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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의 연가
이문열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하나의 소설 작품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 소위 '고전 Classic'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은 그런 유효기간 따위는 없다,라 말을 한다 하고, 실제로 그 '고전'들 몇 편을 읽었던 저 또한 (읽어보았던 모든 '고전'들로부터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역시 고전이라 불리울 만한 소설에는 유효기간이란 없네!'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행의 사그라듬이 아닌, 정녕 '이 소설의 유효기간은 끝났어'라 말한다라는 건 (고전 작품들을 포함하건 제외하건) 일반적 관점에서 보아 온당치 않은 표현인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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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있는 한 남자와, 주위의 결혼 재촉을 감내하고 있는 스물 일곱 살 여성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불륜' 이야기란 거죠. 하지만! 마치... '나는 작가 이문열의 글을 좋아하도록 태어난 것임에 틀림없어!'란 생각이 지극히 자연스러울 정도로, 예의 제 마음을 뒤흔드는 스타일의 문장들로, 작가 이문열은 이 이야기 속에, (결혼 적령기, 성의 개방 등) 사뭇 세속/현실적인, 혹은 (결혼 제도, 정신적 순결 등) 일견 철학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여러 가지의, 그럼에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일관성을 지닌 채 의도적으로 거론된 것들임에 틀림 없기도 한, 거의 모든 주제들에서.... 저의 지대한 관심, 그리고 최고조의 집중을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러일으켜 주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결국 우리가 고안해 낸 가장 훌륭한 사랑의 귀결이란 결혼밖엔 없는 것일까. ……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 있으면 안 되는가. …… 어째서 모든 사랑 이야기는 결혼 아니면 죽음과 이별로 끝나는 것일까. 어째서 모든 사랑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는가. 아름답지 않으면 추악해지는가.
와 같이, 부분 부분 잘만 골라낸다면, 아.마.도! 세심하게 잘 골라내어 이십 대때에 적잖게 연애 편지란 것에 인용했었을 듯 싶은, 지극히 감성적 애잔함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헌데... 저의 이십 대때엔 그러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도 사십 대 중반을 넘긴, 새로움보다는 기존의 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그런 대한민국의 한 가장이자 남자가 되어있다라는 현실은... 저에게 이 작품을 읽고, 이야기 속 두 주인공들 간의 연애 감정의 시종(始終)을 적어내는 것보다는, 사뭇 뜬금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과연 소설에도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발 더 나아가 '작가에게도, 그의 필력이 유지되고 있는가의 여부를 의도적으로 제외시켜버린 채, 그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적용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떠올려 주더군요. (그렇게 흘러간 이십 몇 년간의 시간은 저로 하여금 위의 감성적인 문장들을 읽으면서... '이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거라고, 뜨거운 연애를 하다가 이별했다해서, 그 이별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애를 한 것이었다,라 말할 수는 없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네요. 대한민국 사십 대 중반의 남자에게 로맨스 소설은 정녕... 읽혀지기 어려운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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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하나의 레테(망각의 강)이다.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강 이편의 사랑을 잊고, 강 건너편의 새로운 사랑을 맞아야 한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오직 그 새로운 사랑만으로 남은 삶을, 그 꿈과 기억들을 채워 가야 한다.
이 작품의 두 번째 문장을 위와 같이 시작됩니다. 물론!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정상적인 관념은 위의 독백에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지켜져야 한다는 것'과 '지켜낼 수 있는 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옳다고 일컫어지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우리는 때때로 반기를 들고 싶어하기도 한다라는 걸, 우리 대부분은 또한 인정한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라면! 이 소설은 일견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읽혀질 수도 있을겁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영화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건지도...)
