결정적 계기가 바로 산업화의 시작이었으며 이로부터 '근대'라는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산업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산업혁명으로 대표될 수 있으며, 이는 영국을 위시로 한 서유럽에서 최초로 등장했었었구요.

 

1800년 무렵만해도 서유럽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아시아보다 자본 축적이나 경제 제도 면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당시의 1인당 소득은 오히려 중국이 서유럽에 앞서 있다고도 주장하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1839-1842년에 벌어졌던 제1차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청을 굴복시킨 것은 이제 서유럽이 동아시아에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고, 이러한 우위의 결정적 원인이 바로 '산업화'였다는 겁니다.(이런 점에서 보자면 「80일간의 세계일주」 의 감상문에 제가 썼었던 <인도, 중국, 일본등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을 때, 작가는 하인 파스파르투의 입을 빌어 '터무니없는 나라를 떠나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가는 중'이란 표현을 썼기도...>의 시각은 그 소설이 1873년에 발간되었으니, 그 길지도 않은 사이(1842-1873)에 서구인들에게는 이미 '동양'이라는 곳이 그처럼 자신들보다 미개한 곳으로 각인되어버렸다라는 걸 보여주는 일례가 될 수도 있겠지요. --;;)  

 

저자는 서유럽 산업화의 성공이 수 세기에 걸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시각을 부정하며, 오히려 매우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우연적 요소'는 바로 석탄의 집약적 사용식민지의 존재였지요. (석탄의 집약적 사용에 관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식민지의 존재는 영국으로 하여금 노예로 대표되는 값싼 노동력과 원재료의 획득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서유럽의 획기적인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는 게 저자의 요지입니다. (산업화의 가장 주요 항목인 기계화에 관해서도, 중국은 이미 그때부터도 노동력이 넘쳐나는 상황이었기에 굳이 기계를 개발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라는 주장도 함께 곁들어져 있습니다.) 물론 중국도 15세기 정화의 원정으로 대표되는 동남아 개척을 했었습니다만, 그건 군사적 · 정치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중국의 앞선 문화와 문물을 오랑캐들에게 전수해준다라 생각라는 이유였기에 중국에게는 식민지 개념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거지요. (중국은 자신들의 나라가 '하늘아래 땅의 중심'이라 생각했기에 자신들 말고는 다 미개한 오랑캐들로 여겼었지요.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의 나라 이름은 특정할 필요도 없고 그냥 '中國', 즉 '중심의 나라'잖아요.) 이처럼 유럽이 아시아에 앞서 근대화를 먼저 이룩하긴 했지만 유럽이 겪은 근대화의 과정과 경험이 다른 국가들이 따라야 할 모범적인 전형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적 요인의 덕을 톡톡히 본 특수한 케이스로 보아야 함에도 서구의 시각은 자신들의 근대화 과정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모델이라 생각해왔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렇게 산업화를 시작한 영국은 이제 세계 최강국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유리한 쪽으로 국제 무역 체계를 만들게 됩니다. 영국의 국부(國富)는 제조업 제품을 세계 각지에 수출하고 농산물과 원재료를 최대한 낮은 가격에 수입하는 데에 달려 있었기에 그들이 주창한 '자유방임주의'는 다른 국가들이 자국의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 장벽을 설치하지 못하게 방지하는 수단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었으며, 이러한 자유방임주의는 결과적으론 여타 지역의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수단으로서 작용했던 것이지요(최소한 제가 배웠던 경제사 교과서에는 이런 배경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추측컨데 아마 지금의 책들에도 여전히 없을 듯). 이처럼 1800년 이후 유럽은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아시아가 자신들의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그 결과의 한 단면이 바로 아편전쟁에서 패하여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야마는 중국의 근세사라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허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또한 기력을 소진하게 되고 결국 전후 국제 사회에서의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기술 혁신, 기계화, 생산의 표준화, 노동 과정의 개선, 규모의 경제, 대량 생산'등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식 경제는 어느덧 유럽의 경제를 앞지르게 되었고, 1945년을 기점으로 미국은 말 그대로의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미국은 주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기반으로 확실한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자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해 나갔으며, 1960년 경이 되어서는 유럽을 대신해 모든 국가가 열광하는 국제 사회의 모범이 되기도 하지요.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의 패배를 시작으로 '굴욕의 세기'라 불리우는 암울한 시기를 맞아야 했던 중국은 1945년 2차 대전의 패배로 일본이 떠나가며 독립을 하게 됩니다. 비록 중국 공산당이 일본에의 저항운동의 주도세력이었긴 했으나, 중국의 독립은 이처럼 분명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1949년 이후 공산당 정권은 중국의 독립을 쟁취하고 통일을 이룩했다라는 표면적 이유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문화대혁명을 공식적으로 '나쁜 것'이었다라 선언했음에도 마오쩌둥은 여전히 덩샤오핑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인기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 된겁니다. 

