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청(淸)으로 바꾸고 ……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아울러 청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지닌 주전론자들을 압송하라는 주문(을 내린다) ……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 요구를 받아줄리 없다. 드디어 그 해 12월 청 태종(홍타이지)은 직접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침략에 나서는데,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전쟁의 양상은 9년 전의 정묘호란 때와 거의 다를 바 없다. 불과 보름 만에 청군은 평양을 거쳐 개성 부근까지 내려왔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또 다시 도대체 뭘 믿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한 가지 전(정묘호란)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정부의 무능함을 익히 알고 있는 백성들이 서둘러 피난 보따리를 쌌다는 점이다.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방에서 오는 군대도 자연히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면서 이곳은 조선의 임시 수도가 되었는데 …… 예상치 못한 피난처였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1만 명 넘게 불어난 성의 수비대를 감안할 때 비축 식량으로는 두 달을 채 버티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청 태종은 굳이 성을 공략하지 않는다. 이제 20만으로 늘어난 군대로 성을 포위한 채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선군을 경기도 일대에서 차단하면서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산성 내의 '임시정부'에서는 뻔한 결론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항복하는 것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는데도 항복과 항전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승산이 제로인데도 청에게 호전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대부들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 남한산성에서 논쟁이 주화론으로 정리되어 갈 무렵인 1637년 1월 하순 드디어 청군은 배로 인천 앞바다를 건넜다. …… (왕실의 부녀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는 남한산성 임시정부의 행보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 나라보다 가족들 걱정이 먼저인 인조는 적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고 항복을 결정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림으로써 두 달 동안의 전란은 끝났다.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하권, pp 199-202 중 발췌

 

이상은 (이 소설 「남한산성」의 시대적 배경인) 병자호란에 대한 한 역사가의 서술입니다. 역사가의 서술은 태생적으로 이처럼 간결하고 건조할 수 밖엔 없습니다. 비록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만의 조미료가 역사를 서술해 냄에 사용되어졌다 할지라도 '역사책'이라는 공간은 분명! 역사가의 상상이 자유로이 펼쳐지도록 허락되어진 곳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 그렇다면! 그러한 상상이 허락된 공간, 즉! 소설이라는 공간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만의 상상을 담아낼 수 있는 소설가의 글은 과연... 역사가의 서술과 어떻게, 얼마만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요? 

 

(과거로부터 전해져 현재에도 남아 있는) 기록된 역사라는 것이 집권층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라는 것에, 그러하기에 우리가 읽게 되는 대부분의 역사책들 또한 집권층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 불만없음이 곧 피지배층이었던 일반 백성들의 이야기들을 몰라도 된다/알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비록 일반 백성들의 하루 하루 삶에 관하여 과거로부터 전해져 오는 기록들에 자세하게 담겨져 있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러!하기에 현재를 살고 있는 역사가나 소설가들 모두에게 (앞서 읽은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의 저자 백승종 교수가 말했던)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을 개입시킬 수 있는 공간이, 집권층에 관한 이야기의 공간보다는 더 넓게 주어져 있다 말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그 공간의 넓이를 어떻게 파악하고 채워내느냐는 온전히 작가(때로는 역사가)의 몫/능력일진데, 이렇게 존재하는/주어진 그 상상의 공간인 이 책 「남한산성」에 작가 김훈이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만든 그만의 '역사적 상상게임'의 외양과 속은 이러... 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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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남한산성」으로 전 작가 김훈을 처음으로 만나보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한 편의 소설로 그가 어떤 작가인지를 온전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을 읽고 박민규 작가의 표현력에 흠뻑 빠졌던 저로서는, 보다 더 고급스럽고, 보다 더 잦은 반복으로 등장되고 있는, 김훈 작가의 문장들에 한껏! 매료되어버렸다라는 걸, 이 작품의 내용, 메세지 등에 앞서 우선 적고 싶네요.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사뭇, 겨울의 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듯 보이는, 별 특별한 기교가 있지도 않은 위의 문장들은 읽히기에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리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문장들로 작가는... 결국!엔 이 전란이 어떻게 마무리되어질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으며, 마치 유행가의 후렴구 가사와도 같이 다른 곳에도 내내 반복되어 등장하는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그 등장의 장소·시점에서마다 모두 다!!! 다른 뜻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박민규의 문장이 '슬픔이 깃들어 있는 유쾌함'을 보여주었다라면, 이문열의 문장들이 치열한 논리를 바탕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듯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라면, (이 작품을 통해 보여졌던) 작가 김훈의 문장들은 '반복과 나열'을 통해 생겨난 (마치 한 곡의 랩을 듣는듯도 한)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러면서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힘이 느껴지는 그런 리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쉼표에서 쉬어가며 소리내어 읽어보면 이내 곧 느껴지게 되는 리듬말이죠.

 

임금이 성 안으로 들어왔으므로, 곧 청병(淸兵)이 들이닥쳐 성을 에워싸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갇혀서 마르고 시드는 날들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갇혀서 마르는 날들 끝에 청병이 성벽을 넘어와서 세상을 다 없애버릴지는, 아니면 그 전에 성 안이 먼저 말라서 스러질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누구나 알았지만 누구도 입을 벌려서 그 알고 모름을 말하지 않았다.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이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생각은 전개되지 않았다. …… 그날이 머지않았는데, 버티는 힘이 다해서 성문을 열고 나가 투항하는 날, 그날까지 저것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인지 김류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것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김류는 생각했다.

 

칸이 오면 성이 열린다는 말과 칸이 오면 성이 끝난다는 말이 뒤섞였다. 칸이 오면 성은 밟혀 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 죽는다는 말이 부딪쳤는데,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밟혀서 끝나는 마지막과 말라서 끝나는 마지막이 다르지 않고, 열려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르지 않으므로 칸이 오거나 안 오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었다.  칸은 서쪽으로 명을 몰아 대고 있으므로 요동을 비우고 오기가 어려워 심양에 머물면서 소문만 내려보낸 것인데, 소문의 뒤를 따라 칸이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므로 온 것보다 무섭고 오지 않는 것보다도 무서우며, 소문이 이미 당도하였으므로 칸이 오지 않더라도 이미 온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삼거리 북쪽 술도가 쪽에서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낮게 깔려서 뒤섞이고 부딪치는 말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났다.

 

또한 저를 감동시켰었던 문장들이기도 합니다. --- 이 문장들이 그저 읽어내기에의 리듬감이라는 언어적 유희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그 안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대로 녹아져 있기도 했기에,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쩌면 이토록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감탄을 절로 내뱉을 수 밖에 없었더랬죠.

 

① 청나라와의 이 싸움에서 결코 조선이 승자가 될 수는 없다라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다만 인정하지 못하는/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 말하고 있는 작가 김훈은 당시 권력층의 그 '인정할 수 없'었던 버팀이, 어느 날 자신들에게 갑자기 닥쳐온 그 영문모를 상황을 그저 이겨내도록 강요받아야 했던 남한산성 내의 백성들, 그리고 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의 최전선에 서야했던 군졸들에게 과연 합당하고 정당하며, 중대한! 것이었느냐라 묻고 있습니다.  

 

② 이런 상황에서 명분을 내세운 주전론, 실리를 앞세운 주화론이 산성 내에서 충돌하지요. 그들, 권력층의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는 동안 백성들과 군졸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감내했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고통이 한 때 있었다 하더라도, 주화론이건 주전론이건 금새 어느 한 쪽으로의 결론이 지어졌더라면 그 고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었겠지요. 허나!!! '그것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 생각했다'라는 문장에서 보여지듯, 결정을 내려야하는 자들은 그 결정을 내내 뒤로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 원인은!!! --- 모든, 정말로 사소한 것까지 모든 결정을 왕으로부터 기다리기만 했던, 즉! 오로지 전란 후에 있을지도 모를 공(功)과 과(過)의 처분으로부터의 유리함만을 생각했었던 신료들, 그리고 '그것이 임금이 정할 일이냐?'라 되묻기만 했던 무능한 왕이 그 백성들과 군졸들이 모시고 있었던/모셔야 했었던 권력이었기 때문이라는 데 있었던 겁니다. (다음의 독서로 읽으려 펼쳐 본 「칼의 노래」에 실려있는 한 사진 아래에 작가 김훈은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라는 구절을 써놓기도 했네요.)      

 

③ 비록!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 그러했기에 백성들과 군졸들이 그런 왕과 신하들의 권력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악화되어가는 상황에서 권력의 최상층부가 우왕좌왕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해하고 있던 것관 달리, '서날쇠(徐生金)'라는 이름의 대장장이가 대변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은 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고, 기어코 찾아냈으며, 그리하여 결국엔 살아남았었는데, 이들의 '살아남음'은 왕을 비롯해 그 주변의 신하들이 찾아낸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음'과는 분명! 전혀 다른 것이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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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남한산성으로 찾아가는 예조판서 김상헌에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늙은 사공이 있었습니다. 강을 건넌 김상헌은 그에게 자기와 함께 산성으로 들어가자 말합니다만, 그 사공은 거절합니다. 뒤에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좀 얻어 볼까 한다라는 그 사공의 이유를 듣고 김상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요. (그리곤 결국 그 사공을 죽여버립니다. 청병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게 하려고.)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던가. …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작가는 '이러한 백성들'을 결코 탓할 수는 없다, 탓해서는 안 된다라 생각하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 기록된 역사라는 것이 원래, 지배층과 관련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하여,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같은 처지의) 우리들마저도 '고통 받았던' 하지만 '기록되지는 못했던' 자들을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건 결코 옳은 사고가 될 수 없을겁니다. 그건... 비록! 역사는 피라미드를 세웠던 이집트의 파라오만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피라미드를 세우다 죽어갔을 수많은 기록되지 않았던, 그러하기에 기억되지도 못하는 당시의 '우리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일이 될테니 말이죠.


