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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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것을, 또한 그 소설을 읽는다라는 행위를,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느냐 혹은 유희의 일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저 또한 그러했었던) '휴가지에 가지고 가 읽으면 좋을' 류의 한정어를 붙여보게도 됩니다. 물론 작가 혹은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소설을 읽는다라는 행위는 읽는 이에게 유희의 일 수단일 것이기에 그러한 한정어가 '소설'이라는 문학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여전히 '한정어'라는 단어가 안고 있는 의미가 그러하듯, '한정'의 대상/조건이 바뀌게 되면 그 소설의 발하게 되는 의미/값어치가 변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독자 개개인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자의적 가변성'은 분명 그 소설을 쓴 작가에게 때로는 실례가 될 수도, 때로는 엄청난 찬사가 되어 표현되어 질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기는 하겠지요. --- 어떠한 작품이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이라는,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또한 이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 수 없을 수식어를 받는다라는 건 어쩌면... 그 작품이 이러한 '자의적 가변성'이라는 변덕스러움까지도 무색하게 만들었다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이러한 생각하에서 보자면, 이 작품 「노인과 바다」는 아마도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많은 것들 - 감동, 교훈, 다짐, 혹은 그 이외의 무엇이건 - 을 안겨주는,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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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비평가들은 나의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아는 한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나중에 나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 출판되자 미국의 한 문학 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나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 농담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이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밍웨이도 아는 영어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았나보군요."

- 위화 著,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중​

위화의 이 농담을 읽었을 당시만해도, 헤밍웨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질 않았던 때였습니다...만, 이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읽고 나니, 위화의 이 농담에 그야말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공감을 하게만 됩니다. 「롤리타」에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언어의 유희라든가, 「금각사」에서 읽었었던 인간 내면의 심리 묘사, 혹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인간 감정의 마지막 한 가닥까지 발기발기 찢어내버리는/릴 듯한' 세세함 등은 최소한 이 작품 「노인과 바다」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발견한 아마도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 상황의 전달이나 행동의 묘사가 아닌, 뭔가 '글쓰는 작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을 꺼 같아!로 보이는 표현은 "해조가 잔잔한 파도에 너울거리며 흔들거리는 모습은 마치 바다가 누런 담요 아래에서 뭔가와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라는 단 한 구절일 뿐이었으니까요.

화려한 서술도 없고, 세세한 묘사도 없다면... 그렇다면 이 유명한 소설은 교장 선생님의 훈시같은, 지독한 무미건조함 속에서 독자가 어렵게 의미를 끄집어 내야만 하는, 그런 쉽지 않은 작품일까요? ---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님이 하셨다.라 전해지는, "자고로 경제학 박사라면 길 위의 걸인에게도 최신의 경제학 이론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표현 자체가 완벽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오해의 여지도 없길 바랍니다.) --- 헤밍웨이 '선생님'이야 말로 ​이 표현의 참뜻을 진정으로 구현해 내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관 없는 환경인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들의 인생!... 을 이야기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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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처음 사십 일 동안은 소년이 함께 있었다. …… 소년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로 옮겨 타게 되었는데, 그 배는 첫 주에 큼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다. 소년은 날마다 노인이 빈 배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때... 는 화려했었던 시절을 보내었던 노인이지만, 현재 그가 처하고 있는 현실은 이처럼 암울하기만 합니다. '제 3자'인 소년의 부모는 노인에게는 '운이 다했다'라 생각하였으며, 여전히 노인을 좋아하며 믿고 따르는 소년마저도 노인을 향해 '가슴이 아팠다'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노인 자신에게는 여전히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미풍이 불어올 때처럼 희망과 자신감이 새롭게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이미 늙었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조각배와 보잘 것 없는 낚시 도구들 뿐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노인에게는 현재의 불행, 그리고 그 불행을 초래한 가까운 과거들까지도 희망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것으로 해석해낼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지난 84일간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그지만, 그 84일째 저녁에 "85는 재수 좋은 숫자란다. …… 우리 끝자리가 85인 복권 한 장을 사두면 어떻겠니? 내일이면 바로 팔십오 일째가 되는 날이거든"이란 말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었던지요. (누군가는 아마... 이 노인의 말을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는 '복권이나 사볼까?'로 해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작품 내내 흐르고 있는 건 분명... 노인의 낙관적이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 자세이기에, 그런 해석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도 싶네요.)  

