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가 써놓은 이야기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을 두고 과연 그것을 독자의 '의무'라고 말할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전에 읽었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두 작품은, '뭔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야기의 서술'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그 '별 것 없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건지, 또한 '시간과 정신노동을 투자한' 독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이 작품에서 얻어내야 하는/얻어낼 수 있는 투자의 성과는 무엇인지.에 관한, 그리고 종국에는 '도대체 이 작품이 왜 고전/명작이라 일컬어지는지'라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 - 이 작품들을 진심으로 '고전/명작'이라 스스로 생각하던, 혹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든가 하던간에 - 을 찾아내라 말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제게 주었었고, 그에 더해 심지어는 그 해답을 웬지 반드시 찾아내어야만 할 것 같은 (그야말로) '의무감' (또는 오기)같은 것까지를 느끼게도 해주었더랬습니다. 독자가 찾아내는 그 '무엇'은 그의 개인적 과거, 현재의 상황 등등등 엄청나게 많은 변수들의 조합으로 인해 (비록 일정한 공집합같은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결국엔! 모두 다 다를 밖엔 없을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남아있는 나날」을 통해 제가 얻었던 그 '무엇'을 말한다면 <'인간'은 결코 완전한 독립변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런 '인간'의 삶이란 것이 스스로에게나 제 3자로부터의 평가를 받게 되는 단계에서 그 독립변수일 수 없었음이, 즉 종속변수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의 삶 전체를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평가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라는 사뭇 비극적인/자포자기스러운 것이었었습니다...만, 제가 이런 '무엇'을 얻게 되는 과정 자체는 비록 애잔하고 슬프기는 했었으나, 그 과정 속에서 단 한번도 '비극적'이라든가 '자포자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흐름'만큼은 제가 처음으로 만나본 작가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 제 취향에 잘 맞더군요. 그런 이유로 그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진다는 이 책 「나를 보내지마」를 (여전히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나날」의 꼬무책으로 급하게 구입해 읽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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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성장 소설로 읽히는 캐시의 이야기 속에 독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몇 개의 단어들이 등장해, 혹시 몇 줄을 빠뜨리고 읽은 게 아닐까 하고 행간을 뒤져 보게 만든다.'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또한 바로 이전에 읽었었던 그의 작품 「남아있는 나날」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어느덧 초반부가 넘어가고 있었던 부분에 다가갈 때까지도 그 내용에 몰입하게 되지는 못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비록 책의 뒷표지에 쓰여져 있는 간단한 힌트를 머릿속에서 내내 떠올려보며 그것을 힌트삼아 퍼즐을 맞춰보려했었어도, 이 책은 거의 종반부가 될 때까지조차 그 퍼즐에 대한 해결의 기미를 전혀 보여주지를 않았었지요. 최인훈의 「광장」은 그러했기에 중간에 읽기를 포기했었으면서 왜 이 책은 계속 읽어낼 수 있었느냐.는 오로지 「남아있는 나날」을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러다가 분명!!! 나에게 뭔가 굉장한 것을 느끼게 해줄꺼야!라는 (근거가 그리 충분하지는 않은) 믿음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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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변신」은 그를 그저 글솜씨 좋은 대중작가로 평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품에서 작가는 "과연 '나'란 존재는 어디서부터 '나'가 되는가"란 질문을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지요. 나의 다른 신체기관은 모두 원래의 내 것인데, 나의 뇌 그것도 일부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대체된다면?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여전히 '과거의 나'와 똑같은 '나'인가하는 이 질문, 비록 히가시노 게이고가 새로이 만들어낸 의문은 아닙니다만 그 어떤 어려운 설명없이도 이러한 의문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그를 단순히 추리소설 작가로 머물게 하기에만은 많이 미안해하여야하는 일일겁니다.

그 「변신」에 대해 쓴 감상문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다음의 설명은 이러한 의문을 좀 더 확장시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지요.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 ……  최근 돼지 등 동물의 장기를 인간 장기의 대체용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 신체의 특정 장기의 이상 때문에 생명이 끊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과, 생명 연장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머지않아 "마치 구형 가정제품을 신형으로 교체하듯 신체 장기를 기능이 좋은 새것으로 바꿀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 아직 보편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이러한 새로운 유전자 공학과 생명 공학의 발달은 이제 '인간다움'을 설명해 왔던 기존의 틀에 의문을 제기한다. …… (한 발 더 나아가) 사이보그는 한편으로 의학 기술의 발달로 유기적 몸과 인공적 기계장치 사이의 경계가 인간의 몸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제 인공 심장, 인공 관절, 인공 신경, 인공 안구 따위가 수술을 통해 손쉽게 인간의 몸속에 삽입될 수 있게 되었다. …… (이처럼) 인공적 대체물의 발달은 인간의 몸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조되어도 괜찮다는 신념을 배양하고 있다. …… 정작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발전의 과정이 기존의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며, …… 이러한 과정이 '진화'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란 여성과 남성 같은 범주처럼 '경계'개념이다. 생물학적 조건들과 문화적 맥락의 결합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규정해 왔던 '인간'이라는 범주는 지금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다양한 치료의 혜택과 욕망의 영역 확장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해 왔던 개념들이 급격하게 해체되는데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한국문화인류학회 著,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pp 67-73

 