<1942년을 돌아보다>에 쓰여져 있는, 이 역시 작가 류전윈의 메세지가 오롯이 담겨져 있다라 여겨지는 다음의 글이, 작가 김훈이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자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남한산성」을 읽고난 후, 다시 읽어보는 류전윈의 글은 「남한산성」과 서로 상통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짜릿!했던 감동을 받았었던 것을 넘어, 이 소설을 읽고나니, <1942년을 돌아보다>에서 작가 류전윈은 그 작품에서 뭔가 울컥함이 깃든 반성까지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지 않았었나라는 생각을 해보게도 되는 --- 이 감동과 반성이 ,어쩌면 제가 이 작품 「남한산성」을 읽고 기억으로 간직하여야 할 가장 큰 무엇이 아닐까 싶... 네요. 

 

송미령(장개석의 부인)이 미국을 방문했고, 인도의 간디가 단식을 했으며,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대혈전이 벌어졌고, 영국의 수상 처칠이 감기에 걸렸다. 1942년의 세계 상황 속에서는 하남성에서 삼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보다 이러한 사건들이 더 중요했다.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처칠, 간디, 아름답던 송미령,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의 대혈전은 알아도, 내 고향에서 가뭄으로 삼백만 명이 넘게 굶어 죽었다는 것은 모른다. …… 초라한 수많은 백성을 무시한다면, 중국의 파란만장한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재난과 성공의 역사에서, 최대의 피해자이자 최종 수혜자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들과는 인연이 없었다. 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넓은 홀에서만 이루어졌다.

- 류전윈 作, <1942년을 돌아보다> 중

 

일산의 음식점에서, 그리고 길에서도 두세 번정도 김훈 작가와 마주쳤었었거늘, 이젠... 혹시 또 다시 생겨날지 모를 그 우연을 기다리는 마음에 이 분의 소설 한 권정도 가방에 넣고 다닐지도 모르겠. ^^

 

 

  

※ 본문과 각주에 등장하는 책들의 감상문 

- 안소영 作, 「책만 보는 바보

- 백승종 著,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 류전윈 作, 「닭털같은 나날」 중 <1942년을 돌아보다>

- 박민규 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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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게임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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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춘장의 비유  

 

이영돈 PD의 '착한 식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조미료를 쓰지 않는 짜장면집을 찾아 나섰는데, 저도 가보았던, 일산의 한 중국집이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는 제보에 카메라가 출동했었었지요. 가보니 실제로 그 식당의 주방에서는 짜장면을 만들 때 조미료를 넣지 않고 있었음에도... 결국 그 식당은 (그 잘난) '착한 식당'으로 선정되지는 못했더랬습니다. 납품받아 사용하고 있던 기성품 춘장에 이미!!! 조미료가 들어있었다라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못내 수긍하는 표정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 주방장... 속으론 엄청 억울해 하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헌데...

 

그 방송을 보고나니, '역사(책을 읽는다)'라는 것이 어쩌면 그 ​짜장면의 춘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히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 우리가 읽는 역사책들에는 이미! '저자의 주관'이라는 조미료가 들어가 있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독자가 제 아무리 ('생각없이'가 아닌) 편견 없이 어느 역사책을 읽어보려 한들, 제거해 낼 수 없는, 이미! 들어가 있는 조미료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일산 짜장면 집 주방장의 억울함관 달리, 바로 이 점!이... 역사책을 읽는 것에 있어서 진짜 재미가 아닐까 싶기도 한겁니다. 저자마다 같지 않을, 그들 각자만의 조미료가 들어가 있는 해석을 서로 비교·섭취해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창조가 아닌 '조합'으로서의 새로운 나만의 조미료를 가지게 된다라는 거, 이 점이 바로... (역사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유희의 모습을 띤 역사책 읽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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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에서 저자 안소영은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 그 책을 썼다라 말했었지요. 미시사(微時史) 전공의 역사학자인, 이 책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의 저자 백승종 교수는 이 책에서 '접착제 혹은 보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걸핏하면, '술이부작(사실을 기록하되 지어내서 쓰지는 않는다)'이라 했다. 그러나 내가 공부해보니 그런 역사는 과거에도 있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차라리 역사란 '술이작(기록하되 제 생각대로 쓰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 역사가가 탐구하는 진실을 흑과 백의 대조처럼 선명하지 않다. 한 사람의 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는 허위가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 결국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작업은 바로 각각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캐는 것이었다. ……  (이처럼) 역사적 상상과 추리와 판단이 어우러진 이 책의 서술 방식을 '역사가의 상상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다. ……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 게임'이라 불릴 만하다. '상상 게임'을 하는 데는 팩션이 빠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팩션은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역사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 하겠다. ……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다. …… 이 경우의 허구란 깨진 청자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것, 달아난 부분을 메워 항아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보철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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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에 대한 관심은 이문열 작가의 「황제를 위하여」를 읽으면서 생겼더랬습니다. 그래 그때 바로 이 책을 사놓고는 이제서야 읽어 본 거죠. 그러하기에 사실 전... 이 책으로부터 <정감록>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했었습니다만, 정작 이 책은 <정감록> 자체에는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는 않고 있더군요. <정감록>에 대한 설명은 다음이 그 전부입니다.

 

정작 이 책을 언제 누가 저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정도전이 저자라는 설도 있으나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혹은 선조 때 반란을 꾀했다 해서 잡혀 죽은 정여립이 저자라는 말도 있었으나 역시 확인할 길은 없다. …… <정감록>의 내용은 새 왕조의 출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요점을 간추리면 …… 이제 조선왕조가 망할 테니 살고 싶으면 십승지 또는 길지로 들어가 숨으라고 했다. 그러면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 나타나 계룡산이 수도를 둔 채 새 왕조를 창건한다는 것이다.

 

「황제를 위하여」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정감록>과 얽혀있는, (역사의 흐름까지를 바꿀 수는 없었던) 일종의 개인사적 에피소드를 그려내고 있었다라면, 이 책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은 <정감록> 자체보다는, <정감록>을 매개로 하여 발생했었던 역모사건들을 통해 영·정조 시대의 사회·정치적 권력 구조를 해석해 내는 것에 그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정감록> 의 내용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은 될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이처럼 이 책의 포인트가 되고 있는, 그러한 역모사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었던 사회적 동인(動因)들의 생성과 작동 과정을, 다음에 적어놓은 저자의 주장에 따라, 중인 계급, 종교계, 그리고 (양반과 왕실이라는) 권력층의 세 부류로 나누어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역사의 진실을 '결정'하는 권력은 현실 속의 부와 명예와 정치적 지배력이어서는 곤란하다. 진실은 결국 하나일지라도 우리는 그'하나'를 대뜸 찾지 못한다. 하나의 진실에 포함된 여러 빛깔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역사의 진실게임은 전부를 얻거나 또는 전부를 잃는 도박이 아니다.


【 평민 · 중인 계층 】


① 당시 중인 계층 가운데에는, 널리 보급된 서당의 영향으로 글을 읽을 줄 아는 즉, 서책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그들은 의술, 산수, 천문, 통역 등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업무에 주로 종사했던 관계로 양반을 가까이서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다라 합니다. 그 결과 중인들은 양반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잘 알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들과 양반층을 구별하고 있는 신분적인 경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라는 좌절감 또한 크게 느끼고 있었었지요. 한편, 서북지방은 조선왕조의 창건자인 이성계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중앙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에 가장 먼저 노출된다는 이유, 그리고 서북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과격하다하여, 과거에서조차도 서북지방 사람들은 좀처럼 등용되지 못했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사회적 불평등 및 소외의 문제로 인해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불만이 점차 쌓여가게 되었고, 그것이 서북지방에서 처음 등장한 <정감록>이라는 예언서와 결합되어 일반 백성들의 울분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이 책에서 조명하고 있는 역모사건들이라는 겁니다. 비록 <정감록>과 관련된 일반 백성들의 역모사건이 당시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때 생겨난 전국 규모의 민중운동의 싹은 18-19세기 내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갔으며, 이 때의 역모사건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성이 결국 19세기 말 대두된 동학에서 꽃을 피워 결국 최제우가 주도한 (역시 종교성을 띠고 있었던) 동학운동이라는 과실을 맺게 해주었다라는 것이 저자의 해석/설명이지요. 그렇다면... 영·정조 당시의 역모사건들은 종교와는 과연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요?

 


【 종교계 】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사회의 주변 집단으로 격하되는 열악한 처지에 놓이고 맙니다. 17세기 이후 정치·사회·문화의 각 방면에서 성리학자들의 독점적인 지위가 더욱 강화되면서 불교계가 지배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것이지요. 이를 계기로 불교계에는 차츰 반왕조적인 성향의 승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약화된 불교의 자리를 도교가 차지하게 되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중인 계층의 평민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친도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던 사람들이었지요. 이러한 연유로 '<남사고비결> 역모사건'에는 승려가,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문양해 역모 사건'의 배경에는 도교가 자리하고 있게 되었던 겁니다.


