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경제학에서 상정하고 있는 인간은 총체적으로 본다면 '합리적'이라는 단 한개의 단어로만 설명되어지고 있지만, 이 '합리적'이란 단어의 경제학적 정의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철저히 계산적인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경제학의 한 분야인 '게임이론'에서 묘사되는 '합리적 인간'은 '합리적임'의 극단에까지 이르러 그야말로 신과 같은 두뇌를 지닌 존재로까지 묘사되고 있기도 하지요. : 갑돌이가 A의 선택을 할지, B의 선택을 할지 갑순이는 알 수 없습니다만(하지만 갑순이는 갑돌이에게 A와 B라는 두 개의 선택이 있다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선택을 하던 일단 갑돌이의 선택이 정해지는 순간, 즉각적으로 갑돌이의 그 선택에 대해 대응하여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갑순이는 이미 완벽하게 계획해놓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 즉 갑순이가 자신의 가능한 모든 선택에 대한 모든 대응책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라는 것과 심지어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갑순이가 내놓게 될 대응책까지도 갑돌이는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알고 있다'의 논리는 무한하게 반복되지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둘이 마주앉아 맞고를 치고 있다고 해보죠. 이때 갑돌이와 갑순이는 각자에게 패가 주어지는 순간 이미 상대방의 패를 (엄밀하게 말하자면 확률분포로서) 다 알게 되며, 그 주어진 패로 선공자인 갑돌이가 초단 또는 고도리를 목표로 정했다라면, 갑돌이가 초단 또는 고도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갑돌이가 초단 또는 고도리의 목표로 설정하는 순간과 동시에 알게된 갑순이의 머릿속에는 슈퍼컴퓨터가 작동하여 갑돌이의 가능한 모든 선택(패)에 대응하는 전략이 순식간에 세워지게 되고 이 사실 자체 - 그러니까 갑돌이가 패를 받자마자 초단이나 고도리를 목표로 해야겠다라 생각하게 되었는데, 갑돌이가 초단이나 고도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라는 걸 갑순이도 이미 알고 있어서 나름의 대응책을 다 강구하여 놓은 상태 - 를 또한 갑돌이가 알고 있고, 또한 여기까지의 이 모든 사실을 갑순이도 알고 있는... 이런 무한 증식의 '알고 있고'의 이야기가 되는겁니다. (더 헷갈리나요? --;;)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 가정의 상황하에서 갑돌이와 갑순이가 내리게 될 결론은 무엇일까요? --- 딱 하나! 그냥 갑돌이는 애초의 목표대로 초단이냐 고도리냐, 둘 중 한가지를 선택해 그에 맞는 패를 내는 것으로 판을 시작할 수밖에는 없는 것 뿐입니다. 물론... 그 판의 결과를 (옆에서 그 맞고판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알 수 없지만) 갑돌이와 갑순이는 (그리고 게임이론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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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직접 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고등학교 1학년인 내 딸이 죽었습니다. 그냥 죽은 게 아니라, 고등학교를 중퇴한 동네 건달같은 사내녀석들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말이죠. 그 건달녀석들은 내 딸을 납치해다가, 마약성분의 약물까지 주사를 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성폭행을 가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장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비디오카메라로 다 찍어 놓기까지 했습니다. 내 딸은 결국 마약 과다투여로 인해 죽게 되었고, 건달녀석들은 내 딸의 시신을 강물에다 버리기까지 했더군요.

나는 비디오테이프에 찍힌 내 딸이 성폭행 당하는 장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범인들을 향한 분노가 조금이라도 식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여러 번 보았으며, 심지어는 그 건달녀석들의 이름과 집 주소까지 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경찰에 알려주기만 하면 그 건달녀석들은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런데 예상되는 그 '법의 처벌'이라는 것이 말이죠!!!

​범인을 체포했다고 해도 …… 범인을 만나게 해줄지, 만나게 해주지 않을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재판이 시작되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범인의 죄가 가벼워질 수도 있다. …… 과거의 사건들을 떠올려보니 미성년자들은 이름도 공표되지 않고, 사형에 처해지는 일도 없었다. …… 소년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도, 범죄방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청소년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슬픔과 분노는 반영되지 않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도덕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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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가미네는 두 명의 범인 중 하나인 아쓰야를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살인은 경제학에서 가정되고 있는 '합리적 인간'이 게임이론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미리 계획된' 선택결코 아니었습니다. (나가미네의 인생에는 딸이 성폭행당해 죽을 것이라는 예상된 시나리오가 없었었고,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아예 존재하질 않았었으니까요.) 그 시작은 단지... 범인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자신의 분노를 전혀 표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었다는 것 뿐, 그러니까 자신의 증오와 슬픔을 범인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직접 쏟아내고 싶었던 것 뿐이었지만, 그 현실적 결과가 의도되지는 않았던 살인으로 나타나고 만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된 현재 '인간의 이성'은 사형(私形)이란 것에 대해 '하지 말아야할 것'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만, 그러하기에 그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법제도 또한 '죄를 심판할 권리'를 각 개인으로부터 모두 거두어놓고 있습니다만... 현실에서의 인간은 이처럼 항상 '이성'의 지배하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존재라는 걸, 또한 법이라는 제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인간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라는 것을 작가는 이 작품의 스토리 전개에서 핵심적 동인(動因)으로 사용하고 있는겁니다.   

아쓰야를 칼로 찔러 죽인 후 (이 순간 이후부터는 '의도되지 않은'이라는 말은 할 수 없는) 나가미네는 아쓰야의 신체를 아주 화끈하게 훼손시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미네의 가슴 속 분노는 식질 않습니다. 그의 극에 달한 분노는 '아쓰야의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이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후회마저 낳게되지요. 이 소설과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영화 <세븐 데이즈>에서도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에게 딸의 엄마는 자신이 직접 그의 죄를 심판합니다. 하지만 그 영화 속 엄마는 '살아 있었을 때 이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나가미네의 후회를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범인을 향해 '살아 있을 때 불에 타 죽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더라'라는 말을 해주며 바로 그렇게... 범인을 산꼼장어 굽듯 불로 태워 죽였지요.

이 작품 「방황하는 칼날」을 읽는 내내... 이처럼 이전에 읽었던 소설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더랬습니다. ---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에서 주인공 유코는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딸을 잃었습니다만, 그녀 또한... 법은 미성년자인 자신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역시 자신이 직접 죄의 심판자로 나서기로 했지요. 하지만 그 두 제자들에 대한 복수를 끝내고 난 후, 그녀는 결국 "모든 기억을 지워주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나가미네 또한 '아쓰야를 죽임으로써 복수가 허무한 일이라는 사실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며 유코와 똑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한 명의 범인이 더 남아있다라는 사실은 나가미네로 하여금 결국...!!!  

그래도 그는 또 하나의 짐승을 방치해둘 수 없다. 그것은 에마(딸)에 대한 배신이다. 그녀를 괴롭힌 짐승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잇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는가? 아니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아쓰야와 마찬가지로 가이지도 미성년자이리라.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쩌면 교도소에 가지 않을지 모른다. …… 한 번 생겨난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 가령, 가해자가 갱생한다고 해도 그들에 의해 태어난 '악'은 피해자들의 마음에 영원히 무거운 납덩이처럼 매달려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어진 법은 오직 국가만이 죄의 댓가를 집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지어 놓고 있지만,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용서하느냐'라는 절규에도 나타나 있듯이, 아쓰야를 죽임으로써 분노의 일부분을 해소하기는 했으나 또 다른 범인인 가이지가 만약 경찰에게 그냥 잡혀버리게 된다면 자신이 원치않는 결과, 즉 자신의 나머지 분노를 영영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있어야 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상황하에서 (이미 이성을 잃은) 나가미네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다시 딱 하나밖엔 남지 않게 됩니다. 가이지도 마저 직접 죽여버리는거지요.

