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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각에 유별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일체감을 느끼던 미조구치가, 성장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현실에 접근하여 할 때면 금각의 방해를 받게 되고, 이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미조구치는 결국 금각을 불태우고 만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 <작품 해설> 중
위의 한 문장이, 이 작품의 스토리를 모두 표현해 내고 있는, 그렇게 매우매우 간단한 줄거리의 소설입니다. 여러 번 언급했었었기도 한, 한 편의 소설을 놓고 그 소설의 스토리가 중요하냐, 아니면 그 스토리를 빌어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중요하느냐의 구분을,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떠올려 봅니다만, 이 작품 「금각사」를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굳이 둘 중 하나의 편으로 구분하라 한다면 당연히 후자의 작품으로 간주되겠습니다만, 그렇게만 분류해버린다는 게 상당한 아쉬움을 남겨주는 것이 틀림없는, 이 작품은 그렇게, 뭔가 어떠한 표현으로도 규정지어내기 힘든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 작품에서 보여지고 있는 인간 내면에 대한 묘사들이야말로 이 작품을 읽으며 '엄.청.나.다.'라는 말을 저절로 내뱉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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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조구치는 태어날 때부터 말더듬이였고, 그러한 선천적 장애는 그를 내성적인 성격의 남자로 자라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 자! 저의 표현 능력은 여기까지 입니다. 그렇다면 미시마 유키오의 표현을 보실까요?
말더듬 증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와 외계外界와의 사이에 하나의 장애로 작용하였다. 첫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첫 발음이, 나의 내계와 외계 사이를 가로막는 문의 자물쇠와도 같은 것이었으나, 자물쇠가 순순히 열린 적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은 자유로이 말을 구사함으로써, 내계와 외계 사이에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해 둘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자물쇠가 녹슬어 버린 것이다. …… 말더듬이가 첫 마디를 소리내기 위해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 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도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 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 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내가 애써서 간신히 외계에 도달하여 보아도, 언젠가 그곳에는 순식간에 변색되어 어긋나 버린 …… 더구나 그것만이 나에게 어울릴 듯이 여겨지는, 신선하지 못한 현실, 거지반 썩은 냄새를 풍기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작품의 줄거리가 간단하다는 사실은 결국... 독자에게 주인공의 행위, 즉 금각을 방화했던 그 행위의 원인이 무엇이었느냐를 작품 전체를 통해 이해해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작가는 지독히도 치밀한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그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헌데... 그 실마리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내는 것이 저에게는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것을 도와주는, 이 책의 말미에 실려있는 <작품 해설>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작품 해설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이게 뭐야!'라는 평가를 한다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이기도 하는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 주인공이 자신 스스로를 표현하는 문장입니다만, 또한...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은 다음의 구절을, 그러하기에 가벼이 보아서는 안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게도 되지요.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 갔다. 마치 돼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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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주인공 미조구치가 중학생이었을 때,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연상의 여인 우이코를 짝사랑했었더랬습니다만, 그의 볼품없는 외모는 결국 우이코로부터 차가운 외면을 받게 만들었지요. 미조구치는 그 수치심에 우이코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 생각하게 됩니다. --- 내 수치의 입회인이 없어져 버리기를 바랐다. 증인만 없다면, 지상에서 수치는 근절되리라. 타인은 모두 증인이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수치라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 군 병원의 간호사였던 우이코는 한 병사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임신을 하게 되어 병원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를 사랑했던 그 병사가 탈영을 해 마을에 숨어지내게 되었고, 그를 잡으러 온 헌병들에게 결국... 우이코는 그 병사가 숨어 있는 은신처를 말하게 됩니다. 그 '배신'의 순간에 미조구치는 신기하게도 자신만의 미美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되지요. --- 나는 우이코의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그녀의 생애에 있어서도, 그것을 보고 있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도 다시는 없으리라고 확신하였다. …… 우이코의 배신이라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아름다움이 나를 도취시켰다.