조선 후기에도 근대를 향한 나름의 대안 사상이 있지 않았는가 궁금(했었고) …… <정감록>을 연구할수록 그것이 조선 후기 성리학에 반발하여 평민지식인들이 내놓은 일종의 대항 이데올로기라는 확신이 섰다. …… 18-19세기에 일어난 굵직한 역모사건에는 <정감록>을 비롯해 각종 예언서가 거의 빠짐없이 개입되었다. 이들 예언서에는 조선 후기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한 굶주림과 전염병 그리고 외세의 침입에 대한 공포심이 나타나 있었다. 또한 새 세상의 도래를 바랐던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도 담겨 있었다. 그들은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소멸된 불교적 이상세계, 즉 미륵하생의 새 왕국을 꿈꾸고 있었다. 이것이 지난 세월 내 눈에 비친 <정감록>의 모습이다.

 

즉,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의구심과 신분제에의 불만으로부터 시작된 사회 변혁의 욕구가 불교와 도교라는 종교와 차례로 결합되어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 개의 역모사건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라 저자는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저자가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문양해 역모사건'의 경우, 주동자 문양해가 종교적 카리스마를 소유한 교주의 역할을 담당했었으며, 그를 정점으로 한 무리의 역모자들이 일종의 신종교 단체를 구성해 역모를 꾀했다라는 것이지요. 즉, 훗날 등장하는 최제우를 중심으로 한 동학운동의 잉태를 '문양해 역모 사건'으로부터 보고 있으며, 이러한 민중운동의 종교성과 관련하여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 전쟁과 굶주림, 질병이 세상을 휩쓸고 난 다음, 진인왕이 다스리는 새 세상이 온다라는 <정감록>의 내용과 말세의 혼란을 묘사하는 신약성서의 몇몇 구절들, 구세주의 강림이라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유사하다라는 견해까지를 저자는 이 책에서 피력하고도 있지요.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종교, 그거 다 똑같은 거야'라는 비아냥이 들리는 듯도 하였었지만, 설마!라는 마음에 차마! --;;)  


 

【 권력 계층 】

 

영·정조 당시의 조선의 성리학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시기였으며, 이러한 성리학적 명분에 가장 충실했던 것이 바로 양반 계층이었었습니다. 영조와 정조를 향한 이들 양반 계층의 속내는 ---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궁녀의 소생이었고, 정조 또한 이처럼 외가의 근본이 미천한 영조의 손자일 뿐 아니라, 아버지 사도세자는 패륜아로 낙인찍힌 인물일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양반의 법도로 보면 패륜아의 아들은 또한 패륜아이며, 미천한 사람의 자손 역시 미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런 것을 조선의 양반들은 '명분'이라 했었었고, 바로 이 명분을 무기 삼아 대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왔던 양반들로서는 영조나 정조를 (진심으로) 왕이라 받아들이기를 썩 내켜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나마 노론이라는 특정 정파로부터 적극적 지지를 받고 있던 영조는 비록 모든 정쟁을 종식한다며 탕평책을 펼쳤지만 정치판은 결과적으로 노론의 일당집권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앙 정치로부터 점차 소외된 소론과 남인들이 결국 중인 계층이었던 평민 지식인들과 결탁하여 동상이몽의 역모를 꾸며냈던 겁니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역모 사건들은 이처럼 양반 계층과 중인 계층이 함께 모의한 것들인데, 여기서 --- 양반 출신들은 쿠데타를 통한 재집권을 꿈꾸었으나, 평민 출신 지식인들은 기성 체제로의 편입이라는 단순한 욕망을, 혹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면적인 사회개혁을 소망했었었었지요. 비록 저자가 이러한 동상이몽을 역모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러한 동상이몽으로 인해 역모가 만약 성공했었다 하더라도 애초 그들의 소망이 그대로 실현되었을까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엔 없었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모든 역모는 결국 다 실패로 돌아갔고, 왕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특정 당파들은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작업을 펼치게 됩니다. 역모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았던 자신들의 반대파 인물들까지도 모두 그 역모사건으로 한데 몰아넣어 제거해버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점은!!!

 

영조와 정조 시대는 우리에게 문예부흥기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여러 역모사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발생했던 시기였었다고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영조와 정조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정치 세력이 적지 않았던 데다가, 이 시기에 사회·경제적 변동이 심화되어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 급속하게 성장했기 때문이었죠. 후대의 우리들에게 이른바 '업적'으로 칭송받고 있는 영조와 정조의 각종 정책들도 당시 양반들이 보기에는 그저 출생의 하자를 감추거나 즉위의 부당성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들을 향한 이러한 시선들을 잘 알고 있었던 영조와 정조는 각종 역모사건들을 되려 왕권의 강화를 도모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 냅니다. 일례로, 궁궐 수비를 담당하는 '징용위'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한 정조가 이 징용위를 통해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여러 정파를 제거해 버렸었듯이, '신분제에의 불만, 권력으로부터의 소외'를 가졌던 중인, 종교계, 양반들의 역모가 오히려 권력층에게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작용되어 그러한 불만의 요인들을 더더욱 고착되게 만들어버린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지요.   

 

…………………………………………………………………………… 


"권력자에 대한 신임을 국민의 투표로 묻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번 권좌에 오르면 죽을 때까지 주인 노릇을 하게 되어 있던 왕조시대에 역모를 통해 정치적 불만을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자가 바라보는 역모사건들의 실체는 이러합니다. 이것을 바꾸려는 당시의 시도들이 비록 그 때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훗날 동학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엔... 지금과 같은 '권력자에 대한 신임을 국민의 투표로 물을 수 있는 시절'을 만들어 내었다라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처럼 역사라는 것에는 단 하나의 사건도 우연에 의해 생겨난 건 없다라는,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민주주의 역시, 외국으로부터 수입되기만 한 타인의 가르침만이 아닌, 우리 선조들의, 목숨을 건 숨은 노력들이 베어 있다라는 사실이, 역모사건 개개의 내용들보다 우리가 이 책으로부터 진정 배워야 하는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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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그저 기록자의 생각일 따름이다.

역사는 기록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기록의 벽을 깨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사고다.

 
 

 

 

 

 

이제까지 읽어 본 대부분의 역사 관련 책들은, 심지어 중·고교 시절의 교과서들 마저도 '기록은 그저 기록자의 생각일 따름이다'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라 생각됩니다. 물론 「책만 읽는 바보」와 같은 인물 평전이나 「황제를 위하여」, 「에네껜 아이들」, 「왕경(王京)」 등과 같은 역사 소설들은 모두 나름 '기록의 벽'을 보완하는 작업들을 담고 있었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 백승종 교수가 언급한 '하나의 진실에 포함된 여러 빛깔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책들이었었지요. 부분 부분에 따라서는 저자의 '상상이 빚어낸 허구'에 대해 과도한 상상/해석이라 여겨지는 내용들도 적잖이 있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보여준 '역사가의 새로운 상상게임'이라는 서술 방식은 분명!!! 역사책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구나!를 이 책의 모든 독자들에게 어김 없이 안겨줄 꺼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겐... 이전관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책과의 만남이었기도 했네요. (조선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상상게임'의 독서는 몇 권 더... 계속되지 않을까도 싶.

 

 

※ 본문에 등장하는 책들의 감상문 

- 안소영 作, 「책만 보는 바보

- 이문열 作, 「황제를 위하여

- 문영숙 作, 「에네껜 아이들

- 손정미 作, 「왕경(王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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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경 - 우리는 통일을 이룬 적이 있었다
손정미 지음 / 샘터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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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재미있는 역사책이 있습니다. 남경태C가 쓴 「종횡무진 한국사」라는 책이지요. --- 이 책에서 보여지고 있는 역사관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과 조금씩, 때로는 아주 많은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닌, 매우 시니컬하기도 한, 그럼에도 결국엔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라는 점에 바로 이 책의 재미가 있는 겁니다. 잠시 「종횡무진 한국사」의 上권에서 묘사되고 있는 삼국통일의 배경을 살펴볼까요?