 

물론 나가미네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감당해야할 결말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벌써 도망쳐버린 가이지를 찾아 나서는 나가미네는 경찰에게 미리 자신이 아쓰야를 죽인 범인이며, 이제 자신의 딸을 성폭행하고 죽인 나머지 범인인 가이지도 마저 찾아 죽이겠노라고, 그리고나서 자수하겠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지요. (즉, 자신이 추구하는/원하는 게임의 결과를 게임 참가자 일부에게 아예 미리 공표해버리는 겁니다) 이미 나가미네가 아쓰야를 죽인 범인임을 알고 있었던 경찰은 나가미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상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가미네가 자살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가이지마저 죽이려들 것이라는 거였었지요. 나가미네가 보내온 편지로 인해 이제 모든 등장인물들의 선택이 결정되어 독자들에게도 공표되었습니다. ①가이지는 (나가미네가 대충은 알고 있는) '어디론가' 도망쳤고, ②나가미네는 가이지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사냥총을 들고 그 '어디론가'로 나섰으며, ③경찰은 가이지와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이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신분이 바뀐) 나가미네를 그가 가이지를 죽이기 전에 찾아내야한다는 것이지요.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이들의 이러한 쫒고 쫒기는 과정을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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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세 명의 플레이어가 쫒고 쫒기는 과정들은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마력같은 글은 그 과정 자체도 충분히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만,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왜' 「방황하는 칼날」이라 지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나가미네의 직장 동료, (나가미네가 머물렀던) 펜션의 주인 부녀, 그리고 설문을 통해 나타난 일반 시민들의 생각... 심지어는 경찰 내부에서조차 나가미네의 행동에 대해 '편견 가득한 공감'이 생겨납니다. 이 공감은 또한 저를 포함하여 이 작품을 읽는 독자 거의 모두에게도 똑같이 생겨났을 거라고도 생각되기도 하지요.  

 

사람을 죽였으니까 살인은 살인이지만, 상대는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간입니다. 자기 딸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 어떤 부모가 복수하고 싶지 않겠어요? 나에게도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어서 그런지,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범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편이 이상한 일이지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개인적 감정'에 촛점을 맞추어 사건의 경과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나가미네는 오히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법은 인간의 나약함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부정적 생각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즉,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개인적 원한의 복수'가 아니라 뭔가 좀 더 커다란 그림이 있다는 것이지요.(...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뉴스가 바뀌면 사람들의 관심도 바뀐다. 그러나 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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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팀의 최종목표는 결국 우승입니다. 그것을 위해 일단 이번 경기를 이겨서 16강에 진출해야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8강, 4강... 등의 새로운 목표들을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플레이어들의 목표가 똑같은 상황하에서는 비교적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이 쉽지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경찰이라는 플레이어의 목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며 점차 혼돈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일본에서는 개인적인 복수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라는 법률적 판단만으로부터 시작된 나가미네에의 추적은 아쓰야와 가이지의 과거 행적들이 드러나면서 점차 '법적으로는 인정되고 있지 않으나, 심정적으로는 인정하게되는' 것으로 변질되고, 그러하기에 아쓰야를 죽인 것은 충동적인 살인이었다라는 것으로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으나, 그가 만약 가이지까지 죽이게 된다면 그 '예외적 상황'인 정상참작의 가능성도 완전히 날아가버리기에, 그 가능성의 소멸을 막기위해 나가미네를 쫒는 것으로 다시 한번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말이죠!!! 이 게임에서 경찰이 지켜야 하는 게임의 룰은 전혀 변하질 않습니다.

 

이번 사건에 관해서 말이야. 우리(경찰)가 할 일은 가이지를 찾아내는 거네. 그래서 에마 양 죽음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나가미네에게서 복수할 기회를 빼앗게 되는 거지.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원한을 불완전한 상태로 봉인하는 걸세.

상사로서 부하 형사들에게 위와 같은 게임의 룰을 다시금 주지시킨 히사쓰카 역시 마음 속으론 애초부터 이 게임의 룰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만, 마지막에 나오는 그의 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자식을 두 눈으로 지켜본 부모에게, 법이 그러니까 참고 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나?"

 

 

가이지를 죽이기 위해 드디어 총을 들고 나타난 나가미네, 그리고 그 상황 바로 직전에 경찰에게도 지급된 권총, 하지만 그 권총은 나가미네가 가이지를 향해 사냥총을 쏘지 못하게 할 때에만 사용하라는 상부의 지시... 이때 형사 오리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다음의 생각 또한 경찰이 따라야하는 게임의 룰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가미네가 총을 쏘는 것은 가이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뿐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가미네를 죽여도 어쩔 수 없다. - 이것이 경찰의 입장인 것이다. …… 한마디로 말해서 그 총은 가이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총이다.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짐승만도 못한 그 녀석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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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일본 소년법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그건 그저 소설의 형식일 뿐 정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게임 속에서 우리는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노력하는 것 자체에만 빠져있다 보면 정작 놓치게 되는 보다 근본적인 것, '이 게임의 룰은 과연 정당하고 합당한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가져보게 되는 것 --- 이러한 의문이 없기에 갑돌이와 갑순는 서로가 치게될 맞고판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게임의 룰이 그러하기에'라며 어쩔 수 없이 게임을 시작했었었지만... 정말 그 게임의 룰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과감히 그 판 자체를 뒤엎고 자리를 일어설 수 있어야하지 않겠냐라고... 우리에게 작가가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방황하는 칼날」​로 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그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오리베 형사의 독백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감상문을 마치겠습니다. 읽어본 작품도, 아직 사놓고 읽지않은 작품도 많은 이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도키오」를 제외한) 거의 모든작품마다 재미면 재미, 주제면 주제, 뭔가 하나는 확실하게 안겨주시는군요.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우리의 일은 법을 어긴 사람들을 잡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악을 없앤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 그러나 이렇게 해서 악을 없앨 수 있을까? 죄인을 격리한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을 보호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일정 기간 보호받은 죄인들은 세간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죄를 저지른다.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누구에게도 보복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가가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그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로 '악'을 차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

 

 

★ More "Food for Thought"  

 

원신연 감독 作, 영화 <세븐데이즈> :  '死刑을 대신하는 私刑'이라는 이 이상한 문장.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다시한번 더!!!) 참 이상한 공감.

다카노 가즈아키 作,13계단: <세븐데이즈>와는 반대가 되는 '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死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공지영 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死形이란 형벌의 정당성에 대한 감성적 의문부호.  

