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꼬무책'으로 최인훈 작가의 「광장/구운몽」을 선택했었습니다...만! 1/3쯤 되는 부분까지 읽어가는 내내 도대체 그 책에 조금도 몰입할 수가 없더군요. 현재와는 약간 다른 단어의 쓰임새에서 오는 그런 단순한 이질감 때문만은 아닌, 그냥 그 작품 자체가 저와는 맞지 않는다라 생각할 수밖엔 없었습니다. 유명한 식당이라 해서 그곳의 음식이 제 입맛에도 반드시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을 수도 있는거잖아~란 핑계를 대어볼 수도, 혹 더 솔직하게는 (어쩌면 제가 그 작품을 너무 일찍 포기해버려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그렇게 뜬구름 잡는 듯한 개인의 감정이나 서술 등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라도 그냥 끝내버리고 싶었었어요. 언제... 다시 그 책을 집어 들게 될지는 이미 시기가 미루어졌음의 문제가 아닌, 가능성의 차원이 되어버린 듯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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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를 다 읽고, 그에 대한 감상문을 다 써내어 내고 난 후, 제 이웃 분들 중 그 책에 대해 포스트를 올려놓은 글들을 읽어보았었습니다. (이건 매 감상문을 쓰고난 후, 항상 제가 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대부분 저와 비슷함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중, 어느 모르는 분께서 덧글로 「롤리타」처럼 인간의 내면을 묘사해 낸 작품들 중 「금각사」라는 작품과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작품을 강추!하신다 써놓으셨더군요. 어차피(?) 소설이라는 것에 기본적으로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롤리타」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역시나 그러한 면에서도 매우 대단한 작품들이었었고, 그러한 '묘사'가 주가 되는 소설로부터도 나름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많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에 (사실 최인훈 작가의 「광장」도 그러한 내용이라 들어 선택했었던겁니다만...--;;) 그 둘 중 일단! 제목이 뭔가 애잔한 이 책 「남아있는 나날」을 펼쳐보기로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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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 주인 가까이있으면서 그 집 일을 맡아보는 사람.

A Butler is the most important male servant in a wealthy house.

​현재의 우리 정서에 딱!하고 와닿지는 않는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 스티븐스가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때는 1956년 7월, 장소는 영국. --- 달링턴 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미국인 패러데이는 전 주인 시절부터 이 집에서 집사로 일해 왔던 (책의 마지막에 이를 두고 그 역시 집과 함께 양수양도된 '일괄거래품목'이라 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스티븐스에게, 자신이 5주간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얼마간의 휴가를 가지라는 제안을 했고, 그렇게 해 떠나게 되었던 6일간의 여행동안 맞닥뜨렸던 일들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보게되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지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일곱 살때 영국으로 이주해 이후 영국에서 쭉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으로부터 지극히 영국적인 면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이상!한 것은 결코 아니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름조차 (여전히!) 일본식인 그의 작품에서 영국의 전통, 관습 등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꽤나 신기하긴 하더군요. (이 책을 다 읽고, 맨 처음에는 일본 작가들의 책이 꽂혀있는 곳에 놓았습니다만... 불꺼진 방안에서 자기네들끼리 살아 움직이던 <토이 스토리>에서처럼, 이 책이 불꺼지고 '살아난' 일본 작가들이 쓴 책들 사이에서 핀잔을 듣는 장면이 문득 떠오르는겁니다. 그래... 오늘 아침, 다시 서양 작가들의 책 쪽으로 옮겨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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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어떻게 정리해 내야 할지 앞이 캄캄하기만 한 작품이었습니다. 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등장하는 몇 가지의 (가볍지 않은) 주제들 중 과연 어떤 것을 이 작품의 메인으로 받아들여야하나에 대해 저 스스로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드디어 떠나게 된 여행의 시작 무렵, 스티븐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었던 어느 노인의 끈질긴 권유에 의해, 뭔가 끌리지는 않으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하는 오기에 이끌려, 약간의 땀을 흘려가며 올랐던 동산의 정상에서 보았던 멋진 풍경이 이 소설의 시작이자 토대가 되고 있다.> 라는 저의 이해로 일단 시작을 해봅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본 것과 같은 풍경에는 다른 나라의 풍경이 결코 갖지 못한 특징이 담겨 있다. 외국 풍경의 겉모습이 제아무리 더 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이 특징을 가장 잘 요약한 말이 있다면 '위대함'이란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 우리가 이 땅을 '그레이트(위대한)' 브리튼'이라 부르는 것을 두고 좀 건방진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데, 우리 나라의 풍경 하나만으로도 그 숭고한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 이 '위대함'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 내게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해 보라고 한다면, 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의 '결핍', 바로 그 점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 마치 땅 자체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비해, 아프리카나 미국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꼴사나운 과시욕으로 인해,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는 저급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처럼 영국의 한 풍경으로부터 스티븐스는 '위대함'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고, 곧이어 이를 자신의 직업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라는 '뚱딴지같은' 스티븐스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 이어지는 작품의 초반부를 읽자라니 '이 책 또 덮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그는 곧이어 '품위'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옮겨가게 되고 그와 연관되어, 역시 저명한 집안의 집사였었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냅니다.  