 

7세기 초반 중국과 한반도 세 나라의 입장 차이 --- 통일시대에 들어선 중국은 변방 정리의 마무리 작업으로 한반도를 복속시키고자 하며, 그 관건이 고구려 정벌임을 알고 있다. 한편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한반도 남진정책을 추구해 온 데다가 중국이 랴오둥을 노리는 것을 알고부터는 신라에게 잃은 죽령 이북의 땅이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또한 백제는 왕조가 일어난 고향이자 오랜 터전이었던 한강 하류를 신라에게 빼앗겼으므로 역시 고구려와 같이 실지 수복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신라는 죽령 이북과 한강 하류(쉽게 말해 한반도 중부)를 유지하려면 백제, 고구려와 계속 등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므로 어떻게든 중국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당 태종은 이런 신라의 다급한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당시는 중국과 고구려가 맞선 가운데 백제와 신라가 이해관계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처신하는 복잡미묘한 정세였다. 바로 이런 구도가 7세기 후반 삼국통일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p199)

 

● 646년 드디어 ……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수 양제의 패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용의주도 하게 전쟁을 준비한 덕분일까? 아무튼 스타트는 순조로웠다. …… 믿었던 요동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  이세민이나 연개소문이나 그것으로 고구려의 등불은 꺼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보게 만든 것은 안시성이었다. …… 밤낮으로 두 달간을 공략한 끝에 당 태종은 안시성을 부술 수 없음을, 아울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  전쟁은 중국의 패배였다.  (pp215-218)

 

●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648년에 신라의 김춘추는 직접 중국 외교길에 오른다. …… 좌절과 분노에 가득 찬 당 태종에게 신라의 사신은 상심을 달래줄 애완견이나 다름없었다. …… 이제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가닥이 잡혔다. 중국은 고구려 정벌을 원하고 신라는 백제의 정벌을 원한다. 때마침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 체제에 있으니 전선을 뚜렷하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통일, 신라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남부의 통일이 목표다. 이렇게 해서 양측의 통일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시나리오를 무대에 올리는 것뿐이다. (pp21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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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왕경(王京)」은 바로 딱 요맘 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이 작품의 줄거리를 따로 적지 않아도 될만큼 딱! 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역사 소설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역사적 전개에 대해서도 매우 정확하고 간략한 소개를 해주고 있기도 하지요.) --- 사실 전 역사 소설에 대해 그다지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가장 근본적 이유는... 제가 역사 공부를 참으로 싫어했었었고, 그로 인해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라는 점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사실(史實)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 사실(史實)에 작가의 상상을 더한 소설을 읽는다라면 자칫! 드라마 <대장금>에서와 같이, 우리 역사에 '대장금'이라 불리웠던 한 슈퍼 우먼이 있었었노라... 와 같은 잘못된 확신이 특정 역사적 사실(事實)에 덧칠되어 제 머리 속에 남게될까,하는 염려 때문이지요. 

 

다행히... 이 작품 「왕경」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대의 역사적 사실(事實)은 위에서 언급한 「종횡무진 한국사」에의 기억으로, 혹시 몰라 그 일부분만을 다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사실(史實)에 대한 오해는 저 스스로 방어해 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역사와 춘장의 비유'에서, 적어도 맛이 없거나 상한 춘장으로 만들어진 짜장면 정도는 먹기 전에 미리 알아챌 수 있었다라는 거지요. 자...  그렇다면 과연 이 소설은 어떤 맛의 춘장으로 짜장면을 만들어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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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같이 재수해서 89학번이었던 저의 불알 친구, 그리고 원샷에 대학에 가 88학번이었던 고등학교 여자 동창 하나, 그리고 저. --- 이렇게 셋이서 종종 만나 술 한잔씩 하면서 이런 저런, 지금 아무리 기억해보려해도 기억나지 않는, 뭐 아마도 소개팅이나 당시 어느 나이트가 물 좋냐 등이 주가 아니었을까 싶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시간들이 정말 정말로 재미있었었지요. 제 생각에... 그 남녀가 섞인 작은 모임이 그렇게 재미나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셋 사이에 그 아무런 연애의 감정 라인이 (최소한 겉으로는) 없었었다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만약! 제 친구가 그 여자 동창을 속으로 좋아했는데, 그 여자 동창은 대놓고 저를 좋아했었다, 뭐 이러면 그 셋의 모임이 재미나게 흘러갈 수는 없지 않았겠어요? (저만 모르게 둘 간에 어떤 연애 감정이 있었으리라고는 차마 상상 못하겠고요. --;;) 

 

 지금 제 머릿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는 한, 제가 평생 까게 될 드라마 한 편이 있습니다. 장혁과 장나라가 주연을 했었던 <명랑소녀 성공기>라는 드라마지요. 정확히 몇 회짜리 드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만약 20회였다면 19회까지는 여주인공 장나라가 죽도록 고생하다가 20회 중반이나 되어서야 드디어 '성공'하게 된다는, 그런 찌글찌글한 '성공기'였었지요. 대체 왜!!! '성공'에는 말도 안 되는 고생들이 꼭 선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채, 그저 '이렇게 고생하고 있더라도 언젠가 장나라처럼 나중엔 성공할 수도 있다!'라는 마약같은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려 했던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결국! 그 드라마 한 편으로 인해 그 이후 지금까지 제가 한국 드라마를 안 보는 그런 (어찌보면 좋은!) 결과를 낳게 해준 드라마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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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개인의 총기 소지에 대해 보다 더 엄격한 규제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라는 메세지를 뽑아내는 독자는 없을꺼라 생각합니다. 비록 그 소설에서 주인공이 사냥총을 가지고 있다라는 설정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만, 작가의 능력은 그러한 설정을 작위적이라 느껴지지 않도록, 매우 우연한 coincidence로 처리해 내고 있었죠. 

 

이 작품의 전체적 스토리와 그 전개는 예전에 읽었던 김탁환 작가의 「뱅크」와 매우 유사합니다. 우선, 제가 생각하기에 재미있는 모임이 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조건인 '남자 둘과 (매력적인!) 여자 하나'의 등장 인물 구성이 그렇죠. 물론, 이 작품과 「뱅크」에서는 셋 간에 어느 정도의 연애 감정이 흐르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거야... 뭔가 갈등구조를 필요로 하는 소설의 특성상 충분히 이해가 되는 설정이라 생각합니다. 단!!!

 

 「뱅크」에서 작가 김탁환은 그 연애 감정에 너무도 많은 비중을 둠으로써, 자칫!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개인의 총기 소지에 보다 더 엄격한 규제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라는 류의, 촛점을 잘못 짚은 이해, 즉 그 소설을 일종의 연애 소설로 이해하게 되는 우(愚)를 자아낼 수도 있게 만들었다라 생각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 분명... 그 소설에는 "100년전 일제와 조선 스페셜리스트들 간의 숨 막히는 화폐전쟁!"이 그려지고 있다라 말했었음에도 말이죠. 

 

반면 이 작품 「왕경」은 세 등장 인물간의 연애 라인에 대해 보다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계림의 김유, 고구려의 진수, 그리고 백제의 정. --- 이 세 사람에게 주어진 태생적 · 개인적 원한 관계가 자칫, 연애 감정이 지나치게 자라날 수 있는 상황을 아예 기본적으로 막아주고 있다는, 설정으로부터의 도움도 있겠습니다만, 작가 스스로도 적절한 시점에서 그 연애 감정의 부각을 매우 세심하게 관리(?)해 놓았다는 인상을 받았었었죠. 일단! 이 점에서는 '역사 소설'로서의 포지션에 매우 충실하고 있습니다. 


「뱅크」에서 작가는 세 등장인물들에게 가혹할 정도의 고생을 안겨줍니다. 특히 주인공 장철호의 삶은, 그저 일개 독자일 뿐이 저에게조차 '내가 뭐 도와줄 꺼 없을까?'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을 정도였었죠. 비록 <명랑소녀 성공기>완 다르게, 장철호가 겪었던 고생들엔 나름 합리적인 전후사정이 주어지긴 했었습니다만 역시!나... '성공을 위해선 가혹한 고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라 읽혀지기만 했던 그 상황은 그 소설을 읽는 내내 저를 상당히 불편하게 했었더랬습니다. 

 

이 작품은 계림의 수도인 왕경(경주의 옛 이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 '김유'는 든든한 어머니의 배경과 뛰어난 외모·무예·학문 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심지어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인물입니다.  '진수'라는 인물 또한 고구려 출신으로, 고구려에서는 (신라의 풍월주와 비슷한) '선배'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가장 유력했었던, 역시나 매우 뛰어난 청년이었죠. 백제 출신의 '정'이라는 소녀는 예의 예쁘고 똑똑하고, 게다가 야심까지도 만땅으로 가지고 있는, 암튼! 세 사람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뛰어난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홈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김유에 비해, 원정경기를 치르고 있는, 게다가 졸지에 노비 신세가 되어버린 진수와 일개 몸종 수준의 신분이었던 정의 처지는 상대적으로나 절대적 기준으로나 매우 고생스러울 수 밖에 없었었지요. 그러나!!! 진수와 정의 삶도, 물론 그들의 심적 상태야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민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무지막지하고 말도 안되는 고생담의 연속은 아닌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바로 그 점!이... 저로 하여금 이 작품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해주었던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였던 겁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여러 매력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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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그러한 점들로 인해 이 소설에는 긴장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교과서적인 인물들이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궤(常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인물들조차도 지극히 예상가능한 행동들만을, 그것도 살짝 맛만 보여주는 정도로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뱅크」라는 소설에 ①번과 ②번 같은 마음에 들지 않는, 혹은 불편했던 점이 있었었다라 말했음에도, 제가 「왕경」보다 「뱅크」에 더 높은 만족도를 주게 되는 건, 역설적임에 분명한 이 이유가 바로... ①,②와 같은 조미료를 적절히 선택해낼 수 있는 '작가의 대중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겁니다. (이 작품 「왕경」이 손정미 작가의 데뷔작이라 하는군요.)

