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교양 - 3천년 인문학의 보고, 성서를 읽는다
크리스틴 스웬슨 지음, 김동혁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자신의 종교가 개신교라 말하는 일본 사람을 만났을 때, 순간 적잖게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미국인이 자신의 종교가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가 아니다!라  말하는 것 또한 아마 듣는 이로 하여금 최소한 그에 뒤지지는 않는 수준의 당황​스러움을 자아내게 해줄겁니다. (어쩌면 저만의 선입견일 수도 있을지 모를) 이러한 인식에 대해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마 북유럽 계통의 미국인인 듯 한데, 정.말로!!! 똑똑.하게 생겼더군요. - '성서는 우리(미국) 문화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개인적인 신념뿐 아니라 공공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준다'라고까지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chapter and verse'라는 표현이나 'icon'과 같은 영어단어, 가수 조영남C가 번안하여 불렀던 탐 존스의 'Delilah'가 삼손을 꼬셨던 '데릴라'라는 사실, 그리고 성서에는 비교적 짧게 기술되어 있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존 스타인벡이 「에덴의 동쪽」을 탄생시켰다는 것 등이 책의 곳곳에 소개되고 있는 실례들이지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근본이 담겨져 있는 성서가 무엇이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으며, '성서가 말한다'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선 과연 성서란 어떤 책인가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해주고 있지요.  

성서는 정말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만 먼저 말한다면, 성서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영어 단어 Bible의 본뜻은 '작은 도서관'이다. 즉 작은 책들이 여럿 모여 전체 성서를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 비유하자면, 성서 전체와 그 속의 개별 책들은 헤밍웨이가 어느 저녁 모히토를 마시고 단숨에 써버린 단편 소설이라기보다는 신앙을 가진 이들 여럿이 함께 작업한 위키피디아인 셈이다. …… 기독교인들에게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는 문서(즉 신약)에 복음서가 네 권이 있다는 사실은 네 권 중 어느 하나도 궁극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를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여 네 권이 함께 읽힐 때에 서로 경쟁하는 주장들, 또 어떤 때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주장들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가깝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성서를 '이해'한다라는 표현은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된다는 게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입니다. 그 해석의 차이는 단적으로 신약을 '성서'에 포함시키느냐 배제시키느냐로, 또한 종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라는 것1이지요. 「유쾌한 성경책」이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서 성경을 이야기해주었었다면, 또한 성경을 역사서의 관점에서 주로 바라보았었다2라면, 이 책 「가장 오래된 교양」은 이처럼 좀 더 진지(?)한 접근방식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책의 도입부에서는 먼저 세 가지의 관점에서 '성서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본 후, 책의 2/3정도를 '성서의 해석'에 할애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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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성서 속의 역사(성서가 이야기하는 사건들), 성서 이면의 역사(성서 본문들을 형성한 상황들, 즉 그 본문들이 반영하는 상황들), 성서 역사(성서가 오늘날과 같이 거룩한 경전이 된 과정)가 그것들이다. 이 세 역사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서 한 장에서 소개된 내용이 다른 장의 내용과 관련될 수도 있다), 똑같지는 않다. 성서의 역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기자들이나 역사가들의 기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성서는 신앙의 책으로서, 삶의 모든 경험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신앙인들이 쓰고, 베끼고, 편집한 것이다. 성서가 말한 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실에 가깝든 가깝지 않든, 성서의 이야기들은 에외 없이 신앙의 전승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성서 이야기는 성스러운 역사이다. 이 역사는 ……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일반 역사와는 다른3이다. 후자가 정확이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가르치려는 것인 데 반해,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 역사의 속에, 아래에, 위에, 뒤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야기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순간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어떤 냉정한 보고가 아닌 그 사건들에 대한 신앙적인 해석이 되는 것이다.

제가 아는 바...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대체적으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릴적부터 제가 다니고 있는 장로교가 그 중 가장 보수적이라고도 들었구요.)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질 않아요. (저자는 이 책에서 특정 종교나 특정 종파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모든 주장들을 소개하고만 있을 뿐이지요.) 예를 들어...

성서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고하려 하지 않는다. 특정한 전승과 신앙의 입장에서 사건들을 해석한다. 성서 이야기는 곧 신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이 강조되고, 하나님과 사람이 맺는 관계의 의미가 부각된다. 다시 말해 성서는 일어난 사건을 관찰한 그대로 옮겨 적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 안타깝게도, 성서가 말해 주는 역사에 의문을 품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의문을 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많다. 그리하여 그들은 (때로 물리 법칙을 왜곡하거나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추어) 성서를 오늘날의 역사책처럼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우리가 성서를 제대로 읽는 순간 바로 무너져 내린다. ……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서의 이야기는 이질적인 자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한데 묶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학적인 목적을 위해 전해진 것이지 역사 기록으로 보존된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저자의 주장에 (그렇지않아도 '정치적'으로조차 보수적이라 불리우는) 한국이 개신교 목사님들이​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가 문득 매우매우 궁금해지더군요. 어쨌!!!든 이처럼 성서에 대한 '해석'이라는 개인/집단의 능동적 행위가 (어쩌면!)성서 자체의 권위에조차 영향을 미칠 수 있게도 되는데, 저자는 ' 성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4, 즉 (해석이 아닌)'번역'으로부터도 상당히 심각한 해석상의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선 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을 채 몇 장 넘기지도 않아, 이 책을 제대로 즐기려면, 그러니까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안겨주려고 작정하고 있는 충격을 100% 다 받으려면 우선 성경 속 사건들에 관한 성경적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하겠어!란 생각을 제게 갖게 해주었던 첫 번째의 문제적 부분이었던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기 이전에 이미 서로 성관계를 한다라는 장면 --- 제가 받은 충격은 분.명.히. '처녀가 잉태하여'라는 성경구절로부터 인한 것인데, 여기서 '처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그냥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음에도,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수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비추어 성서를 해석하여 버리는 바람에, 구약성서의 예언(이사야 7:14)의 그리스어 번역을 완전히 자신의 주관을 통해서만 적용시켰다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 '번역의 오류(혹은 주관적 번역)'를 저자의 주장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그러니까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를 낳았다는 기독교(특히 카톨릭)의 핵심 신앙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며, 그에 반해 주제 사라마구가 기독교 신자들, 특히 자신의 모국인 포르투칼의 국교나 다름없는 카톨릭을 겨냥했었던(것으로 추정되는) 충격은 사실 그 의미가 많이 반감될 수 밖엔 없겠다 봐야겠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더 심각하게는 --- "두 사람이 밤낮으로 성서를 읽는다. 너는 검은 부분을, 나는 흰 부분을 읽는다"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재치넘치는 말이나, "성서가 그것을 말하는 그대로는 뜻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성서가 말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란 조지 버나드 쇼 특유의 씨니컬한 표현이 말해주듯,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듣고 싶은 것, 그리고 파악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성서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으로부터 성서를 둘러싼 여러가지 (때로는 전쟁까지를 유발시켰던) 논쟁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원제 「Bible Bable」은 '바벨탑'의 이야기로부터 '바벨'이란 단어가 서로간 소통이 불가능해졌음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고, 저자는 그러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이 책의 제목을 「Bible Babel」이라 정했던게 아닐까도 싶은데5... 문구의 해석으로부터 기인된 오해, 그리고 그 오해가 낳은  소통가능성의 단절 중 가장 유명한 건 아마도 '스콥스 재판'으로 대변될 수도 있겠는 창조론과 진화론간의 대립이겠지요.

