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끈적한 무언가가 내 손에 잔뜩 묻었는데, 손을 씻을 수 있는 상황은 도저히 아니고, 그런데 나는 지금 당장 반드시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 여덟 살 적에 썼었던 내 인생 최초의 일기장을 한장씩 넘겨가며 읽어야만 할 때... 와 같은 그런 찝찝 가득한 느낌만을 받았던 「스트로베리 나이트」를 잇는 책으로, 그냥 아무! 다른 이유 없이 그저 표지의 느낌이 뭔가 비슷하지 않나?하는 이유만으로 집어들었던 책이 바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였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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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에든 '전문가'라 불리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이 '전문가'가 불리우는 이유는 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기 때문이겠지요. 거기에 더해 '전문가'라 불리우기를 뛰어넘어 '대가'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또한 그들을 또한 그렇게 불리우게 만드는 명백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겁니다. 에로 영화만을 찍는 감독들에게도 분명 그들만이 만들어/자아낼 수 있는 에로틱한 장면 연출의 노하우가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만약 현존 국내 최고의 영화감독,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 혹은 원신연 감독 등과 현존 최고의 에로 영화 감독에게 똑같이 대강의 줄거리만을 알려주고 거기에 각자의 살을 붙여 한 편의 인생작품을 만들어 봐달라.라한다면 과연... 관객들은 감독의 이름이 지워져 있는 채로의 완성작을 보며 어떤 점에서 명백히 구분되어지는 차이를 알아채게/느끼게 될까요? 

 

