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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민주주의를
지켜내기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군대라는 곳이지만, 그러한 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곳 또한 대한민국의 군대라는 조직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비록(?) 출퇴근하는 군생활을 했었습니다만, 나름의 고충은 저도 참 많았었습니다. 특히나 4주간의 훈련소 생활은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나!'라는 생각만 하게 만드는 곳으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기도 하지요. --- 민주주의의 가치 중 하나가 '평등'이라면, 그 '평등' 하나만큼은
훈련소 시절 (지금이니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거지만) 참으로 '애잔'하게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었더랬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똑같은 일들을 해야만 했었었던,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던 시간 4주였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곳 또한
나름의 한 '사회'인지라 그 '사회'내의 고유한 판단기준에 의한 개개인에의 평가 역시 바깥의 사회와 다름없이 내려지기도 했었었지요. 헌데 그
'군대 사회'만의 판단기준에 의한 평가라는 것이 말이죠... : 서울대 대학원 출신의 동기가 동작이 빠릿하지 못하다며 연신 구박을 받았던 반면,
지하술집 주방보조로 있다 왔다는 동기는 허접한 과도 하나로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과일접시를 만들어 내 소대장들의 이쁨(?)을
받기도 했었었던, 대한민국에서 한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학벌로부터의 평등(free from)'을 그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었습니다.
허나!!! 과연 그것을 '평등'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제 눈에 보였던 그 '학벌로부터의 불평등'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의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와 해소되고 이루어진 평등이 아닌,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안에서 한 개인의 '쓰임새'의 유용성에 따른 평가, 즉 엄연히 말하자면 그 또한 또
다른 버젼의 '불평등'에 의해 그 효용가치가 사라져버려 지워지게 된 것 뿐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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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롤리타」가 영어로 쓰인 소설이었습니다만,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던 사람입니다. 읽지 않고 잔뜩 쌓여져 있는 책들 중에
러시아 작가의 작품이 뭐가 있나 찾아보니 딱 한 권 있더군요. 바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 책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책이었습니다.
……………………
사회생활이란
걸 정식으로 시작하여 10년쯤 되고나니, 역시 가장 어려운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른 한살까지 학교라는 사회에 속해있었을 때에는
'1+1=2'라는 명제에 대해 그 누구도 부정하는 구성원은 없었습니다. 가끔 왜? '1+1=3'이 아니고 2일까라는 것에 토론하고 고민하고 서로
질문을 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이러이러함으로 진리이다!'라 배우고 난 이후에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는 않았었지요. 헌데
말이죠... 일반 사회생활에서의 셈법은 학교라는 사회에서의 셈법과는 또 많이 다르더군요. 저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1+1=2'가 진리라 믿고
행동했었습니다만, '1+1=3', 심지어 '1+1=365'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상황앞에서는 도대체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대처해야하는지 몰라 많이 당황했었었고, 그러한 순간들이 점점 더 많이 쌓여감에 따라 제가 하고 있는 이 '사회생활'이란 것에 염증을
느끼게도 되었었지요.
물론
여전히 저는 '1+1=2'가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사회생활이 어디 그렇게 교과서에서 배운대로만 되나!'라는 윗 연배분들의 조언을 이제는
대략 80-90%까지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이 사실이 어쩌면 제가 그간의 사회생활에서 배운 유일한 배움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하지만 이걸 두고 '적응의 산물'이라 표현하는 것이 못내 가슴아프기는 합니다. (조심스럽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또한 조심스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고 있었던 '안과의사의 아내'가 끝내는 나도 차라리 눈이 멀어서 이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라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차마 '적응'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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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 자체는 매우 간단하고 단순한 소설입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슈호프라는 한 인물이 보냈던 어느 하루의 일과가
이야기의 전부이니까요.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도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도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 오늘은 명절과 다름없는
날이다.
……………………………
"그렇다. 오늘 하루는 왠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들떠서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 오, 하느님, 오늘도 영창에 가지 않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라면 그런 대로 어떻게 잠들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 다섯 시에 시작되었던 슈호프의 하루는 이렇게 감사의 마음으로 끝맺음이 됩니다. 헌데
말이죠... 과연 위의 문장 속 내용들이 '감사'해야할 일들일까요? --- 제가 '감사의 이유'라는 것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걸 진정으로 깨닫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었고 그 더 좋은 것을 가지게 되면 '감사',
못가지게 되면 '불평과 한탄'이라는 양극단을 왔다갔다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읽었었던...
