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가 써놓은 이야기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을 두고 과연 그것을 독자의 '의무'라고 말할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전에 읽었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두 작품은, '뭔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야기의 서술'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그 '별 것 없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건지, 또한 '시간과 정신노동을 투자한' 독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이 작품에서 얻어내야 하는/얻어낼 수 있는 투자의 성과는 무엇인지.에 관한, 그리고 종국에는 '도대체 이 작품이 왜 고전/명작이라 일컬어지는지'라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 - 이 작품들을 진심으로 '고전/명작'이라 스스로 생각하던, 혹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든가 하던간에 - 을 찾아내라 말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제게 주었었고, 그에 더해 심지어는 그 해답을 웬지 반드시 찾아내어야만 할 것 같은 (그야말로) '의무감' (또는 오기)같은 것까지를 느끼게도 해주었더랬습니다. 독자가 찾아내는 그 '무엇'은 그의 개인적 과거, 현재의 상황 등등등 엄청나게 많은 변수들의 조합으로 인해 (비록 일정한 공집합같은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결국엔! 모두 다 다를 밖엔 없을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남아있는 나날」을 통해 제가 얻었던 그 '무엇'을 말한다면 <'인간'은 결코 완전한 독립변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런 '인간'의 삶이란 것이 스스로에게나 제 3자로부터의 평가를 받게 되는 단계에서 그 독립변수일 수 없었음이, 즉 종속변수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의 삶 전체를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평가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라는 사뭇 비극적인/자포자기스러운 것이었었습니다...만, 제가 이런 '무엇'을 얻게 되는 과정 자체는 비록 애잔하고 슬프기는 했었으나, 그 과정 속에서 단 한번도 '비극적'이라든가 '자포자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흐름'만큼은 제가 처음으로 만나본 작가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 제 취향에 잘 맞더군요. 그런 이유로 그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진다는 이 책 「나를 보내지마」를 (여전히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나날」의 꼬무책으로 급하게 구입해 읽어보았습니다.

………………………………

​'얼핏 성장 소설로 읽히는 캐시의 이야기 속에 독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몇 개의 단어들이 등장해, 혹시 몇 줄을 빠뜨리고 읽은 게 아닐까 하고 행간을 뒤져 보게 만든다.'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또한 바로 이전에 읽었었던 그의 작품 「남아있는 나날」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어느덧 초반부가 넘어가고 있었던 부분에 다가갈 때까지도 그 내용에 몰입하게 되지는 못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비록 책의 뒷표지에 쓰여져 있는 간단한 힌트를 머릿속에서 내내 떠올려보며 그것을 힌트삼아 퍼즐을 맞춰보려했었어도, 이 책은 거의 종반부가 될 때까지조차 그 퍼즐에 대한 해결의 기미를 전혀 보여주지를 않았었지요. 최인훈의 「광장」은 그러했기에 중간에 읽기를 포기했었으면서 왜 이 책은 계속 읽어낼 수 있었느냐.는 오로지 「남아있는 나날」을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러다가 분명!!! 나에게 뭔가 굉장한 것을 느끼게 해줄꺼야!라는 (근거가 그리 충분하지는 않은) 믿음때문이었습니다. 

.

.

.

​히가시노 게이고의 「변신」은 그를 그저 글솜씨 좋은 대중작가로 평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품에서 작가는 "과연 '나'란 존재는 어디서부터 '나'가 되는가"란 질문을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지요. 나의 다른 신체기관은 모두 원래의 내 것인데, 나의 뇌 그것도 일부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대체된다면?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여전히 '과거의 나'와 똑같은 '나'인가하는 이 질문, 비록 히가시노 게이고가 새로이 만들어낸 의문은 아닙니다만 그 어떤 어려운 설명없이도 이러한 의문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그를 단순히 추리소설 작가로 머물게 하기에만은 많이 미안해하여야하는 일일겁니다.

그 「변신」에 대해 쓴 감상문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다음의 설명은 이러한 의문을 좀 더 확장시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지요.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 ……  최근 돼지 등 동물의 장기를 인간 장기의 대체용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 신체의 특정 장기의 이상 때문에 생명이 끊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과, 생명 연장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머지않아 "마치 구형 가정제품을 신형으로 교체하듯 신체 장기를 기능이 좋은 새것으로 바꿀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 아직 보편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이러한 새로운 유전자 공학과 생명 공학의 발달은 이제 '인간다움'을 설명해 왔던 기존의 틀에 의문을 제기한다. …… (한 발 더 나아가) 사이보그는 한편으로 의학 기술의 발달로 유기적 몸과 인공적 기계장치 사이의 경계가 인간의 몸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제 인공 심장, 인공 관절, 인공 신경, 인공 안구 따위가 수술을 통해 손쉽게 인간의 몸속에 삽입될 수 있게 되었다. …… (이처럼) 인공적 대체물의 발달은 인간의 몸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조되어도 괜찮다는 신념을 배양하고 있다. …… 정작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발전의 과정이 기존의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며, …… 이러한 과정이 '진화'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란 여성과 남성 같은 범주처럼 '경계'개념이다. 생물학적 조건들과 문화적 맥락의 결합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규정해 왔던 '인간'이라는 범주는 지금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다양한 치료의 혜택과 욕망의 영역 확장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해 왔던 개념들이 급격하게 해체되는데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한국문화인류학회 著,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pp 67-73

 

삐삐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내 곧 핸드폰이라는, 당시에는 그저 머릿속에만 있었었던, 그 상상 속 바램을 실제로 만들어 냈습니다.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핸드폰에 어느새 카메라의 기능을, 그리고 이제는 내 일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그 핸드폰의 도움이 없이는 많이 불편해지는 세상을 만들어냈지요. 핸드폰의 진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중 정말 똑똑한 몇몇들)는 실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들을 그렇게 불편함으로 남아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생명의 유한함'이라는 것에는 과연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요? 

 

.

.

.

 

네. 이 작품 「나를 보내지마」는 인간의 생명 연장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복제품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에 관한'이 아닌, '-들의' 이야기라 써야할 듯.) 이처럼... 참신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닌, 게다가 매우매우 불친절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심지어 얇지조차도 않은 작품입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한 개인의 회고담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예의 A라는 것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도중, 그와 관련된 B와 C, 심지어는 가끔 D의 이야기까지도 한참을 말하다가 갑자기 다시 A로 돌아가는 형식의 서술을 매우 자주 사용하고 있지요. (이게 이 분의 특징인지까지는 이제 겨우 두 작품을 읽었을 뿐인지라 아직은 확신할 수 없...) 이런 결코 편치않은 조건들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끝까지 읽어낸 독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그 댓가로 주고 있을까요?

