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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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전쯤인가... 종원군이 하도 '가족이 다 함께' 이 영화 보는 것을 원한다해 '어쩔 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보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캡틴 어메리카>였었죠. 뭐... 제목부터 뻔합니다. 지구를 정복/파괴하려는 악당들에 맞서 '캡틴 어메리카'라는 인물이 신나게 그들을 무찌르는, 그런 영화일꺼야!라는게 영화 제목에서부터 진동을 하니까요. 대충... 그렇게 예상되었던 뻔한 스토리대로 영화가 흘러 갔었음에도, 이 영화... 정말! 무지하게!!! 엄청!!! 재미있는 겁니다. 저와 조교수 모두... 영화를 보고나와, 이 영화를 보게해주어서 고마워~란 말을 종원군에게 했었었을만큼 말이죠. (이처럼 뻔하디 뻔한 스토리가 계속해서 영화로 만들어지는데도, 관객들이 그에 여지없이 호응하는 걸 보면 역시 헐리웃의 힘은 대단하기만 하죠.)

이런 류의 수많은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종종 영화 비평글들에서 보게 되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마음이 더 큽니다. --- 싸우고 죽이고 하는 일은 분명... 현재로선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나라이며, 현재 이 세상이 (아직까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라는 것 또한 (이에 대한 비판에까지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틀린 사실을 관객들에게 주입시키려는 영화는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사실을 조금 과장하여 그려냈다라는 것까지 비난/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건 너무 가혹하지요. 그러하기에 이런 류의 영화에 대해 '미국 중심의 세계관'을 거론하는 비판보다는 오히려!!! : 악당이 나쁜 짓(이런 류의 영화들은 대부분 이 '나쁜 짓'으로부터 국적을 초월한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만이 공격당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영화 속 전개에서는 미국만이 공격을 당하고 있더라도 결국엔 전 세계를 재패하려는 것이 악당들의 최종 목표임을 내세우고 있지요. 만약 미국만이 오로지 당하는 설정이라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들을 '악당'이라 생각하게 될, 그 '악당'에 맞서 싸우는 미국의 영웅에 온전히 감정이입을 하게 될 개연성은 현저히 떨어질 테니까요. 그것만으로도 혹시 부족할까 하여 거의 대부분, 일단 주인공 쪽을 보편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착한/정당한 인물로 그려내고 있는 영화의 도입부를 우리가 항상 보게되는 것은 일종의 보너스라고나 할까요?)을 하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나쁜 짓을 하기에 악당으로 그려지게 되는 존재), 그 악당을 미국이 물리쳐주니까 우리가 (최소한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악'을 상대하는 자로서의) '미국'이란 나라에 환호성을 질러주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이 '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라는 걸 우리 스스로 (비록 환호성은 질렀을지언정)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은 겁니다. 즉, '악'에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미국'에게는 사뭇 열렬하기까지도 한 응원을 보내지만, '악'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우리가 미국에게 그 열렬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라는 거, 다시 말해 ('악'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기준에서까지도 미국이 '무조건적인, 항상적인 선'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어야 한다는 게 훨씬 더 중요한 포인트라는 거지요. (나를 괴롭히는 깡패 A를 반대파 조직의 깡패 B가 나타나 무찔러 줄 때, 그 깡패 B를 응원하고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는 되겠지만/가지는 건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까지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애초에 A가 나를 괴롭혔었고, 그 순간에 B가 나타나, 어떤 이유에서건, A와 맞서 싸워주었다라는... 이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A와 B는 모두 그저 깡패들로만 인식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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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소설에서 작가는, 주된 스토리의 전개 이전에 그 스토리를 이끌어내어주는 각종 배경들 - 등장인물, 환경, 갈등구조 등등등 - 을 작품의 초반부에 만들어 놓지요. 1968년생 작가답게 박민규는 1969년생인 저의 기억에도 남아있는 요소들을 작품 초반에 대량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 포스트를 읽고 있는 분들 중 이 단어를 들어보지 못한 분들이 분명 있을) '지진아'였었습니다. 같은 반의 지진아들끼리 선생님도 없이 '나머지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때 '정예 지진아'였던 한 친구가 보여준 포르노 잡지를 보는 장면에서... 예의, '작가 박민규표' 표현이 등장하지요. --- "(잡지 속) 여자들은 대개 프리즘을 거쳐 분산된 햇빛처럼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 길고 매끈한 다리의 사이에는 그래서 영롱한 무지개라든지, 그 빛을 받은 찬란한 화초라든지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 썰어놓은 돼지의 간肝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 지진아가 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각 한자의 뜻을 떠나, '지진아'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모욕적인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지진아들은, 뭔가 굴레와도 같은 것으로 엮여져 '육성회비 미납자' 명단에도 또한 대부분 올려져 있었었지요. 만약 지금의 세태에서 그런 단어를 쓴다라면, 혹은 아이들을 그렇게 누구나 알 수 있게 나누어 놓는다면 학부모들은 차치하고라고, 아이들도 또한 그들을 조롱/왕따의 대상으로 삼을 것 같습니다만, 저희 세대때만 해도 '지진아'란 표현이 그저 '공부 좀 못하는 친구'를 일컫는, '선생님들만 자주 쓰는' 한 단어쯤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암튼... 이런 면만 보아도 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현재의 시각으로 이해하려 한다라는 게 자칫 매우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는...)

 

그 당시엔 편을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도 꼭 친구들은 '넌 어떤 편이야?'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나뉘어 대립해 있던 시절이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나라는 남과 북으로, 운동회에선 청군과 백군이, 영화에선 좋은 놈과 나쁜 놈이. …… 소련이 언제 핵을 쏠지 모르고, 북한은 연신 땅굴을 파대는 이 불안한 세계 속에서, …… 정의는 늘 승리했다.

​작가의 표현처럼, 당시의 제가 속한 '우리' (작품 속 배경을 따라 1979년 국민학교 3-4학년)도 항상 '편 가르기'를 했었었고 또 보아왔지만, 그것이 엄밀한 "정의"의 개념에 입각한 편 가르기는 결코 아니었었습니다. '내가 속한 곳'이 곧 '정의의 편'이 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단순한 기준만이 존재했었을 뿐이며,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소련이나 북한의 어린이들에게는 미국과 남한이 곧 '악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었을 것이고, (여전히 '미국과 남한'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그 사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악'으로 보여진다라는 것- 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또 인정할 수 있어야지만이...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비판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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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아가 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포르노 잡지를 함께 보다 선생님에게 걸려,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통지를 받고는, 도저히 그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릴 용기가 없어, 주인공은 결국 자살을 결심했고, 기어이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렸었거늘 …… (사람의 용기가 보여주는 방향성이란게 때론 참으로 신기하지요? 학교에 부모님 모시고 올 용기 대신,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릴 용기를 발휘한다라는 것만 봐도 말이죠) 그때 마침 한국 상공을 날고 있던 슈퍼맨의 눈에 띄어 극적인 구출을 받게 됩니다. 이후 그는 슈퍼맨, 배트맨과 로빈, 원더우먼, 그리고 아쿠아맨 등으로 구성된 '슈퍼특공대(Super Friends' Archive)'의 근거지인 '정의의 본부(Hall of Justice)'로 데려가져 그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지요.  

 

'정의의 본부'에서 잡무부터 시작해 일을 배우게 된 주인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스스로 '나는 더 이상 지진아가 아니었다. 나는 더이상, 한국인이 아니었다'라 생각하게 되며, 결국엔 그 자신도 슈퍼특공대 멤버들과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만!!! --- 미국 유학시절, 기숙사 옆 방에 한국말을 꽤 잘하는, Law School에 재학중이었던 교포2세 친구가 하나 있었었는데 그 친구 왈, 자신의 최종목표는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국말을 꽤 잘한다 해도, 여전히 스물 여덟살!의 제 아내를 '사모님'이라 지칭하는 수준이었었고, 또 한국에서의 법률용어들이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다라는 걸 그 친구가 모르지는 않을텐데... 라는 생각에 '왜 하필이면 한국에서?'란 질문을 그에게 던졌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고, 보너스로 한국어까지 나름 잘할 수 있다해도, 자기는 이 땅에선 여전히 '황인종'이기 때문이라는 당시 그의 대답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지요.

 

"꿈도 꾸지마." 슈퍼맨은 한마디로 나의 얘기를 일축했다. "넌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그럼 미국인이 될 테야." 내가 소리쳤다. "소용없어."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그런다 해도 넌 백인이 아니니까."