바지 속에 신문을 넣고 둘둘 말아 그것을 베개로 삼았다. 담요를 몸에 둘둘 감고 침대 스프링을 덮고 있던 또 다른 헌 신문지 위에서 잠을 잤다. 노인은 곧 잠이 들었고, 아직 소년이었을 시절에 본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꾸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긴 해변과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해안선, 그리고 드높은 갑岬과 우뚝 솟은 커다란 갈색 산들이 꿈에 나타났다. 요즘은 들어 그는 매일 밤마다 꿈속에서 이 해안가를 따라 살았고, 꿈속에서 파도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파도를 헤치며 다가오는 원주민들의 배들을 보았다.

​노인에게는 투망도 없었고,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노란 쌀밥도, 생선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베고 잘 베개도 없으며, 헌 신문지 위에서 자야만 할 정도로... 그야말로 그에게는 가진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상황입니다. 이러한 불안/불행한 현실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찬란했던 과거'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지요. (카위의 「이방인」을 옮긴 역자 이정서는 카뮈가 '「이방인」에 나오는 모든 구절들'이 결국엔 서로서로 연결이 되도록 써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만, 카뮈의 연결고리를 매우 초라하게 만들어 버릴 만큼,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전체적인 상황의 전개에 따라 노인의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 예를 들어 초반에 등장하는 이 구절, 노인이 떠올려보는 '찬란했던 과거'가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 그때 그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일면 무미건조할 수 있는 전체 줄거리를 살찌워주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다시 노인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85일째의 낚시를 떠납니다. 그것도 아주 이른 새벽에, 머나먼 바다를 향해서! 말이죠. 

위화의​ 「형제」처럼 주인공의 일생 전체를 보여주는 작품에서 대단함을 느낄 수도 있겠고, 반면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처럼 지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사실 별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85일째, 그렇게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떠난 노인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고기 한 마리가 잡히게 되고, 그 고기와 사흘간에 걸친 사투 끝에 결국 '내 것'으로 만들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향해 돌아간다는 내용이 그 전부인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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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그것도 조그마한 조각배로는 자신의 낚시줄에 걸린 커다란 고기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노인은 부모의 강요로 인해 다른 배를 타야만 했던 소년을 떠올리며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이란 말을 여러 번 내뱉지요. 그 바램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맛없는 생선을 날로 먹을 때에 이르러서는 "지금 그 애가 내 곁에 있고, 또 소금이 조금 있으면 좋으련만"으로 확장됩니다. ​--- 이처럼 변화해가는 노인의 '바램'이야말로 이 소설을 읽어가는 데 있어, 매우 집중해서 잡아내야 하는 한 요소라 생각하는데, 바다에 나온지 이틀 째 밤이 다가오자, 노인의 바램에는 이제... "상어만 오지 않는다면"이 또 하나 더해지게도 되지요. 

 

 

만새기라는 생선을 날로 먹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노인은 "만새기는 제대로 요리해서 먹으면 정말 맛있는 생선이지. 하지만 날로 먹으니 정말 맛대가리가 없군. 이 다음에 배를 탈 때에는 꼭 소금이나 라임을 갖고 타야겠는걸"이라 말합니다. 이는 단지 현실에 불만족하며 더 많은 '바램'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조건의 상황하에서도 노인은 여전히 '미래'를 그려내고 있었었으며, 암울한 현실조차 상상을 통해 나름 긍정적으로 계속 해석해나가고 있는 거지요!!! ​

결국 ​거의 나흘에 걸친 사투 끝에 고기를 '내 것'으로 만들었지만, 너무도 큰 크기 때문에 배 위로 올리지 못하고, 그저 배 옆에 매달고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란 오래가지 않는 법"이란 노인의 말처럼, 이내 상어 떼의 습격을 받게 되었고,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걸"이라 말하는 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상어 떼의 습격을 간신히/어쨌든 물리쳐 내긴합니다. 물론... 상어 떼의 습격이 지나갈 때마다 배 옆에 매달려 있는 고기의 살점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말이죠.

상어 두 마리 중 첫 번째 놈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외침 소리는 다른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한 개인이 느끼게 되는 '절망'이란 건, 정말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던 구절이었습니다. '이 외침 소리는 다른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 내가 느끼는 절망이란 이처럼 '다른 어떤 말로 옮겨 놓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걸"이란 노인의 바램에 이제는 아예!!! "이 고기를 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이라는 것으로 변하여 갔으며, 몰려드는 상어 떼를 물리치다가 가지고 있던 칼마저 무디어지자, 결국 "숫돌을 가지고 올걸 그랬어"라는 또 하나의 '바램'을 추가하게 됩니다.