여주인공 희원과 남주인공 민 화백 사이에 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었는가는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인공 희원마저도 자신 스스로를 확실하게 설득해내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작가 또한... 그 왜!의 문제보다는 사랑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두 주인공의 심리상태에 더 많은 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그렇게 둘의 만남 초기에 희원이 스스로에게 연신 던졌던 자문은 그 왜!의 문제가 아닌 둘 간의 관계의 정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두 사람 사이에 연애 감정이 생겨난 것에 있어 왜!라는 문제는 두 당사자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 둘을 바라보는 제 3자에게는 왜!의 문제가 상당히 호기심을 끄는 주제일지 모르겠지만요.)
겨우 한 달 사이에 열 번 가까이나 그와 나는 아무런 명분없이 만나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연애가 아닌 것은 나도 그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남녀간의 우정? 그러나 나이도 처지도 전혀 걸맞지 않다. …… 그렇다면 그는 내게 무엇인가? …… 적어도 그는 내가 무심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서 빨리 명분을 결정 짓지 않으면 안 될 사람, 또는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끝내 그 명분을 찾아내지 못했던 희원은 결국 '나는 제자리로 돌아간다'라 결심합니다만 이내... 다음과 같은 후회로 인해 그 결심을 거두어버리게 되지요.
'이게 제자리인가. 이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내가 있던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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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과 마찬가지로 둘의 관계에 대해 도덕적 자책을 느끼고 있었던 남자 주인공 민 화백 또한 희원에게 떠나라 말을 했었습니다만, 그 또한... 이내 다시 희원의 곁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곤 이렇게 선언합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믿고 출발해 보는 것이오. 하지만 한 가지 …… 이성(理性)과 자제는 이제 나 홀로만의 몫은 아니오."
이처럼 결국! 두 사람은 각자 나름의 이유를 대며 둘 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지속시켜가기로 합니다. 도덕적일 수 없는 이 사랑을, 운전과의 비교를 통해, 그 피치 못할 정당성을 자신들 스스로에게 각인 시켜 가며 말이죠.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우리는 여러 법규들의 정당함이나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운전석에 오르면 우리는 어린애 같은 흥분과 쾌감에 모든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부도덕한 사랑의 위험을 잘 알고, 그로 인해 우리 삶에 가해질 위해를 피하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러나 한 번 사랑에 빠져 버리면 우리는 이내 비정한 쾌감과 잔인한 이기에 휘몰려 그 모든 걸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 희원의 일기 형식을 빌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일기 속에서 지속되는, 둘의 관계에 대한 희원의 의문은 이내 현실적인 부분, 즉 성(性)의 문제에 이르르게 되지요. 이미 로맨스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둘 사이의 관계에서 성(sex)이란 하나의 추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는 거의 마지막에, 즉 헤어짐이 머지 않은 시점에 가서야 등장할, 단 한 번의 '격렬한 포옹과 뜨거운 키스'이외의 그 어떠한 육체적 관계가 끝내 없지요.)
그런데 소설은 - 즉 작가는!!! - 이러한 관계의 유지가 내내 남자 주인공인 민 화백의 뜻이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성과 자제가 자신 홀로만의 몫은 아니라는 말로, 민 화백은, 또한 작가 이문열은 희원에게 내내 그 이성과 자제를 강제시킵니다... (라고 저는 읽었습니다)만! 희원의 감정은 민 화백처럼 이성과 자제를 끝내 완전히는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사람의 사랑이 동물의 성애(性愛)와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도덕성(이다). …… 사랑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이다. 부도덕하고 추악한 세상의 사랑은 사랑과 성을 혼동한 결과이다.
비록 희원의 일기라는 형식으로 쓰여진, 그러하기에 희원 자신의 심리를 사실은 가장 잘 묘사해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위에서처럼 둘 간의 사랑에 명확한 경계를 그어놓고 있는 민 화백과는 달리) '그는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나 또한 그를 기다리기 위해 지난 세월을 허송해 왔음을 의심없이 믿고 싶은 지금 …… 그는 나의 사랑이고, 연민이고, 괴로운 운명이다.' 라는 희원의 심리는 독자를 향한 설득력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아무리 이 소설이 왜!의 문제보다는 '관계의 정의'에 집중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점이 이 작품의 큰 결점 중 하나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부분이지요.