주인공은 결국 영웅의 일원으로 승인받게 되고, 미국 시민권까지 받게 됩니다. 비록 그 이유가 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향후를 대비해 영웅의 인종 구성을 미리 다양화 시켜놓을 필요가 있다는 다분히 시혜적이고 노골적인 인종주의의 근거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을 영웅의 일원으로 받아준 다른 영웅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그에게 붙여진, '겉은 노랗지만, 속은 희다'라는 다분히 인종차별적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바나나 맨'이라는 그의 새로운 이름에도 무척이나 만족해 하지요. "이게 현실일까?"라며 감격해 하는 그에게 슈퍼맨이 말해 줍니다. "물론, (이제) 너의 영혼은 백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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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위에 어떤 나라가 생긴다면, 일단은 그 나라를 '정의'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거야. 만약 그러지 못하면, 썩어버리거나 나쁜 무리들의 먹이가 될 게 뻔하니까. …… 그래서 그 모든 나라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거야. 그건 우리의 사과를 상자에 담는 일이고, 그 사과를 썩지않게 보관하는 일이란다. …… 이 지구를 위해서도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란다. …… 이를테면 석유를 생각해보렴. …… 만약 소련이 어떤 나라를 차지해버린다면, …… 그 나라의 자원은 모두 나쁜 일을 하는 데 쓰여 고갈되고 말겠지? '정의'를 위해 쓰여야 할 자원이 나쁜 일을 하는 데 쓰인다는 건 보통 아까운 게 아니지. …… 소련의 가장 나쁜 점이 무엇인지 아니? 더럽고 추잡한 빨갱이들의 사상? 아니, 그건 두번째에 불과해. 뭐니뭐니해도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건 나와 맞먹는 힘을 가지려 드는 것이란다. 그건 정말 위험한 일이지. …… 내가 가진 힘 …… 그건 이 지구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나 외의 존재가 그런 힘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거야. 나라면 안심할 수 있지. 왜? 내가 곧 이 세계의 '정의'니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그리고 아쿠아맨은 각기 다른 모습의 미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정의도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얘기야"라는 슈퍼맨의 말에서도 쉽게 알아챌 수 있지요그 중 슈퍼맨은 힘(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가려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소설의 전체를 통해, 슈퍼맨이 말하고 있는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또한 왜 슈퍼맨이 '정의'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힘에 제일 세다는 것이 곧 '정의'가 되는, 우리는 그런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제까지 살아왔었던 것이며, 그 '힘'의 덕분에 가까스로 이렇게까지 커올 수 있었다라는 사고는 '정의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 왜 미국이 정의인가?'에 대한 의문 자체를 아예 자라날 수 조차 없게 했었다라는 걸 의미라도 하듯 말입니다. --- 크림반도의 분쟁에서도 보여졌듯이, 미국이 말하는 '정의'란 결국/애시당초부터 자국의 이익에 합치되느냐의 문제였었던 겁니다. 그 '자국의 이익'을 위한다라는 것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 결국 석유를 가지고 있는 중동의 문제에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개입했었던 것이며, 베트남전에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정의'라는 명분이 내세워졌던거죠. 소설 속에서 바나나 맨은 별다른 이유 없이 슈퍼맨의 '정의'를 곧 자신의 '정의'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미국의 '정의'를 우리도  똑같이 '정의'로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군복입고 시청앞 광장에 종종 모여드는 할아버지들 같은 분들의) 주장은 "그럼 나도 미국인이 될 테야"라는 바나나 맨의 반응과 전혀 다를 게 없지 않을까요?

'바나나 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같은 영웅의 일원으로 받아졌음에도, '바나나 맨'의 역할은 여전히 간식 심부름이라든지 원더우먼의 탐폰을 사다준다든지 하는 등의 하찮은 것들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 "미국은 대한민국을 '우방'이라 불러줍니다만, 과연...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우방'의 대접을 받고는 있습니까?" 어쩌면 작가는 이 질문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정의'의 개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 그러하기에 '나쁜 무리'들이 왜 '나쁘다'는 건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흰 피부색의 영웅들이 자신을 '바나나 맨'이라 부르고 있음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 그런 주인공을 통해, '사실 너는 약간의 친절에 홀려 그들의 뜻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하는 신세'였다라는 걸, 만화 속 주인공들을 데려다 이야기해주면서 말이죠.

 

바나나 맨 : "우린 친구지?" 

슈퍼맨 : "물론."

바나나맨 :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어?"

슈퍼맨 : "딴 건 필요 없고, 열심히 응원이나 해. 포즈나 확실히 잡아주고 말이야." 

바나나 맨 : "물론, 나의 삶 그 자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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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조추점 직후, 우리가 속한 H조가 사실은 그리 좋은 결과는 아닐 지도 모른다라는 이야기를 친구와 했었더랬습니다. 차라리 같은 조에 브라질 같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 팀 모두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질 것이 쉽게 예상되는, 그렇기에 브라질을 제외한 세 나라에게는 오로지 두 번의 경기 결과만이 중요한, 즉, 집중해야 할 경기의 수가 줄어드는 조의 2위를 노려보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훨씬 더 행운의 결과가 아니겠느냐라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었지요. 

비록 그것이 결국엔 다 자신을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주고, 누군가의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준다라는 건 사실 매우 피곤한 일일겁니다. 이래저래 자신에게 와 신세한탄을 늘어놓으며 좀 도와달라 말하는 자신의 '사과 상자 속 사과'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으니, 듣는 시늉이라도 해주어야만 할 것이고, 가끔은 내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미래의 더 큰 이득을 기대하며 지금 당장에는 내 호주머니에서 적잖은 돈을 끄집어 내기도 해야할... 그런 '정의'의 소유자가 되기보다는, 어쩌면! 그의 '정의'를 그저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댓가로 그의 우산 아래에서, 그의 버팀목에 기대어, 때로는 억지 눈물로 나의 억울함을 과장하여 졸라보기도 할 수 있는, 이건 마치 어차피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16강 정도가 목표인, 운 좋으면 8강까지도 꿈 꿔보기는 하는 실력의 축구팀으로서는, 우승을 당연하게 노리고 있는, 확실한 조 1위팀이 존재하는 조에서 조 2위를 노려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유리한 그런 상황과도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현실적'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마력은 이런거니까... 란 핑계를 꼭 붙여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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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어 길게 씁니다" --- 파스칼이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는 표현이라더군요. 정신적으로 피로하다는 건 저에게 물리적 시간마저도 앗아가는 듯 합니다. 그러했기에 저도 '시간이 없어 길게 썼습니다'라 말하고 싶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요약한다'라는 것이, 저의 생각을 '정리해낸다'라는 것이 저의 능력에는 여기, 이 정도 길이까지 뿐이라는 실토를 할 수 밖엔 없네요. --- 작가의 데뷔작이어서일까요? 초반의 힘찬 전개에 비해, 중반 이후는 횡설수설이라 여겨지는 부분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물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저를 놀라게 해주었던 '박민규표 표현'들이 이 작품에도 적잖게 등장합니다만, 그 호흡이 대단히 짧은 것 또한 사실이지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작가 박민규에게, 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도 또한 그만큼 진화해 왔다라는 말을, 좀 이른 듯한 이 시점에서 미리 해도 되지않을까 싶네요. 아직... 사놓은, 그의 작품이 세 개나 남아 있지만서도.    

 

 (읽어본) 박민규의 다른 작품들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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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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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것을, 또한 그 소설을 읽는다라는 행위를,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느냐 혹은 유희의 일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저 또한 그러했었던) '휴가지에 가지고 가 읽으면 좋을' 류의 한정어를 붙여보게도 됩니다. 물론 작가 혹은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소설을 읽는다라는 행위는 읽는 이에게 유희의 일 수단일 것이기에 그러한 한정어가 '소설'이라는 문학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여전히 '한정어'라는 단어가 안고 있는 의미가 그러하듯, '한정'의 대상/조건이 바뀌게 되면 그 소설의 발하게 되는 의미/값어치가 변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독자 개개인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자의적 가변성'은 분명 그 소설을 쓴 작가에게 때로는 실례가 될 수도, 때로는 엄청난 찬사가 되어 표현되어 질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기는 하겠지요. --- 어떠한 작품이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이라는,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또한 이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 수 없을 수식어를 받는다라는 건 어쩌면... 그 작품이 이러한 '자의적 가변성'이라는 변덕스러움까지도 무색하게 만들었다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이러한 생각하에서 보자면, 이 작품 「노인과 바다」는 아마도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많은 것들 - 감동, 교훈, 다짐, 혹은 그 이외의 무엇이건 - 을 안겨주는,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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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비평가들은 나의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아는 한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나중에 나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 출판되자 미국의 한 문학 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나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 농담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이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밍웨이도 아는 영어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았나보군요."