 

1978년을 기점으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정책을 선언하는데, 그는 심지어 (물론 중국의 실정에 맞게 수정을 가하기는 했으나) 미국이 주창한 신자유주의적 요소까지도 수용을 할만큼 과감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이처럼 획기적으로 경제 개혁을 서둘렀던 이유는 '서구화'로 대변되는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함이 아니라, 경제 성장을 통해 마오쩌둥 사후 공산당의 정당성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여 종국에는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데 있었지요. 이는 중국의 기나긴 역사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은 '단일성'을 가장 커다란 가치로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역사에서 중국이 분열했을 때에 발생했었던 살육과 빈곤에의 기억이 이처럼 단일성에 집착하는 중국인의 유전자가 된거지요. (이는 조정래의 「정글만리」에서 정확히 집어내고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거대한 중국이 이처럼 강력히 경제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서구 국가들은 중국의 부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가정이 깔려 있었었지요. 첫째, 중국의 부상은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 한정될 것이다. 둘째, 중국은 적당한 때가 되면 전형적인 서구 국가가 될 것이다. 셋째, 국제 사회는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며, 중국은 주어진 현상을 그대로 따르는 유순한 국가가 될 것이다. --- 허나... 저자 마틴 자크는 이 세 가지 가정이 모두 틀렸다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들이 틀렸다는 근거로 저자는 '중국의 역사'를 들고 있지요.)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국가는 반드시 자신의 경제력을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게 되며 이는 중국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지만, 서구의 시각에서 보아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상상은 결코 쉽지 않지요. 오랫동안 헤게모니를 장악해 왔던 서구는 자신들만의 가정 속에 갇혀 있기에 다른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항상 서구화의 기준에서만 정의되어 왔으며, 따라서 서구는 개념상 가장 서구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인류 발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다른 사회는 서구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진보의 정도를 평가받아야 한다라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요. 저자는 여기서 '맥도널드 버거를 찾는 중국인이 많아졌다고 해서 중국의 음식 문화가 서구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을만치 섣부른 판단이라는 단적인 표현으로 이러한 서구의 시각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경제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내적 갈등요소도 제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까지는 옮기지 않겠습니다.) 서구는 식민지라는 요인을 통해 자원의 부족이나 환경 문제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이 산업화를 이룩할 수 있었었으나, 중국은 현재 심각한 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지구 온난화라는 국제적인 환경문제에도 직면해 있지요. 중국의 자원집약적 생산방식은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을 초래했지만, 또 한편으로 중국의 과잉 노동력 덕분에 선진국의 소비자들은 값싼 소비재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었지요.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서구 국가들이 자신들의 온실가스 배출 일부를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겁니다. (이처럼 서구 세계는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부터 긍정적인 혜택과 부정적인 영향 모두를 받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보아 저자는 긍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융 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국민들이 중국 덕분에 값싼 이자율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텐데 그렇게 보면... 중국의 부정적 영향만을 극히 강조하고 있는 코너 우드먼의 시각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이기주의적인가를 다시 한번 알 수 있지요.)  

 

이에 중국 정부는 그간 무역수지 흑자로 확보한 막대한 현금보유고를 앞세워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대상으로 원자재 확보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코너 우드먼이 (아마도 부러움에 못이겨 그랬을) 비난을 퍼부었던 중국의 이러한 자원외교는 현재까지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지요. (코너 우드먼이 지적한 바대로) 과거 서구 국가들처럼 아프리카 국가들과 역사적 앙금이 없다라는 사실도 이에 도움이 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중국의 대아프리카 지원은 서구의 그것관 달리 별다른 부대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IMF와 세계은행은 무역 자유화, 민영화, 정부의 역할 축소 등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중국의 지원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정치적인 조건을 부여했던 서구완 달리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하는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거지요. (저자는 중국이 이러한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굴욕의 세기'를 경험한 것과 무관치 않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나도 당해봐서 아는데'의 정서라는 거지요.) 그 결과 이 책이 발간된 2009년 당시에 벌써 중국의 대아프리카 자금 대여액은 세계은행 수준을 상회하게 됩니다. 

.

.

.

 

이 책은 이러한 경제적인 면 뿐만이 아니라 역사, 문화, 국민의 의식구조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면에서 중국을 해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저자가 유독 집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이지요. 서구의 역사와는 판이하게 다른 중국의 역사는 중국이 차후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하더라도, 현재의 미국처럼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헤게모니 장악 및 역학 구도의 조정과는 역시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해결되고 있지 않은 난사 군도와 시사 군도에 관한 분쟁 사례, 그리고 현재에도 일본과 중국 간 첨예한 대립을 불러오고 있는 다오위다오 분쟁 등에서 저자는 특이하게도 옛 '조공 문화'를 들며, 이러한 분쟁의 원인을 서구가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의 역사적 문맥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은 매우 신선(?)하기도 하더군요. (조공 제도에서는 지나친 불평등이 오히려 안정을 가져왔다란 주장은 그야말로 신선함의 백미!!!였지요.)

 

이 책의 저자가 매우 친중국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만, 그의 논리에 딱히 비판을 가할 수 있는 부분 또한 쉽게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본문만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제 수준에서 갈무리해낸다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서구식 모델만이 경쟁력이 있다는 주장은 틀렸으며 서구의 경험이 보편적이며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지나친 자만심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이 책의 전반을 통해 깔려 있는 시각이며, 중국을 해석하고 평가하려면 서구식 잣대를 먼저 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읽으면서는 같은 동양권에 살고 있는 저마저도 이제까지 지극히 서구식의 잣대로 중국을 보아왔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마지막으로 저자는 유럽은 지난 50년이라는 비교적 기나긴 시간을 통해 쇠퇴의 길을 걸어왔기에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일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는 미국의 경우엔 머지 않은 미래에 '여전히 가장 강력한 배우이나, 다른 배우들과 중요한 배역을 나눠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상상을 초월할 상실감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라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의 한국어 판 제목처럼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이라는 가정법적 상황에 주안점이 주어져있다기보다는, 즉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결국 중국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인데!'의 전제 하에 서양인인 저자는 서구 세계가 그 상황에 어떻게 대비하여야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책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네요.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의 부상이 결국 이제껏 보편적으로 통용되어 왔었던 서구식 보편주의의 종말을 가져오고, 서구식 가치관의 영향력도 앗아간다면, 그렇다라면!!! 그런 중국과 바로 인접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제껏 미국을 가장 강력한 후원자로 여겨 왔었던, 그러했기에 어느덧 서구식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우리나라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아니해볼 수 없게 만드는 책이었고, 그러하기에!!! 읽어내기에 결코 녹록한 책은 아니지만, 알지 않고서는 현재의 중국(및 중국과 관련된 국제 관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드시 읽어보는게 좋은 책이 아닐까 싶네요. 

