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인간 -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지음, 김찬호 옮김 / 민음사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어느 이웃분께서 덧글로 '니 글은 다른 데 같다놔도 니가 쓴 글인지 딱! 알 수 있을꺼 같다'라 써주셨더군요. (물론! 표현이 이렇지는 않았고, 사뭇 칭찬의 뉘앙스마저도 느껴졌던 글이었습니다.) --- 일단 문장 하나가 무쟈게 길지요. 저도 나름 짧게 줄여보려 노력해봅니다만 웬지... 제가 써놓은 긴 한 문장을 두 세개로 끊어버리면, 읽는 데 있어 뭔가 제가 원하는 맛(!)이라는 게 살지도 않거니와, 뜻마저도 약간 다르게 전달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그 노력을 항상 이겨버리는겁니다. 근데 문제는 말이죠!

 

제가 말할 때에도 그 비슷한, 끊어내지 못해 이야기가 길어지는, 심지어는 옆길로 새어버리는 일마저 생겨난다라는 겁니다. --- C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A와 B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걸 토대로 C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어!란 생각에 친구와 마주앉아 우선 A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근데 이 상황이란 게... 저 혼자 연설을 하는 상황은 아닌거잖아요. 제가 뭔가 이야기를 하면 친구가 그에 대한 맞장구를, 혹은 다른 의견을 말하곤 하니까요. 그럼 그때 A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전 어느덧 A1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뭐 그렇게 A2, A3 …… 로 나가다보면, 그날... 제 입에서, 정작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C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나오지도 못한 채 술기운이 저를 지배하는 순간을 영접하고 말지요. 거의... 예외 없이!  (두괄식 화법이라도 배워야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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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삶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최초의 인간 사회와 언어는 어떠했을까? 각각의 문화들이 다양하게 진화하면서도 그 경로들이 놀랍게 수렴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계급 구분은 왜 생겨났는가? 작은 밴드 및 촌락 사회가 군장 사회로 대체되고 그것이 다시 강력한 국가에 흡수된 경위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여러분은 나만큼 관심이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조건 가운데 얼마만큼이 유전자이고 얼마만큼이 문화적 유산인지, 질투, 전쟁, 가난, 그리고 남녀 차별은 불가피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 인류는 도대체 살아남을 가망이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나만큼 궁금해하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기 바란다. …… 당신은 당신 집의 굴뚝 연기를 넘어서 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스스로를 인류 전체의 일원으로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으로 특정한 부족, 국가, 종교, 성, 인종, 군중 등의 일원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고? 그러면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자신이 쓴 책에 대해 이렇게나 감출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는 듯 보이는,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아보이는 그 자신감을, 읽는 이로 하여금 끝내 매력으로 느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위와 같은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Z를 말하기 위해 A부터 시작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저처럼 곁길로 빠져버리는 일 없이, 매우 충실하게 하나하나 서술해 놓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 마빈 해리스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Z는 바로... "인간의 삶에 대해 비교문화적이고 범지구적이며 진화론적인 안목을 심어 …… 그래서 우리가 어떤 종(種)이고 우리 문화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없는지를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무쟈게 거창하죠? --- 네! 이런 거창한 Z를 이야기하기 위해 전개되는 A부터의 내용들은, 읽어내기에 (A1, A2등의 샛길로 매번 빠지기만 하는 사고를 가진 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매우 어려웠더랬습니다. '이 책은, 지금 나 같은 사람이 한 번 읽어본다해서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관련된 다른 책들 - 소설을 포함하여 - 을 읽어갈 때면 어김없이 찾아 뒤적이며 부분부분이나마 다시금 읽게 될, 그리고 인용하게 될 그런 책이긴 하다!' 라는 억지스런 위로를 했었어야할만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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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워서 절반쯤 읽다 포기했던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그 (반쯤 읽어 본) 수준에서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인간의 진화를 오로지(?) 생물학적 이유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같은 사람은 도킨스의 주장을 자칫(!)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이해해 버리게도 되지요. (사실 전, 지금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해가 틀렸을꺼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만. --;;) 이에 반해 마빈 해리스는, 물론 그가 문화인류학자라는 배경 때문이겠지만, 인류의 진화 거의 대부분을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제 생각/해석엔 말입니다!라는 강한 단서하에, 엄청나게 다른 결론을 각각 낳게 됩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의 렌즈로 바라본다면, 생물학적인 이유로 인해 인류가 과거로부터 그런 사회·문화적 배경을 갖게 되었던 것일테고, 따라서 현재의 인류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밖엔 진화할 수 없었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지요. 왜? 생물학적으로 그러니까! 반면 마빈 해리스가 이 책에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처럼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진화를 바라본다면, 현재 인류의 '지금과 같은 모습'은 유일한 선택지가 아닌게 되어버립니다. 왼쪽으로도, 혹은 오른쪽으로, 아니면 그냥 직진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셋 중 한 길을 선택하게 했었다라는 게 되니까요. ('생물학적 결정론'에는 물론 아예 이런 선택지 자체가 없겠지요.) 

 

A로부터 출발하여 Z의 단계에까지 이르르는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정리해낸다는 건 제 능력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저자의 시각, 즉 인류의 진화를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는, 제 생각에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몇 부분들, 주로 우리의 현재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가? (이 책의 원 부제 중 Who We Are, Where We Came From 에 초점을 둔) 부분들만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저의 서술보다는 인용한 부분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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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두 발로 걷게 되었다라는 사건, 그리고 '호모 파베르'로 불리울만큼 도구의 이용에 탁월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다음의 문장들에,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맥락'이라는 렌즈의 특징이 단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4백만 년 전, 언어나 의식이 있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이미 두 발로 곧게 서서 걸어다녔다. …… 다른 유인원들은 손처럼 생긴 발을 지니고 있었다. 그 큰 발가락은 … 숲속에서 높은 가지의 과일을 딸 때 나뭇가지에 걸고 매달리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딴 과일을 제 힘 닿는대로 한가득 운반하는 데는 별 소용이 없었다. …… 왜 자연은 어떤 한 종류의 유인원을 두 발로 걷도록 만들었을까? 그 해답은 그러한 동물이 땅 위에서 번식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 ……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유인원이 진화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그들만이 땅 위에서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그로써 일상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데 있다.

 

동물들은 뇌가 크지 않아도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유인원과 원숭이들 역시 지능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능한데도 도구 사용의 범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 인간을 뺀 나머지 동물의 왕국에서 현재 가장 탁월한 도구 사용 솜씨를 가진 것은 침팬지이다. (동물원에서 길러지고 있는 침팬지들은 더더욱 뛰어난 도구 사용 능력을 보여주는데) …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침팬지는 필요가 생기면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을 확대할 줄 안다는 점이다. 야생 상태에서 비교적 도구 사용이 드문 것은 지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야생에서 그들은 대개 그냥 타고난 신체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비용-효과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즉 뇌의 용량이 커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다,가 아니라 도구의 사용으로 인해 뇌의 용량이 커졌다라는 것인데, 이 사실 자체도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논리의 전개를 거꾸로 올라가다보면, 현생 인류의 선조들이 직립 보행을 했었던 것까지를 '동기 부여'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보게 된다라는 점이 정말!로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지는 것 중 하나는, 다른 유인원들과는 뚜렷이 구분되었던 현생 인류의 선조들, 하지만 아마도 외모적으로, 최소한! 피부의 색은 똑같았었을 우리 선조들에게서 어떠한 이유로 인해 지금과 같이 다른 피부색을 가진 여러 인종의 후손들이 나오게 된 걸까 하는 점이겠지요.       