자세한 내용까지를 알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한 때 그리고 한동안 황우석 박사로 인해 자동차 부품을 바꾸듯 인간의 장기를 신품으로 교체할 수 있는 세상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는 상상을 했었던 적이 (그러니 마음놓고 술 더 마시자 했던 개인적 부작용도 있었었던 적이) 있었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기는 올 것 같지만, 어쨌든 그 때의 상상속에서도 내가 새로이 이식받게 될 간은 매우 통제된 환경의 공장같은 곳에서 '만들어진' 것일꺼라고만 생각했었었지요. 하지만 이 작품 「나를 보내지 마」에 담겨 있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상상은 아예 <완전한 한 인간, 하지만 복제된 것인> 존재를 만들어 내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초에 접어들자 과학의 약진이 얼마나 빠르게 이루어졌던지, …… 그러다 갑자기 온갖 새로운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졌지. 전에는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많은 병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 말이다. ……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이식용 장기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생기는 거라고, 진공실 같은 곳에서 배양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 했단다. 그래, 그걸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 '학생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그 때 이르러서야. 그 무렵이 되자 그들은 너희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너희 같은 존재가 꼭 있었어야 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그 과정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 사태가 그런 만큼 너희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려는 장벽이 늘 있어 왔단다. 

.

.

.

 

책을 읽을 때 항상 노트북이 켜져 있습니다. 뭔가 작은 부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읽으면서 밑줄 치게 되는 모든 부분을 적어놓기 위해서이지요. 워낙 처음부터 아리송한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작품이었기에, 그 중 어떤 것이 나중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지 몰라 참.으로 많은 부분들을 적어놓게 만들어주었던 작품이었습니다만!!! 다 읽고 나서야 그 거의 모든 것들이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더군요.

 

인간 복제의 문제... 도 물론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생각해볼 꺼리일 수 있겠습니다만, 저에게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바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라는 문장이었습니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표현은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만, (저도 포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나 돼지'를 가리켜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적 거리낌을 그다기 크게 느끼지는 않을겁니다. 동물성과 인간성을 가르는 경계,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만, 그게 무엇/어디가 되었든 분명한건 그것은 지극히 '객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는 그 객관적인 경계에 '이상/이하'라는 상대적인, 그것도 모자라 주관적이기까지 한 개념을 굳이 붙여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나 돼지에게 그들을 오로지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육'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명체에 대한 뭔가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미안한 감정때문에 우리의 식탁을 채소로만 채우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로, 또한 그 (미안한 감정이 어려 있는) 이유를 극복해내기 위해 어쩌면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을 동원해 소나 돼지들은 마치 그렇게 '사용'되기 위해 '사육'되어도 괜찮은/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단지 식탁의 풍요로움과 그로부터의 얻게되는 미각의 즐거움조차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이 '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 연장을 위해 사용되어 질 수 있는 복제된 인간에 대해서도 그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즉 그들을 다시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 억지로/스스로 생각하게 될꺼란 상상이 그리 일어날 확률이 낮은 것이 아님을... 가즈오 이시구로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매우 자신없는) 결론을 내려보게 됩니다.

 

………………………………

 

이 책을 읽는 내내 영화 <아일랜드>가 떠올랐더랬습니다. <아일랜드>와 이 작품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존재, 복제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마지막에 복제된 인간들이 떼거지로 수용소(?)를 탈출하는 장면을 보며 '쟤네들 저렇게 나가면 어쩔!'이라는 걱정(?)으로만 남아있는 영화 <아일랜드>에 비해, 이 작품 「나를 보내지마」는 훨씬 더 진지한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다만... "혹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과 흥미진진한 속도감을 기대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이 작품은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라 적고 있는 <옮긴이의 말>처럼, "이 작품 「나를 보내지마」가 모든 이들의 구미에 맞는 작품은 아니다"라고 했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나름의 결론/생각할 꺼리를 찾아내는 과정이 너무도 힘들었기에, 제가 얻은 그 '나름의 결론/생각할 꺼리'가 지니고 있는 진지함(이 있다해)도 실제만큼의 빛을 발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는 생각은 아쉽지만 끝내 버릴 수 없네요.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가즈오 이시구로가, 확실히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을 꼭 읽어보고싶게 만드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굉장한 매력이 있는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건 분명.해진 독서였었습니다.

 

- (맛있는 맥주를 마시며 포스트를 작성하는 주말을 소원했던 저에게 그 소원을 드디어 이루게 해준, 지난 주에 이어 또 다시)

at 'Brew House The Table', 일산. 

 (읽어본)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작품 : 남아있는 나날

 

★ More "Food for Thought"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변신 :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어디서부터 혹은 어디까지가 '나'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꼬무책'으로 최인훈 작가의 「광장/구운몽」을 선택했었습니다...만! 1/3쯤 되는 부분까지 읽어가는 내내 도대체 그 책에 조금도 몰입할 수가 없더군요. 현재와는 약간 다른 단어의 쓰임새에서 오는 그런 단순한 이질감 때문만은 아닌, 그냥 그 작품 자체가 저와는 맞지 않는다라 생각할 수밖엔 없었습니다. 유명한 식당이라 해서 그곳의 음식이 제 입맛에도 반드시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을 수도 있는거잖아~란 핑계를 대어볼 수도, 혹 더 솔직하게는 (어쩌면 제가 그 작품을 너무 일찍 포기해버려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그렇게 뜬구름 잡는 듯한 개인의 감정이나 서술 등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라도 그냥 끝내버리고 싶었었어요. 언제... 다시 그 책을 집어 들게 될지는 이미 시기가 미루어졌음의 문제가 아닌, 가능성의 차원이 되어버린 듯 한. --;;

.

.

.

「롤리타」를 다 읽고, 그에 대한 감상문을 다 써내어 내고 난 후, 제 이웃 분들 중 그 책에 대해 포스트를 올려놓은 글들을 읽어보았었습니다. (이건 매 감상문을 쓰고난 후, 항상 제가 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대부분 저와 비슷함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중, 어느 모르는 분께서 덧글로 「롤리타」처럼 인간의 내면을 묘사해 낸 작품들 중 「금각사」라는 작품과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작품을 강추!하신다 써놓으셨더군요. 어차피(?) 소설이라는 것에 기본적으로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롤리타」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역시나 그러한 면에서도 매우 대단한 작품들이었었고, 그러한 '묘사'가 주가 되는 소설로부터도 나름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많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에 (사실 최인훈 작가의 「광장」도 그러한 내용이라 들어 선택했었던겁니다만...--;;) 그 둘 중 일단! 제목이 뭔가 애잔한 이 책 「남아있는 나날」을 펼쳐보기로 했었습니다.

​……………………………

집사 : 주인 가까이있으면서 그 집 일을 맡아보는 사람.

A Butler is the most important male servant in a wealthy house.

