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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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708페이지 수를 자랑하는 「돈키호테」 1·2권을 모두 다 읽어냈습니다. 이제 저도 '「돈키호테」 1·2권 모두 다 읽은 사람?'이란 질문에 자신있게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라는 거죠. 1권의 앞표지를 넘기며, 이 두꺼운 두 권의 책을 다 읽어내면 저 스스로에게 매우 뿌듯한 감정을 가지게 될 것 같다라 생각하기는 했었습니다만, 2권의 뒷표지를 덮는 순간, 기대(?)했던 뿌듯함... 이라기보다는 지난 16일간 줄곧 저의 머릿속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던 <슬픈 몰골의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 그리고 '산초 판사'와 이제는 헤어지게 되었다라는 아쉬움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제 마음을 뒤덮더군요. 들고 다니기에 상당히 무겁긴 했으나, 정말로...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정말로 매력적인, 어느새 친구가 되어버린 듯한 두 인물이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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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돈키호테는 미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 읽었었던 1권과는 달리, 2권을 펼쳐들 때엔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되어질 것이며, 그 마무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란 궁금증이 가장 컸었더랬습니다. 1권을 다 읽고, 2권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 책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돈키호테」, 어떻게 읽을 것인가?>란 주제의 강연을 들었었지만, 가급적 강연의 내용들을 머리에서 지워낸 채 시작하고 싶었기도 했구요.(강연의 내용은 2권의 말미에 있는 <작품 해설>의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우베다에 있었던 화가, 오르바네하에게 무엇을 그리느냐고 물었더니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을 그린다고 대답하곤 했다네. 수탉을 그릴 때에는 그 아래 '이것은 수탉이다'라고 쓰곤 했지. 사람들이 여우로 보지 않도록 말일세. (p861)

2권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자면, 게다가 그에 얽힌 저의 하고 싶은 말들을 다 늘어놓자면, 정말로 한없이 기나긴 감상문이 될 것 같기에, 중요하다!라 생각되는 부분만을 적어내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했을때 혹! '이 사람, 수탉을 보고 여우를 그려놓았네!'란 댓글이 달릴지도 모르겠노라는 우려를 '이 감상문은 수탉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그린 것입니다'란 변명을 앞세워 미리 지워내며 시작해 볼까 합니다. 특정 대상의 일부분만을 따온다라는 것이 그 대상 전체의 속성/이미지/실체를 변질·왜곡시킬 수도 있다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덮는 순간 저를 사로잡고 있었던 한 가지 생각, 이 생각만!을 적어내는 것이 그나마 지금 제가 (그나마 잘) 해낼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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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단 몇 차례, 거의 항상 부서지고 깨어지기만 할 뿐이다. 오로지 자신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그래서 실패에 대한 인식도 없는 광인 돈키호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을 잊지 않고 욕심을 채우며 겁도 많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충실하기 그지없는 단순 순박한 종자 산초,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충돌은 독자들에게 끝없는 유쾌함과 해학을 선사한다. (p912)

​'누가·왜·어떻게' --- 이 세 가지의 포인트가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추리 소설을 읽어가는 데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에 따라선 '누가'의 해답을 미리 독자에게 알려주고 오로지 '왜' 혹은 '어떻게' 또는 '왜와 어떻게' 모두를 밝혀내가는 경우도 있고, 암튼... 그 조합에 따라 매우 다양한 내용의 추리 소설들을 (저의 경험 한에서는)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거의 백지와도 같았던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었던 1권과 달리,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라는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저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게 된 상태에서 2권을 읽기 시작했었을 때 전... 이 작품을 '누가·왜·어떻게' 등을 밝혀내는 추리 소설 읽듯이, 즉 소설 속 이야기의 전개에 집착해서 읽지는 않(아도 되)겠다라 생각했었더랬습니다. 단지 과연 이 두 인물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며/어떠한 이유로 인해 자신들의 편력을 끝맺음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졌었던, 즉! 과정보다는 그 결말(이 담고 있는 의미)에 집중을 하고 싶었었으며, 그러했기에 읽어가는 과정에서도, 또한 다 읽고 난 지금에도 돈키호테가 이상주의자인지, 산초는 현실주의자였는지라는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는 거지요. 헌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2권을 쭈욱 읽어가다보니, 그리고 (드디어!) 다 읽어내고 보니 이 작품의 내용을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충돌', 즉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산초 판사를 현실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는 역자의 주장에 관심의 차원을 넘어, 선뜻 동의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하여, 제가 수탉을 보았음에도 결국엔 여우를 그려낼지도 모르겠다란 걱정(?) 어린 감상문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거지요. 자 그럼... 제가 그려낸 이 '결과적으로 나온 것'이 과연 수탉인지 여우인지의 판단은 어쨌든 여러분들께 맡기기로 하고, 그 그림을 한 번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작품을 이해했을 때 이런 해석이 옳바른 것일지도, 그러하기에 단 한 번의 독서만으로 제가 가지게 된 결론인 이 '동의할 수 없음'이, 특정 부분에 집중하여 이 작품을 읽었었던 것으로부터 기인된 일종의 '변질·왜곡'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도 한다라는 발뺌을 미리 해놓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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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을 당할 수 없는 자는 아무도 모욕할 수 없지요. 여자들이나 어린애들이나 성직자들은 모욕을 당해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굴욕당할 수 없습니다. …… 굴욕과 모욕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모욕은 모욕을 줄 수 있고 모욕을 주며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자로부터 옵니다. 반면 굴욕은 모욕을 주는 일 없이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 예를 들어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때렸다고 합시다. 그러고는 기다리지 않고 도망을 가고 맞은 사람이 그 사람을 쫒아 가지만 붙들지 못할 때, 이 맞은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욕은 그에 맞서는 것이 있을 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때린 사람이 불시에 때렸더라도 그 후에 멈춰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상대와 맞서려고 했다면, 맞은 사람은 모욕과 굴욕을 함께 당한 겁니다. 굴욕스러운 건 기습적으로 맞은 것 때문이며 모욕적인 건 자기를 때린 사람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대신 스스로의 행동을 지지하며 그대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저주스러운 결투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굴욕은 당했을 수 있지만 모욕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pp407-408)

​<굴욕과 모욕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논술 문제가 나온다면 아마도 만점을 받게되지 않을까 싶은 위와 같은 대답을 한 인물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돈키호테입니다. 이 작품을 (종원군처럼 요약본을 읽은 것이 아닌 원본으로) 읽어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이 인물, 돈키호테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제가 이 소설을 읽어가며 느끼게 되었던 감정적 분노를 그나마 억제할 수 있었던 그 무엇이 되어주었었기에... 위의 인용한 부분을 이 작품, 그리고 작품 속 인물인 돈키호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꼽을 수 밖엔 없게 됩니다.

1권에서 산초는 자신을 섬의 통치자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라는 돈키호테의 말에 그의 종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방랑 내내... 그 약속을 주인인 돈키호테에게 주지시켜 주었지요. 물론! 그 스스로도 자신이 통치자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을 확신에 가까울정도로 믿고 있었기도 했구요. 하지만 1권의 마지막은 그 두 사람이 비참하다 싶을 정도의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산초의 꿈은 어떻게 될까요?

 

2권에서 작가는, 10여년 전에 쓰여졌던 1권의 내용들 모두가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시중에 널리 퍼져 있다라는 설정을 해놓고 있습니다. 즉, 많은 세상 사람들이 돈키호테와 산초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편력기들을 다 알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늘이 원하고, 운명이 명령하고, 이성이 요구하며, 무엇보다 내 의지가 원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돈키호테와 산초가 떠난 이 세 번째의 모험에서 만나게 될 많은 사람들이 이미! 돈키호테와 산초가 어떠한 인물들인가를 알고 있다라는 전제하에 이후의 에피소드들을 그려내고 있는 겁니다. 이 설정은 2권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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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우연히, 사냥을 하고 있던 공작과 그의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부부는 물론! 1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이미 읽었었기에, 돈키호테와 산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었지요. 부부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직접 만났다는 기쁨에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넓은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아름다운 시녀 두 명이 다가와 돈키호테의 어깨에 주홍색 멋진 망토를 걸쳐 주었다. (p392) --- <각주 200> 기사 소설에서 보통 기사가 성에 들어서면 그 즉시 시녀들이나 시동들이 나와 망토로 그의 어깨를 덮는다. 공작이나 그 하인들이 기사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환대를 받은 돈키호테는 자신이 책에서 읽었던 것과 똑같은 대접을 실제로 받는다라는 사실로부터 스스로가 환상 속이 아닌 진짜! 편력 기사라는 걸 처음으로 전적으로 실감하고 믿게됩니다. 즉! 1권에서는 '말하는 것들이 모두 실제로 그러하다고 상상'했던 그가 드디어 '눈에 보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들을 느끼게 된다라는 거지요. 허나!!! 

 

이 두 사람(공작 부부)기사도의 양식과 아주 잘 어울리면서도 놀랄 만한 것으로 돈키호테를 놀려 줄 일을 구상하고 그 순서도 정했다. 아주 기사도적이면서 빈틈없는 것들로 여러 가지 장난을 생각해 냈으니, 그것들이 바로 이 위대한 이야기에 들어 있는 가장 훌륭한 모험들이다. (p433)

이후 산초에게 섬(이라 속인 어느 마을)의 통치자가 되게 해준 것도, 둘시네아에게 걸려 있는 마법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과정도 ……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실은 공작 부부의 속임수였었던 겁니다. 그들이 이런 모든 속임수를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던 단! 하나의 이유는 오직...

 

공작 부부는 사냥과 자기들이 뜻한 바를 기막히게 교묘하고도 훌륭하게 해낸 것에 만족하여 다음 장난을 이어 가기 위해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었다. (p456) …… 자기들이 뜻한 일에 돈키호테가 어찌나 잘 말려드는지, 공작과 공작 부인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p466) …… <슬픔에 잠긴 과부 시녀>의 모험이 재미있고도 무시하게 끝나자 공작 부부는 아주 흡족해하며, 진짜처럼 보일 만한 적당한 소재를 찾아 계속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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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자신의 영지 중 한 마을을 '바라타리아'라는 이름의 섬으로 속여, 산초 판사를 그 섬의 통치자로 보냅니다. 물론! 자신의 재미를 위한 장난이었지만 나름 스케일은 웅장하지요. 이러한 내막도 모른 채, 산초가 섬으로 떠나기 전날, 돈키호테는 산초를 불러 옳바른 통치자가 되기 위한 여러가지 진심어린 조언들을 해줍니다. 결국 다 기억하지 못하겠노라는 산초의 말에 돈키호테는 그 조언들을 모두 꼼꼼하게 적어 산초에게 전해주지만, 산초는 그마저도 흘렸고, 조언을 담은 편지는 결국 공작 부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를 읽은 '두 사람은 새삼 돈키호테의 기지와 광기(p527)'에 놀라게 되지만 --- 이미 1권을 통해 '돈키호테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던 전, 이 인물의 신중함과 정의로움에 다시 한번 또! 놀라게 되었더랬습니다. 다음에 요약해 인용해 놓은,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본다면 여러분은... 어떠실지요?

 

● 자네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도록 노력하게. …… 자네를 알게 되면 황소와 같아지고 싶었던 개구리처럼 몸을 부풀리려는 일은 없을 게야.

●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자기가 수행하는 업무에 있어 엄격하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네. …… 자네 가문이 천한 것을 떳떳이 여기게. 농부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게. …… 혈통은 계승되는 것이지만 덕은 획득하는 것이며, 덕은 그 자체만으로도 혈통이 가지지 못하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라네.

자가 하는 말보다 가난한 자의 눈물에 더 많은 연민을 가지도록 하게. 그렇다고 가난한 자들의 편만 들라는 건 아니네. 정의는 공평해야 하니까 말일세. 가난한 자의 흐느낌과 끈질기고 성가신 호소 속에서와 똑같이 부자의 약속과 선물 속에서도 진실을 발견하도록 해야 하네.

● 혹시 정의의 회초리를 꺾어야 할 경우가 이다면, 그것은 뇌물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자비의 무게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네. 자네의 원수와 관련한 소송을 재판할 일이 생길 때는, 자네가 받은 모욕은 머리에서 떨쳐 버리고 사건의 진실에만 생각을 집중해야 하네. 자네와 관계없는 사건에서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눈이 멀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 말일세. …… 만일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자네에게 판결을 요구하러 온다면, 그녀의 눈물에 눈을 두거나 그녀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녀가 요구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차분이 생각해야 하네. 그녀의 눈물에 자네의 이성이, 그녀의 한숨에 자네의 착한 마음이 휘말려 버리는 게 싫다면 말일세. 체형으로 벌해야 할 사람을 말로써 학대하지 말게. 체형의 고통은 고약한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그 불행한 사람에게는 충분하네. 자네의 사법권 아래 들어올 죄인을 타락한 우리 인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라고 생각하며 가엾게 여기게. 자네 쪽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상대를 모욕하지 말고, 늘 인정과 자비를 베풀도록 하게.