가정(家庭)이 있는 남자와의 사랑 ---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 장애물은 바로 그 '남자의 가정'이겠지요. '우리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제 둘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자문 끝에, 타인의 입을 빌린 형식의, 하지만 그것이 여주인공 희원의 생각이라는 의심을 지워내지 못하겠는, 사뭇 파격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다음의 구절에서 작가는/소설은 독자들에게 '너의 생각은 어떠냐?'라 묻고 있기도 합니다. (2014년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미혼 여성들의 생각이 아주 많이! 궁금하기도 하네요. ^^;;)
배가 난파했을 때, 꼭 한 사람만이 의지할 수 있는 통나무에 두 사람이 헤엄쳐 간 경우... 그때 둘 중 하나가 자기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을 밀쳐 결국 그가 죽게 되더라도 그 행위는 정당 방위가 된다는 거야. …… 누가 먼저 그 통나무를 잡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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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이십 대에,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아쉽게도... 그 어느 기록에도, 또한 그저 애잔한 사랑 이야기였다라는 단편적 느낌 이외에는 저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헌데 말이죠... 사십 중반의 나이가 되어 읽은, 1983년에 출간되었다는 이 소설은 지극히 남성 편향적인 사고의 현란한 변명이라는 생각밖에는 지금의 저에게 남겨주는 것이 없습니다.
여주인공 희원은 미모의 커리어 우먼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바보 · 멍충이가 아니라는 거지요. 선을 보았던 남자에게 '왜 여자도 하나의 어엿한 판단 주체라는 걸 무시하죠?'라는 항의를 하기도 하는, 말하자면 나름 여성의 자의식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자를 한 독립된 판단 주체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개 그런 식으로 부추김으로써 여자가 자진하여 옷을 벗고 우리 침대 속으로 기어들도록 유도하려는 때죠. 즉 책임이라는 부담 없이 여자를 즐기고 싶을 때 우리는 가장 기꺼이 그녀가 독립된 판단 주체라는 걸 인정합니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자의식이란 것은...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작가가 정의내리고 있는, 고작!해야 이런 수준의 자의식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즉! 여주인공 희원은 남자의 이러한 대꾸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수준 정도의 자의식만을 가지고 있는, 잘나보이기만 하는 그런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인 거지요. (위의 인용된 문장이 가지고 있는 논리를 들어 작가 이문열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남자의 생각을 남자인 작가가 표현하고 있다라는 그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것으로 소설은 끝맺음을 하고 있는데, 이 헤어짐 역시 전적으로 남자 주인공 민 화백의 결정이었다라는 점 또한, '극단적 이기심'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는 민 화백이 밝힌 헤어짐의 이유, 그리고 어쩌면 '어처구니 없는'이라 표현될 수도 있을 듯한 희원의 심리 상태는 2014년의 독자인 (남자이고, 페미니즘에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의 사회생활을 그만두라고도 주장했었던) 저조차도 이해해내기엔 짐짓 버거웠다라 말할 수밖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아직도 나는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한 것이라 믿고 있소. 그런데 방금과 같은 방식으로 희원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데는 전혀 희원쪽의 행복은 고려되어 있지 않소. …… 그건 이미 사랑도 무엇도 아니었소. 아니, 사랑의 탈을 쓴 저열한 이기(利己)였을 따름이었소. …… 역시 우리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소. …… 내가 희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이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치닫는 걸 막는 일뿐이오. 적당한 곳에서 멈출 줄 아는 것이 내가 배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오. ……그리하여 나의 기억에는 언제나 희원이 내 젊음에 내려진 마지막 축복으로 남아 있을 것처럼, 희원의 기억에도 나는 항상 부끄럼 없는 사랑으로 살아 남고 싶소.