​현재의 우리 정서에 딱!하고 와닿지는 않는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 스티븐스가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때는 1956년 7월, 장소는 영국. --- 달링턴 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미국인 패러데이는 전 주인 시절부터 이 집에서 집사로 일해 왔던 (책의 마지막에 이를 두고 그 역시 집과 함께 양수양도된 '일괄거래품목'이라 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스티븐스에게, 자신이 5주간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얼마간의 휴가를 가지라는 제안을 했고, 그렇게 해 떠나게 되었던 6일간의 여행동안 맞닥뜨렸던 일들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보게되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지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일곱 살때 영국으로 이주해 이후 영국에서 쭉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으로부터 지극히 영국적인 면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이상!한 것은 결코 아니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름조차 (여전히!) 일본식인 그의 작품에서 영국의 전통, 관습 등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꽤나 신기하긴 하더군요. (이 책을 다 읽고, 맨 처음에는 일본 작가들의 책이 꽂혀있는 곳에 놓았습니다만... 불꺼진 방안에서 자기네들끼리 살아 움직이던 <토이 스토리>에서처럼, 이 책이 불꺼지고 '살아난' 일본 작가들이 쓴 책들 사이에서 핀잔을 듣는 장면이 문득 떠오르는겁니다. 그래... 오늘 아침, 다시 서양 작가들의 책 쪽으로 옮겨주었!)     

 

.

.

.

 

솔직히 말해, 어떻게 정리해 내야 할지 앞이 캄캄하기만 한 작품이었습니다. 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등장하는 몇 가지의 (가볍지 않은) 주제들 중 과연 어떤 것을 이 작품의 메인으로 받아들여야하나에 대해 저 스스로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드디어 떠나게 된 여행의 시작 무렵, 스티븐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었던 어느 노인의 끈질긴 권유에 의해, 뭔가 끌리지는 않으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하는 오기에 이끌려, 약간의 땀을 흘려가며 올랐던 동산의 정상에서 보았던 멋진 풍경이 이 소설의 시작이자 토대가 되고 있다.> 라는 저의 이해로 일단 시작을 해봅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본 것과 같은 풍경에는 다른 나라의 풍경이 결코 갖지 못한 특징이 담겨 있다. 외국 풍경의 겉모습이 제아무리 더 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이 특징을 가장 잘 요약한 말이 있다면 '위대함'이란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 우리가 이 땅을 '그레이트(위대한)' 브리튼'이라 부르는 것을 두고 좀 건방진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데, 우리 나라의 풍경 하나만으로도 그 숭고한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 이 '위대함'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 내게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해 보라고 한다면, 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의 '결핍', 바로 그 점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 마치 땅 자체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비해, 아프리카나 미국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꼴사나운 과시욕으로 인해,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는 저급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처럼 영국의 한 풍경으로부터 스티븐스는 '위대함'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고, 곧이어 이를 자신의 직업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라는 '뚱딴지같은' 스티븐스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 이어지는 작품의 초반부를 읽자라니 '이 책 또 덮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그는 곧이어 '품위'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옮겨가게 되고 그와 연관되어, 역시 저명한 집안의 집사였었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냅니다.  

​"진정한 의미가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으며 그 외의 나라들에는, 실제로 사용되는 칭호가 무엇이든, 오직 하인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이따금 듣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대륙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들이기 때문에 집사가 될 수 없다. 오직 영국 민족만이 할 수 있다. …… 한마디로 말해 '품위'는 그런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결국 (제가 만일 이 작품을 읽는 '독자'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면) 독자는 스티븐스가 내내 고민하였던 '품위'라는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왜 그토록 그가 그것에 집착했었던가, 그리고 자신이 정의해놓았던 그 '품위'라는 것에 스스로 충실했었다.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지난 삶을 살아왔었었던 그에게 그 '품위'라는 것이 현재에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직업적 권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의 도덕적 진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 내 부친 세대의 집사들은 세상을 사다리와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즉 왕실, 공작,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을 제일 꼭대기에 놓고, '신흥 갑부'의 집을 그다음 단에 놓고하는 식으로 계속 내려오다 결국에는 오직 부에 의해 혹은 부의 결핍에 의해 계급을 판단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방식말이다. 야망을 가진 집사라면 누구나 이 사다리를 더 높이 올라가고자 안간힘을 썼으며, 대개는 높이 올라갈수록 직업인으로서 그의 권위도 더 커졌다. 물론 '헤이스 소사이어티'의 '저명한 가문'이란 개념에 담긴 것도 바로 이러한 가치관이다. …… 사실 그들의 사고는 당시 우리의 직업 최전선에 부상하고 있던 고급 인력들의 사고방식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다. …… 우리 세대는 세상을 사다리가 아니라 '바퀴'와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우리 중 직업적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 힘닿는 대로 이 중심축에 다가가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왜나하면 우리는 좀 전에도 말했듯,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잘 발휘하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느냐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주의적 세대였기 대문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 자신이 봉사해 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 나는 그분에 대해,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신사 중의 신사, 그리고 내가 경력의 절정기에 모실 수 있었음을 오늘날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티븐스 스스로 물어보았던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는 결국 자신의 회고를 통해 위와 같은 대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의 한 대목이 떠오르더군요. --- 수술을 위해서는 환자를 마취시켜야 하지요. 즉, 마취라는 행위는 수술이라는 목적을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서만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여기서 마취를 담당한 의사가 자신이 가진 마취기술의 한계에 도전해보겠노라며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게 되는 순간, '수술'이라는 원래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될겁니다. 하지만 스티븐스 집사는 그 책의 저자인 홍기빈의 표현을 빌자면,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었던, 자신 스스로에게 붙여주기를 끝내 쑥쓰러워했던 표현인 '위대한 집사'의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직업인이었었으며, 그러한 자격을 충분히 인정받으며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대우해 주었던 달링턴 경이라는 신사를 경력의 절정기에 모실 수 있었었다.라는 것만으로... (현재의) 우리는 그의 인생이 성공적이었었다라 말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

.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었던 주인 달링턴 경의 고귀한 이상이 결국에는 히틀러에 의해 조종당했던 꼭두각시 노릇에 지나지 않았었다라 세상 사람들이 비난했었을 때에도 스티븐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달링턴 경의 참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생각해왔지요. 하지만, 그가 엿새 동안의 여행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지나온 그의 삶은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었음'으로 결말지어집니다. 그 결말은 스티븐스가 집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었다는 이유때문이 아니라 그가 모셨던,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이고 신사 중의 신사'라 굳게 믿었었던 달링턴 경의 인생이 (비록 달링턴 경의 의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국 실패작으로 돌아가는 것에 종속될 수 밖엔 없는 것이 '집사'로서 스티븐스의 정해진 삶이었기 때문인 겁니다. 이것만 해도 미치도록 억울해할 수 있겠건만...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춘 집사라면 완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의 역할 속에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마땅하다. 자신의 역할이 무슨 판토마임 의상이라도 되는 양, 아무 때고 벗어 던졌다가 다시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품위를 중시하는 집사가 역할의 짐을 벗어도 무방하다고 느끼는 상황은 한 가지뿐이며 오직 그 상황에서만 가능한 법인데 그것은 즉, 그가 온전히 홀로 있을 때이다.   