조세희 作, 「뫼비우스의 띠」 :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사쿠 다쓰키 作, 사망 추정시각: 사적 복수가 낳게되는 애꿎은 희생자.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성공한 복수라해도 그것이 아픈 기억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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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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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재미있다'라는 표현을 하게되는건 분명히... 개콘을 보고 '재미있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재미있다'이어야한다/일꺼라고 생각합니다.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그저 TV를 바라보기만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재미'와, 나름 정신적 노동을 통해 얻게되는 '재미'는 ('재미'의 quality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엄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이게... 경제학을 배운 이의 두뇌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소설을 읽고 느끼는 재미'라는 것 또한 스토리가 너무너무 재미있다라는 것과 소설이 던져주는 물음 자체가 흥미롭다라는 걸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용의자 X의 헌신」이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스토리 자체가 주는 재미만으로도 그 소설에 흠뻑 빠져들게 해주는 작품들이 있는 반면, 「남아있는 나날」 혹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같은 작품들은 별 특별한 스토리 없이도 '인생이란 결국 무엇이더냐'라는 꽤나 진지한 질문을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스스로 가져보게 만들어주는, 그런 (이것도 재미라 할 수 있다면) 재미를 주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주제로 한 독서는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을 그 최종 목적지로 하여 시작되었었습니다만, 그 중간... 바로 이 책,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의 주제를 알게되니 '어서 빨리 좀 읽어보고 싶은데!'라는 조바심을 정말로 오랫만에 가져보게 되더군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아마 '소설이 던져주는 질문'만 놓고보자면, 이제까지 읽었던 소설들 중 가장! 진지한, 그러나 해답을 선뜻 내릴 수는 없는 그런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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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실수에는 지체 없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하나님이 지금은 로마가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들에게 주는 수모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이 하나님이 이름이나 권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데도 하나님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중​

​소설은 1930년대 중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33년간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었던 페레이라 주교가 '구멍 매달기'라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결국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보고를 받은 포르투갈 선교회는 결국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페레이라 주교의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과 가르페 신부를 일본으로 파견합니다. (이 작품이 일본인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감안해야할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소설은... 이 장면에서 포르투갈의 가톨릭 교단은 '당시 유럽인의 눈으로 보면 세계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은 나라에서 페레이라가 배교를 강요당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신앙과 사상 면에서 굴욕적인 패배'라는 생각을 가졌었으며, 로드리고 신부와 가르페 신부의 파견을 이러한 불명예를 설욕하기 위한 선교로 간주하고 있었다라 표현하고 있지요.

1857년 히데요시​가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래, 일본은 모든 가톨릭 선교사들을 해외로 추방하였으나 37명의 사제가 잠적하여 일본에 남았고, 이들은 일본 관리들의 눈을 피해 여전히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본 관리들에게 붙잡힌 신부들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었으나, 일본 관리들은 결국 그들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데 실패하고 말지요. (이 소설의 스토리와 등장 인물들은 약간의 각색을 거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실제의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 마침내 우네메(일본 관리 이름)는 아무래도 자기가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신부들의 용기와 힘이 더욱 강해지는 듯하여 이들을 개심시키기 전에 운젠(일본의 온천)의 모든 샘과 연못의 바닥이 드러나 버릴 것이라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신부들을 나가사키로 다시 데려가기로 결심했습니다. …… 이런 사실로 우리의 성스러운 교의(敎義)가 오히려 대중의 칭송을 받게 되고 신도들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바로 전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에 등장하는 다음의 장면을 소름끼치도록 재현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제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A라는 나라가 B라는 나라를 식민지로 삼겠다 작정했다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다스렸던 시대가 아마 그 '모범적 사례'로 연구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통치는, 순전히 A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철저함은 기독교를 억압하는 것에도 나타나, '순교'가 불러오는 여파를 알아채고는 이내 곧 '배교'로 정책을 바꾼 그들의 대응속도에는, 여전히 A와 같은 입장에서 보자면 가히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게도 되지요.)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예수에게 순교자의 역할을 요구하지요. 거기에 더해 순교자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하며, 가능하다면 수치스러워야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 형태의 순교야말로 신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퍼뜨리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최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이용할 수 있는 나뭇조각이지. …… 너는 숟가락이 될 거야, 나는 그 숟가락을 인류에게 집어넣어 내가 앞으로 되고자 하는 새로운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가득 떠올리게 될 거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단다. …… 영혼을 구하려면 몸은 희생되어야 한단다."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어쨌든 무사히 일본에 들어갈 수 있었고, 기치지로라는 이의 도움을 받아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어느 한 마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곧 마을 사람들이 가톨릭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 관리들에게 발각되었고, 마을 대표로 끌려간 세 사람은 '성화를 밟고 그 위에 침을 뱉고, 성모는 남자들에게 몸을 맡겨 온 매음녀'라 말하라는 관리들의 명령을 거부한 채, 잔인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끝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어기지 못해, 그렇게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된 거였지요. ​이러한 현실 앞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핵심적 질문이기도 한 다음과 같은 인간적 고뇌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 하지만 제가 이 사실을 쓰는 것은 그들이 출발하던 날 아침, 기치치로가 머리를 약간 떨군 채 중얼거리던 그 말이 가슴속에 차츰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 무엇을 위한 순교일까요? 저는 오랫동안 성인전(聖人傳)에 쓰인 그런 순교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돌아갈 때 공중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런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지나치게 꿈꿔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 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모키치도 이치소우도 지금 주님 옆에서 그들보다 먼저 간 많은 일본인 순교자들과 똑같이 영원의 지복을 얻고 있을 것이라고.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비애에 빠진 인간들의 소리에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만 말없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한 그런 느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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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마카오에 머물렀었을 때, 로드리고 신부과 가르페 신부는 그곳에서 기치지로라는 일본인을 소개받았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가톨릭 신도가 아니라고 말했었습니다만, 사실 그는 고문의 협박에 못이겨 배교를 했었던 인물이었지요. 그는 자신 스스로를 약한 자라 말하며 다음과 같이 절규합니다. ---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하지만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 신부님, 그러면 저 같은 겁쟁이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런 기치지로의 외침에 로드리고 신부도 결국엔... "인간을 모두 성자나 영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시대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신도가 배교한다거나 목숨을 던진다거나 할 필요도 없이 은혜받은 그대로 신앙을 계속 지킬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평범한 신도였기 때문에 육체의 공포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 만약 사제라는 자존심이나 의무감이 없다면 저 또한 기치지로와 똑같이 성화를 밟았을지도 모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마는데, 계속되는 일본 신도들의 죽음 앞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인간적 고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커져만 가게 됩니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 농민이 오로지 당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정적이, 이런 고요가 계속되는가? 이 한낮의 고요함. 매미 소리. 이런 어리석고 참혹한 일과는 전혀 관계 없다는 듯이 그분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신부는 그것을 오랫동안 그분이 기도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하였을 뿐 결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쫒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은 환영(幻影)을 계속 뒤쫒은 것인가. ……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런 때마저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까? …… 나는 배교한다. 배교할 테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제 소설은... 이처럼 일본인 신도들의 비참한 최후에도 여전했던 하나님의 침묵이,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는 과연 깨어지게 될까, 또한 로드리고 신부는 정말 결국 배교를 하게 될까하는 의문을 독자로 하여금 가지게 만들어 줍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결국 한때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게 되지요. 예의 페레이라 신부는 이름조차 일본식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가르침과 가톨릭교의 과오와 부정을 폭로하는 책을 쓰고 있다고 일본 관리들은 말합니다. 페레이라는 그에게 일본이란 나라에는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없다라 말하며, 일본에서의 선교를 그만두기를 권하는데, 그렇게 철저히 변해버린 자신의 옛 스승, 페레이라에게 더할나위 없는 실망을 느낀 로드리고 신부는 혼자 감방에 앉아 예수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믿음 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되지요.