얼핏 읽으면, 지극히 순애보적인 사랑의 마음을 가진 남자의 고백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신 스스로 이기적이지 않으려 내린 결정이라 남자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끝!까지... 둘 간의 사랑은 남성인 민 화백이 '해줄 수 있는 / 베풀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사고를, 그 마지막에 가서는 '부끄럼 없는 사랑'으로 남고 싶다라고까지 말하는, 더할 수 없이 독단적이며 이기적인 한 남자의 욕심이자 오만으로 밖에는 해석되질 않습니다.
① 남녀의 사랑에서 성적 욕구가 남자로부터 더 먼저 생겨나는 것이 일반적이라 본다면, 이 두 사람 사이에 성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연애 감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남자인 민 화백이 진정!으로 희원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니었느냐란 질문, 그러니까 그 스스로 '해줄 수 있는/ 베풀 수 있는' 이라는 생각을 한다라는 게 이기적이라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느냐란 질문엔...
만약 내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랑은 성(性)의 침해와 오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 지난 봄 내가 다시 그대를 만나게 되었을 때도 그러했다. …… 우리의 만남이 변질될 징후를 보이면서부터 내가 그대를 상대로 꿈꾼 사랑은 그것을 통해 둘의 정신이 보다 높게 끌어올려지고, 우리 살이(生)가 진 온갖 고통스런 부하(負荷)는 그 무게가 줄어들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피로이며 소모이며 부패인 성(性), 거리마다 넘쳐흐르는 그 저급한 사랑의 육화(肉化)는 처음부터 내 예정에 없었다.
이 남자는 사랑에 있어 성(性)적인 면을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고 있었었으며, 그 부정의 이유는 오로지! 그만이 만들어낸 것이었지요. 즉! 여기에는 이 연애의 상대가 미혼 여성이라는 것에 대한 배려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다행(?)히도 희원 또한 그와의 육체적 관계를 (최소한 겉으로는 드러내놓고) 원하지는 않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녀가 민 화백에게 성적인 관계라도 애원했었더라면 글쎄요... 이 둘의 관계가 계속될 수 있었을까요?
② 이 둘의 사랑은 그 시작부터 민 화백의 일방통행이 일상적이었었습니다. 물론! '도무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는 그의 전화만 받으면 반드시 그의 말대로 해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빠지고 만다'라는 희원 스스로의 적극적이었던 수동적 태도도 이 사랑이 일방통행이 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만, 사랑의 본질은 '남을 향한 것'이라 믿고 있다는 사람 - 사실 이 말도 제 3자인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 이 일방적으로 떠나고, 헤어짐을 선고하는 마지막 순간에까지도 이 헤어짐을 순전히 자신의 입장에서만 해석해주고 있다라는 건, 저의 이해력 수준에서는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상극이었을 뿐.
그대는 나의 이 같은 물러남을 거절 또는 버림과 같은 이름을 붙여 자존심의 문제와 관련지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진정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쪽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가 아닌 나이다. 만약 어떤 도둑이 있어 능동적인 회개로 훔치기를 포기하고 빈 집을 나온 경우라도, 그 집에 경관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묘한 치욕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내게도 이 한 번의 사랑, 아름답게 가꾸려돈 오랜 결의 외에, 도덕과 관습의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나이라든가 신분이 있었다.
결국 자신의 버리지 못하겠는 것을 버리지 못해 이 사랑으로부터 떠나간 남자가, 그 버리지 못함을 오히려 '도둑의 능동적인 회개'로, 희원의 명시적 동의 - 사랑이건 섹스건 - 를 '경관이 서 있는 것'에 비유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희원! 화를 내라구 화를!!!'이라 제가 다 외치고 싶었었기도 한 장면이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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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민 화백은 '세상에서 가장 벗어 던지기 힘든 짐'이라는 '자신 스스로 진 짐'을 벗어내 버립니다만, 그래! 민 화백이 희원을 꼬신 건 아니었지않느냐란 항변을 받아들인다 해도, 여기에 더해 1983년의 사회적 분위기가 이러한 민 화백의 사랑을 순애보로 해석했었었노라고 억지로 저를 설득시켜 내더라도 정작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러한 민 화백의 결정에 대한 여주인공 희원의 반응이었습니다. '남녀 사이에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인데 자신은 그걸 믿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라는 누군가의 말에 심정적 동의를 했던 그녀, 희원은 끝내...