- 위화 著,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중​

위화의 이 농담을 읽었을 당시만해도, 헤밍웨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질 않았던 때였습니다...만, 이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읽고 나니, 위화의 이 농담에 그야말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공감을 하게만 됩니다. 「롤리타」에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언어의 유희라든가, 「금각사」에서 읽었었던 인간 내면의 심리 묘사, 혹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인간 감정의 마지막 한 가닥까지 발기발기 찢어내버리는/릴 듯한' 세세함 등은 최소한 이 작품 「노인과 바다」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발견한 아마도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 상황의 전달이나 행동의 묘사가 아닌, 뭔가 '글쓰는 작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을 꺼 같아!로 보이는 표현은 "해조가 잔잔한 파도에 너울거리며 흔들거리는 모습은 마치 바다가 누런 담요 아래에서 뭔가와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라는 단 한 구절일 뿐이었으니까요.

화려한 서술도 없고, 세세한 묘사도 없다면... 그렇다면 이 유명한 소설은 교장 선생님의 훈시같은, 지독한 무미건조함 속에서 독자가 어렵게 의미를 끄집어 내야만 하는, 그런 쉽지 않은 작품일까요? ---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님이 하셨다.라 전해지는, "자고로 경제학 박사라면 길 위의 걸인에게도 최신의 경제학 이론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표현 자체가 완벽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오해의 여지도 없길 바랍니다.) --- 헤밍웨이 '선생님'이야 말로 ​이 표현의 참뜻을 진정으로 구현해 내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관 없는 환경인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들의 인생!... 을 이야기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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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처음 사십 일 동안은 소년이 함께 있었다. …… 소년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로 옮겨 타게 되었는데, 그 배는 첫 주에 큼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다. 소년은 날마다 노인이 빈 배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때... 는 화려했었던 시절을 보내었던 노인이지만, 현재 그가 처하고 있는 현실은 이처럼 암울하기만 합니다. '제 3자'인 소년의 부모는 노인에게는 '운이 다했다'라 생각하였으며, 여전히 노인을 좋아하며 믿고 따르는 소년마저도 노인을 향해 '가슴이 아팠다'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노인 자신에게는 여전히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미풍이 불어올 때처럼 희망과 자신감이 새롭게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이미 늙었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조각배와 보잘 것 없는 낚시 도구들 뿐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노인에게는 현재의 불행, 그리고 그 불행을 초래한 가까운 과거들까지도 희망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것으로 해석해낼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지난 84일간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그지만, 그 84일째 저녁에 "85는 재수 좋은 숫자란다. …… 우리 끝자리가 85인 복권 한 장을 사두면 어떻겠니? 내일이면 바로 팔십오 일째가 되는 날이거든"이란 말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었던지요. (누군가는 아마... 이 노인의 말을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는 '복권이나 사볼까?'로 해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작품 내내 흐르고 있는 건 분명... 노인의 낙관적이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 자세이기에, 그런 해석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도 싶네요.)  

바지 속에 신문을 넣고 둘둘 말아 그것을 베개로 삼았다. 담요를 몸에 둘둘 감고 침대 스프링을 덮고 있던 또 다른 헌 신문지 위에서 잠을 잤다. 노인은 곧 잠이 들었고, 아직 소년이었을 시절에 본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꾸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긴 해변과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해안선, 그리고 드높은 갑岬과 우뚝 솟은 커다란 갈색 산들이 꿈에 나타났다. 요즘은 들어 그는 매일 밤마다 꿈속에서 이 해안가를 따라 살았고, 꿈속에서 파도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파도를 헤치며 다가오는 원주민들의 배들을 보았다.

​노인에게는 투망도 없었고,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노란 쌀밥도, 생선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베고 잘 베개도 없으며, 헌 신문지 위에서 자야만 할 정도로... 그야말로 그에게는 가진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상황입니다. 이러한 불안/불행한 현실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찬란했던 과거'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지요. (카위의 「이방인」을 옮긴 역자 이정서는 카뮈가 '「이방인」에 나오는 모든 구절들'이 결국엔 서로서로 연결이 되도록 써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만, 카뮈의 연결고리를 매우 초라하게 만들어 버릴 만큼,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전체적인 상황의 전개에 따라 노인의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 예를 들어 초반에 등장하는 이 구절, 노인이 떠올려보는 '찬란했던 과거'가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 그때 그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일면 무미건조할 수 있는 전체 줄거리를 살찌워주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다시 노인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85일째의 낚시를 떠납니다. 그것도 아주 이른 새벽에, 머나먼 바다를 향해서! 말이죠. 

위화의​ 「형제」처럼 주인공의 일생 전체를 보여주는 작품에서 대단함을 느낄 수도 있겠고, 반면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처럼 지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사실 별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85일째, 그렇게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떠난 노인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고기 한 마리가 잡히게 되고, 그 고기와 사흘간에 걸친 사투 끝에 결국 '내 것'으로 만들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향해 돌아간다는 내용이 그 전부인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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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그것도 조그마한 조각배로는 자신의 낚시줄에 걸린 커다란 고기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노인은 부모의 강요로 인해 다른 배를 타야만 했던 소년을 떠올리며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이란 말을 여러 번 내뱉지요. 그 바램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맛없는 생선을 날로 먹을 때에 이르러서는 "지금 그 애가 내 곁에 있고, 또 소금이 조금 있으면 좋으련만"으로 확장됩니다. ​--- 이처럼 변화해가는 노인의 '바램'이야말로 이 소설을 읽어가는 데 있어, 매우 집중해서 잡아내야 하는 한 요소라 생각하는데, 바다에 나온지 이틀 째 밤이 다가오자, 노인의 바램에는 이제... "상어만 오지 않는다면"이 또 하나 더해지게도 되지요. 

 

 

만새기라는 생선을 날로 먹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노인은 "만새기는 제대로 요리해서 먹으면 정말 맛있는 생선이지. 하지만 날로 먹으니 정말 맛대가리가 없군. 이 다음에 배를 탈 때에는 꼭 소금이나 라임을 갖고 타야겠는걸"이라 말합니다. 이는 단지 현실에 불만족하며 더 많은 '바램'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조건의 상황하에서도 노인은 여전히 '미래'를 그려내고 있었었으며, 암울한 현실조차 상상을 통해 나름 긍정적으로 계속 해석해나가고 있는 거지요!!! ​

결국 ​거의 나흘에 걸친 사투 끝에 고기를 '내 것'으로 만들었지만, 너무도 큰 크기 때문에 배 위로 올리지 못하고, 그저 배 옆에 매달고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란 오래가지 않는 법"이란 노인의 말처럼, 이내 상어 떼의 습격을 받게 되었고,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걸"이라 말하는 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상어 떼의 습격을 간신히/어쨌든 물리쳐 내긴합니다. 물론... 상어 떼의 습격이 지나갈 때마다 배 옆에 매달려 있는 고기의 살점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말이죠.

상어 두 마리 중 첫 번째 놈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외침 소리는 다른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한 개인이 느끼게 되는 '절망'이란 건, 정말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던 구절이었습니다. '이 외침 소리는 다른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 내가 느끼는 절망이란 이처럼 '다른 어떤 말로 옮겨 놓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걸"이란 노인의 바램에 이제는 아예!!! "이 고기를 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이라는 것으로 변하여 갔으며, 몰려드는 상어 떼를 물리치다가 가지고 있던 칼마저 무디어지자, 결국 "숫돌을 가지고 올걸 그랬어"라는 또 하나의 '바램'을 추가하게 됩니다.

만약!!! 소설 속 노인이 이처럼 현실에 대해 연신 불평을 쏟아내기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는 이처럼 유명한 작품의 주인공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 그를 이처럼 유명한 작품 속 주인공으로,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원맨쇼'와도 같은 위치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던 건 다름아닌... 이러한 '바램의 추가'가 노인이 현실을 향해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이라, (다시 한번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하지만 이 늙은이야, 넌 그것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잖아. 지금은 갖고 오지 않은 물건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 갖고 있는 물건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라는 스스로를 향한 자책을 보여줌으로써, 이제까지 연신 추가되어왔기만 했던 노인의 '바램'들이 결코!!! '현실에의 부정'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 모든 건 결국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주는 것들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럼에도... 노인에게 닥치는 시련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한 마리면 한 사람이 한겨울 내내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 그런 생각은 집어치워. 이젠 그저 휴식을 취하면서 남은 고기를 지킬 수 있도록 손이나 제대로 풀어 두도록 해'라 나름 현실에 순응해가는 노인에게 또 다른 상어 떼가 나타났고, 이번엔 그가 가진 거의 마지막 무기였었던 칼의 칼날마저 부러져 버리고 맙니다. 이제... 노인에게 남은, 상어를 대적할 수 있는 무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자꾸만 반복하여 사용하게만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도 노 두 개에 키 손잡이와 짤막한 몽둥이가 한 개 있어"라며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지요. --- '희망'이란 건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란다!라 마치 작가가 저에게 말해주고 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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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상어 놈들한테 완전히 지고 말았구나,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이제 너무 늙어서 몽둥이로 상어를 때려죽일 만한 힘도 없어. 그렇지만 내게 노와 짤막한 몽둥이와 키 손잡이가 있는 한 끝까지 싸워 볼 테다. …… 한밤중에 상어 놈들이 다시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놈들과 싸우는 거지.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 그가 말했다. …… 고기는 반밖에 남지 않았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운이 있으면, 어쩌면 앞쪽 반만이라도 가져갈 수 있겠지. 내게도 조금쯤은 운이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럴 리 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너무 멀리까지 나왔을 때 너는 이미 운수를 망쳐 버리고 만 거야. 