'성서를 읽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발생된 이 논쟁은 비단 '기독교 VS 과학'의 구도뿐 아니라, 심지어는 같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각자가 취하고 있는 입장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들 (특히 문자주의자들)에게 있어 성서를 글자 그대로 읽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되지만, 좀 더 유연한(?) 기독교 신자들은 <창세기 1-3>장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책임과 우리가 이루어야 할 관계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저자도 이에 대해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하나님이 변화의 주체이시고,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인간이 특별한 책임이 부여된 존재임과 동시에 지금도 진화하는 세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궁극적으로 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저 개인적으로 진화론의 주된 영역은 ('그들'의 주장대로 단백질 스프로부터던 뭐로부터던 일단 창조된) 생명/생명체가 어떻게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왔느냐를 말하는 학문이지, 창조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겠다는 학문은 결코 아니기에, 기독교 신자라해서 진화론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라든다 기독교 신자이기에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신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해석'의 상이함에서 기인된 꽤나 심각한 이 논쟁으로부터 우리는... 결국 '우리 인간은 남녀 모두 존엄한 목적을 갖고 태어났으며, 세상은 참 좋으며, 살 만하며, 거룩한 것이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책임과 명령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절실한 존재가 되었다!' 뭐 이 문장, 딱 이 문장정도로 창세기를 이해한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합의(?)를 아직까지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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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해석은 좁게 보아선 이처럼 개인의 신념, 극단적으로 넓게 보아선 인간 존재의 의의같은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만, 그 중간 수준에서도 또한 현실적이고 나름 '흥미롭다'라는 표현을 하게만 되는 몇몇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 유다는 성경이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한,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조차도 '나쁜 사람'의 상징처럼 여겨지게될 인물입니다만, 정경 (현재의 공식적인 성경)에 실리지 못한 <유다복음서>라는 기록을 보면 --- "유다는 예수의 제자들 중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로 행동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을 유다에게 명령했고 유다는 그에 순종했다. 즉, 유다는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고 예수는 자신을 당국에 넘겨주는 혐오스러운 일을 유다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이 일 때문에 자신이 영원토록 비난받고 저주받을 것이라는 것도 또한 알고있었다." --- 라는 겁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위와같은 해석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시간을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해주었던 이유였었었지요. 이것 말고도 이 책은 꽤나 많은 문제들에 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그 중... 제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① 환경문제 : 저자는  '성서에서 운전 중 핸드폰 사용에 관한 법규를 찾을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성서에서 21세기적 환경 윤리 강령을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8)라는 구절은 '인간은 자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제한 없는 생산은 하나님의 명령이다'라는 주장을 낳았기도, 또한 그 반대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를 관리자로서의 인간은 잘 돌보아야한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고 합니다.

해방신학 / 노예제 폐지운동 : 출애굽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의 애굽 탈출과정에서 '압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미국 남부의 노예들에게는 마치 자신들을 향한 이야기로 들렸었었고, 해리엇 터브먼이라는 여성 운동가를 '모세'라 지칭하게도 만들어주었으며, 1970년대를 기점을 남미를 휩쓸었던 '해방신학6'의 종교적 기반이 되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위의 두 해석(①,②)은 '그럴 수도 있겠'는 논리의 전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성서는 그렇게 옳바른/상식이 통하는 곳에만 인용되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③​ 노예제 옹호 :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노아가 어는 날 포도주를 마시고 잔뜩 취해 - 노아는 인류 최초로 포도주는 만든 사람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인사불성이 된 채 벌거벗고 누워있었었는데, 그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 정작 노아는 그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았던 반면, (저자는 아마도 성서에 적혀 있지 않은 무언가 큰 죄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쩌면 단순히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은 것이 죄가 되었었지도 모르는) 막내 아들 함이 아버지인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다는 이유로,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그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이후 함의 후손들은 역사적으로 이집트와, 또 아프리카와 연결되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아프리카인들이 노예가 될 것은 성서에서 이미 정해졌던 정당한 것'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발현하게 되었지요. 또한 저자는 노아가 아들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한 것에 대해서도 성서에 적혀 있는 상황만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며, 훗날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복에의 근거일 수도 있다는, 더 넓게는 '비이스라엘인들이 왜 이스라엘인들과 똑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는가'에 대해 성서적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의견을 조심스레 나타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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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으로... 밤늦은 시각이 되면 사람은 졸음에 못이겨 잠을 자게된다라는 신체적 제약에 찌~인한 아쉬움을 느껴보게 해주었던 책이었습니다7. 그만큼 재미있었으며, 그러한 재미와 더불어 읽어나가며 뭔가가 내 머릿속에 쌓여간다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던 책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저만의 착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꼭 제가 개신교 신자이기때문에 받았던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쨌.든 수입종교인) 기독교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교양'이라는 이름으로까지 자리매김 해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신학자 김용규 교수가 쓴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성서에 대해 최소한 이 책이 말하고 있는 정도의 내용은 알고 있어야한다라는 주장은 아마도...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져야하지 않을까 싶기때문입니다.

책의 뒷편에 나와있는 미주들은 주로 해당 설명의 성경구절을 명시해주고 있는데8, 이 책을 읽으실꺼라면 반드시!!! 그 미주의 성경구절들을 찾아서 읽어보셔야한다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덧 곁들여지는 자신만의 해석을 즐겨보게 될 수 있는, 밋밋하나마 "가장 오래된 교양"이라는 제목 또한 그런 의미로라면 충분히 나쁘지않다라 받아들여지게되는 그런 책이니까요.