●자네를 하느님께 맡기게. 그리고 처음 먹은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게. …… 자네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을 제대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뜻과 신념을 늘 확고히 지니고 있으라는 것이네. 하늘은 항상 착한 소원을 도와주시기 때문이라네. (pp513-515)

자네가 다스리는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면 많은 일들 가운데 먼저 다음 두 가지를 해야 하네. 하나는 누구에게나 예의를 다하여 대해야 한다는 것이네. ... 다른 하나는 양식을 충분히 확보해 두라는 것일세.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괴롭히는 것으로 배고픔과 품귀로 인해 물가가 올라가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기 때문이라네. (p637) …… 덕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악덕의 의붓아버지가 되게. 늘 엄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늘 다정하지도 않은 이 양극단의 중간을 택하도록 하게. (p638)

드디어 통치자가 되어 섬에 부임한 산초 또한, 주인의 이러한 말을 잘 따라 (예상 외로!) 매우 현명하고 훌륭한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각종 소송의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그것들 중엔 --- 만일 누군가 다리를 이용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고자 한다면, 먼저 어디로 가며 무슨 일로 가는지를 맹세해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진실을 맹세한다면 무사히 건너갈 수 있으나, 거짓말을 하면 어떠한 사면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교수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곳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나 맹세하길, 자기는 저기 있는 저 교수대에서 죽기 위해 다리를 건너가겠다라 말을 합니다. 다리의 재판관들은 고민하지요. 만일 이 남자가 자유롭게 다리를 건너게 내버려 둔다면 이 사람은 거짓 맹세를 한 셈이니, 법에 따라 죽어야 하나, 그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이 남자가 저 교수대에서 죽을 것이라고 맹세한 것이 진실이 되니, 법에 따라 그를 자유롭게 가게 내버려둬야 하는 상황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산초의 현명한 판결은 여러분이 직접 이 책에서 확인해 보시는 걸로 남겨두겠습니다.)


물론!!! 이 모든 (허무맹랑한) 소송들은 모두 공작 부부가 보낸 신하들이 꾸며낸, 산초를 놀리기 위한 계략들의 일부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며 산초에게 통치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음식만을 제공하기도 했지요. 흡사 영화 <트루먼 쇼>와도 같은 상황이랄까요? 하지만!!!

 

"모욕은 모욕을 줄 수 있고 모욕을 주며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자로부터 옵니다. 반면 굴욕은 모욕을 주는 일 없이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멋진 말의 주인공인 돈키호테의 종자였던 산초 또한, 비록 공작의 신하들로부터 굴욕을 당하기는 했으나 끝내! 선하고 현명한 통치자로서 그 임무를 멋지게 수행해 내는 것으로 그들에게 모욕을 되갚아줍니다. 뿐만 아니라, 산초를 두고 장난을 쳐왔던 자들이 모두 모여 어떻게 그를 통치직에서 물러나게 할까에 관해 상의하는 와중에도 산초는 그곳을 훌륭하게 다스리기 위한 법령들을 구상하고 있었었지요.

 

그는 자기의 관할 지역에서는 양식을 도매가로 사서 소매가로 넘기는 자들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 생산된 것이든 포도주는 모두 다 자기 관할 지역으로 들여올 수 있지만, 평가와 품질과 평판에 따라 가격을 매기기 위하여 산지가 어디인지 추가적으로 밝히도록 했다. 포도주에 물을 섞거나 상표를 바꾸는 자는 그 죄로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신발 값을 내렸는데, 우선적으로 구두 값이 지나치게 비싼 것 같아 조절했다. 하인들이 자기 이익에 따라 고삐 풀린 듯 나다녔으므로 그들의 급료 규정도 만들었다. 밤이건 낮이건 음란하거나 난잡한 노래를 부르는 자에게는 아주 엄한 벌을 내리도록 했다. …… 가난뱅이들에게는 이들을 담당할 관리를 두었으니, 이들을 추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가난한지를 조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왜나하면 도둑이나 술주정뱅이들이 손이며 팔이 없는 것으로 위장하거나 허위로 종양에 걸린 것처럼 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단히 훌륭한 법들을 제정했으니, 그 법들은 오늘날까지 그곳에서 지켜지고 있으며 이 법을 <위대한 통치자 산초 판사의 법령>이라 이름하고 있다. (pp643-644)

이 밖에도 훗날 한동안 머물렀었던 이들 공작 부부의 성을 떠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만난 또 다른 귀족으로부터도 돈키호테와 산초는 이런, '의도된 조작으로부터의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물론! 비록! 두 인물 모두 조롱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기대했던 바의 재미를 안겨주게 되지만, 결코 그들의 조롱이 돈키호테와 산초에게 모욕이 아닌, 그저 굴욕일 뿐이었다라는 걸 독자들은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설정 속 에피소드들이 어쨌든 저에게는 적지않은 화를 나게 해주었더랬습니다. 아니 대체 니가 왜 화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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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로 하여금 그 장난의 통치자직에서 물러나게 하기 직전, 신하들은 전쟁이 일어났다라 보고하며 그 전쟁을 지휘해야 한다며 산초에게 걷지도 못할 정도로 꽉끼는 갑옷을 입혀줍니다. 이 갑옷을 입고 산초는 말하지요.

 

"어떻게 걸어야 하지, 이 불행한 내가?"

 

진심으로 진지하게 통치자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결국 산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스스로! 통치자의 직에서 내려옵니다. (이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여 산초를, 또 돈키호테를 조롱하던 자들의 계획에서 벗어난 것이었는데, 이 또한... 두 사람이 굴욕을 당했을지언정 결코 모욕을 당한 것은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생각합니다.)

 

이리로 오렴, 나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나와 고생과 가난을 같이해 온 잿빛아. 너와 마음을 나누고 네 마구를 손질하고 네 작은 몸뚱이나 먹여 살릴 일 이외에는 다른 생각일랑 하지 않으면서 보낸 나의 시간들과 나의 나날들과 나의 해들은 행복했었지. 하지만 너를 내버려 두고 야망과 오만의 탑 위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내 영혼 속으로 수천 가지 비참함과 수천 가지 노고와 수천 가지 불안이 들어오더구나. …… 여러분, 길을 비쳐 주시오. 그리고 내가 옛날의 자유로운 몸으로 돌아가도록 놔두시오. 현재의 이 죽음과 같은 생활에서 되살아나도록 지난 삶을 찾으러 가게 해주시오. 나는 통치자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오. …… 나는 법을 만들고 땅이나 왕국을 지키는 일보다 밭을 일구고 땅을 파고 포도나무를 베고 가지를 치는 일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오. 성 베드로는 로마에 있을 때 제일 편안하다는 말처럼,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어울린다는 얘기요. 손에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상인 왕홀보다 낫 한 자루 쥐고 있는게 내게는 더 잘 어울린다오. …… 그리고 통치한답시고 거기에 구속된 채 네덜란드산 이불 잠자리에 들고 검은담비 옷을 입고 사느니, 차라리 자유롭게 여름에는 떡갈나무 그늘에 드러눕고 겨울에는 새끼 양가죽을 입고 살고 싶다오. 그대들은 안녕히 계시요. 그리고 내 주인이신 공작님께는 내가 벌거숭이로 태어나 벌거숭이로 남았다고 전해 주시오. 나는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소이다. …… 제비나 다른 새들한테 잡아먹히라고 나를 공중에다 띄워 준 이 개미의 날개는 여기 마구간에 남기고 우리는 다시 평범하게 땅으로 돌아다닐 거요. …… 이불이 아무리 길더라도 그보다 더 다리를 뻗지는 말아야 하는 법이오. (pp 660-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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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부분이 제가 이 작품을 읽고 그려낸 '결과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장하준 교수는 '개인주의 경제 이론(=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가장 큰 문제점을 "개인이 처해 있는 환경의 거의 모든 부분이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라는 가정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재산권, 노동권 등 기존의 사회 구조 또한 '이미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라는 암묵적 요구"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가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면 사람들의 생각 자체도 변하게 되어, '적응된 선호 adaptive prefernece'를 만들어 내게 되고, 그로부터 생성된 '허위 의식  false consciouness'이라 불리우는, 예를 들어 억압을 받거나 착취나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그 와중에도) 자신은 행복하다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상황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로 인한 더욱 커다란 폐해는 그들에게 (너네는 결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야란) '진실'을 말해줌으로써, 그들에게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너네들 스스로를) 행복해하면 안 된다고 말할 권리를 앗아가 버린다라는, 그럼으로 하여 (비록 착각이나마 자신을 행복하다라 생각하고 있는)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권리를 가진 사람 또한 존재할 수 없다라는 점에 있다라고 주장했었었지요.

 

진보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며, 운전하면서도 가급적 좌회전은 하지 않으려 한다라 말할 수도 있는 제가, 그럼에도 작품 속의 이러한 설정들로부터 '화가 난다'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던 이유는 바로!!!

 

악의가 없는, 허나 가난한 자들은 있는 자들의 놀림감의 대상으로 밖에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작되어, 결국엔 --- "나는 통치자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오. …… 낫 한 자루 쥐고 있는게 내게는 더 잘 어울린다오."라는 산초의 말이 끝내!!!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어울린다는 얘기요. …… 이불이 아무리 길더라도 그보다 더 다리를 뻗지는 말아야 하는 법이오."로 끝맺음되는 이 상황이, 즉 장하준 교수가 언급한 '적응된 선호'를 '가난한/권력 없는 자들'에게 입히려는 '가진/권력 있는 자들'의 시도가 멋지게 성공하게 된다라는 이 상황이 저에게 '화가 난다'라는 감정을 가져다 주었던 겁니다.


자신들의 이러한 조작, 그러니까 없는 자들의 사상마저 개조해 그냥 없는 자는 영영 없는 자의 상황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 믿게 만드는 이 조작은 성공을 거두게 되고, 그로써 '타고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어울린다'라는 속담의 정당성을 기어이 산초 스스로로부터 이끌어내는 이 장면의 그림이 만약 (수탉을 보고 그려내야했던) 수탉을 그려내는 것이라면 전... 차라리 여우를 그려내는 걸 선택하겠다라는 거지요. 뭔 말이냐 하면!!!

이 상황은 결코!!! '타고난 일은 하는 것이 제일 어울린다'라는 속담이 맞다라 이야기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속담을 통해 피지배층의 정신을 개조하려는 시도가 성공했다라는 걸 의미하고 있으며, 열흘 간의 짧은 통치자직을 끝내고 주인인 돈키호테에게 돌아가는 산초가 '주인과 다시 함께하게 되는 것이 그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섬의 통치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p665)'라 느끼도록 만든 것 역시 패배의식을 포장해 그들이 그것을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들려는 조작 또한 성공했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걸, 이도 모자라 '일은 인간이 계획해도 이루시는 하느님이시지.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제일 좋은 일과 제일 알맞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란 말에서처럼 神마저도 이 속담의 정당성에 동원시키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정녕!!! 


작가 세르반테스가 의도한 것들이었는지, 아니면 이를 통해 거꾸로/역설적으로 그 속담/시대적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일 독자일 뿐인 저로서는 무모한 선택일지는 모르겠으나, 선뜻! 당연히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왜냐? 바로...

 


"지금은 부지런함보다는 게으름이 승리를 거두고, 노동보다는 오락이, 덕보다는 악습이, 용기보다는 오만이 …… 승리를 차지하고 있지." (p70)


(작가 세르반테스의 생각이 스며들어 있을) 돈키호테의 말이 그저 특정 문맥의 상황에만 한정되는 것으로 등장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2권 속에 1권이 독립적인 소재로 등장하고 있듯, (요약본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순환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이를 좀 확대해 본다면, 2권의 전반부의 등장했었던 돈키호테나 산초 판사의 말이 그 후반부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란 결론을 내리는 것이 그다지 큰 무리는 아니라는 거지요. 설혹! 이런 제 선택이 수탉을 보고 여우를 그려낸 것일지라해도 말이죠. (이 책의 역자는 <작품 해설>을 통해 '공작 부부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이 두 주인공을 가지고 집요하게 장난을 치는 이야기를 보면 인간의 유머가 잔인함에 기인해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p900)'라 말하고 있습니다. 시선의 방향이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잔인함'이라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지요.)



돈키호테를 집으로 오게 하기 위해 계책을 짰고, 결국 성공해 그로부터 집으로 돌아가겠노라라는 약속을 받아낸 삼손 카라스코에게 공작은 오히려 역정을 내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광인을 제정신으로 돌리고자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을 가하다니 ……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줄 수 있는 이득이 그가 미친 짓을 함으로써 주는 즐거움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시오? …… 매정한 말 같지만, 난 돈키호테의 병이 절대로 고쳐지지 말았으면 하오. 그가 낫게 되면 그로 인한 재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그의 종자 산초 판사의 재미까지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오." (pp806-807)

이 부분은 흡사! 현재의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쏟아지고 있는 비판들을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켜 주기도 했었습니다. '개인은 합리적이고 그들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라는 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가정은 단지! 그리고 여전히! 돈과 권력을 이미 자신의 수중에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라는 걸, 그리하여 결국엔 그 선택의 이면에 깔려 있는 <지배 - 피지배의 구조>를 지극히 간단하게 지워내 버린다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 말입니다.