……………………………

​"행운을 파는 곳이 있다면 조금 사고 싶군.' 그가 말했다. 하지만 뭣으로 사지?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잃어버린 작살과 부러진 칼과 부상당한 이 손으로 그걸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넌 바다에서 보낸 여든 날하고도 나흘로 그것을 사려고 했어. 상대방도 네게 그걸 거의 팔아 줄 듯했잖아." …… 하늘에 훤한 불빛이 나타나면 좋을 텐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바라는 게 너무 많구나. 하지만 지금 당장 절실히 바라는 건 그 훤한 불빛을 바라보는 거야.

물론... 노인은 지쳤습니다. 육체적으로도, 또한 정신적으로도 그는 너무도 많이 지쳐버렸지요. 드디어 그의 눈에 저 멀리 있는 아바나 시의 불빛이 보였음에도, 여전히 꼬박 하루밤을 더 가야만 한다라는 사실 앞에서 노인은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 "제발 또다시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희망은 꺾이기만 하는 것일까요? 꺾이기 때문에 그것은 (꺾이기 이전까지는) '희망"이라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바나 항구를 향해 돌아가는 그 마지막 밤에도 예의 상어 떼들의 공격은 이어졌고, 이제 고기의 살은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 누군가 식탁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라도 하듯 한밤중에도 상어 떼가 고기잔해에 덤벼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상어 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키 잡는 일에만 집중했다. 뱃전에 달린 무거운 짐이 없어진 배가 얼마나 가볍고도 순조롭게 바다 위를 미끄러지드 달리는지만 느낄 뿐이었다.  …… 배에는 이상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키 손잡이 말고는 전혀 피해가 없어. 손잡이 같은 거야 쉽게 갈아 끼울 수 있지.

'뱃전에 달린 무거운 짐이 없어진 배가' --- 과연... 노인에게 그 커다란 물고기는 희망의 상징이었을까요, 아니면 항해(인생)에의 짐이었던 것일까요? 지난 나흘 간에 걸친 사투가 그야말로 아무런 소득도 없게 된 이 순간에도 노인은 '배에는 이상이 없구나 …… 손잡이 같은 거야 쉽게 갈이 끼울 수 있지' 라는 말로 또 다른 희망을 가져보고 있습니다.

노인이 그토록 힘든 사투를 벌이고도,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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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내 좋은 친구거든. 침대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란 좋은 물건이지. 녹초가 되었을 때 그렇게도 편안하게 해 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물건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지. 헌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녹초가 되고 나서야 새삼 깨닫게 되는 침대의 안락함과 소중함. '다만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라는, 노인을 그렇게 녹초로 만들어버렸던 원인. --- 나 자신의 '이상 실현'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었고, 나는 다만, 나는 단지, 나는 오로지!!! 내 가족만을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해 가며 일을 하고 있는거지... 라 말하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헤밍웨이가 전해주는 그야말로 '보석같은'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가족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일을 하고 있다지만, 실제 나는 그로 인해 그 '위함의 대상'인 가족들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이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음으로부터 받게되는 삶의 고통을 결국 난... (침대로 표현되고 있는) 내 '가족'으로부터 치유받게 된다라는, 누구나 알고 있다 말하는 이 간단한 진리를 이 별 것 아닌 스토리를 통해 작가가, 이 별 것 아닌 스토리를 읽어본 독자라면 결코 잊을 수 없도록 마음 속에 새겨주고 있다라는 거, 이것이 바로!!! 작가 헤밍웨이와 그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게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이라는 수식어를 아니붙일 수 없게 만들어주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채,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배에 매달려 있는 생선을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항구에 묶여 있는 그의 배를 본 마을 사람들이, 그 배에 매달려 있는 고기의 뼈를 보고 그 엄청난 크기에 다들 무척이나 놀라지요. 과연... 그 물고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토록... 저주를 퍼부었던, 노인을 괴롭혔고, 배를 제외한 노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상어 떼들. 그 상어 떼들로부터 지켜내려 했던 노인의 그 고기는... 다름아닌 똑같은 상어였었던 겁니다. --- "상어가 저토록 잘생기고 멋진 꼬리를 달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라는 이 마지막 문장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또 '불행/고통'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가짐만이 다를 뿐인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작가의 또 하나의 교훈이... 책을 덮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를 감동시켜주더군요. 

문득... 며칠 전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삶'과 '옳다고 보여지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타인의 삶' 중 과연... 내가 나의 아이에게 권해줄 만한/권해야 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더랬지요. 연신 닥치는 고난을 그래도 꿋꿋이 이겨내고 있는 노인의 삶과, 행운인지 실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노인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다른 어부들의 삶 중 과연... 우리는 어떤 삶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될까요? --- 당연!히 노인의 삶은 아닐겁니다. 노인의 삶은 그저... 우리에게 '교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아질 뿐이니까요. : 저는 과연... 어떠한 삶을 제 아이에게 권해주게 될른지 아직은 궁금증... 으로만 남아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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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년하고도 4개월 전, 사이판에 갔었을 때 찍었던 사진들입니다. :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이처럼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건데, 내가 잡은 물고기가 넉넉치 못하다면 발벗고 나서서 다른 물고기들을 충분히 먹을 수 있을만큼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물고기들을 이렇게 회쳐주고 구워주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잔뜩 있는데... 세상에 불만 가질 것이 뭐가 있으며, 그 노인은 순전히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얼핏이나마 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게... 그저 즐겁지만은 않은거구나, 너무도 힘들고,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구나... 를 느끼게 되는 저의 요즈음.이 이 작품을 읽고 느끼게 된 제 감동을 더더욱 크게 만들어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삶이란 게 즐겁기만 할 때'에도, 또한 '삶이란 게 너무도 나를 지치게 할 때'에도 여전히... 제 머릿속에 커다랗게 남아 있게 되리라 믿게 됩니다.    

 

"너는 지쳐 있단 말이야. 속속들이 지치고 만 거야." --- 역경의 상황에서 노인이 스스로를 위로했던 이 말. :  저 또한... 지금의 제가 그저 지쳐 있는 것 뿐이라고, 그것도 속속들이 지쳐 있을 뿐인거라고... 그렇게 저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비록 이래저래 고민 많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만, 노인에게 '배'가 남았고, 그에게 '침대'가 있었었듯이, 제게도 또한, 어쩌면 제게는 더욱! 많은 것들이, 그리고 소중한 가족이 여전히 남아 있다라는 거. 제 마음 속에... 꼭꼭 새겨두면서 말이죠. 

 

(엄청난 분량의 <작품 해설>이 말미에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그저... 제가 읽고, 제가 받은 느낌을 살려놓고 싶어 읽지는 않았습니다. 추후 그 부분까지 읽게 된다면, 이 글에 추가/변경될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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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각에 유별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일체감을 느끼던 미조구치가, 성장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현실에 접근하여 할 때면 금각의 방해를 받게 되고, 이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미조구치는 결국 금각을 불태우고 만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 <작품 해설> 중

위의 한 문장이, 이 작품의 스토리를 모두 표현해 내고 있는, 그렇게 매우매우 간단한 줄거리의 소설입니다. 여러 번 언급했었었기도 한, 한 편의 소설을 놓고 그 소설의 스토리가 중요하냐, 아니면 그 스토리를 빌어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중요하느냐의 구분을,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떠올려 봅니다만, 이 작품 「금각사」를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굳이 둘 중 하나의 편으로 구분하라 한다면 당연히 후자의 작품으로 간주되겠습니다만, 그렇게만 분류해버린다는 게 상당한 아쉬움을 남겨주는 것이 틀림없는, 이 작품은 그렇게, 뭔가 어떠한 표현으로도 규정지어내기 힘든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 작품에서 보여지고 있는 인간 내면에 대한 묘사들이야말로 이 작품을 읽으며 '엄.청.나.다.'라는 말을 저절로 내뱉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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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조구치는 태어날 때부터 말더듬이였고, 그러한 선천적 장애는 그를 내성적인 성격의 남자로 자라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 자! 저의 표현 능력은 여기까지 입니다. 그렇다면 미시마 유키오의 표현을 보실까요?