 

 

 

 

More "Food for Thought"  

- 위화 著,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중국인이 바라보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세계 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코너 우드먼 지음, 홍선영 옮김 / 갤리온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분히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80 Days」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책, 「Around the World in 80 Trades」(번역서의 제목은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의 저자 코너 우드먼이 쓴 또 하나의 '세계일주 시리즈(?)'인 이 책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를 '세계일주'라는 공통점을 들어 「80일간의 세계일주」의 꼬리를 무는 책으로 선택했던 건 나름 괜찮네!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시작이었었습니다...만.

 

………………………

 

 

커피잔에 새겨져 있던 "당신이 마신 이 커피가 우간다 부사망가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라는 문구로부터 저자 우드먼은 '이 말이 정말일까?'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로부터 6개월이 후 그가 카메룬의 어느 해안지방에 머물러 있었을 때, 바로 앞 바다에서 잡아 온 싱싱한 생선요리를 즐기고 있었던 우드먼관 달리 정작 그 생선을 잡아왔던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잡았던 그 생선들의 시장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 그 지역으로부터 6천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모로코에서 수입한 말린 생선을 먹고 있다라는 희안한 사실을 목격하고는 다시금 커피잔의 문구를 떠올리게 되지요. 이에 우드먼은 당시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있던 '공정 무역'이란 것이 실제로 '공정한가'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겠다 결심하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세계일주(?)'를 떠나게 됩니다.

 

.

.

.

 

우드먼이 가졌던 의문이 그리 특별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떤 특정한 커피를 사마신다고해 지구 반대쪽 누군가의 삶이 나아진다라는 게 말이 되는가하는 의문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잖아요. 허나 그저 그런 의문을 가져보는 것에 그쳤던 우리들관 달리 '그렇다면 내가 직접 그 상품의 유통과정을 한번 역추적해보겠다'란 생각을 실행에 옮긴 이 책의 저자 코넌 우드먼에게는 그런 점에 대해서만.큼은 분명 <대단하다>는 형용사를 붙여주어도 될 것 같아요. (물론 그 '용기'란 것도 사실은 그의 직업과 관련이 있는 것이겠습니다만) 

 

공정한 거래를 약속한다는 문장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제3세계 생산자와 '공정한 거래를 약속합니다'보다는 '공정한 거래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가 차라리 솔직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뿌듯해진 이유도 그들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었기 때무이 아니라, 무언가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뿌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 이런 윤리 인증 사업이 의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니카라과 - 영국 - 중국 - 라오스 - 콩고 민주 공화국 - 아프가니스탄 - 탄자니아 - 코트디부아르>의 여정을 통해 과연 '공정 무역이 진정으로 '공정한가'하는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 코너 우드먼이 그 '목숨을 건' 여행을 통해 얻은 해답을 허무하리만치 짧게 저의 생각대로 정리해 보자면... 

 

<현재의 세계 무역시장은 매우 불공정한 많은 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공정 무역 재단'은 나름 '공정한'의 의미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는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라기 보다는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 하는 것이 맞을 듯하며, 대기업의 마케팅의 주요한 요소정도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이 '공정 무역'보다 훨씬 더 공정한 무역이 분명 존재하고 있더라>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헌데... 겨우 이 정도의 결론을 내리자고 본인 스스로 말한바와 같은 '목숨을 건 여행'을 했던거야?란 가소로운 생각이 들기도 해요!!!)

 

 

………………………

 

 

책의 원제는 아주 간단하게 <Unfair Trade>이에요. 헌데 이를 한국의 출판사가 저자의 전작과 무리하게 연결시키려다 보니 '세계일주'란 단어를 써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라는 심히 무리수를 둔 제목을 뽑아낸듯 합니다. 이 책에 붙어 있는 꽤 높은 네이버 평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별다른 특별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던, 좀 심하게 말해도 된다면 '오직 말장난을 통한 마케팅의 승리!'쯤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듯 하달까요?

 

각 나라를 돌아다니는 과정 중에 유난히 '중국'이란 나라의 등장이 참 많이 보였습니다. 저자 역시 "이번 여행에서는 어디를 가나 중국 경제 기구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라 쓰고 있기도 하지요. 여기서 나타난 저자 코너 우드먼의 전형적인 서구식 해석을 한번 보시죠.