권력과 금력, 그 둘을 모두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선 2014년 지금! 다음과 같은 장하준 교수의 물음이 그나마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라 생각했었었거늘, 채! 인식해낼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고 지워져버리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지배 - 피지배의 구조>란 것이, 그것이 아직 싹도 생겨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 세르반테스에게서는/도 이미! 주어져 있었던 (해결을 요하는) 문제이었던 겁니다. --- 나는 너희들에게 음식과 의복, 잠자리를 장만할 수 있는 돈을 제공할 테니, 너희들은 나에게 너희들의 (고통스러운) 노동을 통해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하.여.야.해. 물론! 고통은 너희들만 느끼는 것일 테고, 너희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마저도 또한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어.야.하지. 마지막으로! 이것이 절대적으로 너희들와 나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교환이라는 점을 잊지는 마. 질문 사절, 이상 끝!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바뀔 수 있는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차선책이 굶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을 선택할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먹어야 한다는 생리적 조건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게 아닌가? ……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하는지도 모른다.

- 장하준 著,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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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미쳐 버린 사람은 언제까지나 미치광이일 것이고, 좋아서 미치광이가 된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 미치광이를 그만둘 수 있다." (p209)

 

돈키호테에게는 어쩌면 숙명과도 같을 질문일 겁니다. '과연 당신은 미친 사람인가?'라는 것 말이죠. 1권을 읽고 저는 돈키호테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 말했었습니다만, 드디어! 2권에서 돈키호테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장면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미쳤다 생각하는 것도 틀린 건 아니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는 이 말 뒤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을 찾고 저것과 싸워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 그들(편력 기사)의 주요하고도 참된 의무랍니다." (p235)

 

다시 말해, 자신은 미치지 않았지만 자신을 미쳤다라 말하는 세상 모든 타인들을 편견과도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기사인 자신의 의무였다었라는 것이지요. 비록!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그 싸움 이길 수 없어도, 그 슬픔 견딜 수 없어도'와 같은 삶을 살았었지만, 돈키호테는 그의 (비록 길지는 않았던) 편력 기사로서의 삶 내내 '나는 죽어가며 사노라, 나는 얼음으로 불타노라, 나는 불 속에서 떠노라, 나는 희망 없이 희망하노라, 나는 떠나고 남노라.'의 신념을 끝내 이처럼 버리지는 않았었던 거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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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매번 인간 삶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거울을 우리 앞에 놓아주니 …… 우리가 어떤 인간들인지,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연극이나 배우들에 비길 만한 것은 어떤 것도 없다네. …… 한 사람이 깡패 역을 하고 다른 사람은 사기꾼, 이 사람은 상인 …… 또 다른 사람은 사랑에 빠진 어리석은 자를 연기하다가 연극이 끝나 의상을 벗어 버리면 모든 배우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되거든. …… 그런데 연극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은 일이 이 세상에서도 일어난단 말이야. 세상에서 어떤 자는 황제 역할을 하고 어떤 자는 교황 역할을 하는데,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연극에 등장할 수 있는 인물들이란 말이지. 하지만 연극이 끝나면,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때가 되어서 말일세,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와서 사람들을 차별화했던 의상들을 벗기면 모두가 무덤 속에 똑같이 있게 되는 게지. (p174)

 

"내  좋은 이들이여, 축하해 주시오. 나는 이제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아니라 알론소 키하나라오. …… 그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내가 빠졌던 아둔함과 위험을 이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오." (p880)

 

라는 유언을 남기고 돈키호테는 이승의 삶을 마감합니다. 사실 그의 이 유언을 읽고 (이 작품의 마무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전 약간의 혼란을 받았었습니다. 2권의 시작에서 그가 했던 "나는 편력 기사로 죽을 것이다. …… 하느님은 나를 이해하신다."(p65)라는 말, 그리고 "명성이라는 것은, 결국은 죽어야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이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에 합당한 상으로나 불멸의 몫으로서 원하는 것이지."(p139) 라는 말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최후를 선택했기 때문이었죠. 이 감상문을 쓰기 시작할 때까지도 그 혼란은 가시질 않았더랬습니다만, 감상문을 쓰기 위해, 읽어가면서 타이핑 해놓았던 구절들을 다시 읽다 보니, (제가 '이 책 최고의 문장'이라 표시해놓았던) 다음의 구절이 어쩌면! 그의 이러한 유언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가 아닐까, 더 나아가 인간의 목숨이 다한 죽음 이후의 그 어떤 곳에서는 그의 마지막 소원대로 목동이 되어 있을지도, 혹은 또다시 편력 기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돈키호테의 모습을 그려보게도 해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오히려 삶은 모두 원을 그리며 흘러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중심에다 한 점을 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다. ……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p655)

돈키호테가 편력 기사의 삶을 마감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삼손 카라스코가 쓴 돈키호테의 묘비명, "그의 운명은 그가 미쳐 살다가 정신들어 죽었음을 보증하노라." (pp885-886)는 "비록 미쳐 살기는 했으나 그러한 모습을 죽음 앞에서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p880)라는 돈키호테의 유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때의 '미쳐 살다가'라는 부분을 '狂人'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지요. 우리말로 무어라 옮겨야 할지 모르겠는, 'holic'의 의미로 전 그의 삶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나는 죽어가며 사노라, 나는 얼음으로 불타노라, 나는 불 속에서 떠노라, 나는 희망 없이 희망하노라, 나는 떠나고 남노라.'의 구절을 되새겨 보면, 독자로서... 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여야만 하는 것 아닐 수도 있다라는 작은 위로를 받게도 되지요. 어쨌든...

 

그는 떠났고, 이 작품이 발표된 1년 후 작가 세르반테스 또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문학사적 의의에까지 저의 능력이 미치지는 못합니다만, 또한 수탉을 보고 여우를 그려낸 듯한 감상문이 쓰여진 것도 같습니다만 --- 어쩌면... 이러한 점, 즉 작가가 보여주는 수탉을 보고 독자마다 나름의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을 가질 수 있다라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 「돈키호테」가, 시대를 초월해서도 여전히 읽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돈키호테 1권」에 대해 '알라딘'에 남겨져 있는 어느 독자분의 100자 평 일부를 빌어, 두 권 합쳐 1,708페이지였던 이 작품을 다 읽고난 (드디어 마지막) 인사를 '돈키호테 데 라만차'와 '산초 판사'에게 남기는 것으로 '수탉을 보고 여우를 그려낸 듯한' 이 그림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덧 마지막 문장이라니, 감상문이란 걸 쓰며 처음으로 울컥!하는 아쉬움이 올라옵니다. 아마도 가끔씩... 이 책을 펼쳐보며 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싶네요.  

 


   
 

당신과 함께 했던 16일동안 정말 즐거웠어요. 

고마와요.


안녕... 돈키호테!

굿바이! 산초.

 
 

 

 

 

 

 

 

P.S. 산초 판사는 속담을 인용해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속담을 많이 인용해 매번 주인인 돈키호테로부터 핀잔을 받기도 했지요.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그냥 읽어갔는데, 2권을 읽으면서부터는 산초 판사가 인용했었던 그 속담들을 진작 정리해 놓을껄,하는 후회가 들더군요. 그 후회 이후 부분에 등장하는 속담들 중 인상깊었던 것들 몇 개를 간추려 봤습니다. 산초가 인용하는 속담들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다시금 이 1,708페이지를 읽어보게될지도 모르겠. ^^

● 항아리가 돌에 부딪치건, 돌이 항아리에 부딪치건 깨지는 건 항아리다.

자기 집 바보가 남의 집 멀쩡한 사람보다 자기 집을 더 잘 안다.

쥐에게 줘야 할 것을 고양이에게 줘라, 그러면 걱정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 치사한 소유보다 훌륭한 희망이 더 낫다. 

● 누구에게서 태어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풀을 먹느냐가 중요하다. 

● 두 번 '주마'하는 것보다 한 번 '가져라'라는 게 훨씬 나으며, 날고 있는 독수리보다 손안에 든 참새 한 마리가 더 낫다.

 

 

 

※ 전편의 감상문 :  돈키호테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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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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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돈키호테 1·2」권의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에 초대를 받았고, 거기에 더해 그 두 권의 책들까지 미리/무려! 선물로 받았더랬습니다. 일단 그 자리에 가기 전에 1권이라도 읽어보고는 싶었으나 그 엄청난 두께와, 결코 읽(어내)기에 녹록한 책이 아니라는 이웃분의 코멘트도 기억이 났기에 - '한 사람의 혼잣말이 무려 여덟 페이지나 이어져요!'라는 것으로 이 책 읽기의 만만찮음을 토로해주셨던 어느 이웃분의 글이 문득 떠올랐었어요 - 이루고는 싶으나 이룰 수는 없을 듯한 소망이라 예상했었었거늘, 기념회 (날짜상으로는) 당일인 오늘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드디어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어냈습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닌 오로지! 이 책이 그만큼 재미있었었기에 가능했던 일!!!

암튼! 혹 동행자가 있으면 미리 알려달라는 출판사의 쪽지를 받고는 혼자 가는 것도 좀 그렇고, 이런 기회를 종원군에게도 보여라도 주고싶어 은근 협박을 함유시킨 채 의향을 물었더만 단칼에 고개를 젓더군요. - '안갈래요. 돈키호테는 미친 사람인데, 내가 왜 미친 사람이 나오는 소설 이야기를 들으러 가요. 난 그거 정말 재미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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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요? 바로 이... '과연 돈키호테는 미친 사람인건가'라는 의문이, 제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제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았더랬습니다. 저 또한 이 책을 읽기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돈키호테>라는 작품과 인물에 대해서는 풍차를 거인이라 주장하며 달려들었었다더라!라는 사실과, 산초라는 이름의 하인 한 명을 데리고 다녔었다는 것이 전부였었었기에, 선뜻!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미친 사람'이라는 종원군의 말에 "그렇다"라거나 "아니다"라는 그 어떤 답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허나! 다행스럽게도 작가 세르반테스는 저의 고민과 종원군의 확고한 판단, 모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으로 이 작품의 시작을 장식해 주고 있었습니다.

<내 망토 밑에서는 왕도 죽인다>라는 말처럼 편할 대로 하십시오. 당신은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존경심이나 의무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그러니 보시는 대로 무슨 말씀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나쁘게 말한다고 당신을 비방할까 혹은 좋게 말한다고 당신에게 상을 줄까, 두려워하거나 고민하지 마십시오. (p28) 

​………………………………………………

 

「돈키호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의 원제는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인데, 작가 세르반테스가 독자들에게 암시해주고 있는 무엇, 혹은 이 작품 속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에 생각해보면 바로 이 제목 속 '이달고'라는 단어에 얼추 거의 다 들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이달고 hidalgo'라는 단어에 대한 역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 그 이유가 들어있지요.


​hidalgo : 하급 귀족 작위인 <이달기아>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외에 스페인에서 최소 4대에 걸쳐 선을 행하며 내려온 기독교 가문의 가계에 주어졌던 이 작위는 스페인 열일곱 개 자치 지역 가운데 하나인 북쪽 나바라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714년부터 1492년까지 스페인 내 무어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국토 회복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도 명예로운 공동의 대의에 참가했음을 기리기 위해 이 작위를 부여하면서 대물림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평민 상당수가 포함될 정도로 많아져 이들 삶의 방식이 스페인 사람을 정의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달고는 "이상주의자에 열성 기독교 신자, 모험가, 큰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자, 대범한 자, 경제에는 무관심한 자"로 이러한 이달고가 스페인 16-17세기의 사고를 지배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위대함과 영광을 찾아 나아가도록 하는 추진력이기도 했다. 이들은 1492년 국토 회복 전쟁이 끝난 후 종교에 파묻혀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고 명예로 여기며, 전쟁과 행정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매여 살았다. (p19) 

주인공 '돈키호테'가 바로 이 '이달고'라는 작위를 가진 가문의 사람이었다라는 것을 알고 나면, 이후 보여지는 그의 수많은 기행들 중 지극히 일부나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자 그럼... 정확히 781 페이지로 끝맺음하고 있는 이 작품 속에 대체 어떤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지를 좀 살펴볼까요?

 

 

줄거리 】 

​'쉰에 가까운 나이의, 얼굴과 몸이 말랐고, 체형은 꼿꼿했고, 아침 일찍 일어났고, 사냥을 좋아했'으며, '틈이 날 때마다 - 1년 중 대부분이 그랬다 - 기사 소설을 읽는데 푹 빠져서 사냥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일조차 까맣게 잊고'마는 인물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입니다. 기사 소설에 대한 그의 호기심과 도취는 일상적 정도를 넘어, 급기야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까지 기사 소설들을 사모으는 지경에 까지 이르르고 말았죠. 결국 '그의 뇌는 말라 분별력을 잃고 …… 그리하여 자기가 읽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모두 진실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런 이야기보다 더 확실한 것들은 없다고 여기게 되'어 버립니다

 

이런 그는 마침내! '명예를 드높이고 아울러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 자신이 직접 편력 기사가 되어 모험을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읽은 편력 기사들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실천해 보'겠노라 결심하고 모험의 길을 떠나기로 합니다. 떠나기 전 우선! 그는 다음의 세 가지를 결정해야만 했었었지요.