​말더듬 증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와 외계外界와의 사이에 하나의 장애로 작용하였다. 첫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첫 발음이, 나의 내계와 외계 사이를 가로막는 문의 자물쇠와도 같은 것이었으나, 자물쇠가 순순히 열린 적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은 자유로이 말을 구사함으로써, 내계와 외계 사이에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해 둘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자물쇠가 녹슬어 버린 것이다. …… 말더듬이가 첫 마디를 소리내기 위해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 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도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 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 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내가 애써서 간신히 외계에 도달하여 보아도, 언젠가 그곳에는 순식간에 변색되어 어긋나 버린 …… 더구나 그것만이 나에게 어울릴 듯이 여겨지는, 신선하지 못한 현실, 거지반 썩은 냄새를 풍기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작품의 줄거리가 간단하다는 사실은 결국... 독자에게 주인공의 행위, 즉 금각을 방화했던 그 행위의 원인이 무엇이었느냐를 작품 전체를 통해 이해해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작가는 지독히도 치밀한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그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헌데... 그 실마리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내는 것이 저에게는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것을 도와주는, 이 책의 말미에 실려있는 <작품 해설>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작품 해설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이게 뭐야!'라는 평가를 한다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이기도 하는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 주인공이 자신 스스로를 표현하는 문장입니다만, 또한...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은 다음의 구절을, 그러하기에 가벼이 보아서는 안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게도 되지요.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 갔다. 마치 돼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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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주인공 미조구치가 중학생이었을 때,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연상의 여인 우이코를 짝사랑했었더랬습니다만, 그의 볼품없는 외모는 결국 우이코로부터 차가운 외면을 받게 만들었지요. 미조구치는 그 수치심에 우이코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 생각하게 됩니다. --- 내 수치의 입회인이 없어져 버리기를 바랐다. 증인만 없다면, 지상에서 수치는 근절되리라. 타인은 모두 증인이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수치라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 군 병원의 간호사였던 우이코는 한 병사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임신을 하게 되어 병원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를 사랑했던 그 병사가 탈영을 해 마을에 숨어지내게 되었고, 그를 잡으러 온 헌병들에게 결국... 우이코는 그 병사가 숨어 있는 은신처를 말하게 됩니다. 그 '배신'의 순간에 미조구치는 신기하게도 자신만의 미美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되지요. --- 나는 우이코의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그녀의 생애에 있어서도, 그것을 보고 있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도 다시는 없으리라고 확신하였다. …… 우이코의 배신이라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아름다움이 나를 도취시켰다.

 그 지역 사찰의 주지였던 미조구치의 아버지는 미조구치에게 또 하나의 미美​의 대상을 심어줍니다. 바로 '금각사'라는 절이었지요.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훗날 미조구치로 하여금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을 보아도 마음 속으로,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형용하기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었었으며, 그 세뇌와도 같았던 아버지의 말로부터, 금각을 처음으로 대면하기 바로 직전의 심리를 통해 보여지듯, 미노구치는 또 하나의 자신만의 미美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 아직 본 적도 없는 금각에 드디어 접할 순간이 다가옴에 따라, 내 마음에는 주저가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금각은 아름다워야만 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금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금각의 미를 상상할 수 있는 내 마음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금각은 미조구치의 상상속 모습과는 달리 그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미美라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라고까지 생각했었던 미조구치였었습니다만, 다시 금각이라는 현실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 온 그는 '현실로부터 벗어났다'라는 이유로 다시금 금각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품게 되지요. --- 그토록 실망을 주었던 금각도 …… 어느덧, 보기 전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금각이 되었다. …… 몽상에 의하여 성장한 것이 일단 현실의 수정을 거쳐, 오히려 몽상을 자극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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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의 아버지는 자신의 선당 시절 친구였었던 금각사의 주지에게 미조구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죽었고, 그렇게 미조구치의 금각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지요. 금각사에서 만나게 된 동갑내기 부잣집 아들 쓰루카와의 잘생긴 외모를 보며 미조구치는 그가 금각을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금각으로 상징되는 미노구치의 인식 속 미美는 어느덧, 자신의 외모와 대비되는 것으로 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 나는 언제부터인지 금각에의 집념을, 오로지 자신의 추한 모습 탓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제 소설은 ①과 ②에서 나타나 있는, 우이코과 금각으로 상징되어지는 두 가지의 '미美에 대한 관점'을 배경으로 그가 왜 그 금각을 불태우게 되었느냐/불태울 수 밖에 없었느냐를 설명해 가게 됩니다.

대학생이 된 미조구치에게 금각은 이렇듯 실재하는 건물, 그 이상의 의미로 각인되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기억 속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우이코의 모습이 그 금각과 더불어 그의 본능까지를 제어하게되지요. --- 나는 서서히 손을 여자의 옷자락에 밀어넣었다. 그때 금각이 나타났다. 위엄으로 가득한, 우울하고 섬세한 건축, 벗겨진 금박을 여기저기에 남긴 호사의 주검과도 같은 건축, 가까운가 싶으면 멀고, 친하면서도 소원하고 불가사의한 거리에, 언제나 선명하게 솟아 있는 그 금각이 나타난 것이다. --- 미조구치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금각의 의미에 또 하나의 인물이 추가됩니다. 바로 금각사의 주지였지요. 이전까지 금각의 의미가 '미美적 관점'이었다면, 주지에게 투영된 이미지는 '아무리 눈길을 피하려 해도 그곳에 존재하는, 기괴한 성城처럼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미조구치 스스로 주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애증愛憎의 어느 면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기괴한 성'의 이미지였었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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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는 …… 미적인 건 이미 나에게는 원수야."

"언젠가 반드시 너를 지배할 테다. 두 번 다시 방해하지 못하도록,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다!"

 

제가 꼽아본 이 작품의 핵심적인 문구입니다. 자신의 본능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금각을, '아름다움'의 절대적 상징이었던 그 금각이 결국 미조구치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렸으며, 그 극복의 방법으로 그는 금각을 불태워버리기로 한거지요.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명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금각을 불태운다면 ……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에 연못가에 계속하여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리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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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가 금각에 방화를 저지르게 된 것은 결국, '우이코와 금각'이라는, 자신을 지배해왔던 두 개의 환영幻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이 감상문만을 읽어서는 방화라는 행위로 나타난 '결과를 이끌어 낸 원인'의 개연성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또한 이 소설을 다 읽어낸 저 스스로조차도 그 개연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을 읽고는, 만약 그가 작정하고 살인 사건을 계획한다면, 그렇다면... 과연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잡아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이 작품 「금각사」를 읽고는, 설혹 매우 잘못된 행위일지라도, 혹은 전혀 인과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두 가지의 사건일지라도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그 행동의 정당성을, 그 두 사건을 인과관계를 지니는 원인과 결과로 맺어놓는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또한!!! 이 작품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를 떠올리게도 해주기도 했는데, 마침표와 쉼표 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그마저도 지극히 절제하고 있는 그와는 달리 미시마 유키오는 수도 없이 사용하는 쉼표를 통해, 문장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카톨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미시마 유키오는 불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된 차이점 또한 두 작가를 의미있게 연결시켜 주기도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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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열 페이지정도를 읽고나서, '이 소설은 어쩌면 이제껏 내가 읽었던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나는 어쩌면 이 소설의 감상문을 써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쓴다면... 이제껏 썼던 그 어느 감상문도다 훨씬 긴 것이 될 것 같다.'라는 느낌을 가졌더랬습니다...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띄엄띄엄, 긴 시간에 걸쳐 읽어낼 수 밖에 없었다라는 사실이 이 작품의 감동을 많이 반감시켜 주었으며, 결국 어찌어찌 써내고야만 이 감상문 또한 그리 맘에 들지도 않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작가의 표현력에 놀라게 되는 경험을 이전에도 적잖이 했었습니다만, 이 작품 「금각사」에서의 놀라움은 이전의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차원의 놀라움이었다라는 겁니다. 전후의 문맥을 떠나서도 제가 받았던 그 놀라움들이 전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저에게 유별난 짜릿함을 안겨주었던, 위에서 인용하지 않았던, 몇몇 표현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감상문을 끝맺겠습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작품에서도 분명, 그의 작품들에서와는 또 다른 '읽어가는 재미'를 느끼며 공감하지 않을까도 싶네요.

 

그때 갑자기, 열세 살인 내가 뜨고 있는 눈은, 크고 따듯한 물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두 손바닥이 등뒤로부터 뻗어나와 내 눈을 가린 것이었다. 지금도 그 손바닥의 기억은 살아 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손바닥. 등뒤에서 넘어와, 내가 보고 있던 지옥을 순식간에 그 눈으로부터 뒤덮어 가려 버린 손바닥. 타계他界의 손바닥. 사랑인지, 비애인지, 굴욕 때문이지는 모르나, 내가 접하고 있던 끔찍한 세계를 순식간에 중단시키고, 어둠 속에 묻어 버렸던 손바닥. 나는 그 손바닥 속에서 가볍게 끄덕였다. 양해와 합의가, 내 자그마한 얼굴의 끄덕임으로 즉시 전하여지자, 아버지의 손바닥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손바닥이 명령하는 대로, 손바닥이 치워진 다음에도, 불면의 아침이 밝아 와어 눈꺼풀이 눈부신 햇살을 통과시킬 때까지, 완고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안짱다리는 애당초 내가 처해 있는 조건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고 있었다. …… 앉아 있는 가시와기는, 걷고 있을 때와는 달리, 남들과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일종의 험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육체적 불구자는 미모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불구자도 미모의 여자도,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지치고, 보여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질려서, 궁지에 몰린 끝에, 존재 그 자체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꼽아보는 이 작품 최고의 구절.)