어쩌면 이런 의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 「롤리타」일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해요. 마흔즈음의 이혼남인 영국인 험버트 험버트가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원래 계획되었던 곳이 아닌 곳에 하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맘에 들지않아 내일 당장 여기를 떠나겠어!라 결심했었었건만, 그 하숙집 딸을 본 순간 '오 마이 갓! 나 그냥 여기 계속 머물래!!!'하게 되었고, 결국엔 그 하숙집 딸과, 게다가! 하숙집 주인이었던 그 딸의 엄마와도 육체적으로 맺어지게 되고... 네!!! 지극히 전형적인, B급이라조차 불리우지 못할만한, 내용의 에로 영화 스토리로는 전혀 손색이 없을 소설입니다만 근데 도대체 왜!!! 이 소설에 사뭇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으며,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까지 올라가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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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현재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분명 정신병자입니다. 게다가 이 인물의 성적 취향은 소아 이성애, 즉 어린 여자애들에게서 참지 못할 성욕을 느끼는 사람이지요.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들 중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 또는 몇 배쯤 많은 나그네 앞에서 자신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자기에게 매료된 나그네에게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라 님프의 모습(즉 마성)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 선택받은 소녀들을 '님펫'이라 부르고 싶다. …… 미모가 기준이 되지도 않는다. …… 야릇한 기품,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영혼을 파괴할 만큼 사악한 매력이야말로 또래 가운데 님펫과 어중이떠중이를 가르는 기준이다. …… 정상적인 남성에게 여학생이나 걸스카우트 단원들의 단체사진을 보여주고 제일 예쁜 아이를 찾아보라고 하면 당연히 님펫을 선택할 듯싶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 결국 다른 사람들은 님펫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 스스로도 자기가 가진 불가사의한 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어떤 남자가 님펫의 마력에 사로잡히게 되는 데에는 두 남녀 사이에 일정한 나이 차이가 필수적이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10년, 일반적으로는 30년이나 40년, 몇몇 알려진 사례를 보면 많게는 90년까지 나이 차가 나기도 한다. 이는 초점을 맞추는 데 필요한 거리인데, 그렇게 둘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 비로소 마음의 눈이 전율하며 그것을 극복하려 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뚜렷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남자의 정신이 여자를 인식하고 놀라움과 더불어 도착적인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뭐... 이런 말 지껄이는 소설을 읽었다고??? --- 일단 자세한 진도 좀 더 나가볼께요. 험버트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사춘기 소녀'의 의미를 갖는 님펫인 롤리타를 하숙집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매력적 외모의 이 영국인 남자에게 하숙집 주인, 즉 롤리타의 엄마인 샬럿 또한 연정을 가지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롤리타와 직접적으로는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험버트는 오로지 그녀, 롤리타를 자신의 feasible set안에 집어넣게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샬럿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롤리타는 험버트의 의붓딸이 된거죠. 그러고는 자신의 딸인 롤리타와의 합법적(!) 애무를 상상합니다. 헌데 이 에로 영화의 스토리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녀가 롤리타의 언니라고 상상했다. …… 샬럿과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이볼을 마셨다. 그 술기운 덕분에 엄마를 애무하면서 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새로 얻은 아내의 완숙한 몸에 올라타면서 이것이야말로 생물학적으로 롤리타와 가장 가까운 육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 우리가 함께 지낸 50일 사이에 …… 마치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엄마와 결혼했기 때문에 아내가 딸을 대신하려고 상당량의 청춘을 되찾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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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험버트란 인물이 써놓은 고백록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95쪽에서부터 102쪽까지 이어지는 부분, 하숙집 주인 샬럿이 교회에 가느라 집을 비운 사이, 그러니까 처음으로 롤리타와 단 둘이 집에 남게 되었을 때의 회상부분은 이런 말을 써도 될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따라 읽어 내려가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숨이 한두 번은 멈칫.도 하게되는 서술이더군요. 어쨌든 그 서술의 끝에서 험버트는 "나는 애처롭다고 표현하겠다. 어째서 애처로우냐 - 지칠 줄 모르는 불길처럼 성욕이 활활 타오르는 상황에서도 성심성의껏 열두 살 먹은 아이의 순결을 지켜줄 작정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변호/변명합니다. 헌데!!! 여기서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이 하나 있더군요. 롤리타와 단 둘이 집에 남게된 험버트가 롤리타와의 첫 스킨쉽을 가지게 되었던 그 장면을 서술하기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제부터 재현하려는 장면에는 독자 제현도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 '편견 없는 공감'의 마음가짐으로 바라보면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이 장면 전체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순수한지를, 독자 여러분도 몸소 확인해주시기 바란다. 자 이제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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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로 나누어져 있는 소설에서 1부는 주인공 험버트의 성장사, 그리고 그 후 롤리타의 첫 만남에서부터 재혼한 아내 샬럿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2부는 다소 지루했는데, 그 후 험버트와 롤리타의 기나긴 여행과 그 과정에서 둘 간의 간극이 벌어지게 되는 심적 변화,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결말에 이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주인공 험버트는 굳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적 제약을 붙이지 않더라도 분명 정신병자적 성향이 다분한 사람입니다. 그는 실제로 롤리타와의 결혼을 상상하기도 했으며, 롤리타 3세라는 자신의 손녀딸에게 할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함에 있어 '침을 질질 흘리면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지요. 또한 제 판단에 험버트의 롤리타에 대한 사랑은 분명 육체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불쾌하다'라는 말은 '독특하다'라는 말의 동의어인 경우가 종종 있으며, 위대한 예술작품은 모두 독창적이고, 바로 그러한 본질 때문에 크든 작든 충격적인 놀라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라는 표현을 작품의 초반부에 미리 위치해 놓음으로서 독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 암시해주고 있기도 하지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주인공 험버트는 자신의 회고 내내 변명하고 있지요. 첫사랑이었던 애너벨 리와 이루지 못했던 사랑때문에 생긴 '잠재의식'속의 강박관념 - 사실 이것도 오로지 육체적인 것에만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 에서 깨끗이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롤리타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라 말하고 있기도 하며, 법적으로 자신이 롤리타의 아버지가 되었음에도 친권에 대한 아무런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섣불리 운명의 흐름을 건드리다가, 즉 운명이 내 손에 쥐어진 환상적인 선무을 정당화하려다가 오히려 선물을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문가'를 뛰어넘는 '대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한 무언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에, 어찌보면 똑같이 극단적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 「스트로베리 나이트」와는 달리 그 어떠한 찝찝함도 남겨주질 않습니다. 책의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 중, 어떤 비평가가 이 소설을 두고 썼다는 (poet과 erotic을 합성한)"poerotic 소설" 즉, 시적 에로티시즘의 소설이다라는 표현이 그야말로 더 이상 적절한 것을 찾을 수 없는 표현임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 누구도 빠짐없이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조차 허투루게 만들어진/씌여진 것이 단 하나도 없으며, '나는 강간범the rapist가 아니라 치료사therapist란다'라는 표현은 띄어쓰기 하나로도 얼마나 강력한 언어의 유희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스 신화를 포함한 서양 문학, 언어, 그리고 심지어는 정신분석학에까지도 뻗어있는 작가의 지식이 이처럼 찬란한 언어의 유희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꺼라 생각하며, 이러한 작품을 그야말로 '거의 완벽하게' 우리말로 옮겨놓은 옮긴이의 역량에도 또한 부러움 가득한 찬탄을 금치 못하게도 됩니다. --- '열두 살 이하 어린이는 무료, 그러나 로는 포로 신세' : 이 자체로만은 아무런 느낌이 없을 수 있는 문장이지만 그 원문 (제 추측으로는 아마도 --;;) 'free for under 12, but Lo's not free'를 읽게 된다면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문장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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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스키가 작품의 주인공 험버트의 정신 세계를 옹호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현란한 언어구사와 곳곳에 의미있는 복선들을 감추어 놓고 있는 작가가 "편견 없는 공감"이라는 표현을 아무런 의미없이 사용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지요. '공감'이라는 단어는 '편견'이라는 감정이 필연적으로 작용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일진데, 작가는 의도적으로 이 "편견 없는 공감"이라는 표현을 험버트로 하여금 사용하게 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험버트의 주장은 그 처음부터가 말이 안되는 변명에 불과한 것'이란 메세지를 독자에게 건네어주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말이죠... 과연 소아성애가 왜 죄가 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상대가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라는 틀에 박힌 대답밖에는 저 또한 생각나는 게 없기 하더군요. 그러했기에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롤리타처럼 자신의 의사를 명백히 밝힌 것이라면, 그렇다라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곧이어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열일곱 스물넷>이라는 노래가 듣기엔 참 좋은 곡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동청소년 보호법'에 저촉되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국경도 없다는 사랑에 과연... 나이가 합법,불법을 결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잣대가 될 수 있겠느냐... 물론 작가가 이러한 의문까지를 작품에 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 작품에 대한 토론이 열린다면 매우 흥미롭게 다루어지지 않을까도 싶네요. 

