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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경제학에서 상정하고 있는 인간은 총체적으로 본다면 '합리적'이라는 단 한개의 단어로만 설명되어지고 있지만, 이 '합리적'이란 단어의 경제학적 정의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철저히 계산적인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경제학의 한 분야인 '게임이론'에서 묘사되는 '합리적 인간'은 '합리적임'의 극단에까지 이르러 그야말로 신과 같은 두뇌를 지닌 존재로까지 묘사되고 있기도 하지요. : 갑돌이가 A의 선택을 할지, B의 선택을 할지 갑순이는 알 수 없습니다만(하지만 갑순이는 갑돌이에게 A와 B라는 두 개의 선택이 있다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선택을 하던 일단 갑돌이의 선택이 정해지는 순간, 즉각적으로 갑돌이의 그 선택에 대해 대응하여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갑순이는 이미 완벽하게 계획해놓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 즉 갑순이가 자신의 가능한 모든 선택에 대한 모든 대응책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라는 것과 심지어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갑순이가 내놓게 될 대응책까지도 갑돌이는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알고 있다'의 논리는 무한하게 반복되지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둘이 마주앉아 맞고를 치고 있다고 해보죠. 이때 갑돌이와 갑순이는 각자에게 패가 주어지는 순간 이미 상대방의 패를 (엄밀하게 말하자면 확률분포로서) 다 알게 되며, 그 주어진 패로 선공자인 갑돌이가 초단 또는 고도리를 목표로 정했다라면, 갑돌이가 초단 또는 고도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갑돌이가 초단 또는 고도리의 목표로 설정하는 순간과 동시에 알게된 갑순이의 머릿속에는 슈퍼컴퓨터가 작동하여 갑돌이의 가능한 모든 선택(패)에 대응하는 전략이 순식간에 세워지게 되고 이 사실 자체 - 그러니까 갑돌이가 패를 받자마자 초단이나 고도리를 목표로 해야겠다라 생각하게 되었는데, 갑돌이가 초단이나 고도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라는 걸 갑순이도 이미 알고 있어서 나름의 대응책을 다 강구하여 놓은 상태 - 를 또한 갑돌이가 알고 있고, 또한 여기까지의 이 모든 사실을 갑순이도 알고 있는... 이런 무한 증식의 '알고 있고'의 이야기가 되는겁니다. (더 헷갈리나요? --;;)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 가정의 상황하에서 갑돌이와 갑순이가 내리게 될 결론은 무엇일까요? --- 딱 하나! 그냥 갑돌이는 애초의 목표대로 초단이냐 고도리냐, 둘 중 한가지를 선택해 그에 맞는 패를 내는 것으로 판을 시작할 수밖에는 없는 것 뿐입니다. 물론... 그 판의 결과를 (옆에서 그 맞고판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알 수 없지만) 갑돌이와 갑순이는 (그리고 게임이론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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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직접 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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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인 내 딸이 죽었습니다. 그냥 죽은 게 아니라, 고등학교를 중퇴한 동네 건달같은 사내녀석들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말이죠. 그 건달녀석들은 내 딸을 납치해다가, 마약성분의 약물까지 주사를 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성폭행을 가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장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비디오카메라로 다 찍어 놓기까지 했습니다. 내 딸은 결국 마약 과다투여로 인해 죽게 되었고, 건달녀석들은 내 딸의 시신을 강물에다 버리기까지 했더군요.
나는 비디오테이프에 찍힌 내 딸이 성폭행 당하는 장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범인들을 향한 분노가 조금이라도 식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여러 번 보았으며, 심지어는 그 건달녀석들의 이름과 집 주소까지 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경찰에 알려주기만 하면 그 건달녀석들은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런데 예상되는 그 '법의 처벌'이라는 것이 말이죠!!!
범인을 체포했다고 해도 …… 범인을 만나게 해줄지, 만나게 해주지 않을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재판이 시작되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범인의 죄가 가벼워질 수도 있다. …… 과거의 사건들을 떠올려보니 미성년자들은 이름도 공표되지 않고, 사형에 처해지는 일도 없었다. …… 소년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도, 범죄방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청소년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슬픔과 분노는 반영되지 않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도덕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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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가미네는 두 명의 범인 중 하나인 아쓰야를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살인은 경제학에서 가정되고 있는 '합리적 인간'이 게임이론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미리 계획된' 선택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나가미네의 인생에는 딸이 성폭행당해 죽을 것이라는 예상된 시나리오가 없었었고,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아예 존재하질 않았었으니까요.) 그 시작은 단지... 범인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자신의 분노를 전혀 표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었다는 것 뿐, 그러니까 자신의 증오와 슬픔을 범인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직접 쏟아내고 싶었던 것 뿐이었지만, 그 현실적 결과가 의도되지는 않았던 살인으로 나타나고 만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된 현재 '인간의 이성'은 사형(私形)이란 것에 대해 '하지 말아야할 것'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만, 그러하기에 그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법제도 또한 '죄를 심판할 권리'를 각 개인으로부터 모두 거두어놓고 있습니다만... 현실에서의 인간은 이처럼 항상 '이성'의 지배하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존재라는 걸, 또한 법이라는 제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인간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라는 것을 작가는 이 작품의 스토리 전개에서 핵심적 동인(動因)으로 사용하고 있는겁니다.