삐삐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내 곧 핸드폰이라는, 당시에는 그저 머릿속에만 있었었던, 그 상상 속 바램을 실제로 만들어 냈습니다.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핸드폰에 어느새 카메라의 기능을, 그리고 이제는 내 일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그 핸드폰의 도움이 없이는 많이 불편해지는 세상을 만들어냈지요. 핸드폰의 진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중 정말 똑똑한 몇몇들)는 실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들을 그렇게 불편함으로 남아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생명의 유한함'이라는 것에는 과연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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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 작품 「나를 보내지마」는 인간의 생명 연장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복제품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에 관한'이 아닌, '-들의' 이야기라 써야할 듯.) 이처럼... 참신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닌, 게다가 매우매우 불친절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심지어 얇지조차도 않은 작품입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한 개인의 회고담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예의 A라는 것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도중, 그와 관련된 B와 C, 심지어는 가끔 D의 이야기까지도 한참을 말하다가 갑자기 다시 A로 돌아가는 형식의 서술을 매우 자주 사용하고 있지요. (이게 이 분의 특징인지까지는 이제 겨우 두 작품을 읽었을 뿐인지라 아직은 확신할 수 없...) 이런 결코 편치않은 조건들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끝까지 읽어낸 독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그 댓가로 주고 있을까요?

자세한 내용까지를 알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한 때 그리고 한동안 황우석 박사로 인해 자동차 부품을 바꾸듯 인간의 장기를 신품으로 교체할 수 있는 세상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는 상상을 했었던 적이 (그러니 마음놓고 술 더 마시자 했던 개인적 부작용도 있었었던 적이) 있었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기는 올 것 같지만, 어쨌든 그 때의 상상속에서도 내가 새로이 이식받게 될 간은 매우 통제된 환경의 공장같은 곳에서 '만들어진' 것일꺼라고만 생각했었었지요. 하지만 이 작품 「나를 보내지 마」에 담겨 있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상상은 아예 <완전한 한 인간, 하지만 복제된 것인> 존재를 만들어 내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초에 접어들자 과학의 약진이 얼마나 빠르게 이루어졌던지, …… 그러다 갑자기 온갖 새로운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졌지. 전에는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많은 병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 말이다. ……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이식용 장기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생기는 거라고, 진공실 같은 곳에서 배양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 했단다. 그래, 그걸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 '학생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그 때 이르러서야. 그 무렵이 되자 그들은 너희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너희 같은 존재가 꼭 있었어야 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그 과정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 사태가 그런 만큼 너희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려는 장벽이 늘 있어 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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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항상 노트북이 켜져 있습니다. 뭔가 작은 부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읽으면서 밑줄 치게 되는 모든 부분을 적어놓기 위해서이지요. 워낙 처음부터 아리송한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작품이었기에, 그 중 어떤 것이 나중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지 몰라 참.으로 많은 부분들을 적어놓게 만들어주었던 작품이었습니다만!!! 다 읽고 나서야 그 거의 모든 것들이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더군요.

 

인간 복제의 문제... 도 물론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생각해볼 꺼리일 수 있겠습니다만, 저에게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바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라는 문장이었습니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표현은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만, (저도 포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나 돼지'를 가리켜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적 거리낌을 그다기 크게 느끼지는 않을겁니다. 동물성과 인간성을 가르는 경계,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만, 그게 무엇/어디가 되었든 분명한건 그것은 지극히 '객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는 그 객관적인 경계에 '이상/이하'라는 상대적인, 그것도 모자라 주관적이기까지 한 개념을 굳이 붙여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나 돼지에게 그들을 오로지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육'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명체에 대한 뭔가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미안한 감정때문에 우리의 식탁을 채소로만 채우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로, 또한 그 (미안한 감정이 어려 있는) 이유를 극복해내기 위해 어쩌면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을 동원해 소나 돼지들은 마치 그렇게 '사용'되기 위해 '사육'되어도 괜찮은/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단지 식탁의 풍요로움과 그로부터의 얻게되는 미각의 즐거움조차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이 '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 연장을 위해 사용되어 질 수 있는 복제된 인간에 대해서도 그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즉 그들을 다시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 억지로/스스로 생각하게 될꺼란 상상이 그리 일어날 확률이 낮은 것이 아님을... 가즈오 이시구로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매우 자신없는) 결론을 내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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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영화 <아일랜드>가 떠올랐더랬습니다. <아일랜드>와 이 작품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존재, 복제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마지막에 복제된 인간들이 떼거지로 수용소(?)를 탈출하는 장면을 보며 '쟤네들 저렇게 나가면 어쩔!'이라는 걱정(?)으로만 남아있는 영화 <아일랜드>에 비해, 이 작품 「나를 보내지마」는 훨씬 더 진지한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다만... "혹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과 흥미진진한 속도감을 기대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이 작품은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라 적고 있는 <옮긴이의 말>처럼, "이 작품 「나를 보내지마」가 모든 이들의 구미에 맞는 작품은 아니다"라고 했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나름의 결론/생각할 꺼리를 찾아내는 과정이 너무도 힘들었기에, 제가 얻은 그 '나름의 결론/생각할 꺼리'가 지니고 있는 진지함(이 있다해)도 실제만큼의 빛을 발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는 생각은 아쉽지만 끝내 버릴 수 없네요.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가즈오 이시구로가, 확실히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을 꼭 읽어보고싶게 만드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굉장한 매력이 있는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건 분명.해진 독서였었습니다.

 

- (맛있는 맥주를 마시며 포스트를 작성하는 주말을 소원했던 저에게 그 소원을 드디어 이루게 해준, 지난 주에 이어 또 다시)

at 'Brew House The Table', 일산. 

 (읽어본)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작품 : 남아있는 나날

 

★ More "Food for Thought"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변신 :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어디서부터 혹은 어디까지가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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