아픔, 슬픔, 괴로움, 고독이 무엇인지... 웃음, 행복, 즐거움, 사랑이 무엇인지... 위로가
무엇인지, 돌아봄이 무엇인지, 돌봄이 무엇인지 알고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가난해 보아서, 상처받아 보아서, 아파 보아서 알았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속상하고, 괴롭고, 외롭고, 서럽고, 지치고, 두렵고, 피하고 싶고, 원망하고 싶은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보았고, 사랑을 보았습니다. 순간마다 다가오는 따듯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2010년 11월 21일 아내의 일기
중에서
(다시 인용해 보는) 「아빠는 목사! 아들은 동자승?」에 나오는 위의 글은 그야말로 결코
잊혀지지 않을 세기의 강도로 제 마음을 때려주었었지요. 물론 이전에 제가 했었던 방식의 '감사' 또한 positive한 방식으로서는 분명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었습니다만, 더 절실하고 더 우러나오고
더 충족되는 '감사'는 바로 이런 negative한 상황으로부터의 감사라는 것을 비록 뒤늦은 나이였지만 비로소나마
느낄 수 있었었다라는 거. 어쩌면... 그런 경험이 있었었기에 이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으며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에
진정한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고
대학의 대학원 출신보다 지하술집 주방보조 출신이 더 환영을 받았다라는 사실에 생기는 의문은 지극히 일반 사회적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거라 말할
수 있을겁니다. 비록 한 달간의 훈련소 생활 이후의 나머지 군대생활에서는 그의 배경으로 인해 서울대 출신의 그 형이 훨씬 더 편한 군생활을
했었을 수도, 그에 반해 주방보조 출신의 동기는 고생 심하다는 짬돌이가 되어 그 17개월을 뺑이쳤었을지도 모르나 - 실제로 그 형은 모 보안부대의 '자판기병'이라는 보직으로 17개월을 보냈다라고 하더군요. 하루종일 부대 내 자판기에 커피랑 물 등등만 보충해주면
해야할 일 다 끝나는. --;; - 최소한 그런 일반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 눈에 훈련소 내에서의 그러한 '신분의
역전(?)'이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보여졌던 것이 또한 사실이었습니다만, 이 책을 읽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제껏... 그러한 '상황에
따른 신분의 변화'를 여기저기서 많이 목격하기도, 또한 제가 직접 경험하기도 했었었다라는 게 뒤늦게야 떠오르더군요. 한쪽 눈만 볼 수 있는 저는
두 눈을 다 볼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선 열등한 존재가 되었었었고, 두 눈 다 볼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선 또한 유일한 구원자의 신분이 되었었기도
한... 그런 경험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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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같이
추운 날이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앞사람의 등에 바싹 붙어서 바람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고는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나 죄수들은 생각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언제나 제자리에서 뱅뱅 돌게 마련이다. 누군가
매트 속에 감춰둔 빵조각을 뒤지지는 않을까? 저녁에 의무실에 가서 작업 면제를 받을 방법이 없을까?
부이노스스키
중령이 앉아 있다. 자기 죽그릇을 비운 지는 오래 되었지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 그는 이제 몸이 녹아서 나른해진 상태였고, 일어날
힘도 없는 데가 땡땡 얼어붙은 밖으로 나가 싸늘한 난롯가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 그는 수용소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노동을 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지금과 같은 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이 순간,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명령을 내리는 해군 중령에서 굼뜨고 소심한 한 사람의 수용소 죄인으로 변한 것이다.
모두들,
서로 누가 담배를 피지 않나 하고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담배를 꺼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없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그냥 쥐고만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수용소에서
생활한 지 만 팔 년째, 그러니까 벌써 구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동안 슈호프가 먹은 것이 무엇인가. 옛날 같으면 입에 대지도
못할 그런 것들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싫증났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천만에 말씀이다. 이렇게 이백 그램짜리 빵
한 덩어리에 온 정신이 팔려 있는 슈호프 옆에는 제104반 전원이 모두 똑같이 이 빵에 넋을 잃고 보고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맥이 빠지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이 모든 것은 양배춧국 한 대접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한 그릇의 양배춧국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 슈호프는
미리 봐둔, 건더기가 좀더 들어 있는 국 두 그릇이 자기 자리에 올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조정해서 쟁반을
내려놓는다.
한
개인의 신분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화되고, 어떻게 쓰임새가 달라지는 가에 대해 이 작품은 이처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일 개인의 신분변화, 그리고 그것을 통해 결국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평등'해지게 된다라는 사실(혹은 그 '평등함'이 비로소 밝혀진다라는
사실), 즉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그리고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체계/평가기준에 의해 '평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사용되고 있기는 하나, '수용소'라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가치체계와 평가기준이 적용되는 곳에서는 기존의 우열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어쩌면 완전히 정반대의 새로운 우열체계가 성립될 수도 있다라는 거, 즉 '상황'이라는 것이 변함에 따라 (최소한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개인의 운명은 얼마든지 180도 바뀌어질 수 있으며 그 사실은 결코
불합리하다거나 비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이... 제가 받은 느낌하에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 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파치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 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슈호프가 자유를 그리워한 것은 오직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단 한 가지
희망에서였다. 그런데,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상황의 변화가 오직 겉으로 보여지는 개인의 운명만을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기를 무사히 다 마쳐도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주인공 슈호프는 결국... 그 자신의 목적마저도 내려놓게 되지요.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었던 자유라는 것을 이제는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지 아닌지조차 스스로 자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어쩌면... 이것이 당시 러시아의
'강제노동수용소'라는 체제가 원하고자하는 바였었을지도, 결국 그렇게 그 체계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어낸 승리자가 되는 것이며,
(다시한번 더!)
어쩌면... 이것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도, 그리고 지금의 현재에도 또한! 겉으로 보여지는
우리의 운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마저도 알게모르게 이 사회의 체제에 '길들여지고/꺾이고/패배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라는
사실, 어찌보면 뜬금없을 수도 있겠는 이런 (지극히 좌빨!적인 ^^;;) 생각이... 이
책을 덮고 나니 떠오르더군요. (너무 거창해져
버린듯. --;;)
소설은, 멋진 소설은, '위대한' 소설은... 이처럼 다 읽고난 후
이런저런 생각할거리들을 참으로 많이 남겨주는 진정으로 유익.한 정신노동을 하게해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