​스티븐스의 지나온 삶에 '성공적'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는 엉뚱하게도(?) 달링턴 홀의 집사였던 그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었던 총무 켄턴 양과의 관계로부터도 생겨나게 됩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스스로 설정해 놓은 위에 언급된 '집사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완벽하게 짜여진 계획은 또한 언제나 완벽하게 그리고 항상 수행할 수는 없듯이, 제가 생각하기에 스티븐스는 자신의 역할에 너무도 완벽하게 충실했었었기에 안타깝게도 (그 자신이 말한) '집사가 역할의 짐을 벗어도 무방하다고 느끼는 상황' 즉, '그가 온전히 홀로 있을 때'를 거의 가져보지 못했었다라는 것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까지도 속이며 살아왔었던 것이죠. 육체적으로는 '온전히 홀로 있었'었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집사로서의 이어질 다음 역할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었기 때문입니다.

 

켄턴 양과의 관계 …… 에 대해 몇몇 '전환점'들이 있었었고 ……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 이 이질적이기도 또한 동질적이기도 한 둘의 관계가 완전히 일방적이기만 한 경우는 현실에서도 거의 없지만, 더군다나 소설 속에서라면 더더욱이 그러하겠지요. 20여 년전 달링턴 홀을 떠나 결혼 생활을 해온 '벤 여사' 또한 자신의 옛 상관인 스티븐스의 앞에서 다시 '캔턴 양'이 되어 다음과 같은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해주는 고백을 합니다.

 

 

그 옛날 (자신이 결혼을 해) 달링턴 홀을 떠나올 때만 해도 제가 정말, 영원히 떠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답니다. 그저, 스티븐스 씨 당신을 놀리기 약 올리기 위한 또 하나의 책략쯤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자신의 결혼 생활이 나름 행복하다는 말에 뒤이어)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화를 내며 집을 나와 버리는 것도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한 번씩 그럴 때마다 곧 깨닫게 되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

​“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단 하나,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때문에 어떻게 노력하느냐가 중요하다. 오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 좀 힘들다고, 정신적으로 지쳤다고 하루를 그냥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보낸 하루가 나중에 너무나도 큰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다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라.”

​고양 원더스 야구팀 김성근 감독님의 말씀입니다. 똑같은 표현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혹은 그 대상에 따라 그 표현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이 작품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런 의미로 '이 말씀 참 좋네!'하며 메모해 두었었던 말입니다만, 문득 이 작품을 다 읽고 나 다시 생각해본 김 감독님의 말씀은 최소한 스티븐스 집사에게만큼은 너무도 잔인할 수 있겠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 …… 새 주인인 패러데이 어르신께서 도착하신 후로 내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무던히도 애써 왔습니다. 그분께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으로 봉사를 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무슨 일을 하든 지난날 내가 설정했던 기준들에 한참 미달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작업에서 점점 더 많은 실수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죠.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전 같았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들이게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압니다. …… 나는 주어야 했던 것을 줘 버렸습니다. 달링턴 나리께 모두 줘 버렸지요.

아버지의 운명조차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목도할 수 없었었던 스티븐스 집사였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 속 감정까지, 자신도 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속여가며 그렇게 자신의 직분이 충실해왔었던 스티븐스 집사였었었구요, 그러했기에 스스로도 이처럼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라 말하는 스티븐스 집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주인인 패러데이의 미국식 농담에 어떻게하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전문가에게 농담은 결코 터무니없는 의미가 아니라 주인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는 의무라는 생각마저 든다'라 독백하고 있는 ​스티븐스 집사!!! 그는 '(끝이 없이 많이 남아 있을 줄 알았었던 그 시간이) 남아 있는 시간은 많지 않지만 아직 끝은 아닌' 그의 인생의 저녁에 여전히 이렇게 다짐하는 것으로 그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기 인생의 저녁을 준비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때라고 한 내 말동무의 이야기가 정말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고 한 그의 충고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만 하다. ​

과연 그에게도 여전히 <오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라.>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질문을 갖게 되는 것으로, //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는 그 순간.에 뭔가 짠!하다거나 혹은 뭔가 찌릿!하다거나 하는 것들이 떠오르는 책이 있는 반면, 막상 책을 덮는 순간에는 '앗! 대체 뭐지?'하는 느낌이었거늘, 읽는 동안 정리해 놓았던 조각들을 다시 읽어 모아가며 하나의 감상문으로 작성해 나가는 도중에야 비로소 '아! 이 책 정말...'의 꽝!!!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책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 책 「남아있는 나날」은 그 두 번째의 느낌을 주었던, 단지 그것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다시 한 번 더 읽는다면 정말.로! 훨씬 더 깊은 무언가를 느껴보게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경제학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어도 저의 경험칙 안에서만큼은 결코 irrefutable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느껴보게 될 수도 있겠다!!!란 아주 강한 느낌을 받았었다는... // 비록 그의 가치관이 어떤 점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 객관적이(어서 때론 굴욕적이라고도 표현되어 질 수도 있겠으나)고, 또 다른 점에서는 그만큼 객관적이지 못하다.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전... 이 작품의 주인공인 스티븐스 집사에게 건낼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말만을 가질 수 있다면 위로의 말을, 어쩌면 공감.이란 단어가 표현해 낼 수 있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것을 포함한 위로의 말을 전하게 될 것 같네요. 그가 엿새 동안의 여행길에 올랐던 그 첫 날에 목격했었던 동산 위에서의 풍경에서 느꼈었었던 그 '위대함'의 원천, "마치 땅 자체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실은 자신 스스로를 향해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이 사실 또한 예의 참으로 (이 책을 골랐던 이유 중 하나인 제목으로부터의 애잔함과 똑같은 바로 그!) 애잔하게 느껴지는, 뭔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 뒷 표지를 덮고 나서야 울컥!하고 올라오는 그 무엇인가.를, 이 감상문을 쓰기 시작할 때 이후 어느덧 석 잔의 하우스 맥주를 비우고 난 후인 지금... 꼭 표현해야 한다면 말이죠.

- at 'Brew House The Table', 일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4-02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살가죽 2014-04-03 14:14   좋아요 0 | URL
오!!! 이렇게!!! ^^

추천해주신 두 권의 책... 꼭 읽어보겠습니다.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주주의를 지켜내기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군대라는 곳이지만, 그러한 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곳 또한 대한민국의 군대라는 조직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비록(?) 출퇴근하는 군생활을 했었습니다만, 나름의 고충은 저도 참 많았었습니다. 특히나 4주간의 훈련소 생활은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나!'라는 생각만 하게 만드는 곳으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기도 하지요. --- 민주주의의 가치 중 하나가 '평등'이라면, 그 '평등' 하나만큼은 훈련소 시절 (지금이니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거지만) 참으로 '애잔'하게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었더랬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똑같은 일들을 해야만 했었었던,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던 시간 4주였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곳 또한 나름의 한 '사회'인지라 그 '사회'내의 고유한 판단기준에 의한 개개인에의 평가 역시 바깥의 사회와 다름없이 내려지기도 했었었지요. 헌데 그 '군대 사회'만의 판단기준에 의한 평가라는 것이 말이죠... : 서울대 대학원 출신의 동기가 동작이 빠릿하지 못하다며 연신 구박을 받았던 반면, 지하술집 주방보조로 있다 왔다는 동기는 허접한 과도 하나로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과일접시를 만들어 내 소대장들의 이쁨(?)을 받기도 했었었던, 대한민국에서 한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학벌로부터의 평등(free from)'을 그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었습니다. 허나!!! 과연 그것을 '평등'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제 눈에 보였던 그 '학벌로부터의 불평등'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의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와 해소되고 이루어진 평등이 아닌,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안에서 한 개인의 '쓰임새'의 유용성에 따른 평가, 즉 엄연히 말하자면 그 또한 또 다른 버젼의 '불평등'에 의해 그 효용가치가 사라져버려 지워지게 된 것 뿐이었겠지요.

