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저의 국어 실력을 저 스스로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 '까칠하다'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원래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맞죠?) 요즘 네이버 상에선 이 '까칠'이라는 단어가 '꼼꼼하다/철저하다/정직하다/실력있다' 등, 무지하게 많은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듯 사용되고 있더군요. 특히나! (지극히 제 개인적 시선입니다만) 어줍지않은 음식 사진 찍는 블로그들에선, 모든 판단 기준의 최상위에 존재하는 절대적 위상의 단어로 전용되고 있지요. 


'여기가 요새 유명한 곳이래!'라는 곳엘 가면서 아예 처음부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음식인지 까칠한 내가 직접 먹어보겠어!' 라는 뉘앙스를 다분히 폴폴 풍겨내면서 쓰는 그런 글들은 예의 '까칠한 내가 (혹은 가족 중 누군가를 대신 내세워) 경험해 보니 별 거 아니야!' 로 끝맺음을, 아~주 가끔씩은 '까칠한 내가 먹어봐도 여긴 대박이야!'가 있기도 하고 뭐 그렇더군요. --- 정!!!말 유치한 짓이죠. 기존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을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그러하기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나의 권위를 세워/만들어나가는 일 방법으로 삼는다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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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여러 곳에서, 이 소설이 '매우 매우' 감동적이라는 문구를 많이 보았기에 정말 궁금했더랬습니다. 단! 저 스스로가 '감동적인 무엇'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또한 그런 '감동적인 무엇'으로부터 (다들 받는다는) 딱히 받아야하는 감동을 잘 느끼지 못한다라는 면이 없잖아 있기도 하기에 정말 여러 번, 이 소설을 들었다놨다 했더랬거늘, 2015년의 시작으로 뭔가 이런 잔잔한 감동 코드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이번엔 기어코! 이 책의 첫 장을 펼쳐 보았더랬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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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흔한 말이지만, 또한 제가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할 때면 정말로 진지하게, 그리고 무척이나 힘든 상태에서 하게 되는 것이 그 대부분인 그런 말이 하나 있지요. 


'편지로 고민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저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p38)'


이 소설의 전체 내용을 가능한 한 압축시켜 표현해보라면 아마 이 문장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달 토끼, 생선 가게 뮤지션, 폴 레논, 길 잃은 강아지' --- 자신의 현재 처지를 나미야 잡화점의 '누군가'에게 그저 털어놓고 싶었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지기는 하지만, 결국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자신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것 또한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그리고!!! 그 점은 또한 그들의 마음 속 고민을 모두 들어주었던 나미야 잡화점의 '누군가'도 알고 있다라는 거지요. 그저...


"내가 몇 년째 상담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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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결국 밝혀지지도 않는 무언가에 의해 서로 통하고 있다라는 설정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면 이 소설이 담고 있다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선의에 대한 믿음(p448)'이란 (옮긴이의) 표현이 너무 상투적일 정도로 뻔하다고 생각되어서 일까요? 전... 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느껴야 하는건지, 심지어 이게 재미있는 소설인건지조차 정말로 잘 모르겠더군요. (기존의 감상문을 써놓으신 분들을 향한 비난이나 비아냥은 결코! 아닙니다.) 워낙!!! 호평 가득한 이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해 '대체 여기에 어떤 감동이 있으며,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거에요?'이라 묻는 것이 혹여라도, 맨 처음에 언급했던 그런 '까칠'이란 단어의 오용에 해당되게 보이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을 심히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암튼/기어이 할 수 밖엔 없는, 한 마디 : 


감동이란 걸 느끼기엔 이 작품의 정서가 너무... 쌍팔년도스럽지 않나요?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들 :  용의자 X의 헌신」 · 편지」 · 마구(魔球)」 · 「변신」 ·도키오」 · 「레몬」 · 「방황하는 칼날」 · 「비밀」 · 「아내를 사랑한 여자

(읽어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발간순) :  「졸업」 - 「잠자는 숲」 - 「악의(惡意)」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내가 그를 죽였다

 


※ 이 책도 잘 안읽혔었고, 감상문 쓰는 것도 귀찮았으며 다음 읽을 책을 고르는 것마저 잘 안 되네요. 금연의 후유증인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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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雅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저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고 있는, 어쩌면! 저와 비슷한 나이의, 저와 비슷한 성장환경을 가졌던 누구에게라도 존재하고 있을듯한 '동네 바보'. ---- 이 작품은 당편이라는 이름의 한 시골 동네 바보의 일생을, 그 본인이 아닌 주변 인물의 회상과 기억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작가 이문열이 쓴 이 이야기는 그런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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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적이면서도 또한 비극적(p35)'이라 표현되고 있는 주인공 당편의 삶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경험했었던 산업화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변화되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랫만에 국민학교 동창회를 계기로 고향에 모여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왔던 누군가의 한 마디, '요새 당편이는 어예(어떻게) 됐노?(p10)'라는 말로 이야기는 시작되지요. 소주를 마시다, 입가심이라며 한 두 잔의 맥주를 마시다보면 예의... 그 둘을 섞게만 되는 것처럼, 작가는 이 길지 않은 이야기의 전체를 '우리가 느낀 것은 다만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때의 애잔함과 그리움 뿐이었다.(p16)'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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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문열의 소설인데!'로 시작하여 '이문열의 소설이니까!'라는 마무리되었던, 그러하기에 더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는 제 감정을 실어)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그게 이 작품의 전부입니다. 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작가가 그토록 강조하는 '기호(記號)'라는 단어의 의미마저도 오롯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망을 금할 수 없는 졸작으로 받아들여졌다라는 거지요.