 

 


 

  1. 십자가에 예수의 몸이 있는 것을 십자고상cyufix이라고 부른다. 십자고상은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교도들이 선호한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희생을 강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개신교인들은 부활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빈 십자가를 선호한다. - 본문 중
  2. 그러하기에 그 책은 성경 속 사건들을 마치 옛날 이야기하듯 풀어놓고 있지요.
  3. 그 단적인 예로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삼손, 솔로몬 과 같은 인물이나 홍수, 출애굽'등과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 자료는 지금까지는 오직 성서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4. 성서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온 다양한 관점을 보여 준다. 성서는 매우 많은 것을 말하며, 이것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더욱이 성서 본문들은 먼 옛날에 쓰였고, 우리에게는 '원'성서가 없다. 오늘의 성서를 만든 것은 사본의 사본의 사본이며, 그 안의 내용, 표현, 어휘는 훌륭하게 훈련된 성서학자들조차 당황하게 만든다. 성서에 대해 더 싶이 배울수록 "그 문제에 대해 성서가 말하는 바는"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본문 중
  5.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을 이처럼 밋밋하게 <가장 오래된 교양>이라고 지었다라는 것이 이 책에 대해 가지는 유일.한 아쉬움이었지요.
  6.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의롭지 못한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실천을 강조했던 기독교 신학 운동이다.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도하고 진보적 개신교 신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초교파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한 사람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빈곤을 신의 뜻에 어긋나는 사회적 죄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인용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7. 이 감상문도 어제 새벽까지 썼었었었었. ^^;;
  8. 두세 개 정도의 매칭오류가 있기는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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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성경책 - 역사 문화 인문지식이 업그레이드되는
나가오 다케시 지음, 전경아 옮김 / 카시오페아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이라는 소설을 읽으려고 펼쳤습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충격적인 내용들이 담겨져 있을거라는 예상을 하긴했었습니다만, 예수님이 잉태되기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섹스를 나눈다는 부분을 읽고나니, 뭔가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면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충격'을 완전히 받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명색이 모태신앙인인 제가 이제껏 성경을 한번도 완독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이, 성경책은 이제 주일날에조차도 내 손에 들리지 않는다라는 것(요즘엔 대형스크린에 성경말씀과 찬송가 가사가 다 뜨기도 하거니와, 무거운 성경·찬송 합본의 책은 이미 오래전에 아이패드로 대체되었. --;; )이 새삼 '창피하다'란 표현으로 제 머리에 떠오르는겁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카인」이라는 작품의 출간 기념식에서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성경을 가리켜 "사악한 도덕의 핸드북"이라 비난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반면에, 성경이 기독교 신자에게 주는 의미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인생에 필요한 모든 해답은 성경 속에 있다!"라는 표현 또한 볼 수 있는, 이 상반된 평가에 대해 자신만의 판단을 가지려면 물론 성경을 직접 읽어보아야겠습니다만... 아담 스미스의 경제관을 공부하고 싶다고 2014년 지금 반드시 그가 쓴 「국부론」이나 「도덕 감정론」을 읽어야하는 건 아니.다... 라 생각할 수도 있기에, 우선 '성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들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네! "ring book"의 첫 번째 주제는 바로 '성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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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필요한 모든 해답은 성경 속에 있다!"는 표현을 접한건 다름아닌 바로 이 책 「유쾌한 성경책」에서였습니다. '딱딱한 성경이 말랑말랑해지는 내 생에 첫 번째 성경 읽기'라는 문구도 붙어있는 이 책은 특이하게도 (기독교 신자가 거의 없는 나라인) 일본사람이 쓴 책입니다. 저자는 '성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해주고 있네요.

 

성경에는 3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성전으로서의 면. 두 번째는 역사서로서의 면. 인류의 시작부터 종말(앞으로 닥칠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엮은 책이다. 세 번째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면.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감동적인 드라마를 연출한다. …… 성경을 어떤 측면으로 접하든 그 밑바닥에 흐르는 '단 하나의 본질'은 ……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서'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르고 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관리와 지배를 인간에게 맡겼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 세상의 관리를 맡은 인간의 사명과 그 사명을 다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은총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사명을 잊고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을 때 받을 죄에 관해서도 소상히 적혀 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장대한 '계약서'인 셈이다. ……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사 '약約'이란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서'를 의미한다.

​이 책 「유쾌한 성경책」은 성경의 이러한 세 가지 측면 중, '역사서'로서의 성경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쓰여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느껴질만한 표현들도 종종 등장합니다. '전지전능'으로 묘사되는 하나님에 대해 '악마의 등장은 하나님의 계산착오였다'고 이해해야 옳다라든가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 그러니 먹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속인 것이다. 반면, 뱀은 유혹은 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라는,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들이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신앙이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 바탕이 되는 것라고는 하지만, 믿음 또한 기본적 상식의 바탕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하기에 지리산 도령의 말에 나는 믿음을 줄 수 없는 것이다라 말할 수 있다라면,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성경에 관한 궁금증은 일단 다 펼쳐놓아보는 것이 옳겠지요.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바로 '구약'입니다. 제목처럼 매우 쉽게 설명되어 있는 구약의 이야기는 어쩌면 예수님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해보게되더군요.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아담과 이브 …… 얼마 후 두 사람은 아들 형제를 낳았다. 첫째 카인은 농부가 되었고 둘째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다. …… 인간의 조상을 보면 1대(아담)가 일찍이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사기꾼'이었고, 2대가 형제를 죽인 '살인자'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태초부터 '어둠을 간직한 존재'였다. 그리고 금단의 나무 열매에서 '지혜'를 얻은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한편 그 '지혜' 덕분에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키고 번영을 누렸다. 이 번영의 규모와 속도는 본래 하나님이 주려고 하지 않았던 지혜에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상을 뛰어넘은 일이었다. 아담이 죽고 10대찌에 이르러 인간은 문명과 부를 구가하고 향락에 취했다. 오만해진 안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한 마음을 잊고 타락에 빠졌다. 하나님은 고민했다. 인간을 이대로 두어도 되는가,하고.