이러한 내가, 친구들처럼 몸파는 여자를 상대로 동정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지. 왜냐 하면, 몸파는 여자들은 손님을 사랑해서 받는 것이 아니거든. 노인이건, 거지건, 애꾸눈이건, 미남이건, 모른다면 문둥이라도 손님으로 받겠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평등성에 안심하고 첫 여자를 사겠지. 사지가 멀쩡한 사내와 내가, 같은 자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고, 그건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자기 모독으로 여겨졌거든. 내가 안짱다리라는 조건이 간과되고 무시된다면,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는, 네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포에 나도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 내 조건을 전적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인간보다 몇 배나 호화스러운 구상이 필요할 테니까. 인생은 하여간에 그런 식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지.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 인간의 심리 묘사가 압권인 소설들.

-  주제 사라마구 作,눈먼 자들의 도시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作, 「라쇼몽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作, 「 롤리타

-  알렉산드르 솔제티친 作,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가즈오 이시구로 作, 「 남아있는 나날

-  제인 오스틴 作, 「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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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나다
김형민 지음 / 집사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제 장인 어른과 '유치원-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직장'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의 반평생을 같은 길을 걸어오신 친구분이 계십니다. 그렇게 반평생도 모자라, 직장에서조차 같이 진급 트랙을 거치셨었고, 결국엔 같은 자리에서 정년퇴임하신... 그야말로 한평생을 함께 걸어온 두 분의 사이이시지요. 그처럼 한평생 같은 길을 걸어오셨다하더라도 두 분의 삶 자체까지 똑같다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일단! (당연한 말이지만) 각기 다른 분과 결혼을 하셨고, 그렇게 따로 가정을 이루셨잖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삶'은 세상 그 누구의 것과도 다른, 오로지 나만의 것임에도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타인이 살아가고 있는/살아왔었던 삶에 적잖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어릴 적 읽기를 강요(!)받았던 위인전에 등장했던 '위인'이라 불리었던 사람들의 일생을 들여다 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부모님들은 당신의 자식들도 (비록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런 '괜찮은 삶'을 살아가게되길 바라셨을 터이고, 이제 스스로의 선택을 하게된 나이가 되어서는 '나는 이렇게 사는데,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호기심에, 혹은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조바심에 무언가 롤모델을 찾는 심정으로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의 가장 큰 이유는 '저런 삶도 있는데, 내 삶은 그에 비하면 감사할 일 천지네!'라는 자기 위안의 대상으로 삼기 위함이 아닐까도 싶지요. 

유시민이 쓴 「어떻게 살 것인가」가 (이 표현이 적합한 것인지에는 자신 없습니다만)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 흡사 교과서의 저자와 같은 관점/기준에서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알려주고 있었다라면... 제가 읽어본 이 저자의 책 두 권에 모두 ★표시를 붙일 수밖에 없었던 김형민은 이 책 「삶을 만나다」에서 그 제목 그대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바로 그/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실제 삶을 통해 독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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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송호근이 쓴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은 한국 사회의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분명 누군가에게는 공감의 눈물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미안함/애잔함/서글픔 등등의 눈물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만, 그 책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삶을 본질적인 점에서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저자의 직업적 한계로 인해, 그의 글들은 그것을 읽는 내내 제겐 그 어떠한 감동도 전해주질 못했었지요. 하지만 김형민의 글은 (집이 아닌, 타인의 시선이 존재하고 있는 북카페에서 이 책을 읽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눈에 어느 순간순간... 뜨거운 무언가를 울컥!하고 올라오게 만들어주더군요.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이야기에서는 퇴출 기업 리스트에 올라 있던 어느 건설회사 직원들의 하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포의 어느 껍데기집에서 술잔을 들고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전하며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문득 서글픔을 느꼈다고 적고 있지요. ​

​(저자가 서글퍼졌던 까닭은) 몇 달 전이라면 기쁨으로 휘둘러졌을 일상이 흔들바위 같은 슬픔과 절망으로 그들에게 다가서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아내가 다음 달이 산달인 것이, 자식놈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 자식처럼 기른 막내 동생이 해를 넘기기 전에 상투를 튼다는 것이 다시 없는 십자가의 무게로 그 어깨를 짓눌러 가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자 스스로는 자신에게 특별난 글쓰기 능력은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똑같은 무언가'를 보고 저자처럼 자신만의 해석이 담긴 '무언가로부터의 무언가'를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라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위의 글에 이어지고 있는 --- '제가 만나고 접했던 분들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과거에는 그 아픔의 조각들이 알알이 박혀 있을 겁니다. 그 아픔의 조각들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보석들로 바뀌었기를, 그리고 앞으로 바뀌어 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내일은 해가 뜨고 인생은 칠십부터라는 말에 현혹(?)되어 기운차고도 명랑하게 하루하루를 엮게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뜹니다'라는, 다른 곳에서 이미 여러 번 보았을 법한, 그런 상투적 표현들조차도 읽는 이에게 이전과는 전혀다른 뜨거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게 되는거지요.

또한 저자 김형민은 위와 같은 상투적 표현들로 뿐 아니라 '나의 삶을 표현해냄에 있어 과연 어떤 단어의 조합들로 나타낼 수 있을까/내어야 할까'를 미처 알지 못했던 저에게 다음과 같은, 아버지인 내가 읽어도 '아버지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만 되는 예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힘겨운 구름다리에 매달려 발버둥을 치며 버티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족 부양을 위해서, 목에 풀칠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경황 없는 힘겨움 때문에 아빠들은, 아버지들은 자신이 지탱하는 가족에게서 동떨어져 가고, 아버지로서 줄 수 있는 가르침과 본보기를 제공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겠지요.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권리와 의무를 어쩔 수 없이 잊은 채 말입니다. 저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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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 9일의 '오늘'은 공사판과 파출부일로 각각 집을 나서야했던 다섯살 혜영이와 세살 영철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걱정되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이 방안에서 놀꺼리가 없어 성냥을 만지작거리다 화재가 나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화재로 자신의 두 아이들을 잃게 됩니다. 만약 집으로 배달되어 온 조간신문속 '기사'로 이 이야기를 접했더라면 아마도 '무책임한/무자비한'이란 형용사들을 앞에 붙여 혜영이와 영철이의 부모를 잠시 탓하고마는 그리 길지 않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이 슬픔 사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오역吾歷'을 이야기 해줍니다.

 

보육시설 확대를 주장하면 "애는 엄마가 길러야지"식의 논리가 정면으로 박치기 하고 나서는 (1990년 당시의) 분위기였다. 보육은 부모의 책임이지 사회가 뭘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암담함 속에서 파출부 나가는 엄마는 자물쇠를 잠가야 했고 아이들은 뜨거워지는 벽과 문을 긁어 대다가 숨이 막혀야 했다. …… 세상에서 가장 옳은 명제는 어쩌면 가장 잔인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가정은 지켜져야 하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옳고 지당한 책임을 사회가 전담 내지는 분담하지 않고 개인에게 떠밀 때, 옳아서 더욱 단단하고 마땅하여 배로 갑갑한 명제의 동아줄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목을 잡아 죈다.

 

제가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 언제나 그 1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책인 「그들이 살았던 오늘」을 읽고 썼었던 감상문의 일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옳은 명제는 어쩌면 가장 잔인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가정은 지켜져야 하며 ……' 라는 저자의 주장과 관련하여 <아빠 힘내세요 정식이 나을께요>라는 이야기 또한 '혜영이와 영철이'의 부모를 다시금 떠올리게만 해주더군요.

정식이의 부모는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그러하기에 백혈병에 걸린 정식이의 병원비를 감당할 처지가 못되었지요. 결국 그들이 선택한/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탈출구는 위장이혼을 통해 정식이의 엄마가 생활수급자가 됨으로써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그 부부가 이혼 도장을 받아 법원 문을 나섰을 때의 심경에 대해 '무능한 자신들을 원망했을까요, 뜻밖의 병을 주신 하늘을 탓했을까요, 이혼 서류를 내밀지 않고서는 속절없이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을 한스러워했을까요'​라 묻고 있기도, 또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통해서는 우리 사회가 '부부의 이혼만이 아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마치 로또 당첨을 바라는 듯한 심정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프로그램 내내 우리는 따스한 온정의 손길을 입에 달고 있었지만, 우리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따스한 온정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온정조차 베풀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고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걸 잊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만, 불현듯 저는 온정이라는 말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1%'의 사람들 외에, 평범하게 세상을 엮고 사는 누구에게라도 저런 위기는 별안간 찾아들 수 있으며, 그때에도 결국 기댈 수 있는 벽이란 '따스한 온정' 이외에는 사실상 없다는 사실이 두려워서였을 겁니다. 혜연이의 친구들이 불렀던 노래처럼 사람들은 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고, 그 삶 속에서 사랑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데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라 말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책의 뒷표지에 적혀 있던 다음의 문구가...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대한민국을 유효하게 설명해내고 있다라는 걸 과연... 누가 부인해낼 수 있을까요?