​"진정한 의미가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으며 그 외의 나라들에는, 실제로 사용되는 칭호가 무엇이든, 오직 하인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이따금 듣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대륙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들이기 때문에 집사가 될 수 없다. 오직 영국 민족만이 할 수 있다. …… 한마디로 말해 '품위'는 그런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결국 (제가 만일 이 작품을 읽는 '독자'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면) 독자는 스티븐스가 내내 고민하였던 '품위'라는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왜 그토록 그가 그것에 집착했었던가, 그리고 자신이 정의해놓았던 그 '품위'라는 것에 스스로 충실했었다.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지난 삶을 살아왔었었던 그에게 그 '품위'라는 것이 현재에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직업적 권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의 도덕적 진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 내 부친 세대의 집사들은 세상을 사다리와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즉 왕실, 공작,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을 제일 꼭대기에 놓고, '신흥 갑부'의 집을 그다음 단에 놓고하는 식으로 계속 내려오다 결국에는 오직 부에 의해 혹은 부의 결핍에 의해 계급을 판단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방식말이다. 야망을 가진 집사라면 누구나 이 사다리를 더 높이 올라가고자 안간힘을 썼으며, 대개는 높이 올라갈수록 직업인으로서 그의 권위도 더 커졌다. 물론 '헤이스 소사이어티'의 '저명한 가문'이란 개념에 담긴 것도 바로 이러한 가치관이다. …… 사실 그들의 사고는 당시 우리의 직업 최전선에 부상하고 있던 고급 인력들의 사고방식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다. …… 우리 세대는 세상을 사다리가 아니라 '바퀴'와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우리 중 직업적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 힘닿는 대로 이 중심축에 다가가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왜나하면 우리는 좀 전에도 말했듯,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잘 발휘하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느냐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주의적 세대였기 대문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 자신이 봉사해 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 나는 그분에 대해,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신사 중의 신사, 그리고 내가 경력의 절정기에 모실 수 있었음을 오늘날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티븐스 스스로 물어보았던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는 결국 자신의 회고를 통해 위와 같은 대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의 한 대목이 떠오르더군요. --- 수술을 위해서는 환자를 마취시켜야 하지요. 즉, 마취라는 행위는 수술이라는 목적을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서만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여기서 마취를 담당한 의사가 자신이 가진 마취기술의 한계에 도전해보겠노라며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게 되는 순간, '수술'이라는 원래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될겁니다. 하지만 스티븐스 집사는 그 책의 저자인 홍기빈의 표현을 빌자면,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었던, 자신 스스로에게 붙여주기를 끝내 쑥쓰러워했던 표현인 '위대한 집사'의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직업인이었었으며, 그러한 자격을 충분히 인정받으며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대우해 주었던 달링턴 경이라는 신사를 경력의 절정기에 모실 수 있었었다.라는 것만으로... (현재의) 우리는 그의 인생이 성공적이었었다라 말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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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었던 주인 달링턴 경의 고귀한 이상이 결국에는 히틀러에 의해 조종당했던 꼭두각시 노릇에 지나지 않았었다라 세상 사람들이 비난했었을 때에도 스티븐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달링턴 경의 참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생각해왔지요. 하지만, 그가 엿새 동안의 여행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지나온 그의 삶은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었음'으로 결말지어집니다. 그 결말은 스티븐스가 집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었다는 이유때문이 아니라 그가 모셨던,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이고 신사 중의 신사'라 굳게 믿었었던 달링턴 경의 인생이 (비록 달링턴 경의 의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국 실패작으로 돌아가는 것에 종속될 수 밖엔 없는 것이 '집사'로서 스티븐스의 정해진 삶이었기 때문인 겁니다. 이것만 해도 미치도록 억울해할 수 있겠건만...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춘 집사라면 완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의 역할 속에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마땅하다. 자신의 역할이 무슨 판토마임 의상이라도 되는 양, 아무 때고 벗어 던졌다가 다시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품위를 중시하는 집사가 역할의 짐을 벗어도 무방하다고 느끼는 상황은 한 가지뿐이며 오직 그 상황에서만 가능한 법인데 그것은 즉, 그가 온전히 홀로 있을 때이다.   