산업화 ·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가면서 대한민국이라는,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양파껍질과도 같은 사회는 그 가장 바깥의 외피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내가기 시작합니다. 작가가 적고 있는 그 양파껍질은 다음처럼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원은 문둥이의 오두막과 거지의 움막집, 백정의 도살장 같은 것들을 잇는 선이 된다. 마을과 다소간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래도 어김없는 공동체의 일부였다. 말라 벗겨저 나갈 때까지는 양파의 맨 바깥껍질도 양파의 일부이듯이. 그 안쪽에는 흔히 미치광이로 불리는 심신상실자와 백치 그리고 생산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중증의 불구자들로 이루어진 원이 있다. …… 그 다음 원은 흔히 반편이로 불리우는 심신미약자나 박약자, 또는 정신이 온전한 신체장애자들이 만드는 원이다. …… 마지막 원은 바보로 대표되는 지려천박자(智慮淺薄者)들이나 무슨 <둥이> 무슨 <쟁이>하는 가벼운 편집증후군의 원이다. …… 그 다음은 몸과 마음이 모두 성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중심이다. …… 당편이는 그 세번째 동심원에서 우리 고향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p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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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한 공동체에 편입된다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을 확보하는 데서 비롯되고 그 성원들로부터 특정의 기호(記號)로 인지되는데서 완성된다.(p32)"


작가는 당편이의 삶이 시작되었던 시절만해도, 그곳 시골의 고향에는 그녀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나름 '특정의 기호', 그러니까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인지될 수 있는 그나마의 여지가 있었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고난 후부터는 '소속 없이 틈새를 메우는 기능만으로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었던 공동체(p105)'가 해체되었고, 그로 인해 당편이의 삶 또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독립된 기능들(p108)'을 요구받기 시작했었으며 결국엔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벌거숭이로 고향 거리에 내몬 셈(p108)'이 되었다라 적고 있지요.


이러한 작가의 이해에 동의하느냐의 여부가 이 작품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물론!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다만, 또한 그것과 이 작품에의 만족도와는 별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 당장 저만해도 이 작품에 지극한 불만을 가지게 된 이유가 이러한 이해에의 부동의 때문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임에도 이 작품에 대해 책값도 아깝고, 이 책을 읽느라 보낸 시간마저도 아깝다라 느끼게 해준 것이었을까요?


인간은 관례에 따라서 행동하기 위하여 안전을 구하려 하고, 그 안전을 그의 생활환경의 현상유지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는 합리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감상적인 애착 또는 현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가치감정에 동기가 있고, 그 감정은 습관에 의하여 형성되며 공포심에 의하여 자극되는 것이다. 이 습관과 공포심은 보수주의의 두 가지 심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생활환경이 그를 만족시키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심리적 태도로서의 소수주의는 인간의 생활환경에 대한 조정(調)과 적응()의 과정에서 생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특정적인 교육이나 연령의 영향에 따라서 강화된다. 특히 노령()이 육체의 쇠약에 따라 비융통성·환멸감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초래하여 보수주의적 태도를 강화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보수주의' 중​ 

1948년생인 작가가 자신의 나이 53세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누군가의 성향이 그의 성장환경과 관계가 있을 수 밖엔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만, 또한 그러한 면이 작가 이문열의 작품들 속에 흠뻑 녹아있다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이 작가를 좋아하기도 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작가 이문열의 '극단적 보수주의'의 한 원인을 --- 어쩔 수 없이 그의 연령에서 찾을 수 밖엔 없었습니다. 작가가 적고 있는 대로,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때의 애잔함과 그리움'이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애잔함과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다면 그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생각합니다. 비록 그 내용이 처절했었고, 심지어 비참하기도 했었으며, 현재의 잣대로는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해도 말이죠. 허나!!!


제가 이 소설을 읽어가며 받았던 뉘앙스는 --- 작가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단순한 '애잔함과 그리움'의 수준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라는 것이었더랬습니다. 즉! 'status quo를 원한다'라는 아주 좁은 의미로서의 '보수'이건, 혹은 '공포심에 의해 자극되어진' 그리하여 보다 적극적인 '反진보'의 양태를 띠게된 '보수'이건, 그 모두를 포괄하는, 그저 이 시대에는 좋게 보아질 수 없는 모습들만을 모아놓은 듯한 '보수'인양 싶은 작가의 성향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여졌다라는 거지요.


발전, 진화, 혹은 진보 ---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지금의 시대엔 발전이건 진화건 혹은 진보이건 무조건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must have item이 되어있다라는 우석훈 박사의 한탄에 동의할 수 있다라면, '진화'는 그저 '다양성의 증가'를 의미할 뿐, '진보'처럼 방향성을 가진 개념은 아니다라는 스티븐 굴드 박사의 말에도 또한 동의할 수 있는 독자라면!!! ---- '다양성의 증가'라는 단순한 현상을 우리 사회는 특정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진보'라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라는, 그리하여 (그 비난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진화'는 must have item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는 지금 더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라는 비난의 화살을 엉뚱하게도 '진보'를 향해 쏘고 있다라는 비판을 이 작품 「아가」의 작가로서의 이문열에게 퍼부을 수 밖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해!!! 그는 '다양성의 증가'로 인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그저 이제는 쉬이 찾아보아지지 않을 뿐인 당신의 추억 속 옛 장면들이 아예 사라졌다라 개탄하고 있으며, 행여 그것들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단죄의 영역이 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결과의 책임을 '사회의 진보'에게로 돌릴 수는 없다라는 것마저도, 최소한 이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혹여나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싶을 정도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요. 대한민국 보수의 씁쓸한/어리석은 일면들만을 한데 모아,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저 어릴적에도, 제 또래보다 두어 살 많아보였던 그 동네바보를, 친구들과 함께 참 많이도 놀려대고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이가 되어, 그때의 제 행동들을 '잘못된 것'이라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그건 그때의 일들이었으니까요. 또한 하지만!!! 그것들을 변명하려는 생각도 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말이죠...


작가는 정상인의 지능과 신체적 기능을 가지지 못한 당편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음과 같이, 우열의 관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우열의 판단근거가 된다라는 것 자체를 제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군가의 지능과 신체가 정상인의 그것들보다 모자라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누군가들 - 지능과 신체가 정상적인 사람들 - 에게 특정의 효용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라 생각하고 있거늘, 작품 속 화자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요.