"탈출구가 없어요. …… 한국이라는 나라에는 비상구가 없지요. 쩝. …… 건물마다 비상구를 알리는 녹색 네온은 빛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요. …… 열쇠공이라도 부르고 싶은데, 열쇠공은 이 나라에 더 이상 없다고 합니다."    - 손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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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책이 소위 말해지는 좌파 인사에 의해 쓰여진 '사회 비평서'는 아닙니다. (제가 살고 있는 사회가 김형민을 '좌파'로 낙인찍는 사회라면, 전 그 순간 기꺼이 저 또한 좌파라 말할겁니다!) 우리와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타인들의 삶을 통해 (지금 나의 삶과는 관계없을 수 있으나) 그들의 삶이 '개인의 탓'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 구조적인 무언가'에 의해 그런 처지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라는 저자 나름의 해석을 담고 있을 뿐이지요. 과연 그 누가... '혜영이와 영철이네', '정식이네' 그리고 '혜연이네'가 겪어야 하는 삶이 온전히 그들 부모들 개인의 탓이었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개미 아저씨의 체면>은 '개인의 탓'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오로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한 개인의 한 번 뿐인 운명을 결정지어주었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숙명여중·고의 전속 사진사인 일명 '개미 아저씨'는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되었을 때 홀로 38선을 넘어야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헤어진 부인을 잊지 못하고 이후의 반평생을 홀로 살아왔지요. 왜 결혼하지 않으셨냐는 저자의 질문에 개미 아저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 "체면이 안 선다 이거지. 남의 집 귀한 딸 데리고 와서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내버려 두고 왔는데, 내가 새살림 차려 버리면 내 체면이 뭐가 돼요. 난 그렇게 못해요. 미안하다 그거지."

 

물론 이 아저씨의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이다라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 당신이 개미 아저씨의 말을 직접 들었었다면, 당신은 개미 아저씨 이야기로부터 과연 '무엇'을 끄집어 낼 수 있었겠나요?

 

'남의 집 귀한 딸'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평생을 혼자 살았다는 개미 아저씨는 또 주섬주섬 카메라를 들고 학교 순례를 나섰습니다. 그 꾸부정한 어깨와 길쭉길쭉한 다리를 흔들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 뒷 모습에 저는 왠지 부아가 치밀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백 배 천 배 더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절대로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떠올라서였던 것 같고, 진심으로 한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그 미안함으로 스스로를 결박했던 한 고집센 노인의 체면과 만인에게 미안할 짓을 저지르고도 내가 뭘 잘못했느냐며 배짱을 부리고 받을 대접 다 받고 챙길 몫은 다 챙기고 다니는 군상들의 두꺼운 안면이 겹쳐졌던 탓도 있었을 겁니다. 

……………………………………

 

저자 김형민의 글을, 그의 글쓰는 스타일을, 심지어는 그가 선택하는 단어 하나하나마저도 무.조.건. 좋아하는 저이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편견 가득한 공감'이 제 (머리속이 아닌)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편견 가득한 공감'으로 인해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던, 이 책을 읽었던 그 짧았던 시간 동안 정확히 세 번... 제 가슴이 울컥.했었더랬지요. 그마저도 타인의 시선이 존재하는 곳이었었기에 세 번 뿐이었을꺼라고, 만약 당신이...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삶에서도 '편견 가득한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소유자라면, 마지막으로 만약... 당신이 타인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순수한 의미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위로를, 용기를, 그리고/혹은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제게 다가왔었던 세 번의 울컥함은 당신이 느끼게 될 그 최소한의 횟수일꺼라는 걸... 꼭 적어놓고 싶네요.

 

딱히... 무지하게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개미 아저씨의 체면>을 읽고 있던 마침 그 때, 제 귀의 이어폰에서 '백수와 조씨'의 <보고싶었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더군요. 이 노래의 가사와 개미 아저씨의 이야기가 같은 상황을 그려내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혹여라도 이 책의 이 부분을 읽게 되신다면 꼬...옥!!!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한 여학생이 개미 아저씨에게 건네었다는 말... '통일될 때까지 사셔서요, 꼭 북한의 가족들 만나세요'라는 말이 혹여라도 이루어져, 아저씨와 부인이 서로 만나게 되는 장면을 머리속에서나마 그려보며 말이죠. (논리와 감상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있는 이 책을 읽고 쓴 감상문이... 처음부터 그 마지막까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정에 치우쳐 있는 듯 합니다만, 딱히 그렇다고 해 불만이 생기지는 않네요. 김형민의 책은 어떻게 읽어내든... 무방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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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 곳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걸
우리가 만나는 지금 이 순간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시간이라는 걸
나 알지만

보고싶었어 보고싶었어
이렇게라도 만나길 기다렸어
잠시 후면 별들이 쏟아지고 강물이 솟구치고
꿈에서 깨어날거야
내일 밤에도 우리 여기서 만나
못다한 얘길 나눴으면 좋겠어

잠시 후면 별들이 쏟아지고 강물이 솟구치고
꿈에서 깨어날거야
내일 밤에도 우리 여기서 만나
못다한 얘길 나눴으면 좋겠어

보고싶었어 보고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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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본) 김형민의 다른 책들 :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썸데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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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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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년법】​

 

​◆ 일본 형법 41조 : 14세 미만인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 - 14세 미만의 소년은 형사책임능력이 없다. 그러하기에 형벌 법령에 저촉되는 행위를 해도 범행을 저질렀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촉법소년이라고 불려 체포의 대상이 아닌, 보호 수속의 대상이 된다. 소년법의 이념에 의하면 어린이는 세공용 점토와 같다. 어린이의 범죄는 미숙함 탓에 환경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범죄를 범한 어린이는 죄의 처벌을 하는 게 아니라 재기를 위해 교육적인 수단으로 지도한다는 이념이 성립되어 있다. 가소성이 풍부한 어린이는 충분한 지원이 있으면 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소년법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일본 소년법 60조 : 형을 마친 소년은 장래를 위해 형의 언도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위의 법령 문구와 그에 관한 해설로부터는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아마 우리나라의 법률도 또한 일본이 그것과 별반 차이는 없을 것도 같구요. '어린이는 세공용 점토과 같아 풍부한 가소성이 있다'라는 표현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도 해, 심지어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개인적으로는 가장 쓸데없는 논쟁 중 하나라 생각하는) 성악설에게 완벽한 KO 펀치를 날리고 난 후 환호작약하는 성선설의 모습까지도 떠올려 주기도 합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은 모두 (범위를 좁혀 본다면)일본 소년법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넓게 본다면 물론 '사적 복수'에 관한 이야기들이겠죠) 그렇다면 과연... 작가 야쿠마루 가쿠는 「천사의 나이프」를 통해 일본 소년법에 관한 어떠한 메세지를 전해주려 했던 것이며, 그 메세지는 과연 앞의 두 작가가 건네어 주었던 것들과는 (좁은 범위와 넓은 범위 모두에서) 어떠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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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는 「고백」에서 소년법의 한계로 인해 피해자가 스스로 딸의 복수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통해, 결국엔... '성공한 복수라해도, 피해자의 가슴 속 상처를 완전히 지워줄 수는 없다'라는 일견 역설적이기도 한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반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소년법과 사적 복수라는 두 측면 모두에서) 이야기의 초점을 피해자보다는 경찰의 입장​에 더 집중해 바라보고 있었었지요. 피해자의 아버지가 가해자가 된 순간부터, 잠재적 피해자가 되어버린 (원인 제공의) 가해자를 지켜내야하는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역시나 인간일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인) 경찰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심적 갈등을...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삼고 있었던 것부터가 미나토 가나에와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보여주고 있었던 겁니다. (「고백」에는 경찰을 비롯한 그 어떤 공적 영역도 등장하질 않지요. 즉, 사적 복수의 허무함을 오로지 사적인 영역으로부터만 이끌어 내고 있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이 제게 이 소설을 특이하다/대단하다라 여기게 만들어 주었지요.)

