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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몽타주 - 서울 1988년 여름,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류동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6월
평점 :
글쎄... 이 책을 무어라 소개해야 할까요. 소설? 문학평론? 혹은 반성문? --- 저자 류동민은 경제학자입니다. 주류 경제학이 아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학에서 가르치며 '자신의 밥벌이를 하고 있는' 분이지요. 그런 저자가, 1988년이라는 특정 시간에 일어났었던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쓴, 아주 짧은, 소설 형식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1부, 그리고 그 1부를 바탕으로 하여 '재현의 재현'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그 '재현의 재현'에 관한 글인 2부로 구성되어 있는, 암튼! 난생 처음으로 만나본 독특한 구성의 책이지요. --- 처음으로 접해보는 그 독특함을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저만의 표현으로 '재현'해 내지 못하겠기에, 이 책의 감상문은 거의 대부분, 이 책에 등장하는 구절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해낼 수 밖엔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 책에 관한 설명마저도 이렇게 …….
우리가 꾸는 꿈은 현실을 직접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반영하지 않는다. …… 그렇지만 꿈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의 경험과 욕망을 재현하고 있다. 꿈이 재현이라면 꿈꾼 이가 꿈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재현의 재현, 즉 재현을 다시 한 번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 이 책은 1988년 서울에 관한 내 꿈(1부)와 그 꿈에 관한 꿈꾼 이, 즉 나 자신의 설명(2부)로 구성된다. …… 이 책은 비록 특정 시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우리가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 그 원리에 관해 생각해보려는 작은 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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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고만고만한 일들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일로 먹고살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지낸다. …… 그러나 그와 같이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사회적 관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은 우리의 행동을 규정짓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 함께 잡담하고 놀며 일하는, 심지어는 갈등하고 다투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것이 친구나 동료와의 우정이나 연대감, 연인이나 가족과의 애증 등의 물질적인 기초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삶의 유물론인 셈이다. (pp 85-86)
'고만고만한 일들의 반복'으로 이루져 있는 이 놈의 지긋지긋한 일상. --- 하지만! 이 일상은, '하나의 레고 조각을 통과하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길고 큰 조각이었던 간에' 라 표현되어지기도 하듯, 항상 모두 같은 형태의 조각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닙니다.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일로 먹고살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지낸다'고는 하지만, 나의 10대, 20대, 30대를 지나, 어느덧 중반을 넘어서버린 40대는 모두 다... 다른 모습의 그 '비슷함'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것이지요. 버스 안에서 오늘 아침엔 옆 학교의 어느 여학생을 보았느냐의 여부가 등교 후 가장 큰 관심사였던 10대 때엔 그 때만의 '비슷함'으로 인해 제 또래 모두의 관심을 받았었지만, 그 관심의 생명력이 결코! 그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되살아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에 대칭하여 40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만나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며 살게될 꺼라는 것 또한 이 이전의 시절 그 어느 때에도 예상되어진 적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또한 실제 저에게 일어났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요. 즉 저자가 말하고 있는 '삶의 유물론'의 물질적 기초란 건, 혹은 그 물질적 기초란 것에 대한 '예상'이라는 것마저도 '저'라는 일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항상 변화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건 굳이 '저'만의 상황은 아니겠지요. 미래의 삶이 모두 현재의 예상대로 흘러가주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더군다나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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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실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인식으로부터 영향받는 존재.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두 가지 영역은 이렇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① 인식론, 그것은 삶에서 겪는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하는가라는 문제이다. ② 존재론, 그것은 그저 사물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기억한 경험, 즉 인식이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p86)
'나의 과거'의 총합이 바로 지금 '현재의 나'와 '나의 현재'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 총합에 더해질 지금 '나의 현재'는 또한 새로운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어느덧 '나의 과거'가 되어, 미래 언젠가 있을 '나의 현재'를 만들어 주는 바탕이 되겠지요. 이건 별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받아들이기에 거부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헌데 말이죠!!!