한줌도 안 되지만 정채(精彩)와 영화(榮華)를 타고난 존재들, 우리보다 잘나고 날래고 똑똑하여 운명의 편애를 받는 이들은 또한 얼마나 자주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하고 속절없는 열패감(劣敗感)이나 천박한 시기로 스스로를 쥐어뜯게 하는가. 그런 그들에 비해 우리보다 못나고 더디고 모자라는 이들은 존재 그 자체가 큰 위로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안도 속에 자신의 삶의 돌아볼 수 있고 성실과 경건의 결의까지도 다질 수 있게 된다. 유식한 말로 하위모방(下位模倣)이나 아이러니 양식이란 것의 효용도 이에 다름없을 것인데 당편이는 옛 고향 사람들에게 바로 그 살아 움직이는 효용이 아니었는지. (p115)

나를 중심으로 나보다 상위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을, 나보다 하위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로부터 받는 위로로 보상한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 도식은 --- 그 열등감의 크기가 커질수록, 내가 받아야하는 위로의 크기도 또한 커져야만 한다라는 이기를 낳게 되고, 그것은 결국 가학을 통한 자기위안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에까지 이르르게 되지요. 당편이보다 한참 어린 화자와 그 또래들이 '당편이의 전설에 한 주역으로 개입(p192)'했던 장면들은 오로지 당편을 성적인 희롱의 대상으로만 그려내고 있을 뿐입니다.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역겹기까지도 하지요.  그런데!!! 그 장면들을 마무리하고 있는 화자의 변명이 더욱 가관입니다. 작가와 작품을, 그리하여 작품 속 인물들의 생각과 언행들을 작가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라면, 이러한 변명을 만들어내었고 또 작품 속에 담아낸 작가에 대해 가지게 되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그런 한낱 궤변일 뿐인, 오로지 자기위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타인이 받아야했던 고통을 보기좋게 포장하고 있는 다음의 말은, 이것와 과연 내가 아는 작가 이문열이 쓴 작품 속에 나오는 것인가하는 믿기 힘든 의심을 갖게 해주더군요.


우리가 성적인 측면에 집착한 것은 그녀의 불행을 즐기는 잔혹 취미가 아니라 불완전한 그녀의 성적(性的)기호를 보완해 주는 의미가 있었다고. 우리는 진심으로 그녀의 여성성을 승인했으며, 방법은 달랐지만 틀림없이 그녀를 한 여성으로 사랑한 것이라고.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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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의 연가」를 읽고 쓴 감상문에서 전, 그 작품의 유효기간은 이미 지났다할지다로, 작가의 유효기간은 여전히 남아있다 믿고 싶다라 썼었습니다만... 이 작품 「아가」를 읽고나니, (이 작품에 등장하는 표현인) '어떤 사람의 의식을 일생 지배한다는(p103)' 이데올로기를 등장시키지 않는 그의 작품에 한하여! 작가로서의 그의 유효기간에 대해 난생 처음으로 막걸리 통을 빙빙 돌려가며 그 제조일자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심을 품어보게만 되었습니다.


이미... '작가'로서의 이문열에 관한 소식을 들은지 오래된 지금, 마지막으로 접했던 그의 소식이란 것 또한 독자들 스스로 과거의 이문열과 현재의 이문열을 단절시켜버리겠다는 점. --- 이 소설 속 화자가, 그리하여 작가가 말하고 있는 말은, 비록 이것이 당편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문득!!! 작가로서의 이문열에게도 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지극한 아쉬움을 느끼게만 됩니다.


아직!!! 사놓고 읽지 않은, 다시 읽어보려 사놓은 그의 책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마냥 웃을 수만도 없듯이, 특정 작가의 모든 작품들이 반드시!!! 깊고 생명력 긴 잔향을 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수많은 향기를 자아내다보면 가끔은... 향기가 아닌 악취를 만들어낼 때도 있는 거라고, 이 작품 「아가」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노라고, 그냥 그렇게 애써 믿어보려 합니다. 이 한 작품으로 작가 이문열에 대한, 그간 쌓여온 저의 애정이 순식간에 식어질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저 아쉬웠노라고, 근데... 참 많이도 아쉽기는 하네요. --;;

  

누군가 말했듯,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다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거기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 누구 또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존재를 존재답게 해주는 소속과 관계는 소통에 바탕한다. 타자(他者)와의 소통이 없이는 소속도 관계도 없다. 그런데 그 소통은 대개 기호(記號)와 인지(認知)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기호는 존재의 발신(發信)이며 인지는 타자의 수신(受信)이다.

……

한번 형성된 기호는 스스로 파괴되거나 지워지는 법은 없다. 타자의 수신 거부나 인출불능(引出不能)만이 그 기호를 파괴하고 지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관심 혹은 둔감이라 부르는 주의 소홀은 바로 그 수신 거부의 효과를 가지고, 보다 뒤에 수신된 강력한 신호들의 간섭은 기억의 쇠잔이나 불용(不用)과 마찬가지로 그 인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향 사람들에게 당편이라는 기호의 특징은 문제적(問題的)인 데 있었다. 그런데 그녀 생애의 절정과도 같은 그 단옷날 하루가 그런 특징을 지워버렸다. 장터거리 사람들이 이제 당편이도 성하고 똑똑한 자기들과 다름없는 삶으로 편입되었다고 안도하는 순간, 무관심과 둔감이 그들을 덮쳐 당편이란 기호는 수명을 다했다. 거기다가 현대성이란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여러 강력한 신호들이 사람들을 간섭해 이미 저장된 기억도 인출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마지막 몇 년 동안 당편이는 분명 장터거리 한모퉁이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수신되지 않아 무의미해진 기호였다. 그녀가 살아 있었던 것은 오직 한 사람 영감에게뿐이었다. (pp294-296)


※ 감상문을 써놓은 작가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 :황제를 위하여」 · 「젊은날의 초상」 · 「시인(詩人)」 · 「레테의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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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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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다 읽고, 과연 감상문을 어떻게 써내야 할 것인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을 때, '줄거리'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아예 할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변명을 앞세워 보자면 그건 '아~무 의미없는 글'이 될 것이기에라는 이유 때문이었었노라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도저히 정리해낼 수 없는 줄거리를 가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진심으로는!!! --- 제가 변명이라 말한, 이 소설을 줄거리로 이해하려는 건 결코 이 재미난 작품을 즐기는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시대순으로 배열되어질 수 있는 세 명의 여자 - 노파, 금복, 춘희 - 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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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읽고나서 뿅~ 갈수 밖에 없는 개인적 이유가 있습니다. --- 저의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란 게, C를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A와 B를 이야기해야겠다,라 하고선... 결국 A' , A" …… 심지어는 B'과 B" 등등으로 새는 탓에 정작 C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어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었었지요. 바로!!! 이 소설이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겁니다. 저와의 차이라면 C를 먼저 말해놓고, 그 난데 없는 C를 이해시키기 위해 A부터 B"까지를, 그야말로 어색함 없이, 게다가 너무도 재미있게, 그리고 빠짐없이 이어주고 있다라는 거.