리처드 도킨스 교수가 「만들어진 신」에서 "모든 아이들, 심지어 태어니기 전의 아이들까지 까마득히 먼 조상의 죄를 물려받는다고 주장하는 윤리철학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인간의 '원죄'라는 것이 결국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시기마다 선택한 남자를 등장시켜 세상을 옳바른 방향으로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아담이고 두 번째가 노아였으며, 세 번째 지도자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인간일지라도 어차피 '원죄'를 짊어진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인간을 지도자로 선택해봤자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을 뛰어넘는 지도자'를 인간들에게 보내자!라고 결심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예수님을 인간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마지막 카드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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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을 바른길로 인도한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손에 창조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닌 남자. 인간의 손에 키워지고 인간에게 사랑을 받고 인간을 사랑한 남자. 인간의 마음과 몸을 가졌기에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투구보다 잘 알았고 끝내 그것을 이겨낸 남자. '인간의 아들'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진 남자"라 저자가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독교 신자로서 바라본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주말 오후 한나절이면 다 읽어낼 수 있겠을 분량, 게다가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쉽게 쓰여있으며, 주제의 설정 또한 '내 생애 첫 번째 성경 읽기'라는 한계에 걸맞게 되어 있는... 그러하기에!!! 성경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모태 신앙인인 저에게 아주 적절한 책이었습니다...만 또한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적지않은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했던 책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 한 권, 그리고 기독교 신자가 보는 성경은 어떠한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또 한 권의 책을 읽고나면... '성경'이라는 주제로 묶여질 첫 번째의 열쇠고리도 나름 구색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다보면... 제 독서의 가장 힘든(?) 목표인 '성경 완독하기'도 머지않아 가능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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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무진기행 외 하서명작선 5
김승옥 지음, 이어령.이태동 해설 / (주)하서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무진기행>으로 대표되는 김승옥 작가의 소설집은 출판사에 따라 수록하고 있는 단편들의 구성이 조금씩 다르더군요. 제가 가지고 있는 '하서'라는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에는 <서울, 1964년 겨울>,<무진기행>,<역사力士>,<환상수첩>,<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서울의 달빛 0章>, 이렇게 여섯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장편소설은 독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 많기에, 이야기의 전개나 주인공의 심리묘사 등, 암튼 그 무엇이라도 생략되거나 감추어지는 것이 많지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단편소설은 그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상상/해석'하게 만드는 여지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남겨주게 되지요. 근데 그 '상상/해석'이라는게... 아무리 노력해봐도 제게 그 어떤 결실도 못주는 투자였던 경우가 많았었었고, 그런 연유로 전... 독서의 호흡도 길지 못한 주제에 단편소설 읽기를 피해왔었었거늘, 어느 날 읽었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은 그간 제가 가지고 있던 단편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그야말로 단!번에 박살내 주더군요. 그 선입견을 다시 한 번 더 박살내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사놓고만 있었던 김승옥 작가의 이 소설집... 이 마침 (눈팅만 하고 있는) "고블린"이라는 온라인 독서모임에서 4월의 미션도서(?)으로 선정되었기에, 잠시 '꼬무독'의 이음매에서 벗어나 몇 번에 나누어 읽고 감상문을 올려보겠습니다. (한번에 올리면 글이 너무 길어질꺼라는 염려도 조금 깃들어있긴 합니다만, 무엇보다... 비록 짧은 작품들이었지만 두 편의 소설을 읽고 나서도 엄청!나게 피로해져서입니다. 역시... 훌륭한 단편소설은 한두 번 읽어서는 참 맛/뜻을 알지 못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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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

충분히, 그리고 분.명.히. 저의 개인적인 착각.일 지도 모른다라는 방패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혹은... '인간의 기억이란 원래 이기적일 수 밖엔 없기 때문에!'라는 좀 더 대범한 이유를 만들어보게도 됩니다만 :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저의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은 분명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 종원군보다는 훨씬 더 어른스러웠었던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저의 고딩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도 또한, 지금의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들보다는 훨씬 더 성숙했고, 책임감 있었다!란 각색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만, 이 상대적 성숙은 또한 당시에도 여전히 지극히 대칭적인 것이기도 하였기에, 저보다 (한두 살이라도) 나이 많은 선배들을 바라볼 때면 나도 대학3·4학년이 되면 과연 저들처럼 우리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게/하게 될까?라는 부러움 섞인 의문을 가졌었던 기억 또한 선명하게 남아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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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동갑의, 이전까지는 서로에게 일면식도 없었던 두 사내, 김金과 안安은 - 새로 출범한 야당의 두 분 대표는 아닙니다. ^^ - 같은 선술집에서 각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말을 나누게 된 둘은 이내 나름 형이상학적(?)인 대화를 나누었었고, 그렇게 나가서 2차 한잔 더 합시다.라며 자리를 일어서는 순간... 그들보다 열살 정도 더 많아보이는, 옹색한 차림을 한, 힘없는 말투의 한 남자가 그 둘에게 합석을 청해옵니다. 그리곤... 그 남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요.

 "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 난 처갓집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었어요. ……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째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 버리고 싶은데요. ……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시겠어요? …… 멋있게 한번 써 봅시다."

​결국 서적 외판원인 남자는 중국집에서 거나한 술과 안주를 사는 것로, 김과 안에게 넥타이를 하나씩 사주는 것으로, 지나가던 소방차를 무작정 따라가달라 탄 택시값으로, 그리고 남은 돈 또한 매우 허망한 방식으로 결국 아내의 시체를 팔아받은 돈 4,000원을 다 써버립니다. 분명 그 남자는 김과 안에게 그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만 함께 있어달라 부탁했었었건만, 그렇게 그 돈을 모두 다 써버리고나자 그 늦은 밤, 받아야할 돈이 있다며 어느 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리지요. ---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 사내는 문 기둥에 두 손을 짚고 앞으로 뻗은 자기 팔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세 남자는 여관으로 들어가 각자의 방을 잡고 밤을 보냈습니다만, 서적 외판원인 남자만은 다음날 아침 그 여관을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시겠어요?"라는 그의 청은 분명 그 스스로가 '셋이 함께 하는 시간'의 끝을 정한 것이었습니다만... 세상의 모든 아쉬움이란 건 즐거움이 끝날 때 즈음이면 여지없이, 심지어는 고통스러웠던 시간의 마지막에조차도 뻔뻔스럽게 찾아오는 것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그 돈을 다 써버리고 나면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약을 먹고 자신도 아내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나리라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조차도... 그 늦은 밤에 '받아야 할 돈'을 떠올리며 누군가의 집을 찾아가, 행여라도 그 돈을 받게 된다면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에, 아니 더 적나라하게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채 남아있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여보고 싶어했던,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그 무엇이 그렇게 그를 누군가의 집으로 찾아가 월부 책값을 받아내려 만들었던 것일지도, 만약 이러한 가정이 맞다면, 그가 '문 기둥에 두 손을 짚고 앞으로 뻗은 자기 팔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던 건 다름아닌 자신의 삶을 연장시켜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수단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게되는 바로 그 순간이, 바로 그 다음 순간에 건네어 줄 Yes/No 의 답이 정녕 무엇일지에 대한 두려움/허탈...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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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외판원이 자살해 있는 것을 알게 된 김과 안은 서둘러 여관을 떠납니다. 그저 뭔가 일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자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였습니다만, 안은 이내 이런 독백을 김에게 건네지요.

 "김 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 두려워집니다. …… 그 뭔가가, 그러니까 ……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대학 1·2학년 시절의 제가 바라보았었던 3·4학년 선배들의 그 나이가 되어보니, 뭔가 지식의 끝!을 배울 수 있을것이라 상상했었던 대학원 시절도 막상 그 자리에 앉고보니, '기억'에뿐만 아니라 '기대'에도 작용한 대칭은 그 기대했던 것의 양만큼의 '막상 와보니 별 거 아니네'하는 생각을 또한 하게해 주기도하더군요. --- 결혼을 했고, 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고, 그렇게... 마흔.이라는, 아주 커다란 의미를 두었던 나이도 이젠 벌써 6년전의 일로만 기억하고 있는 지금이 되어서도 여전히 전... (다시 한번 더) 여전히 전, 제가 배워야 할 인생의 무언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며, 그 남아있는 무언가의 양에 비례하여 제가 살아가게 될 시간 또한 많이 남아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만, 이건 아마도... 지금 바라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르신'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되는 환갑의 어르신들을 향해 제가 가지고 있는, 뭔가 그 분들은 인생의 참 의미를 거의 다 깨닫고 계실꺼야!라는 믿음도 또한 어쩌면 제가 환갑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지금처럼 또 다시 '환갑 되봐도 별 거 없네'라는 똑같은 말을 하게해줄지도 모르겠다는, 다시말해 '아직은 늦지 않았고, 남아있는 시간은 참 많아'라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오기어린 제 믿음에 대해  작가 김승옥은 이렇게... 스물다섯 살짜리! 두 남자의 길지도 않은/길 수도 없는 하룻밤의 이야기를 통해 저에게 '우리 솔직해지자. 어쩌면 말이다... 넌 이미 충분히/너무 늙어 버린 것일지도 몰라'라고 말해주고 있는 거 같았습니다.