 

.

.

.

 

비록 「롤리타」가 영어로 쓰인 소설이었습니다만,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던 사람입니다. 읽지 않고 잔뜩 쌓여져 있는 책들 중에 러시아 작가의 작품이 뭐가 있나 찾아보니 딱 한 권 있더군요. 바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 책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책이었습니다. 

 

……………………

 

사회생활이란 걸 정식으로 시작하여 10년쯤 되고나니, 역시 가장 어려운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른 한살까지 학교라는 사회에 속해있었을 때에는 '1+1=2'라는 명제에 대해 그 누구도 부정하는 구성원은 없었습니다. 가끔 왜? '1+1=3'이 아니고 2일까라는 것에 토론하고 고민하고 서로 질문을 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이러이러함으로 진리이다!'라 배우고 난 이후에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는 않았었지요. 헌데 말이죠... 일반 사회생활에서의 셈법은 학교라는 사회에서의 셈법과는 또 많이 다르더군요. 저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1+1=2'가 진리라 믿고 행동했었습니다만, '1+1=3', 심지어 '1+1=365'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상황앞에서는 도대체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대처해야하는지 몰라 많이 당황했었었고, 그러한 순간들이 점점 더 많이 쌓여감에 따라 제가 하고 있는 이 '사회생활'이란 것에 염증을 느끼게도 되었었지요.

 

물론 여전히 저는 '1+1=2'가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사회생활이 어디 그렇게 교과서에서 배운대로만 되나!'라는 윗 연배분들의 조언을 이제는 대략 80-90%까지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이 사실이 어쩌면 제가 그간의 사회생활에서 배운 유일한 배움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하지만 이걸 두고 '적응의 산물'이라 표현하는 것이 못내 가슴아프기는 합니다. (조심스럽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또한 조심스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고 있었던 '안과의사의 아내'가 끝내는 나도 차라리 눈이 멀어서 이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라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차마 '적응'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라고나 할까요?

 

.

.

.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 자체는 매우 간단하고 단순한 소설입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슈호프라는 한 인물이 보냈던 어느 하루의 일과가 이야기의 전부이니까요.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도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도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 오늘은 명절과 다름없는 날이다.

 

……………………………

 

"그렇다. 오늘 하루는 왠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들떠서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 오, 하느님, 오늘도 영창에 가지 않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라면 그런 대로 어떻게 잠들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 다섯 시에 시작되었던 슈호프의 하루는 이렇게 감사의 마음으로 끝맺음이 됩니다. 헌데 말이죠... 과연 위의 문장 속 내용들이 '감사'해야할 일들일까요? --- 제가 '감사의 이유'라는 것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걸 진정으로 깨닫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었고 그 더 좋은 것을 가지게 되면 '감사', 못가지게 되면 '불평과 한탄'이라는 양극단을 왔다갔다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읽었었던...

    

아픔, 슬픔, 괴로움, 고독이 무엇인지... 웃음, 행복, 즐거움, 사랑이 무엇인지... 위로가 무엇인지, 돌아봄이 무엇인지, 돌봄이 무엇인지 알고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가난해 보아서, 상처받아 보아서, 아파 보아서 알았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속상하고, 괴롭고, 외롭고, 서럽고, 지치고, 두렵고, 피하고 싶고, 원망하고 싶은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보았고, 사랑을 보았습니다. 순간마다 다가오는 따듯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2010년 11월 21일 아내의 일기 중에서

(다시 인용해 보는) 「아빠는 목사! 아들은 동자승?」에 나오는 위의 글은 그야말로 결코 잊혀지지 않을 세기의 강도로 제 마음을 때려주었었지요. 물론 이전에 제가 했었던 방식의 '감사' 또한 positive한 방식으로서는 분명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었습니다만, 절실하고 우러나오고 충족되는 '감사'는 바로 이런 negative한 상황으로부터의 감사라는 것을 비록 뒤늦은 나이였지만 비로소나마 느낄 수 있었었다라는 거. 어쩌면... 그런 경험이 있었었기에 이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으며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에 진정한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고 대학의 대학원 출신보다 지하술집 주방보조 출신이 더 환영을 받았다라는 사실에 생기는 의문은 지극히 일반 사회적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거라 말할 수 있을겁니다. 비록 한 달간의 훈련소 생활 이후의 나머지 군대생활에서는 그의 배경으로 인해 서울대 출신의 그 형이 훨씬 더 편한 군생활을 했었을 수도, 그에 반해 주방보조 출신의 동기는 고생 심하다는 짬돌이가 되어 그 17개월을 뺑이쳤었을지도 모르나 - 실제로 그 형은 모 보안부대의 '자판기병'이라는 보직으로 17개월을 보냈다라고 하더군요. 하루종일 부대 내 자판기에 커피랑 물 등등만 보충해주면 해야할 일 다 끝나는. --;; - 최소한 그런 일반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 눈에 훈련소 내에서의 그러한 '신분의 역전(?)'이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보여졌던 것이 또한 사실이었습니다만, 이 책을 읽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제껏... 그러한 '상황에 따른 신분의 변화'를 여기저기서 많이 목격하기도, 또한 제가 직접 경험하기도 했었었다라는 게 뒤늦게야 떠오르더군요. 한쪽 눈만 볼 수 있는 저는 두 눈을 다 볼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선 열등한 존재가 되었었었고, 두 눈 다 볼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선 또한 유일한 구원자의 신분이 되었었기도 한... 그런 경험들 말이죠.

 

.

.

.

  

 

오늘같이 추운 날이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앞사람의 등에 바싹 붙어서 바람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고는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나 죄수들은 생각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언제나 제자리에서 뱅뱅 돌게 마련이다. 누군가 매트 속에 감춰둔 빵조각을 뒤지지는 않을까? 저녁에 의무실에 가서 작업 면제를 받을 방법이 없을까? 

 

부이노스스키 중령이 앉아 있다. 자기 죽그릇을 비운 지는 오래 되었지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 그는 이제 몸이 녹아서 나른해진 상태였고, 일어날 힘도 없는 데가 땡땡 얼어붙은 밖으로 나가 싸늘한 난롯가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 그는 수용소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노동을 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지금과 같은 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이 순간,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명령을 내리는 해군 중령에서 굼뜨고 소심한 한 사람의 수용소 죄인으로 변한 것이다.  

