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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교양 - 3천년 인문학의 보고, 성서를 읽는다
크리스틴 스웬슨 지음, 김동혁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자신의 종교가 개신교라 말하는 일본 사람을 만났을 때, 순간 적잖게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미국인이 자신의 종교가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가 아니다!라 말하는 것 또한 아마 듣는 이로 하여금 최소한 그에 뒤지지는 않는 수준의 당황스러움을 자아내게 해줄겁니다. (어쩌면 저만의 선입견일 수도 있을지 모를) 이러한 인식에 대해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마 북유럽 계통의 미국인인 듯 한데, 정.말로!!! 똑똑.하게 생겼더군요. - '성서는 우리(미국) 문화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개인적인 신념뿐 아니라 공공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준다'라고까지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chapter and verse'라는 표현이나 'icon'과 같은 영어단어, 가수 조영남C가 번안하여 불렀던 탐 존스의 'Delilah'가 삼손을 꼬셨던 '데릴라'라는 사실, 그리고 성서에는 비교적 짧게 기술되어 있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존 스타인벡이 「에덴의 동쪽」을 탄생시켰다는 것 등이 책의 곳곳에 소개되고 있는 실례들이지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근본이 담겨져 있는 성서가 무엇이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으며, '성서가 말한다'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선 과연 성서란 어떤 책인가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해주고 있지요.
성서는 정말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만 먼저 말한다면, 성서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영어 단어 Bible의 본뜻은 '작은 도서관'이다. 즉 작은 책들이 여럿 모여 전체 성서를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 비유하자면, 성서 전체와 그 속의 개별 책들은 헤밍웨이가 어느 저녁 모히토를 마시고 단숨에 써버린 단편 소설이라기보다는 신앙을 가진 이들 여럿이 함께 작업한 위키피디아인 셈이다. …… 기독교인들에게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는 문서(즉 신약)에 복음서가 네 권이 있다는 사실은 네 권 중 어느 하나도 궁극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를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여 네 권이 함께 읽힐 때에 서로 경쟁하는 주장들, 또 어떤 때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주장들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가깝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성서를 '이해'한다라는 표현은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된다는 게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입니다. 그 해석의 차이는 단적으로 신약을 '성서'에 포함시키느냐 배제시키느냐로, 또한 종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라는 것이지요. 「유쾌한 성경책」이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서 성경을 이야기해주었었다면, 또한 성경을 역사서의 관점에서 주로 바라보았었다라면, 이 책 「가장 오래된 교양」은 이처럼 좀 더 진지(?)한 접근방식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책의 도입부에서는 먼저 세 가지의 관점에서 '성서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본 후, 책의 2/3정도를 '성서의 해석'에 할애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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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성서 속의 역사(성서가 이야기하는 사건들), 성서 이면의 역사(성서 본문들을 형성한 상황들, 즉 그 본문들이 반영하는 상황들), 성서의 역사(성서가 오늘날과 같이 거룩한 경전이 된 과정)가 그것들이다. 이 세 역사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서 한 장에서 소개된 내용이 다른 장의 내용과 관련될 수도 있다), 똑같지는 않다. 성서의 역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기자들이나 역사가들의 기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성서는 신앙의 책으로서, 삶의 모든 경험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신앙인들이 쓰고, 베끼고, 편집한 것이다. 성서가 말한 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실에 가깝든 가깝지 않든, 성서의 이야기들은 에외 없이 신앙의 전승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성서 이야기는 성스러운 역사이다. 이 역사는 ……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일반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 후자가 정확이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가르치려는 것인 데 반해,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 역사의 속에, 아래에, 위에, 뒤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야기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순간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어떤 냉정한 보고가 아닌 그 사건들에 대한 신앙적인 해석이 되는 것이다.
제가 아는 바...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대체적으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릴적부터 제가 다니고 있는 장로교가 그 중 가장 보수적이라고도 들었구요.)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질 않아요. (저자는 이 책에서 특정 종교나 특정 종파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모든 주장들을 소개하고만 있을 뿐이지요.) 예를 들어...