자신, 즉 편력 기사가 타고 다닐 말에게, 사람들이 이 말이 이전에는 어떤 말이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면서도 아울러 현재의 신분을 드러낼 만한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는데, 돈키호테는 결국 '로시난테'라는 이름으로 결정합니다. --- '보기에 이 이름이야말로 고상하고 부르기도 좋은 데다, 지금은 세상의 모든 말들 가운데 제일가는 이 말이 전에는 일개 평범한 말이었으며, 어쨌든 이는 지난 일이었다는 의미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에게도 새로운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돈키호테'로 지었는데, '돈(don)'은 스페인에서 남자 앞에 사용하던 경칭이며, '키호테(quijote)'는 허벅지 안쪽 근육을 보호하기 위해 입던 갑옷을 뜻하는 단어로서, 남성의 상징이 결코 약해지거나 풀이 죽거나 느슨해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만! 사실 이는 그의 외모와 극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뜻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도 이러한 것일테구요. ('돈키호테'를 우리 말로 하면 '변강쇠 대감'? --;;)

 

이제 편력 기사인 자신이 사랑할/해야하는 귀부인을 찾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 사랑하는 귀부인이 없는 편력 기사란 잎이나 열매가 없는 나무요, 영혼 없는 육체이기 때문이었다. --- 결국 돈키호테는 자신이 사는 마을 근처에 사는, 한때 그가 좋아했었던,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던 한 농사꾼 처자에게 상상 속 이름을 지어 붙여줍니다. '둘시네아 델 토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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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력 기사에게 필요한 세 가지를 모두 갖춘 그는 길을 떠나자마자 곧! 자신이 제일 중요한 기사 서품을 받지 않았다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기사 소설들에 따라 그는, 모험의 여정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으로부터 기사 서품을 받겠노라 맘 먹고, 로시난테가 가고 싶은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둔 채 길을 갑니다. '모험의 매력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이후 그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그저 평범한 객줏집에 불과한 장소를 '네 개의 탑과 은빛 찬란한 첨탑, 그리고 위로 여닫는 다리와 성 둘레로 깊게 한 해자가 있으며 그 밖에 책에 묘사된 요소들을 모두 갖춘 성'이라 믿은 - ⓐ 실제로! 돈키호테의 눈에는 그렇게 비추었을까요? - 그는 어찌어찌해 기어이, 자신이 카스티야 성주라 불렀던 객줏집 주인으로부터 기사 서품을 받(아내)고야 맙니다.

 

서품식에서 객줏집 주인이 지 맘대로 지껄인 몇 마디, 그러니까 자고로 편력 기사에게는 돈과 비상약 그리고 종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따르고자 그것들을 구하기 위해 돈키호테는 일단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만 (기사 서품을 받아 한껏 들떠 있는) 그 길에 마주친 일단의 상인들에게 다짜고짜! - '라만차의 왕후이며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둘시네아 델 토보소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거라면, 모두 그 자리에 멈추시오'라는, (종원군의 표현을 빌자면 )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요구를 하지요. 그리곤 결국, 온 몸이 맷돌에 갈린 밀처럼 두들겨 맞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와중에도 이러한 불행조차 편력 기사들에게만 일어나는 일로 여겨 자기는 행복한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며 길에 뻗어 있었었는데, 마침 다행히도 그 곳을 지나가던 한 농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더랬죠. 물론! 자신이 그 곳에 그렇게 쓰러져 있던 이유는 이 드넓은 세상 어디를 가도 만나기 어려운 가장 지독하고 무모한 거인 열 명과 싸우다가 심하게 넘어졌다라는 말을 빼놓지는 않고서. (ⓑ 독자로서/가 처음으로 읽게 되는, 돈키호테의 이 황당한 이 말은 과연 거짓말이었을까요, 아니면 진짜 돈키호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것일까요?)

 

돈키호테는 이후 보름 동안 집에 머물며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먼저 이웃에 사는 착한 그러나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한 농부에게 간청을 하여 자신의 종자가 되게했지요. 돈키호테가 그에게 한 여러 가지 약속들 중 하나가 바로! - 만약 그가 기꺼이 자기를 따라나서 준다면 모험으로 아무리 못해도 어떤 섬을 얻게 되었을 때 그 섬을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에 산초 판사라는 이름의 그 농부는 마누라와 자식을 버리고 돈키호테의 종자가 될 것을 승낙했던 것이구요.  

  

이후 자신의 재산 중 어떤 것은 팔고 어떤 것은 저당 잡혀 적지 않은 돈을 마련한 돈키호테는 함께 살고 있던 가정부와 조카에게, 산초 판사는 처자식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어느 날 밤 아무도 모르게 그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저(조차)도 알았었었고, 많이들 알고 계시는, 일명 '풍차 모험'이 펼쳐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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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나머지 '5/6'를 차지하고 있는 이후의 이야기들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길에서 맞닥뜨리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 중 대부분은, 긁어 부스럼 식의 '만들어 일으켰던' 여러 가지 사건들에 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어떻게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느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과거 이야기도 나오고 암튼!!! 상당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연이어 등장하지요.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된다 말할 수도 있겠는 우연의 남발들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그것들이 이 소설의 재미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더랬습니다. 제가 집중했던 부분은 여전히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과연 미친 사람인가'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어쨌든 이 책 「돈키호테 1권」은 (어찌 생각해보면 너무 짧은, 또 어찌 보면 길게 느껴지기도 하는) 17일간의 편력 생활을 마치고, 비록 돈키호테의 의지와는 달리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그들의 집으로 되돌아 오는 것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 어떤 점이 이 소설 「돈키호테」를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는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 준 것이었던 걸까요?

 

 

 

【 줄거리 속에 숨겨져 있는 진짜! 이야기 】

이 책을 거진 다 읽었을 즈음 종원군이 가지고 있는, 곧 알라딘 중고 서점에 팔리게 될 운명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초등 저학년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돈키호테」를 읽어봤었습니다. 이 책과 비교하여 빠진 부분들도 있었습니다만, 돈키호테의 모험담에 관한 부분은 대체적으로 거의 다 담고 있더군요. 즉! 이 소설의 줄거리만을 알겠다 한다면 굳이 8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이 긴 책을 읽지는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혹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구사카베 요의 소설 「A 케어」의 감상문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이란 작품을 예로 들어 썼었듯) 한 소설 작품을 이야기함에 있어 오로지! 줄거리만을 따 표현해 본다면 사뭇 그 작품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혹은 그 작품의 지니고 있는 (문학적이건 시사적이건 교훈적이건 무엇이 되었든간에 그) 진정한 가치가 심하게 변질, 더 나아가 왜곡되어질 수도 있다라 생각하는데, 바로 그러한 변질과 왜곡이 어린 아이들/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돈키호테」들에 있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종원군에게도 결국 '돈키호테는 미친 사람일 뿐'이라는 강한 인상이 심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키호테가 길을 떠나 객줏집 주인에게 기사 서품을 받았다라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죠. --- 단순하게 줄거리만 보자면 한낱 우습기만한 장면만이 머릿속에 그려질 뿐이지만, 작가 세르반테스가 써놓은 그 하나하나의 서술들은 읽는 이에게 '읽는다'라는 노동에의 보답인 '읽는 즐거움'을 차고 넘칠만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읽는 즐거움'을 배제한 채, '독서'라는 행위를 단지 일개 노동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오로지 줄거리만으로 한 작품을 (이해가 아닌) 습득만! 한다면 과연... 작가의 진의대로 이해되어지는, 또한 그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고전이라 불리우는 작품이 대체 얼마나 남게될 지 정말로 의심스럽기만 하기도 합니다. 이는 제가 이전에 읽었던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서 실제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한데 --- 단 세 줄만을로도 요약되어질 수 있는, 그렇게 이야기의 뼈대만으로 쓰여있는 「왕자와 거지」를 읽은 초등학교 5학년 종원군이 - 물론 종원군의 독서 능력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겠지만 - 결국 '나 같으면 옥새 찾는 것을 도와주지 않고 계속 왕자로 살고 싶어 했을 것이다'란 독후감을 써놓았던 결과를 낳기도 하는 거지요. 이건 그렇고!

 

자 그렇다면... 이제 과연 '돈키호테는 진정 미친 사람일 뿐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열쇠를 찾아보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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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으로 느릿하게 길을 걸었다. 태양은 그의 뇌수를 녹일 정도로 지독한 열기로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얼마간의 뇌수가 그에게 남아있다면 말이다. (p76)

 

마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작품인 「롤리타」에서 주인공 험버트험버트를 드러내 놓지는 않았지만 돌려대는 표현으로 은근히, 허나 심하게 까대었던 것처럼, 세르반테스는 초반부의 돈키호테를 이렇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미쳤다'라는 말을 아니지만, 최소한 그에게 정상적인 분별력은 결여되어 있다라는 걸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출신지인 라만차라는 지역이 영웅적인 장소와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몽상가들이 사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라는 각주의 설명을 통해서도 또한 알 수 있듯이, 소설 곳곳에 돈키호테의 기이함에 대한 기본적 밑바탕을 깔아놓고 있는 겁니다. 일단! 그가 정상은 아니라는 거지요. 하지만!!!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산초 또한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돈키호테만의) 이름의, 본명이 알돈사 로렌소인 여인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녀의 실체에 대해 산초가 이야기 하자 돈키호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지요.

 

내가 둘시네아 델 토보소를 사랑하는 것은 지상의 가장 고귀한 공주로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네. 그래, 시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붙여서 찬양하는 여성들이 모두 실제로 있는 인물들은 아니지. …… 다들 시의 소재로 쓰기 위해 만들어 낸 인물들인 게야. 자기들을 사랑에 빠져 있거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지어낸 여인들이란 말일세. 그러하기에 나도 저 알돈사 로렌소라는 그 착한 여자가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면 되는 거라네. 가문 따위는 중요하지가 않아. …… 내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공주라고 간주하고 있으면 되는 게야. …… 이로써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말하는 것들이 모두 실제로 그러하다고 나는 상상한다는 것이네. …… 나는 아름다움에 있어서나 고귀하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 그녀를 상상해 본다네. (pp366-367)

 

1권의 딱! 절반쯤 되는 부분에서 작가는 이렇게 돈키호테의 정신 세계에 대한 정답을 알려줍니다. --- '내가 말하는 것들이 모두 실제로 그러하다고 나는 상상한다는 것이네'라는 이 한 마디의 표현으로 독자는 돈키호테가 결코!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거지요. 게다가 뒤이어 작가는 돈키호테의 방랑/모험을 '이미 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의 멸망해 가는 편력 기사도를 부활시키고 세상에 그것을 되돌려 주고자 하는 아주 존경할 만한 결심 (p431)'이라 표현하기도, 또한 '지금은 편력 기사가 유행하지 않으며 기사 소설들은 바보 짓거리에 거짓말뿐 (p500)'이라는 다른 등장인물의 말을 통해 돈키호테의 시대에는 정작 편력 기사가 거의 없었다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돈키호테라는 인물을 '이달고'(이상주의자)와 '라만차 출신'(몽상가)의 지극히도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거지요


이러한 외양와 내면의 아슬아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돈키호테의 기이한 언행들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이 골.때리는 인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매력들이 작품 곳곳에 놓여져 있기도 한데, 저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닥치는 온갖 고난들을 대하는 돈키호테의 자세, 이를 대변하는 다음의 말을 그 백미로 꼽지 않을 수 없었.더랬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이긴 합니다.) 


세월과 함께 잊히지 않는 기억은 없고,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 고통은 없다는 걸세.…… 운이라는 것은 불행 속에서도 빠져나갈 문을 항상 열어 놓지. 불행을 해결하라고 말일세.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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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그렇다면, 이 작품 속에서 그야말로 쏠쏠한( 그리고 어쩌면 '쓸쓸한')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산초 판사는 대체 어떤 인물인걸까요? 미친 건 아니지만, 미친 것처럼 보이는 주인인 돈키호테를 그는 대체 무슨 연유에서 끝까지 따라다녔던 걸까요?

 

'풍차를 향한 돈키호테의 무모한 질주'를 목격한 산초는 이내 자신의 주인이 최소한 정상은 아닌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착한 그러나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산초는 돈키호테가 약속한 백작 지위와 백작 영토인 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버리지는 않습니다. 떼를 지어 몰려오는 양떼를 향해 달려가는 주인 돈키호테, 끌려가는 죄인들을 보고 기어이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해 주지만 끝내 그들로부터 자신 또한 몰매를 맞게 되는 온갖 상황들을 겪어가며, 주인인 돈키호테에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넌지시 건네어 보기도 했고, 자신의 말이 단칼에 거절당하자 섬이고 작위고 뭐고 다 때려치고 혼자서라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적도 있었더랬습니다만! 그는 주인인 돈키호테를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의 곁에 남아 '내가 말하는 것들이 모두 실제로 그러하다고 나는 상상한다'라 말하는 주인, 그리하여 한 데서 밤을 보내야하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기사도 수련을 용이하게 해주는 고행의 기회'라며 그 상황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주인을, 또한 자신만이 그려내고 있으며 자신에게만 보이는 그러한 상상 속에서 현실적인 위험으로부터도 피하지 않으려는 주인을 위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주기도 합니다.

 

러나는 것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며, 위험이 희망을 앞지를 때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요. 지혜로운 자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삼갈 줄 알고, 하루에 모든 것을 모험하지 않습니다요. (p322)

작가 세르반테스는 이런 산초 판사라는 인물에 대해/인물을 위해 다음과 같은... 가슴 찡한 한 마디를 적고 있지요. : '산초는 비록 돈키호테가 약속한 섬 …… 이라는 물질에 관심이 많았지만, 진실로 돈키호테를 존경은 하고 있었다. (p382-383)'

 

 

【 읽는 줄거리가 아닌 이해하는 이야기 】

이 작품을 읽어가며, 어쩔 수 없이 작가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계속 떠올렸었더랬습니다. 자신을 황제라 믿고 있었던 주인공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었지요. 그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황제라 믿게되는 계기는 전적으로 아버지 때문이었었습니다. 시작은 '믿음'이었으되, 점차 그 '믿음'을 '진실'로 만들기 위한 온갖 '작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 '믿음과 작위들' 모두를 '진실'이라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황제였다라 생각하며, 그렇게 황제가 아닌 황제로서의 일생을 마치게 되지요.

