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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스무 살 되던 해, 영월 고을에서 있었던 백일장에 응시한 김병언은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저항하다 죽은 정 아무개의 충절과 반란군에 항복한 김 아무개이 죄를 논하라는 시제를 받고는, 김 아무개의 죄를 추상같이 논한 시로 장원 급제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홀어머니로부터 그 김 아무개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는 충격을 받아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생을 방랑으로 보냈다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삿갓을 썼던 이유는 역적의 자손이니 불충이요, 할아버지를 하늘에도 들지 못할 죄인으로 욕했으니 불효라, 스스로를 천지간에 용납받지 못한 죄인으로 꾸짖으려 햇볕 아래 얼굴을 드러내기 않았노라 전해지기도 하지요.
작가 이문열은 "설화는 전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이 이야기 「시인」이 그러한 설화의 내용과는 다르게 전개될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문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 됩니다. ('좋아한다'라는 표현이 차마 담아내지 못할만큼의 애정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문열의 표현들"이기에, 그 표현들을 가능한 한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저의 존경/감사함을 표하려 합니다. --- 본문 중에 굵게 표시한 부분들은 작가의 표현 그대로를 옮긴 것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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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손이 방어사령관으로 있던 지역에서 민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김익손은 반란군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즉, 대역죄인이 된 것이지요. 그로 인해 김익손의 자손들은 비록 멸문을 면하기는 했으나 가문이 박살나고 맙니다. 김병연이 바로 그 김익손의 손자였었었지요.
이처럼 죽임을 면한, 즉 살아 있음을 가질 수는 있었습니다만, 대역죄인의 자손이었던 그에게는 '조정이 그들 일가에 대해 직접적인 형별권의 행사를 포기했다고 해서 체제 전체가 그들에 대한 악의를 지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리 지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특성 때문이 무리로부터의 소외는 때로 어떤 형벌보다 가혹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끊이지 않는 '체제의 보복'이 가해짐으로써, 김병연의 삶을 성장기부터가 그대로 일탈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소외와 가치박탈의 체험으로 점철되어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체제의 보복'에 대처하는 병언, 그리고 그의 형이었던 병하의 선택은 각기 다른 것이었었지요.
무엇때문이었건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특권적인 신분에서 도태된 정영精英이 그 사회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자신을 밀어낸 체제 전반에 대해 적극적인 반역을 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귀본능에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열정을 바치는 것이며, 나머지는 자학에 시달리다 서둘러 하위계층으로 편입돼 가는 것이다. 그보다 두 살 손위인 형 병하는 셋째 방식을 택해 철이 들면서 서둘러 상민常民으로서의 길을 갔다. 그러나 옛날에 대한 기억이 그보다 많았던 만큼 그 새로운 선택이 준 상처도 커서 끝내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삶을 제대로 꾸려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만다. 그런 형과 달리 그는 두 번째 방식으로 대응했다. 곧 옛 신분의 회복을 갈망하며 그 유일한 길인 학문에 매달린 것이다. 갈망이란 원래가 새로운 소유보다 한 번 소유했다 박탈된 것을 향할 때가 더 뜨겁고 세찬 법이다.
병언은 이처럼 <학문 수양 - 과거를 통한 체제로의 진입 - 옛 영화의 회복>이라는 인생 스케줄을 세웁니다. 그 스케줄의 시작으로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영월에서 개최된 백일장에 참가를 했었지요. 그리고 그가 받아든 시제는 설화가 전해주는 바 대로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비난이었던겁니다. 이제 여기서 작가 이문열은!!! 병언이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즉 설화와는 180도 다른 전개를 펼쳐나갑니다. 병언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난하라는 시제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제 3자가 보아도 신랄하기 그지없는 힐난의 수위를 보이는 시를 써냄으로써 장원급제를 하게 되지요.