성서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고하려 하지 않는다. 특정한 전승과 신앙의 입장에서 사건들을 해석한다. 성서 이야기는 곧 신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이 강조되고, 하나님과 사람이 맺는 관계의 의미가 부각된다. 다시 말해 성서는 일어난 사건을 관찰한 그대로 옮겨 적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 안타깝게도, 성서가 말해 주는 역사에 의문을 품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의문을 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많다. 그리하여 그들은 (때로 물리 법칙을 왜곡하거나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추어) 성서를 오늘날의 역사책처럼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우리가 성서를 제대로 읽는 순간 바로 무너져 내린다. ……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서의 이야기는 이질적인 자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한데 묶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학적인 목적을 위해 전해진 것이지 역사 기록으로 보존된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저자의 주장에 (그렇지않아도 '정치적'으로조차 보수적이라 불리우는) 한국이 개신교 목사님들이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가 문득 매우매우 궁금해지더군요. 어쨌!!!든 이처럼 성서에 대한 '해석'이라는 개인/집단의 능동적 행위가 (어쩌면!)성서 자체의 권위에조차 영향을 미칠 수 있게도 되는데, 저자는 '원 성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즉 (해석이 아닌)'번역'으로부터도 상당히 심각한 해석상의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선 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을 채 몇 장 넘기지도 않아, 이 책을 제대로 즐기려면, 그러니까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안겨주려고 작정하고 있는 충격을 100% 다 받으려면 우선 성경 속 사건들에 관한 성경적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하겠어!란 생각을 제게 갖게 해주었던 첫 번째의 문제적 부분이었던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기 이전에 이미 서로 성관계를 한다라는 장면 --- 제가 받은 충격은 분.명.히. '처녀가 잉태하여'라는 성경구절로부터 인한 것인데, 여기서 '처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그냥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음에도,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수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비추어 성서를 해석하여 버리는 바람에, 구약성서의 예언(이사야 7:14)의 그리스어 번역을 완전히 자신의 주관을 통해서만 적용시켰다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 '번역의 오류(혹은 주관적 번역)'를 저자의 주장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그러니까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를 낳았다는 기독교(특히 카톨릭)의 핵심 신앙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며, 그에 반해 주제 사라마구가 기독교 신자들, 특히 자신의 모국인 포르투칼의 국교나 다름없는 카톨릭을 겨냥했었던(것으로 추정되는) 충격은 사실 그 의미가 많이 반감될 수 밖엔 없겠다 봐야겠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더 심각하게는 --- "두 사람이 밤낮으로 성서를 읽는다. 너는 검은 부분을, 나는 흰 부분을 읽는다"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재치넘치는 말이나, "성서가 그것을 말하는 그대로는 뜻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성서가 말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란 조지 버나드 쇼 특유의 씨니컬한 표현이 말해주듯,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듣고 싶은 것, 그리고 파악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성서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으로부터 성서를 둘러싼 여러가지 (때로는 전쟁까지를 유발시켰던) 논쟁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원제 「Bible Bable」은 '바벨탑'의 이야기로부터 '바벨'이란 단어가 서로간 소통이 불가능해졌음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고, 저자는 그러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이 책의 제목을 「Bible Babel」이라 정했던게 아닐까도 싶은데... 문구의 해석으로부터 기인된 오해, 그리고 그 오해가 낳은 소통가능성의 단절 중 가장 유명한 건 아마도 '스콥스 재판'으로 대변될 수도 있겠는 창조론과 진화론간의 대립이겠지요.
'성서를 읽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발생된 이 논쟁은 비단 '기독교 VS 과학'의 구도뿐 아니라, 심지어는 같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각자가 취하고 있는 입장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들 (특히 문자주의자들)에게 있어 성서를 글자 그대로 읽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되지만, 좀 더 유연한(?) 기독교 신자들은 <창세기 1-3>장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책임과 우리가 이루어야 할 관계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저자도 이에 대해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하나님이 변화의 주체이시고,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인간이 특별한 책임이 부여된 존재임과 동시에 지금도 진화하는 세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궁극적으로 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도 진화론의 주된 영역은 ('그들'의 주장대로 단백질 스프로부터던 뭐로부터던 일단 창조된) 생명/생명체가 어떻게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왔느냐를 말하는 학문이지, 창조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겠다는 학문은 결코 아니기에, 기독교 신자라해서 진화론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라든다 기독교 신자이기에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신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해석'의 상이함에서 기인된 꽤나 심각한 이 논쟁으로부터 우리는... 결국 '우리 인간은 남녀 모두 존엄한 목적을 갖고 태어났으며, 세상은 참 좋으며, 살 만하며, 거룩한 것이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책임과 명령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절실한 존재가 되었다!' 뭐 이 문장, 딱 이 문장정도로 창세기를 이해한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합의(?)를 아직까지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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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해석은 좁게 보아선 이처럼 개인의 신념, 극단적으로 넓게 보아선 인간 존재의 의의같은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만, 그 중간 수준에서도 또한 현실적이고 나름 '흥미롭다'라는 표현을 하게만 되는 몇몇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 유다는 성경이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한,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조차도 '나쁜 사람'의 상징처럼 여겨지게될 인물입니다만, 정경 (현재의 공식적인 성경)에 실리지 못한 <유다복음서>라는 기록을 보면 --- "유다는 예수의 제자들 중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로 행동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을 유다에게 명령했고 유다는 그에 순종했다. 즉, 유다는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고 예수는 자신을 당국에 넘겨주는 혐오스러운 일을 유다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이 일 때문에 자신이 영원토록 비난받고 저주받을 것이라는 것도 또한 알고있었다." --- 라는 겁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위와같은 해석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시간을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해주었던 이유였었었지요. 이것 말고도 이 책은 꽤나 많은 문제들에 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그 중... 제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① 환경문제 : 저자는 '성서에서 운전 중 핸드폰 사용에 관한 법규를 찾을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성서에서 21세기적 환경 윤리 강령을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8)라는 구절은 '인간은 자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제한 없는 생산은 하나님의 명령이다'라는 주장을 낳았기도, 또한 그 반대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를 관리자로서의 인간은 잘 돌보아야한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고 합니다.