이어지는 2권에서 돈키호테는 또 다시 편력 기사가 되어 방랑을 떠난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가 죽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고도 하구요. 그러하기에 「황제를 위하여」의 주인공의 최후와 돈키호테의 최후가 과연 어떠한 차이를 보일 것인지, 혹은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을지가 사뭇 궁금했기도, 어쩌면! 이 작품 「돈키호테」의 감상문을 써냄에 있어 아주 유용(?)한 비교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사실은 2권까지를 모두 읽고 하나의 감상문으로 써내려 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선뜻 용기가 생기질 않았기도,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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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작품의 기본 배경을 미리 정리해 놓는 것이 2권을 읽어가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이 때의 기본 배경이라는 건 물론 주연과 조연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라는 인물에 대한 (1권이니까) 1차적 이해가 되겠고, 두 번째로는 이 작품을 읽는 일종의 방법이랄까? 한계랄까? 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 선긋기를 스스로에게 해놓고 훗날 이 책을 읽게 될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를 - 2권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부족하기에 역사 소설 읽기를 꺼려해왔고, 지금도 쉽게 달려들지 못한다라 적기도 했었습니다만 외국의 역사에 관해서야 더더욱이 그러합니다. 이 작품 「돈키호테 1권」의 내용 중 가장 지루했던 부분은 '포로로 잡혀갔었던 대위의 이야기'였었는데 - 아마 제 이웃분께서 한 사람의 독백이 자그마치 8페이지나 이어진다라 하셨던 부분이 바로 여기였을 듯 - , 그 이유는 바로 제가 알지 못하는 전투와 장군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죠. 허나! 이는 거꾸로 --- 스페인 독자가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 등이 등장하는 임진왜란의 여러 전투들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소설의 한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보면, 그저 소위 말하는 '읽기 훈련'이라 생각하며 이 부분을 대충 넘겨도 전체적으로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별/거의/아무 지장은 없다고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해의 수준과 감동의 수준 사이의 격차는 생겨나겠지만, 그리하여 어쩌면 그런 이유가 유럽인들에게 이 소설 「돈키호테」가 저 같은 사람은 만들어낼 수 없는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만약 이 격차마저 줄여보겠다라 한다면 이 작품 「돈키호테」 읽어내기는 하 세월을 요하는 독서가 될 겁니다.)

 

이런 '감동의 차이'는 또한 언어적인 면에서도 나타납니다. 물론 이 책의 번역자인 안영옥 교수께서 정말로 꼼꼼하고 자세하게, 반드시 필요하기도 한 각주를 달아 놓아, '이 각주들 없이 「돈키호테」를 즐긴다라는 건 있을 수 없다!'란 확신을 가지게 될 정도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만!!! 예를 들어, '간장공장 공장장은 강공장장이고 …… 경찰청 창살 쇠창살' 등의 우리말 혹은 그 우리말이 어떤 의미/문맥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외국어로 옮길 수는 없겠듯, 끝끝내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는 작가의 언어적 유희들이 유럽인들과 제가 이 작품을 읽고 받게 되는 감동에 극복해낼 수 없는 '감동의 차이'를 낳게 된다라는 걸, 비록 아쉽긴 하나 미리! 마음 속에 새겨만 놓을 수 있다면!!!

 

이 작품 「돈키호테 1권」은 줄거리만을 빼놓은 요약본이 아닌, 반드시 원작 그대로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설이며 게다가!!! 놓치기엔 정말 아까운, (조금만 현대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연애 편지 - 요즘도 이런 거 쓰긴 하나요? --;; - 에 써도 될 듯 싶은) 주옥같은 몇몇 표현/철학들 또한, '읽(기만 하)는 육체적 행위'가 아닌, '이해하는 정신적 행위'로서의 독서가 선사해 주는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저에게 안겨주기도 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건 많은 경우 욕망에 지나지 않고, 욕망의 궁극적인 목적은 쾌락인데, 이 쾌락을 얻고 나면 사랑은 그치고 마는 법입니다. 또한 사랑으로 보였던 것도 뒤돌아 가기 마련이지요. 그런 사랑은 자연이 정해 놓은 한계를 넘어 더 나아갈 수가 없거든요. 진정한 사랑에는 그런 한계가 없지만요. (pp343-344)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내가 확신한다는 걸 네가 알고 있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야. 알아준 사랑은 결코 불행한 적이 없었어. (p159)


​………………………………………………

물론 「돈키호테」라는 이 소설을 언젠간 읽어보리라,란 마음은 가지고 있었었고, 그러하기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한 권 가지고(만) 있었습니다만, 그게 언제가 될 지는 정말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 정말 '행운'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이런 제안을 받았다라는 게 계기가 되어, 다른 때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두께의 책을 일단! 한 권은 다 읽어낼 수 있었었네요.

사실은 "『돈키호테』의 작품 세계와 보다 재미있게 읽는 법"에 대한 강연이라는 오늘의 행사에 참석히기 이전에, '가급적 이 작품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가져보고 싶다'라는 이유로 독서란 거에 뭔 데드라인 같은 게 있는 걸 참 싫어하면서도 이 날짜에 맞춰 다 읽어내고, 또 감상문까지 써내고 그 강의를 듣고 싶었었거늘, 겨우!!! 어쨌!든 둘 다 해내긴 했네요. 여기에 더해 --- '781'이라는 숫자로 끝이나는 페이지의 책을 한 번 읽고 나니, 앞으로... 어지간히 두꺼운 책을 봐도 미리 쫄지는 않겠구나,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얻게된 부수적 성과이기도 합니다... 만! 솔직히 말해

일단 '927'이라는 페이지 숫자를 가지고 있는 「돈키호테 2권」이 제 앞에 놓여 있으니, 이걸 '기대된다'라 해야할지, 아님 '걱정된다'라 해야할지... 는 잘 모르겠네요. --;;

※ 이 작품과 무언가 공통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作, 「롤리타

- 이문열 作, 「황제를 위하여

 

* 제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이다 보니, 써놓은 각주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네요. 각주가 보이는 글은 다음의 주소에 있습니다. : http://blog.naver.com/koolpark/220195288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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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몽타주 - 서울 1988년 여름,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류동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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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 책을 무어라 소개해야 할까요. 소설? 문학평론? 혹은 반성문? --- 저자 류동민은 경제학자입니다. 주류 경제학이 아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학에서 가르치며 '자신의 밥벌이를 하고 있는' 분이지요. 그런 저자가, 1988년이라는 특정 시간에 일어났었던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쓴, 아주 짧은, 소설 형식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1부, 그리고 그 1부를 바탕으로 하여 '재현의 재현'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그 '재현의 재현'에 관한 글인 2부로 구성되어 있는, 암튼! 난생 처음으로 만나본 독특한 구성의 책이지요. --- 처음으로 접해보는 그 독특함을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저만의 표현으로 '재현'해 내지 못하겠기에, 이 책의 감상문은 거의 대부분, 이 책에 등장하는 구절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해낼 수 밖엔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 책에 관한 설명마저도 이렇게 …….

 

우리가 꾸는 꿈은 현실을 직접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반영하지 않는다. …… 그렇지만 꿈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의 경험과 욕망을 재현하고 있다. 꿈이 재현이라면 꿈꾼 이가 꿈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재현의 재현, 즉 재현을 다시 한 번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 이 책은 1988년 서울에 관한 내 꿈(1부)와 그 꿈에 관한 꿈꾼 이, 즉 나 자신의 설명(2부)로 구성된다. …… 이 책은 비록 특정 시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우리가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 그 원리에 관해 생각해보려는 작은 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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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고만고만한 일들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일로 먹고살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지낸다. …… 그러나 그와 같이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사회적 관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은 우리의 행동을 규정짓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 함께 잡담하고 놀며 일하는, 심지어는 갈등하고 다투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것이 친구나 동료와의 우정이나 연대감, 연인이나 가족과의 애증 등의 물질적인 기초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삶의 유물론인 셈이다. (pp 85-86)

'고만고만한 일들의 반복'으로 이루져 있는 이 놈의 지긋지긋한 일상. --- 하지만! 이 일상은, '하나의 레고 조각을 통과하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길고 큰 조각이었던 간에' 라 표현되어지기도 하듯, 항상 모두 같은 형태의 조각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닙니다.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일로 먹고살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지낸다'고는 하지만, 나의 10대, 20대, 30대를 지나, 어느덧 중반을 넘어서버린 40대는 모두 다... 다른 모습의 그 '비슷함'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것이지요. 버스 안에서 오늘 아침엔 옆 학교의 어느 여학생을 보았느냐의 여부가 등교 후 가장 큰 관심사였던 10대 때엔 그 때만의 '비슷함'으로 인해 제 또래 모두의 관심을 받았었지만, 그 관심의 생명력이 결코! 그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되살아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에 대칭하여 40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만나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며 살게될 꺼라는 것 또한 이 이전의 시절 그 어느 때에도 예상되어진 적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또한 실제 저에게 일어났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요. 즉 저자가 말하고 있는 '삶의 유물론'의 물질적 기초란 건, 혹은 그 물질적 기초란 것에 대한 '예상'이라는 것마저도 '저'라는 일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항상 변화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건 굳이 '저'만의 상황은 아니겠지요. 미래의 삶이 모두 현재의 예상대로 흘러가주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더군다나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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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실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인식으로부터 영향받는 존재.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두 가지 영역은 이렇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① 인식론, 그것은 삶에서 겪는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하는가라는 문제이다. ② 존재론, 그것은 그저 사물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기억한 경험, 즉 인식이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p86)

'나의 과거'의 총합이 바로 지금 '현재의 나'와 '나의 현재'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 총합에 더해질 지금 '나의 현재'는 또한 새로운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어느덧 '나의 과거'가 되어, 미래 언젠가 있을 '나의 현재'를 만들어 주는 바탕이 되겠지요. 이건 별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받아들이기에 거부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헌데 말이죠!!!

'과거'라는 것은 그 특성상, 그것이 '현재'였었을 때의 모든 것 그대로 지금의 '현재'에 다시 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시 재현되는 그 '과거'의 현재 모습은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 모.두!!! 일정 부분 기억의 편집을 거쳐야지만 "타인에게, 심지어는 저 자신에게도 이야기 되어지기" 때문이지요. 내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만을 담아내는 편집,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잘라내는 편집이라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기억이 현재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있었던 일, 즉 사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생각했던 바, 즉 의식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과거의 의식을 재현하는 데는 이미 현재의 의식이 개입한다. (p148) …… 일종의 '아름다운 시절'의 이미지자기모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151) …… 과거를 아름다운 시절로 생각하는 태도와 을 이루는 것은 현재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는 태도이다. (p152)

 

40대 중반인 지금, 되돌아 바라보는 저의 20대와 30대는 분명! '아름다운 시절'이었었노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자의 표현대로 자기모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해도 그것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또한 그 짝을 이룬다는, 현재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는 태도 역시 부정할 수 없기도 하지요. (사실 저의 삶이란 것이 다가올 미래, 그것이 '현재'가 되어 있을 때 부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었음/이었었다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의... 그 '미래'가 '현재'가 되어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정작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정말!로 안타깝고 속상하고 결국엔... '과거의 총합으로서의 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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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려 내야 할 사람에 대한 현재의 평가가 그것을 돌이키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왜곡 · 편집하게 한다. 가령 유명한 학자가 된 사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억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남달리 뛰어났다"라는 식으로 편집되곤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학자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학자에 어울리는 특성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결과 자신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조각들을 사후적으로 주어진 논리에 꿰어맞추려 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성공한다. 왜나하면 그들의 기억 속에서 대상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면서 말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편집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pp163-164)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기억들... 이 사실 (현재의) 저 자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동적으로 편집당하는 존재'로서의 '내'가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던/없는 상황이니까요. (물론! 미래의 언젠간 또한 '기억'이 될 현재의, 타인이 보게 될 나의 모습들에는 적잖은 신경이 쓰여지긴 합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최소한 '나'에게 어느 정도 능동적인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나의 과거'에 대한 기억들 속에서마저도 '과거의 내 모습'은 수동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아쉽게도...

 

이 표현, '아쉽게도'란 말을 반드시 썼어야 할 만큼 --- 제가 '현재' 만.들.어.내고 있.는 '나의 과거' 속에서, '과거의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그에 반해 '과거의 나'를 편집하고 있는 '현재의 나'는 소름 돋을 만큼 능동적임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마치, 여러 남들의 논문을 적당히 짜집기(copy & paste)하여 '완전히 새로운' 나의 논문으로 탈바꿈시키는 비윤리적 행위와도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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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그럼에도 이 '짜집기'란 것이 만약!