 

 

저자는 아마도 갈색이었었을 1만 년 전 조상들의 피부색이 북유럽인에게는 흰 색으로, 중앙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검은 색으로 변하게 된 시초를 '특수한 적응의 결과'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피부빛은 멜라닌이라는 분자에 의해 결정된다. 멜라닌의 일차적인 기능은 가장 윗쪽의 피부를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 멜라닌 분자가 많을수록 피부는 더 검어지고 햇빛 화상과 모든 피부암에 걸릴 위험은 적어진다. …… (하지만) 만약 햇빛이 오로지 해만 끼칠 뿐이라면 자연은 모든 인구 집단을 검은 피부빛으로만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햇빛은 순전히 위협만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부에 와 닿으면서 표피 속의 지방질을 비타민 D로 전환시켜 준다. …… 비타민 D는 몇 가지 음식에서 얻어질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바다 물고기의 기름과 간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내륙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중요한 물질을 공급받는데 햇빛과 자기의 피부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 피부의 독특한 색깔은 상당한 정도가, 햇빛이 너무 많아 화상이나 피부암에 걸릴 위험과 너무 적어서 구루병이나 골종에 걸릴 위험 사이의 어떤 타협인 셈이다. 인류의 대다수가 갈색 피부를 가진 것이나, 열대 지방 사람들의 피부가 검고 위도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피부가 희어지는 것도 바로 그런 타협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처럼 피부색으로 나뉘어지는 인종간의 차이는 사실 알고보면 별 것 아니었던겁니다. 헌데! 우리, 현재의 인류는 (자연의 선택일 뿐이었던) 이 별 것 아닌 피부색의 차이를 가지고 (사회·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인종간 차별'을 만들어 버렸지요. '아프리카 흑인들은 유전적으로 영원히 뒤처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 잘못된 믿음에 대한 저자의 다음 설명/반론은 (어쩌면 현재에도 진행중일지 모르는) '인류의 진화'가 왜?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바라보아져야/파악되어야 하는가를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하라 사막에 의해 유럽의 기술이 전해지지 못했다. 게다가 사막 남쪽 사람들은 사막을 횡단하는 데만 골몰한 나머지, 바다로 모험을 나설 만한 동기를 갖지 못했었고, 그런 상황에서 포르투갈 배가 15세기 가나 해안에 도착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그것이 이후 5백년 간의 아프리카의 운명을 결정해 버린 것(이었다.) ……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금광이 바닥나자,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유럽에 노예로 넘기고 그 대가로 옷과 무기를 얻는 데 몰두, 그 결과 엄청난 전쟁, 반란, 그리고 자생적인 봉건 왕국의 파탄이 빚어지면서 아프리카의 정치적 발전 궤도는 중단(되었던 것이다.) …… 식민 정부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아프리카가 종속적이고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었다. 부족들 사이에 전쟁을 부추기고, 가장 최소한의 수준으로 교육을 제한하며, 무엇보다도 정치적 독립을 이룬 후에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지 못하도록 산업의 하부구조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 그 주요한 방법이었다. 그런 역사를 이어받은 아프리카인들이 만일 다음 세기 중반 이전까지 독자적인 선진 산업 사회를 이룩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들은 인종적으로 열등한 것이 아니라 매우 탁월한 것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    

 

이것이 왜 사회·문화적 맥락인가? 이건 역사적 맥락에서 본 아프리카의 과거 아닌가?라는 질문은, 제 생각에는, 그들을 식민지로 거느렸던 서구만의 전형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피지배집단의 개개인들에게 그 상황은 세계사의 흐름으로 읽혀졌던 것이 아니라, '먹고, 숨쉬고, 배설하고, 짝을 짓고, 자녀를 낳고, 앉고, 돌아다니고, 잠자고, 눕고 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 반드시 자기 사회의 문화의 어떤 측면을 따르거나 그것을 드러내기 마련'인간으로서 한 개인의 일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실제 미국에 사는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IQ가 낮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반박에 대해서도 저자는 위에서와 같은 사회·문화적 견지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저개발과 마찬가지로 미국 흑인들의 낮은 IQ도 수백 년 동안의 체계적인 억압의 결과이다. 아프리카의 저개발, 또는 미국 흑인들이 고통받는 빈곤, 범죄, 마약 등을 두고서 그것이 선천적인 지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잘못된 정보를 퍼뜨려 흑인들의 평등한 지위 쟁취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흑인들이라고 해서 다른 인종과 달리 과학 기술과 사회 변동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가진 것은 전혀 아니다. 언젠가 그들도 빛을 볼 때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 해도 될 만큼, 다양한 주제들 - 무려! 102개의 챕터!!! - 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 <우리는 왜 잔치를 벌이는가>라는 장은, '잔치'라는 것의 인류학적 근원 자체도 흥미로왔지만, 그것을 인용해 현재의 현실을 꼬집어내고 있는 부분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배고픔이라는 경험은 산업 사회 이전 전체 기간 동안의 인류에게는 '잉여 음식 에너지를 지방질로 저장해 놓는 능력'을 생물학적 유산으로 남겨주었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방질로 저장된 여분의 에너지는 그 다음번 추위, 가뭄 또는 궁핍기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반응이었다라는 것이고, '잔치'라는 사회적 문화는 지방질을 저장하기 위한 하나의 생존 행위였었던 거라는 거죠. 하지만!!! 지금 미국인들이 '반쯤 아사 상태로 있다가 고갈된 지방질 저장고를 빨리 보충해야 하는 절박함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건 아닙니다. 이렇듯...

 

'잉여 음식 에너지를 지방질로 저장해 놓는 능력'이 배고픔으로부터 유래된 생물학적 유산이었지만, 사실 우리의 선조들은 먹을 것 자체가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 지속되었던 탓에 살찔 틈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연 선택'이라는 기제는 비만 때문에 심장과 동맥을 손상받을 정도로 많이 먹는 이들을 도태시켜볼 기회를 아예 가지지 못했었던, 즉 인간의 몸에 디자인된 유전적 결함인 과식,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비만은 자연 선택도 미처 제거해 내지 못한 인간의 약점이 되어버렸다라는 거지요. 헌데... 이 비만이라는 '인간의 약점'이 '모든' 인간의 약점은 아니라는 문제점을 향해있는 저자의 시선이 매우 날카롭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보다 여전히 키가 작지만, 이제 그들은 더 살이 쪄 있다. …… 이러한 패러독스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체중 조절은 칼로리와 영양, 그리고 비만이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없다. 조깅, 에어로빅, 그 밖의 많은 스포츠는 시간을 많이 들여야하고 또한 흔히 비용도 많이 치러야 한다. 설탕과 녹말이 많은 음식은 칼로리가 적으면서도 영양가가 많은 고기나 생선보다 싸다. 끝으로 임금이 낮은 서비스업이나 노조도 없는 공장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공공 복지의 혜택으로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위를 쫒는 중산층이 유지해야 하는 복장과 와모의 기준에 순응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사실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서도 위와 비슷한 주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 책 「작은 인간」은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더해, 그 현상의 근원까지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게 창피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참!으로 속시원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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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인지라, 편집면에서는 (요즘 나오는 책들에 비해) 매우 불친절합니다. 그렇잖아도 빡빡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인데, 거기에 줄 간격마저도 매우 촘촘한, 게다가 무겁기까지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화적 특성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 문화적으로 거듭거듭 선택되어온 것은 거의 어느 상황에서든 단지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라는 저자의 핵심적 주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촘촘한 연결로 이루어져있는 A로부터 Z까지의 인류 진화에 관한 내용 속에, 한 시도 잊혀지지 않은 채 녹아들어 있기에 참으로 많은, 이제까지 미처 생각할 수 없었었던 부분들에까지 뻗쳐있는, 책 속 102가지의 주제들에서, 읽는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부분에서 상당히 유익한 지적 충격을 건네어 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위에 제가 언급한 주제들 말고도 '문화적 선택이 유전적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부분의 능력에 날카로운 차이를 창출해 낼 수 있는 힘을 지녔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남자 아이들이 수학 점수가 놓은 까닭은?>이라는 장과, 성차별과 전쟁이라는 현상을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전쟁과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전쟁의 발생 이유를 생태학적이고 인구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하는가> 등의 장이 매우 흥미롭게 읽혀졌었었지요. (솔직히 말해, 하지만!... 흥미롭지 않게 읽혀졌던/지루했던 장이 더 많기는 했습니다. 이 책의 원제 중 'Where We Are Going' 부분이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가장 관심가는 부분이었습니다만, 가장 읽어내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웠었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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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만족도는, 읽는 이가 지니고 있는 학문·지식의 배경, 개인적 관심사, 어쩌면 (세계관을 포함한) 종교관에 따라서도 지극히 극과 극으로 나뉘어질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예전에 읽었었던 「블랙 라이크 미」나 「노동의 배신」과 같은 사회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들, 거기에 더해 바로 이전에 읽었던 「제노사이드」가 건네주었던 메세지들을 다시금 되새겨봄에 있어서, 또한! 이제 읽으려 하는 「혹성탈출」과 같은 소설을 이해함에 있어서마저도, 그 밖에 '인간의 본성'에 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하고 있는 책들을 읽을 때면, 마치 재수 시절의 제가, 고1때 샀던 해법수학을 여전히 뒤적였던 것 마냥, 그렇게 꽤나 (끝을 알 수 없는) 오랫동안 (복습과 인용을 반복할) 참고서스러운 역할을 하게 될거란 사실 하나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입니다. 최소한... 제가  지금처럼, 혹 지금처럼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독서라는 이 훌륭한 취미를 잃지 않는 한 말이죠. 자... 이젠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은, 읽어내기에 별 부담도 없을 듯 보이는, 피에르 불의 「혹성탈출」 그 첫 페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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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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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서비스란게 처음으로 등장했던 시절로 한번 돌아가볼까요? --- 당연!히 처음으로 큰 돈 들여 전화기를 구입해 전화 서비스에 가입한 누군가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양방향 통신이라는 전화 서비스의 특성상, 자기 혼자만 전화 서비스에 가입했다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전화를 걸/걸어올 상대가 아무도 없으니까요. 곧이어 두 번째, 세 번째 … 의 가입자들이 생겨나겠지만, 여전히 그들이 서로를 알지 못한다면 여전히 자신의 수중에 있는 전화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 이제 시간이 좀 흘러, 드디어! 내가 아는 누군가도 전화 서비스에 가입을 했습니다. 이제서야... 전화기가/전화 서비스에 가입했다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역할을 시작하게 된거죠. --- 이처럼... 전화, 철도, 전기, 심지어는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 서비스까지를 포함하는 '네트워크 산업'이 소비자들에게 의미있는 서비스가 되기 위해서는, 또한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에게 수익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가입자 수가 필수적입니다. 헌데 말이죠!!! 전화 서비스 산업에서의 가입자 수 증가에는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답니다. 바로... 'critical mass(임계군)'라는 일정 수준의 가입자 수를 넘어가면 그 이후부터는, 서비스 제공 기업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가입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망외부성(network externalities)'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서비스 제공 기업은, 초창기에는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가입된 가입자 수가 '망외부성'을 불러일으키는 이 critical mass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겁니다...라는게 1997년 제 석사 논문의 주제였었답니다. ^^;; 