 

 

현재 서양의 자본주의은 식민주의 역사와 싸우고 있다. 콩고 동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서양 탓으로 돌리는 국가에 투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는 윤리적 난제에 발목을 잡혔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 식민지 수탈에 대한 나쁜 기억에서 자유로운 중국이 움직이고 있다. …… 중국은 명목상으로는 공산주의 국가지만 세계관은 뼛속까지 자본주의적이다. 라오스 북부의 정글에서 나는 천연자원에 목마른 중국이 개발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세계 빈곤층의 생존을 고려하지 않는 현실을 보았다 

- <중국을 경계하라>라는 제목의 글 중

한마디로 서양의 제국주의·식민주의적 역사는 도외시 한 채, 현재 자신들의 실패를 '과거의 서양 탓'으로 돌리고 있는 나라들을 도와주는 게 과연 맞는거야? 뭔가 좀 억울하지 않아?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이들과 아무런 과거의 인연이 없는 중국이 난데없이 끼어들어 무차별적인 돈 공세로 그들의 자원을 앗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자신들은 '투자'를 하려고 했는데, 중국은 그저 '착취'만을 하고 있다는 거에요. 물론 동남아나 아프리카이 빈곤국에서 중국이 행하고 있는 행동들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판단의 근거가 지극히도 서구적인 것에만 있다는 게 이 책이 지닌 가장 커다란 문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중국을 경계하라>라는 제목의 글의 결론을 저자 코너 우드먼은 "서양의 진화된 자본주의가 현재 동양의 노골적인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라 내리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기도 합니다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저자의 배짱만큼은 정말 부럽습니다. '억대 연봉의 애널리스트'를 무식하다라 표현할 수는 차마 없겠습니다만, 그가 지닌 역사 인식에 대해서만큼은 '무식하면 용감해질 수 있다'라 말해주고도 싶고,('너는 얼마나 잘났길래?'와 같은 반응은 이 책에서만큼은 사양하겠습니다.)  과연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뽑은 이는 '그가 만났다는 자본주의'가 결국 이런 것이었다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제목을 정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분의 배짱 또한 우드먼의 그것에 결코 뒤쳐지지 않을 듯하다는 생각 뿐인 씁쓸한 독서였습니다. 

 

.

.

.

 

 "진보는 항상 서구화의 기준에서만 정의된다. 따라서 서구는 개념상 가장 서구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인류 발전의 정점을 항상 차지하는 반면, 다른 사회는 서구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진보의 정도가 평가된다." -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p26.

 

위의 짧은 문장이 꼬집어내고 있는 서구의 인식수준을 이 책은 더도 덜도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요. 부디... 이런 책들이 마케팅의 힘으로 많이 팔리게 되는 일은 더 이상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0일간의 세계 일주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4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2014,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 「인생」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고 나니, 자연스레 두 권의 책이 손에 잡히더군요. 약간의 고민끝에 아마도 처음.이지 싶었지만 그냥 그 두 권 모두를 한꺼번에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름아닌 바로 이 「80일간의 세계일주」!!! --- 초반이지만 나름 자연스러운 꼬리죠? ^^

.

.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와 같은 파란만장하고 다양한 경험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씌여진 게 무려! 1873년이었음을, 또한 소설의 배경 마저도 그와 같은 시대인 1872년임을 감안한다면 여기 담겨져 있는 내용으로도 당시엔 충분히 '파란만장하고 다양한 경험들'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개인적 사생활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필리어스 포그'라는 신사는 얼마전 일산의 어느 극장에 걸려있던 포스터에서 보았던 영화 <플랜맨>의 주인공처럼 그의 일상생활 속 모든 것을 정확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하루 일과는 분 단위로 행해지며, 그것이 틀리는 경우는 전혀 없지요. 심지어 면도용 물은 섭씨 30도이어야하는데 하인이 실수로 그만 29도의 물을 가져왔다하여 그를 해고하기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파스파르투'라는 새로운 하인이 온 날에도 또한 포그 씨는 "11시 반에 집을 나와, 오른발을 왼발 앞으로 575번 내딛고 왼발을 오른발 앞으로 576번 내디뎌"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유일한 외출처인 <혁신 클럽>에 도착합니다. 그 날의 주요 화제는 5만 5천 파운드라는 거금이 영국은행에서 감쪽같이 도난당한 사건이었고, <혁신 클럽>의 회원들은 영국경찰이 곧 범인을 잡을 것이다란 쪽과 이 넓은 세상에서 (당시만해도 범인의 몽타쥬같은 건 없었습니다) 어떻게 범인을 찾느냐는 쪽으로 나뉘어지게 되지요. 이 논쟁은 곧 세상은 그렇게 넓지 않다에 관한 논쟁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에 주인공 포그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모닝 크로니클>이 제시한 바 그대로 80일이면 지구 한 바퀴를 충분히 돌 수 있을 만큼 "지구가 예전보다 작아졌다"라 말합니다.   

 

 

런던에서 수에즈까지, 몽스니와 브린디시를 경유하여, 철도와 기선으로 --- 7일

수에즈에서 뭄바이까지, 기선으로 --- 13일

뭄바이에서 캘커타까지, 철도로 --- 3일

캘커타에서 홍콩까지, 기선으로 --- 13일

홍콩에서 요코하마까지, 기선으로 ---- 6일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기선으로 ---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철도로 --- 7일

뉴욕에서 런던까지, 기선과 철도로 --- 9일

모두 합하여 80일

 

어떤 경우, 아주 중요한 일이라도 그 시작은 매우 사소한 것일 때가 종종 있지요. 포그 씨의 이러한 계산(그는 여기엔 악천후와 역풍, 난파, 열차의 탈선 등까지를 모두 포함된 계산이라고까지 말합니다)에 <혁신 클럽>의 회원들은 모두 말도 안된다는 의견을 내고, 급기야 게 중 한 사람이 이 계획이 가능하지 않다에 4천 파운드를 걸겠다는 내기를 합니다. 이에 포그 씨도 지지않고 자신이 직접 이 계획을 실행해보이고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데에 무려 2만 파운드를 걸게 되지요. 곧 곁에 있던 다른 네 사람의 회원도 '안된다'에 합류해 결국 1:5의 내기에 양측이 각자 2만 파운드(어제자 환율로도 약 3,500만원의 거금)의 거금을 건 내기가 성립되게 된겁니다.