 

그녀는 이미 내 곁에 없었다. 애초부터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다가 여러 우연이 겹쳐 잠깐 동안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제는 각자 속한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거는 대상으로서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서 붙잡을 수 없으나 머릿속에서는 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사람. 말하자면 그것은 부재함으로써만 존재하는 역설이었다. 그 역설의 한 측면인 부재에 초점을 맞추면 슬픔이었지만 다른 한 측면인 현존에 초점을 맞추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이를테면 이미 죽은 그 누군가가 아직 내 곁에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은 그 반대 상황, 그러니까 아직 죽지 않은 그 누군가가 마치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덜 서글픈 일이었으므로.  …… 신경성 위염처럼 간헐적으로 명치끝을 후벼 파는 그리움마저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몰랐다.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이자면, 실은 그리워하기 위해서, 즉 그리워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하여 사랑했다 아니 사랑했다고 믿었던 기억을 자꾸 만드는 것 같았다. (pp 63-64)

 

그저 이런 '초점 바꾸어보기' 정도라면... 어쩌면! 저 스스로 그 짜집기를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할지도,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평생 자위를 한다거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짜집기를 짜집기가 아닌 양 그렇게... 평생을 남들 앞에 서야하며, 심지언 자신 스스로에게조차도 그것은 '짜집기가 아니었다'란 세뇌를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라는 것에서부터 생겨나지요. (어느덧... 순전히 '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당신'을 포함한 모두가 이러하다라는 건 결코 아닙니다. --;;)

 

글쓴이의 첫 번째 독자는 바로 글쓴이 자신이라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글쓴이의 기억 자체가 스스로를 속이는 왜곡·편집도 발생한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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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용감(?)해지려 한들, 이제껏 살아 온 제 인생의, 그 어떤 왜곡도 없는 말 그대로의 미편집본을 이 공간에 써낼 수는 없을 겁니다. (심지어 어떤 미편집본은 아예 제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수없이 오랜 시간동안의 왜곡, 그리고 그러한 왜곡을 거쳐 편집된 채 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과거들을 어느새... 저 스스로조차도 그것이 '편집되지 않은 진실'이라 믿어 버리게 된 부분들도 분명 있을테니까요.) --- 바로 어제 저녁의 외식이었다 하더라도, 오늘 기록하고, 그렇게 기록하여 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건 오직 어제 저녁의 그 자리에서 찍었던 사진들만이 아닌겁니다. 어제 저녁 시간,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그 식탁을 찍었고, 오늘 아침 출근 전에 그 식탁을 차려주었던 내 아내와 대판 싸우고 나왔다 하더라고, 내가 올리는 사진들과 적어내는 이야기들 속의 그녀와 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어제 저녁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고, (적어도 '쇼윈도 부부'로 보이고자 하는 등의 어떤 저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런 편집본을 적어내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미안해~'란 문자를 보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으니까요.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시간차가 지극히 짧은 경우에도, 최소한 그 편집본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와중에는 저 스스로 저의 현재 감정을 왜곡하여 나타내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의 실천을 통해 사물과 사회관계의 존재 그 자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식은 우리가 겪은 일들을 마음속에서 재현하는 행위로부터 출발한다. CCTV로 녹화된 테이프를 재생함으로써 '그날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 확인에 기초하여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 다시 그에 기초하여 어떤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 인식과 존재는 이렇게 실천을 통해 비로소 연결된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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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소설을 읽고, '모든 소설은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새로이 해석될 수 있다'라는 작가 위화의 말처럼, 독자에 따라 다른 감상문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가려낼 수 없을만큼 비슷비슷한 감상문이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을겁니다. 이는... '고만고만한 일들의 반복'이자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일로 먹고살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지내는 우리 각자들의 모습들, 그러니까 '독자의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마저!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인데, 이러한 과거 기억에 대한 동일점으로의 수렴은 무려! 국경마저... 초월하기도 하나봅니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p167)

 

하지만!!! 최소한 이 책, 「기억의 몽타주」를 읽고 써낸 저의/누군가의 감상문과 비슷한 누군가의/저의 감상문은 아마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꺼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온 우리들이지만, 그 과거를 현재로 다시 끄집어 내는, 그 '재현'의 과정에 끼어져 있는 각자의 편집, 혹은 왜곡의 강도는 모두에게 있어 다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이 책을 읽어낸 것은...

저의 30대 초반,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저의 삶이 완전히 2등분 되어지도록 나누어진 그 때 이후 --- 저 스스로 만들어 내었던,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사실이라고까지 착각하게도 된 그 결정적 편집과 왜곡에 대해 처음!으로... 가슴 아픈 후회란 걸 해보게 해준 독서였었습니다. 이제껏 그 편집과 왜곡을 후회하게 될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던, 오히려 그 편집과 왜곡을 자랑으로 삼아 저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내왔던 저였.었.음.에도 말이죠. (다시 말해, 저의 과거에 대한 제 기억, 어쩌면 제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는 그 기억이란 것에 '편집과 왜곡'이 있다라는 사실을 최소한 저 스스로는 인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기억의 사진첩'을 갖게 된다.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사진첩을 열어보면서 회한에 젖을 수도, 아련한 행복감을 맛볼 수도 있으나, 때로는 사진첩을 열어보기를 거부하거나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끔찍할 정도로 나쁜 기억, 반대로 너무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되풀이될 수 없는 기억과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p178)

그나마 행복하노라... 라 느끼며 지내고 있을 때 읽었을 껄, 이런 내용인줄 알았더라면 요즘같은 때 절대 펼치지 않았을 텐데,란 속상함마저도 만들어 준 이 책, 특별하게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지 모를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어느덧 10년이 넘도록 써 온 이 블로그. 그리고 이 속에 담겨져 있는 많은 '재현의 재현'들. --- 여드름 투성이에 콧물까지 질질 흘리는 더벅머리를 한 범인의 모습을, 원빈의 얼굴로 그려낸 몽타주로는 결코! 범인을 잡을 수 없겠듯, 어쩌면 제 <기억의 몽타주>를 너무도 판이하게 그려내어 왔던, 차라리!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란 생각을 했었어야... 하지 않았나란 후회를 하게도 됩니다. 제가 그려왔던 제 <기억의 몽타주>란 것이 결국엔 이처럼 (몽타주란 걸 그려내기 시작했던 애초의 목적인 범인을 잡는 것에 실패하여) '고작!' 이란 단어와 어울리게 된다라는 걸 이제서야 이렇게... 초라하게 고백하고 있자니 말이죠. --;;

 

'재현'으로서의 글쓰기는 그 형식이 소설이건 무엇이건건에 경험이라는 일차적 실체와 그에 기초한 '이야기'라는 이차적 실체를 재료로 삼아 행해진다. 물론 이 글쓰기, 좀 더 일반적으로는 말하기의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강화 · 왜곡 · 편집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려는 욕망은 경험을 기억으로 가공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첫 단계에서는 결과물인 '이야기'를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같기 때문에, 즉 내가 나 자신에게 얘기하는 것이므로 말하는 이가 숨기고 있는 사실조차도 듣는 이가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의 결과물은 말하는 이(나)와 듣는 이(독자)가 다르기 때문에 말하는 이는 첫 번째 단계의 결과물을 그대로가 아니라 걸러서 전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듣는 이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별개의 문제이지만. (p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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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을 담아내어 보겠다란 생각은 이 감상문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제 머리속엔 아예 없었더랬습니다. 마치... 작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읽고 썼었던 저의 감상문과도 같이, 그저 나 스스로에게 전하는 이야기/반성문/위로... 그 무엇이 되었든, 이 글이 최소한 '타인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언 이 글을 읽는 타인들이 대체 이 글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하더라고 상관없다란 생각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써낸 저의/누군가의 감상문과 비슷한 누군가의/저의 감상문은 아.마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듯" 하다라고도 위에 써놓았듯, 이 책을 읽고난 후 쓰여질 '당신'의 감상문은 분명... 제가 쓴 이 글과는 또 다른 것들을 담고 있을꺼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후회'라는, 제 것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 않을까,란 사뭇 용감하기까지한(?) 짐작이 덧붙여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만 그런 건 아닐꺼야'란 위로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한 번 물어보고는 싶네요.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당신의 지난날들에 관한 <기억의 몽타주>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나요?

 
 

 

 

 

 

 

읽어 본 저자의 다른 책들 :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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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케어
구사카베 요 지음, 현정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한창 술마시며 다녔던 청춘 시절, 좀 취했다 싶으면 일부러 오바이트를 하고 다시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렇게 하면 술도 깨고, 술이 깨니 더 마실 수 있었고, 게다가... 엄청 시원!하기까지 했었거든요. 이 '시원함'에 대한 당시 저의 해석은 이러했었었으니 :  

 

"우리의 식도는 곱창같은 얇은 관일테고, 음식물이 원샷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면 안될테니 식도의 양 옆에는 돌기같은 것이 있겠지. 헌데 이 돌기들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음식물들만을 맞이하므로 항상 아래 방향을 향해 있을꺼야. 그런데 오바이트를 하면 일시적으로 이 돌기들이 역방향, 즉 목구멍쪽을 향하게 될 것이고, 돌기들이 이 상태로 여전히 되어 있는, 그러니까 오바이트를 하고 난 바로 직후에 들이키는 맥주 한 잔은 위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이 돌기들을 다시 제 방향으로 돌려주게 되므로, 이 때 '나'는 그 맥주로부터 보통 때완 비할 수 없는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

 

술 좋아하는, 한 치기어린 청춘에 의해 만들어진 가설(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었고, - 당시의 저는 이것을 사실로 확신하고 주변에 전파했었었다는... --;; - 이 가설로 인해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가 (아직까지는) 발생된 것도 아니기에,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지금도 딱히 큰 관심사는 아닙니다... 만!!! 만약 이런 류의 한 가설이 실.제.로. 의료 현장에서 '되돌이킬 수 없는 시술'의 형태로 시행된다면 과연 어떤 상황이 발생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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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우루시하라는 '이진자카 클리닉'이라는 노인 간호 병원의 원장입니다. 이곳은 치매나 노환으로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을 돌보아주며, 이들에게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이케어 서비스를 하고 있는 병원이지요. 노인들을 치료 · 관찰하면서 우루시하라는 노인 의료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노인들이 하고 있는 재활 운동이란 게 기껏해야 현상 유지 혹은 관절 구축의 예방 정도밖엔 효과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작 노인들은 이러한 재활 운동을 열심히 하면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된다거나 원래대로의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루시하라는 이 간극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언젠가 닥쳐올 현실에의 인식으로부터 노인들이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노인 의료'란 노인을 안심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라 믿고 있는 그에게 이것은 어떻게든 꼭 해결해야 할/해결해내고 싶은 문제였었었지요. 게다가!!!

 

데이케어의 직원들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간호하는 것은 여간한 육체적 중노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간호사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 좀 낫지만, 데이케어가 끝나고 노인들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이후는 온전히 가족들의 몫이 되는 거지요. 즉! 그 노인이 살아 있는 한, 가족들에게는 '가혹한 간호'라는 의무가 계속될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날마다 그 부담은 증가되기만 하며, 이러한 암울함으로 인해 결국 노인 학대라는 현상마저 빈번하게 생겨나게 되는겁니다. 노인들은 불편한 자신의 육신 뿐 아니라, 그러한 육신에 가해지는 학대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노인 학대의 진정한 공포란 무엇일까요. 유아 학대인 경우에는 피해자가 성장하면 자기 방위나 경우에 따라서는 복수도 가능합니다. 노인의 경우에는 입장이 역전될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약해지기만 할 뿐이라, 더 저항할 수 없게 되어서 계속해서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가 됩니다. 완전한 약자로서 죽을 때까지 괴롭힘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인 학대의 공포입니다.

 

(현직 의사이기도 한 작가가 쓴 이 소설에 의하면) 치매는 원인에 따라 '알츠하이머형 치매'와 '뇌혈관성 치매'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일본의 경우 '뇌혈관성 치매'가 대략 전체 치매 환자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 합니다. 이들 뇌혈관성 치매 환자들은 대부분 (정신은 멀쩡한 채) 사지의 일부가 마비되는 증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마비된 사지는 예를 들어 '갈고리 형태로 굳은 손이 옷을 갈아입힐 때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바지를 입을 때에 굳은 다리가 잘 들어가지 않아서 고생하는 사람'등과 같이, 환자 본인 뿐만 아니라 간호하는 사람에게도 커다란 불편함을 준다는 것이지요. 


자! 여기까지 읽어 본 여러분은 만약 당신이 이러한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라면, 혹은 내 가족이 이러한 환자라면, 이런 상황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킨다거나 혹은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해결 방안으로 과연 어떠한 상상을 어디까지 해볼 수 있으신가요? (물론 이 상상이 지향하여야 할 주목적은, 환자를 간호하는 데 들어가는 주위의 고통을 줄이려는 시도라는 부수적 목적과 더불어, 진정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걸 전제로 하여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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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용신(廢用身) :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의학 용어로, 뇌경색 등의 이유로 마비되어서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팔다리를 가리키는 말.

 

무거운 무언가를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옮기려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인은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가는 동선상에 걸림돌이 없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이를 (좀 심할 정도로까지) 일반화시켜보자면 '목적 달성에 있어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시킨다'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또한 이것을 '합리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주인공 우루시하라는 바로 이런 합리주의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데이케어의 환자 중 한 사람인 이와가미 씨는 몸무게가 9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입니다. 당연히 그를 간호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환자의 경우보다 더 힘들 수 밖에 없지요. 사지 중 오른쪽 팔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는 이러한 이유로 가족들로부터 신체적 학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 상황을 지켜 본, '합리주의자' 우루시하라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요.