이 재미난, 한 편의 통 큰 구라와도 같은 이야기를 흡사 학술논문 검토하듯 이 작품을 읽어내(려)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그런 독자를 위해 작가는 작품 속에... 미리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놓고 있습니다.


일단 컨베이어벨트에 올려진 귓속말은 곧 자동공정을 통해 매우 그럴듯하고 선정적인 이야기로 부풀려저 온 동리를 거쳐 인근마을에까지 퍼져나갔다. (p28) ……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117)

​작가가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려놓은, 독자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서 바라보게/면 되는 자동공정 속의 전개 중간중간에, 작가는 총 51개의 '법칙'들을 펼쳐놓고 있습니다. - 제가 세어본 것이 맞다면, '그것은 OO의 법칙이었다'라는 표현은 총 58번 등장합니다. 그 중, '사랑'이 다섯 번, '중력'이 두 번, '이념'이 세 번 반복되니까 갯수만 따져보면 총 51개의 법칙이 되겠죠. 이 51개의 법칙들 중에는 세상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등장인물만의 주관적인 것들도 몇몇 있습니다만, 그 주관적인 것들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독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줍니다. 헌데!!!


●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감춘 채 아무나 붙잡고 상대방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둘 중의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었다. 그것은 이념의 법칙이었다. (p129)


●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바빠 허둥거렸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이유 없이 속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는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p220)

이처럼 수많은 '법칙'들로 가득한 이 작품의 이야기가... 그야말로 중구난방으로 뻗어갑니다. 아니! 법칙이라는 건 자고로 시공을 초월해 통용되는 것일진데, 그러한 법칙들로 가득한 소설의 이야기가 어찌하여 중구난방일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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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천명관은 '(나는) 소설 자체를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 …… (나는) 소설을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 …… 일종의 비이클(vehicle) 같은 거죠(p438)'라 말하고 있더군요. 그러면서도 작가는 역설적으로 '그 말은 다시 그 비이클 안에 무언가를 실어나를 것이 있다는 얘기가 되고, 그게 전제가 되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 자신은 아직 거기에 무엇을 실어날라야 할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난경(p438)'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대답은 '소설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매우 일반론적 질문에 대한 것이었고, 어쨌든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소설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상황에서 저같은 일개 독자가 '이 수레에는 이것이 실려 있다니까요!'라 말하는 게 심히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제가 무지하게 좋아하는 표현인지라 저도 또한 사용해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작품에 실려있는 것을 한 개의 단어로 표현해보라 한다면 전... '결핍'이 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 사람의 삶이라 말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통해 모은 엄청난 돈의 소유자였던 그녀, 국밥집 노파. --- '세상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p38)' 돈을 모은다 말했던 그녀는, 하지만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 돈의 목적인 복수의 대상이 누구/무엇이었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 많은 돈을 제대로 써보도 못하고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었습니다. 향하는 목적을 알 수 없기에, 그 노파가 과연 그 돈을 어떠한 방법으로 사용해 '세상에 복수를 하'려 했었는지 또한 아무도 알지 못하지요.


● 이 작품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 금복 --- 행운,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타고난 동물적 감각으로 인해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그녀. '크고 넓은 것에 무턱으로 매료되는 습관(p48) 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바다 속에서 물위로 뛰어오르는 대왕고래를 본 순간이었었지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녀의 그 지칠줄 모르는 생명력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난데없는 바램을 이해하는 데에는 이런 그녀의 습관과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라 작가는 친절히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소녀를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p271)

● 이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그녀, 춘희 --- 그녀에게 '결핍'이란 어쩌면 그녀 자체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로 태어났다라는 조건 자체가 그녀의 삶 전체를 결핍된 무엇으로 만들어주었었지요. 그녀에게 결핍되어 있지 않은 건 단 하나! 바로 살/몸무게 뿐이었습니다. (아! 타고난 힘도 있다 할까요?) 그런 그녀가 가장 원했었던 건, 즉 그녀에게 있는 수많은 결핍들 중 그녀가 가장 채워놓고 싶었던 것 단 한 가지는 다름아닌 엄마 금복의 사랑이었었지요. 하지만 끝내... 그녀, 춘희는 그 결핍을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을 뛰어넘어 제가 이 작품의 핵심을 '결핍'이라 생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다음의 부분이었습니다. 


끝없이 상실해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한 셈이었다. 유년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첫사랑을 상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젊음을 상실해버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빈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싱그러운 수련의 육체 앞에서 뼈저리게 확인해야 했다.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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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집어치고라도, 그 무엇보다!!!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읽어가는 것마저도 재미나지요. pp241-243에 걸친 '공수논쟁'이나 p260의, 금복이 창부 수련의 몸값을 계산하는 장면, 그리고 바로 다음 페이지에 등장하는 '맹견주의' 등, 정말 이 소설은 곳곳에서 작가의 감탄스러운 '구라 파워'를 지루할 틈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냥... '읽는 재미'만을 위해 이 작품을 선택한다해도 전혀 후회 없을만큼 말이죠.