​스티븐스의 지나온 삶에 '성공적'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는 엉뚱하게도(?) 달링턴 홀의 집사였던 그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었던 총무 켄턴 양과의 관계로부터도 생겨나게 됩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스스로 설정해 놓은 위에 언급된 '집사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완벽하게 짜여진 계획은 또한 언제나 완벽하게 그리고 항상 수행할 수는 없듯이, 제가 생각하기에 스티븐스는 자신의 역할에 너무도 완벽하게 충실했었었기에 안타깝게도 (그 자신이 말한) '집사가 역할의 짐을 벗어도 무방하다고 느끼는 상황' 즉, '그가 온전히 홀로 있을 때'를 거의 가져보지 못했었다라는 것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까지도 속이며 살아왔었던 것이죠. 육체적으로는 '온전히 홀로 있었'었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집사로서의 이어질 다음 역할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었기 때문입니다.

 

켄턴 양과의 관계 …… 에 대해 몇몇 '전환점'들이 있었었고 ……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 이 이질적이기도 또한 동질적이기도 한 둘의 관계가 완전히 일방적이기만 한 경우는 현실에서도 거의 없지만, 더군다나 소설 속에서라면 더더욱이 그러하겠지요. 20여 년전 달링턴 홀을 떠나 결혼 생활을 해온 '벤 여사' 또한 자신의 옛 상관인 스티븐스의 앞에서 다시 '캔턴 양'이 되어 다음과 같은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해주는 고백을 합니다.

 

 

그 옛날 (자신이 결혼을 해) 달링턴 홀을 떠나올 때만 해도 제가 정말, 영원히 떠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답니다. 그저, 스티븐스 씨 당신을 놀리기 약 올리기 위한 또 하나의 책략쯤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자신의 결혼 생활이 나름 행복하다는 말에 뒤이어)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화를 내며 집을 나와 버리는 것도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한 번씩 그럴 때마다 곧 깨닫게 되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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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단 하나,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때문에 어떻게 노력하느냐가 중요하다. 오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 좀 힘들다고, 정신적으로 지쳤다고 하루를 그냥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보낸 하루가 나중에 너무나도 큰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다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라.”