그나마!!! 서적 외판원은, 아내의 시체마저도 '할 수 없었어요'라는 이유과 함께 병원에 해부실습용으로 팔았던 서적 외판원은, 아내의 육신이 누워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라 말하던 서적 외판원은...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이었을지도 모를, 돈 4,000원을 '멋있게' 써보고 싶다는 마지막 바램을, 이런 상황에도 '성취'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성취해내긴 했지요. 문득... 작품 속에서 불행한 모습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그에게도,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부러워할 점이 있다는, 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 짧고, 별 특별한 사건이 있지도 않은... 하지만 씹을수록 - 세 번을 계속해 다시 읽어봤어요 - 뭔가 새로운 맛이 느껴졌던, 하지만 남는 건 저 자신을 향한 씁쓸함만 남는 독서였었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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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霧津紀行>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은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진'은 실제 존재하는 곳이 아니더군요. 위키백과에 쓰여 있길, 작가의 고향인 순천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하나의 가상 공간이랍니다. --- '빽좋고 돈많은 과부'의 결혼한 주인공은 안색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이 곳 무진에서의 휴식을, 그 '빽좋고 돈많은' 아내로부터 권유받아 내려왔습니다. 4년 만에 찾아온 무진에 대해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지요.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 했었다.

​예의 주인공은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던 그곳 무진에서 그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하게 됩니다... 만 "27일 회의 참석 필요, 급상경 바람. 영"이라는, 아내로부터의 전보 한 통은 그 짧은 시간동안 그가 빠져 있었던 '현실 아닌 현실의 세계'로부터 다시 그를 '현실인 현실의 세계'로 끄집어 내줍니다. ---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현실 아닌 현실의 세계'로부터 '현실인 현실의 세계'로 다시금 돌아가야함을 알게 된 주인공은 그러나... 그곳 무진이라는 곳이 과거에,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합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바로 그러하지요. 그는 무진에서의 만 이틀 동안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현실 아닌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고, 그것들 또한 '현실인 현실의 세계'라고, 마지막으로 꼭 한 번만 믿기로 했습니다...만, 결국 '현실 아닌 현실의 세계'로부터 '현실인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려 했던 여인을 향해 썼던 편지를 찢어버림으로써, 그리고 무진을 떠나는 길위에서 보았던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팻말의 글씨로부터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 고백함으로써, 여전히 무진은 그에게 '현실 아닌 현실의 세계'로만 남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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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가 좀 든 뒤로 무진에 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차례 되지 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 문득 한적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 떠올렸었던, 스스로도 '아늑한 장소'라 표현하는 무진이라는 곳이 결국 주인공에게 가져다주는 건 '어둡던 그의 청년시절'이었다는 이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표현이 어쩌면 역설적으로...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묘사되었었듯, '미래의 나는 뭔가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더 나아져 있을 것'이라는 '과거'에 가졌었던 기대/희망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지금'... (어떤 뚜렷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어쩌면 도피라 표현되어질 수도 있겠지만) 다시 그 때 그 '과거'를 그리워하는, 그나마 그때엔 기대/희망이라도 있었었음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전보를 기다리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는, 그런 저를 말해주고 있는듯도 했습니다.

뭔가 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었.는데.... 그 생각을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해내야하는지 몰라 점차 그 생각마저 잊어가고 있던 저에게, 작가 김승옥이 이 두 편의 길지않은 소설을 통해 마치 '혹시 이런 거 아니었니?'라 콕! 찝어주는 듯 했던, 표현법을 모르던 이가 그 표현법을 알게 되면 기뻐해야할 것 같았는데... 알게되니 더 씁쓸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드는 독서였네요. 남아있는 네 편의 작품들은 또... 저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해줄까요.

※ 어쩔 수 없이, 이 두 작품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이해일 수 밖엔 없습니다. 어쩌면... 요즘의 제 기분이 과하게 개입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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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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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는 「나를 보내지 마」에서 복제인간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 채, 철저하게 그들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 복제인간들을 교육시켰던 이들의 입을 통해, 복제된 인간이 아닌 진짜 인간인 그들 또한 복제인간들을 제자로 가르치며 적지않은 마음속 혼란을 겪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복제인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그 복제인간들의 '근원자'에 관한 이야기는 끝까지 함구하고 있지요. 반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레몬」을 통해 복제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 복제인간을 '바탕이 된 사람'과 기어이 마주치게하여 '내'가 '나'를 만들어낸다라는 윤리적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읽어보았던 「눈먼 자들의 도시」와 「죽음의 중지」를 통해 그야말로 인간의 심리를 머리카락 하나도 놓치지 않게 파헤치는 글을 써주었던 주제 사라마구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내셨을까요? 

…………………………

​단지 두 편뿐만 읽어본 작가 주제 사라마구이지만, 저 개인적으론 그의 작품에서 '이야기의 줄거리'는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라 생각합니다. 이 작품 「도플갱어」 또한 그 줄거리만을 적어내자면, 유치원생용 버전의 <왕자와 거지>보다 훨씬 더 짧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그나마 「눈먼 자들의 도시」는  나름의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만, 두번 째로 만나보았던 「죽음의 중지」는 (특히 2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작가가 써놓은 한줄 한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정신 차리고 해석해야만 했었었던, 사실 제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유형의 작품이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제 사라마구에 의해 씌여진 것이었기에 끝내 끝까지 집중해 읽어낼 수 있었더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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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현실이라고 부르는 게 어제는 상상에 불과했다는 걸 잊지 마.

- 주인공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의 동료교사인 수학 선생님 말.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둘이나 존재해서는 안 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 --- 이 작품은 주인공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이하 막시모 아폰소)가 했던 이 말...에 대한 서술적 증명과정이라 불리워도 될 듯 합니다. 역사교사인 막시모 아폰소는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 스스로에 대해 '제가 누군지는 알겠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어요'라는 고백을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교사인 수학선생의 권유로 빌려본 한 편의 영화에서 자신과 너무도 똑같이 생긴 단역배우1를 발견하고는 결국 그 단역배우, 안토니오 클라로와 만나게 되지요.

두 사람의 손은 어느 모로 보나 똑같았다. 혈관, 주름살, 털, 각각의 손가락이, 심지어 지문까지도 모두. 마치 같은 틀로 찍어낸 것 같았다.