 

모두들, 서로 누가 담배를 피지 않나 하고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담배를 꺼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없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그냥 쥐고만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수용소에서 생활한 지 만 팔 년째, 그러니까 벌써 구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동안 슈호프가 먹은 것이 무엇인가. 옛날 같으면 입에 대지도 못할 그런 것들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싫증났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천만에 말씀이다. 이렇게 이백 그램짜리 빵 한 덩어리에 온 정신이 팔려 있는 슈호프 옆에는 제104반 전원이 모두 똑같이 이 빵에 넋을 잃고 보고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맥이 빠지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이 모든 것은 양배춧국 한 대접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한 그릇의 양배춧국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 슈호프는 미리 봐둔, 건더기가 좀더 들어 있는 국 두 그릇이 자기 자리에 올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조정해서 쟁반을 내려놓는다. 

한 개인의 신분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화되고, 어떻게 쓰임새가 달라지는 가에 대해 이 작품은 이처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일 개인의 신분변화, 그리고 그것을 통해 결국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평등'해지게 된다라는 사실(혹은 그 '평등함'이 비로소 밝혀진다라는 사실), 즉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그리고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체계/평가기준에 의해 '평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사용되고 있기는 하나, '수용소'라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가치체계와 평가기준이 적용되는 곳에서는 기존의 우열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어쩌면 완전히 정반대의 새로운 우열체계가 성립될 수도 있다라는 거, 즉 '상황'이라는 것이 변함에 따라 (최소한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개인의 운명은 얼마든지 180도 바뀌어질 수 있으며 그 사실은 결코 불합리하다거나 비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이... 제가 받은 느낌하에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 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파치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 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슈호프가 자유를 그리워한 것은 오직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단 한 가지 희망에서였다. 그런데,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상황의 변화가 오직 겉으로 보여지는 개인의 운명만을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기를 무사히 다 마쳐도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주인공 슈호프는 결국... 그 자신의 목적마저도 내려놓게 되지요.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었던 자유라는 것을 이제는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지 아닌지조차 스스로 자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어쩌면... 이것이 당시 러시아의 '강제노동수용소'라는 체제가 원하고자하는 바였었을지도, 결국 그렇게 그 체계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어낸 승리자가 되는 것이며, (다시한번 더!) 어쩌면... 이것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도, 그리고 지금의 현재에도 또한! 겉으로 보여지는 우리의 운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마저도 알게모르게 이 사회의 체제에 '길들여지고/꺾이고/패배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라는 사실, 어찌보면 뜬금없을 수도 있겠는 이런 (지극히 좌빨!적인 ^^;;) 생각이... 이 책을 덮고 나니 떠오르더군요. (너무 거창해져 버린듯. --;;) 

소설은, 멋진 소설은, '위대한' 소설은... 이처럼 다 읽고난 후 이런저런 생각할거리들을 참으로 많이 남겨주는 진정으로 유익.한 정신노동을 하게해 주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롤리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끈적한 무언가가 내 손에 잔뜩 묻었는데, 손을 씻을 수 있는 상황은 도저히 아니고, 그런데 나는 지금 당장 반드시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 여덟 살 적에 썼었던 내 인생 최초의 일기장을 한장씩 넘겨가며 읽어야만 할 때... 와 같은 그런 찝찝 가득한 느낌만을 받았던 「스트로베리 나이트」를 잇는 책으로, 그냥 아무! 다른 이유 없이 그저 표지의 느낌이 뭔가 비슷하지 않나?하는 이유만으로 집어들었던 책이 바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였었습니다만... 

 

……………………… 

 

어느 분야에든 '전문가'라 불리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이 '전문가'가 불리우는 이유는 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기 때문이겠지요. 거기에 더해 '전문가'라 불리우기를 뛰어넘어 '대가'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또한 그들을 또한 그렇게 불리우게 만드는 명백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겁니다. 에로 영화만을 찍는 감독들에게도 분명 그들만이 만들어/자아낼 수 있는 에로틱한 장면 연출의 노하우가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만약 현존 국내 최고의 영화감독,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 혹은 원신연 감독 등과 현존 최고의 에로 영화 감독에게 똑같이 대강의 줄거리만을 알려주고 거기에 각자의 살을 붙여 한 편의 인생작품을 만들어 봐달라.라한다면 과연... 관객들은 감독의 이름이 지워져 있는 채로의 완성작을 보며 어떤 점에서 명백히 구분되어지는 차이를 알아채게/느끼게 될까요? 

 

어쩌면 이런 의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 「롤리타」일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해요. 마흔즈음의 이혼남인 영국인 험버트 험버트가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원래 계획되었던 곳이 아닌 곳에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맘에 들지않아 내일 당장 여기를 떠나겠어!라 결심했었었건만, 그 하숙집 딸을 본 순간 '오 마이 갓! 나 그냥 여기 계속 머물래!!!'하게 되었고, 결국엔 그 하숙집 딸과, 게다가! 하숙집 주인이었던 그 딸의 엄마와도 육체적으로 맺어지게 되고... 네!!! 지극히 전형적인, B급이라조차 불리우지 못할만한, 내용의 에로 영화 스토리로는 전혀 손색이 없을 소설입니다만 근데 도대체 왜!!! 이 소설에 사뭇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으며,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까지 올라가 있는걸까요? 

 

. 

. 

.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현재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분명 정신병자입니다. 게다가 이 인물의 성적 취향은 소아 이성애, 즉 어린 여자애들에게서 참지 못할 성욕을 느끼는 사람이지요.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들 중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 또는 몇 배쯤 많은 나그네 앞에서 자신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자기에게 매료된 나그네에게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라 님프의 모습(즉 마성)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 선택받은 소녀들을 '님펫'이라 부르고 싶다. …… 미모가 기준이 되지도 않는다. …… 야릇한 기품,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영혼을 파괴할 만큼 사악한 매력이야말로 또래 가운데 님펫과 어중이떠중이를 가르는 기준이다. …… 정상적인 남성에게 여학생이나 걸스카우트 단원들의 단체사진을 보여주고 제일 예쁜 아이를 찾아보라고 하면 당연히 님펫을 선택할 듯싶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 결국 다른 사람들은 님펫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 스스로도 자기가 가진 불가사의한 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어떤 남자가 님펫의 마력에 사로잡히게 되는 데에는 두 남녀 사이에 일정한 나이 차이가 필수적이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10년, 일반적으로는 30년이나 40년, 몇몇 알려진 사례를 보면 많게는 90년까지 나이 차가 나기도 한다. 이는 초점을 맞추는 데 필요한 거리인데, 그렇게 둘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 비로소 마음의 눈이 전율하며 그것을 극복하려 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뚜렷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남자의 정신이 여자를 인식하고 놀라움과 더불어 도착적인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뭐... 이런 말 지껄이는 소설을 읽었다고??? --- 일단 자세한 진도 좀 더 나가볼께요. 험버트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사춘기 소녀'의 의미를 갖는 님펫인 롤리타를 하숙집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매력적 외모의 이 영국인 남자에게 하숙집 주인, 즉 롤리타의 엄마인 샬럿 또한 연정을 가지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롤리타와 직접적으로는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험버트는 오로지 그녀, 롤리타를 자신의 feasible set안에 집어넣게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샬럿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롤리타는 험버트의 의붓딸이 된거죠. 그러고는 자신의 딸인 롤리타와의 합법적(!) 애무를 상상합니다. 헌데 이 에로 영화의 스토리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녀가 롤리타의 언니라고 상상했다. …… 샬럿과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이볼을 마셨다. 그 술기운 덕분에 엄마를 애무하면서 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새로 얻은 아내의 완숙한 몸에 올라타면서 이것이야말로 생물학적으로 롤리타와 가장 가까운 육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 우리가 함께 지낸 50일 사이에 …… 마치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엄마와 결혼했기 때문에 아내가 딸을 대신하려고 상당량의 청춘을 되찾은 듯했다.  