 

자! 왜 이 이야기를 했느냐하면... 이 '망외부성' 비슷한 게 '독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라는 걸 이 책, 「제노사이드」를 읽고 문득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독서가 (독서 감상문이라는 걸 써놓은 덕분에) 현재의 독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라는 거, 또한 지금 읽고 있는 책으로부터 생겨난 호기심이 미래의 독서를 결정지어 주기도 한다라는 거, 하지만 이 긍정적인 영향들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서는 독서에도 또한! critical mass를 넘겨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걸 느꼈다는 거지요. 이건 꼭! 양의 문제만이 아닌, 어쩌면 다양한 분야에 걸친 독서의 문제일 수도 있겠는, 뭐 그런 것 말이죠. 여전히 아직은 제가 이러한 외부성을 즐길만한 수준의 양과 범위를 충족시킨건 아닙니다만, 운좋게도 제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 시간 속에, 제가... 진화론과 수학에 관한 책들을 몇 권 읽었었다라는 게, 이 소설을 읽는데 있어 배가된 재미와 함께, 저에게 '이 소설을 읽는 이유'를 더더욱 확고히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주더군요. 그렇다면... 과연 '소설을 읽는 이유'라는 게 뭘까요? 제 생각엔 말이죠... 

 

 

 제 책꽂이에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살 때만 해도 당장이라도 읽을 것 같았던 「불평등의 대가 The Price of Inequality」라는 책이 한 권 꽂혀져 있습니다.

 

불평등이 사회에 해로운 이유는 단지 그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불평등은 비효율적이다. 부유층은 상위 1퍼센트의 이익이 나머지 99퍼센트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중산층과 빈민층을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스티글리츠는 이 책에서 오늘날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이런 불평등을 초래한 방식이 어떻게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 <네이버 책소개> 중​ 

 

지금 나 먹고 사는 것도 머리아파 죽겠는데... 라는 이유로 '사회의 불평등, 그리고 그 불평등이 초래하는 경제 성장의 저하' 등을 지금 제가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제가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제아무리 분노한다 한들, 저의 분노만으로 그 불평등이 시정되지도 않을테구요. 그리고 이건... 바로 이전에 올린 2014년 노벨 경제학상을 장 티롤 교수님이 받았다라는 사실에 제가 흥분감까지 느꼈다는 것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이 질문 하나면 저의 입은 콱! 막혀버리잖아요.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 부르는, 거기에 더해 '호모 루덴스'라고까지 부르는 이유가 바로... 현재의 내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며, 그와 더불어! (상상이라는) 지적 유희의 일 수단으로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읽게 만드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사자가 사슴이라는 종(種)의 존속을 걱정해 자신의 허기짐을 참아내지는 않듯이, 사슴들 또한 자신의 무리들 중 유독 병약한 모습의 동료 사슴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 듯 그렇게... 우리가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루덴스의 특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즉 누구나 다!!!에게 이 작품 「제노사이드」는 더할 나위 없는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토리의 스케일이 가지고 있는 장대함도 그 유희의 증가에 한 몫 하겠지만 무엇보다... (캐내어 보자면 상당히 많은 주제들을 끄집어낼 수 있겠으나, 일단!) 크게 보아 다음의 두 가지 주제만으로도 독자 스스로 자신이 호모 사피엔스임과 호모 루덴스임을 깨닫게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다라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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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라는 형태로 표출되는 개인의 인격 】

 

 

무서운 것은 지력(知力)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근거리에서 적 병사와 조우한 미군 병사가 총의 방아쇠를 당긴 비율이 얼마나 될 것 같나? 겨우 20퍼센트다." --- 전후 미국은 이 20퍼센트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병사들의 훈련 방법을 바꾸었다고 소설은 적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확률의 증가가 아닙니다. 왜 애초부터 20퍼센트 밖에 안되는냐의 이유가 중요한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한 심리학자의 입을 빌어 죽여야 할 상대와의 거리, 즉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적이 인종적으로 다르며, 언어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다르게 되면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그만큼 죽이기 쉬워진다. …… 그리고 싸우는 상대가 윤리적으로도 열등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철저하게 가르쳐두면 정의를 위한 살육이 된다. …… 살육병기의 개발은 적을 얼마나 멀리, 보다 간단하게 대량의 희생자를 내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미국의 대통령 번즈에게 이라크는 물리적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먼 상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또한 전쟁 개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쥐어져 있었지요. 천재 과학자 루벤스는 번즈의 이라크 침공이 '정의를 위한다'라는 명목하에, 실질적으로는 석유를 노린 침략 전쟁이었다라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루벤스는 곧... 자신의 금전욕을 신보수주의라는 정치 사상으로 호도하는 정치가들 한 사람 한 사람도 이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참가자들이지만, 그들보다! 국가 기관인 대통령으로서의 번즈가 아닌, 개인/인간으로서의 번즈에 대해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게되지요. 


전지전능한 존재를 꿈꾸며 이교도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널리 보이는 습성이었다. 피부색이나 언어의 차이뿐만 아니라 어떤 신을 믿는지도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장치로써 기능했다. 그리고 신은 회개했다고 말하기만 하면 대학살의 죄악도 사라지게해 주는 편리한 존재였다. …… 인간은 모두 다른 사람을 상처 입혀서라도 식량이나 자원, 영토를 빼앗고 싶어 했다. 이 본성을 적에게 투영하여 공포를 느끼고 공격하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을 초래하는 폭력의 행사에는 국가나 종교라는 세력이 면죄부가 되었다. …… 이러한 악으로부터 눈을 감고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동종 간의 살육을 비난할 만한 지성이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조차도 이교도의 살해를 장려했다.

 

이러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아프리카의 콩고에 '본 적 없는 생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생물이 현생 인류를 능가하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첩보가 번즈 대통령에게 보고됩니다. 


 위협이란 '힘'이었다. 두려운 점은 핵폭탄의 파괴력이나 최첨단 과학 기술력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앎의 힘 그 자체였다.