 

포그 씨는 지체하지 않고 "오늘 저녁 8시 45분 도버행 기차로 출발하여 …… 오늘이 10월 2일 수요일이니까, 1872년 12월 21일 토요일 오후 8시 45분까지 혁신 클럽의 휴게실로 돌아오겠다"는 선언을 하며, 그의 전 재산인 4만 파운드 중 2만 파운드는 내기의 판돈으로, 나머지 2만 파운드는 여행의 경비로 사용하겠다고 계획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작가는 '도박은 영국인들의 타고난 기질이다'라 말하며 그 기질은 이러한 여행(?)을 낳은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런던의 증권시장에 이른바 '필리어스 포그 주(株)'라는 새로운 증권까지를 상장시키게 했고, 그 '필리어스 포그 주(株)'는 실물 뿐 아니라 선물(futures)로까지 확대되어 활발히 거래되었다라 묘사하고 있기도 하지요. 어쨌든!!! 

.

.

.

 

이 '여행 아닌 여행'은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의 영어 제목 <Around the World in 80 days>가 말해주고 있듯이 이 소설의 내용은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의 여행기(travelog)가 아니라 오로지 '80일'이라는 시간 내에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거지요. 그러하기에 이 소설엔 주인공 포그 일행이 거쳐간 세계 각국의 문화라든가 풍경이라든가에 대한 설명이 일반적인 여행기처럼 자세하거나 많이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포그 씨 일행이 잠시나마라도 거쳐야 했었던 인도, 중국, 일본등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을 때, 작가는 하인 파스파르투의 입을 빌어 '터무니없는 나라를 떠나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가는 중'이란 표현을 썼기도 했을만큼 여전히 이 소설에는 19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동양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사고가 녹아있기도 하지요. 물론 인도의 '써티 문화' 등에 관해서는 작가의 인식이 틀렸다라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신문에 연재되었었다는 이 소설을 읽었었을 수많은 독자들이, 작가가 쓴 '터무니없는 나라를 떠나'라는 짧은 표현을 통해 동양권에 대해 가지게 되었을 근거 없는 오해가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는 되더군요. (다신 한번 더) 어쨌든!!!

 

요즘과 같은 세상이라면 비행기나 기차의 사소한 연착 등은 있을지언정,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건 대략 예측가능하고 조정가능한 변수들하에서의 여정이 될 것이겠습니다만, 1872년의 상황은 결코 그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그 씨는 <혁신 클럽>에서 주장했었던 것처럼 여행 도중 연이어 생겨나는 돌발변수들에조차도 모두 자신의 예상하에 있었다 말하는데, 여기서도 또한!!! 그가 말하는 '예상했던'이란 단어는 사실 연착이나 탈선 등등 발생가능한 개별의 돌발상황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러한 돌발상황들이 초래할 '시간의 지체'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주인공은 그러한 시간의 지체들을 자신의 기막힌 순발력과 그 순발력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해준 막대한 여행경비덕분에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게 되지요. 지금이나 그때나... 역시 집 떠나면 '돈'이 장땡인듯!!!

 

……………………… 

 

'80일'이라는 시간과 '지구 한 바퀴'라는 공간, 그리고 '2만 파운드'라는 돈은 이처럼 그것들 자체로서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닌, '포그'라는 인물이 자신의 정확성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사용했었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이 설정은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인 픽스 형사에게도 적용되어, 그가 수행하고자 했던 원래의 목적까지도 잊혀진 채 무조건 '80일 안에 세계일주를 하여야한다'라는 것에 모두 묻혀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거기에 애초부터 이 계획을 탐탁치 않아했던, 허나 여행 자체는 원래 무척 좋아했었던 하인 파스파르투마저도 어느덧 동일한 이 '여행아닌 여행'이라는 목적에 동화되어버리고 말지요. 그러하기에 이 소설은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 어쩌면 무척 허무한/알멩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게됩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 모두가 어쩌면 옆을 볼 수 없도록 눈가리개를 한 채 앞만 보며 경주를 해야하는 경주마와 같다고나 할까요? 독자가 판돈을 건 관람객이냐 아니면 말을 타고 있는 기수냐, 혹은 그 말의 입장이느냐... 에 따라 이 소설의 평가(?)가 극렬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나 할까요?  