'과거'라는 것은 그 특성상, 그것이 '현재'였었을 때의 모든 것 그대로 지금의 '현재'에 다시 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시 재현되는 그 '과거'의 현재 모습은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 모.두!!! 일정 부분 기억의 편집을 거쳐야지만 "타인에게, 심지어는 저 자신에게도 이야기 되어지기" 때문이지요. 내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만을 담아내는 편집,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잘라내는 편집이라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기억이 현재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있었던 일, 즉 사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생각했던 바, 즉 의식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과거의 의식을 재현하는 데는 이미 현재의 의식이 개입한다. (p148) …… 일종의 '아름다운 시절'의 이미지는 자기모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151) …… 과거를 아름다운 시절로 생각하는 태도와 짝을 이루는 것은 현재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는 태도이다. (p152)
40대 중반인 지금, 되돌아 바라보는 저의 20대와 30대는 분명! '아름다운 시절'이었었노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자의 표현대로 자기모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해도 그것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또한 그 짝을 이룬다는, 현재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는 태도 역시 부정할 수 없기도 하지요. (사실 저의 삶이란 것이 다가올 미래, 그것이 '현재'가 되어 있을 때 부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었음/이었었다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의... 그 '미래'가 '현재'가 되어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정작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정말!로 안타깝고 속상하고 결국엔... '과거의 총합으로서의 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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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려 내야 할 사람에 대한 현재의 평가가 그것을 돌이키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왜곡 · 편집하게 한다. 가령 유명한 학자가 된 사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억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남달리 뛰어났다"라는 식으로 편집되곤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학자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학자에 어울리는 특성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결과 자신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조각들을 사후적으로 주어진 논리에 꿰어맞추려 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성공한다. 왜나하면 그들의 기억 속에서 대상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면서 말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편집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pp163-164)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기억들... 이 사실 (현재의) 저 자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동적으로 편집당하는 존재'로서의 '내'가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던/없는 상황이니까요. (물론! 미래의 언젠간 또한 '기억'이 될 현재의, 타인이 보게 될 나의 모습들에는 적잖은 신경이 쓰여지긴 합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최소한 '나'에게 어느 정도 능동적인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나의 과거'에 대한 기억들 속에서마저도 '과거의 내 모습'은 수동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아쉽게도...
이 표현, '아쉽게도'란 말을 반드시 썼어야 할 만큼 --- 제가 '현재' 만.들.어.내고 있.는 '나의 과거' 속에서, '과거의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그에 반해 '과거의 나'를 편집하고 있는 '현재의 나'는 소름 돋을 만큼 능동적임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마치, 여러 남들의 논문을 적당히 짜집기(copy & paste)하여 '완전히 새로운' 나의 논문으로 탈바꿈시키는 비윤리적 행위와도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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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그럼에도 이 '짜집기'란 것이 만약!
그녀는 이미 내 곁에 없었다. 애초부터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다가 여러 우연이 겹쳐 잠깐 동안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제는 각자 속한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거는 대상으로서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서 붙잡을 수 없으나 머릿속에서는 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사람. 말하자면 그것은 부재함으로써만 존재하는 역설이었다. 그 역설의 한 측면인 부재에 초점을 맞추면 슬픔이었지만 다른 한 측면인 현존에 초점을 맞추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이를테면 이미 죽은 그 누군가가 아직 내 곁에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은 그 반대 상황, 그러니까 아직 죽지 않은 그 누군가가 마치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덜 서글픈 일이었으므로. …… 신경성 위염처럼 간헐적으로 명치끝을 후벼 파는 그리움마저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몰랐다.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이자면, 실은 그리워하기 위해서, 즉 그리워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하여 사랑했다 아니 사랑했다고 믿었던 기억을 자꾸 만드는 것 같았다. (pp 63-64)
그저 이런 '초점 바꾸어보기' 정도라면... 어쩌면! 저 스스로 그 짜집기를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할지도,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평생 자위를 한다거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짜집기를 짜집기가 아닌 양 그렇게... 평생을 남들 앞에 서야하며, 심지언 자신 스스로에게조차도 그것은 '짜집기가 아니었다'란 세뇌를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라는 것에서부터 생겨나지요. (어느덧... 순전히 '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당신'을 포함한 모두가 이러하다라는 건 결코 아닙니다. --;;)
글쓴이의 첫 번째 독자는 바로 글쓴이 자신이라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글쓴이의 기억 자체가 스스로를 속이는 왜곡·편집도 발생한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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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용감(?)해지려 한들, 이제껏 살아 온 제 인생의, 그 어떤 왜곡도 없는 말 그대로의 미편집본을 이 공간에 써낼 수는 없을 겁니다. (심지어 어떤 미편집본은 아예 제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수없이 오랜 시간동안의 왜곡, 그리고 그러한 왜곡을 거쳐 편집된 채 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과거들을 어느새... 저 스스로조차도 그것이 '편집되지 않은 진실'이라 믿어 버리게 된 부분들도 분명 있을테니까요.) --- 바로 어제 저녁의 외식이었다 하더라도, 오늘 기록하고, 그렇게 기록하여 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건 오직 어제 저녁의 그 자리에서 찍었던 사진들만이 아닌겁니다. 어제 저녁 시간,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그 식탁을 찍었고, 오늘 아침 출근 전에 그 식탁을 차려주었던 내 아내와 대판 싸우고 나왔다 하더라고, 내가 올리는 사진들과 적어내는 이야기들 속의 그녀와 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어제 저녁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고, (적어도 '쇼윈도 부부'로 보이고자 하는 등의 어떤 저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런 편집본을 적어내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미안해~'란 문자를 보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으니까요.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시간차가 지극히 짧은 경우에도, 최소한 그 편집본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와중에는 저 스스로 저의 현재 감정을 왜곡하여 나타내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의 실천을 통해 사물과 사회관계의 존재 그 자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식은 우리가 겪은 일들을 마음속에서 재현하는 행위로부터 출발한다. CCTV로 녹화된 테이프를 재생함으로써 '그날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 확인에 기초하여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 다시 그에 기초하여 어떤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 인식과 존재는 이렇게 실천을 통해 비로소 연결된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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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소설을 읽고, '모든 소설은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새로이 해석될 수 있다'라는 작가 위화의 말처럼, 독자에 따라 다른 감상문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가려낼 수 없을만큼 비슷비슷한 감상문이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을겁니다. 이는... '고만고만한 일들의 반복'이자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일로 먹고살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지내는 우리 각자들의 모습들, 그러니까 '독자의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마저!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인데, 이러한 과거 기억에 대한 동일점으로의 수렴은 무려! 국경마저... 초월하기도 하나봅니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p167)
하지만!!! 최소한 이 책, 「기억의 몽타주」를 읽고 써낸 저의/누군가의 감상문과 비슷한 누군가의/저의 감상문은 아마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꺼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온 우리들이지만, 그 과거를 현재로 다시 끄집어 내는, 그 '재현'의 과정에 끼어져 있는 각자의 편집, 혹은 왜곡의 강도는 모두에게 있어 다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이 책을 읽어낸 것은...