아쓰야를 칼로 찔러 죽인 후 (이 순간 이후부터는 '의도되지 않은'이라는 말은 할 수 없는) 나가미네는 아쓰야의 신체를 아주 화끈하게 훼손시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미네의 가슴 속 분노는 식질 않습니다. 그의 극에 달한 분노는 '아쓰야의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이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후회마저 낳게되지요. 이 소설과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영화 <세븐 데이즈>에서도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에게 딸의 엄마는 자신이 직접 그의 죄를 심판합니다. 하지만 그 영화 속 엄마는 '살아 있었을 때 이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나가미네의 후회를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범인을 향해 '살아 있을 때 불에 타 죽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더라'라는 말을 해주며 바로 그렇게... 범인을 산꼼장어 굽듯 불로 태워 죽였지요.
이 작품 「방황하는 칼날」을 읽는 내내... 이처럼 이전에 읽었던 소설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더랬습니다. ---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에서 주인공 유코는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딸을 잃었습니다만, 그녀 또한... 법은 미성년자인 자신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역시 자신이 직접 죄의 심판자로 나서기로 했지요. 하지만 그 두 제자들에 대한 복수를 끝내고 난 후, 그녀는 결국 "모든 기억을 지워주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나가미네 또한 '아쓰야를 죽임으로써 복수가 허무한 일이라는 사실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며 유코와 똑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한 명의 범인이 더 남아있다라는 사실은 나가미네로 하여금 결국...!!!
그래도 그는 또 하나의 짐승을 방치해둘 수 없다. 그것은 에마(딸)에 대한 배신이다. 그녀를 괴롭힌 짐승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잇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는가? 아니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아쓰야와 마찬가지로 가이지도 미성년자이리라.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쩌면 교도소에 가지 않을지 모른다. …… 한 번 생겨난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 가령, 가해자가 갱생한다고 해도 그들에 의해 태어난 '악'은 피해자들의 마음에 영원히 무거운 납덩이처럼 매달려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어진 법은 오직 국가만이 죄의 댓가를 집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지어 놓고 있지만,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용서하느냐'라는 절규에도 나타나 있듯이, 아쓰야를 죽임으로써 분노의 일부분을 해소하기는 했으나 또 다른 범인인 가이지가 만약 경찰에게 그냥 잡혀버리게 된다면 자신이 원치않는 결과, 즉 자신의 나머지 분노를 영영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있어야 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상황하에서 (이미 이성을 잃은) 나가미네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다시 딱 하나밖엔 남지 않게 됩니다. 가이지도 마저 직접 죽여버리는거지요.
물론 나가미네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감당해야할 결말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벌써 도망쳐버린 가이지를 찾아 나서는 나가미네는 경찰에게 미리 자신이 아쓰야를 죽인 범인이며, 이제 자신의 딸을 성폭행하고 죽인 나머지 범인인 가이지도 마저 찾아 죽이겠노라고, 그리고나서 자수하겠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지요. (즉, 자신이 추구하는/원하는 게임의 결과를 게임 참가자 일부에게 아예 미리 공표해버리는 겁니다) 이미 나가미네가 아쓰야를 죽인 범인임을 알고 있었던 경찰은 나가미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상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가미네가 자살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가이지마저 죽이려들 것이라는 거였었지요. 나가미네가 보내온 편지로 인해 이제 모든 등장인물들의 선택이 결정되어 독자들에게도 공표되었습니다. ①가이지는 (나가미네가 대충은 알고 있는) '어디론가' 도망쳤고, ②나가미네는 가이지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사냥총을 들고 그 '어디론가'로 나섰으며, ③경찰은 가이지와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이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신분이 바뀐) 나가미네를 그가 가이지를 죽이기 전에 찾아내야한다는 것이지요.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이들의 이러한 쫒고 쫒기는 과정을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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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세 명의 플레이어가 쫒고 쫒기는 과정들은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마력같은 글은 그 과정 자체도 충분히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만,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왜' 「방황하는 칼날」이라 지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나가미네의 직장 동료, (나가미네가 머물렀던) 펜션의 주인 부녀, 그리고 설문을 통해 나타난 일반 시민들의 생각... 심지어는 경찰 내부에서조차 나가미네의 행동에 대해 '편견 가득한 공감'이 생겨납니다. 이 공감은 또한 저를 포함하여 이 작품을 읽는 독자 거의 모두에게도 똑같이 생겨났을 거라고도 생각되기도 하지요.