헌데, 책의 두께에 비해, 제가 읽어가며 옮겨 적어놓은 부분은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적었더랬습니다. 그 대부분이 '그것은 OO의 법칙이었다'였을 정도로 말이죠.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적어놓은 것 별로 없이 이 작품을 읽어낸 것이 혹여 후회스럽지나 않았을까요?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p406) …… 이쯤 해두자.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p415)

………………………………………………………… 


제가 '그것은 OO의 법칙이었다'란 문장을 적어가기 시작한 게 p23의 '세상의 법칙'에서부터였더랬습니다. 혹시 그 전에도 같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싶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작품의 처음부터 p23까지 다시 읽어보았었지요. 저의 목적이었던 '그것은 OO의 법칙이었다'란 표현은 딱 하나 놓친 게 있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소설의 처음부터 p21까지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었던 그 때엔 뭔 소린가 했던 이 부분이... 다름아닌, 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였었음을 알게되더군요. 뿐만 아니라, 그 느낌 자체가, 처음 읽었었던 때, 그러니까 이 소설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전혀 모른 채 읽었었던 때완 완전히!!! 다른 느낌을 안겨주는 겁니다. --- p21의 하단부터 시작되는, 이 기나긴 구라스런 이야기의 시작에 등장하는 표현, '하지만 어찌 알랴, 이 모든 이야기가 한 편의 복수극일 수도 있음을'을 읽는 순간, 춘희가 남긴 그림을 보고 어느 시인이 남겼다는 다음의 시가 정녕... 이 이야기는 '결핍'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려주더군요. 읽기엔 너무도 재미있었으나, 읽고나니 잔향처럼 남아있는 건 오히려 슬픔 뿐인 이 묘한 느낌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결핍'이었다라는 걸 말입니다.



그대, 돌아오세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수많은 날들이 흘러도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쌍의 족제비가 사랑을 나누듯

한 쌍의 잠자리가 사랑을 나누듯

우리 다시 만나

예전처럼 함께 사랑을 나누어요.

그대, 어서 돌아오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p417)  



박민규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래, 처음으로 '표현의 재미'를 느꼈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뭔가 아쉬운 감정이, 여타의 모든 감정들을 압도하는 시기인 12월의 끝자락에, 그것도 한 해의 마지막일 듯한 독서로... 이 작품 「고래」를 읽었던 걸, 행운!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로 말이죠. 단지... 이 행운으로 인해, 지금도 이미! 읽는 속도를 훨씬 뛰어넘고 있는 '책 사는 속도'에, 작가 천명관의 다른 작품들이 더한 가속를 붙여듯한, 설레임 어린 걱정이 문제일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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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신이 존재한다고 믿느냐'란 질문에, 전 진심으로 '그렇다'라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묻는, 그리고 가장 듣기 싫어하는 대답인 '(하지만) 신의 존재는 이성의 논리로 증명해보일 수는 없고, 그럴 수 있는 성질의 문제도 아니다'라는 말을 못내 덧붙여야 하긴 합니다만, 2014년 12월 현재!의 제 대답은 '그렇다'이지요. (물론! 태어나서 이제까지 계속 그러해왔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또한! 앞으로도 지금의 생각이 변치않고 유지될거라 확신할 수 없기도 합니다.)

제목만으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러니까 기독교적 신앙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하며 첫 장을 펼쳤었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제가 접했었던 몇 권의 책들 - 「사람의 아들」, 「예수복음」, 「침묵」 - 에서는 '신의 존재' 혹은 '신의 역할' 등에 대해 사뭇 부정적인 부분들만을 읽을 수 있었었기에, 그들에 대한 무언가 '명쾌한 대응 논리'쯤을 이 소설로부터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 저의 기대이기도 했었었지요. ​과연 이 작품은... 그러한 저의 기대를 어떻게 채워주었을까요?


……………………………………………


제 생각에, 이 작품은 스토리로 읽어내는 소설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그 스토리라는 게, 딱히 필연적인 연관성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으며, 그 전개 자체도 한국전쟁이라는 비참하고도 다급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한가롭기까지 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외의 것들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듯 보인다/보일 수도 있다.. 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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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을 통해 평양을 수복한 한국 정보당국은 평양에 있던 열네 명의 목사들이 북한의 비밀경찰에 의해 납치되었었고, 그 중 열두 명이 처형을 당했으며 나머지 두 명은 어떠한 이유에선지 모르겠으나 암튼 풀려나 현재 평양에 머물고 있다라는 첩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이에 평양 주재 정치정보국 책임자인 장 대령은 열두 명의 목사가 북한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라는 그 사실을, 생존한 두 명의 목사를 통해 알림으로써 북한군의 비열함에 대한 대내외적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려 하지요.


이건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아주 중대한 종교탄압의 경우로서 국제적 중요성, 특히 미국에서 큰 중요성을 가질 만한 사건이다. …… 달리 말하면 기독교 순교사에 들어갈 한국의 장(章)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 거고. (p18)

헌데, 생존자 중 한 명인 신 목사 - 다른 한 명인 한 목사는 미쳐버렸음 - 는 자신은 처형된 그들과 자기들은 따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진상을 전혀 알지 못하노라고, 또한 "자신과 한 목사가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건 …… 신의 개입이었다(p34)"라고만 말하며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평양의 교인들은 신 목사가 처형된 열두 명의 목사들, 그러니까 <순교자들>을 배반하고 살아남았노라 생각하고 격렬히 그들을 비난하지만, 장 대령과 그의 부하인 이 대위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뭔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다른 무언가를... 신 목사가 숨기고 있다라는 거지요. 이 대위는 거듭 신 목사의 증언을 듣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모두 살해당했죠. 목사님이 감옥으로 이송되기 직전에 말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 목사님의 신,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p37)

이 질문이 저에게 낯선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 그리고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에서 이미 접했던 적이 있는 질문이지요. --- 「침묵」에서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는 신의 대답을, 「예수복음」의 주제 사라마구는 "하나님은 몸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신다"라 말해주었더랬습니다. 사뭇... 세속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애매하기만 하죠. 그렇다면 작가 김은국은 이 작품을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무엇이라 내려주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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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일 수 밖에 없는 '진실', 즉 열두 명의 목사들이 진짜 <순교자>라 불리울만한 최후를 맞이했었느냐라는 의문에의 해답을 밝혀가는 과정을 통해 이 작품은 신의 존재, 그리고 그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네 명의 등장인물 - 신 목사, 장 대령, 이 대위, 박 대위 - 들이 결국엔 모두 다 알게 되는 이 '진실'에 대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이 모두 다 다릅니다.