 

최소한 (19세기 후반의 문학사조 같은걸 전혀 알리 없는) 제가 이해하는 바에선 작가 쥘 베른은 이 소설을 (제가 또한 알아챌 수 없는)무언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만 됩니다. 이는 분명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있는 작가 위화의 소설관과는 분명 다른 것이 아닐까싶기도 하지요. 어쨌든!!! 독자에 따라 느낄지도 모를 이 '허무함/알멩이 없음'을 작가 쥘 베른 또한 감추고 싶었던건지 다음과 같은 (물론 현재의 시각에서 보아서지만) 좀 얼토당토않은 결론으로 소설의 마지막을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필리어스 포그는 내기에 이겼다. 그는 80일 동안에 세계일주를 끝마쳤다. 그러기 위해 온갖 탈것을 이용했다. 기선·기차·마차·요트·상선·썰매, 심지어는 코끼리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별난 신사는 놀라운 침착성과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 여행에서 그가 얻은 이익은 무엇인가? 그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말할까? 확실히, 한 아리따운 여성말고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그러나 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그 여성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하찮은 것을 위해서라도 세계일주를 하지 않을까?

 

 .

.

.

 

'여러 나라를 경험한다'라는 동일한 주제를 가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 옹과 이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 포그 씨에게는 사실 좀 특이한 공통점이 두 개 있지요. 첫째로 그 둘에게는 가족, 심지어는 친척까지도 전혀 없다는 겁니다. 어쩌면 이 사실이 이 두 소설과 위화의 소설 「인생」의 주인공인 푸구이 옹의 인생에 결정적 차이를 낳게 해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전후좌우야 어찌되었건 돌보아야할 가족이 없다라는 설정으로부터 시작된 알란 옹과 포그 씨의 인생과, 가족을 돌보아야한다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푸구이 옹의 인생은 어쩌면 그들이 서양인과 동양인이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런 <설정>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그토록 달라진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더군요. 만약... 알란 옹과 포그 씨에게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었더라도 그 두 소설이 같은 이야기로 온전하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또 하나!!! 알란 옹과 마찬가지로 포그 씨는 소설의 마지막에 한 여인을 얻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근데 이게 또... 혹 전형적인 서양식 사고방식이 아닐까도 싶더군요. 별로 인상깊지 않았던 현대의 소설 「사기꾼」에서도 주인공은 마지막에 한 여인과 평안한 삶을 얻는 것으로 결론지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 여성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었다"라는 이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어쩌면!!! 작가 쥘 베른만의 것이 아닌, (동양인으로서는 아마 끝끝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를) '다른 목적을 가진 행위로부터 생겨난 부산물로서의 여성', 그리하여 그것이 현재에는 'trophy wife'라는 어이없는 단어로 표현되기도 하는 현실을 낳은 것이 아닌가도 싶은겁니다. (부디 너무 오바했다는 비난만은 말아주시길. --;;) 서양이 동양을 이해하지 못하듯, 동양 또한... 이렇게 서양을 이해할 수 없는건가요? --;; 

.

.

.

 

내 아내를, 다시 태어나도 내 아내와 결혼하고 싶다라 말하는 남자에게 그 아내(될 여자)를 찾기 위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하겠느냐라 물으면 당연히 하겠다라 대답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때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분명 그녀를 만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는겁니다. 목적은 분명 '아내를 만나는 것'이지요. 여전히... "사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하찮은 것을 위해서라도 세계일주를 하지 않을까?"란 소설의 마지막 문구에 등장하는 '그보다 훨씬 하찮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그보다 더더욱이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건... 바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수단'으로서만 사용되고 있다라는 점입니다. (물론 인도에서 아우다 부인을 구출하고, 미국에서 파스파르투를 구출하려고 기차를 포기하는 장면이 있기는 합니다만 주인공 포그 씨의 표현대로라면 그 모든 것들 또한 그의 '계획'하에 있었던 일일테니 딱히 커다란 감동을 주는 장면이 될 수는 없겠지요.) 제 아무리 시대상이 그랬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라 생각해보려해도... 말이죠. 

 

모르겠습니다. 이건 단지 저의 관점에서 느낀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일 뿐, '판돈을 건 관람객'은, '말을 모는 기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말이죠. '수단과 목적은 때론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란 문장에의 동의 여부가 아마도... 이 작품에 대한 개인의 느낌을 결정적으로 차이나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분명하게 듭니다. 어린이용 버젼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종원군에게 읽어보라 했습니다. 지난 번 「왕자와 거지」를 읽고 각자의 느낀점을 말했던 것이 참 재미있었거든요. 13살 종원군은 과연 어떤 느낀점을 말해줄지 사뭇.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특별한 이유.를 끄집어 낼 수는 없습니다만, 참 많이도... '들었다 놨다'하며 차마 읽기를 망설여했던 책이었습니다. 두껍지도 않은,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아 보이는 이 책을 말이죠. 어쩌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인생'이란 단어의 뭔가 모를 무게에 억눌렸어서였을지도, 혹은 '인생'이란 그 단어에 아직은 진지한 관심이 없었서였을지도 모를 이유로...

 

.

.

.

 

'소설 읽기'에 대한 변명? 혹은 정당한 이유? --- 그것이 어떤 단어로 불리우든 저 스스로 그 '소설 읽기'를 주저할 때에, 작가 위화는 「허삼관 매혈기」에도 나와있는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을 통해 '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 대한 그의 이해와 감상은 다른 독자는 물론, 작가의 그것과도 전혀 다를 것이다'라며 저의 주저함을 명확하게 멈추어주었었지요. '그래! 소설은 시간 때우기도 아니고, 작가의 말장난을 즐기는 것도 아닌... 타인의 경험을 통해 나의 경험을 다른 시선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야!!!'라며 말입니다.

 

중국 혁명과 대약진,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시기들을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았던, 그것도 실화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 속 삶을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는 이 소설은 그렇다면 어떻게/어떠한 이유로 저의 마음을 움직여줄 수 있었던걸까요?