② 해방신학 / 노예제 폐지운동 : 출애굽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의 애굽 탈출과정에서 '압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미국 남부의 노예들에게는 마치 자신들을 향한 이야기로 들렸었었고, 해리엇 터브먼이라는 여성 운동가를 '모세'라 지칭하게도 만들어주었으며, 1970년대를 기점을 남미를 휩쓸었던 '해방신학'의 종교적 기반이 되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위의 두 해석(①,②)은 '그럴 수도 있겠'는 논리의 전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성서는 그렇게 옳바른/상식이 통하는 곳에만 인용되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③ 노예제 옹호 :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노아가 어는 날 포도주를 마시고 잔뜩 취해 - 노아는 인류 최초로 포도주는 만든 사람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인사불성이 된 채 벌거벗고 누워있었었는데, 그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 정작 노아는 그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았던 반면, (저자는 아마도 성서에 적혀 있지 않은 무언가 큰 죄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쩌면 단순히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은 것이 죄가 되었었지도 모르는) 막내 아들 함이 아버지인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다는 이유로,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그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이후 함의 후손들은 역사적으로 이집트와, 또 아프리카와 연결되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아프리카인들이 노예가 될 것은 성서에서 이미 정해졌던 정당한 것'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발현하게 되었지요. 또한 저자는 노아가 아들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한 것에 대해서도 성서에 적혀 있는 상황만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며, 훗날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복에의 근거일 수도 있다는, 더 넓게는 '비이스라엘인들이 왜 이스라엘인들과 똑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는가'에 대해 성서적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의견을 조심스레 나타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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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으로... 밤늦은 시각이 되면 사람은 졸음에 못이겨 잠을 자게된다라는 신체적 제약에 찌~인한 아쉬움을 느껴보게 해주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만큼 재미있었으며, 그러한 재미와 더불어 읽어나가며 뭔가가 내 머릿속에 쌓여간다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던 책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저만의 착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꼭 제가 개신교 신자이기때문에 받았던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쨌.든 수입종교인) 기독교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교양'이라는 이름으로까지 자리매김 해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신학자 김용규 교수가 쓴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성서에 대해 최소한 이 책이 말하고 있는 정도의 내용은 알고 있어야한다라는 주장은 아마도...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져야하지 않을까 싶기때문입니다.
책의 뒷편에 나와있는 미주들은 주로 해당 설명의 성경구절을 명시해주고 있는데, 이 책을 읽으실꺼라면 반드시!!! 그 미주의 성경구절들을 찾아서 읽어보셔야한다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덧 곁들여지는 자신만의 해석을 즐겨보게 될 수 있는, 밋밋하나마 "가장 오래된 교양"이라는 제목 또한 그런 의미로라면 충분히 나쁘지않다라 받아들여지게되는 그런 책이니까요.
- 십자가에 예수의 몸이 있는 것을 십자고상cyufix이라고 부른다. 십자고상은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교도들이 선호한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희생을 강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개신교인들은 부활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빈 십자가를 선호한다. - 본문 중
- 그러하기에 그 책은 성경 속 사건들을 마치 옛날 이야기하듯 풀어놓고 있지요.
- 그 단적인 예로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삼손, 솔로몬 과 같은 인물이나 홍수, 출애굽'등과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 자료는 지금까지는 오직 성서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 성서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온 다양한 관점을 보여 준다. 성서는 매우 많은 것을 말하며, 이것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더욱이 성서 본문들은 먼 옛날에 쓰였고, 우리에게는 '원'성서가 없다. 오늘의 성서를 만든 것은 사본의 사본의 사본이며, 그 안의 내용, 표현, 어휘는 훌륭하게 훈련된 성서학자들조차 당황하게 만든다. 성서에 대해 더 싶이 배울수록 "그 문제에 대해 성서가 말하는 바는"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본문 중
-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을 이처럼 밋밋하게 <가장 오래된 교양>이라고 지었다라는 것이 이 책에 대해 가지는 유일.한 아쉬움이었지요.
-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의롭지 못한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실천을 강조했던 기독교 신학 운동이다.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도하고 진보적 개신교 신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초교파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한 사람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빈곤을 신의 뜻에 어긋나는 사회적 죄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인용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 이 감상문도 어제 새벽까지 썼었었었었. ^^;;
- 두세 개 정도의 매칭오류가 있기는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