동헌 벽 높이 걸린 그 시제를 본 뒤부터 이윽고 붓을 들어 써 나갈 때까지 한나절, 그가 치러야 했던 것은 그 일생에 걸쳐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의 축약에 다름 아니었다. …… 사회적 제도에 기초한 규범인 충성과, 혈연의 윤리에 기초한 효도는 인간에게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소중한 무엇이다. 그런게 그 둘의 충돌에 일방적인 우선순위를 정해 두는 것은 아무래도 불합리하다. 그 우선순위는 경우마다 기준이 있어야 하고 또 그 기준은 마땅히 옳고 그름이 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에 무관하게 충성보다 효도에 우선순위를 준다면 그건 너무도 동물적인 혈연의 논리다. …… 할아버지의 선택은 체제뿐만 아니라 일반의 감정에도 맞지 않는 그릇된 것이었고, 마침내는 그로 인해 이 사회로부터의 영구한 격리를 선고받았다. 할아버지는 체제의 법감정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의 윤리감정에게도 그 선고의 순간 무(無)가 되었다. 그런데도 혈연에 바탕한 윤리의 대상으로는 여전히 유(有)여야 하는가. 아니다. 할아버지는 거기서도 무여야 한다. …… 나는 쓰겠다. 우리 시대 지상(至上)의 규범 중에 하나인 효도의 대상, 내 할아버지 김익순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전 세대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다음 세대의 권리를 행사하겠다. 그 지워지지 않는 행적과 시비를 향해 객관의 붓을 들겠다.
이러한 결심 후에 지어낸 글로 장원급제를 했으나, 끝내 병언은 시상식 자리에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 '결국 자신이 노리는 것은 …… 조상을 팔아 산 그 면죄부로 세상과의 더러운 거래를 시작하려 함이 아닌가'라는 자책이 생겨났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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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김병언의 방랑이 불효의 충격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적고 있으나, 이문열은 여전히 버리지 않은 '신분 상승의 의지'가 그로 하여금 집을 나서게 했다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결과적으로는 방랑이 되어버린 그의 일생의 시작은 도피가 아닌 하나의 도전이었다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도전으로 시작되었던 그의 방랑이 그를 詩人이 되게 했던 연유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어내고 있습니다.
그의 유년을 상처 깊게 할퀴고 간 일문의 처참한 몰락과 그 때문에 받은 여러 자극들도 그가 내부에서 길러 내게 된 시인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의 의식에 너무 세차게 와 닿아, 일부는 그 밑바닥에 본능처럼 잠재하고 일부는 허무감으로 변해 그의 감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그 죽음의 공포와 망명도주의 체험, 어떤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야 했던 유년기의 삶,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묵은 상처처럼 그를 괴롭히던 옛 번성의 단편적인 기억들, 한 마리 막다른 골짜기로 몰린 짐승처럼 그 자체를 위협받으며 살아온 듯 느껴지게 하던 열악한 삶의 조건들, 죄의 사회적 유전인자와로 나중에는 원죄의식까지 품게 한 연좌의 그늘, 단순한 순응을 넘어 고정관넴에 가까워진 일반의 체제유지 감정과 하급기관의 타성으로 끊임없이 상기되던 체제의 복수심, 그리하여 나중에는 잠재적 폭력으로만 여겨지던 국가와 법, 철들어서는 거의 부재나 다름없었던 부성, 잦은 이주와 제도 밖에서의 배움에서 비롯된 또래들로부터의 고립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울려서 빚어낸 여러 가치박탈의 체험... 이러한 것들은 비록 한 시인을 길러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한 감수성 예민한 영혼을 시인의 길로 이끄는 자극으로서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진작부터 그 모든 기억들은 토해지지 않고는 못 배길 말로 그의 내부에서 자라면서 자신들을 가장 미학적으로 변용시키고 조직해 줄 시詩란 양식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나긴 방랑의 과정에서 병언은 '홍경래의 난'에 대한 진정한 의미/정당성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까지 자신을 억눌러 왔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법과 제도 아래에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원죄 의식이 사실은! 진실 쪽에서 보면 의인이 되는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이제 이러한 깨달음은 그간 병언을 짓누르고 있었던 울분과 한을 공격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에게는 세상을 원망할 권리가 있다고, 꾸짖고 욕할 권리가 있으며 조롱하고 야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저절로 그를 부패한 지배계층이나 그 보조계급보다는 자신과 같이 소외당한 계층 쪽을 다가가게 했다라 작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후 김병언은 파격적 형식과 풍자적 내용을 담은 시를 짓게 되었고, 이러한 이 시기의 시들은 그에게 '민중시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줍니다. 