 

.

.

.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 작품의 원제 '살아간다는 것(活着)'은 매우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 힘은 절규나 공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

 

- 위화가 쓴 <서문>과 <한국어판 서문>에서 발췌 인용

이 책을 읽으려 여러번 펼쳤다 다시 덮었던 건... 다름아닌 위에 인용해 놓은 글들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써놓았길래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간다'란 말을 이처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걸까,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이란 표현이야 그렇다 쳐도,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이란 또 도대체 뭔 말인가... 하면서 말이죠.

 

………………………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그야말로 자기가 원하는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길에서 얼핏 본 이쁜 여학생을 별 어려움 없이 자신의 아내로 만들었고, 결혼한 후에도 기생집에서 술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했기에 또한 그렇게 살았었고, '사업을 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노름판에 끼어들었다 결국엔 집의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만... 삶의 과정만 놓고 보자면 그야말로 '즐겁고 또 즐거웠던, 더 이상 즐거울 수 없었던'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요.

 

옛날에 우리 쉬씨 집안 조상들은 병아리 한 마리를 키웠을 뿐인데 그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되었고, 닭이 자라서 거위가 되었고, 거위가 자라서 양이 되었고, 양이 다시 소가 되었단다. 우리 쉬씨 집안은 그렇게 발전해왔지. …… 내 손에서 쉬씨 집안의 소는 양으로 변했고, 양은 또 거위로 변했다. 네 대에 기르러서는 거위가 닭이 되었다가, 이제 닭도 없어졌구나.

사실 푸구이의 이런 성향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라 해도 될만큼 그의 아버지 또한 만만치않게 '호방한' 젊은 시절을 살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푸구이와의 차이가 있다면 위 아버지의 독백처럼 그의 호방함이 집안 재산의 반토막으로도 감당이 가능했었다라는 것 뿐. 결국 집안의 모든 재산이 노름빚으로 날아가버렸다는 그 충격으로 푸구이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럼에도 푸구이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 자전은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으면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은 법'이란 말로 푸구이를 위로합니다. 행여... 푸구이가 죄책감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갈까하는 걱정때문이었지요. 

 

나는 비로소 반년 전에 그들한테 빚을 지기 시작해, 반년 만에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가산을 전부 탕진했다는 걸 알았지. …… 성문 밖에 이르러 비스듬히 뻗어 있는 작은 길을 보자, 또다시 털컥 겁이 났어.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 허리띠로 콱 목을 매 죽고 싶었다네. …… 사실 난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화낼 방법을 찾았던 것뿐이거든. 게다가 내가 죽는다고 노름빚이 없어지는 게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네. 그래서 이렇게 혼잣말을 했지. "그만 두자, 죽지 말자구."

이 소설이 '중국 소설'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읽는다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을 우연(?) 때문에 푸구이는 2년여 동안 타의로 집을 떠나 있어야 했고, 다시 돌아온 집에 더이상 그의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었지요. 병으로 농아가 되어버려 있던 딸 펑샤와 (뱃속에 있을때 헤어졌기에)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들 유칭, 그리고 어느덧 늙어버린 모습의 아내 자전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푸구이의 처음부터 다시 병아리부터 키워야하는 새로운(?) 삶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책의 제목에서도 예감되듯이 그 이후 푸구이 가족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아들 유칭이 권력자 아내의 사산을 막기 위해 헌혈을 하다가 너무 많은 피를 뽑아내 죽게 되었고, 고생만 하며 자란 딸 펑샤는 드디어 착한 남자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 싶었건만 그녀 또한 아이를 낳자마자 과다출혈로 죽고 맙니다. 아들은 피가 없어 죽었고, 딸은 과다출혈로 죽은거지요.  

 

내 두 아이는 모두 그렇게 아이를 낳는 와중에 죽었다네. 유칭은 남의 아이때문에 죽었고, 펑샤는 자기 아이를 낳다가 그렇게 됐고. …… 펑샤는 죽은 뒤 그 작은 병실에 누워 있었지. 그런데 그 방을 보는 순간 도저히 못 들어가겠더라구. 십여 년 전 유칭도 바로 그 방에서 죽었거든.  

'인생'이란 것이 푸구이에게 선사해 준 고통은 그랬던겁니다. 그러고도 모자란 '인생의 고통'은 딸 펑샤가 죽은지 석 달이 채 되지않아 푸구이로부터 그의 아내 자전을 앗아갔으며,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위 얼시를, 그리고 기어이 하나 남은 혈육인 외손자 쿠건까지를 모두 푸구이로부터 떠나가게 합니다.

 

소설은 노인이 된 푸구이가 어느 젊은이에게 자신의 돌아온 '인생'을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마친 푸구이가 말하죠.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나도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 주검을 거둬줄 사람을 구태여 바랄 필요가 없단 말일세.'

   

 ………………………

 

「허삼관 매혈기」, 「제7일」, 그리고 이 책 「인생」... 이렇게 위화의 소설 세 작품을 읽었더랬습니다. 세 작품의 번역가가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이상하죠?--;;) 위화의 소설은 여전히 일관되게 차분하며 또한 (잊지않고) 유머러스하게 읽혀집니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는 작가의 말을 빌자면, 이 책의 옮긴이가 소설 말미의 <해설>을 통해 ' 소설에서는 푸구이가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자기 해체 과정을 농민이라는 존재로서의 삶을 통해 극복해내고 있고, 그것이 땅과 노동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그 현실적 노력 속에서 정채롭게 그려지고 있다'라 (지나칠 정도로 지극.히. 평론가답게)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만, 또 다른 독자인 저에게 이 소설은 「허삼관 매혈기」와 「제7일」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던/되는 작가 위화의 꾸준한 주제인 '아버지'와 '작가의 조국, 중국'에 관한 다른 버젼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

.