.

 . 

.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험버트란 인물이 써놓은 고백록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95쪽에서부터 102쪽까지 이어지는 부분, 하숙집 주인 샬럿이 교회에 가느라 집을 비운 사이, 그러니까 처음으로 롤리타와 단 둘이 집에 남게 되었을 때의 회상부분은 이런 말을 써도 될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따라 읽어 내려가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숨이 한두 번은 멈칫.도 하게되는 서술이더군요. 어쨌든 그 서술의 끝에서 험버트는 "나는 애처롭다고 표현하겠다. 어째서 애처로우냐 - 지칠 줄 모르는 불길처럼 성욕이 활활 타오르는 상황에서도 성심성의껏 열두 살 먹은 아이의 순결을 지켜줄 작정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변호/변명합니다. 헌데!!! 여기서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이 하나 있더군요. 롤리타와 단 둘이 집에 남게된 험버트가 롤리타와의 첫 스킨쉽을 가지게 되었던 그 장면을 서술하기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제부터 재현하려는 장면에는 독자 제현도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 '편견 없는 공감'의 마음가짐으로 바라보면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이 장면 전체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순수한지를, 독자 여러분도 몸소 확인해주시기 바란다. 자 이제 시작해본다."

 

……………………… 

 

1·2부로 나누어져 있는 소설에서 1부는 주인공 험버트의 성장사, 그리고 그 후 롤리타의 첫 만남에서부터 재혼한 아내 샬럿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2부는 다소 지루했는데, 그 후 험버트와 롤리타의 기나긴 여행과 그 과정에서 둘 간의 간극이 벌어지게 되는 심적 변화,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결말에 이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주인공 험버트는 굳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적 제약을 붙이지 않더라도 분명 정신병자적 성향이 다분한 사람입니다. 그는 실제로 롤리타와의 결혼을 상상하기도 했으며, 롤리타 3세라는 자신의 손녀딸에게 할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함에 있어 '침을 질질 흘리면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지요. 또한 제 판단에 험버트의 롤리타에 대한 사랑은 분명 육체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불쾌하다'라는 말은 '독특하다'라는 말의 동의어인 경우가 종종 있으며, 위대한 예술작품은 모두 독창적이고, 바로 그러한 본질 때문에 크든 작든 충격적인 놀라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라는 표현을 작품의 초반부에 미리 위치해 놓음으로서 독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 암시해주고 있기도 하지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주인공 험버트는 자신의 회고 내내 변명하고 있지요. 첫사랑이었던 애너벨 리와 이루지 못했던 사랑때문에 생긴 '잠재의식'속의 강박관념 - 사실 이것도 오로지 육체적인 것에만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 에서 깨끗이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롤리타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라 말하고 있기도 하며, 법적으로 자신이 롤리타의 아버지가 되었음에도 친권에 대한 아무런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섣불리 운명의 흐름을 건드리다가, 즉 운명이 내 손에 쥐어진 환상적인 선무을 정당화하려다가 오히려 선물을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문가'를 뛰어넘는 '대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한 무언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에, 어찌보면 똑같이 극단적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 「스트로베리 나이트」와는 달리 그 어떠한 찝찝함도 남겨주질 않습니다. 책의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 중, 어떤 비평가가 이 소설을 두고 썼다는 (poet과 erotic을 합성한)"poerotic 소설" 즉, 시적 에로티시즘의 소설이다라는 표현이 그야말로 더 이상 적절한 것을 찾을 수 없는 표현임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 누구도 빠짐없이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조차 허투루게 만들어진/씌여진 것이 단 하나도 없으며, '나는 강간범the rapist가 아니라 치료사therapist란다'라는 표현은 띄어쓰기 하나로도 얼마나 강력한 언어의 유희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스 신화를 포함한 서양 문학, 언어, 그리고 심지어는 정신분석학에까지도 뻗어있는 작가의 지식이 이처럼 찬란한 언어의 유희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꺼라 생각하며, 이러한 작품을 그야말로 '거의 완벽하게' 우리말로 옮겨놓은 옮긴이의 역량에도 또한 부러움 가득한 찬탄을 금치 못하게도 됩니다. --- '열두 살 이하 어린이는 무료, 그러나 로는 포로 신세' : 이 자체로만은 아무런 느낌이 없을 수 있는 문장이지만 그 원문 (제 추측으로는 아마도 --;;) 'free for under 12, but Lo's not free'를 읽게 된다면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문장이 되는 겁니다.  

 

 

.

 . 

.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스키가 작품의 주인공 험버트의 정신 세계를 옹호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현란한 언어구사와 곳곳에 의미있는 복선들을 감추어 놓고 있는 작가가 "편견 없는 공감"이라는 표현을 아무런 의미없이 사용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지요. '공감'이라는 단어는 '편견'이라는 감정이 필연적으로 작용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일진데, 작가는 의도적으로 이 "편견 없는 공감"이라는 표현을 험버트로 하여금 사용하게 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험버트의 주장은 그 처음부터가 말이 안되는 변명에 불과한 것'이란 메세지를 독자에게 건네어주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말이죠... 과연 소아성애가 왜 죄가 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상대가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라는 틀에 박힌 대답밖에는 저 또한 생각나는 게 없기 하더군요. 그러했기에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롤리타처럼 자신의 의사를 명백히 밝힌 것이라면, 그렇다라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곧이어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열일곱 스물넷>이라는 노래가 듣기엔 참 좋은 곡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동청소년 보호법'에 저촉되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국경도 없다는 사랑에 과연... 나이가 합법,불법을 결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잣대가 될 수 있겠느냐... 물론 작가가 이러한 의문까지를 작품에 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 작품에 대한 토론이 열린다면 매우 흥미롭게 다루어지지 않을까도 싶네요. 