그분은 왜 결국은 자신을 배신할 그 사나이를 제자 대열에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유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오랫동안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고 보면 유다는 그분의 영웅적인 십자가를 위해 조종당한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닌가. 게다가... 게다가 만약 그분이 사랑 그 자체라면 최후에는 왜 유다를 쫒아 버린 것일까? 유다가 피밭에서 목을 매달고 영원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가는데도 그는 왜 내버려 두었던 것일까? …… 유다가 피밭에서 목을 달아맸을 때 그리스도는 유다를 위해 기도하셨을까?

이처럼 작가는...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충분히 가져볼 수 있는 의문을, 이제까지의 일생을 기독교 교리에 따라 살아왔었던 가톨릭 신부를 통해 제기함으로써 읽는 이의 종교에 상관없이 똑같은 고민을 해보게 만들어줍니다. 이제 소설은 로드리고 신부 앞에 페레이라를 다시금 등장시킴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주지요. 페레이라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그가 감방에 앉아 있을 때, 참으로 신기하다라 생각했었던 다른 감방에서 들리는 코고는 소리가 사실은 '구멍 매달기'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 신도들의 신음소리였다라는 걸 말해주며, 로드리고 신부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야. ……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 내가 여기서 보내던 밤에는 다섯 사람이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었어. …… 관리는 이렇게 말했지. 당신이 배교하면 저 사람들을 곧 구덩이에서 꺼내 밧줄도 풀어 주고, 약도 주겠다고 말이야. 나는 대답했지. 저 사람들은 왜 배교하지 않느냐고. 관리는 웃으면서 가르쳐 주었어. 그들은 이미 몇 번이나 배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네가 배교하지 않는한 저 농민들을 구할 수 없다. …… 저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고통 대신에 영원히 기쁨을 얻을 수 있겠지요. …… 자네는 그들보다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겠지. 적어도 자기 자신의 구원이 중요한 것일 테지. 자네가 배교하겠다고 말하면 저 사람들을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있어. 고통에서 구원받는 거지. 그런데도 자네는 배교하려고 하지 않고 있어. 자네는 그들을 위해 교회를 배반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야. 나처럼 교회의 오점이 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지. …… 신부인 나는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사랑하라고 가르쳤어.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거야! 그리스도는 배교했을 것이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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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바로 앞에 둔 상황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마음속에 들렸던 '그분'의 목소리는 이러했다... 라고 소설은 쓰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침묵에 대해 묻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주어진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는 대답을 통해 작가는 이 작품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만, 전 개인적으로 이러한 끝맺음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의문 자체가 어쩌면 그 누구도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그러하다면 차라리 「예수복음」에서의 주제 사라마구처럼 "하나님은 몸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신다"라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어쩌면 훨씬 더 솔직한 (결코 위로가 될 수는 없는) 위로가 되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더군요.     

 

 

물론 이 작품은 신앙을 지켜내는 것의 어려움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참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것에 그 방점이 찍혀 있긴 합니다만... 막상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이 슬픈 현실 앞에서 우리의 간절함 바램관 달리 '기적'은 여전히 생겨나고 있지 않다라는 거, 그렇게 또한 여전히... 하나님은 왜! 지금도 침묵하고만 계신가에 대한 신자로서의 가슴아픈 의문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이 작품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입을 통해 "기도라는 것이 이 지상의 행복이나 요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작가의 대답과는 별개로... 이 책을 읽고나니,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정말로 진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저의 쉽지않은 개인적 상황들에, 대한민국에 닥쳐온 이 엄청난 슬픔에도 또한...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으시다라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일지 사실... 제 신앙으로는 아직 감조차도 전혀 잡지 못하고 있으면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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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복음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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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1+1=365'라는 누군가의 주장에 놀라거나 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비웃거나... 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겁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그저 '아~ 일 더하기 일은 삼백육십오구나. 몰랐었어'라는 말 밖엔 나오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는 그렇게... 한동안 '일 더하기 일은 삼백육십오'라 알고 지내게 되는거겠죠. 이제껏 제가 성경에 관한 네 권의 책을 읽었던 것도 어쩌면 이 소설 「예수복음」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서였었다라 말할 수 있을겁니다. '내 작품을 읽는 동안은 내가 써준대로만 생각해!'라 명령하는듯한 그의 소설로부터, 인구의 94%이상이 카톨릭교 신자인 조국 포르투칼에서 1992년 발표한 이 작품으로 인해 결국 스페인으로 쫒겨나야했었던 주제 사라마구, 그리고 그런 그가 1998년 노벨 문학상을 탔을 때 교황청이 유감을 표명했던 원인이었던 이 작품 「예수복음」이 담고 있는 이야기로부터 충격을 받게되건, 이제껏 제가 가져왔던 작가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존경심에 상처를 받게되건, 그 어떤 결과를 얻게 된다한들 일단!은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 기본전제가 될 테니까 말이죠.

……………………………

"만약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책 뒷장의 도발적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처음부터 성경 속 가장 의미있는 fact를 부정하며 시작됩니다. 갓 이십 대에 접어든 요셉과 열여섯 살의 마리아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었고, 그들의 첫째 아이인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부여하신 욕망 중 하나인 성욕의 발현, 즉 그들의 섹스로부터 태어났다고 적고 있는 것이지요.

요셉은 조용히 다가가 천천히 시트를 걷었다. 그녀는 눈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자신의 튜닉 가두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것을 배꼽께까지 들어 올리자마자 요셉은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 마리아의 다리는 벌려져 있었다. 어쩌면 꿈을 꾸면서 저절로 벌려젔는데 갑작스러운 나른함 때문에 미처 닫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의무를 아는 결혼한 여자로서 어떤 예감이 있었기 때문에 닫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초반부에선 예수의 탄생 당시 베들레헴의 세살 아래 사내아이들이 예수의 탄생으로 인해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사건에,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그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원죄'가 지워져 있는 것과 같은 의미가 부여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즉,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기 이전에, 베들레헴에 사는 사람들에게 헤롯왕의 그 잔인한 명령을 전해주기만 했더라도 스물다섯 명의 어린 사내아이들이 죽임을 당하지않을 수도 있었다라는 것을 요셉의 '죄'로 규정하며 또한 그것이 아들 예수에게도 전해지고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지요.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이처럼 이 작품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에 자신만의 상상을 개입시켜 자유자재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해 받기도 하듯) 창녀로 설정된 막달라 마리아와 청년 예수가 섹스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며,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여러가지 기적들을 예수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지요. 또한 이전에 제가 읽었던 작품들에서 '죽음'이라든가 '상식'등을 하나의 인격체로 등장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는 하나님과 악마를 각각 눈에 보여지는 하나의 '존재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이제까지 읽어보았던 그의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복음」이라는 이 작품 또한 줄거리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자들로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말도 안되는, 심지어는 불경스럽다.라는 할 수도 있는 표현들을 하고 있는 줄거리로 받아들여지겠지만 말이죠. 이 작품을 끝까지 커다란 거부감없이 읽어낼 수 있었던 이유가 만약 저의 '부족한 신앙'때문이라면, 그 '부족한 신앙'으로 인해 매우 흥미로운 의문 한 가지를 이 작품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라 말하고 싶네요.