② 그 지역 사찰의 주지였던 미조구치의 아버지는 미조구치에게 또 하나의 미美의 대상을 심어줍니다. 바로 '금각사'라는 절이었지요.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훗날 미조구치로 하여금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을 보아도 마음 속으로,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형용하기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었었으며, 그 세뇌와도 같았던 아버지의 말로부터, 금각을 처음으로 대면하기 바로 직전의 심리를 통해 보여지듯, 미노구치는 또 하나의 자신만의 미美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 아직 본 적도 없는 금각에 드디어 접할 순간이 다가옴에 따라, 내 마음에는 주저가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금각은 아름다워야만 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금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금각의 미를 상상할 수 있는 내 마음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금각은 미조구치의 상상속 모습과는 달리 그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미美라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라고까지 생각했었던 미조구치였었습니다만, 다시 금각이라는 현실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 온 그는 '현실로부터 벗어났다'라는 이유로 다시금 금각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품게 되지요. --- 그토록 실망을 주었던 금각도 …… 어느덧, 보기 전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금각이 되었다. …… 몽상에 의하여 성장한 것이 일단 현실의 수정을 거쳐, 오히려 몽상을 자극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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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의 아버지는 자신의 선당 시절 친구였었던 금각사의 주지에게 미조구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죽었고, 그렇게 미조구치의 금각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지요. 금각사에서 만나게 된 동갑내기 부잣집 아들 쓰루카와의 잘생긴 외모를 보며 미조구치는 그가 금각을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금각으로 상징되는 미노구치의 인식 속 미美는 어느덧, 자신의 외모와 대비되는 것으로 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 나는 언제부터인지 금각에의 집념을, 오로지 자신의 추한 모습 탓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제 소설은 ①과 ②에서 나타나 있는, 우이코과 금각으로 상징되어지는 두 가지의 '미美에 대한 관점'을 배경으로 그가 왜 그 금각을 불태우게 되었느냐/불태울 수 밖에 없었느냐를 설명해 가게 됩니다.
대학생이 된 미조구치에게 금각은 이렇듯 실재하는 건물, 그 이상의 의미로 각인되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기억 속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우이코의 모습이 그 금각과 더불어 그의 본능까지를 제어하게되지요. --- 나는 서서히 손을 여자의 옷자락에 밀어넣었다. 그때 금각이 나타났다. 위엄으로 가득한, 우울하고 섬세한 건축, 벗겨진 금박을 여기저기에 남긴 호사의 주검과도 같은 건축, 가까운가 싶으면 멀고, 친하면서도 소원하고 불가사의한 거리에, 언제나 선명하게 솟아 있는 그 금각이 나타난 것이다. --- 미조구치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금각의 의미에 또 하나의 인물이 추가됩니다. 바로 금각사의 주지였지요. 이전까지 금각의 의미가 '미美적 관점'이었다면, 주지에게 투영된 이미지는 '아무리 눈길을 피하려 해도 그곳에 존재하는, 기괴한 성城처럼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미조구치 스스로 주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애증愛憎의 어느 면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기괴한 성'의 이미지였었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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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는 …… 미적인 건 이미 나에게는 원수야."
"언젠가 반드시 너를 지배할 테다. 두 번 다시 방해하지 못하도록,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다!"