이제 병언은 높아진 인기 덕분에 쏟아지는 민중들로부터의 호의를 그 스스로도 한껏 누리며 자기가 받고 있는 갈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대한 악의의 강도를 높이고 시의 파격을 확대시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이 온전히 그들 민초와 하나가 되었다고 믿는 순간에조차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그러는 자체가 바로 하나의 큰 베풂인 양 뻣뻣이 고개 들고 있는 의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가망 없는 자신의 허위의식에 괴로워하게 되었다. 그들에 대한 애정이란 것도 기껏해야 그들의 무지, 천박, 이기, 비굴 같은 약점들을 참아 주었다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껴안고 같이 아파하며 뒹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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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작품이 김삿갓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김병언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詩는 의식의 산물이고 한 詩人의 추적은 그 의식의 추적일 수도 있다"라는 작품 속 화자의 말은 곧 이 작품을 써낸 작가 이문열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작가 스스로도 "「영웅시대」는 본질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否認이라는 의미를 띠는데,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바로는 김삿갓을 방랑으로 내몬 최초의 동기가 또한 그와 유사한 데가 있다"라 밝히고 있듯이, 오로지 사상때문이라는 이유로 월북을 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개인사를 이 작품과 떼어놓고는 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읽혀지기를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말이죠!!!
관서땅을 뒤로하고 길을 가던 병언은 일단의 무리들에게 잡히는 일이 생깁니다. '제세濟世 선생'이라 불리우는 자를 우두머리로 하여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들은 병언에게 시로서 적들을 향해서는 공포와 무력감을, 우리를 위해서는 용기와 믿음을 생산하라는 제안을 했고, 병언은 이를 받아들였었지요. 겨우내 병언이 지은 시는 노래가 되어 민중들에게, 그리고 무리의 군사들에도 불리워 졌고, 그렇게 제세 선생은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싶은 봄이 되자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혁명을 시작합니다만... 그들의 거사는 너무도 허무하게, 민중들의 그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실패를 받아 들이며 제세 선생이 병언에게 해주는 다음의 고백은, '진보와 보수'라는 현재의 편가름, 그 어느 쪽이건을 향한 작가의 정치적 메세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만 됩니다.
무릇 혁명하려는 자는 실질 없는 혁명의 노래가 거리에서 너무 크게 불려지는 걸 경계하여라. 온 숲이 일어나야 날이 새는 것이지, 일찍 깬 새 몇 마리가 지저귄다 해서 날이 새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일찍 깬 그들의 소란은 숲의 새벽잠을 더 길고 깊게 할 수도 있다. 선잠에서 깨났다가 다시 잠들게 되면 정작 날이 새도 깨나지 못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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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으나) 제 기억에... 작가 이문열의 소설을 소설의 줄거리 자체로만 이해했었던 작품은 「레테의 연가」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책의 뒷표지에 실려 있는, "「詩人」은 전형적인 '이문열 소설'이다"라는 <한겨레>의 평에 기대어 보기도 합니다만, 설혹! 이 작품 「詩人」을 향한 저의 이러한 이해가 비록 오역(誤譯)의 결과일지라도, 작가 이문열의 '글'을 읽었었다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독서였다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작가 주제 사라마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분의 '글쓰는 스타일'에 있다면, 작가 이문열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분의 '논리/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표현들'에 있기에, (굵은 글씨체로) 지극히 일부만을 인용해 본 이 작품 속 주옥같은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었다라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저는... '책값'이라는 객관적 가치가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유희를 즐겼기 때문이지요. 작가 이문열에 대한 저의 이러한 애정은 무의식적인 습관이 아닌, 반복에 의한 몸에 배어짐!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소설이 인간의 얘기를 하는 것일진대, 세상에 정치와 무관할 수 있는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라 일갈하며 시작하는 작가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는 과연... 저에게 어떻게 읽혀지게 될른지, 사뭇 궁금하네요.
※ 감상문을 써놓은 작가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 : 「황제를 위하여」 · 「젊은날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