 

첩보의 내용에는 이 생물체가 고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추상적 수학 사고 능력이 매우 뛰어나 40자리 합성수를 단 5초만에 두 개의 소수(素數)로 분리해내었다고 적혀져 있었었지요. 미국 NSA가 이 첩보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생물체의 수학적 능력, 정확하게는 소인수 분해 능력이었는데, 만약 이 생물체가 적국에게 넘어간다면 미 정보국/국방성의 암호가 무력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겁니다. 미국은 여러 첩보를 종합해 인류의 진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생물체를 '진화한 인류'로 간주하지요. 그리고! 바로 이 앎의 힘그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번즈 대통령은, 이교도 대신에 나타난 새로운 적인 그 '진화한 인류'를 말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인류를 능가하는 지성이 이 지구상에 나타났다고하면 미국 같은 초거대국이 어떻게 대처할까? 역시 죽이려 하지 않을까? 자신들의 이익이 되도록 초인적인 지성을 이용하려 해도 지적으로 열등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지배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사전은 '제노사이드'란 단어를 '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량학살하여 절멸시키려는 행위'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떠올리게 되는 '제노사이드'에는 '대량 학살'의 이미지가 강합니다만, 이 작품에서 핵심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건 숫자의 문제라기 보다 '절멸'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번즈 대통령이 내린 명령은, 즉! 개인으로서의 번즈가 아닌, 국가의 인격 바로 그 자체로서의 의사 결정권자 번즈 대통령이 내린 명령이 바로  단 한 개체만이 존재하는 종(種)인 '진화한 인류'에 대한 제거, 즉! '제노사이드'였기 때문이지요. --- 유전자 변형 씨앗 하나는 우리 인간이 충분히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관리할 수 없는, 어쩌면 자라나서 우리를 관리하려들지도 모를, 하지만 아직은 씨앗일 뿐인 것이 있다면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처가,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인격을 가진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 작품은... 루벤스의 입을 빌어, 이 결정이 개인 번즈에 의해 선택되어진 것이라 보고 있으며, 이는 어쩌면...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제노사이드'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작가가 독자와 함께 공유하길 원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쨌!든... 제노사이드가 악한 행동임에는 틀림 없습니다...만!



【 선과 악의 정의(definition) 】

      

지금부터 약 50년 전, 트루먼 대통령이 알버트 아이슈타인에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만약 우주인이 지구에 찾아오면 어떻게 대처하면 될지를. 아이슈타인의 대답은 '결코 공격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뛰어넘는 지적 생명체에게 전쟁을 건다한들,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대통령 과학 고문인 가드너 박사의 말

 

어설픈 기독교 신자로서 전... 지구 이외의 어느 곳에 생명체가 존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거의 확실히!'란 대답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구에만 생명체를 만드셨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외계인이 과연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갖고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라는 이유로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외계인을 '인류를 뛰어넘는 지적 생명체'라 단언한 아이슈타인의 말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아니죠. 질문 자체가 '우주인이 지구에 찾아오면'이었기에, 아인슈타인의 대답이 그러했던 것이었으니까요


미국이 입수한 첩보는 아프리카에 있는 그 '본 적 없는 생물체'가 피그미족의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즉! 최소한 '우주인이 지구에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럼에도 '누스(Nous)'라 명명되어진, 그 '본 적 없는 생물체'는 초인적인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체... 이 생명체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진화라는 현상에는 점진단속(斷續)의 두 가지 방향에서 생물종을 탄생시키는 미지의 메커니즘이 잠재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우리 영장류에게도 해당된다. …… 현생인류에서 진화한 다음 세대의 인간은 ……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압도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이 다음 세대의 인류가 출현할 수 있는 장소는 문명국이 아니라 주변과 교통이 단절되어 있는 미개척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지역에 사는 소수 집단에서는 개체 수준의 유전자 변이가 집단 전체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30년 전에 발간된, 인류의 멸망 가능 시나리오를 담고 있는 <하이즈만 리포트>는, 현재 살고 있는 인류를 마지막으로 진화가 멈췄다고 하는 생물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논리로, 인류가 아직 진화의 도중에 있다고 추론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바로 이 <하이즈만 리포트>에 근거하여 누스가 '진화한 인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었죠. 여기서...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침팬지 무리의 싸움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의 중반이 넘어가서야 독자는 알아차리게 됩니다. 정글 속을 진군하고 있던 네 명의 용병으로 구성된 '누스' 제거팀은 두 무리의 침팬지들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승패가 기울어지고, 승자가 패자 집단 우두머리 침팬지의 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본 한 용병, 믹이 승자 침팬지와 그가 살해하고 있던 어린 침팬지 모두를 총으로 쏴버립니다. 이 장면을 본 팀의 리더 예거는 믹의 행위가 어린 침팬지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승자 침팬지의 행위가 부당하다 느껴서였는지에 대해 궁금했지만, 결국 이를 그저 의문으로만 남겨 두지요. 하지만 이 의문이 결국...

 

그럼 새로이 탄생한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할까? 우리를 멸망시키려 들리라는 것은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 …… 그들이 본 현생인류는 같은 종끼리 살육의 나날을 보내는 데다 지구 환경을 파괴하기만 하느 과학 기술을 갖고 있는 등,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한 하등 동물이다. 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열등한 생물종은 보다 고도의 지성에 의해 말살된다. 인류의 진화가 일어나면 얼마 안 가 우리는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북경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하이즈먼 리포트>는 위와 같은 결론을 '진화한 인류'에게 내리고 있었는데, 작가는 예거가 숲에서 보았던 침팬지 집단간의 전쟁을 종식시켰던 것이 결국 (침팬지 보다 진화해 있는) 인간이었다라는 점을 보여주며, 이 리포트의 결론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하이즈먼 리포트>를 작성했던 하이즈만 박사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확인시켜 주고 있기도 하지요.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의 정의야. 인간성이란 잔학성이란 말일세. 일찍이 지구상에 있던 다른 종류의 인류, 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도, 현생인류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나는 보고 있네. …… 우리가 살아남게 된 것은 지성이 아니라 잔학성이 이겼기 때문이야. …… 현생인류는 다른 인류와의 공존을 바라지 않았다네. …… 인간이라는 동물의 뇌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질적인 존재를 구분하고 경계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난 이거야말로 인간의 잔학성을 말해 주는 증거라고 생각하네.

 

미국 정부는 '진화한 인류'를 끝까지 제거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습니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미국에게 불리해지기만 합니다. 이 때 등장하는 하이즈만 박사의 한 마디, "누스를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네. 침팬지에게 습격당하면 인간도 당연히 역습하겠지. 그걸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말은, 누스와의 대결이 '인간과 침팬지의 대결'이라는 진화 단계가 다른 두 종간의 대결에서 우리 인류가 약자의 입장에 놓여져 있다라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누스를 이길 수 없다라는 것이지요. 

 

승산이 없는 우리로서는 누스의 의도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지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네. …… 어떻게 지느냐,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네. …… 인류와 초인류 사이의 힘 관계는 인간과 신의 관계와 동등하지. 어쨌건 상대는 초월적인 힘으로 반격하고 있으니, 거기서 누스가 선택한 것은 신의 전략이네. 처음에는 인간에게 협조하려 하지. 그에 반해서 인간이 배신하면 뼈아픈 보복을 하고, 인간이 협조하면 즉각 그 쪽도 협조를 해 주겠지. 복수심 따위는 없어.

 

한 마디로, 누스와 인간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 전략을 서로 들고 맞서고 있으며, 인간이 누스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누스로부터 최대한의 호의를 이끌어내야한다라는 것이 바로 하이즈먼 박사의 충고였습니다. 헌데! 우리가 만약 하이즈먼 박사의 이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한 가지 이율배반적 문제가 튀어나오게 되지요. 다름 아닌... '제노사이드'를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저지른 제노사이드는 분명 '악'이라 규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애초에 미국이 누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 과연 '악한 행동'인가라는 거지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에는 복제된 인간을 바라보는 실제 인간의 인식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 인간의 심리에는 이처럼 스스로 단순해져버림으로써 자신에게 지워진 짐을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습성이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습성이 실제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라면, 그렇다면!!! 아마도 현생 인류가 '진화된 인류'인 누스를 제노사이드 해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것 또한 누스를 '별개의 존재'로, '인간 이상의 존재'로 인식해버린다면, 그리하여 누스와의 심리적 거리를 멀어지게 만들어버린다면 그 때에는... 이 제노사이드는 '악'이라 불리워질 수는/조차 없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메세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만 됩니다. (물론, 스토리의 마지막 결말을 보며, 저의 이 해석이 틀렸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이 작품의 결말을 이렇게 낸 것은... 그 반대의 경우로 결말이 지어졌다면, 어쩌면 진화라는 것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란 추측을 곁들여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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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선' 혹은 '악'으로 규정지어야하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제노사이드와 같이 '악'이라 확실하게 규정지어진 이 개념에 대해, 이것이 언제나 '악'이기만 한 것일까,라는 새로운 시선을 던져준 이 작품은, 또한 그런 점에서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우리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숙제를 남겨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이 왜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앞으로도 여전히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는 지적 유희를 즐기는, 그런 호모 루덴스로서의 독자가 되는 것만이, 이 훌륭한 작품을 써 준 작가에 대한 옳바른 예의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초반부의 약간 지루한 부분을 지나, <2장>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책을 덮지 못할만큼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를 가진 이 소설, 읽는 내내... 분명! 영화로도 만들어지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이 작품을 장용민의 「궁극의 아이」와 비교하는 감상문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스케일이나 이야기의 빠른 전개 등은 비슷할지 몰라도, 결국 독자에게 남겨놓는 질문의 무게만큼은 사뭇...  「궁극의 아이」와 비교한다라는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분명... 한 때의 유행으로 읽혀져서만은 안되는 작품이기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말이죠.