 

​막시모 아폰소와 안토니오 클라로는 이처럼 육체의 모든 생김새가 똑같았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사마귀의 위치과 갯수, 그리고 흉터까지도, 심지어는 생년월일 모두가 똑같다는 걸 서로 알게 됩니다. 딱 한 가지, 서로에게 차이점이 있었었다면 안토니오 클라로가 막시모 아폰소보다 삼십일 분 먼저 태어났었다는 것 뿐. 이 유일한 차이점을 알게 된 안토니오 클라로는, 자신이 삼십일 분 먼저 태어났으므로, 어쩌면 자신이 삼십일 분 먼저 죽을 수도 있다며 막시모 아폰소에게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앙금을 남기게 될 말을 해주지요. --- "그 삼십일 분 동안 복사본이 원본의 자리를 차지해서 원본이 되는거예요. 당신이 그 삼십일분 동안 개인적이고 절대적이며 배타적인 정체감을 즐기길 빌어드리죠. 앞으로 당신이 즐길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을테니까." 

 

소설은 안토니오 클라로의 이 조롱섞였던 말이 그 끝에 가서 기어이 현실이 되는,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저열한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는 마음이 최선의 이유와 최악의 행동을 결합시켜 그 둘이 서로를 정당화하도록 교활하게 양심을 압박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양식과는 반대로 양심을 어디까지 끌고 들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을'에 딱 어울리는 결말이 초래되는 과정을 그야말로 이 잡을듯한 기세로, 똑같은 외모의 두 남자의 심리를 묘사해가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찬찬히 다 따라가고 나면, 윤리적이지도 신학적이지도, 또한 양심에 기대지 않고도, 그러니까 「나를 보내지 마」나 「레몬」에서와는 또 다른 이유로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둘이나 존재해서는 안 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라는 막시모 아폰소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게 됩니다. 과정을 밟아가던 와중에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게 될지, 어쩌면 하나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게 될 것이라는 예상조차 차지 못했었던 하나하나의 문장들이 결국에 가서는 '격렬한 공감'이라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 주제 사라마구만의 놀라운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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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 스스로 전지전능한 화자의 입장이 되어 등장하고 있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단순한 이벤트/행위와 이벤트/행위의 사이에 생기는 빈 시간조차도 그저 '시간이 흘러서'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2. 「죽음의 중지」에서 '죽음'이라는 존재에 인격을 더해 하나의 새로운 '존재물'로 만들어내었듯이, 이 작품 속에서도 '상식'이라는 것에도 인격을 부여하여 그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메꾸고 있지요.

 

막시모 아폰소가 신호를 기다리며 가사도 없이 노랫가락에 맞춰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리고 있을 때 상식이 차에 올라탔다. 안녕, 상식이 말했다. 누가 너더러 여기 타라고 했어, 운전자가 보인 반응은 이랬다. 

 

​이러한 주제 사라마구의 특징에 익숙지 못한, 익숙해지지 못한 독자에게는 아마도 그의 작품들이 그저 말장난의 연속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고,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일단 그의 이러한 특징에 익숙해지고나면, 익숙해질 수 있었다면!!!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을 통해 독서라는 것이 오로지 '정신노동'으로만 표현되는 건 결코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런 작품을 읽어간다는 건 다른 어디에서도 즐길 수 없을 매우 훌륭한 '지적 유희'라는 걸, '세상에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어'라는 작품 속의 문장에 기대어서라도 충분하진 않지만 그렇.다라는 걸 꼭 말하고 싶어하는 제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와는 또 다른 형식의 언어의 유희는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에 대한 감상문을 작성하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꺼에요. 운명을 거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의 막시모 아폰소는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봅시다'류의 노래로 그 날의 저녁 메뉴를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과 똑같은 단역배우가 등장한 한 편의 영화를 보고는 그 영화사에서 나온 수많음 영화 비디오를 잔뜩 빌려와 시간순으로 늘어놓고는 오래된 것부터 보느냐, 아니면 신작부터 확인해 볼 것이냐를 결정했던 과정에 일어났었던 막시모 아폰소의 심리를 주제 사라마구는 다음과 같은 예의 간단치 않은, 철학적 ​문장으로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뇌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통, 습관, 관습의 엄청난 무게가 뇌의 나머지 부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더 훌륭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을 무자비하게 찍어 누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제멋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모르는 상상력의 무절제와 방종에 맞서 이 무게가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믿고 있는 것을 무의식적인 굴성에 미묘하게 굴복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자신의 왜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항상 몸을 굽혀야 하는지 모르는 식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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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와라 히로시의 「타임슬립」에도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똑같은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작품에서는 다행히도(?) 그 둘에게 압도적인 시간적 차이가 주어졌지요. 그 압도적인 시간적 차이로 인해 「타임슬립」은 비극적인 결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만, 주제 사라마구의 이 작품 「도플갱어」는 동시대에, 그것도 동일한 도시내라는 조건으로 말미암아 매우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비극적3 결말이 초래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불행히도 상식이 필요할 때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상식이 잠깐씩 자리를 비운 순간이 중요한 드라마와 가장 끔찍한 재앙을 낳는 경우가 많다." 라는 단지 두 문장만으로 독자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만, (주제 사라마구의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만이 누릴 수 있을) '읽는 것으로부터의 즐거움'을 만끽해가며 이 작품을 다 읽고나면, (제가 그러했었듯) 이 작품의 결말이 그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리고는 "우리는 이차 세계대전 때의 폭탄이 너무 낡아서 폭발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땅 속에 그냥 방치하면 어떤 비극적인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카산드라가 옳았다. 그리스인들은 트로이를 불태울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로 표현된 결말이 너무도 안타깝다라는 것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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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써놓고 다시 읽어봐도 너무도 추상적으로 쓰여진 독서감상문이라 아니말할 없습.니다만, 이렇게 멋진 작품을 왜 겨우 요따구로밖엔 정리해내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이 창피해.라는 수준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이 (저의 능력으로는) 어쩌면 원래부터 이렇게 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거라서요!라는 핑계를 조심스레 방패 삼아보며 이 추상적임에... 딱! 두 가지만 더 보태어보겠습니다.

"그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위에 가운을 입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마리아 다 파즈는 당신이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목이 말라서 물을 한 잔 청하려고 왔다고." - 이 책을 읽어보시면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이 얼마나 로맨틱한 것인지를 알게 될꺼라고, 거기에 더해...  

 

"당신을 여전히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라고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 ……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있어요. …… 그녀는 그의 왼손을 잡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때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 ……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거의 포옹하는 것처럼, 거의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 그리고 이 문장들이 왜/얼마나 충격적인 결말인가...가 조금이라도 궁금하시다면, 그렇.다라면 꼬옥! 이 작품을 읽어보시라고...