​옮긴이 정영목은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 책, 「예수복음」을 작가 주제 사라마구만 특유의 성경에 대한 해석이 깃들여 있는 작품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제 생각엔 그저 성경으로부터 (비록 이런 제 의견이 이 소설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등장인물과 배경, 그리고 여러 사건들만을 차용한, 그렇게 작가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창작되어진 그야말로/말 그대로의 '픽션'으로만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도 싶었습니다. 비록 주제 사라마구가 평소에도 기독교에 매우 비판적이었다고는 하나, 이 작품이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또는 기독교 교리의 헛점을 파헤쳐내기위해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이해한 바!의 이 작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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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은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그 반대의 것이 없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가 이해했던 바, 이 소설의 핵심은 초반부에 등장하는 바로 이 문구입니다. '신은 절대선이다'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그리고 현재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의심할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은 절대 선이다'라는, 바로 이 (또한) 절대적인 명제에 대해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이 작품을 통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그를 조국으로부터 쫒겨나게 만들었으며, 그의 노벨 문학상의 수상까지도 마뜩찮아하는 시선을 자아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음의 장면들이, 제 생각에, 이 소설의 핵심이며 작가가 기독교계로부터 배척을 당해야했던 가장 주된 부분이 아닐었을까 싶네요. '충격 1단계'입니다. ------ 안개 자욱한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로 혼자서 배를 저어 나간 예수는 그 배위에서 그의 눈 앞에 현신한 하나님, 그리고 악마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예수에게 순교자의 역할을 요구하지요. 거기에 더해 순교자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하며, 가능하다면 수치스러워야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 형태의 순교야말로 신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퍼뜨리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최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이용할 수 있는 나뭇조각이지. …… 너는 숟가락이 될 거야, 나는 그 숟가락을 인류에게 집어넣어 내가 앞으로 되고자 하는 새로운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가득 떠올리게 될 거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단다. …… 영혼을 구하려면 몸은 희생되어야 한단다." 거기에 더해 이 작품 속에서 하나님은 왜 사람들앞에 직접 나타나시지 않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그건 '신들간의 합의'때문이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즉,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하나님 스스로가 부정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거지요.

 

 

자... ​충격의 강도를 한 단계 더 올려보죠. ------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교를 하게된다면, 자신이 죽고나서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행복해질꺼냐 묻는 예수에게 하나님은 또 다음과 같은 대답을 주십니다. "(그들은) 천국에서는 행복을 얻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될 거야, 나는 천국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고 그들은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지." 하나님의 이 대답을 예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것이 주제 사라마구 자신의 해석이기도 할 듯한) "당신은 사람들이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당신을 위해 살려고 태어난 것임에도 그들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거로군요, 천국에서는 그들에게 삶의 기쁨을 전혀 주지도 못할 거면서."

 

 

 

 

●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 이문열 著 「사람의 아들」 중 어느 제사장의 말

 

"대개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만 얘기해요. 앞으로도 쭉 같이 살아갈 가난뱅이 말이죠. 설령 한 푼도 없더라도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얌전하게 견디고 있으면 죽어서 금쟁반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밖에 가르쳐주지 않아요." --- <분노의 포도>중 톰의 말

 

 

종교가 '천국'이라는 마약과도 같은 상징을 이용해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부정/이겨내게 만드는 이런 내용은 표현의 강도만 다를 뿐, 위의 인용에 나타난 것 처럼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바로 이러하다.라고 김용민이 「맨 얼굴의 예수」에서 비판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주제 사라마구가 만약 여기서 그쳤더라면, 조국에서 추방당하는 대신 옛날 우리 문학계에서 마광수 교수가 받아야했던 그런 종류의 시선을 감당해야하는 걸로 끝났을지도 모를겁니다. (물론 그것도 당사자에겐 꽤나 견뎌내기 힘든 일종의 형벌이겠지만.) 그러나 예의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끝내 다음과 같은 가장 강력한 강도의 충격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주지요.

​'서양의 작가들치고 어떤 식으로든 성경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작가가 몇이나 되겠냐만'이라는 옮긴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서양의 문화는 기독교를 뼈대로 하여 구성되어져 왔으며, 그 영향은 현재에도 엄연하게 남아있기도 하지요. <메가마인드>라는 만화영화를 정말로 재미있게 봤더랬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그 흐름을 담아내는 화면으로부터의 재미도 만만치않았습니다만, 무엇!보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선'이 없어진 세상에 무료함을 느낀 '악'이 자신과 맞서 싸워줄 새로운 '선'을 만들어낸다라는 설정 자체가 너무도 멋졌었기 때문이었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예수복음」을 읽고서 그 스토리를 떠올린건지, 혹은 이것이 서양인들의 정신에 기본장착되어있는것인지...까지를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주제 사라마구는 이 설정을 기어코 하나님에게도 적용을 시키고야 맙니다.

 

예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앉아있는 하나님과 악마. 하나님은 이때... 앞으로 벌어질 인간 세상에서의 각종 비극들 - 순교, 십자군 전쟁, 종교개혁 등- 을 악마와 예수에게 미리 이야기해줍니다. 예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악마조차도 마음이 안좋아졌고, 결국... 악마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게 되지요.  

당신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것이 그렇게 많은 죽음 없이도 땅끝까지 퍼지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자, 당신은 당신을 방해하고 부인하는 모든 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대표하고 관장하는 악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십니다, 따라서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이 나를 당신의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줄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내 과거의 허물은 내가 미래에 저지르지 않을 허물로 씻어내는 걸로 하고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 선택한 천사들 가운데 하나였던 그 행복한 시절처럼 내 복종을 받으실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시절에 당신은 나를 루시퍼라 불렀지요, 빛을 나르는 자라는 뜻으로요, 물론 내 영혼이 당신과 동등해지고자 하는 야망에 사로잡혀 다신에게 반역을 하기 전 일입니다만. …… 당신이 용서를 나에게 내려주시면, 악은 멈출 것이고, 당신의 아들은 죽을 필요가 없고, 당신의 왕국은 히브리인의 땅을 넘어, 현재 알려진,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지구 전체를 끌어안을 정도로 넓어지고, 어디에나 선의가 지배하고, 나는 줄곧 당신에게 충성했던 천사들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서게 될 것이고, 나는 회개했으므로 그들 누구보다 더 충성할 것이고, 나는 당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고, 모든 것이 생기지도 않았던 것처럼 끝이날 것이고, 모든 것이 늘 그랬어야 할 것처럼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이 놀랍고도 대담하며 사뭇 자기희생적이기까지도 한 제안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야말로 이 소설의 백미중의 백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난) 자네를 받아들이지도 용서하지도 않을 거야, 자네가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훨씬 나아,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네가 지금보다 더 나빠졌으면 좋겠어. 왜? 내가 대표하는 선은 자네가 대표하는 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자네 없이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자네가 끝나면 나도 끝나는 거야, 내가 계속 선이려면 자네가 계속 악이 되는게 긴요해, 악마가 악마가 아니면 하나님도 하나님일 수 없는거야."