 

 

※ 읽어본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다른 책 :13계단

 

※ 함께 읽으면 좋은 듯한 책들

- 장용민 作, 궁극의 아이」 : 재미 하나 만큼은!

- 가즈오 이시구로 作, 「나를 보내지마」 : 나와는 별개인 존재를 향한 (진짜) 인간의 심리!

- 김영미 著, 「세계는 왜 싸우는가?」 : 도대체 왜?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선과 악의 상대성에 대한 충격적 묘사!

- 주제 사라마구 作, 「눈먼 자들의 도시」 :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면?

- 히가시노 게이고 作, 「악의(惡意)」 : '이유없는 악의'의 이유를 찾아서!

- 전종환 著, 「오래된 연장통 : 그러니까 '진화'란 뭐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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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 사소하다라 생각하는 것. ---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었을 수도, 혹 고개를 숙이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의 감사를 표시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는, 또는... 누군가의 일생에 걸친 최대의 숙제가 될 수도 있다!라는 사실.  


● 생선회 한 점, 그 위에 편마늘 하나, 다시 그 위에 회 한 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생선회를 먹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앞에 이 햄버거스런 생선회가 있다해도 숟가락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어요. 생선회를 먹을 땐, 나무 젓가락만 필요한 게 아니라, 나무 젓가락으로도 집을 수 없는, 이런 햄버거스런 모양으로 먹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는 생선회를 먹을 때에도 반드시 수저를 필요로 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회를 왜 수저로 먹냐?' --- 이런 저에게 이 소설은, 솔직히 말하자면... 쇠젓가락 한 벌만 주면서 얇게 썬 복어회에 미나리 돌돌 말아 싸먹으라 말하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맛있다고들 하니까 먹어보고는 싶은데, 살짝 대 본 혀끝은 이거 정말 맛있을 거 같아!란 생각을 저에게 해주는데... 제 앞엔 나무 젓가락도 아닌 쇠젓가락이 놓여져 있고, 게다가! 수저도 없는 상황. 이 길지 않은 작품을, 뭐... 그렇게 쇠젓가락만으로 어쨌!든 복어회에 미나리 말아 힘들게 먹어내긴 했는데...   

 

(제가 쓰는 감상문들이 대부분, 책을 소개한다기보다는, 이미 그 책을 읽어본 분들을 머리에 두고 쓰여진 것들입니다만 특히!나 이번 감상문은 절대적으로 이 작품을 읽어본 분들만을 상정하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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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읽었었던 소설들 중, '개인적 감정'에의 한도내에서... 읽고 난 후 저의 마음 속에 가장 날카로운 바늘이 되었던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를 꼽게 됩니다. 만약 하나를 더 꼽아보라 한다면 류전윈의 <닭털같은 나날>이 간발의 차로 그 뒤를 잇게 되지요. ---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바늘의 우연스런 공통점은 모두!!! 그 마지막 문장에 가서/마지막 문장으로 저를 무너뜨렸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무너지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두 작품을 읽었을 때엔, 이미! 이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무너질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고있기에 처음부터 작품 속 주인공에게 소위 말하는 '감정 이입'이라는 게  무서우리만치 생겨났었었지요. 만약!!! 그 '감정 이입'이라는 걸 용케, 작품의 결말을 알지도 못한 채, 억지로라도 이 소설 「인간실격」의 시작에서부터 해낼 수만 있다면, 만약 그렇게...

 

'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는 소설의 두 번째 문장에, 주인공이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쓴 수기의 두 번째 문장인 이 말에, 전적인 동의를 해주고 시작할 수만 있다면만약 독자가 '나에게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일을 해서 벌어먹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만큼 난해하고 애매모호하고 그러면서도 협박의 여운을 강하게 풍기는 말은 없습니다'라는 그의 독백을 그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않아 준다면... 이 작품은 이해하기가 한결 쉬워질 꺼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의 말년에 가서까지도 '내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아직까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라 고백하게 만드는, 그의 인생, 결국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 규정해버리는 그 인생이 바로...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일을 해서 벌어먹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이 말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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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행복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관념이 전혀 맞물리지 않는다는 불안감, 나는 그 불안감 때문에 밤마다 뒤척이고 신음하고 자칫 미쳐버릴 뻔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주인공은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요시코라는 여자와 결혼한 후의 얼마간, 단지 행복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희망을 '어렴풋이 가슴속에서 키워'갔던 그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었지요. 그 원인이야, 참!으로 많은 것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참으로 독특한 주인공에게는 아마도 다음의 한 문장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서로 사기를 치면서도 다들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 속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실로 훌륭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가 인간의 삶에 가득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같은 인간이 내게는 난해하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이 '인간의 난해함'을 극복해보려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 뭐든 다 주신다는데 그게 정말이냐?라 묻는 시게코의 질문을 받고는 그 스스로 "나야말로 그런 기도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냉정한 의지를 주시옵소서. 내게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라 속으로 외쳤기도 했었을만큼,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의 난해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같은 게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신의 사랑은 믿을 수 없었고, 신의 처벌만을 믿었었던 그는, 지옥은 믿어져도 천국의 존재는 믿어지지 않았다 말하는 그는 결국...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집니다. 그렇게...

 

이제 나는 죄인은 고사하고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뇨, 결단코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미쳤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미친 사람은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는군요. …… 이곳을 나가더라도 나의 이마에는 미친 사람,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겠지요. 인간실격. 이제 나는 완전하게,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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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독자 대부분은 아마도... 주인공의 '단 한 순간이라도 미쳤던 적은 없습니다'란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미친 사람은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는군요'라는 말 또한 정말 그렇지 않나요? 미친 사람치고 나 미쳤어요라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의학적 개념이 아닌) 상식의 잣대로 보았을 때... '자신이 가진 행복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관념이 전혀 맞물리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가졌던 주인공의 행동들로부터 주변의 사람들이 '그는 미쳤어'라는 생각을 한 것 자체는 어찌보면 무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시 어쨌든 분명 굉장히 심한 약물중독 상태였었으니까요. --- 제 생각에!!! 주인공 또한 자신에게 정신병원에 한 번 입원한 경력이 생겼다라는, 단지 그 사실만으로 스스로에게 '이제 나는 완전하게,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라 선고를 내린 건 아니었지 싶습니다. 그렇담?...

 

바로 앞서 읽었던 「도련님」의 (유클리드 공간의 사고를 하고 있었던) 주인공에게는 '학교'라는 (비유클리드) 공간을 떠날 수 있는 자유도, 그리고 떠나 머물 수 있는 다른 공간도 있었습니다. 설정 자체가 '학교'라는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었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설정해 놓은 공간은 '인간의 삶 자체'라는, 더 이상 커다랗게 설정되어질 수 없는, 고로 여타의 다른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것이었던겁니다. 물론!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그 공간을 떠날 수 있는 자유는 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건 다름아닌 생의 마감일 수 밖엔 없는 것이었지요. --- ① '이제 나는 완전하게,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라는 주인공의 자책에서의 '인간'은 이처럼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도 없는 그 공간 자체를 의미한다고,  '인간실격'이라는 단어는, '난 아빠/남편/선생으로서의 자격이 없어'에서처럼 어느 특정 '사회적 신분/위치'와 같은 의미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자신이 속해지지 못했던 '인간'이라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한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전 이 소설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만나 서로 얽히고 설켜 살아가고 있는 '인간 사회'라는 것에... 서의 자신을 작가 스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 기 때문에 말이죠.