 

 

 

 (읽어본) 주제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 :  눈먼 자들의 도시」 · 「죽음의 중지

★ More "Food for Thought"  

작게 보아 '인간복제'의 문제, 넓게 보아선 (이 작품의 '옮긴이의 말'에 나와 있는 표현을 빌어) '과연 나를 나로 인정받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관한 책들.

- 마크 트웨인 作,왕자와 거지: 같은 공간내에서 발생한 똑같이 생긴 두 인물의 자리바꿈, 그러나 해피엔딩. 

- 오기와라 히로시 作,타임슬립: 넓은 의미에서 같은 공간에서 발생한, 하지만 압도적인 시간차이를 두고 발생한 똑같이 생긴 두 인물의 자리바꿈, 여전히 해피엔딩.

- 히가시노 게이고 作,변신: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어디서부터 혹은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주제로 지어질 수 있는 거의 완벽하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

- 가즈오 이시구로 作,나를 보내지 마: 복제인간으로서 살아온 삶, 그리고 그들의 삶을 바라보아 온 복제인간이 아닌 진짜 인간들이 느끼는 죄책감. 

- 히가시노 게이고 作,레몬: 인간복제를 통해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들이 겪게될 지도 모를 끔찍한 상황, 더할 수 없는 새드엔딩.

 

 


 

  1. 주제 사라마구는 이들 단역배우를 '작품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스타들의 접점이자 교차 궤도로서 작으나마 위성 역할을 하며 몇 마디 대사를 하는데도, 픽션의 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이름을 얻을 권리조차 없는 사람들'이라고 기가 막히도록 멋지게 묘사하고 있지요.
  2. 주제 사라마구는 "직업적인 양심 때문에 플롯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대로변의 소란이나 교통사고를 만들어 낼 수 없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 사용된다. 다음 사건으로 급히 넘어가야 할 때나, 아니면 예를 들어 등장인물의 생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을 때. 특히 등장인물의 생각이 그가 살고 있는 실존적인 공간과 아무 상관이 없을 때 그렇다.'라는 문장을 통해 자신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은 최소한 그러한 작가들보다는 '우월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3.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 '충격적, 비극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게 된 건, 어쩌면 서양과 동양간 정서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혹은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갈 때까지 가보는'류의 결말이기 때문일지도, 그도저도 아니면 그냥 저의 감성이 그러하다!라 말해야, 어쨌.든... 저에겐 굉장히 충격적/비극적으로 느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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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단 한 순간도 정확히 한 개의 숫자로 표현되어질 수 없는, 그러하기에 그저 '수많은'이라고 밖에는 표현되어질 수 없는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 중에 나와 똑같이(라 말해도 무방할만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그리 허황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라는 주장에 동의를 할 수 있다면, '머리카락 · 눈 · 코 · 입, 그리고 귀'... 이 다섯 가지만의 조합이 낳게되는 결과물인 얼굴이 (똑같다!라는 표현과 거의 다름없는 수준으로) 매우매우 비슷한 사람을 어디에선가 (직접이건 화면이나 인쇄물에서건) 마주치게되는 일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행운보다 나에게 더 먼저 찾아올 지도 모른다라 생각하는게 결코 이상한 게 아닐겁니다. 이런 상상은 이미 1881년  마크 트웨인에 의해 「왕자와 거지」라는 작품 속에서도 등장했던, 지극히 평범한, '독창성 下'의 평점을 받게 될 상상입니다...만!

신앙심이 바다보다도 더 깊은 장로/권사님에게, '자! 때가 왔습니다. 오늘 밤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계신 하늘나라로 가실 겁니다'라는 말을 전했을 때 과연 그 장로/권사님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까요? --- 물론 매우 조악한 예입니다만, 그런 분을 찾는 것 또한 로또 1등 당첨과 비슷한 행운이 따라주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오래 살 수 있기를 원하고,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여전히 죽음의 순간과는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를 원하는 게, 태어날 때 인간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본성일겁니다. 비록 현실의 삶을 살다보면 그 본성조차 이겨낼 수 없을만큼의 고통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은 오래 살기를 원한다'라는 명제는 유효하다 말할 수 있겠지요. 그 명제에 충실한 상상은 결국 거의 죽음의 단계에 다가섰었던 사람을 기계의 힘을 빌어서라도 다시 살려놓고야 만다는 <로보캅>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 내었고, 그러한 상상에 대해서 주어지는 '독창성 中'의 평가가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 그리 야박한 건 아닐겁니다...만!!

이제 인간은 '오래 살기를 원한다'라는 명제에 '건강한 육신과 맑은 정신상태로!'라는 추가조건까지를 원하게 되었고, 그 추가조건까지를 고려한 인간의 상상력은 드디어 영화 <아일랜드> 그리고 「나를 보내지 마」와 같은 '복제인간'이 존재하는 작품들이 그려내는 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근원자 - 그 원문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가즈오 이시구로는 「나를 보내지 마」에서 복제된 인간을 낳게 한 원래의 진짜 인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 는 자신의 육체에 이상이 생기는 그 순간, 자신의 생명연장을 위해 복제인간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복제인간들의 심리묘사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작품 「나를 보내지 마」는 <아일랜드>에서와 같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인간들이 복제인간들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장기를 적출해낸다는 설정까지를 상상해내고 있습니다. 윤리적 논란들에 눈감고 귀막아 버린다라면 이 두 작품에게는 '독창성 上'의 표창장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야말로 획기적인 상상이라 도저히 말을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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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는 유전적으로도 완벽하게 똑같은 근원자와 복제품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작품은 복제품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근원자로부터 만들어졌는지 등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지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 작품에서 그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복제품들의 내면 그리고 그들을 교육/사육하는 진짜 인간들의 고뇌등을 이야기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자... 이와 동일한 주제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와는 장르가 다른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떠한 메세지를 준비하고 있을까요? --- 이 작품 「레몬」 또한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인간이 아니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내용 자체만으로는 '독창성 特上'의 표창장을 주저함 없이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만. --;; 