 

세 작품 모두 분명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란 단어를 쓰기엔 아직 제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로서의 경력'이 세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그것에 훨씬 못미칩니다만,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기억해 본다면, 아직도 정정하신 내 아내의 아버지를 바라보노라면... 위화의 소설 속 아버지들과 모두 동일한 '아버지스러움'을 떠올리게 됩니다. 박범신의 소설 「소금」에 등장하는 '아버지'에는 처음부터 아직까지도 여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만, 과연 내가 나의 아이에게 이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혹여라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소금」 속 아버지인 선명우와 같이 행동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이라도 없는 걸까... 하는 자책 섞인 의문 또한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라는 게 저를 은근 불안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

 

 

<인생>이라는 작품은 개인과 운명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감동적인 우정이다. 왜냐하면 그 둘이 서로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증오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그의 운명은 서로 상대방을 포기할 방법이 없고, 서로 원망할 이유도 없다. …… 아울러 <인생>은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 또한 나는 <인생>이 ……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인생>에는 우리 중국인들이 최근 수십 년 동안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

 

이 작품 「인생」의 '한국어판 서문'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만, 이는 그 이후에 발표된 작품 「허삼관 매혈기」에도 정확히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되기도 하며, 넓게 본다면 가장 최근작인 「제7일」 또한 결국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건 '이 작가의 작품은 모두 거기서 거기!'란 비난을 받을 요지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또한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만... 같은 작가의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그 작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위화라면,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최소한 저는 더 이상은 그런 비난을 제 밖으로 꺼내어 놓을 수는 없게만 됩니다. 같은 내용이 적혀져 있는 교과서를 여러 번 읽다보면 맨 처음 그것을 읽었었을 때완 분명 다른 무언가가 제 머릿속에 새겨지듯이, 「허삼관 매혈기」를 통해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렇게 작가 위화가 만들어 낸 이야기를 얼핏 접했더랬습니다만 「제7일」과 「인생」을 읽고나니 완전히!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처음보다는 확실히!!! 무언가가 그려지고 잡혀질 것도 같은... 작가의 의도가 약간이나마 이해되었다라는 말은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비록 제가 중국인도 아니고, 중국을 잘 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말이죠.

 

.

.

.

 

 

"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 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 소설의 초반부에 밭을 갈고 있는 푸구이 노인이 한 마리뿐인 소에게 하는 추임새입니다. 소설의 화자가 푸구이 노인에게 묻지요. 소는 한마리뿐인데 왜 여러 개의 이름을 부르죠?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푸구이가 대답합니다. 

 

"소가 자기만 밭을 가는 줄 알까 봐 이름을 여러 개 불러서 속이는 거지. 다른 소도 밭은 갈고 있는 줄 알면 기분이 좋을 테니 밭도 신나게 갈지 않겠소?"

 

워낙 초반부에 등장하는 대화인지라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저 무심코 넘어갔던 부분이었습니다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문득 그 대화 속 이름들이 궁금해지더군요. 다시 되돌아가 본 대화 속 이름들은 모두 푸구이 노인이 자신의 일생 동안 땅 속에, 그리고 자신의 가슴 속에도 묻었던 가족들의 이름이더군요. 게다가 푸구이 노인과 함께 밭을 가는 소의 이름도 또한 푸구이였습니다.

 

"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 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이 추임새는 어쩌면 푸구이 노인이 자신에게 거는 쓸쓸한 자기최면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은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란 말로 자신의 일생을 표현해 낸 푸구이 노인의 '인생'이 결코 멋져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쩌면... 타인에게 비추어질 저의 인생 또한 '거기서 거기!'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란 생각을 해본다라면 저 역시 '게으름 피워선 안돼'류의 자기최면이 좀 필요한 게 아닐까도 싶네요.

 

 

 

책이란 거... 읽으면 읽을수록 제 머리를 참 복잡하게 만들어주네요. 복잡함.에 복잡.이 더해지니... 이 멋진 작품을 겨우 이렇게 밖에는 정리해내지 못하냐!하는 화나는 쪽팔림만 가득합니만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 마음을 뭐라 딱 꼬집어 말해낼 수는 없게, 그렇게 슬프게 만들어주는 작가이고 그런 작가의 작품>이란 함량 미달의 표현으로 마무리를 하게만 되네요. 이 분의 작품들을 읽고, 이 분의 사진을 보노라면 아마... 그 누구라도 이 사람, 위화와 소주 일잔 해봤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될 듯.  

  

 

 

     
 

 

"(나이가 들수록) 온몸이 점점 굳어 가는데, 딱 한 군데만 날이 갈수록 부드러워 진다네."

 

- 푸구이 노인의 말

 
 

 

 

 

 

'남자'... 만 이해할 수 있는 유머 맞나요? ^^;;

 

 

 

★ (읽어본) 위화의 다른 작품들 

- 「허삼관 매혈기 : 문화대혁명... 그리고 아버지. 

- 「제7일 : 오늘의 중국... 그리고 아버지.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 위화가 말하는 그의 조국 중국. 그러하기에... 위화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입문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