위의 두 작품들과 동일한 정서 - 소년법의 문제점, 그리고 사적 복수 - 를 바탕에 깔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 「천사의 나이프」는 스토리의 구조는 좀 더 복잡하며... 등장 인물들의 화법은 좀 더 솔직 하고, 그리고 결론은 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입니다. 또한 새드 엔딩에 가까웠던 두 작품에 비해, 「천사의 나이프」는 최악의 상황에서 비교적 해피 엔딩을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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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가족】​

​주인공 히야마의 부인 쇼코는 세 명의 중학생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일본의 형법은 예의 그 세 명의 신상을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으며, 형사처벌을 내리지도 않았지요. 법이 앞장서서 가해자는 보호해주면서도, 피해자에 대해서는 그 아무런 배려를 해주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일본 소년법의 이념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억울해 분통 터질 수밖에 없는 불합리로 다가오는 거지요.

죄를 범한 어린이들의 재기는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념은 범죄피해자나 그 가족의 통곡을 짓밟고서 성립되어 있었다. 죄를 범한 어린이들은 과잉된 인권 의식에 의해 극진하게 보호 받는다. 그럼 살해당한 쇼코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것일까. 죽어 버린 사람은 별 수 없다는 것일까. 잃어버린 생명이나 상처 받은 마음은 결코 점토처럼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 피해자 측에 있어서는 가해자가 성인이든 미성년이든 잃어버린 것에는 변함이 없다. 어째서 미성년에게 살해당한 순간부터 피해자의 생명이 가진 가치는 가벼워지고 마는 것인가. 어째서 자신은 소년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조차 없는 것일까. 소년들이 어째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 소년들이 지금 어떤 기분을 안고 있는지를 어째서 알 수 없는 것일까. 어째서 심판에 참가해 소년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범인들에 대한 히야마의 증오는 결국/그러하기에... 이러한 자신의 증오를 밖으로 표출해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경찰과 사법계 전체를 향하게 됩니다. ---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사사로운 행복을 바라는 일반 시민을 지켜주는 것이 경찰이고 법률이 아니었던가' ---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응보를 일본 형법으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히야마는 어쨌든 자신의 분노나 증오의 창끝을 향할 구체적인 존재를 필요로 했고, 이의 일 방편으로 민사소송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의 가정으로부터 고액의 배상금을 뜯어내 그들이 의식주조차 어려운 생활고 속에서 평생 죄의 무게를 생각하며 살게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복수의 방법마저도 일본 법은 가해자들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너무도 많이 남겨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절망하게 되지요.

아내를 잃은 히야마가 이러한 분노와 좌절을 겪는 것과는 달리, 쇼코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들에 대해 히야마로서는 일견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 이유를 묻는 히야마에게 장모는 이렇게 말해주지요. --- "소중한 사람이 당한 것과 같은 괴로움을 맛보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분을 꾹 억누르고 있지. 이 이상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 '국가가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범인을 죽이고 싶습니다'라 말했던, 「방황하는 칼날」속 아버지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히야마는 결국... 장모의 그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나오는 '소년들을 증오한다고 죽어버린 쇼코가 돌아오는 건 아니다'라는 히야마의 말은 「고백」의 주인공 유코가 했던 독백과 완벽하게 똑같지요. 비록 「고백」의 주인공이 자신의 복수를 모두 끝마친 뒤에야 이를 깨달았다는 차이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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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모든 기억을 지워주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나토 가나에는 「고백」의 주인공 유코의 이 말을 통해 '성공한 복수라해도 그것이 아픈 기억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다'라는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전해주었었습니다. 작가 야쿠마루 가쿠가 「천사의 나이프」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도 결국엔 이와 똑같은 내용입니다. 헌데... 훨씬 더 가슴이 아프죠. --- 「고백」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합니다.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피해자가 (또 다른 사건의) 가해자로 변해버리지요. 이 작품 「천사의 나이프」에서는 '피해자 -가해자'의 구분이 매우 혼란스러우며 그 혼란이 바로...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세지를 만들어 내는 가장 근본적인 재료가 되어주고 있고, 결국 이러한 혼란이 '거듭되는 반전'을 거쳐, (비록 소설적 작위가 좀 많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마지막에 가서는 의외의 인물을 '끝까지 속죄하기를 거부한 진정한 범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책의 뒷표지에 쓰여있는 '3중 트릭'을 통한 '혼란의 마무리'를 자아냅니다. --- 책의 마지막 30여 페이지가 보여주는 살인 사건의 진실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란 말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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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소년들이 스스로 범한 죄를 받아들이고 올바르게 사회로 돌아와 자신들과 마주 서기를, 잃어버린 것은 결코 돌아오지 않지만 피해자 측의 괴로움을 다소나마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가해자들뿐인지도 모른다. …… (가해자의) 인생에 묻어 버린 검은 얼룩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닦을 수 없다. 아무리 어리고 미숙하다 한들, 스스로 멋대로 닦아 내서는 안 되는 거다. 그것을 닦아 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상처 입힌 피해자나 그 가족뿐이다. 피해자가 정말로 용서해 줄 때까지 끊임없이 속죄하는 것이 진짜 갱생인 거다.

"가해자... 가 남은 일생을 통해 느껴야하는 괴로움 …… 그것을 닦아 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상처 입힌 피해자나 그 가족 뿐이다'라는 작가의 메세지. --- 이 작품을 읽어본 분이라면 이 메세지의 참뜻을 올곧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는 분에게는 얼핏 이해되지 않을 , 혹은 심정적 반발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제가 이해한 바의) 「고백」에서의 메세지는 피해자들에게 완전한 상처의 치유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방황하는 칼날」의 메세지는 자신들에게 상처를 안겨준 가해자에게 직접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내서는 안되는거다쯤이 되는 거겠죠. 이 작품 「천사의 나이프」는...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가 지니는 범위나 무게면에서 위의 두 작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며 더 무겁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그들이 가져야할/가졌으면 하는 마음가짐을 한 작품을 통해 모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이 작품의 메세지는 그 무게만큼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느 한 장면> --- '서구의 근대화는 ……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라는 말을 통해 푸코는 사실 '근대화 자체에 대한 비난'하고자 했었음에도, 대한민국의 우익은 이를 '서구의 근대화도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었단다'라는 의도적 오역誤譯을 통해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해 왔었었지요. --- '가해자가 일평생 겪게 될 양심의 가책을 닦아 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상처 입힌 피해자나 그 가족 뿐이다'라는 명제의 의도적 오역 또한, 과거 우리나라의 최고 권력층이 <현대사의 어느 한 장면>, 그 피해자들을 향해 '이제 그만 다 용서해라, 앞날을 위해서라도 <그 장면>은 이젠 완결된 과거가 되어야만 한다.'라 강요했었던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물론 작가는 이러한 오역을 단호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위의 명제. '가해자가 일평생 겪게 될 양심의 가책을 닦아 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상처 입힌 피해자나 그 가족 뿐이다'가 성립될 수 있는 기본적 전제는 바로 가해자의 진심어린 참회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갱생인 것이며, 그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피해자(의 유족)에게도 가해자의 얼룩을 닦아달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지요. 즉, 「고백」과 「방황하는 칼날」이 가지고 있는 메세지들이 매우 직선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의 메세지는 '가해자의 속죄'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이해가능해진다는 겁니다. 그에 더해 미나토 가나에와 히가시노 게이고가 제시하지 못했던 '사적 복수를 반대함의 이유'/'사적 복수를 참아내게 할 수 있는 해결책(?)'을 야쿠마루 가쿠는 나름 명확하게 제시해주고 있기도 하지요. --- 가해자의 <속죄>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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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치락 뒤치락... 하는 여러 번의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반전이 펼쳐지고 있는 소설입니다. 비록 이 감상문에 소설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1/10도 적어내지 않았습니다만, 이 소설을 읽었던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 소설의 핵심이 <속죄>라는 단어에 있다는 것에는 동의해주지 않을까, 그와 더불어...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 그런데! 그 두 상극의 지위가 시간을 뛰어넘어 가슴 아프게 한 점으로 모이게 되는 여러 장면들, 그 상황에서 내뱉어지는 한 인물의 다음 절규가,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저를 정말로 찌릿!!!하게 해주더라는 걸,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편이 아냐! 공범이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는 기분을 모르는 넌 같은 편이 아냐!"
 
 
'공범이긴 하지만, 같은 편은 아니다'라는 이 말을 자아내게 만든 가슴 아픈 이야기... 가 건네주는 찌릿함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또한...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하시다면, 바로 이 작품 「천사의 나이프」가 아마도 그 완벽에 가까운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인 듯 하다라는 저의 개인적 의견에 한 번쯤 속아봐주시는 건 어떨까... 도 싶다는 말로써, 이 작품의 감상문을 마칩니다. 토요일 이른 아침, 라페스타의 Angel-in-Us는... 그야말로 사립 독서실이군요. ^^
 
 
 
※ 이 작품과 더불어 꼭! 함께 읽어 보기를 권해 드리는 소설들
-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방황하는 칼날
- 조세희 作, 「뫼비우스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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