 

 

 

 

 

이야기 자체는 이처럼 말도 안되고, 혹자에게는 역겹다라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만, 감독의 포커스가 에로틱함에만 맞추어져 있느냐, 아니면 '이러면 안되지'류의 교훈적 메세지에 담겨져 있느냐, 그도 아니면... 그것이 남녀간의 정사장면일지라도 그것을 화면에 표현해내는 '아름다움'에 있느냐로 B급도 안되는 줄거리로 이루어진 영화 작품을 평해본다면, 이 작품 「롤리타」는 분명!!!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한 줄 한 줄의 표현'에 어느새 빠져들어있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네요. 그러하기에... 이 작품을 두고 소재로 인한 논란을 말한다라는 건 그 사람이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간만에... '읽.는.다.'라는 노동으로부터 더할나위 없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었던 소설이었네요. 정말이지... 지금이라도 이 작품을 원문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적 소양을 키우고 싶습니다만, 그것이... 언어의 습득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또한 알기에 그나마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번역으로라도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라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또 다른) 만족해야만 하겠네요. "전 세계의 속독가들이여, 유념하라! 「롤리타」는 여러분은 위한 책이 아니다"라는 앨프리드 아펠의 말에, '책은 한 번 읽으면 그 구실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재독하고 애독하며, 다시 다시 손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애착을 느끼는 데서 그지없는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라는 러스킨의 말에 "편견 없는 공감"을 백만 개라도 날릴 수 있음을 느껴보았다는 말로 이 야릇.하게 위대한 작품에 대한 그지없이 초라한 감상문을 마칩니다. (영화를 검색해보니 제레미 아이언스가 험버트 역을 맡았던데, 이 캐스팅에도 또한... "편견 없는 공감"을,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물론 편집상의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책 표지의 사진이 저렇게 가로로 놓여져 있다는 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트로베리 나이트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 1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화장실에 들어가 손부터 씻고 변기에 앉아 일 보는 건... 뭔가 제대로 된 순서가 아닌거겠죠. 한 발 들여놓은 김에 「소울케이지」의 전편인 이 책 「스트로베리 나이트」를 읽기로 했습니다. 초반부부터... 역시 시리즈물은 1편부터 읽어야.란 생각을 여지없이 다시금 확인시켜 주더군요. 주인공의 이름인 '히메카와 레이코'를 전... 「소울케이지」에서 처음 읽었을 때 '히메카'란 사람 그리고 '레이코'란 사람 이렇게 두 명을 지칭하는 걸로 알았었었거든요... --;; 

 

………………………  

  

지금 종원군에게 돌아가신 배삼룡, 이기동C의 코메디를 보여준다면, 뭐 좀 시간을 땡겨 심형래C의 '변방의 북소리'나 '영구'의 연기를 보여준다면 과연 그 녀석은, 이 아빠가 그때 그 시절에 그렇게 웃었던 것처럼 똑같이 웃게 될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아마.도. '좀 시시한데요!'라 말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지요. 또 마찬가지로 종원군이 뒤로 자빠지도록 웃어제끼는 런닝맨을 보며 이 아빠는 아무리 몇 수 접어 생각해봐도 '역시 애는 애군...'하는 표정으로밖에는 바라봐줄 수가 없더군요. --- '지식의 습득'이 기본적 목적이 될 수는 없는 독서가 바로 '소설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교훈? 간접경험? 새로운 사고의 습득? 또는 재미! 이 정도가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로부터 예상가능한 개인적 소득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모든 건 '공감'이라는 기본적 바탕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가능한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식의 습득'에는 이러한 공감이 필요없지요. 구구단을 외우면서 '아 공감 쩌네!'하는 사람... 없잖아요.) 아마존 숲 속 어느 곳에 사는 부족의 이야기로부터도 그들의 풍습, 사고방식 등등이 그들의 환경에 적합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라면 제가 그러한 환경에서 그러한 풍습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확률이 확실!하게 0%라 해도 그러한 것들을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게 되는 이유는 다름아닌 바로 이 '공감'이라는 것이 작용하기 때문이겠지요. 

 

. 

. 

. 

 

1편을 건너 뛰고 읽었던 2편때보다는 덜했습니다만, 여전히 혼다 테쓰야의 '레이코 형사 시리즈'는 최소한 번역본을 읽어야하는 외국독자에게는 그리 친절한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일본 작품인 「대망」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 이름 매칭시키느라 아주 죽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하더만, (한 사람이 어릴 때 이름, 커서 이름, 게다가 심지어는 별명으로까지 불리운다 하더군요) 소설의 길이에 비해 엄청난 숫자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기본 구조는 「소울케이지」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책의 첫 장을 읽으면서 '아... 이거 계속 읽어? 걍 관둘까?'하는 고민을 가지게 했던 책이었습니다. 나의 과거, 그리고 예상되는 여러 갈래에서의 나의 미래... 그 어떤 것에도 이 책의 첫 장에서 묘사되는 장면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게다가 이런 묘사로부터의 공감이란 것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이유에서였지요. 

 

의학적 의미에서가 아닌... 그냥 일반적으로 우리끼리 주고받는 의미로서의 '싸이코'들의 이야기입니다. 완전 끝까지 간 싸이코가 있고, 그보다 정도는 덜한 싸이코들도 나오고, 정상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 안에 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내가 있더라'류의 인물도 있고... 한 줄거리입니다. 이제 고작 두 권뿐인 작품을 읽어보았을 뿐입니다만, 그 두 권을 바탕으로 제가 내린 결론은 이 작가는 '별 것 아니게도 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무진장 복잡하게 만들어 마치 꽤나 별 것.인양'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일 뿐, 그 이외의 다른 뭔가를 '특징'이라 잡아낼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네요.  

     

. 

. 

. 

 

제비뽑기가 있습니다. 이때 참가자가 뽑게 되는 건 행운의 제비가 아니라 죽음의 안내장입니다. 또한 이 제비뽑기는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됩니다. 자... 이번 달의 제비뽑기에서 나는 죽음이 아닌 삶의 제비를 뽑았습니다. 우리들 중 딱 한 사람은 죽음의 제비를 뽑게 되는데... 그 제비를 뽑은 사람은 우리들, 한달 더!의 제비를 뽑은 사람들 앞에서 죽어가게 되고,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노라 고백합니다. 

 

"나였을지도 모르는 저 제물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져서 핏덩이가 되어 죽을 때 느끼는 그 한없는 우월감은 말도 못해요. 나는 오늘도 살아남았다. 내일부터 다시 적어도 한 달은 더 산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어요." 

 

물론 이것만이 작가의 메시지는 아닐꺼라고 생각합/아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 사고에 공감을 할 수 없다면 이 작품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간다라는 행위 자체가 시간 낭비로 여겨지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는 몇 번이고 그냥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돈 주고 산건데... 하는 마음에 끝을 보기는 했습니다만, 끝.을 냈다는 그 어떤 성취감도 끝끝.내 느끼지는 못하겠더군요. 

 

읽지 않은, 몇 권 더 있는 혼다 테쓰야의 작품들... 언제쯤 제가 다시 집어들게 될른지는 이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듯. 

 

 

(읽어본) 혼다 테쓰야의 다른 작품 : 소울케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