 

조미료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몸에 덜 해롭다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집에서는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밖에 나가선 조미료 없는 음식에 '심심하다'라는 말을 하게 되며, 결국!!! 조미료 없이, 직접 정성스레 만든 춘장으로 만들어낸 짜장면이 손님들의 맛없다는 항의를 받게 되더라는, 그래 어쩔 수 없이 그 짜장면집이 문을 닫게 되었다라는 역설적 상황이 소설을 읽는 것에도 예의 등장했다라는 거지요. (이 작품은 '역사 소설'이기에 조미료가 전혀 안들어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 양이, 대중을 자극하기엔 지나치게 적절!하다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작품이 뭔가 자극적인/독특한 역사적 상황/인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더라면, 혹 그런 조미료스러운 부분이 덜 가미되었다해도 대중이 느끼는 재미를 충분히 만들어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너무도 평범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너무도 착하고 예측 가능한 행동들만하는 인물들만을 등장시켰기에 결국! '심심하다'란 느낌만을 남겨주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겁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정'의 실체 정도가 약간의 놀라움을 주었다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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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을 과연 통일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적어도 한반도에 국호를 가진 나라가 신라만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삼국통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것은 통일이 아니다. 우선 영토를 보면, 당시 신라가 확보한 영토는 지금의 대동강와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에 그쳤으니 고구려의 영토까지 포함하면 삼국의 영토 가운데 절반이 되지 못한다. (애초에 신라는 백제만을 병합하고자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또한 정치적으로 신라는 당에 조공하면서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완전한 독립 왕국이라 할 수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반도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 왕국에서 하나의 중국 군현으로, '삼군에서 일군(一郡)으로 전락한 셈이 될 것이다.  (pp 240-241)

 

사실(史實)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라는 사실로부터 위와 같은 평가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만!!! (역사) 소설까지 똑같은 평가를 내려야 하는 건 아닐 수도, 또한/그러하기에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정 정도의 여유 공간을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여유 공간의 인테리어는 그야말로 작가의 의도에 따라 그 컨셉이 정해지는 것이겠지요. 작가 손정미는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에 남경태와는 달리 '우리는 통일을 이룬 적이 있었다'라는 인테리어를 해놓았으며, 그 인테리어의 하이라이트로 전... 김유의 다음 독백을 꼽게 됩니다.  

 

백제가 계림을 쳐들어와 가족 같은 화랑들을 죽였지만 정이 창칼을 든 적군은 아니었다. 상황이 삼국을 대치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 속에서 먹고 마시며 울고 웃는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일 뿐이었다. 단군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과정은 충분히! 심지어 100%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나...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 역시 '사람들'이었다라는 점이 김유의 갈등엔 빠져 있지요. 물론! 이 작품의 작가가 그 상황을 만들어낸 것 또한 '사람들'이었음까지를 파헤쳐내야 했었다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소설의 주제, 그리고 작가의 의도는 분명! 그런 곳에 있지는 않았다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만약 작가가 소설의 분량을 「뱅크」 수준으로 가져갔었다면, 즉 자신이 인테리어 공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설정했더라면 상당히 치밀하고 매력적인, 허나 어쩌면 지금과는 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될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기도 합니다. 


삼국통일의 과정을, 그 속에서 계림·고구려·백제 출신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심적 갈등을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상당히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삼국통일의 과정을 딱딱한 서술이 아닌, (매우!) 적당한 / 최소한으로만 가미된 양의 조미료와 함께 즐기고 싶다면, 바로 이 소설이... 역사에 대한 당신의 판단을 결코! 해하지 않을, 메인 디쉬로 들어가기 직전에 즐길 수 있는 최상의 에피타이저 역할로는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 한 권의 책이지 않을까 싶네요. 저에겐... 당분간 아마도 역사 관련 책들을 읽지 않을까 싶도록 만들어주기도 한.

 

 

 

※ 본문에서 언급되었던 책들의 감상문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방황하는 칼날

- 김탁환 作, 「뱅크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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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의 연가
이문열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하나의 소설 작품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 소위 '고전 Classic'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은 그런 유효기간 따위는 없다,라 말을 한다 하고, 실제로 그 '고전'들 몇 편을 읽었던 저 또한 (읽어보았던 모든 '고전'들로부터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역시 고전이라 불리울 만한 소설에는 유효기간이란 없네!'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행의 사그라듬이 아닌, 정녕 '이 소설의 유효기간은 끝났어'라 말한다라는 건 (고전 작품들을 포함하건 제외하건) 일반적 관점에서 보아 온당치 않은 표현인걸까요? 

 

…………………………………………………………

 

가정이 있는 한 남자와, 주위의 결혼 재촉을 감내하고 있는 스물 일곱 살 여성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불륜' 이야기란 거죠. 하지만! 마치... '나는 작가 이문열의 글을 좋아하도록 태어난 것임에 틀림없어!'란 생각이 지극히 자연스러울 정도로, 예의 제 마음을 뒤흔드는 스타일의 문장들로, 작가 이문열은 이 이야기 속에, (결혼 적령기, 성의 개방 등) 사뭇 세속/현실적인, 혹은 (결혼 제도, 정신적 순결 등) 일견 철학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여러 가지의, 그럼에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일관성을 지닌 채 의도적으로 거론된 것들임에 틀림 없기도 한, 거의 모든 주제들에서.... 저의 지대한 관심, 그리고 최고조의 집중을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러일으켜 주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결국 우리가 고안해 낸 가장 훌륭한 사랑의 귀결이란 결혼밖엔 없는 것일까. ……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 있으면 안 되는가. …… 어째서 모든 사랑 이야기는 결혼 아니면 죽음과 이별로 끝나는 것일까. 어째서 모든 사랑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는가. 아름답지 않으면 추악해지는가.

 

와 같이, 부분 부분 잘만 골라낸다면, 아.마.도! 세심하게 잘 골라내어 이십 대때에 적잖게 연애 편지란 것에 인용했었을 듯 싶은, 지극히 감성적 애잔함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헌데... 저의 이십 대때엔 그러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도 사십 대 중반을 넘긴, 새로움보다는 기존의 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그런 대한민국의 한 가장이자 남자가 되어있다라는 현실은... 저에게 이 작품을 읽고, 이야기 속 두 주인공들 간의 연애 감정의 시종(始終)을 적어내는 것보다는, 사뭇 뜬금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과연 소설에도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발 더 나아가 '작가에게도, 그의 필력이 유지되고 있는가의 여부를 의도적으로 제외시켜버린 채, 그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적용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떠올려 주더군요. (그렇게 흘러간 이십 몇 년간의 시간은 저로 하여금 위의 감성적인 문장들을 읽으면서... '이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거라고, 뜨거운 연애를 하다가 이별했다해서, 그 이별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애를 한 것이었다,라 말할 수는 없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네요. 대한민국 사십 대 중반의 남자에게 로맨스 소설은 정녕... 읽혀지기 어려운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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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하나의 레테(망각의 강)이다.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강 이편의 사랑을 잊고, 강 건너편의 새로운 사랑을 맞아야 한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오직 그 새로운 사랑만으로 남은 삶을, 그 꿈과 기억들을 채워 가야 한다.  

 

이 작품의 두 번째 문장을 위와 같이 시작됩니다.  물론!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정상적인 관념은 위의 독백에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지켜져야 한다는 것'과 '지켜낼 수 있는 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옳다고 일컫어지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우리는 때때로 반기를 들고 싶어하기도 한다라는 걸, 우리 대부분은 또한 인정한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라면! 이 소설은 일견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읽혀질 수도 있을겁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영화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건지도...) 

 

여주인공 희원과 남주인공 민 화백 사이에 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었는가는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인공 희원마저도 자신 스스로를 확실하게 설득해내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작가 또한... 그 왜!의 문제보다는 사랑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두 주인공의 심리상태에 더 많은 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그렇게 둘의 만남 초기에 희원이 스스로에게 연신 던졌던 자문은 그 왜!의 문제가 아닌 둘 간의 관계의 정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두 사람 사이에 연애 감정이 생겨난 것에  있어 왜!라는 문제는 두 당사자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 둘을 바라보는 제 3자에게는 왜!의 문제가 상당히 호기심을 끄는 주제일지 모르겠지만요.)   


겨우 한 달 사이에 열 번 가까이나 그와 나는 아무런 명분없이 만나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연애가 아닌 것은 나도 그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남녀간의 우정? 그러나 나이도 처지도 전혀 걸맞지 않다. …… 그렇다면 그는 내게 무엇인가? …… 적어도 그는 내가 무심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서 빨리 명분을 결정 짓지 않으면 안 될 사람, 또는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끝내 그 명분을 찾아내지 못했던 희원은 결국 '나는 제자리로 돌아간다'라 결심합니다만 이내... 다음과 같은 후회로 인해 그 결심을 거두어버리게 되지요. 


'이게 제자리인가. 이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내가 있던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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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과 마찬가지로 둘의 관계에 대해 도덕적 자책을 느끼고 있었던 남자 주인공 민 화백 또한 희원에게 떠나라 말을 했었습니다만, 그 또한... 이내 다시 희원의 곁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곤 이렇게 선언합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믿고 출발해 보는 것이오. 하지만 한 가지 …… 이성(理性)과 자제는 이제 나 홀로만의 몫은 아니오."

 

 

이처럼 결국! 두 사람은 각자 나름의 이유를 대며 둘 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지속시켜가기로 합니다. 도덕적일 수 없는 이 사랑을,  운전과의 비교를 통해, 그 피치 못할 정당성을 자신들 스스로에게 각인 시켜 가며 말이죠.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우리는 여러 법규들의 정당함이나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운전석에 오르면 우리는 어린애 같은 흥분과 쾌감에 모든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부도덕한 사랑의 위험을 잘 알고, 그로 인해 우리 삶에 가해질 위해를 피하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러나 한 번 사랑에 빠져 버리면 우리는 이내 비정한 쾌감과 잔인한 이기에 휘몰려 그 모든 걸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 희원의 일기 형식을 빌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일기 속에서 지속되는, 둘의 관계에 대한 희원의 의문은 이내 현실적인 부분, 즉 성(性)의 문제에 이르르게 되지요. 이미 로맨스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둘 사이의 관계에서 성(sex)이란 하나의 추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는 거의 마지막에, 즉 헤어짐이 머지 않은 시점에 가서야 등장할, 단 한 번의 '격렬한 포옹과 뜨거운 키스'이외의 그 어떠한 육체적 관계가 끝내 없지요.)