만약!!! 소설 속 노인이 이처럼 현실에 대해 연신 불평을 쏟아내기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는 이처럼 유명한 작품의 주인공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 그를 이처럼 유명한 작품 속 주인공으로,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원맨쇼'와도 같은 위치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던 건 다름아닌... 이러한 '바램의 추가'가 노인이 현실을 향해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이라, (다시 한번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하지만 이 늙은이야, 넌 그것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잖아. 지금은 갖고 오지 않은 물건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 갖고 있는 물건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라는 스스로를 향한 자책을 보여줌으로써, 이제까지 연신 추가되어왔기만 했던 노인의 '바램'들이 결코!!! '현실에의 부정'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 모든 건 결국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주는 것들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럼에도... 노인에게 닥치는 시련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한 마리면 한 사람이 한겨울 내내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 그런 생각은 집어치워. 이젠 그저 휴식을 취하면서 남은 고기를 지킬 수 있도록 손이나 제대로 풀어 두도록 해'라 나름 현실에 순응해가는 노인에게 또 다른 상어 떼가 나타났고, 이번엔 그가 가진 거의 마지막 무기였었던 칼의 칼날마저 부러져 버리고 맙니다. 이제... 노인에게 남은, 상어를 대적할 수 있는 무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자꾸만 반복하여 사용하게만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도 노 두 개에 키 손잡이와 짤막한 몽둥이가 한 개 있어"라며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지요. --- '희망'이란 건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란다!라 마치 작가가 저에게 말해주고 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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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상어 놈들한테 완전히 지고 말았구나,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이제 너무 늙어서 몽둥이로 상어를 때려죽일 만한 힘도 없어. 그렇지만 내게 노와 짤막한 몽둥이와 키 손잡이가 있는 한 끝까지 싸워 볼 테다. …… 한밤중에 상어 놈들이 다시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놈들과 싸우는 거지.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 그가 말했다. …… 고기는 반밖에 남지 않았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운이 있으면, 어쩌면 앞쪽 반만이라도 가져갈 수 있겠지. 내게도 조금쯤은 운이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럴 리 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너무 멀리까지 나왔을 때 너는 이미 운수를 망쳐 버리고 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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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파는 곳이 있다면 조금 사고 싶군.' 그가 말했다. 하지만 뭣으로 사지?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잃어버린 작살과 부러진 칼과 부상당한 이 손으로 그걸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넌 바다에서 보낸 여든 날하고도 나흘로 그것을 사려고 했어. 상대방도 네게 그걸 거의 팔아 줄 듯했잖아." …… 하늘에 훤한 불빛이 나타나면 좋을 텐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바라는 게 너무 많구나. 하지만 지금 당장 절실히 바라는 건 그 훤한 불빛을 바라보는 거야.

물론... 노인은 지쳤습니다. 육체적으로도, 또한 정신적으로도 그는 너무도 많이 지쳐버렸지요. 드디어 그의 눈에 저 멀리 있는 아바나 시의 불빛이 보였음에도, 여전히 꼬박 하루밤을 더 가야만 한다라는 사실 앞에서 노인은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 "제발 또다시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희망은 꺾이기만 하는 것일까요? 꺾이기 때문에 그것은 (꺾이기 이전까지는) '희망"이라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바나 항구를 향해 돌아가는 그 마지막 밤에도 예의 상어 떼들의 공격은 이어졌고, 이제 고기의 살은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 누군가 식탁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라도 하듯 한밤중에도 상어 떼가 고기잔해에 덤벼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상어 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키 잡는 일에만 집중했다. 뱃전에 달린 무거운 짐이 없어진 배가 얼마나 가볍고도 순조롭게 바다 위를 미끄러지드 달리는지만 느낄 뿐이었다.  …… 배에는 이상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키 손잡이 말고는 전혀 피해가 없어. 손잡이 같은 거야 쉽게 갈아 끼울 수 있지.

'뱃전에 달린 무거운 짐이 없어진 배가' --- 과연... 노인에게 그 커다란 물고기는 희망의 상징이었을까요, 아니면 항해(인생)에의 짐이었던 것일까요? 지난 나흘 간에 걸친 사투가 그야말로 아무런 소득도 없게 된 이 순간에도 노인은 '배에는 이상이 없구나 …… 손잡이 같은 거야 쉽게 갈이 끼울 수 있지' 라는 말로 또 다른 희망을 가져보고 있습니다.