(이 대위) 목사님께선 당신이 말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진실을 사람들이 추측하고 짐작해주길 속으로 바라고 계셨죠? (p102)

(신 목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소? (p103)

(장 대령) 모든 건 바로 이렇게 돼야 하는 거야. 죽은 자나 생존자나 모두 칭송받을 자격이 있어. 그들은 다 같이 훌륭하고 성자다워야 하는 거야. 알겠나? (p127)

(박 대위) 우리가 어쩌면 진실을 원치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 (신 목사는) 그 순교자들에 대한 진실이 너무도 추악한 것이어서 우리가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p127) …… 그 열두 명의 목사들이 모두가 순교자는 아니라는 비밀. (p129)

 

네! 교인들이 <순교자>들이라 믿고 있는 그 열두 명의 목사 모두가 다 <순교자>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러한 '진실'을 모두 알게 된 이후, 이 대위와 박 대위는 신 목사가 그 '진실'을 거짓없이 대중들에게 말해야 한다라 주장하지만, 신 목사는 끝내... '나의 새로운 신앙을 위해서(p181)'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배반자였노라는, 그 열두 명의 목사들 모두는 진정 <순교자>다운 최후를 맞이했었노라는 거짓고백을 교인들 앞에서 하지요. 


이 작품은 이처럼... (여기까지의) 줄거리만을 이야기한다면 '그래서 뭐 어쩌라구?'의 반응만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각 등장인물들, 특히! 장 대령의 말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자신의 진짜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앞에서도 적었듯이) 단지 일종의 설정 도구로서만으로 '소설'이라는 형식을, 따라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하는 '스토리'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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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보국 국장으로서의 장 대령에게는 사실,  순교의 진실이 무엇인가는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문제에 집착했었던 이유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 그의 동기는 진실 발견에 있지 않고 국가 이익의 보호와 선전 목적을 위해 거룩한 '순교자'들을 만들어 내는 데(p319)" 있었기 때문이었죠.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한다(p319)"라 생각하는 이 대위완 달리,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던) 장 대령은 "왜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pp152-153)"라 보고 있었던 겁니다.  

비밀임무를 위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장 대령은 후임자가 올 때까지 이 대위를 정치정보국장의 자리에 임명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장사에 관한한 중요한 건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이 국가라는 집단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일이야. …… 자네가 그 군복을 차려입고서 사람들에게 한다는 얘기가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는 곤란해. …… 사람들이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들에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나?(p174)

 

신 목사와 함께 살아돌아왔던, 하지만 미쳐버리고 말았던 한 목사는 마지막으로 '하나님... 없어... 하나님... 없어(p190)'란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습니다. 처형 된 열두 명의 목사들 중 지도자격이었었던 (박 대위의 아버지이기도 한) 박 목사 또한, 죽기 직전 기도나 하라고 시간을 준 북한군들 앞에서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에게 나는 기도하고 싶지 않아!(p214)"란 말을 했었었지요. 이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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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p255) ……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55) ……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p271)

……………………………………………


엔도 슈사큐의 「침묵」에서 페레이라 신부는 자신이 배교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야. ……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 내가 여기서 보내던 밤에는 다섯 사람이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었어. …… 관리는 이렇게 말했지. 당신이 배교하면 저 사람들을 곧 구덩이에서 꺼내 밧줄도 풀어 주고, 약도 주겠다고 말이야. 나는 대답했지. 저 사람들은 왜 배교하지 않느냐고. 관리는 웃으면서 가르쳐 주었어. 그들은 이미 몇 번이나 배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네가 배교하지 않는한 저 농민들을 구할 수 없다. …… 신부인 나는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사랑하라고 가르쳤어.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거야! 그리스도는 배교했을 것이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페레이라 신부는 눈 앞의 비참한 현실/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 하나 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 자신이 그 '무엇'인 배교를 했었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결정을,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내려왔던 그리스도마저도 선택했었을 것이라고도 했지요. (이는 어쩌면 "누군가 한 사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죽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믿는 신의 아들이었고요.(p193)"이라는 이 작품 속 이 대위의 말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 한편, 서울로의 철수를 앞두고,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함께 서울로 가자 청합니다. 하지만 신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자신은 가지 않겠노라 대답하지요.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그래 줄 사람이 없다면 나만이라도 남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있고 나도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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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기독교 신자들이 대답하여야 할 질문이 더 이상 '신이 존재한다고 믿느냐'란 단순한 질문이 아닌 --- 신의 존재를 믿는 이유가 진짜로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냐, 아니면 존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냐, 혹은 신이 존재한다라 믿고 싶기 때문이냐가 되어야 한다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만 됩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신 목사를 통해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 바로 위 신 목사의 말이 아닐까도 싶구요.

'사람들이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라는 장 대령의 말이야말로 --- '나도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라 말하는 신 목사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는 교인들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적나라하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신은 없다!'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란 거지요.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p255)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신이 존재한다고 믿느냐'란 질문에 대한 '그렇다'라는 저의 대답. --- 이제 그 대답이 '존재한다'라는 것에의 대답이었는지, 아니면 '(그렇다라고) 믿느냐'에의 대답이었던건지를 또 다시 대답하여야한다라는 것이... 기독교 신자로서의 저에게 이 작품이 안겨준, 한동안 한없이 커다란 부담으로 남아 있게 될 듯 합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는 꽤나 멋있는, 뭔가 쫌 광범위하면서도 깊이 있는 감상문을 써낼 수 있을 꺼라 생각했더랬거늘, 예의 음주와 함께한 글쓰기는 그렇기는 커녕 뒤로 갈수록 흐지부지해지기만 했네요.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올리는 포스트의 핵심이 하필이면 '신은 없다!'라니... --;;)

 

 

※ 꼭! 함께 읽어야 한다라 생각되는 책들

- 엔도 슈사쿠 作, 「침묵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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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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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한강 作, 「소년이 온다」 (p134)

 

(와 똑같은) 질문을 아예 제목으로 삼고 있는,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 ---  1945년 12월부터 1947년 1월까지, 거의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투옥되었었던 저자 프리모 레비의 기록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유대인 절멸정책을 추진했었던 독일 나치즘하에서의 수용소 생활을 겪었었으며, 독일의 패전으로 인해 기적적으로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지요. 그런, 미루어 짐작컨데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보내었음이 확실한, 그리하여 그의 마음 속에 그 누구도 어림해낼 수 없을만큼 커다란 분노와 증오가 자리잡고 있을 꺼라 생각되는 그는 하지만 놀랍게도!!! 수기 형식의 이 책에서 철저하게 '심판관보다는 증언자(p285)'로서의 역할에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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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을 펼치며 과연, 「소년이 온다」 속 질문들의 해답이 이 안에 담겨져 있을까, 최소한 그 실마리라도 있지나 않을까... 라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었지요. 