 

그런데 소설은 - 즉 작가는!!! - 이러한 관계의 유지가 내내 남자 주인공인 민 화백의 뜻이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성과 자제가 자신 홀로만의 몫은 아니라는 말로, 민 화백은, 또한 작가 이문열은 희원에게 내내 그 이성과 자제를 강제시킵니다... (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희원의 감정은 민 화백처럼 이성과 자제를 끝내 완전히는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사람의 사랑이 동물의 성애(性愛)와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도덕성(이다). …… 사랑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이다. 부도덕하고 추악한 세상의 사랑은 사랑과 성을 혼동한 결과이다.

 

비록 희원의 일기라는 형식으로 쓰여진, 그러하기에 희원 자신의 심리를 사실은 가장 잘 묘사해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위에서처럼 둘 간의 사랑에 명확한 경계를 그어놓고 있는 민 화백과는 달리) '그는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나 또한 그를 기다리기 위해 지난 세월을 허송해 왔음을 의심없이 믿고 싶은 지금 …… 그는 나의 사랑이고, 연민이고, 괴로운 운명이다.' 라는 희원의 심리는 독자를 향한 설득력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아무리 이 소설이 왜!의 문제보다는 '관계의 정의'에 집중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점이 이 작품의 큰 결점 중 하나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부분이지요.

 

가정(家庭)이 있는 남자와의 사랑 ---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 장애물은 바로 그 '남자의 가정'이겠지요. '우리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제 둘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자문 끝에, 타인의 입을 빌린 형식의, 하지만 그것이 여주인공 희원의 생각이라는 의심을 지워내지 못하겠는, 사뭇 파격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다음의 구절에서 작가는/소설은 독자들에게 '너의 생각은 어떠냐?'라 묻고 있기도 합니다. (2014년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미혼 여성들의 생각이 아주 많이! 궁금하기도 하네요. ^^;;)


배가 난파했을 때, 꼭 한 사람만이 의지할 수 있는 통나무에 두 사람이 헤엄쳐 간 경우... 그때 둘 중 하나가 자기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을 밀쳐 결국 그가 죽게 되더라도 그 행위는 정당 방위가 된다는 거야. …… 누가 먼저 그 통나무를 잡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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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이십 대에,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아쉽게도... 그 어느 기록에도, 또한 그저 애잔한 사랑 이야기였다라는 단편적 느낌 이외에는 저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헌데 말이죠... 사십 중반의 나이가 되어 읽은, 1983년에 출간되었다는 이 소설은 지극히 남성 편향적인 사고의 현란한 변명이라는 생각밖에는 지금의 저에게 남겨주는 것이 없습니다.

 

여주인공 희원은 미모의 커리어 우먼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바보 · 멍충이가 아니라는 거지요. 선을 보았던 남자에게 '왜 여자도 하나의 어엿한 판단 주체라는 걸 무시하죠?'라는 항의를 하기도 하는, 말하자면 나름 여성의 자의식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자를 한 독립된 판단 주체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개 그런 식으로 부추김으로써 여자가 자진하여 옷을 벗고 우리 침대 속으로 기어들도록 유도하려는 때죠. 즉 책임이라는 부담 없이 여자를 즐기고 싶을 때 우리는 가장 기꺼이 그녀가 독립된 판단 주체라는 걸 인정합니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자의식이란 것은...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작가가 정의내리고 있는, 고작!해야 이런 수준의 자의식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즉! 여주인공 희원은 남자의 이러한 대꾸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수준 정도의 자의식만을 가지고 있는, 잘나보이기만 하는 그런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인 거지요. (위의 인용된 문장이 가지고 있는 논리를 들어 작가 이문열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남자의 생각을 남자인 작가가 표현하고 있다라는 그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것으로 소설은 끝맺음을 하고 있는데, 이 헤어짐 역시 전적으로 남자 주인공 민 화백의 결정이었다라는 점 또한, '극단적 이기심'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는 민 화백이 밝힌 헤어짐의 이유, 그리고 어쩌면 '어처구니 없는'이라 표현될 수도 있을 듯한 희원의 심리 상태는 2014년의 독자인 (남자이고, 페미니즘에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의 사회생활을 그만두라고도 주장했었던) 저조차도 이해해내기엔 짐짓 버거웠다라 말할 수밖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아직도 나는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한 것이라 믿고 있소. 그런데 방금과 같은 방식으로 희원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데는 전혀 희원쪽의 행복은 고려되어 있지 않소. …… 그건 이미 사랑도 무엇도 아니었소. 아니, 사랑의 탈을 쓴 저열한 이기(利己)였을 따름이었소. …… 역시 우리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소. …… 내가 희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이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치닫는 걸 막는 일뿐이오. 적당한 곳에서 멈출 줄 아는 것이 내가 배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오. ……그리하여 나의 기억에는 언제나 희원이 내 젊음에 내려진 마지막 축복으로 남아 있을 것처럼, 희원의 기억에도 나는 항상 부끄럼 없는 사랑으로 살아 남고 싶소.

 

얼핏 읽으면, 지극히 순애보적인 사랑의 마음을 가진 남자의 고백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신 스스로 이기적이지 않으려 내린 결정이라 남자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끝!까지... 둘 간의 사랑은 남성인 민 화백이 '해줄 수 있는 / 베풀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사고를, 그 마지막에 가서는 '부끄럼 없는 사랑'으로 남고 싶다라고까지 말하는, 더할 수 없이 독단적이며 이기적인 한 남자의 욕심이자 오만으로 밖에는 해석되질 않습니다.  

 

① 남녀의 사랑에서 성적 욕구가 남자로부터 더 먼저 생겨나는 것이 일반적이라 본다면, 이 두 사람 사이에 성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연애 감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남자인 민 화백이 진정!으로 희원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니었느냐란 질문, 그러니까 그 스스로 '해줄 수 있는/ 베풀 수 있는' 이라는 생각을 한다라는 게 이기적이라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느냐란 질문엔...

 

만약 내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랑은 성(性)의 침해와 오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 지난 봄 내가 다시 그대를 만나게 되었을 때도 그러했다. …… 우리의 만남이 변질될 징후를 보이면서부터 내가 그대를 상대로 꿈꾼 사랑은 그것을 통해 둘의 정신이 보다 높게 끌어올려지고, 우리 살이(生)가 진 온갖 고통스런 부하(負荷)는 그 무게가 줄어들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피로이며 소모이며 부패인 성(性), 거리마다 넘쳐흐르는 그 저급한 사랑의 육화(肉化)는 처음부터 내 예정에 없었다.

 

이 남자는 사랑에 있어 성(性)적인 면을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고 있었었으며, 그 부정의 이유는 오로지! 그만이 만들어낸 것이었지요. 즉! 여기에는 이 연애의 상대가 미혼 여성이라는 것에 대한 배려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다행(?)히도 희원 또한 그와의 육체적 관계를 (최소한 겉으로는 드러내놓고) 원하지는 않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녀가 민 화백에게 성적인 관계라도 애원했었더라면 글쎄요... 이 둘의 관계가 계속될 수 있었을까요?

 

② 이 둘의 사랑은 그 시작부터 민 화백의 일방통행이 일상적이었었습니다. 물론! '도무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는 그의 전화만 받으면 반드시 그의 말대로 해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빠지고 만다'라는 희원 스스로의 적극적이었던 수동적 태도도 이 사랑이 일방통행이 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만, 사랑의 본질은 '남을 향한 것'이라 믿고 있다는 사람 - 사실 이 말도 제 3자인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 이 일방적으로 떠나고, 헤어짐을 선고하는 마지막 순간에까지도  이 헤어짐을 순전히 자신의 입장에서만 해석해주고 있다라는 건, 저의 이해력 수준에서는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상극이었을 뿐.


그대는 나의 이 같은 물러남을 거절 또는 버림과 같은 이름을 붙여 자존심의 문제와 관련지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진정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쪽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가 아닌 나이다. 만약 어떤 도둑이 있어 능동적인 회개로 훔치기를 포기하고 빈 집을 나온 경우라도, 그 집에 경관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묘한 치욕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내게도 이 한 번의 사랑, 아름답게 가꾸려돈 오랜 결의 외에, 도덕과 관습의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나이라든가 신분이 있었다.

 

결국 자신의 버리지 못하겠는 것을 버리지 못해 이 사랑으로부터 떠나간 남자가, 그 버리지 못함을 오히려 '도둑의 능동적인 회개'로, 희원의 명시적 동의 - 사랑이건 섹스건 - 를 '경관이 서 있는 것'에 비유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희원! 화를 내라구 화를!!!'이라 제가 다 외치고 싶었었기도 한 장면이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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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민 화백은 '세상에서 가장 벗어 던지기 힘든 짐'이라는 '자신 스스로 진 짐'을 벗어내 버립니다만, 그래! 민 화백이 희원을 꼬신 건 아니었지않느냐란 항변을 받아들인다 해도, 여기에 더해 1983년의 사회적 분위기가 이러한 민 화백의 사랑을 순애보로 해석했었었노라고 억지로 저를 설득시켜 내더라도 정작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러한 민 화백의 결정에 대한 여주인공 희원의 반응이었습니다. '남녀 사이에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인데 자신은 그걸 믿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라는 누군가의 말에 심정적 동의를 했던 그녀, 희원은 끝내...