노인이 그토록 힘든 사투를 벌이고도,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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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내 좋은 친구거든. 침대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란 좋은 물건이지. 녹초가 되었을 때 그렇게도 편안하게 해 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물건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지. 헌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녹초가 되고 나서야 새삼 깨닫게 되는 침대의 안락함과 소중함. '다만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라는, 노인을 그렇게 녹초로 만들어버렸던 원인. --- 나 자신의 '이상 실현'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었고, 나는 다만, 나는 단지, 나는 오로지!!! 내 가족만을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해 가며 일을 하고 있는거지... 라 말하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헤밍웨이가 전해주는 그야말로 '보석같은'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가족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일을 하고 있다지만, 실제 나는 그로 인해 그 '위함의 대상'인 가족들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이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음으로부터 받게되는 삶의 고통을 결국 난... (침대로 표현되고 있는) 내 '가족'으로부터 치유받게 된다라는, 누구나 알고 있다 말하는 이 간단한 진리를 이 별 것 아닌 스토리를 통해 작가가, 이 별 것 아닌 스토리를 읽어본 독자라면 결코 잊을 수 없도록 마음 속에 새겨주고 있다라는 거, 이것이 바로!!! 작가 헤밍웨이와 그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게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이라는 수식어를 아니붙일 수 없게 만들어주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채,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배에 매달려 있는 생선을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항구에 묶여 있는 그의 배를 본 마을 사람들이, 그 배에 매달려 있는 고기의 뼈를 보고 그 엄청난 크기에 다들 무척이나 놀라지요. 과연... 그 물고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토록... 저주를 퍼부었던, 노인을 괴롭혔고, 배를 제외한 노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상어 떼들. 그 상어 떼들로부터 지켜내려 했던 노인의 그 고기는... 다름아닌 똑같은 상어였었던 겁니다. --- "상어가 저토록 잘생기고 멋진 꼬리를 달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라는 이 마지막 문장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또 '불행/고통'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가짐만이 다를 뿐인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작가의 또 하나의 교훈이... 책을 덮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를 감동시켜주더군요. 

문득... 며칠 전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삶'과 '옳다고 보여지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타인의 삶' 중 과연... 내가 나의 아이에게 권해줄 만한/권해야 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더랬지요. 연신 닥치는 고난을 그래도 꿋꿋이 이겨내고 있는 노인의 삶과, 행운인지 실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노인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다른 어부들의 삶 중 과연... 우리는 어떤 삶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될까요? --- 당연!히 노인의 삶은 아닐겁니다. 노인의 삶은 그저... 우리에게 '교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아질 뿐이니까요. : 저는 과연... 어떠한 삶을 제 아이에게 권해주게 될른지 아직은 궁금증... 으로만 남아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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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년하고도 4개월 전, 사이판에 갔었을 때 찍었던 사진들입니다. :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이처럼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건데, 내가 잡은 물고기가 넉넉치 못하다면 발벗고 나서서 다른 물고기들을 충분히 먹을 수 있을만큼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물고기들을 이렇게 회쳐주고 구워주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잔뜩 있는데... 세상에 불만 가질 것이 뭐가 있으며, 그 노인은 순전히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얼핏이나마 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게... 그저 즐겁지만은 않은거구나, 너무도 힘들고,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구나... 를 느끼게 되는 저의 요즈음.이 이 작품을 읽고 느끼게 된 제 감동을 더더욱 크게 만들어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삶이란 게 즐겁기만 할 때'에도, 또한 '삶이란 게 너무도 나를 지치게 할 때'에도 여전히... 제 머릿속에 커다랗게 남아 있게 되리라 믿게 됩니다.    

 

"너는 지쳐 있단 말이야. 속속들이 지치고 만 거야." --- 역경의 상황에서 노인이 스스로를 위로했던 이 말. :  저 또한... 지금의 제가 그저 지쳐 있는 것 뿐이라고, 그것도 속속들이 지쳐 있을 뿐인거라고... 그렇게 저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비록 이래저래 고민 많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만, 노인에게 '배'가 남았고, 그에게 '침대'가 있었었듯이, 제게도 또한, 어쩌면 제게는 더욱! 많은 것들이, 그리고 소중한 가족이 여전히 남아 있다라는 거. 제 마음 속에... 꼭꼭 새겨두면서 말이죠. 

 

(엄청난 분량의 <작품 해설>이 말미에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그저... 제가 읽고, 제가 받은 느낌을 살려놓고 싶어 읽지는 않았습니다. 추후 그 부분까지 읽게 된다면, 이 글에 추가/변경될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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