 

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

② 우리는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며, 실제로는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된 인간의 본질인가?

 

사실 위의 두 질문은, 서로 반대편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들을 향하고 있는, 그러니까 서로 방향이 다른 질문입니다. --- ①번의 질문은 '가해자로서의 인간'을 보며 하는 것이며, ②번의 질문은 '피해자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지고 있는 질문이니까요. 과연 이 책은 저에게 해답을, 혹은 그 실마리를 안겨주었을까요? 아니! 이 두 개의 질문들에 해답이란 것이 있을 수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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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우리는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며, 실제로는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된 인간의 본질인가?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 오늘은 명절과 다름없는 날이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기억해 보면, ②번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만약 '그렇다/아니다' 둘 중에서만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그렇다'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에, '인간'과 '개인'의 차원을 너무 단순하게 무너뜨린 결과라는 힐난이 주어진다라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선택을 바꾸지는 않겠으나, '아니다'라 말할 수 있는 약간의 여지를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찾을 수 있었다라고는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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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것이 '인간의 본질'인가의 여부를 따져보기에 앞서, 한 개인이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결국엔 살해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그저 두려움의 차원이 아닌 가까운 미래에 실현 되어질 수 있는 현실로 인식하게 될 때, 과연 그 개인의 속마음은 어떠할까를, 실제! 그러한 상황을 겪었었던 프리모 레비의 기록을 통해 느껴보기로 할까요?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야만 했다. …… 이제, 사랑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pp34-35) ……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p38) …… "언제부터 수용소에 있었니?" "3년" 어린아이 때 들어온 게 틀림없어. 이런 생각을 하자 오싹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여기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p41)

 

​● 프리모 레비는 곧이어 수용소 시절의 자신을 '그저 지친 짐승에 불과할 뿐(p62)'이었다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 그 명단에 올라가면 수용소를 떠나게 되고,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뜻을 가진, 곧! '죽게 된다'를 의미하는 '선발된다'라는, 수용소에서만의 은어가 있었습니다. 치글러라는 사람이 어느 날 '선발'되었었지요. 독일군은 그렇게 누군가가 '선발'되고 그들이 수용소를 떠나기까지의 며칠간엔 보통 때보다 2-3배 많은 죽을 배급해 주었다 합니다. 그들 나름의 자비였었던거죠. 자신이 '선발'되었음을 알게 된 치글러는, 즉! 자신의 생이 이제 며칠밖에는 남지 않다라는 걸 알게 된/알고 있는 치글러는 자신에게 배급된 죽의 양이 보통 때와 똑같자, '자신은 선발되었다고, 그러니 평소의 두 배가 되는 양의 죽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 주장합니다. 그리곤...

 

"배급이 정확히 주어지자 치글러는 죽을 먹으러 조용히 침대로 간다."(p198)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이것이 인간이다!'라 대답해주고 있는, 사뭇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며칠 후의 죽음보단 당장의 배고픔이 훨씬, 어느덧 '지친 짐승에 불과할 뿐'인 존재가 되어버린 치글러에게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무엇이었던 거지요. 

● 저녁 식사 시간 이후부터 다음 날 아침이 올 때까지, 혹 소변이 마려워지면 수용소 막사 앞에 있는 소변통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다보니 자정이 넘기 전에 벌써 그 통이 다 차버리곤 하지요. 소변통의 용량이 다 차게되면, 그 마지막에 소변을 본 사람이 소변통을 비워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습니다. '수용소의 고참들은 감각이 상당히 예리해져서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통의 바닥에 울리는 오줌 소리만으로 오줌의 높이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는지 아닌지를 기적처럼 구별해(p91)'냈었었기에, 그 일은 거의 항상 수용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들의 몫이었지요. 물론! 신참이었던 프리모 레비도 어느 날, 소변통을 옮겨야 했는데...

 

통은 적정 용량을 넘어 아슬아슬할 정도로 꽉 차 있으므로, 흔들릴 때마다 뭔가가 우리의 발 위로 흘러내리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일이 혐오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침대의 동료가 아니라 우리가 이 일은 명령받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p92)

 

이 와중에도 그가 '다행'이란 단어를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건 --- 좁디 좁은 침대에서 두 사람이 서로 거꾸로, 그러니까 나의 발이 동료의 얼굴 쪽으로, 동료의 발은 나의 얼굴쪽으로 향해 놓고 잠을 자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얼굴을 향해 발을 놓아야 하는 동료의 발에 소변이 흘러내리는 것보다는, 그래서 내가 그 악취를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하는 것보다는 --- 비록 그것이 동료의 얼굴을 향하게 된다라는 걸 알지만 차라리!!! 나의 발에 소변이 흘러내리는 것이 낫다라는 거지요.

이 부분에서 - 우리가 보통 '베품'이라는 형태로 표현해내는 인간의 본성인 자비라는 건 결국... '나의 소유/나의 안전/나의 행복'등이 이미! 확보된, 최소한 확보될 수는 있다라는 확신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 우리는 정녕... '우리는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 '아니요'라 답할 수 있는/해도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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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 사회적 지위 · 출신 · 언어 ·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p132) ……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p134) …… (못 가진 사람, 능력 없는 사람들 등)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p136)

저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범죄자도 정신병자도 없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도덕률이 없기 때문에 범죄자가 없으며, 우리가 하는 행동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뿐,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자도 없다(p148)'라는 거지요. 이 상황은 딱!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속 상황과 똑같습니다. 아무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 전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차마 할 수 없었던 행동들을 거리낌없이 하게 되는,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단 하나의 제약조건만 없어진 것일 뿐인 그 상황에서 말 그대로 지옥을 만들어냈었었지요. 그 작품에서 '의사의 아내'는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라는 말로 점점 짐승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설득했었었지만...