그의 다른 작품인 「죽음의 중지」에서 '죽음'이 없어진 상황에 대해, 즉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죽지않게 된 상황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존재의 의미'를 잃게될까 걱정하는 곳은 장의업계도 아니고, 사설노인복지지설도 아니라 바로 카톨릭계인걸로 그려지고 있지요.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고, 그렇다면 교회의 존립근거 또한 없어진다라는 이유때문이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존재 근거가 다름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모순적인 경우가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흔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의 정의는 그야말로 '불가침'의 영역으로 전해져왔고, 지금도 그러하거늘 주제 사라마구는 이에대해 이렇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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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이렇듯 자비롭지도 심지어 선하지도 않은 분입니다. 이 분의 목적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지역이 넓어지는 것을 원할 뿐이지요. 결국 소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 하여금 '그 순간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희생 제단에 가는 양처럼 꾐에 빠진 것이다. 그의 생명이 처음부터 죽음을 위해 계획된 것임을 알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읽어본 그의 작품들이 다 그러했듯이 이 작품 또한 소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 자체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혹은 심하다싶을 정도로 뒤틀어놓은, 그러하기에 어쩌면 (이 표현이 맞는 건지는 자신없습니다만) '현실성이 떨어진다'라는 느낌으로부터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읽는 동안에는 잠시의 틈에서조차 쉴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기에, 읽는다라는 것이 매우 힘든 정신적 노동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읽는다라는 것으로부터의 신비스러운 재미를 느끼게도 해준다.'라는 저의 개인적 생각은 이 작품에서도 또한 여전히 유지될 수 있었었지요. 작품의 매우 초반에 등장하는 다음의 문구, 과연 이 문구에서의 '선'과 '악'에 대해, 특히 기독교 신자로서 과연 '절대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과연 어떠한 대답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또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나 스스로 '기독교 신자로서'라는 수식어를 제거해낼 수 있겠는가... 라는 참으로 답해내기 힘든 의문을 가져보게 되었다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시 한번 더 말해) 별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는 이 작품 「예수복음」으로부터 제가 얻게된 지적 소득이 아니었나 싶네요. 여전히 저에겐... No.1의 작가로 남아있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이시라는. 

     

"선과 악은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그 반대의 것이 없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ring books' on <성경>

- 나가오 다케시 著, 유쾌한 성경책 : 정말 '유쾌'하고 쉽기까지 한 '성경은 어떤 책이며, 어떠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입문서.

- 크리스틴 스웬슨 著, 「가장 오래된 교양」​ : 기독교 신자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성경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 신자가 아닌 당신도 어쩌면!!!

- 공병호 著, 「공병호의 성경공부」​ : 신앙이란, 믿음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역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책. 저자의 신앙관에는 (아직은) 동의할 수 없음.
- 칼릴 지브란 著, 「사람의 아들 예수 : '사람의 아들' 예수의 모습을 통해 결국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한 권의 책. 
 
 
  (읽어본) 주제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 :  눈먼 자들의 도시」 ·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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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예수
칼릴 지브란 지음 / 프리윌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꼼수의 멤버인) 김용민이 쓴 책, 「맨 얼굴의 예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인간에게 끝없이 다가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복음서를 갖고 예수를 인간으로부터 끝없이 갈라놓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민중과 한 몸이다. 그런데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교리와 신학을 들이대면서 예수를 자꾸만 신격화해서 민중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초월적인 그리스도로 둔갑시킨다. 그래서 이 땅의 가난한 신자들이 '자기네 자신의 희로애락'과는 무관한 예수를 그들의 구세주로 모시는 서글픈 일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벌어진다.

- 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연구위원의 말​

그 책에는 또한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를 신으로 믿고서야 이해할 수 있다"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이 있기도 하지요. 무언가 일맥상통하는 듯 보이기도 하는,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예수를 말하고 있음 또한 느껴지기도 하는 이러한 차이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성서에 대한 해석이야말로 성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김용민은 그 책에서 자신의 해석으로 예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나는 예수가 능히 빵과 물고기를 십수 광주리 남길 만큼 곱절로 만들어 낼 능력의 소유자라고 믿는다. 그러나 파울루스의 해석처럼, 어린아이가 가져온 음식을 이웃과 나누려는 예수의 모습이 감명 받은 주변의 군중이 자기들도 먹을거리를 풀어 이웃과 나눴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오병이어는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기묘한 남자의 마술쇼가 아닌 수많은 군중이 스승인 예수와 함께 만들어 낸 집단적 사랑의 기적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 그의 사역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시작됐다. 가난하고 병들고 못 배운 자를 모아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로마 제국의 온전성과 완결성이 강조되는 마당에 오히려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언명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행동했나. 들어가자마자 성전을 뒤엎었다. 상인들에게만 뭐라고 한 게 아니다. 그들과 결탁한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보란 듯이 다그쳤다. 예수는 기득권 세력이 두려워하는 혁명가였다. 

…………………………………

(기독교 신자에게는 약간 거부감을 줄지도 모를 제목의) 이 책 「사람의 아들 예수」에는 성서 속 인물들 (가공의 인물로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듯 합니다. 여전히 성경에 대한 저의 지식이 정말로 한심한 수준이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절감했네요. --;;)의 입을 빌어 예수에 관해, 그리고 그의 행적들에 관해 칼릴 지브란의 작가적 상상력을 곁들여져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나올만큼 멋지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인간' 예수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심지어는 제목조차 모르고 있지만 언젠간 꼭 한번 읽어보고싶은) 흡사 '조조'의 관점에서 쓰여진 「삼국지」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 '가버나움의 제사장'이 보는 예수는 그저 "마술사이며 마법사"였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대제사장 안데스'에게도 또한 예수는 "선동자였고 약탈자였으며, 협잡꾼이었고 자기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자"였을 뿐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나사렛의 어느 부자에게 예수는 훌륭한 목수로서, 상인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으로, 약제사의 눈에는 위대한 의사로, 시인에게는 천상의 시인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릅을 탁 칠만큼'이라는 오래된 표현이 딱 들어맞을만큼 재미있었던, 예수를 따라 그의 제자가 된 이의 어머니에게는 '어미와 자식을 생이별 시킨 잔인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책은 물론?/오히려? '육체를 입고 온 계시'로서의 예수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세베데의 아들 요한'은 "거룩한 그리스도였던 예수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함께 하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불리기를 원했"다 말하고 있으며, '여성 제자 라헬'은 "그분의 마음은 포도주 짜는 기계 같아서 우리가 잔을 들고 다가서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사랑을 마실 수 있었"다라고 예수를 기억하고 있지요.

또한 작가는 '바빌론의 천문학자 멜라기'의 입을 빌어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에 대해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기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자연의 법칙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적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도 있습니다. 이처럼 작가는 (함석헌 선생의 표현대로) 「사람의 아들, 예수」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결국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지요.