 

자신이 신체를 고의로 상처 입히는 것은 자신보다 고위의 존재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사지 절단에는 그러한 본능적인 경외가 붙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심해서는 안 되는 일일까요? …… 새로운 한걸음에는 그 시대의 '경외'가 따라붙지만, 유효성이 인지되면 다음 시대에는 사라져 버리는 법입니다. …… 저는 '폐용신이 된 다리를 잃는다'라는 마음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습니다. …… 부모님에게 받은 것은 다리뿐만이 아닌데, 마비된 다리 때문에 다른 것이 소용없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모님에게 죄송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폐용신이 초래하는 고통은 마비로 움직이지 않는 것뿐 만이 아닙니다. 통증이나 증오나 미련 등, 정신적인 문제도 큽니다. 그것은 폐용신이 저주처럼 달라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쪽 손에는 무관심하고 마비된 팔에만 신경 쓰는 사람. 두 팔은 자유로운데 걷는 것만 집착하는 사람. 그런 노인을 보면 어떻게든 폐용신의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의 머리에 '절단'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 이 소설은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이 가설이 현실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절단'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amputation'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A 케어'라는, 즉 cure의 개념이 아닌 care의 개념으로 폐용신을 (불가피한 상황이 아님에도) 절단시켜버리는 것이지요. --- "불필요한 것을 배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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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 때, 이와가미 씨의 왼쪽 다리에 패혈증이 생겼고, 우루시하라는 그 왼쪽 다리를 절단합니다. 이 결정은 패혈증으로 잃게될 수도 있는 이와가미 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었지요. 헌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절단된 왼쪽 다리 덕분(?)에 이와가미 씨의 왼쪽 엉덩이에 있던 욕창이 사라졌는데, 붙어 있는 오른쪽 다리와 이어져 있는 오른쪽 엉덩이에는 여전히 욕창이 심하게 남아 있던 거지요.  

 

마비된 팔다리는 '절단'하면 이와가미 씨의 몸도 단숨이 가벼워진다!!! …… 90킬로그램의 몸무게지만 폐용신의 두 다리와 왼쪽 팔을 떼어 내면 50킬로그램 정도로 감량된다. …… 절단해서는 안 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폐용신의 절단'을 선택지에 넣자마자, 저의 눈앞에는 미지의 영역이 단숨에 펼쳐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좋은 치료법이 있는데 환자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해 그 치료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의사의 태만함이라 생각하고 있는 우루시하라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 - A 케어 - 을 이전에 언뜻 이와가미 씨에게 비추었었는데, 마침! 패혈증으로 인해 그의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자신을 괴롭히던 욕창이 사라진 것을 경험한 이와가미 씨가 우루시하라에게 찾아와 나머지 폐용신인 오른쪽 다리와 왼쪽 팔도 절단해달라 부탁한 것이지요.

 

'정말로 이것이 잘하는 일인가, 그 밖에 해결법은 없는가'라는 자문을 수술실에서까지 마지막으로 던져보며 결국 우루시하라는 이와가미 씨의 오른쪽 다리와 왼쪽 팔에 'A 케어'를 시행합니다. 이제 이 소설의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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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케어' 이후 이와가미 씨는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매우 활기찬 삶을 살아갑니다. 성격만 밝아진 것이 아니라  심지어! 절단되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는 양쪽 넓적다리를 이용해 스스로 이동할 수 있게도 되었지요. 이런 이와가미 씨를 본 다른 노인들은 처음엔 놀랐지만 점차 그들도 이 'A 케어'를 받고 싶어해 합니다. 결국 1년 간 13명의 환자가 (본인 또는 본인의 의식불명인 상황에서 가족의 동의를 받아) 'A 케어'를 받게 되지요. 헌데 말입니다!!!

 

우루시하라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A 케어'를 받은 환자들에게서 나타납니다. 'A 케어'를 받은 거의 모든 환자들이 케어 이후 이와가미 씨처럼 성격이 밝아졌고, 사지 중 남아 있는 부분을 이용해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운동능력들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 치매까지도 호전되는 경이적인 현상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 그 답의 힌트는 <오체미완성>의 저자, 오토사다 고헤이 씨에게 있었습니다. 

 

오토사다 씨는 팔다리가 없지만 머리와 몸통만은 보통 사람과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장도 보통 사이즈가 아닐까요? 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 오토사다 씨의 심장은 팔다리에 혈액을 보낼 필요가 없는 만큼, 여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힘을 뇌에 돌리면 어떻게 될까요. 오토사다 씨의 뇌는 우리들의 뇌보다 혈액을 공급받기 훨씬 쉬운 상황인 것입니다. 즉 뇌의 혈류량만을 놓고 보면, 오토사다 씨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지능지수와 뇌 혈류량의 관계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 혈액의 흐름이 나빠져서 치매가 걸린다면 혈류량이 늘어나면 치매도 개선되는 것은 아닐까요. 너무 단순한 발상이라고 웃지는 마세요. 사실 인간의 생리는 단순한 이론에 지배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A 케어' 뒤에는 정신적으로도 그때까지 폐용신에 집중되어 있던 의식이 마비되지 않은 팔다리로 향하게 되므로 기능성이 높아집니다.  …… 인간의 뇌에는 신체의 운동을 다스리는 부위인 운동령(運動領)이 정해져 있습니다. …… 운동령의 크기는 신체 부위에 비례하지 않고, 세밀한 움직임이 많은 손끝이나 입술 등이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두 팔이 없는 사람의 팔을 다스리는 운동령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부분은 생후에 서서히 위축되어 갑니다. 조종해야 할 팔이 없으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두개골 내부란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뇌는 그 안에서 필요한 부분을 증대시켜서 기능을 높입니다. 두 팔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다리를 사용하는 것에 집중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다리를 다스리는 운동령이 보통 사람보다 확대되겠지요. 두개골 내에는 위축되어서 생겨난 여분의 공간이 있으니까요. …… 이것이 선천적으로 두 팔이 없는 사람이 발로 바이올린을 켜거나 자수를 할 경우에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능숙하게 해내는 것에 대한 한 가지 설명입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읽고, 그 간략한 내용을 조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더랬습니다. --- "부인과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부인만 죽었어. 근데 부인의 정신은 살아서 딸의 육체 속으로 들어갔지. 딸은 육체만 살았고 정신이 없어진거고. 그렇게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부인과 살아가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한 남자. 그 둘이 겪게 되는 현실적, 정신적 고통을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이야."

 

피식~ 하고 웃더군요. 아마 저라도, 다른 이가 이런 내용의 소설을 읽었다라고 이렇게 말해준다면 '뭐 그런 짜장같은...'이라 말하며 피식~ 웃었을겁니다. 요약해 내면 이렇듯 이상한 소설이 되어버리지만, 실제! 읽어본 「비밀」은 애잔한 슬픔과 함께, 그 현실성마저 잊게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상상까지를 해보게 해주었었죠. --- 소설이란게...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거라 생각합니다. 현실성의 여부를 떠나 우리의 사고 지평을 넓혀준다라거나 혹은 이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었던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독자에게 알려준다라는 것.

 

이런 점에서만! 보았을 때, 이제까지 저의 독서 내력 한에서는 --- '나만 빼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눈이 멀게 된다면? (「눈먼 자들의 도시」)'이라든가, '만약 세상에 아무도 죽지 않게 된다면? (「죽음의 중지」)', 혹은 '나와 완벽히 똑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내 주변에 존재한다면? (「도플갱어」)' 등과 같은, 현실성의 여부를 개의치 않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의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들등을 써낸 작가 주제 사라마구와 '나는 과연 어디서부터 나일 수 있는가? (「변신」)'와 '나는 과연 누구인가? (「레몬」)'등과 같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 의문조차 가져보지 않았던 화두를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해 주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야 말로 단연코 독보적인 두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오로지 이 관점만으로 소설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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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정리 해고'라는 개념으로 'A 케어'를 고안해냈던 우루시하라의 논리에, 그 과정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거의 아무런 거부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노인 간호'라는 것이 아직은 저에게 현실로 닥쳐와있지 않기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을 현실로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라면 과연? 이라는 의문, 그리고 아마도! 라는 저 스스로만의 대답을 하게 되었을 만큼 말이죠.

 

내가 지금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유사한 문체로 쓰여여 있는, 우루시하라가 직접 쓴 원고인 1부에서는 이처럼 'A 케어'가 현실로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2부에서는 각종 언론들에 의해 과정되어 폭로되는 'A 케어'와 개인 우루시하라 씨의 과거사에 관한 내용들, 그리고 살인에 관한 매우 충격적인 묘사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만, 그것들보다!!!

 

'필요 없는 동물을 죽여도 괜찮다'라는 생각. …… 이것이 '필요 없는 인간은 죽여도 괜찮다'라는 식으로 발전하면 이른바 노숙자 살상이나 노인 학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비된 팔다리는 잘라낸다는 발상은, 이것에 가까운 뭔가를 느끼게 하는군요.

 

라는 한 사회심리학자의 말에, 그때까지 '거부감 없음'의 감정으로, 일견 'A 케어'에 동조하는 마음으로마저 읽어왔던 우루시하라의 논리는, 그리고 그 논리를 따라와있던 독자는 결정적 치명타를 받게 됩니다. 크게 보자면 결국 독자는... 무엇이 가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를 잠시나마 혼동하게 되는거지요. (이러한 혼동은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에도 일어나는데, 이 책이 앞뒤의 겉표지만 빼고는 마치 또 다른 한 권의 책인 듯 보여주는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거 이해해내는데 은근... 시간이 걸렸었다는... --;;)

 

소설의 감상에 대한 저의 취향은 이처럼 대체적으로 '소재의 신선함과 그로부터의 충격'을 주로 향해 있는데, 그런 이유 - 소재의 신선함 그리고 그로부터의 충격 - 로 인해, 이 작품 「A 케어」는 저로 하여금 「눈먼 자들의 도시」 이후 처음으로 두 개의 ★ 표시를 붙여놓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소설이기도 했었습니다.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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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의 해결해낼 수 없는 간극"

 
 

 

 

 

 

 

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주제를 이렇게 정리해내고 싶네요.


…………

 

입학식도 치르기 전, 제 손의 쥐어졌던 한 장의 연극 안내장! --- 뭔가 찌릿한 사진이었기에 책갈피로 쓰다가 결국! 이를 스캔까지 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현실과 이상 사이의 해결해낼 수 없는 간극'이라는 메세지를 이 사진, 그리고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 않을 수도 없을 때"란 문구가 더할 나위 없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는 게 참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편적인 노래'가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랑 노래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라 물으신다면 제 마음 속 그 이유를 정확히... 글이나 말로써 표현해 내지 못하겠는 것처럼 말이죠. --;;)

 

 

 

이 소설 속에는 불효의 자식과 아내도 등장합니다만, 또한 자신의 결혼까지 포기하고 치매의 어머니를 간호하며 사는 딸도 등장합니다. 어쩌!면 노인 간호라는 현실적 고통과 그 노인이 바로 나를 낳아준 '나의 부모'라는 윤리 사이의 갈등이, 또한 '합리성의 추구'와 '의료 윤리' 사이에서 빚어지는 한 의사의 갈등이 바로... 이 사진 속 어머니가 저 순간 느끼고 있는 그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이 아닐까 싶었었고, 이 간극은 사회적 문제이기에 앞서 언젠가 '나'에게도 생겨날 수 있는 그런... '발생가능한 현실'이었었기에 더더욱...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 제 마음 속에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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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부모가 치매에 걸렸다면, 또는 내가 치매 환자가 된다면! 등과 같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그 '현실성의 여부를 떠나!!!' 나에게 닥쳐 온다면 그때의 나는 여전히... 우루시하라의 'A 케어'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인가. --- 뭐... '사서 고생한다'란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이러한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여전히! '사서 고생하는 소설 읽기'의 진정한 유익함이 아닐까도 싶네요.

 

암튼!!! 이 소설... 이런 걸 떠나서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을 만큼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무지하게 두껍고, 게다가 두 권짜리이기까지 한) 이 작가의 다른 소설 「신의 손」도 상당히 끌리는군요. 그 작품에선 '안락사'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데 과연 또 어떤 충격을 건네어 줄지... 사뭇 궁금궁금합니다.         