 

 

 

 

 

이야기 자체는 이처럼 말도 안되고, 혹자에게는 역겹다라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만, 감독의 포커스가 에로틱함에만 맞추어져 있느냐, 아니면 '이러면 안되지'류의 교훈적 메세지에 담겨져 있느냐, 그도 아니면... 그것이 남녀간의 정사장면일지라도 그것을 화면에 표현해내는 '아름다움'에 있느냐로 B급도 안되는 줄거리로 이루어진 영화 작품을 평해본다면, 이 작품 「롤리타」는 분명!!!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한 줄 한 줄의 표현'에 어느새 빠져들어있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네요. 그러하기에... 이 작품을 두고 소재로 인한 논란을 말한다라는 건 그 사람이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간만에... '읽.는.다.'라는 노동으로부터 더할나위 없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었던 소설이었네요. 정말이지... 지금이라도 이 작품을 원문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적 소양을 키우고 싶습니다만, 그것이... 언어의 습득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또한 알기에 그나마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번역으로라도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라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또 다른) 만족해야만 하겠네요. "전 세계의 속독가들이여, 유념하라! 「롤리타」는 여러분은 위한 책이 아니다"라는 앨프리드 아펠의 말에, '책은 한 번 읽으면 그 구실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재독하고 애독하며, 다시 다시 손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애착을 느끼는 데서 그지없는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라는 러스킨의 말에 "편견 없는 공감"을 백만 개라도 날릴 수 있음을 느껴보았다는 말로 이 야릇.하게 위대한 작품에 대한 그지없이 초라한 감상문을 마칩니다. (영화를 검색해보니 제레미 아이언스가 험버트 역을 맡았던데, 이 캐스팅에도 또한... "편견 없는 공감"을,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물론 편집상의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책 표지의 사진이 저렇게 가로로 놓여져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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