제가 꼽아본 이 작품의 핵심적인 문구입니다. 자신의 본능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금각을, '아름다움'의 절대적 상징이었던 그 금각이 결국 미조구치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렸으며, 그 극복의 방법으로 그는 금각을 불태워버리기로 한거지요.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명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금각을 불태운다면 ……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에 연못가에 계속하여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리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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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가 금각에 방화를 저지르게 된 것은 결국, '우이코와 금각'이라는, 자신을 지배해왔던 두 개의 환영幻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이 감상문만을 읽어서는 방화라는 행위로 나타난 '결과를 이끌어 낸 원인'의 개연성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또한 이 소설을 다 읽어낸 저 스스로조차도 그 개연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을 읽고는, 만약 그가 작정하고 살인 사건을 계획한다면, 그렇다면... 과연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잡아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이 작품 「금각사」를 읽고는, 설혹 매우 잘못된 행위일지라도, 혹은 전혀 인과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두 가지의 사건일지라도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그 행동의 정당성을, 그 두 사건을 인과관계를 지니는 원인과 결과로 맺어놓는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또한!!! 이 작품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를 떠올리게도 해주기도 했는데, 마침표와 쉼표 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그마저도 지극히 절제하고 있는 그와는 달리 미시마 유키오는 수도 없이 사용하는 쉼표를 통해, 문장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카톨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미시마 유키오는 불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된 차이점 또한 두 작가를 의미있게 연결시켜 주기도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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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열 페이지정도를 읽고나서, '이 소설은 어쩌면 이제껏 내가 읽었던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나는 어쩌면 이 소설의 감상문을 써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쓴다면... 이제껏 썼던 그 어느 감상문도다 훨씬 긴 것이 될 것 같다.'라는 느낌을 가졌더랬습니다...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띄엄띄엄, 긴 시간에 걸쳐 읽어낼 수 밖에 없었다라는 사실이 이 작품의 감동을 많이 반감시켜 주었으며, 결국 어찌어찌 써내고야만 이 감상문 또한 그리 맘에 들지도 않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작가의 표현력에 놀라게 되는 경험을 이전에도 적잖이 했었습니다만, 이 작품 「금각사」에서의 놀라움은 이전의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차원의 놀라움이었다라는 겁니다. 전후의 문맥을 떠나서도 제가 받았던 그 놀라움들이 전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저에게 유별난 짜릿함을 안겨주었던, 위에서 인용하지 않았던, 몇몇 표현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감상문을 끝맺겠습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작품에서도 분명, 그의 작품들에서와는 또 다른 '읽어가는 재미'를 느끼며 공감하지 않을까도 싶네요.
● 그때 갑자기, 열세 살인 내가 뜨고 있는 눈은, 크고 따듯한 물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두 손바닥이 등뒤로부터 뻗어나와 내 눈을 가린 것이었다. 지금도 그 손바닥의 기억은 살아 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손바닥. 등뒤에서 넘어와, 내가 보고 있던 지옥을 순식간에 그 눈으로부터 뒤덮어 가려 버린 손바닥. 타계他界의 손바닥. 사랑인지, 비애인지, 굴욕 때문이지는 모르나, 내가 접하고 있던 끔찍한 세계를 순식간에 중단시키고, 어둠 속에 묻어 버렸던 손바닥. 나는 그 손바닥 속에서 가볍게 끄덕였다. 양해와 합의가, 내 자그마한 얼굴의 끄덕임으로 즉시 전하여지자, 아버지의 손바닥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손바닥이 명령하는 대로, 손바닥이 치워진 다음에도, 불면의 아침이 밝아 와어 눈꺼풀이 눈부신 햇살을 통과시킬 때까지, 완고히 눈을 감고 있었다.
● 그의 안짱다리는 애당초 내가 처해 있는 조건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고 있었다. …… 앉아 있는 가시와기는, 걷고 있을 때와는 달리, 남들과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일종의 험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육체적 불구자는 미모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불구자도 미모의 여자도,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지치고, 보여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질려서, 궁지에 몰린 끝에, 존재 그 자체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꼽아보는 이 작품 최고의 구절.)
● 이러한 내가, 친구들처럼 몸파는 여자를 상대로 동정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지. 왜냐 하면, 몸파는 여자들은 손님을 사랑해서 받는 것이 아니거든. 노인이건, 거지건, 애꾸눈이건, 미남이건, 모른다면 문둥이라도 손님으로 받겠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평등성에 안심하고 첫 여자를 사겠지. 사지가 멀쩡한 사내와 내가, 같은 자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고, 그건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자기 모독으로 여겨졌거든. 내가 안짱다리라는 조건이 간과되고 무시된다면,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는, 네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포에 나도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 내 조건을 전적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인간보다 몇 배나 호화스러운 구상이 필요할 테니까. 인생은 하여간에 그런 식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지.
●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 인간의 심리 묘사가 압권인 소설들.
- 주제 사라마구 作, 「눈먼 자들의 도시」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作, 「라쇼몽」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作, 「 롤리타 」
- 알렉산드르 솔제티친 作,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가즈오 이시구로 作, 「 남아있는 나날 」
- 제인 오스틴 作, 「오만과 편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