 

세면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그저 흙탕물 뿐이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그런 물로는 차라리 씻지 않는 것이 오히려! 청결과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 반대로, 씻는다는 행위가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다는 증거로서, 무척 중요하고 도덕이 살아 있게 하는 수단으로써 꼭 필요(p56)'한 것이 아닐까하는 갈등도 가지고 있었었거늘 결국 그의 선택은 :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유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pp56-57)

 

또 다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여 --- '한 인간'이 '지친 짐승'이 되어버린 결과로, '이전엔 당연한 일'이었던 것마저도 이제는 '어리석고 무례한, 기계적인 습관'이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게되는 겁니다. 게다가 이 처참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상당한 설득력마저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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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했던 '의사의 아내'는 아우슈비츠에도 존재했었습니다. --- 동료 죄수였었던 슈타인라우프의 다음 말은, 비록 그들이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p45)'을 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육체를 씻는 일이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될지라도 그럼에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에 어려 있는 조롱, 자조, 또는 절망 등을 (거의) 완전히 불식시켜버리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고 있지요. 지옥같은 모습의 불행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살아내야만 하는 나름의 생존 이유를 대 어쨌든 살아남자!라는,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p307)' 결의를 다져주었고 끝내는 이들을 지켜낼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그런... '이것이 인간이다'가 아닌, '그래서 인간이다'라고나 할까요?


수용소는 우리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의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pp57-58) 

 


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는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되었던 이 제노사이드의 원인을 히틀러라는 한 개인에게로만 돌려 설명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라는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시작되었던 '반유대주의'는 그 안에 '거부'라는 본질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불관용'의 일 현상이었지만, 그가 경험했었던, 수용소의 일상생활에서 현실화되어 나타났었던 유대인에 대한 나치즘의 증오와 경멸에는 역설적으로 그러했기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는 게 아예 존재하질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증오와 경멸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에 있(p302)'었다라는 겁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 안에서 '최초의 구타'를 당했던 프리모 레비는 구타로부터의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오히려 '경이로움'을 느꼈다라 적고 있습니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도고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p17)

 

영화 <스카우트>에서 보았던,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 읽었었던 그 상황들 --- 그 당사자들의 심정까지야 헤아려낼 수 없는 관객과 독자인 저로서는 어쩌면! 바로 위의, 어이 없는 의문이, 그 의문이 결국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의, 자문자답스러운 대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 전혀 작동되지 않는, 바로 그런 상태에서조차 상대를 증오할 수 있고, 실제 진심으로 증오하며, 그 증오의 강렬한 표현으로 가능한 최고 수준의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일이 발생될 수도, 실제 발생되기도 한다라는 걸, 최소한 관객과 독자로서 목격했었기 때문에 말이죠.     

 

내가 직접 겪고 있는 지금의 현실, 그 현실이 지금 나에게 안겨 주고 있는 고통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었을 때보다 훨씬 강하며, 이 과거의 고통마저도, 이것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 혹은 그저 바라만보는 행위가 생성해내는 심정적 동화로서의 고통보다는 또한 훨씬 더 직접적이며 분명 강할 겁니다. 그럼에도 이는 다시! 제 3자의 입장에 서있는 내가 누군가의 과거 고통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을 (그저) 읽는 것으로부터의 심정적 동화보다는 다시 훨씬 더 큰 것이기도 하지요. --- 그러하기에, 이 책을 '단지 읽었다'라는 것만으로, 이 책의 저자가 직접 겪었었던, 허나 마치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적어낸 이 기록물을 '단지 읽는다'라는 행위로부터는 그 온전한 크기의 심정적 동화를 제가 얻을/받을 수는 없었더랬습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 책을 읽는 시간이란 게 -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물세례를, 그 끝에서는 엄청난 세기의 폭포같은 물줄기를 맞게 되는 일종의, 놀이공원 속 동굴탐험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제가 이해한 바로선 --- 저자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잔인한 어떠함'을 행하기 위해 인간 모두가 반드시 잔인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대신!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은 반드시 잔인해야하는데, 역사적으로 그들은 실제로 잔인했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의 총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트레블랑카 수용소의 소장들이 그러했었으며, 그로부터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도, 그리고... 35년이 흐른 '그해, 그때, 그곳'에 있었던 '특별하게 잔인했던 군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하게 소극적인 군인들' 또한! 그 잔인함의 증인들일 겁니다.

 

백보 양보해 그저, 단지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하여 잔인해졌을 뿐'이라는 그들의 항변을 들어는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심지어!!! 행여 그런 '기술자'들이 그 '잔인함'이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여도,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건 절대 아니라고 저자는 자신의 다른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가벼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훨씬 더 무거워졌노라 말이죠.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 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파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 프리모 레비 著, 「살아남은 자의 아픔」 중

 

헌데 말입니다... 위에 인용한 검사의 말과 한나 아렌트의 말이 오로지 그러한 '기술자'들만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말은, 우리를 지배했었던 일본국, 일본국의 국민들에게도,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 그리고 그들의 자손인 저와 당신들마저도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라는 걸 프리모 레비는 이내 깨닫게 해줍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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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적어놓은 작가 소개의 표현을 따르자면) 저자 프리모 레비는 1987년 '돌연한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해 버립니다. --- 누군가의 자살을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었던, 심지어 예고되기까지 했었던 이벤트'라 말할 수는 결코 없겠습니다... 만!!!

 

누군가는 피할 수 없는 무언가를 피하고 싶어 그러한 선택을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했었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왠지... 프리모 레비에게 '자살'이란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건 아니었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하게만 됩니다. ​왜? --- 어쨌든... 그에게 더 이상의 비는 내리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비가 오면 우리는 울고 싶어진다. 11월이다. ……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이 날 것이다.(pp200-201) 

 

 

※ 이 부분을 읽기 위해 앞의 페이지들을 넘겼었노라,라 말해도 될 정도로... 부록으로 실려 있는 <독자들에게 답한다>라는 부분은 읽어볼 만, 아니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라까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반드시!라 말하고 싶을 만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주제 사라마구 作, 「눈먼 자들의 도시

- 한강 作,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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