 

 

 

※ '치매'를 이야기하고 있는 읽어본 작품 :

- 오기와라 히로시 作, 「내일의 기억」 : 환자 본인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치매'


※ 본문에 등장하는 소설들의 감상문 :

- 주제 사라마구 作, 「눈먼 자들의 도시」 · 「도플갱어」 · 「죽음의 중지」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비밀」 · 「레몬」 · 「변신

-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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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김훈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4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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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년(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 네이버 캐스트, <인물 한국사 : 이순신>  중 발췌

 

'영웅'이라는 단어조차 모자란 듯, '성웅'이라 불리우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우리는 정작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 중학교 1학년 즈음, 「난중일기」를 읽었었더랬습니다만, 무지하게 재미없었었다란 기억 외에, 그 내용에 관하여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셨었다는, 죽는 순간에까지도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라 명령하셨다라는 위대한 장군... 이 제가 (어쩌면 당신도?) 가지고 있는 그 분에 대한 모든 것일 뿐이지요. 종원군이 두 번이나 보았던, 하지만 아빠는 못봤으니 아빠랑 또 같이 볼꺼라 했었던 영화 <명량>마저도 그다지 끌려해하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건 그저 위의 밑줄 그어놓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라 생각해왔었거늘... 나이 마흔 여섯에야 기어이 이순신 장군의 참 모습을, 저의 머릿 속에 남겨져 있는 것들이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라는 깨달음을 이렇게...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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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이순신은 그의 나이 마흔 다섯에 종육품인 정읍 현감에 임명되었고, 그 8개월 후 종삼품인 병마첨절제사로의 파격적 승진을 명받는 것 이후, 2년간 무려 세 번의 인사발령과 취소를 겪게 되었는데, 작가는 이를 '조정 대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당쟁의 여파였던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을 통해 작가가 비판했었던 권력층 내부의 알력과 대립은 이 때부터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이러한 권력의 갈등이 그저 한 무관의 승진에만 관계된 것이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차라리 그나마 평온했었을 겁니다. --- 1590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통신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지요. 통신사의 No.1 이었던 황윤길은 일본이 곧 쳐들어올 것 같으니 대비가 필요하다라 임금에게 보고했으나, No.2 김성일은 그럴 위험은 없다라는 상반된 보고를 올렸던 겁니다. 결국 조정은 No.2 김성일의 의견을 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김성일이 동인이었고, 황윤길은 서인이었다라는 것 때문!  

 

이렇듯 임진왜란이 비록, 명나라 침략을 위해 그 걸림돌이었던 조선을 먼저 치워버리고자 했던 일본에 의해 일어난 전쟁임에는 틀림없으나, 눈 앞의 권력만을 놓고 다툼을 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그 전란의 시작이 초래되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어쨌!든... 똥 싸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은 또 반드시 따로 있어야만 했던 것이 바로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던 '명분'이었으니... --- 전라좌수사의 직책으로 임진년(1592년)에 시작된 일본과의 전투에 임했던 이순신은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었던 옥포만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의 전과를 쌓아갔습니다만, 수색섬멸에서 유인섬멸로 작전을 바꾼 것이 결국 그에게 화(禍)가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군공(軍功)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적장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라는 죄목으로 이순신은 결국 체포되고 말지요. 그 당시 이순신의 심정을 작가는 이렇게 적어내고 있습니다. ---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죽음은 절벽처럼 확실했다"   

 

조정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 걸린 정치적 상징성을 목말라했다. ……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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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는 이순신으로부터 한산 통제영을 인수받은 원균은 곧이어 벌어진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 수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내가 원균에게 인계한 병력과 장비는 한산 통제영에서 삼 년 반 동안 확보한 군비의 전체였으며, 조선 수군 총 군비의 팔할이 넘는 것이었다. 그 팔할이 칠천량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 하룻밤 하룻낮의 전투였다.

이에 다급해진 조정은 이순신을 기소했던 권율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묻지요. "자네 무슨 방책이 없겠나?"

 

그때 나는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 권율이 돌아간 뒤, 나는 칼을 갈았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임금은 자신 스스로 '털끝만치도 용서해줄 수 없다'라 말했던 이순신을 다시 충청,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백이십 명이었고 내 전선은 열두 척이었다. …… 그것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고 다만 사실일 뿐이었다. 다른 아무것도 없었고 그 밖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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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대답으로 임금의 명을 받아든 이순신을, 비록 명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었으나 다분히 버선발 붙잡고 매달리는 심정이었을 임금은 그럼에도... 그를 완전하게 믿지는 못했더랬습니다. 탈영 장군 배설을 찾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순신이 머물고 있던 영내를 며칠 간 샅샅이 뒤져, 혹시 역모의 기운이 있지는 않는가를 확인하기도 했었었지요.

 

"나는 겨우 알았다. 임금은 수군통제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명량 싸움의 결과가 임금은 두려운 것이다. 수영 안에 혹시라도 배설을 감추어놓고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작가 김훈은 이후,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라는 앞서의 서술에 걸맞게, 철저하게 '군인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임진년에 나는 농사를 짓듯이, 고기를 잡듯이, 적을 죽였다. …… 임진년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敵意)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 나는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영화로 새삼 유명해진 명량해전에 임하는 이순신의 "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살 길이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너희는 마땅히 알라"라는 명령은 이처럼 '적의 적으로 죽어지는 자연사'를 원했던 그의 마음 뿐만이 아니라, 변변한 지원조차 받지 못했던 당시의 어쩔 수 없었던 현실로부터도 나온 것이었다라 작가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적이 울돌목의 사지로 들어와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전선 열두 척으로 적을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전략이었다. 전략이라기보다는 그 이외에는 아무런 방책이 없었다. ……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전선의 장수와 병사들은 이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고 있거늘, 뭐 하나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던 임금은 내내 이러한 이순신을 다구치기만 합니다. --- '남쪽 바다의 장수는 무얼 하고 있느냐. 너는 수군을 이끌고 물길로 나아가 적의 중원 병력을 바다에서 부수어라. …… 즉시 경상 해안 쪽의 적을 없애라.', '너는 빼앗은 왜적의 조총을 많이 쌓아두고 있다 하니 그중 성한 것을 골라서 서울로 보내라.', '종이가 모자라 문서와 전적을 가지런히 하지 못한다. …… 너희들의 남쪽 바닷가에는 종이를 만들 만한 상서로운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하더구나. 너는 속히 종이를 장만해서 조정으로 보내라.'  --- "임금은 멀리서 보채었고, 그 보챔으로써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바로 전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 「남한산성」에 등장하는 '권력'과, 이 작품 「칼의 노래」에 등장하고 있는 '권력'은 이처럼 소름끼치도록 똑같습니다. 백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어가고,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적의 말똥에 섞여나온 곡식 낟알을 꼬챙이로 찍어 먹'고 있었음에도, 오로지 '사직은 종묘 제단 위에 있었고 조정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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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도와준다는 명목하에 출동한 명의 군대는 사실상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않은 채, 내내 후방에만 머물고 있었는데, 이러던 중 명과 일본이 비밀리에 강화협상을 통해 조선을 둘로 나누어 분할통치를 하기로 하고, 이 전쟁을 끝내려 한다는 소문이 이순신의 귀에 들려옵니다.   

 

나는 강화 협상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골로 뒤덮인 강토에 쑥부쟁이가 우거졌고, 도성은 잿더미가 되었다. 적이 나의 강토와 연안을 내습했으므로, 적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온 국토를 갈아엎고 돌아가는 적을 온전히 살려서 돌려 보낼 것인지, 종자를 박멸해서 시체로 바다를 덮을 것인지는 적이 아니라 나와 내 함대가 결정할 일이었다. 적은 귀로의 바다 위에서 죽음을 통과해야만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고, 그 바다에서 적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또 한번 뒤엉킬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토록 단순하고 자명한 일이 단순하지도 자명하지도 않았다. …… 명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해서 강화한다면 나는 고려 때의 삼별초들처럼 함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때는 명과 일본이, 그리고 조정 전체가 나의 군사적인 적이 될 것이었다.

 

이 부분이 이순신이 진정한 군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구절이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혹자는 이 부분 마지막과 "나는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라는 그의 말을 들어, 이순신이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거야말로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개인의 총기 소지에 보다 더 강력한 규제가 가해져야 한다!'라 외치는 격이겠지요. (만약 이 소설 '전부'를 읽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다면, 그 돈으로 앞으로는 책 사지 말고 걍 술 사 드시길 권해드립니다.) 

 

이 와중에 명의 대장 진린은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곧 물러갈 것이니 괜한 전투 벌이지 말고 군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라는 내용의, 권고의 형식이었으나 기실 명령과 다름없는 편지 한 통 불쑥 보내옵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명군 지휘부가 조선 조정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조선의 수군에게 군대 해산과 적대행위 종료를 명령하고 있다라는 점에 격분한 이순신은 이 사실을 곧 조정에 알립니다만 이내 그의 머리 속엔... '다시 서울 의금부에 끌려가 베어지는 내 머리의 환영이 떠'오르게 되지요. 임금도 그를 믿지 못했었지만, 이순신 역시 임금을 위시한 '권력'을 믿지 못했던 겁니다. --- '나는 임금의 칼에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자연사로서 적의 칼에 죽기를 원했다.' 

 

이순신의 편지에 대한, 그러한 명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임금의 답장은... 명의 수군을 설득해 그곳으로 보낼테니, 부족함이 없이 잘 맞이해주라는 내용만을 담고 있었습니다. 미쳐 돌아버리는 거지요. 

 

진린은 적과 알맞은 거리에 떨어져서 전쟁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부스러기들을 이득으로 챙겨서 돌아갈 것이었다. 임금은 이 진린을 나에게 보내왔다. ……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는, 이 세상의 손댈 수 없는 무내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숨죽여 울었다. …… 내 마음속에서 내 칼이 징징징 울면서 춤을 추었다.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붉게 물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 술 취한 칼은 마구 울었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진린은 도착한 후 술판만 벌이며 딱히 전투에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진린과 일본은 몰래 내통하여 적당한 거래를 성사시켰고, 이내 일본군은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광양만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여기는 내가 죽을 자리는 아니었다. 나는 적의 전체를 내 전방에 두어야 했다. 나는 노량바다로 가기로 했다. …… 적보다 먼저 노량으로 들어가서, 적 퇴로의 진행방향 앞에 나는 포진해야 했다. …… 그날 밤, 함대는 광양만을 떠났다. …… 격군장들은 북을 울리지 않았다. 함대는 고요히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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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토를 더럽히고 우리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적들과의 전투조차 당시의 조선 수군은, 조정의 지원도 못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렇듯 눈치를 보며 수행해야 했었던 겁니다. ① 만약! 이순신이 상황을 그렇게 만든 조정이 하라는 대로 했더라면! 노량해전이라는 전투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겠지요. ② 만약! 이순신이 자신의 조국 조선을 조금만 덜! 사랑했었더라면, 그는 명의 장수 진린의 권유대로 명나라로 가 훨씬 더 좋은 대접을 받으며 어쩌면 군인으로서 더 큰 뜻을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순신에게는, 자신의 조국과 백성들을 사랑하는 이순신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었던거였지요.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전란의 와중에도 그 전선의 최전방에 서 있는 자신을 믿지 않는, 자신도 또한 믿을 수 없는 임금, 그리고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백성들... 사이에서 어쩌면! 이순신 장군은 지독히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아들 면이 일본군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가 가마니 위에 엎드려 숨죽여 울어야만 했던 것으로 대변되는 그런... 외로움 말이죠.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라는 작가의 한 마디는, 저같은 일개 독자에게 따로이 저만의 생각을 만들어낼 필요를 생겨나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작가 이문열의 작품에 대한 감상문에서와는 이렇듯 또 다른 의미로, 이 작품의 감상문을 써냄에 있어, 유난히도 많이 작품 속 작가의 구절들을 인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라는 이 한 마디를 감히 이겨낼 생각조차 할 수/할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 하지만...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지금, '무력한 권력은 그 무력함만으로도 사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란 말 또한 성립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물론! 이 때의 '무력함'이란 내부를 겨눈 힘의 무력함이 아닌, 내부를 지켜내기 위해 외부를 향해 있는 힘의 무력함이지요. 권력, 그 실체로서의 '국가'의 가장 기본적 존재 이유는 바로 내부를 지켜내기 위해 외부를 향한 힘일진데, 그것을 결여하고 있는 권력은 응당 자신의 본분을 이행치 못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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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장선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빌었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후대의 우리들이 그에게 '영웅'도 아닌, '성웅'이라는 호칭을 붙여준들,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란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2014년의 우리가 '성웅'이라 부르고 있는, 1598년 전사한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 1년 전, 천하의 역적으로 잡혔었듯이, 2400년대 우리의 후손들이 또한 '성웅'이라 부를게 될 누군가를 2014년의 우리는 '역적'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라 작가가 이름 붙여 놓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와 있는, 노량해전에 임하는 이순신의 위 다짐이, 나라를 위한 한 신하의 이 '사랑'이 당시의 조선 뿐 아니라, 2014년의 대한민국에도 여젼히 '들리지 않는' 건 아닌지...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난데없는!!!'이라 말할지도 모를, 그런 생각을 해보게도 되네요.

 

「남한산성」에서와 같이, 예의 작가는 이 책의 말머리에에도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라 적어놓았습니다만, 세세한 내용이 아닌, 군인 이순신의 모습을 알게됨에는 과함도, 부족함도 없는 완벽한 작품이었다 생각합니다. 비록 독서란 걸 취미로 삼은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이후 새롭게 알게 된 많은 작가들보다 더 늦게... 작가 김훈을 알게 되었다라는 게 은근 후회되기도, 그러다... 이런 후회를 저에게 느끼게 만들어 줄 작가들은 여전히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라는 생각에... 어여어여 더 열심히 책!책!책!을 읽읍시다 하고 싶습니다만, 그게 참... --;;  

 

 

 

※ 읽어본 김훈 작가의 다른 책 : 남한산성

 

 (시각의 넓고 좁음을 떠나 보았을 때) '권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읽어본 책들 

- 율리 체 作, ​어떤 소송

- 백승종 著,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 쑤퉁 作, 「나, 제왕의 생애

- 류전윈 作,닭털같은 나날

- 박민규 作, 「지구영웅전설

- 알베르 카뮈 作,이방인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주제 사라마구 作,눈먼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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