'음지인(陰地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배자, 악덕한 자를 가리키는 말인 모양이지만, 나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음지인인것만 같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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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마시지 못한 한 잔의 압셍트. …… 나는 영원히 보상받기 어려운 그 상실감을 나 혼자 그렇게 표현합니다.

 

작가의 생애를 읽어보면,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아채게 됩니다. --- 영화배우란 직업이 너무너무 해보고 싶다라 제 블로그에 썼던 적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영화배우처럼 (비록 영화 속에서지만) 수많은 직업을 경험해볼 수 있는, 다른 직업은 없으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자신의 과거를, 이처럼 하나의 문학 작품의 형태를 빌어 타인들에게 (비록 100%의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보여줄 수 있는 작가라는 직업에 또한 매력을 아니 느낄 수 없겠지요. 물론!!! 이 작품처럼 불행한 삶을 가졌었다라는 것 자체는 부러움의 대상도, 매력의 원천도 아니겠습니다만, 최.소.한! 이런 수준의 아름다운 표현으로 그것을 표현해낼 수 있다라는 건 분명!!! 작가로서 다자이 오사무를 바라보는 독자에게는 부러움과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은 틀림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손 체조만 좀 했어도 그의 우울은 치유됐을 것'이라는 (몸 좋은!) 미시마 유키오의 냉소가 사뭇 고개를 끄덕이게도 될 만큼, 저같은 사람이 이해하기엔 정녕 버거운 일생을 보여준 작가가 쓴, 자신의 이야기스러운 이 소설... 은, 작가의 실제 일생만큼이나 읽고 이해해내기에 정말! 많이 어려웠더랬습니다. (한 번 더!) 그럼에도 희한하게...


동화되고는 싶었었으나 끝내 동화되지 못했던, 그러했기에 스스로에게 '실격'이라는 판단을 했었어야 했던 주인공이... 이 공간을 떠나 속하게 될 다른 공간에서는 부디 남아있던 한 잔의 압셍트를 다 비워낼 수 있었었기를, 그리하여 이 공간에서는 차마 채우지 못했던 그 상실감을 끝내는 다 채웠기를, 이상스럽게도 제가 다 바래어보게는 되더군요. 다자이 오사무가 묘... 하게 매력적인 작가임에는 틀림 없는 듯.  

 

 

※ 본문에 등장하는 작가/작품

- 나쓰메 소세키 作, 「도련님

- 미시마 유키오 作, 「금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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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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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180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19세기 초반까지 대다수 수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어떤 수학자도 위의 질문에 "180도"라고 답하지 않는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장우석 著, 「수학, 철학에 미치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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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안겨주는 이미지 그대로, 또한 (대단한 부잣집 아들은 아니었던 듯 하지만 어쨌든 기요라는 이름의 하녀로부터) 실제로 '도련님'으로 불리우며 자라났던 한 남자의 유년 시절부터 청춘 시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띠지에서부터 '일본의 세익스피어'라 칭하고 있을만큼 상당히 유명한 작가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소설의 중간즈음까지를 읽어가며 이대로 끝나지는 않겠지, 뭔가 대단한 메시지가 나오겠지, 하는 조바심/기대를 내내 가지고 읽었었지요. (제가 선택한 번역본에는 삽화도 넣어져 있는, 어찌보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 읽고, '현암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미리보기해서 비교해보니, 제가 읽은 번역본이 적지않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더군요. 어쨌든! 나쓰메 소세키라는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같이 서술 자체에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작가는 아닌 듯 하니, 이게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문제는 아니었다라 스스로 위안 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즐기는 데 있어서는 많이 부족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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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는 "변변한 인간이 못 될 게 뻔해"라는 말을, 어머니로부터는 "앞날이 캄캄하구나"란 말을 들으며 자란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시자, 형이 자신의 몫이라며 건네어준 600엔으로, 1년에 200엔씩 쓰며 3년간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 뭔가가 되도 되겠지란 생각을 했고, 아무 생각없이 지원했던 물리학부를 어쨌!든 졸업을 하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고 자란 주인공이 이나마의 생각이라도 했다라는 게 한편으로는 참 신기하지요?)

 

졸업 후, 다시 얼떨결에 시골 촌동네의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된 주인공이, 바로 그... 시골 동네에서 짧은 기간동안 겪게 되는 (나름)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일단! 이 친구는 - 소설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의상 '이 친구'라고 하겠습니다 - 그때까지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딱히 커다란 고민이란 걸 안해보고 지내온,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대해 현실감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이 친구가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배경 설명은, 제가 찾아내지 못한 걸지도 모르지만, 딱히 작품 속에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학교에 부임한 첫 날, 의례적인 교장 선생님의 훈시, 그러니까 수고해달라,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어달라 등등등의 이야기를 듣고는 '난 그렇게 못살 것 같아!'란 생각에, '(그렇게 하겠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도저히 교장 선생님 말씀대로는 할 수 없으니 임명장을 반환하겠다'라고까지 말해버렸을 만큼이었죠.

 

암튼... 스스로도 '나 같은 놈도 선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된 그의 시골/학교 생활은 이내 여러가지 시련을 맞게 됩니다. 학생들의 수근거림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감시아닌 감시, 태어나고 자란 도쿄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옹색한 시골의 생활, 하숙집 주인의 밤마다 이어지는 끊임없는 골동품 강매도 모두... 그로 하여금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버릴까?하는 마음만 불러일으켜 주는 것들이었죠. 그러던 와중!!!

 

학생들이 자신에게 못된 장난을 쳐 화가 잔뜩 나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마저 '그래도 당신이 선생이니 참으라'는 교장의 말이 그에게 결정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현재 자신이 두 발 딛고 서있는 현실이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옳지 못한 일을 장려하고 있는 듯하다. 악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박힌 듯하다. ……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이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낫지 않은가. 이왕이면 큰 맘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비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술법'이라든가,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등을 학과목으로 정하여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하고 당사자를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저 놈은 미친 놈입니다. 미쳤기 때문에 나를 때린거에요!'라 외치고 있는 자신에게 세상은, '맞은 놈이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미친 놈이 때린 것이지, 그가 미쳤기 때문에 때린 건 아니다!'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 이 친구는 결국 '단순함이나 솔직함이 비웃음을 사는 세상이라면 어쩔 수 없다'라는 단 한 마디의 체념으로 그러한 괴리를 극복하기를 포기하고 맙니다. 그렇게... (소설의 대부분인 시골학교에서의 에피소드들을 제 임의대로/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써 본다면)

 

결국 이 친구는 그 학교를 떠나게 되지요. 그리곤 도쿄로 돌아와 철도회사의 기수 자리에 취직을 해 살아간다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찌보면 불평과 체념으로 가득 찬 한 사람의 성장기가 당췌 왜!!! 이렇게 유명한 소설이 된/되어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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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특정한 공간(유클리드 공간)에서는 180도이지만 다른 공간(비유클리드 공간)에서는 180도가 아니다. 예를 들어 구(球)위에 그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며 말안장 위에서 그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작다

- 장우석 著, 「수학, 철학에 미치다」 중

 

저에게 이 작품은 --- '주인공이 옳다라 믿고 있는 것들의 공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그가 속해 있었던 공간이 옳다라 믿고 있는 것들'의 상이함이, 마치 유클리드 공간과 비유클리드 공간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달라지듯이, 누군가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해답을 주인공 자신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괴리를 만들어내고 있다라는, 실.제.로!!! 제가 이제껏 사회생활을 하며 느껴왔었던 바로 그 것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더랬습니다.