이 책에 등장하는, 제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던 구절 두 곳을 옮겨 놓는 것으로 이하를 대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상수훈 - 마태> 중 : "스승이시여, 저는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하고 싶을 때는 너희의 바라는 바를 그대로 말로 옮기면 되느니라. 내가 하는 바를 보아라. 내가 지금 바라는 것, 즉 나의 기도는 이것이니라. '땅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시길 바라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부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들을 불쌍이 여기시어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또 저희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어둠속에 빠져 있는 저희에게 손을 내밀어 저희들을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십시오. 모든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오며, 아버지 안에 저희들의 힘과 완성이 있음을 믿사옵니다.'" ---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제야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 막달라 마리아> 중 :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이에요. …… 저는 사람들이 그분의 부활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 거에요. 악기 속에 들어있는 음악을 찾으려고 하프나 수금을 부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머지않아 열매가 맺힐 나무의 열매가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라고 베어 버리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 이제까지의 제 신앙이 바로 이런 것이었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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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에서 작가 칼릴 지브란은 <그로부터 1900년 후 : 레바논에서 온 사람>이라는 제목의 장을 통해 "사람들은 당신이 신(神)이 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고 가냘픈 인간이었다고 말하고, 예배와 찬송을 받이게는 너무 인간적인 신(神)이었다고 말합니다" 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책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칼릴 지브란의 복음서>라는 글을 통해 함석헌 선생은 "현대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만 보고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못 보는 면이 많다"라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 다시 한번 성경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두고 음란한 소설이라 말했던 사람들은 분명, 그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 말했던 저 역시, 이 책 「사람의 아들 예수」의 제목으로부터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다시 한번 더...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예의 「롤리타」를 두고 더 이상은 음란한 내용의 소설이라 생각지 않게 되는 것처럼 이 책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성경에 매우 충실한 책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부족하기만한 제 신앙에... 참으로 깊은 의미를 안겨다 준 독서였었던 이 책의 여러 구절들 중, 가장 감명 깊었었던 부분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며 감상문을 끝맺겠습니다.

 

 

<예수의 희생에 관하여 : 삭게오> 중 : 그분은 얼마든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피해 살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한밤의 이리떼들로부터 자신의 양떼들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분은 마치 농부가 자신이 수확한 곡식을 모아 두었다가 봄에 그것을 뿌러 가을에 수확하기를 바라듯, 또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가장 큰 돌을 모퉁잇돌로 놓듯이 자신의 죽음을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죽인 자는 누구입니까? 로마인들입니까, 아니면 유대의 제사장들입니까?" 로마인들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죄악이 그분을 언덕 위 십자가 고통 위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이 그분의 보혈의 은혜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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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호의 성경 공부 - 성경에서 답을 찾다
공병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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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내려놓고, 선입견을 잠시 접어두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그 안의 글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성경>속 문장들 안에서 놀라운 것들을 찾아내는 독서가 <성경>을 읽는 멋진 방법입니다. ……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성경>에서 그런 흥미진진함과 감동 그리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틈틈이 시간을 내서 …… 그 깊은 뜻이 마음에 퍼져가는 것을 누구든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리트머스 종이에 잉크가 퍼져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사람' --- 경제적 · 정신적 · 육체적 고통을 겪지 않은 기독교 신자를 가리켜 같은 신자들이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또한 저자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이런 사람들은 흔하지 않아보입니다. 그러하기에 주일 예배중에 목사님께서 해주시는 설교도 주로 (지나친 일반화일 여지가 충분히 있는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어려움을 극복해나감에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걸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억하게 해주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다.라는 것의 적나라한 증거라 말해지기를 원치는 않지만) 주일날의 설교가 그러하다하여 불만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저 또한 매우 여러번 목사님의 그러한 설교말씀으로부터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얻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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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또한 그저... 아직!은 제가 저자가 권하는 '편견을 내려놓고, 선입견을 잠시 접어두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엔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저의 신앙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한때는 그런 적이 있었기도 했지만요), '어떠어떠한 상황에 걸맞는 성경의 구절들을 적절히 인용해오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그럴듯하게 섞어내어놓는 타입의 간증'에는 아직!!!도 아무리 해보려해도 동의할 수 없겠노라고, 차라리 '이건 오로지 나의 신앙적 미숙함이 여전히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자책하는 것이 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길인듯 싶기때문이지요. 이 책도 예의 여러가지 상황을 나누어놓고 각각에 알맞는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며 그와 더불어 저자의 생각을 펼쳐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그 각각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것 - 결국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믿고 기다리며 이겨내라'가 전부인 - 이 끝내 저에겐 지극히 추상적으로만 다가오더군요. 왜... 그랬던걸까요?

 

자기 만족을 위해 쓰여지고 출간된 책이 아니라면, 분명 그 책은 타겟으로 삼는 독자층이 있겠지요. 예를 들어 책의 머리말에 이 책은 학부생을 위해 쓰여진 미시경제학책이다라 쓰여있는 책이 있고, 석사과정을 위해 쓰여진 더 어려운 미시경제학책이 있으며, 박사과정에서까지도 뒤적여야만 하는 (환상적인!!!) 미시경제학책이 있듯이 말이죠. 제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의문스러웠던 부분이 바로 '과연 이 책은 누구를 위해 쓰여진 책인가?'라는 점이었었고,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건 '내 수준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책이다, 이 책은 신앙심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니... 이 책을 읽고 제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라는 것이 저자와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제도 모르고 까불며' 이 책을 읽겠다라 맘먹었었던 저의 잘못이었다라는 걸 전제로, '중하'정도 수준의 신자가 '최상'의 신자들을 위해 쓰여진 책을 읽고 쓴 감상문임을 미리 밝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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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디모데후서 3:16-17

 

​저자는 위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믿는 자들에게 <성경>은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에도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매우 충실한/올바른 '해석'이겠지요. 저 또한... '언젠간 나도 꼭 똑같은 고백을 하고 싶어'란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하지만 말이죠...

 

"믿음은 순종입니다. 그런데 순종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구원받는 일도 믿기가 힘듭니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는 길인 성령 충만도 믿기 힘든 일이지요. 실험으로 증명하기 쉽지 않으니까요"까지의 수준으로 넘어가게 되니, 저자의 말에 많은 양보를 곁들여 절반에 가까운 동의를 한다.라 말한다하더라도, 끝끝내 제 마음 속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남아 '절반을 넘는 동의'를 주저하게 만들어 주더군요.

첫 번째는 사실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 사놓고 아직 읽지는 않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계의 창조론자들이 '지적 설계론'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른바 '창조론도 엄연히 과학이다'라는 창조과학을 계속 주장하며 지치지도 않고 그야말로 꾸준하게 진화론을 공격했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그들의 공격에 대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코미디라 생각해왔었었기에 잠자코만 있어왔었습니다만, 어느 순간 '이제 더 이상은 못참겠어!'라는 기류가 진화론의 진영내에 흘렀고, 그리하여 진화론의 여러 분야 대표 학자들이 위와 같은 제목으로 지적설계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을 내게 된거지요. 이처럼 창조론 또한 '과학'이라는 외투를 두르고 싶어합니다. 일단 그런 외양을 띠고 있으면 '믿음'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일은 최소한 아니라는 말을 하게될 수는 있을테니까 말이죠.  