사람을 죽였으니까 살인은 살인이지만, 상대는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간입니다. 자기 딸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 어떤 부모가 복수하고 싶지 않겠어요? 나에게도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어서 그런지,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범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편이 이상한 일이지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개인적 감정'에 촛점을 맞추어 사건의 경과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나가미네는 오히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법은 인간의 나약함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부정적 생각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즉,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개인적 원한의 복수'가 아니라 뭔가 좀 더 커다란 그림이 있다는 것이지요.(...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뉴스가 바뀌면 사람들의 관심도 바뀐다. 그러나 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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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팀의 최종목표는 결국 우승입니다. 그것을 위해 일단 이번 경기를 이겨서 16강에 진출해야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8강, 4강... 등의 새로운 목표들을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플레이어들의 목표가 똑같은 상황하에서는 비교적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이 쉽지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경찰이라는 플레이어의 목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며 점차 혼돈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일본에서는 개인적인 복수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라는 법률적 판단만으로부터 시작된 나가미네에의 추적은 아쓰야와 가이지의 과거 행적들이 드러나면서 점차 '법적으로는 인정되고 있지 않으나, 심정적으로는 인정하게되는' 것으로 변질되고, 그러하기에 아쓰야를 죽인 것은 충동적인 살인이었다라는 것으로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으나, 그가 만약 가이지까지 죽이게 된다면 그 '예외적 상황'인 정상참작의 가능성도 완전히 날아가버리기에, 그 가능성의 소멸을 막기위해 나가미네를 쫒는 것으로 다시 한번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말이죠!!! 이 게임에서 경찰이 지켜야 하는 게임의 룰은 전혀 변하질 않습니다.
이번 사건에 관해서 말이야. 우리(경찰)가 할 일은 가이지를 찾아내는 거네. 그래서 에마 양 죽음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나가미네에게서 복수할 기회를 빼앗게 되는 거지.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원한을 불완전한 상태로 봉인하는 걸세.
상사로서 부하 형사들에게 위와 같은 게임의 룰을 다시금 주지시킨 히사쓰카 역시 마음 속으론 애초부터 이 게임의 룰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만, 마지막에 나오는 그의 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자식을 두 눈으로 지켜본 부모에게, 법이 그러니까 참고 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나?"
가이지를 죽이기 위해 드디어 총을 들고 나타난 나가미네, 그리고 그 상황 바로 직전에 경찰에게도 지급된 권총, 하지만 그 권총은 나가미네가 가이지를 향해 사냥총을 쏘지 못하게 할 때에만 사용하라는 상부의 지시... 이때 형사 오리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다음의 생각 또한 경찰이 따라야하는 게임의 룰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가미네가 총을 쏘는 것은 가이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뿐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가미네를 죽여도 어쩔 수 없다. - 이것이 경찰의 입장인 것이다. …… 한마디로 말해서 그 총은 가이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총이다.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짐승만도 못한 그 녀석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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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일본 소년법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그건 그저 소설의 형식일 뿐 정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게임 속에서 우리는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노력하는 것 자체에만 빠져있다 보면 정작 놓치게 되는 보다 근본적인 것, '이 게임의 룰은 과연 정당하고 합당한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가져보게 되는 것 --- 이러한 의문이 없기에 갑돌이와 갑순는 서로가 치게될 맞고판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게임의 룰이 그러하기에'라며 어쩔 수 없이 게임을 시작했었었지만... 정말 그 게임의 룰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과감히 그 판 자체를 뒤엎고 자리를 일어설 수 있어야하지 않겠냐라고... 우리에게 작가가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방황하는 칼날」로 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그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오리베 형사의 독백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감상문을 마치겠습니다. 읽어본 작품도, 아직 사놓고 읽지않은 작품도 많은 이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도키오」를 제외한) 거의 모든작품마다 재미면 재미, 주제면 주제, 뭔가 하나는 확실하게 안겨주시는군요.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우리의 일은 법을 어긴 사람들을 잡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악을 없앤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 그러나 이렇게 해서 악을 없앨 수 있을까? 죄인을 격리한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을 보호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일정 기간 보호받은 죄인들은 세간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죄를 저지른다.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누구에게도 보복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가가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그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로 '악'을 차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
★ More "Food for Thought"
① 원신연 감독 作, 영화 <세븐데이즈> : '死刑을 대신하는 私刑'이라는 이 이상한 문장.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다시한번 더!!!) 참 이상한 공감.
② 다카노 가즈아키 作, 「13계단」 : <세븐데이즈>와는 반대가 되는 '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死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③ 공지영 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死形이란 형벌의 정당성에 대한 감성적 의문부호.
④ 조세희 作, 「뫼비우스의 띠」 :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⑤ 사쿠 다쓰키 作, 「사망 추정시각」 : 사적 복수가 낳게되는 애꿎은 희생자.
⑥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성공한 복수라해도 그것이 아픈 기억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