주인공은 끝내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라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를 거부하며, 그 공간(학교 = 비유클리드 공간)을 떠나버렸지요. 하지만!!!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라고 맘 속으로는 여전히 믿고 있지만, 주인공처럼 그 공간을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가 없는, 떠날 수 없기에 역시나 스스로도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다'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 비춰지게 생활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을겁니다. (물론! 저도 그 범주에 속하는 한 사람이구요. --;;)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 소설은 그렇게... 자신의 생각과 다른 해답을 내놓는 공간을 단순히 떠나버린다/버려라,라는 체념어린 도피의 이야기로 읽혀져서는 안되는 거겠죠. 그렇다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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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의 움직임은 자유자재지만, 그 움직이는 범위는 45센티 안에 한정되어 있는 만큼 전후좌우의 사람과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휘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놀랍지 않은가! 이 춤은 상당히 숙련된 기술을 요하며 어지간히 해서는 장단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북 장단 맞추기가 어렵다고 한다. 30명의 발동작, 손놀림, 허리를 구부리는 것도 일일이 두둥둥 선생의 장단 하나에 정해진다고 한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이 가장 느긋하게 "야아! 하아!"하고 태평스럽게 노래를 부르지만, 사실은 상당히 힘든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하니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는, 30명의 춤꾼들이 칼을 들고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을 보고 느낀 점을 다름 아닌/하필이면!!! '아이러니'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친구의 주위에, 울컥하지말고 걍 참으라 말해주었던 하숙집 할머니가,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기요라는 사람이 있었었듯이... 우리에게는 부모, 스승, 선배 등 우리보다 지금 내 인생의 시점을 더 먼저 거쳐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하 완전히 저만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주변의 수많은 좋은 충고들보다, 실제 내 인생을 바꾸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느끼게 되는 깨달음이라는 걸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날의  군무 장면을 이 친구는 '아이러니'라 받아들였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 훗날 다시 되돌아 본다면 --- 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었었음을, 시골 중학교에서 만났었던 그 사람들 모두가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었다라는 것을, 어쩌면! 주인공이 너무도 미워했었던 빨강셔츠나 알랑쇠로 대변되는 시골 중학교 시절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겉으로 보기에는 별 하는 일 없는 듯한, 하지만 실제로는 (학교라는 사회가 돌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두둥둥 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그 당시엔 하지 못했었노라고, (하숙집 할멈의 조언처럼) 나이가 들은 이 때에 깨닫게 된 것을 젊었던 그 당시에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또 바뀌었을까,란 후회를 주인공이 그 훗날에 하게되지 않을까! 싶게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이야기를 구성해놓았다라는 거지요.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이 속해있는 공간과는 또 다른, 어떠한 공간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으며, 내 육신이 만약 그 어떠한 공간에 속하게 된다면, 지금의 내 생각의 공간과 다르다해서 일방적으로 '이 해답은 틀렸다!'라 선언해버리면 안된다라는 이야기로 이 작품을 1차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라는 겁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소설은... 체념과 도피의 이야기가 아닌,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이어야한다!' 라는 믿음을 버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에 따라서는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 아닐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라는 메세지의 여운을 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남겨진 여운 속에는 어쩌면... 훗날 주인공이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라는, 젊었던 시절의 자신에게 그토록 고민을 안겨주었던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라는 걸 깨닫게 된다,라는 (사뭇 허망하다라 느껴질 수도 있는)히든카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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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역사는 우리에게 친숙한, 즉 상식적인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이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도형에 관한 많은 지식들이 사실은 특정 공간에서만 성립하는 상대적 진리였다는 것을 깨달아간 역사이다.

 - 장우석 著, 「수학, 철학에 미치다」 중

 

우연!히도 소설 속 주인공와 똑같이 (이 분은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인 「수학, 철학에 미치다」의 저자가 말해주고 있는 이 '수학의 역사'라는 것이... 단지 '수학'만의 역사는 아니라는, 이건 단어 한 두개만 바꾸면 한 개인이 사회적 존재가 되어가는 그 과정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음을, 이 소설 「도련님」이 다시 한번 문학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던... 그런 독서였었습니다. (보너스로... 번역 작품을 고를 땐, 좀 더 신중해야 한다라는 작지 않은 교훈도. --;;)


작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좀 알아보려 검색을 해보았더니, 이 작품 「도련님」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라 써놓은 글이 있더군요. (네이버 지식백과 : 도련님」) --- 물론 이야기의 끝에 주인공의 감정 실린 '징악懲惡'의 장면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장면을 부각시켜 이 소설에 '징악'의 교훈을 붙여놓는 것도 어색해보일 뿐만 아니라, 저의 이해로는 이 작품엔 아예 '권선勸善'이 등장조차 하지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권선'으로 받아들인다라는 건 어쩌면...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라는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이 작품을 읽어본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많이 궁금하네요. (예전에 네이버에 있었던 '소셜검색' 기능이 없어진 게 이럴 때 참 아쉽습니다. 일정 범위를 정해놓지 않고 검색하는 것보다는 제가 이웃으로 맺고 있는 분들로 한정한 검색은 이럴 때 정말 유용할텐데 말이죠.) 

 

단지 이 작가의 한 작품만을 읽어보았기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겠지만, 오랫만에 만나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특징이 아닐까 싶은) 툭툭 끊어지는 호흡 짧은 서술의 소설을 읽어보니 요즘처럼 정신적으로 복잡할 때엔 딱! 이런 스타일의 책을 읽는 게 좋겠다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의 독서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집어들었는데, 이 작품은 과연 어떻게 읽혀질지가 사뭇. 

  

 

 

※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책의 감상문

- 장우석 著, 「수학, 철학에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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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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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되던 해, 영월 고을에서 있었던 백일장에 응시한 김병언은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저항하다 죽은 정 아무개의 충절과 반란군에 항복한 김 아무개이 죄를 논하라는 시제를 받고는, 김 아무개의 죄를 추상같이 논한 시로 장원 급제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홀어머니로부터 그 김 아무개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는 충격을 받아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생을 방랑으로 보냈다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삿갓을 썼던 이유는 역적의 자손이니 불충이요, 할아버지를 하늘에도 들지 못할 죄인으로 욕했으니 불효라, 스스로를 천지간에 용납받지 못한 죄인으로 꾸짖으려 햇볕 아래 얼굴을 드러내기 않았노라 전해지기도 하지요.

 

작가 이문열은 "설화는 전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이 이야기 「시인」이 그러한 설화의 내용과는 다르게 전개될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문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 됩니다. ('좋아한다'라는 표현이 차마 담아내지 못할만큼의 애정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문열의 표현들"이기에, 그 표현들을 가능한 한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저의 존경/감사함을 표하려 합니다.  --- 본문 중에 굵게 표시한 부분들은 작가의 표현 그대로를 옮긴 것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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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손이 방어사령관으로 있던 지역에서 민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김익손은 반란군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즉, 대역죄인이 된 것이지요. 그로 인해 김익손의 자손들은 비록 멸문을 면하기는 했으나 가문이 박살나고 맙니다. 김병연이 바로 그 김익손의 손자였었었지요.

 

이처럼 죽임을 면한, 즉 살아 있음을 가질 수는 있었습니다만, 대역죄인의 자손이었던 그에게는 '조정이 그들 일가에 대해 직접적인 형별권의 행사를 포기했다고 해서 체제 전체가 그들에 대한 악의를 지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리 지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특성 때문이 무리로부터의 소외는 때로 어떤 형벌보다 가혹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끊이지 않는 '체제의 보복'이 가해짐으로써, 김병연의 삶을 성장기부터가 그대로 일탈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소외와 가치박탈의 체험으로 점철되어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체제의 보복'에 대처하는 병언, 그리고 그의 형이었던 병하의 선택은 각기 다른 것이었었지요.

 

무엇때문이었건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특권적인 신분에서 도태된 정영精英이 그 사회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자신을 밀어낸 체제 전반에 대해 적극적인 반역을 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귀본능에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열정을 바치는 것이며, 나머지는 자학에 시달리다 서둘러 하위계층으로 편입돼 가는 것이다. 그보다 두 살 손위인 형 병하는 셋째 방식을 택해 철이 들면서 서둘러 상민常民으로서의 길을 갔다. 그러나 옛날에 대한 기억이 그보다 많았던 만큼 그 새로운 선택이 준 상처도 커서 끝내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삶을 제대로 꾸려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만다. 그런 형과 달리 그는 두 번째 방식으로 대응했다. 곧 옛 신분의 회복을 갈망하며 그 유일한 길인 학문에 매달린 것이다. 갈망이란 원래가 새로운 소유보다 한 번 소유했다 박탈된 것을 향할 때가 더 뜨겁고 세찬 법이다.

 

병언은 이처럼 <학문 수양 - 과거를 통한 체제로의 진입 - 옛 영화의 회복>이라는 인생 스케줄을 세웁니다. 그 스케줄의 시작으로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영월에서 개최된 백일장에 참가를 했었지요. 그리고 그가 받아든 시제는 설화가 전해주는 바 대로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비난이었던겁니다. 이제 여기서 작가 이문열은!!! 병언이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즉 설화와는 180도 다른 전개를 펼쳐나갑니다. 병언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난하라는 시제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제 3자가 보아도 신랄하기 그지없는 힐난의 수위를 보이는 시를 써냄으로써 장원급제를 하게 되지요.