이 책의 저자인 공병호 박사님 또한 이런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으신 듯 보이기도 합니다. '실험으로 증명하기 쉽지 않으니까요'란, 아니붙이셔도 될 구절을 굳이 '믿음'이라는 것에의 설명에 넣고 있으시죠. --- 우리가 실험을 통해 증명해내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론'이라 부르는 것, 그것이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각종 실험들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특정 조건하의 특정 상황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닌, 어느 상황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이론'이 되는 것일테니까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한 가지!!!는 바로 --- "과학의 이론은 나열된 여러 사실들을 설명해 주는 수단이다. …… (그리고) 이론은 특성상 그릇됨만 증명할 수 있고 참임을 증명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즉, 나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실험을 통해 이라고 증명될 수 없다라는 사실은 '과학을 통한 증명'이 원래부터 그럴 수밖엔 없기에 가지게 되는 내재적이고 원천적인 한계이지, 증명의 대상이 '믿음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다'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는 길인 성령 충만도 믿기 힘든 일이지요'라는 표현은 신앙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즉 신앙이란 것이 지극히 개인적/내면적 차원의 문제이기에 그러하다라 말해져야 하는 것이지, 저자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이라는 이름을 꺼내어야만 하는 논리의 부족함으로부터 발생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제 표현력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만) --- 이건 마치 유치원생에게 세상 최고의 게임이론 학자가 'Infinitely repeated games'의 solution을 설명하려했지만 유치원생이 끝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 서로 헤어진 후 그 게임이론 학자는 게임이론 세미나에서 동료들에게 자기가 가르쳤던 유치원생의 지적능력이 심히 의심스럽다 말하며, 그 유치원생 또한 자기네 병아리반 친구들에게 대학교수란 사람이 '게임'하나 제대로 설명도 못하더라라 말하는,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런 상황을 우리가 받아들여야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게 되버리는 거지요. (참... 쓰고나서도 맘에 들지 않는 표현이네요. --;;) 과연 이 책 「공병호의 성경공부」가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라면, 누군가는 (이젠 거의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있는) '공병호'라는 이름으로 인해, 또 누군가는 '성경공부'라는 것을 위해 이 책을 집어들었다 했을 때... '하나님은 항상 우리곁에 계십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세요'라는 말만이 내내 반복되고 있는 이 책으로부터 과연 얼마만큼의 독자들이 자신의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원하던 바를 얻었다라 말할 수 있을지 전... 그게 의심스러웠고,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다는 겁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나의 개인적/내면적 신앙을 타인(비기독교인이건 초보적 수준의 기독교 신자이건)에게도 온전히 전해주고 싶다라 할 때, 과연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를 따질 때, 그렇다면 우리 손에는 '무엇'이 쥐어져 있는 걸까요? 이와 관련하여...

두 번째는 첫 번째와도 관련이 있는, 그리고 저를 동의하지 못하게 만든 매우매우 커다란 이유, 그러니까 --- '믿음은 순종입니다'라는 말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진실/진리, 그 어떤 이름으로든 암튼 제가 '믿는다'라는 것은 제가 피타고라스의 정리에게 복종/순종하게 되었다라거나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패배하였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받아들인다'라는 것일 뿐이지요. 저자 또한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집착하는 신비주의는 경계해야겠지만"이라 말하고 있듯이,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이야기는 사실 당사자인 그 이외의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 생각하고 있는 저 또한 가끔 듣게되는 간증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라는 것이 사실 그다지 미덥지도, 공감이 가지고, 감동을 받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러한 간증들로 초보 신자들/비기독교인들을 신자의 길로 들어서게하려는 그 많은 부흥회라든가 전도집회들이 과연 정말 목적에 적절한 수단인가하는 의구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도 하구요. '세상의 의사들은 다 내가 얼마 못가 죽는다 했지만, 하나님의 은사로 이렇게 아직까지도 건강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멘!!!'이라는 외침보다는 「아빠는 목사, 아들은 동자승」에서 저자와 그 가족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나에게 어떠한 결과가 주어진다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음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만​이 비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부흥회나 전도집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훨씬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해주는 '무엇'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헌데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집착하는 신비주의는 경계해야겠지만"이라는 표현 뒤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 자체에 신비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을 덧붙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저도 동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때때로 '신비스러운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서 받아들이게 해준다라는 것 또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기초에는 분명히 '인간이기에 가동시켜보지 않을 수 없는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라는 걸 (이 연사, 두 주먹쥐고 힘주어!!!) 말하고 싶은겁니다. 이성에 기초한 믿음, 그리고  믿음을 바탕으로하여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 신앙... 이것이 신자들이 가져야할 올바른 믿음이고, 우리가 비기독교인에게 전해야할 믿음이지, 이 책에서 저자가 내내 말하고 있는 (저자에게는 상당히 죄송스러운 표현입니다만)'자기 최면'류의 믿음은 결코 아니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의 내용에 비록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중하'수준밖엔 안되는 신자이기때문에!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절반 이상의 동의를 할 수는 없다는거였지요. 우리의 '이성'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껏 사용하라 선사해주신 선물이 아니라 말할 수는 없겠죠. 만약 교회가 '하나님의 은사로 말미암아 세상이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부터 완치되었다'라는 것을 '무엇'으로 삼아 비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파하고자 한다면, 그래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만 반복해서 말한다라면, 과연 우리의 교회와 저 어릴 적의 길거리 약장사들과 무슨 차이가 있게 됩니까. 이 책이 어떤 층을 타겟으로 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보기에는 너무도 평이한/여기저기서 많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고, 비기독교인들 혹은 저와 같은 수준의 신앙심만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전도/입문서 정도로 쓰여진 것이라면 그 설명의 방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설정되어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겁니다. 이 책이 최소한 공병호 박사님 자신의 자기만족만을 위한 일기장은 아닐테니까말이죠. 

 

커쇼의 이 말이야말로 나의 신앙을 타인에게도 전해주는 가장 올바른 방식이 아닐까요?

(출처 : 엠팍 불펜게시판 중 "커쇼의 신념.jpg")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제가... 매일 아침 ​회사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읽곤하는 성경 구절들입니다. 저 개인적 어려움에 닥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찾게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뭔가 일이 해결되지도 않았건만 제 마음 속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 또한 (제 개인적 경험에 집착하는 신비주의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으나) 사실이었구요. 하지만 '믿음'이란 건... 여기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라는, 듣기에 따라선 매우 조소섞인 비아냥을 상대방으로부터 듣지 않으려면,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서 선물해주신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야하죠. 그저 '믿음은 순종이다'라는 말로 그들/비기독교인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2014년의 현재에도 통할꺼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설교도 '이성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되어야하며, 세상의 물리적 법칙을 어긋나게 하면서까지 발생하는 하나님의 기적은 아마도 이제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을꺼라는 걸, 하지만 그것이 결코 하나님이 그러하실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처럼 로또를 사고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들 모두가 1등에 당첨되는 현실이 벌어질 때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는 거, 그러한 세상의 혼란을 원치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열심히 기도하며 로또를 사는 기독교 신자들도 거의 매주 5,000원짜리에도 당첨되지 못한 로또를 휴지통에 버려야만 한다는 걸, 그건 결코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는 그들의 '끊임없이 간구한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걸, 그러나 그 반대로 당신이 호기심에 샀던 한 장의 로또가 1등에 당첨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또한 온전히 '하나님의 은사'로 돌리는 건 옳지 않은 해석일 수도 있다고... 이젠 우리의 교회도 이런 말들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어야한다고 (이 연사~~ --;;) 생각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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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주저리 많은 말을 했습니다만, 또한 적혀져 있는 글의 내용과 저의 생각을 정확하게 일치시키지 못한 표현이 너무도 많다는 아쉬움도 어마무시하게도 남아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무리를 더하여 딱 한마디!로 정리해보자면, '신앙은 결코 자기최면이 되어서는 안되며, 신앙이라는 개인적/내면적 믿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해주신 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쯤... 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언젠가... 는 꼭! 다시 한번 읽어('보고싶은'이 아닌) 책입니다. 부디... 그때엔 리트머스지에 퍼져있는 잉크처럼, 신앙적으로 훨씬 더 성장해 있는,그리고 좀 더 겸손해져 있는, 제 모습이길 또한 지금부터 바래어 보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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