 

"사랑이 지나간 시대의 플라토닉한 외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덕분이었다."

 

라 그 만남을 기억하며 지워버리지요.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던 민 선생을 우연히 어느 술집에서 만났을 때를 기록한 희원의 일기, '나는 곧 울컥 치미는 설움과도 같은 반가움에 빠지고, 이어 까닭 모를 기쁨과 즐거움의 애상을 느꼈다'라는, 연애의 초기에 둘 사이에서 그녀 스스로 설정해 놓은 이 포지션을, 둘의 관계가 끝이 나고서도 여전히... 그녀는 버리지 않고/못하고 있는 겁니다. 


…………………………………………………………


이처럼 이 작품이 지극히 남성 중심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해도, 만약... 저 위에 보라색으로 써놓은 문장, '이게 제자리인가. 이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내가 있던 곳인가.' 에 대해 작가가 왜? 희원이라는 인물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를 알려만 주었다면 전... 이 작품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1983년이라는 시대, 그 시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남성들이 훨씬 더 많았었으며, 그 시대의 여성들 또한!!! 그러한 남성 중심의 사고에 적잖이 순응하고 있었다라 이해할 수도 있는 거니까 말이죠.


아마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지극히 육체적인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재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당시의 '사랑'을 비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 그러하기에 '정신적 순결'이라는 것에 그토록 매서운 비난의 표현들을 쏟아 내었으며, 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끝내... '플라토닉한 외형'으로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즉! 이 소설의 주제를 '순수한 사랑의 의미' 혹은 '순수한 사랑이란 과연 어떤 모습인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아닐 수도 있다라는 생각도 적잖게 들었습니다. 만약 작가가 이 둘의 사랑을 '순수한 사랑'으로 그려낸 것이라면 자칫... 육체적 관계가 없는 불륜은 괜찮다!라는 생각을 심어줄 여지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이 소설의 주제가 이것이 아니라면?에 대한 의문에 제 수준에서는 다른 카드가 선뜻 떠오르지는 않네요. 민 화백이 내내 '사랑의 도덕성'을 고집했다라는 점, 그리고 어찌됐건 그 '사랑의 도덕성'이라는 걸 지켜내기도 했다라는 결말로 보아, 이 소설의 핵심으로 '순수한 사랑'을 꼽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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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의 작품을 2014년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이냐의 물음에 대해서는 200년 전에 쓰여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그 전형적 대답을 해주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반면!!! 1983년에 보여졌던 작가 이문열의 사랑관은, 2014년의 시각엔 낡은 것도, 희귀한 것도 아닌 그저... 옳지 않은 것!이었다라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 "희귀하리라고 생각한 이야기는,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낡았기 때문에 희귀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라 적고 있는데, 이 소설 속 사랑은... 새롭거나 낡았기 때문에 희귀한 것이 아닌, 단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희귀한 것이라 답해드리고도 싶고 말이죠.

 

아마도 처음이지 않을까 싶게... 이문열의 작품에 날선 비판적 생각을 갖게 된 작품이었습니다만, 작가 이문열을 향한 저의 애정은 아직은 유효 기간이 끝나지 않았노라고, 물론! 작가로서의 유효 기간 또한 아직은 남아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기도, 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작가의 사랑관이 옳지 않다!라 말하는 것까지도 모두... 그 애정으로부터 나온 것임에는 또한 틀림이 없다는 말이... 꼭! 덧붙여져야 하구말이죠. 

 

 

 

※ 감상문을 써놓은 작가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 :황제를 위하여」 · 「젊은날의 초상」 · 「시인(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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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 탈출
피에르 불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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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서로부터...도! '짜릿한 희열'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라는 건 진즉에 경험해 보았더랬습니다...만, 이번의 독서를 통해, 그 희열이란 게 사뭇 씁쓸한 여운을 남겨줄 수도 있다라는 건 처음 알게되었네요. --- 뭔가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어 「제노사이드」를 읽었었고, 그걸 다 읽고 나니 다시금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그래 「작은 인간」이란 책을 힘들게 읽어낸 후엔,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혹성 탈출>에서처럼 뭔가, 그 '진화론'의 논리대로 인류 사회가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 할 듯한, 그 영화의 원작이라는 이 소설 「혹성 탈출」을 읽으며, 앞서 읽은 두 책으로부터의 기억을 서로 비교해볼 수 있었던... 그런 독서로부터의 희열을 느꼈었거늘, 그와 함께 남는 씁쓸함의 여운은... 사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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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만 년 전, 언어나 의식이 있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이미 두 발로 곧게 서서 걸어다녔다. …… 왜 자연은 어떤 한 종류의 유인원(만)을 두 발로 걷도록 만들었을까? ……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유인원이 진화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그들만이 땅 위에서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그로써 일상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데 있다.

 

동물들은 뇌가 크지 않아도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유인원과 원숭이들 역시 지능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능한데도 도구 사용의 범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 인간을 뺀 나머지 동물의 왕국에서 현재 가장 탁월한 도구 사용 솜씨를 가진 것은 침팬지이다. … (동물원에서 길러지고 있는 침팬지들은 더더욱 뛰어난 도구 사용 능력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침팬지는 필요가 생기면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을 확대할 줄 안다는 점이다. 야생 상태에서 비교적 도구 사용이 드문 것은 지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야생에서 그들은 대개 그냥 타고난 신체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비용-효과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인류의 진화/역사를 설명해 놓은 마빈 해리스의 「작은 인간」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와는 다르게!!!

 

"침팬지인 내 의견은... 우리가 사수류(四手類)라는 사실이 우리의 정신적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해. 덕분에 우리는 쉽게 나무에 오르고 공간의 3차원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반대로 인간은 손이 두 개뿐인 데다다 손가락이 짧고 서툴러 땅바닥에 고착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평면의 2차원에만 안주해야했지. 신체적 장애로 인해 도구를 사용할 수 없었던 인간에 비해 우리는 능숙하게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이었어."

 

즉! ①지혜로웠기 때문에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가 아닌, 도구를 사용했기에 (뇌의 용량이 커져) 지혜로워졌다,라 주장했던 마빈 해리스의 사회·문화적 진화의 논리를 그.대.로. 유인원들이 가져다 사용한다라면, ②마빈 해리스가 말하는 '도구'의 개념과 유인원들이 말하는 '도구'의 개념이 반드시 똑같은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면, ③유인원들에게도 어떠한 연유에서든지 '도구 사용'에의 동기 부여가 주어졌었다라면, 종국적으로 ④모든 것을 우리 인간의 시선으로 보고 해석하는 본능과도 같은 습관을 버려낼 수 있다면!!! (이 책, 「혹성 탈출」에 나와 있는) 침팬지의 위와 같은 주장이... 과연 허무맹랑한 것이라고만 여겨져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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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스스로를 많이 진화되었고 상당히 문명화되었으며 최고의 지성과 지혜를 가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라는 우물 안에서 그 우물을 지배하고 사는 인류의 관점에 불과하다.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자연계와 동물계는 인류에게 상생의 존재가 아니라 지배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의 절대적 위상은 광대한 우주와 영겁의 시간 앞에서도 똑같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 소설이 바로 「혹성 탈출」이다.

- <옮긴이의 말> 중

 

마빈 해리스의 주장에 의하면, 유인원 중 가장 지능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있는 침팬지조차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뇌가 아니라 에 있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언어를 발음해내기 위해서는 인두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침팬지 뿐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모든 영장류에는 그 인두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다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유인원 -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등 - 들이 인간의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라는 점을,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 그들의 단점이라 말한다는 건 거꾸로 보자면, 치타가 인간의 뜀뛰기가 느리다고, 강아지가 인간의 후각을 자신들의 그것보다 미개하다라고, 물고기가 깊은 바다속을 헤엄치지 못하는 우리를, 하늘을 날지 못한다하여 새들이 우리에게 조롱을 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게 되지요. 그렇!다면 과연... 이런 수도 없이 많은 육체적 단점들을 지니고 있는 인류가 (최소한 지구 내에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 해답은 '도구의 사용'입니다. "가장 커다란 막대기를 휘두르는 동물이 가장 커다란 이빨을 가지고 으르렁거리는 동물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라 이 소설 속에 표현되어 있기도 하듯이, 머리 좋은 놈과 힘만 센 놈이 붙어, 머리 좋은 놈이 승리를 차지했다라는 것이지요. 그럼 만약에!!! 힘만 셌던 놈이 (어떠한 이유로든간에) 머리까지 좋아졌다면, 그렇다면 그 때에도 둘 간의 지배-종속 관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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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은 복제된 인간들이 떼거지로 현실의 세상으로 뛰쳐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말을 보면서, 저들이 현실의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과연 저들에게 더 좋은 것일까? '그 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라는 의문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만,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에서도 현생 인류보다 진화한 초인류가 번식의 조건을 모두 갖춘 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져 버림으로 '그 이후'의 진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만, 무려!!! 1963년에 출간되었다는 이 소설은 제가 궁금해했던 '그 이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요.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 우주에 우연은 없다."