 

동헌 벽 높이 걸린 그 시제를 본 뒤부터 이윽고 붓을 들어 써 나갈 때까지 한나절, 그가 치러야 했던 것은 그 일생에 걸쳐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의 축약에 다름 아니었다. …… 사회적 제도에 기초한 규범인 충성과, 혈연의 윤리에 기초한 효도는 인간에게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소중한 무엇이다. 그런게 그 둘의 충돌에 일방적인 우선순위를 정해 두는 것은 아무래도 불합리하다. 그 우선순위는 경우마다 기준이 있어야 하고 또 그 기준은 마땅히 옳고 그름이 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에 무관하게 충성보다 효도에 우선순위를 준다면 그건 너무도 동물적인 혈연의 논리다. …… 할아버지의 선택은 체제뿐만 아니라 일반의 감정에도 맞지 않는 그릇된 것이었고, 마침내는 그로 인해 이 사회로부터의 영구한 격리를 선고받았다. 할아버지는 체제의 법감정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의 윤리감정에게도 그 선고의 순간 무(無)가 되었다. 그런데도 혈연에 바탕한 윤리의 대상으로는 여전히 유(有)여야 하는가. 아니다. 할아버지는 거기서도 무여야 한다. …… 나는 쓰겠다. 우리 시대 지상(至上)의 규범 중에 하나인 효도의 대상, 내 할아버지 김익순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전 세대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다음 세대의 권리를 행사하겠다. 그 지워지지 않는 행적과 시비를 향해 객관의 붓을 들겠다.

 

이러한 결심 후에 지어낸 글로 장원급제를 했으나, 끝내 병언은 시상식 자리에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 '결국 자신이 노리는 것은 …… 조상을 팔아 산 그 면죄부로 세상과의 더러운 거래를 시작하려 함이 아닌가'라는 자책이 생겨났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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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김병언의 방랑이 불효의 충격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적고 있으나, 이문열은 여전히 버리지 않은 '신분 상승의 의지'가 그로 하여금 집을 나서게 했다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결과적으로는 방랑이 되어버린 그의 일생의 시작은 도피가 아닌 하나의 도전이었다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도전으로 시작되었던 그의 방랑이 그를 詩人이 되게 했던 연유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어내고 있습니다.

 

그의 유년을 상처 깊게 할퀴고 간 일문의 처참한 몰락과 그 때문에 받은 여러 자극들도 그가 내부에서 길러 내게 된 시인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의 의식에 너무 세차게 와 닿아, 일부는 그 밑바닥에 본능처럼 잠재하고 일부는 허무감으로 변해 그의 감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그 죽음의 공포와 망명도주의 체험, 어떤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야 했던 유년기의 삶,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묵은 상처처럼 그를 괴롭히던 옛 번성의 단편적인 기억들, 한 마리 막다른 골짜기로 몰린 짐승처럼 그 자체를 위협받으며 살아온 듯 느껴지게 하던 열악한 삶의 조건들, 죄의 사회적 유전인자와로 나중에는 원죄의식까지 품게 한 연좌의 그늘, 단순한 순응을 넘어 고정관넴에 가까워진 일반의 체제유지 감정과 하급기관의 타성으로 끊임없이 상기되던 체제의 복수심, 그리하여 나중에는 잠재적 폭력으로만 여겨지던 국가와 법, 철들어서는 거의 부재나 다름없었던 부성, 잦은 이주와 제도 밖에서의 배움에서 비롯된 또래들로부터의 고립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울려서 빚어낸 여러 가치박탈의 체험... 이러한 것들은 비록 한 시인을 길러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한 감수성 예민한 영혼을 시인의 길로 이끄는 자극으로서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진작부터 그 모든 기억들은 토해지지 않고는 못 배길 말로 그의 내부에서 자라면서 자신들을 가장 미학적으로 변용시키고 조직해 줄 시詩란 양식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나긴 방랑의 과정에서 병언은 '홍경래의 난'에 대한 진정한 의미/정당성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까지 자신을 억눌러 왔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법과 제도 아래에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원죄 의식이 사실은! 진실 쪽에서 보면 의인이 되는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이제 이러한 깨달음은 그간 병언을 짓누르고 있었던 울분과 한을 공격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에게는 세상을 원망할 권리가 있다고, 꾸짖고 욕할 권리가 있으며 조롱하고 야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저절로 그를 부패한 지배계층이나 그 보조계급보다는 자신과 같이 소외당한 계층 쪽을 다가가게 했다라 작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후 김병언은 파격적 형식과 풍자적 내용을 담은 시를 짓게 되었고, 이러한 이 시기의 시들은 그에게 '민중시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줍니다. 이제 병언은 높아진 인기 덕분에 쏟아지는 민중들로부터의 호의를 그 스스로도 한껏 누리며 자기가 받고 있는 갈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대한 악의의 강도를 높이고 시의 파격을 확대시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이 온전히 그들 민초와 하나가 되었다고 믿는 순간에조차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그러는 자체가 바로 하나의 큰 베풂인 양 뻣뻣이 고개 들고 있는 의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가망 없는 자신의 허위의식에 괴로워하게 되었다. 그들에 대한 애정이란 것도 기껏해야 그들의 무지, 천박, 이기, 비굴 같은 약점들을 참아 주었다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껴안고 같이 아파하며 뒹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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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작품이 김삿갓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김병언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詩는 의식의 산물이고 한 詩人의 추적은 그 의식의 추적일 수도 있다"라는 작품 속 화자의 말은 곧 이 작품을 써낸 작가 이문열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작가 스스로도 "「영웅시대」는 본질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否認이라는 의미를 띠는데,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바로는 김삿갓을 방랑으로 내몬 최초의 동기가 또한 그와 유사한 데가 있다"라 밝히고 있듯이, 오로지 사상때문이라는 이유로 월북을 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개인사를 이 작품과 떼어놓고는 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읽혀지기를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말이죠!!!

 

관서땅을 뒤로하고 길을 가던 병언은 일단의 무리들에게 잡히는 일이 생깁니다. '제세濟世 선생'이라 불리우는 자를 우두머리로 하여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들은 병언에게 시로서 적들을 향해서는 공포와 무력감을, 우리를 위해서는 용기와 믿음을 생산하라는 제안을 했고, 병언은 이를 받아들였었지요. 겨우내 병언이 지은 시는 노래가 되어 민중들에게, 그리고 무리의 군사들에도 불리워 졌고, 그렇게 제세 선생은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싶은 봄이 되자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혁명을 시작합니다만... 그들의 거사는 너무도 허무하게, 민중들의 그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실패를 받아 들이며 제세 선생이 병언에게 해주는 다음의 고백은, '진보와 보수'라는 현재의 편가름, 그 어느 쪽이건을 향한 작가의 정치적 메세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만 됩니다. 

 

무릇 혁명하려는 자는 실질 없는 혁명의 노래가 거리에서 너무 크게 불려지는 걸 경계하여라. 온 숲이 일어나야 날이 새는 것이지, 일찍 깬 새 몇 마리가 지저귄다 해서 날이 새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일찍 깬 그들의 소란은 숲의 새벽잠을 더 길고 깊게 할 수도 있다. 선잠에서 깨났다가 다시 잠들게 되면 정작 날이 새도 깨나지 못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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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으나) 제 기억에... 작가 이문열의 소설을 소설의 줄거리 자체로만 이해했었던 작품은 「레테의 연가」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책의 뒷표지에 실려 있는, "「詩人」은 전형적인 '이문열 소설'이다"라는 <한겨레>의 평에 기대어 보기도 합니다만, 설혹! 이 작품 「詩人」을 향한 저의 이러한 이해가 비록 오역(誤譯)의 결과일지라도, 작가 이문열의 '글'을 읽었었다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독서였다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작가 주제 사라마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분의 '글쓰는 스타일'에 있다면, 작가 이문열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분의 '논리/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표현들'에 있기에, (굵은 글씨체로) 지극히 일부만을 인용해 본 이 작품 속 주옥같은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었다라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저는... '책값'이라는 객관적 가치가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유희를 즐겼기 때문이지요. 작가 이문열에 대한 저의 이러한 애정은 무의식적인 습관이 아닌, 반복에 의한 몸에 배어짐!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소설이 인간의 얘기를 하는 것일진대, 세상에 정치와 무관할 수 있는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라 일갈하며 시작하는 작가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는 과연... 저에게 어떻게 읽혀지게 될른지, 사뭇 궁금하네요. 


 

※ 감상문을 써놓은 작가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 : 「황제를 위하여」 · 「젊은날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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