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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ㅣ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소설을
읽고 '재미있다'라는 표현을 하게되는건 분명히... 개콘을 보고 '재미있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재미있다'이어야한다/일꺼라고 생각합니다.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그저 TV를 바라보기만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재미'와, 나름 정신적 노동을 통해 얻게되는 '재미'는 ('재미'의 quality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엄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이게... 경제학을 배운
이의 두뇌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소설을 읽고 느끼는 재미'라는 것 또한 스토리가
너무너무 재미있다라는 것과 소설이 던져주는
물음 자체가 흥미롭다라는 걸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용의자 X의 헌신」이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스토리 자체가 주는 재미만으로도 그 소설에 흠뻑 빠져들게 해주는 작품들이 있는 반면, 「남아있는 나날」 혹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같은 작품들은 별 특별한 스토리 없이도 '인생이란 결국 무엇이더냐'라는 꽤나 진지한 질문을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스스로 가져보게 만들어주는, 그런 (이것도 재미라 할 수 있다면) 재미를 주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주제로 한 독서는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을 그 최종 목적지로 하여 시작되었었습니다만, 그 중간... 바로
이 책,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의 주제를 알게되니 '어서 빨리 좀 읽어보고 싶은데!'라는 조바심을 정말로
오랫만에 가져보게 되더군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아마 '소설이 던져주는 질문'만 놓고보자면, 이제까지 읽었던 소설들 중 가장!
진지한, 그러나 해답을 선뜻 내릴 수는 없는 그런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
다윗의
실수에는 지체 없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하나님이 지금은 로마가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들에게 주는 수모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이 하나님이 이름이나 권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데도 하나님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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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중
소설은 1930년대
중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33년간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었던 페레이라 주교가 '구멍 매달기'라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결국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보고를 받은 포르투갈 선교회는 결국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페레이라 주교의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과
가르페 신부를 일본으로 파견합니다. (이 작품이 일본인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감안해야할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소설은... 이 장면에서 포르투갈의 가톨릭 교단은 '당시 유럽인의
눈으로 보면 세계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은 나라에서 페레이라가 배교를 강요당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신앙과 사상 면에서 굴욕적인 패배'라는 생각을 가졌었으며, 로드리고 신부와 가르페 신부의 파견을 이러한
불명예를 설욕하기 위한 선교로 간주하고 있었다라 표현하고 있지요.
1857년
히데요시가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래, 일본은 모든 가톨릭 선교사들을 해외로 추방하였으나 37명의 사제가 잠적하여
일본에 남았고, 이들은 일본 관리들의 눈을 피해 여전히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본 관리들에게 붙잡힌 신부들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었으나, 일본 관리들은 결국 그들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데 실패하고 말지요. (이 소설의 스토리와 등장 인물들은 약간의 각색을 거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실제의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 마침내 우네메(일본 관리 이름)는 아무래도 자기가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신부들의 용기와 힘이 더욱 강해지는 듯하여 이들을 개심시키기 전에 운젠(일본의 온천)의 모든 샘과 연못의
바닥이 드러나 버릴 것이라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신부들을 나가사키로 다시 데려가기로 결심했습니다. ……
이런 사실로 우리의 성스러운 교의(敎義)가 오히려 대중의 칭송을
받게 되고 신도들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바로 전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에 등장하는 다음의 장면을 소름끼치도록 재현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제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A라는 나라가 B라는 나라를 식민지로 삼겠다
작정했다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다스렸던 시대가 아마 그 '모범적 사례'로 연구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통치는, 순전히 A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철저함은 기독교를 억압하는 것에도 나타나, '순교'가 불러오는 여파를 알아채고는 이내 곧 '배교'로 정책을 바꾼 그들의 대응속도에는, 여전히 A와
같은 입장에서 보자면 가히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게도 되지요.)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예수에게 순교자의 역할을 요구하지요. 거기에 더해 순교자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하며, 가능하다면 수치스러워야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 형태의 순교야말로 신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퍼뜨리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최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이용할 수 있는 나뭇조각이지. …… 너는 숟가락이 될 거야, 나는 그 숟가락을 인류에게 집어넣어 내가 앞으로 되고자 하는 새로운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가득 떠올리게 될 거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단다. …… 영혼을 구하려면 몸은 희생되어야
한단다."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어쨌든 무사히 일본에 들어갈 수 있었고, 기치지로라는 이의 도움을 받아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어느 한 마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곧 마을 사람들이 가톨릭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 관리들에게 발각되었고, 마을 대표로 끌려간 세 사람은
'성화를 밟고 그 위에 침을 뱉고, 성모는 남자들에게 몸을 맡겨 온 매음녀'라 말하라는 관리들의 명령을 거부한 채, 잔인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끝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어기지 못해, 그렇게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된 거였지요. 이러한
현실 앞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핵심적 질문이기도 한 다음과 같은 인간적 고뇌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 하지만 제가 이 사실을 쓰는 것은 그들이 출발하던 날 아침, 기치치로가 머리를 약간 떨군 채 중얼거리던 그 말이 가슴속에
차츰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 무엇을 위한 순교일까요? 저는 오랫동안 성인전(聖人傳)에 쓰인 그런
순교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돌아갈 때 공중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런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지나치게
꿈꿔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 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모키치도 이치소우도 지금 주님 옆에서 그들보다 먼저 간 많은
일본인 순교자들과 똑같이 영원의 지복을 얻고 있을 것이라고.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비애에 빠진