​추리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답게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복제라는 주제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모르는 출생의 비밀을 찾아낸다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작가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습니다... 만, 제 생각에 소설의 줄거리는 이 작품을 이해해냄에 있어 일단/최소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1992년 9월에 연재되기 시작했고, 1993년 9월에 단행본으로 일본에서 발행되었다는 이 소설 (원작의 제목은 분신分身」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레몬」으로 바꾼 이유도, 근거도 사실 선뜻 마음에 와닿지는 않더군요.) 에 등장하는 의학적 내용들이 과연 의학적으로 성립가능한 상상인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설혹 실현가능한 현실이 되어있다하더라도, 사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철학적·윤리적 질문의 무게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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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정상적'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방법으로 여성의 자궁에 태아가 들어서게 되는 것의 여집합, 즉 '정상적이지 않은' 과정을 통해 한 생명이 만들어지는 방법은 한두 개가 아닌가봅니다. 예를 들어, 남자의 정자에 유전적 문제가 있다거나 아예 아이를 낳은 수 없는 상황에는 '인공수정'이라는 대안이 있다 합니다. 이 때에는 부부관계에 있는 남성으로부터 정자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제 3자의 정자가 사용되어 여성이 임신을 할 수있게 된다고 합니다만, 반대로 여성에게 문제가 있어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 - 이 작품에는 여성의 난관 두 개가 모두 막혀있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 에는 '체외수정'이라는 방법이 사용되는데, (의학적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체외수정의 경우에는 타인의 정자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차용되고 있는 핵심적 아이디어입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의 원천이 되는 염색체가 마흔여섯 개 있어. 원래 아기는 그 가운데 스물세 개를 어머니로부터, 나머지 스물세 개를 아버지로부터 받지. 우지이에가 제안한 방법은 수정 후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제거하고, 특수한 방법을 써서 어머니 것을 곱절로 만든다는 거였어. 그렇게 되면 아기는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정보를 이어받을 일이 없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의학적 아이디어는 이처럼 한 생명을 잉태하게 됨에 있어, 결과적으로 오로지 엄마의 유전자 정보만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유전적 질병으로 인해 자신의 정자로 아이를 가지게 되면 그 아이도 또한 자신과 같은 질병으로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된 다카시로는 당시만해도 그저 연구실에서 실험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던 위의 방법으로라도 아이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 과정이 너무도 힘들었던 아내 아키코의 거부로 다카시로는 결국 자신의 혈육을 이 세상에 남기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지요. 하지만 이 때 채취되었던 아키코의 난자 중 두 개가 비공식적으로/비밀리에 냉동보존되었었고, 각각의 이유로 그 두 개의 냉동보존되었던 난자는 얼마 뒤 해동이 되어 누군가에 의해 생명으로 탄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하여 마리코와 후타바라는, 완전하게 동일한 두 '인간'이 1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세상에 탄생한 것이지요. 

소설 「나를 보내지 마」에서도, 영화 <아일랜드>에서도 모두 복제된 인간들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불리우든) 근원자들은 등장하지 않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복제품들에 대해 과연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이 작품 「레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둘을 직접 만나게 해줍니다. 아키코만의 유전자로만 만들어진, 즉 완전하게 아키코의 육체와 똑같은 후타바는 30여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바로 눈 앞에서, 또한 아키코는 30여년 전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후타바를 바로 눈 앞에서 보게되는 겁니다. 이 상황에서 아키코가 느끼는 감정은 이 작품을 읽어보게 될 분들을 위해 적지는 않겠...지만, 저의 (지금 내 눈앞에 열여섯 살의 내가 서 있다는 상황에 대한) 상상은 작품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아키고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만은 남기고 싶네요.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가져보게 된 가장 커다란 충격!!!은 이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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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말미에 한 부부가 백혈병에 걸린 자신의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물론 그렇게 낳은 둘째의 골수가 첫째에게 생체적으로 적합할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그렇게해서라도 첫째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는 부모의 마음이 둘째를 낳게 했다는 거죠. (제 기억에 이 이야기가 작가가 지어낸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디에선가 본/들었던 듯) 이 부모의 행동에 대해 '그럼 둘째는 뭐냐? 걔는 완전히 첫째를 위한 도구로서 태어난 거 아니냐?'는 비난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이를 뛰어넘어 영화 <아일랜드>에서도 보았었듯 '첫째를 치료하기 위해 확실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둘째는 낳는' 수준이 아닌, 아예 '여분의 내 육체'를 하나 더 만들어놓고 있다가 필요할 때에 즉시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만들어 내기도 했었습니다. 이 소설에도 정자에 문제가 있어 여자에게 아이를 가지게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자가 골수성 백혈병으로 죽어가자,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내 그 클론으로부터 골수를 이식받으려는 시도를 하지요. 하지만!!! 이 작품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은 --- 그 권력자는 훨씬 이전에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이미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했었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었습니다. 즉, 자신(A)의 생명연장을 위해 복제인간(A´)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A)이 죽고나서도 이 세상에는 (비록 정신세계까지는 똑같지않겠지만) 자신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 자신의 클론(A´)이 자신의 대를 이어가게 되는 끔찍한 유산(?)을 남겨놓고 간다는 겁니다. (작가는 그 클론이 면역체계의 문제로 청소년기에 죽는다는 설정으로 이 엄청난 일이 소설속에서라도 벌어지지 않게하고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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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고, '목적과 수단이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그 소설에 대한 평가를 갈라놓을 것 같다라고도 썼었습니다만, 이 작품 「레몬」도 또한 그처럼 극단적으로 '목적과 수단을 바꾸어 버리는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만, 이 소설에 대해 느끼는 바가 갈라지는 일은 없지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상상이 언젠가 현실이 된다면, 정말 만약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말입니다...  소설은 생각만해도 오싹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상황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키코는 결국 자신과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한 자신의 복제인간을 자신의 자궁속에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비록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 그 아키코의 복제인간이 아키코의 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여자의 몸을 통해 결국 마리코와 후타바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아키코는 후타바를 실제로 만나게 됨으로써 20여년 전의 자신과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한 육체와 마주서게 된 것이었죠. 둘째, 마리코의 아버지는 대학시절 아키코를 사랑했지만 결국 아키코와 결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코의 냉동배를 해동하여 자신의 부인에게 몰래 착상시킴으로써 아키코의 복제인간을 딸로 얻게 됩니다. 훗날 그는 딸 마리코에게 써놓은 마지막 편지를 통해 자신 스스로 '너를 전혀 딸로 보고 있지 않은 나 자신이 불쾌하기도 했어'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남기기도 하지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 두가지의 상황들만으로도 인간이 '생명의 탄생'이라는​ 신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비윤리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소름이 끼치도록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만 이에 그치지 않고, 물론 불가능한 탄생을 가능케 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힘들지만 약간의 도움만 받으면 한 생명의 부모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현재의 의료기술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 않습니다만, 그것이 도를 넘어서 유전자에 대한 마사지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만을 가진 생명'을 상상한다는, 이 '독창성 特上'의 상상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를, 그저 그것이 윤리적 혹은 신학적으로 옳지않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또한 의학적으로 그렇게해서 탄생한 생명체에 어떠한 심각한 문제점이 있느냐를 차치하고서라도) 이제까지 지탱되어온 '인간의 사회'가 어쩌면 그러한 시도들에 의해 결국엔 모두 망가뜨려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된 섬뜩.한 독서였었습니다. 정녕...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아나는 경험을 원하신다면 이 작품은 빼놓지 말고 읽어보셔야 할 듯. (덧붙여... 이 작품은 단숨에 읽어내실 것을 권합니다. ^^;;)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들 :  용의자 X의 헌신」 · 편지」 · 마구(魔球)」 · 「변신」  · 「도키오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발간순) :  「졸업」 - 「잠자는 숲」 - 「악의(惡意)」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내가 그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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