"사랑이 지나간 시대의 플라토닉한 외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덕분이었다."
라 그 만남을 기억하며 지워버리지요.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던 민 선생을 우연히 어느 술집에서 만났을 때를 기록한 희원의 일기, '나는 곧 울컥 치미는 설움과도 같은 반가움에 빠지고, 이어 까닭 모를 기쁨과 즐거움의 애상을 느꼈다'라는, 연애의 초기에 둘 사이에서 그녀 스스로 설정해 놓은 이 포지션을, 둘의 관계가 끝이 나고서도 여전히... 그녀는 버리지 않고/못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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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 작품이 지극히 남성 중심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해도, 만약... 저 위에 보라색으로 써놓은 문장, '이게 제자리인가. 이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내가 있던 곳인가.' 에 대해 작가가 왜? 희원이라는 인물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를 알려만 주었다면 전... 이 작품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1983년이라는 시대가, 그 시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남성들이 훨씬 더 많았었으며, 그 시대의 여성들 또한!!! 그러한 남성 중심의 사고에 적잖이 순응하고 있었다라 이해할 수도 있는 거니까 말이죠.
아마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지극히 육체적인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재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당시의 '사랑'을 비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 그러하기에 '정신적 순결'이라는 것에 그토록 매서운 비난의 표현들을 쏟아 내었으며, 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끝내... '플라토닉한 외형'으로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즉! 이 소설의 주제를 '순수한 사랑의 의미' 혹은 '순수한 사랑이란 과연 어떤 모습인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아닐 수도 있다라는 생각도 적잖게 들었습니다. 만약 작가가 이 둘의 사랑을 '순수한 사랑'으로 그려낸 것이라면 자칫... 육체적 관계가 없는 불륜은 괜찮다!라는 생각을 심어줄 여지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이 소설의 주제가 이것이 아니라면?에 대한 의문에 제 수준에서는 다른 카드가 선뜻 떠오르지는 않네요. 민 화백이 내내 '사랑의 도덕성'을 고집했다라는 점, 그리고 어찌됐건 그 '사랑의 도덕성'이라는 걸 지켜내기도 했다라는 결말로 보아, 이 소설의 핵심으로 '순수한 사랑'을 꼽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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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의 작품을 2014년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이냐의 물음에 대해서는 200년 전에 쓰여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그 전형적 대답을 해주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반면!!! 1983년에 보여졌던 작가 이문열의 사랑관은, 2014년의 시각엔 낡은 것도, 희귀한 것도 아닌 그저... 옳지 않은 것!이었다라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 "희귀하리라고 생각한 이야기는,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낡았기 때문에 희귀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라 적고 있는데, 이 소설 속 사랑은... 새롭거나 낡았기 때문에 희귀한 것이 아닌, 단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희귀한 것이라 답해드리고도 싶고 말이죠.
아마도 처음이지 않을까 싶게... 이문열의 작품에 날선 비판적 생각을 갖게 된 작품이었습니다만, 작가 이문열을 향한 저의 애정은 아직은 유효 기간이 끝나지 않았노라고, 물론! 작가로서의 유효 기간 또한 아직은 남아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기도, 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작가의 사랑관이 옳지 않다!라 말하는 것까지도 모두... 그 애정으로부터 나온 것임에는 또한 틀림이 없다는 말이... 꼭! 덧붙여져야 하구말이죠.
※ 감상문을 써놓은 작가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 : 「황제를 위하여」 · 「젊은날의 초상」 · 「시인(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