인간들의 소리에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만 말없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한 그런 느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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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마카오에 머물렀었을 때, 로드리고 신부과 가르페 신부는 그곳에서 기치지로라는 일본인을 소개받았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가톨릭
신도가 아니라고 말했었습니다만, 사실 그는 고문의 협박에 못이겨 배교를 했었던 인물이었지요. 그는 자신 스스로를 약한 자라 말하며 다음과 같이
절규합니다. ---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하지만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 신부님, 그러면 저 같은
겁쟁이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런
기치지로의 외침에 로드리고 신부도 결국엔... "인간을 모두 성자나 영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시대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신도가 배교한다거나 목숨을 던진다거나 할 필요도 없이 은혜받은 그대로 신앙을 계속 지킬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평범한 신도였기 때문에 육체의 공포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 만약 사제라는 자존심이나 의무감이 없다면
저 또한 기치지로와 똑같이 성화를 밟았을지도 모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마는데, 계속되는 일본 신도들의 죽음 앞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인간적 고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커져만 가게 됩니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 농민이 오로지
당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정적이, 이런 고요가 계속되는가? 이 한낮의 고요함. 매미 소리. 이런 어리석고
참혹한 일과는 전혀 관계 없다는 듯이 그분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신부는 그것을 오랫동안 그분이 기도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하였을 뿐 결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쫒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은 환영(幻影)을 계속 뒤쫒은 것인가. ……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런 때마저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까? …… 나는
배교한다. 배교할 테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제
소설은... 이처럼 일본인 신도들의 비참한 최후에도 여전했던 하나님의 침묵이,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는 과연 깨어지게 될까, 또한 로드리고 신부는
정말 결국 배교를 하게 될까하는 의문을 독자로 하여금 가지게 만들어 줍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결국 한때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게 되지요. 예의 페레이라 신부는 이름조차 일본식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가르침과 가톨릭교의 과오와 부정을 폭로하는 책을 쓰고 있다고 일본
관리들은 말합니다. 페레이라는 그에게 일본이란 나라에는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없다라 말하며, 일본에서의 선교를 그만두기를 권하는데, 그렇게
철저히 변해버린 자신의 옛 스승, 페레이라에게 더할나위 없는 실망을 느낀 로드리고 신부는 혼자 감방에 앉아 예수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믿음 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되지요.
그분은
왜 결국은 자신을 배신할 그 사나이를 제자 대열에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유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오랫동안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고 보면 유다는 그분의 영웅적인 십자가를 위해 조종당한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닌가. 게다가... 게다가 만약 그분이 사랑 그 자체라면 최후에는 왜 유다를 쫒아 버린 것일까?
유다가 피밭에서 목을 매달고 영원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가는데도 그는 왜
내버려 두었던 것일까? …… 유다가 피밭에서 목을 달아맸을 때 그리스도는 유다를 위해
기도하셨을까?
이처럼
작가는...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충분히 가져볼 수 있는 의문을, 이제까지의 일생을 기독교 교리에 따라 살아왔었던 가톨릭 신부를 통해
제기함으로써 읽는 이의 종교에 상관없이 똑같은 고민을 해보게 만들어줍니다. 이제 소설은 로드리고 신부 앞에 페레이라를 다시금 등장시킴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주지요. 페레이라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그가 감방에 앉아 있을 때, 참으로 신기하다라 생각했었던 다른 감방에서 들리는
코고는 소리가 사실은 '구멍 매달기'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 신도들의 신음소리였다라는 걸 말해주며, 로드리고 신부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야. ……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 내가 여기서 보내던
밤에는 다섯 사람이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었어. …… 관리는 이렇게 말했지. 당신이 배교하면 저 사람들을 곧 구덩이에서 꺼내 밧줄도 풀어
주고, 약도 주겠다고 말이야. 나는 대답했지. 저 사람들은 왜 배교하지 않느냐고. 관리는 웃으면서 가르쳐 주었어. 그들은 이미 몇 번이나 배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네가 배교하지 않는한 저 농민들을 구할 수 없다. …… 저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고통 대신에 영원히 기쁨을 얻을 수 있겠지요. …… 자네는 그들보다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겠지. 적어도 자기 자신의 구원이 중요한
것일 테지. 자네가 배교하겠다고 말하면 저 사람들을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있어. 고통에서 구원받는 거지. 그런데도 자네는 배교하려고 하지 않고
있어. 자네는 그들을 위해 교회를 배반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야. 나처럼 교회의 오점이 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지. …… 신부인 나는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사랑하라고
가르쳤어.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거야! 그리스도는 배교했을 것이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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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바로 앞에 둔 상황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마음속에 들렸던 '그분'의 목소리는 이러했다... 라고 소설은 쓰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침묵에 대해 묻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주어진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는 대답을 통해 작가는 이 작품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만, 전 개인적으로 이러한 끝맺음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의문
자체가 어쩌면 그 누구도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그러하다면 차라리 「예수복음」에서의 주제 사라마구처럼
"하나님은 몸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신다"라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어쩌면 훨씬 더
솔직한 (결코 위로가 될 수는
없는) 위로가 되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더군요.
물론
이 작품은 신앙을 지켜내는 것의 어려움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참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것에 그 방점이 찍혀 있긴 합니다만... 막상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이 슬픈 현실 앞에서 우리의 간절함 바램관 달리 '기적'은 여전히 생겨나고 있지 않다라는 거, 그렇게 또한
여전히... 하나님은 왜! 지금도 침묵하고만 계신가에 대한 신자로서의 가슴아픈 의문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이 작품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입을 통해 "기도라는 것이 이 지상의 행복이나 요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작가의 대답과는 별개로... 이 책을 읽고나니,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정말로 진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저의 쉽지않은 개인적 상황들에, 대한민국에 닥쳐온 이 엄청난 슬픔에도 또한...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으시다라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일지 사실... 제 신앙으로는 아직 감조차도 전혀 잡지 못하고 있으면서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