 

발달된 과학기술로 인해, 지구의 인간 세 명이 '마이너스 엡실론 광속'으로 우주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부터 300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베텔게우스계로 탐험을 떠났습니다. 거기서 지구와 매우 유사한 환경을 지닌 행성 하나를 발견한 세 사람은 곧 그 별에 착륙을 하지요. 예상대로 그곳의 대기와 자연 환경은 지구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했었고, 이에 그들은 '자매'라는 뜻의 라틴어인 '소로르'를 그 행성의 이름으로 지어줍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지구와 유사한 소로르에, 지구와 다른 딱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유인원들이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인간들은 지구에서의 유인원들처럼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라는 것이었지요.

 

주인공 윌리스 메로는 이 역전된 상황 속에서, (어찌어찌한 과정을 거쳐) 소로르 행성을 다스리고 있던 유인원들로부터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으로 인정 받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의 역전이 과연 왜/어떻게 발생되었는가를 파헤쳐 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이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은 1968년 개봉되었던 영화 <혹성 탈출>과 비슷합니다만, 전개 과정은 판이하게 다르지요.) 코르넬리우스와 지라, 이 두 과학자 침팬지의 도움을 받아 윌리스 메로가, 한 인간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해 결국 알게 된 진실은 다름 아닌...

 

모든 유인원들이 얼마 전부터 끊임없이 번식하고 있다. 그들 종족은 조만간에 사라질 것 같았는데 …… 만일 그들이 번식을 계속한다면 곧 우리와 비슷하게 많아질 것이다. ……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교만해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시선에 눈을 똑바로 뜨고 맞서도 있다. 우리가 길들여온, 특히 하인처럼 부려온 그들에게 자유를 준 것이 실수였다. 바로 그 유인원들이 가장 오만해졌다. ……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실험실에서 실험의 대상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유인원들 가운데 한 마리가 말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어떤 학자들은 그것을 과학의 위대한 승리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 사건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 그들이 처음으로 말을 사용한 것은 사람들이 복종을 요구했을 때 그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 사람들은 두뇌를 쓰는 일을 싫어하게 되었다. …… 그러는 사이 유인원들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들의 두뇌는 고독한 사색 속에서 발달했다. …… 마침내 그들은 (전부가) 말하기 시작했다.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섭리는, 무기력해진 인간들이 이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더 뛰어난 종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즉!!! 유인원들이 인간의 뒤를 계승하였다라는 게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인간의 뒤를 계승한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야. …… 이성을 지닌 인간이 임기를 끝내자 우수한 유인원이 인간을 계승했고, 비록 침체기이긴 하지만 지금은 인간이 일으킨 문명을 보존하며 그 결과들을 제 것으로 만들고 있어. 그리고 이제 곧 새로운 미래를 위해 도약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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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 탈출」은 이처럼 「작은 인간」에서 다루었던 진화의 사회·문화적 맥락의 방향을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정반대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제노사이드」에서처럼 현생 인류보다 더 진화된 초인류가 등장한다는 설정이 아닌, '인간의 퇴화와 유인원의 진화'라는 상대적 역전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떤 과학자들은 그것(실험실의 침팬지가 말을 한 것)을 과학의 위대한 승리로 간주했다."라는 소설 속 인간의 후회를 읽는 순간, 「작은 인간」에서 보았던 다음의 구절들이 지체 없이 떠오르더군요.


자연선택은 종종 어느 한 가지 기능을 위해서 선택된 구조를 이용하여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구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 기각류는 돌고래나 바다표범처럼 바다에 사는 포유류를 말하는데 뇌가 크고 사회성이 높다. …… 미국의 해군은 기각류들을 훈련시켜 바다 밑에 떨어진 미사일의 폭발물 부분을 물어다가 적군의 배 밑에다가 갖다 붙이도록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돌고래 여섯 마리가 샌디에고를 떠나 페르시아만까지 파견되었다. 그러나 도구를 사용하거나 물체를 조작해야 하는 자연적인 필요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기각류 동물들의 뇌는 에렉투스에서 사피엔스로 넘어오면서 일어난 재구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지금와서 보자면 그들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만일 그러한 재구성이 일어났다면 지금쯤 그들은 해군 신병 훈련소에 수용되어 바다 밑에서 서로를 죽이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 테니 말이다.

- 「작은 인간」 pp 68-69

 

말 그대로 유인원들의 진화의 시작에서 나왔던 "그들은 이 사건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라는 소설 속 한 인간의 탄식이, 단지 작가의 상상력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위의 문장에서, 독자는 소름끼치도록 느끼게 됩니다. 몇년 전 개봉했었던 영화 <혹성 탈출 : 진화의 시작> 속 상황이 결코! 영화 속 상상의 장면만은 아니었던 거니까요. 그렇다면 이 소설도 또한! 단지 이런 비현실적/상상 속 상황을 가정하여 그려내고 있는, 하나의 '허구(fiction)'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중국 작가 위화의 다음 문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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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은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새로이 해석될 수 있다.

 
 

 

 

 

이 소설이... 인류의 진화라는 사뭇 거창하기만 한, 그러하기에 나의 일생동안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하나의 지적 유희로서 즐겨보는 상상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저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느낌은... 어쩌면 당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지도.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섭리는, 무기력해진 인간들이 이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더 뛰어난 종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즉!!! 유인원들이 인간의 뒤를 계승하였다라는 게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 개인의 일생을 '인류의 역사'에 빗대어 본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태어나 생활을, 지식을 습득하며 자라났고, 어느 순간이 되어 그간의 축적된 모든 것들이 만개하여 커다란 성취감을 맛보았던 적이 있었었으며, 그리고 또한!!!... 그 성취 후에 다가왔던, '정해진 성장의 마지막 과정에 무사히 들어섰다는 데서 오는 방심'으로부터 기인된 무기력에 의해 결국엔, '나의 지위'를 누군가에게 양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저는 물론이거니와 거의 모든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다라는 걸 이 소설이 꼬집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만 됩니다. 차마... 이 곳에 써낼 수는 없는, 사실은 길고 길게 썼다가 다 지워버린, 하지만 분명! 저의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되집어보자라니, 작가 피에르 불의 이 경고 - 인간의 퇴화와 유인원의 진화 - 가 작품 속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윌리스 메로가 받았을 충격의 강도와 똑같은 세기의 '두려움과 씁쓸함'을 2014년 현실의 저에게 그대로... 느끼도록 만들어 주었고, 또한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것이 독서로부터 얻게 되는 짜릿!한 희열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겁니다.   

 

지금 제가 영위하고 있는 이 사회 생활이라는 거 --- 무기력함에 빠져 있는/있었던 '나'를, 어느 순간 획!하며 제치고 앞서 나갈 수 있는/나아가버리는 정말로 많은 유인원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인간인 '나'를 향해 "너는 정말로 못생겼어!"라 말하는 유인원들이... '나'의 주위에서 쉬임없이 '나'를 지켜/노려보고 있다라는, 그러한 '상황의 역전'이 최소한 소로르 행성에서는 진실이었었듯, 지금 제가 서있는 곳 또한 어쩌면 그 소로르 행성일 수도 있다라는, 바로 그 점이 저를 씁쓸하게 만들어 주었던 거지요. 

 


"나의 베텔게우스 세계로의 여행은 미리 정해진 섭리였다. 그러니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은총을 잃은 이 인류의 새로운 구세주가 되는 것이 내 임무였다."


주인공 윌리스 메로의 위와 같은 결심이, 이 부분을 읽을 때에는 사뭇 헛웃음까지 자아내게 해주었었던 이 결심이 어쩌면... 지금의 저에게 가장 필요한 다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비록 소설은 주인공 윌리스 메로의 위와 같은 다짐이 너무 늦어 버린, 그래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만, 저의 현실은... 차마 너무 늦어 버린건 아니라고, 그러하기에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여력이 아직은 남아 있는 거라고 믿으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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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은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새로이 해석될 수 있다'라는 중국 작가 위화의 말에 기대어 제가 이 작품을 이렇게 되새김질 해보았듯, 이 소설 「혹성 탈출」이... '나'와는 다른 일상을 살아 온/가고 있는 다른 사람인 '당신'들에게는 과연 어떻게 읽혀질까... 가 문득 궁금해지네요. 저에게... 언제 한 번 들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소설이 정말로 대단!한 작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표시까지 붙어있는 만족도에는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도 깃들어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P.S. 이 작품은 (아주 얇은 테두리를 가지고 있는) 액자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액자의 마지막 테두리에서 드러나는 (액자 속) 등장인물들의 실체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문」의 마지막 장에서 받게 되는 충격에 전혀 뒤지지 않는 소름 돋음!을 선사해 줍니다. 영화 <혹성 탈출>의 마지막 장면인, 부서진 '자유의 여신상'을 주인공이, 그리고 시청자가 보게되는 순간을 최소한... 100만 배는 뛰어넘는. 

 

 

  

※ 이 포스트에 등장하는 책들의 감상문

- 다카노 가즈아키 作, 「제노사이드

- 마빈 해리스 著, 작은 인간

- 아비코 다케마루 作, 「살육에 이르는 병

- 오기와라 히로시 作,「소문」​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도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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