저의 30대 초반,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저의 삶이 완전히 2등분 되어지도록 나누어진 그 때 이후 --- 저 스스로 만들어 내었던,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사실이라고까지 착각하게도 된 그 결정적 편집과 왜곡에 대해 처음!으로... 가슴 아픈 후회란 걸 해보게 해준 독서였었습니다. 이제껏 그 편집과 왜곡을 후회하게 될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던, 오히려 그 편집과 왜곡을 자랑으로 삼아 저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내왔던 저였.었.음.에도 말이죠. (다시 말해, 저의 과거에 대한 제 기억, 어쩌면 제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는 그 기억이란 것에 '편집과 왜곡'이 있다라는 사실을 최소한 저 스스로는 인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기억의 사진첩'을 갖게 된다.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사진첩을 열어보면서 회한에 젖을 수도, 아련한 행복감을 맛볼 수도 있으나, 때로는 사진첩을 열어보기를 거부하거나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끔찍할 정도로 나쁜 기억, 반대로 너무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되풀이될 수 없는 기억과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p178)
그나마 행복하노라... 라 느끼며 지내고 있을 때 읽었을 껄, 이런 내용인줄 알았더라면 요즘같은 때 절대 펼치지 않았을 텐데,란 속상함마저도 만들어 준 이 책, 특별하게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지 모를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어느덧 10년이 넘도록 써 온 이 블로그. 그리고 이 속에 담겨져 있는 많은 '재현의 재현'들. --- 여드름 투성이에 콧물까지 질질 흘리는 더벅머리를 한 범인의 모습을, 원빈의 얼굴로 그려낸 몽타주로는 결코! 범인을 잡을 수 없겠듯, 어쩌면 제 <기억의 몽타주>를 너무도 판이하게 그려내어 왔던, 차라리!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란 생각을 했었어야... 하지 않았나란 후회를 하게도 됩니다. 제가 그려왔던 제 <기억의 몽타주>란 것이 결국엔 이처럼 (몽타주란 걸 그려내기 시작했던 애초의 목적인 범인을 잡는 것에 실패하여) '고작!' 이란 단어와 어울리게 된다라는 걸 이제서야 이렇게... 초라하게 고백하고 있자니 말이죠. --;;
'재현'으로서의 글쓰기는 그 형식이 소설이건 무엇이건건에 경험이라는 일차적 실체와 그에 기초한 '이야기'라는 이차적 실체를 재료로 삼아 행해진다. 물론 이 글쓰기, 좀 더 일반적으로는 말하기의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강화 · 왜곡 · 편집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려는 욕망은 경험을 기억으로 가공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첫 단계에서는 결과물인 '이야기'를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같기 때문에, 즉 내가 나 자신에게 얘기하는 것이므로 말하는 이가 숨기고 있는 사실조차도 듣는 이가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의 결과물은 말하는 이(나)와 듣는 이(독자)가 다르기 때문에 말하는 이는 첫 번째 단계의 결과물을 그대로가 아니라 걸러서 전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듣는 이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p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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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을 담아내어 보겠다란 생각은 이 감상문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제 머리속엔 아예 없었더랬습니다. 마치... 작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읽고 썼었던 저의 감상문과도 같이, 그저 나 스스로에게 전하는 이야기/반성문/위로... 그 무엇이 되었든, 이 글이 최소한 '타인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언 이 글을 읽는 타인들이 대체 이 글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하더라고 상관없다란 생각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써낸 저의/누군가의 감상문과 비슷한 누군가의/저의 감상문은 아.마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듯" 하다라고도 위에 써놓았듯, 이 책을 읽고난 후 쓰여질 '당신'의 감상문은 분명... 제가 쓴 이 글과는 또 다른 것들을 담고 있을꺼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후회'라는, 제 것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 않을까,란 사뭇 용감하기까지한(?) 짐작이 덧붙여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만 그런 건 아닐꺼야'란 위로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한 번 물어보고는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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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당신의 지난날들에 관한 <기억의 몽타주>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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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 본 저자의 다른 책들 :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