​고양 원더스 야구팀 김성근 감독님의 말씀입니다. 똑같은 표현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혹은 그 대상에 따라 그 표현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이 작품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런 의미로 '이 말씀 참 좋네!'하며 메모해 두었었던 말입니다만, 문득 이 작품을 다 읽고 나 다시 생각해본 김 감독님의 말씀은 최소한 스티븐스 집사에게만큼은 너무도 잔인할 수 있겠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 …… 새 주인인 패러데이 어르신께서 도착하신 후로 내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무던히도 애써 왔습니다. 그분께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으로 봉사를 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무슨 일을 하든 지난날 내가 설정했던 기준들에 한참 미달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작업에서 점점 더 많은 실수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죠.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전 같았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들이게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압니다. …… 나는 주어야 했던 것을 줘 버렸습니다. 달링턴 나리께 모두 줘 버렸지요.

아버지의 운명조차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목도할 수 없었었던 스티븐스 집사였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 속 감정까지, 자신도 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속여가며 그렇게 자신의 직분이 충실해왔었던 스티븐스 집사였었었구요, 그러했기에 스스로도 이처럼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라 말하는 스티븐스 집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주인인 패러데이의 미국식 농담에 어떻게하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전문가에게 농담은 결코 터무니없는 의미가 아니라 주인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는 의무라는 생각마저 든다'라 독백하고 있는 ​스티븐스 집사!!! 그는 '(끝이 없이 많이 남아 있을 줄 알았었던 그 시간이) 남아 있는 시간은 많지 않지만 아직 끝은 아닌' 그의 인생의 저녁에 여전히 이렇게 다짐하는 것으로 그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기 인생의 저녁을 준비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때라고 한 내 말동무의 이야기가 정말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고 한 그의 충고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만 하다. ​

과연 그에게도 여전히 <오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라.>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질문을 갖게 되는 것으로, //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는 그 순간.에 뭔가 짠!하다거나 혹은 뭔가 찌릿!하다거나 하는 것들이 떠오르는 책이 있는 반면, 막상 책을 덮는 순간에는 '앗! 대체 뭐지?'하는 느낌이었거늘, 읽는 동안 정리해 놓았던 조각들을 다시 읽어 모아가며 하나의 감상문으로 작성해 나가는 도중에야 비로소 '아! 이 책 정말...'의 꽝!!!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책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 책 「남아있는 나날」은 그 두 번째의 느낌을 주었던, 단지 그것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다시 한 번 더 읽는다면 정말.로! 훨씬 더 깊은 무언가를 느껴보게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경제학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어도 저의 경험칙 안에서만큼은 결코 irrefutable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느껴보게 될 수도 있겠다!!!란 아주 강한 느낌을 받았었다는... // 비록 그의 가치관이 어떤 점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 객관적이(어서 때론 굴욕적이라고도 표현되어 질 수도 있겠으나)고, 또 다른 점에서는 그만큼 객관적이지 못하다.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전... 이 작품의 주인공인 스티븐스 집사에게 건낼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말만을 가질 수 있다면 위로의 말을, 어쩌면 공감.이란 단어가 표현해 낼 수 있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것을 포함한 위로의 말을 전하게 될 것 같네요. 그가 엿새 동안의 여행길에 올랐던 그 첫 날에 목격했었던 동산 위에서의 풍경에서 느꼈었었던 그 '위대함'의 원천, "마치 땅 자체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실은 자신 스스로를 향해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이 사실 또한 예의 참으로 (이 책을 골랐던 이유 중 하나인 제목으로부터의 애잔함과 똑같은 바로 그!) 애잔하게 느껴지는, 뭔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 뒷 표지를 덮고 나서야 울컥!하고 올라오는 그 무엇인가.를, 이 감상문을 쓰기 시작할 때 이후 어느덧 석 잔의 하우스 맥주를 비우고 난 후인 지금... 꼭 표현해야 한다면 말이죠.

- at 'Brew House The Table', 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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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2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살가죽 2014-04-03 14:14   좋아요 0 | URL
오!!! 이렇게!!! ^^

추천해주신 두 권의 책... 꼭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